1996년 봄 목사님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충북의 한 교회 수련원에서 위빠사나 3박 4일 집중 수행을 이끌어달라는 것이었다. 기쁨 반 설렘 반으로 수용하고 참여하게 되었다. 그중 원로 목사님 한 분께서 ‘지금 교회도 금식기도나 방언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영적 상태가 있어 명상을 개발해야 한다’는 취지로 필자를 초청했다고 했다. 또 어떤 분은 청소년 수련대회를 할 때 학생들이 음식물을 남겨서 버리면 쓰레기통에서 꺼내 씻어서 먹었더니 그다음부터는 학생들이 음식물을 남기지 않더라며 이는 불교에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어떤 목사님은 하느님을 창조자로 보지 않고 우주 법칙으로 보는 분도 계셨다. 향후 그런 성직자들이 더 많아질 거라는 강조의 말씀도 했다.

강의 중 나는 당나라의 선승 임제의현 화상의 어록을 인용해 이렇게 말해주었다. “《임제록》에 보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수처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인 우리의 삶터에서, 작주란 삶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지금 여기서 참 주인이 되고 우리가 서 있는 곳 모두가 참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임제 선사의 유명한 선언인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蓬祖殺祖 蓬佛殺佛)’를 인용했다. 그랬더니 《벽암록》을 비롯한 선불교 관련 책을 읽고 참선 공부를 했다는 한 목사님이 이렇게 받았다. “그러니까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이고, 하느님을 만나면 하느님을 죽이라 이 말씀이지요.” 그 말에 좌중은 한바탕 웃었다. 물론 이때 부처, 스승, 예수, 하느님은 절대화된 관념으로 보지 말고 실제 참모습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들은 그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지금 여기서 깨어 있음(반응 없이 알아차림/무집착적 앎)이 가난한 마음이고 탐진치를 벗어나는 반야지혜와 자애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지금 여기서 계발 실현해 나갈 때 과정과 목적이 하나가 되고 순간에서 영원한 행복을 맛보기 시작하는 깨어 있는 삶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가 추구하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목사님들은 크게 동의해주었다. 그때 인연 맺은 한 목사님은 불교 수행을 받아들여 힐링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펼치고 있다. ‘알아차림’ ‘참나를 찾아’ 등이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다.

이제 이런 일은 일상이 되었다. 3개월 전 미국에서 언론 계통의 일을 하는 재미교포를 만났는데, 그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는 부디스트 크리스찬, 부디스트 가톨릭 인구가 늘어난다고 한다. 불교를 공부해 보니 실용적이고 심오해서 좋은데 막상 기독교도 버릴 수 없어 그 장점을 융합해서 좋은 점들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흐름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심리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난다. 수용전념치료(ACT), 마음챙김에 근거한 MBSR(스트레스감소), 인지치료(MBCT) 등 모든 심리 상담이나 심리치유에 마음챙김, 알아차림이 적용 확산되고 있다. 예를 들면 바둑판에서 바둑알인 흰 돌이나 검은 돌은 자기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그러했다. 하지만 바둑판은 누가 이겨도 상관없이 구경할 뿐이다. 바둑알은 관념 · 개념적 자기이고, 바둑판은 마음챙김이나 반응 없이 알아차리는 반응 없는 알아차림인 관찰적 마음(맥락적 자기)이다.

이것을 ACT 등 심리프로그램에서는 내담자나 일반 수련자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MBCT에서는 마음을 행동양식과 존재양식으로 구분한다. 마음은 실제 가장 바라는 목표를 달성하도록 동기화[渴愛, tanha]되어 있다. 행동양식(‘doing’ mode)은 현실과 원하는 것 사이의 불일치를 감지했을 때 마음이 들어가는 상태이다. 이러한 불일치 상태에서는 두 가지가 유발되는데, 첫 번째는 자동적으로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고, 두 번째는 현재 또는 기대되는 상태와 소망하는 상태 사이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습관적인 마음 패턴[業]이 가동된다. 이것이 고통의 원인이다.

이때 생각과 개념은 마음 안에 있는 현상이나 사건처럼 느껴지기보다는 ‘실제’처럼 경험된다. 마음은 오로지 목표 달성을 모니터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다차원적인 장대함으로 가득 찬(full multidimensional splendor)’ 지금 여기에 대한 본질은 놓치게 된다. 존재양식(‘being’ mo-de)은 행동양식처럼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동기화되지는 않는다. 존재양식에서 초점을 두는 것은 즉각적으로 바꾸려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을 ‘수용(accepting)’하고 허용(allowinng)하면서 현재 일과 마음 상태에서 마음챙김/알아차림으로 지혜와 자애를 넓혀 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두 가지 양식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바둑알과 바둑판을 하나로 보듯이. 이를 불교 전문 용어로는 물(진여본체)과 파도(생멸심/번뇌)를 함께 보는 여래장(如來藏)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자각함으로써 행동양식의 자동 조종 상태[業]에서 존재양식[慧]으로 전환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동/말/생각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앞으로 슬픔/갈등/걱정에 빠졌을 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자각/창조해 나갈 수 있다. 행동양식은 바둑알, 개념적 자기에 비유되고, 존재양식은 바둑판, 반응 없는 앎(Panna)에 비유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볼 때는 ‘봄’, 들을 땐 ‘들음’, 맛볼 땐 ‘맛봄’, 생각(걱정/슬픔/기쁨)이 일어나면 ‘생각(걱정/슬픔/기쁨)’……등으로 거울로 그림자 비추듯이 알아차려 나간다. 그렇게 되면 일어난 현상은 조건을 따라 사라지면서 자각/지혜가 향상되고 이 맘으로 자신과 타인을 공감하는 자애가 일어난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알아차림으로 자타 행복을 창조하는 붓다의 위빠사나 수행이다.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는 불교를 힌두교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힌두교는 모든 종교와 수행을 인정하는 대표적인 융복합의 종교다. 작년 7월에 인성개발법이 국회서 통과되어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스님들과 재가 전문가 중심으로 명상지도자협회가 설립되었다. 교회나 심리학회 등 모든 분야에서 명상심리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다종교 간, 여러 수행법의 융복합 흐름 속에서 불교도의 역할은 지대하다고 본다. 불교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고 고유의 교리와 핵심 수행을 바탕으로 한 전통 수행법과 대중용 응용 수행법을 전승 계발 해 나갈 때 불교가 세계 평화와 뭇 생명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정법으로 모든 수행법을 섭수하고, 섭수한 모든 종교 수행법들을 정법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강물, 대동강물이 바다에서 하나의 맛이 되듯이.

 

김열권 / 마하위빠사나 명상원장 , vipassana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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