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어 있는 절집은 아름답다. 고즈넉한 절 마당 한쪽에 가만히 서서, 꽃잎들의 가느다란 떨림을 그윽한 향기로 만나보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어쩌다 나서는 여행길에 나는 일부러 개화 시기에 맞춰 사찰을 찾는 여정을 잡고는 한다. 선암사 홍매를 보러 갈 때가 그러하고, 개심사의 청벚꽃, 선운사 꽃무릇과 미황사 동백, 부석사 가는 길의 사과꽃이 그러하다. 어쩌다 날을 잘못 잡아 먼 길 찾아간 보람도 없이 꽃망울조차 보지 못하고 낙담하여 돌아올 때도 있지만, 우연히 든 산사에서 눈물처럼 피어난 하얀 별꽃이라도 한 포기 발견한 날에는 두고두고 혼자 흐뭇하다.

꽃을 만나고 돌아오는 내 발길은 강퍅하게 이리저리 삐죽거리던 마음이 곱디고운 색색의 꽃잎들로 어루만져져서, 어느덧 번뇌를 비워내고 평정심을 되찾아 가뿐하고 산뜻하다. 절집의 꽃에게로 가는 길은 그래서 나에게는 치유의 길이고, 불국(佛國)으로 건너가는 무지개다리다.

이번 여름에는 작년에 갔었던 백련사 배롱꽃을 보러 갈 것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 백련사에 머물렀던 시간들이 꿈을 꾼 듯 아련하다.

지난여름 무더위에 떠났던 남도 여행길 끝자락에 백련사가 있었다. 말로만 전해 들었던 그토록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있다는 강진의 백련사.

남도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팔월 한낮에 줄줄 흘러내리는 땀으로 흠씬 젖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만덕산 숲길을 넘어갔었다. 새로 덖은 차를 들고 다산에게 사뿐사뿐 걸어가던 혜장의 마음으로. 깊은 밤, 절간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혜장에게 흰 베옷적삼 나부끼며 걸어가던 다산의 마음으로. 혜장과 다산. 또 누구와 누구. 보고 싶은 얼굴 하나씩 품에 안고, 보고 싶은 이에게로 걸어가는 길.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 조각 산들바람에 오래된 동백나무와 대나무와 차나무 이파리들 끝에서 초록이 물결치고 있었다.

백련사 안뜰에 미처 들어서기도 전에 멀리서도 그 배롱나무의 자태가 한눈에 보였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미끈하고 뽀얀 살갗을 보란 듯이 드러낸 아름다운 수형 위에 열두 폭 치마를 활짝 펼쳐놓은 듯 붉은 꽃송이들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화려한 듯 소박하고 도드라진 듯 수줍다. 한걸음에 내달려 가니 눈앞이 아득해지도록 장관이었다. 나는 꽃나무 아래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정갈한 절집 마당에 무심히 드리워진 꽃그늘. 내 그림자. 두 귀에 넘치도록 쏟아져 들어오는 매미들의 쩌렁쩌렁한 울음소리 한가운데 나는 역설적이게도 적막한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새 꽃잎 들어 붉어졌을 내 눈동자.

수년 전 교편을 잡고 있던 학교 교정에도 잘생긴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늘을 만들어 줄 만큼 몸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나 학교로 돌아온 개학날이면 음악실 앞에 활짝 피어 제일 먼저 반갑게 나를 맞아주던 배롱꽃. 구월이 오고 떨어진 꽃잎들이 정원에 융단처럼 붉게 깔리면 아이들과 나는 배롱꽃잎 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야외수업을 하곤 했었다. 내 기타 반주에 머리를 까닥이며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갑자기 교직을 그만두고 학교를 떠나오던 봄날, 배롱나무 곁에 아이들이 철 잊은 배롱꽃처럼 조롱조롱 서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볼 때마다 저 멀리 손을 흔들며 서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오래오래 꽃잎처럼 한들거리고 있었다.

그 후로 해마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불쑥불쑥 꽃처럼 피어나는 보고 싶은 아이들의 얼굴.

온몸에 뚝 뚝 붉은 꽃물이 든 채로 만경루에 올라서니 눈앞에 아스라이 펼쳐진 구강포가 보였다. 벌써 길 떠날 채비를 하는지 여름새 한 무리가 우르르 날아올랐다가 점점이 되돌아오고 또다시 날아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누마루에 앉아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다 올려다본 대들보에 천의(天衣)를 입고 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피리 부는 비천상(飛天像)이 그려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불국정토의 피리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하늘에서 꽃송이들이 흩뿌려져 내려올 것만 같았다.

창 너머로 배롱나무꽃 무더기를 바라다보며 나는 그제야 그 얼굴들을 천천히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보고 싶던 아이들의 작은 얼굴이 붉은 꽃잎 위에 오롯이 되살아났다. 배롱꽃잎들이 바르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조그만 입술로 나에게 무엇인가 소곤소곤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입을 모아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창가에 바짝 기대어 귀를 기울였다. 그때 나는 바람결에 언뜻 비천의 피리 소리를 들었을까. 일만 년을 지어 얻은 인연, 내 그리운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아마도 나는 들었을까. 나무 관세음보살.

 

문리보 / 시인 , river19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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