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일. 대련행 비행기에서

바쁜 일상을 잠시 미루고 중국 대련행(大連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늘 그렇듯이 비행기는 출입국 과정의 복잡함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사람을 지치게 한다. 대련 불자들과의 인연은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북경 만월사에서 해외포교를 한답시고 행자에서 주지 노릇까지 하고 있었다. 원래는 불교방송에서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마무리하고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상사라는 게 늘 그렇듯 뜻대로 되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어느 어른 스님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 나는 북경 만월사에서 해외포교를 하기로 방향을 바꾸고 말았다.

그렇게 북경에서 살고 있을 때 대련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느 날 대련 불자 세 명이 기도를 위해 북경 만월사를 찾아왔는데 사연이 눈물겨웠다. 대련 지역 한인 불자들이 중국 사찰을 전전하며 법회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교단 차원에서 지원한다는데, 불교는 이게 뭐람.’ 나는 무슨 사명감 같은 것에 이끌려 대련으로 갔다. 그렇게 해서 법당도 마련하고 법회도 볼 수 있도록 했다. 조금 더 중국에 있었다면 어떻게 더 해보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의욕일 뿐이었다. 얼마 뒤 나는 고단한 중국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때의 인연은 요즘도 이어지고 있다. 가끔 대련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마다 고단했던 중국 생활이 생각나곤 한다.

요즘은 중국 내 생산원가가 턱없이 높아지면서 한인들의 기업이나 개인 사업자들의 사정이 많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대기업 협력업체들은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하고 있는 실정이라 중국 주재 한인들의 숫자도 많이 줄었다. 그렇지만 올해도 저들은 조촐하게나마 부처님오신날을 정성스럽게 맞을 것이다.

4월 28일. 수원-광명 민자고속도로 개통하는 날

조용하던 산사가 갑자기 쌩쌩 달리는 자동차 소리로 온종일 시끄럽다. 사찰과 도로 사이 거리가 직선으로 불과 200~25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수원-광명을 이어주는 민자고속도로가 생긴 것이다. 내가 주지 소임을 오기 전에 이미 계획이 발표되고 주민들에게 땅 보상도 다 끝난 터여서 착공만이 남아 있었다. 설사 그전에 알았다 해도 혼자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공사 착공 후 1년여는 터널 뚫는 발파 소음에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사찰 앞 구간에서 공사가 이어지는 3년여 동안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개통을 할 즈음 방음벽이 세워지는데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 상황이 생겼다. 사찰 건너편은 7미터 높이의 방음벽이 세워지고 터널 앞까지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반면 사찰 쪽은 딱 보이는 몇 미터에만 방음벽이 세워졌다. 높이도 4미터밖에 안 된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공무원의 말은 환경영향평가에 준해서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반대편은 소 축사가 있어 소들이 예민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 건강은 고려되고 사람의 심리적 피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공사 현장이다.

사람이 소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살아야 하는 현실. 도저히 소음공해 때문에 살 수 없어 민원이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제부터 지루한 전쟁이 되지 않을까. 오늘도 바삐 오가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푸념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5월 3일. 전국비구니회 원로회의

며칠간 원로회의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우리 비구니계의 가장 어른 스님을 모시는 자리인 만큼 조심스럽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11대 전국비구니회 집행부가 출범하며 대중 스님들과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비구니 원로회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회칙에만 존재하던 원로회를 구성해 어른을 여법하게 모시는 일이다.

참 오랜만에 어른 스님들께서 한자리에 모여 앉으셨다. 어른 스님들을 뵈며 몇십 년 후의 나도 저기에 앉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현대 한국불교가 있기까지 비구니 원로 스님들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려운 시절 전란의 폐해를 복원하기 위해 기도와 수행 틈틈이 당탑불사(堂塔佛事)를 하던 분들이다. 요즘도 다 개선된 것은 아니지만, 저분들이 출가할 무렵은 남녀불평등이 너무 심했었다. 속가에서는 아무 존재감이 없는 딸이었고 출가해서는 종단 내에서 더더욱 역할이 없던 비구니로서의 삶은 정말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각 분야에서 치열하게 정진하셨던 스님들을 한자리에 모시니 코끝이 시큰하다. 첫 회의라 먼저 의장과 수석부의장, 부의장을 선출하고, 비구니 명사(明師)를 추천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으고 회의는 끝났다. 운문사 회주 명성 명사 스님을 의장으로 모셨지만 끝까지 사양하는 겸손을 보이셨다. 그동안 비구니계는 전국비구니회의 자리처럼, 할 만한 스님이 해야 한다며 서로 양보하는 문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그런 미덕이 살아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비구니계에서조차 자리다툼을 한다는 말이 들릴 때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제 그런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새로 시작하는 자리였다. 누군가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든든한 울타리 같은 원로 비구니 스님들이 계시고, 닮고 싶은 어른이 계시다는 것은 후학들에게 얼마나 큰 복인가.

5월 7일. 부처님오신날 맞이

일 년 중 절에서 가장 바쁜 달이 5월이다. 불교 최대 명절인 부처님오신날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때가 되면 전국 사찰이나 단체에서는 다양한 문화 행사가 이루어진다. 대부분 사찰 분위기가 예전같이 조용하고 한적하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분주한 사찰에 비해 아직도 여기 법련사는 도심에 가까운 오지이다. 그저 준비라고 하는 것이 도량 정리하고 나무 전지며 화초 정리하는 정도다. 앞으로 이 도량을 찾아올 어린이들을 위해 앵두나무며 자두, 살구, 호두, 복숭아, 사과나무 등등 갖가지 과일나무도 심었다. 부처님 외에 보여줄 게 없는 사찰이지만 인연이 된 불자들이 잠시라도 마음 쉬어 갈 수 있는 도량이 되기 위해 나무와 화초들에 역할을 부여해야 할 것 같다.

역사는 오래지만 전란에 다 소실되어 문화재 한 점 없는 초라한 절. 어쩌다 나하고 인연이 되었을까 싶다. 피해갈 수 없는 일이라면 즐기라고 했던가. 오늘 하루도 즐겁게 도량 정리를 하며 최선을 다한 나를 격려하고 위로한다.

진명 / 시흥시 법련사 주지, jm88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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