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5월, 불교학과 4학년생이었던 나는 삭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교신문사에 입사했다. 트럭을 탄 군인들이 교정으로 밀고 들어와 총을 휘두르며 강의실과 도서관을 휘젓고 다니던 학창 시절 내내, 학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두루 경험을 쌓았지만, 불교신문사는 또 다른 세계로의 출발이었다.

주필직을 맡고 계셨던 법정 스님과의 면접을 위해 총무원 내에 자리한 신문사를 찾아가는 발길은 마치 30본산 중의 어느 한 문중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짧은 면담과 웃음으로 입사를 결정해 주신 법정 스님에게 감사를 드린 후, 나는 홍정식 교수님과 황성기 교수님 등 은사님들을 찾아뵙고 사정상 강의 참석에 불충실하게 될 것을 말씀드렸다.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기자 생활에 충실할 것을 격려해주시었다. 불교학과는 불교 언론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학과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기자가 되라고 하셨다.

이후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2013년, 나는 불교계의 신문 · 잡지 · 출판으로 이어온 내 기자로서 삶의 흐름을 대충 정리하고, 엄청난 짐꾸러미들을 여기저기로 처분했다. 그리고는 양평에 마련한 밭뙈기에서 네 명이나 되는 손주 놈들과 뛰어놀고, 물주고 풀 뽑느라 바쁜 몸이 되었다.

그러나 논둑길을 걷다가 씀바귀를 따느라 쭈그려 앉노라면, 혹은 다슬기를 잡느라 어두운 밤 강 속에서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에 뜬 별과 달을 바라볼 때면, 문득문득 가슴에 치미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훌륭한 기자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삭발출가 하였어도 바람직한 승려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과 다름없다. 기자가 불교 포교의 제반사에 임하는 삶은 바로 출가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학신문사 편집부장이던 시절, 나는 유신독재를 징계하기 위해 분신자살을 꾀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월남에서 스님들이 자주 분신하던 뉴스를 접하고 얻은 용기였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자는 계획 아래, 모 교수 연구실에서 동지들과 함께 대국민 성명문을 쓰던 우리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복 차림의 대원들에게 끌려감으로써 사건은 종결됐다. 아니, 나라를 위해 아무 짓도 못 한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더더욱 오늘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계를 이끌고 있는 신문 · 방송 · 출판사가 돈을 벌기 위해 오락실이나 카페 같은 노릇을 하고 있어도, 그런 이야기가 흘러들어 와도, 못 본 척하는 무기력한 기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종단의 안팎에서 권력을 쥐었다고 함부로 쌍스런 짓을 해대는 승속이 있어도, 칼날을 휘둘러 시원스레 베어내지 못하는 부질없는 기자가 되어 있다. 아픈 가슴, 이것은 나만의 질병일까?

나의 선배님들은 그러하지를 않으셨다. 머리를 깎으셨거나 낡은 잠바를 입으셨거나, 그릇된 일에는 호된 야단을 치고, 교계를 생각하고 종단을 걱정하며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셨다. 그걸 보는 후배 모두가 두 손을 모으고 ‘나도 이것을 배워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언행을 하셨다. 선후배 모두 그런 그릇의 ‘어른’들이셨다.

그분이 기자이건 아니건, 승이건 속이건, 후배와 선배는 뜻을 같이하여 훌륭한 분들을 사뭇 칭양하고, 못된 이들은 가차 없이 매질하였다. 자랑스러운 불가의 이름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렇게 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부끄러워하였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런 ‘어른’이 되지를 못했다.

‘문중도 별 볼 일 없는 주제에’라고 함부로 스님을 무시하는 기자를 본다. ‘재가자 주제에’라며 포교에 헌신하는 불자를 손아래로 보는 기자를 본다. ‘돈도 없는 처지에’ ‘끗발도 없는 것이’라고 삿대질을 하면서 돈 많고 끗발 있는 이를 맹종하는 그런 기자를 본다.

나는 불가를 망치는 허수아비 기자들이 곳곳에서 자라나게끔 방치한 그런 늙은이일 뿐이다. 선배로서도, 기자로서도, 아무런 역할도 못 한 멍청이일 뿐이다. 어찌 불교학과를 나온 불가의 기자라고 할 수 있으랴. 4개의 불교 잡지를 창간하고, 1,600종의 출판물을 낸 편집쟁이라고 할 수 있으랴.

나는 다시 출가하고 싶다. 신출내기 기자가 되어 선배님들을 졸졸 따르며 신바람 나게 빗자루질을 하고 싶다. 나를 아껴주시던 그 많은 스님들, 그 스님들의 그림자를 다시금 밟고 싶다. 은사님들, 선배님들, 동고동락하던 후배 기자들, 그분들이 터트리던 웃음소리를 들으며 무엇이 불가의 미래인지 교단의 발전상인지를 맹렬히 토론하고 싶다. 그리고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 오욕에 물든 벌레들을 부처님 발치에서 저 멀리 잘라내고 싶다.

양평의 광탄(廣灘) 냇물은 이름과 달리 그리 넓지를 않다. 집을 나서서 50여 미터의 징검다리를 건너면 손녀 손자와 나는 물고기박물관에 도착한다. 철갑상어를 비롯해 온갖 민물고기가 2개 층의 수족관과 정원의 너른 연못에 가득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노는 아이들을 보며, 너는 속세를 떠나라고 스스로 채근한다. 속세란 어디에 있을까? 동국대 근처, 인사동 근처, 거기가 속세임이 분명하지만 과연 나는 떠날 수 있을까?          

 

김형균 / 불교출판인, haaaw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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