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 출판사의 요청으로 전설의 4인조 밴드인 비틀스(Beatles)의 노랫말을 번역하여 《비틀스 시집》이란 책을 낸 적 있었다. 그동안 멜로디 위주로 들었던 가사들을 그때 유심히 살피게 되었는데, 의외로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가사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전혀 뜬금없는 일은 아니다. 한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불자가 이미 600만을 넘었으며, 명상 수행하는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숫자가 천만 가까이나 된다 한다.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에 수많은 불교 사찰과 명상센터가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아널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  1975)는 자신이 세상을 뜨기 몇 년 전, 옥스퍼드 학술회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만일 2, 3백 년 뒤, 후세 사학자들이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본다면, 당신은 무슨 사건을 꼽을 것인가? 그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20세기 최대의 사건은 동양의 불교가 서양으로 건너와 기독교를 조금씩 대체하는 일이다.” 세계적 석학의 강의를 듣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한 저명한 학자, 교수, 기자는 물론 학생들도 모두 할 말을 잃었다는 후문이다. 이는 동양불교의 서양 유입으로 서세동점이 거꾸로 이루어진 느낌이다.

비틀스의 창립 멤버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존 레넌(John Len-non)은 1970년 비틀스가 해체된 다음에 솔로 활동을 하면서 유명한 〈이매진(Imagine)〉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나를 몽상가라 말할지 몰라도…… 상상해 보세요, 국경이 없다고.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 그러면 누굴 죽이거나 죽어야 할 이유도 없을 테니……
You may say I’m a dreamer.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그리고 또 상상해 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 세상 모든 사람이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Imagine no possessions……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요즘 유럽 대륙은 내전과 굶주림을 피해 국경을 넘어오는 난민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만약 이 노랫말처럼 국경이 없고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대동(大同)의 축제이자 무차별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서방정토가 따로 없을 것이다. 비틀스의 최대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렛잇비(Let it be)〉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내 환란의 시절에 성모님께서 지혜의 말씀을 주셨네, 그대로 두어라.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리고 어둠 속을 헤맬 때
and in my hour of darkness

또 내 앞에 나타나 지혜의 말씀을 주셨네, 그대로 두어라. 그대로 두어라, 그대로, 순리대로, 답은 나올 것이니…… 그냥 내버려두어라.
Let it b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이 노래에서 후렴까지 합치면 ‘렛잇비’라는 말이 서른 번도 더 나온다.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일 것인가? 인위로 어찌할 수 없을 때 터져 나오는 무위(無爲)! 길가의 풀꽃 한 송이조차 시절인연이 있어야 핀다 하지 않는가.

사실 서구의 역사는 과학 발전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런 힘을 바탕으로 그들은 선진국이 되었고 지금까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이성 중심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그들도 이제는 벽에 부딪힌 느낌이다. 상처받은 영혼과 문제투성이의 세상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통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과 작가, 예술가, 철학자들이 명상을 하고 참선을 한다. 그 중심에 불교적 사유가 있다. 그들에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차라리 삶의 철학에 더 가까운 것으로 그들의 이성적 사유체계에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 같다. 이론물리학자로서 상대성이론을 남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도 ‘미래의 종교는 자연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똑같이 존중할 수 있는 통합의 종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자신의 생각과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상응하는 종교는 바로 불교’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불교야말로 오래된 미래가 아닐는지.

불교적 관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뮤지션이 있다. 프레그레시브 6인조 록 밴드인 캔자스(Kansas)다. 그들이 1977년에 발표한 〈더스트 인 더 윈드(Dust in the Wind)〉는 허무적인 듯 아름다운 멜로디와 철학적 가사로 유명하다. 마치 겨울을 이기고 온 노란 산수유가 물그림자에 어리는 따뜻한 봄날, 제자들을 앞에 둔 어느 고승의 설법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다. 지면 관계상 전문을 옮길 순 없지만, 주요 구절들을 들어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잠시 눈을 감으면 모든 순간이, 당신의 모든 꿈이 눈 앞에서 사라진다. 그저 끝없는 바다의 물방울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집착하지 마라(Don’t hang on). 하늘과 땅을 제외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Nothing lasts forever but the earth and sky). 우리의 모든 행위도 결국 부서져 가루가 되고 만다(All we do crumbles to the ground). 당신의 재산을 다 주어도 단 1분도 더 살 수 없다(All your money won’t another minute buy). 우리 모두는 바람 속의 먼지와 같다(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세상만사 모든 것은 그저 바람 속의 먼지일 뿐이다(Everything is dust in the wind).
 
정말 기가 막히지 않는가? 허망하고 쓸쓸한 일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행위 그 모든 것이, 다만 바람 속의 먼지요, 티끌에 불과하다니! 하지만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듯이, 선업(善業)의 티끌이 어느 뿌리 끝이라도 적실 수 있지 않겠나. 선(禪)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명상 수행에 빠져들었던 애플(Apple)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우리는 이 우주에 아주 작은 흔적(변화)이라도 남기려고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의 이유가 없다.(We’re here to put a dent in the universe. Otherwise why else even be here?)”라고 말했다.

이 글을 끝내면서 내다보니, 4월의 창밖은 오늘의 사태를 은유(隱喩)하듯 황사로 가득하다. 번쩍이는 고급 승용차도, 향기로운 라일락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의 꼭대기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는 먼지가 될 나, 아니 이미 티끌에 불과한 나부터 건방 떨지 말고, 허무에도 빠지지 말고, 그 끝까지 가보아야겠다. 혹시 한 송이 꽃이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강서일 / 번역가,  kwkang20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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