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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의 일본왕 겸임과 불교 포교
-일본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의 성왕의 신주는‘금목대신’
[27호] 2006년 09월 10일 (일) 홍윤기 한국외국어대 교양학부 일본문화 담당교수

서론(백제 성왕에 대하여)

백제 제26대 국왕은 성왕(聖王 : 523~554재위)이다. 성왕은 백제 제25대 무령왕(武寧王 : 501~523재위)의 왕자이다. 성왕의 이름은 명농(明)이며 일본 역사에서는 성왕의 왕명을 거의 모든 기사에서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으로 ‘명’(明)자를 한 글자 더 첨가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일본 역사 기사에서는 성왕의 성(聖)자를 빼고 그냥 백제의 명왕(明王)으로도 쓰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일본 역사서에서 성왕의 왕호에 ‘밝을 명(明)자’가 반드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억해 둘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우리나라 『삼국사기(三國史記 : 서기1145년 편찬)』의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는 성왕(聖王)으로만 쓰고 있다.

일본 역사서에서 성명왕 또는 명왕으로 기술하여 오는 것은 모름지기 왕의 이름 명농에서 명(明)자를 따온 것이 아닌가 추찰한다. 더구나 여기서 아울러 밝혀 두자면 백제 성왕이 일본에 건너가서 왜왕 왕위를 겸임했던 당시의 왕명에도 ‘밝을 명자’가 들어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즉 성왕이 겸임했던 일본왕의 왕호는 킨메이 천황(欽明天皇)으로서, 그 왕명에도 밝을 명자가 들어 있다. 흠(欽)자의 뜻은 ‘공경하다’다. ‘불교로 빛을 밝혀 공경할 임금’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 : 서기720년 편찬)』에서 킨메이 천황은 제29대왕이며, 재위 연간을 서기539년에서부터 571년까지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등극년은 그 보다 8년 앞선 서기531년이라는 것이 일본 불교 고문서인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德法王帝說 : 10C경 편찬)』의 기사이다.

『상궁성덕법왕제설』은 일본 왕실 고문서이며, 일본 왕가의 성덕태자(聖德太子 : 574~622)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서, 서기 7세기 이후의 고대 사료를 편집하여 10세기 경에 집대성한 일본 고대 왕실사의 귀중한 사료로서 높이 평가되어 온다. 권위 있는 일본 사학자들은 이 문헌에 의하여 킨메이 천황의 즉위년을 서기531년으로 삼는 것이 정설이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 천황의 등극년을 8년간 뒤로 내려서 서기539년으로 쓰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사에서는 “백제 성명왕(聖明王)은 서기552년에 일본에다 불교를 전하여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 예시한 『캉코우사연기(元興寺緣起 : 서기747년 편찬)』와 『상궁성덕법왕제설』에서는 한결 같이 “백제 성명왕이 서기538년에 일본에다 불교를 전하여 주었다”라고 쓰고 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성왕의 백제 불교 일본 전파는 서기538년을 정설로 삼고 있다.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포교한 것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欽明天皇13년)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別表,讚流通禮拜功德云,是法於諸法中,最爲殊勝.難解難入.周公.孔子,尙不能知.此法能生無量無邊福德果報,乃至成辨無上菩提.譬如人懷隨意寶,逐所須用,盡依情,此妙法寶亦復然.祈願依情.無所乏.且夫遠自天竺,爰泊三韓,依敎奉持,無佛尊敬.由是,百濟王臣明,謹遣陪臣怒唎斯致契,奉傳帝國,流通畿內.果佛所記我法東流.是日,天皇聞己,歡喜踊躍,詔使者云,朕從昔來,未曾得聞如是微妙之法.

(킨메이 천황13년) 겨울철 10월에 성명왕, 다른 이름은 성왕(聖王)은 서부희씨노리사치계 등을 파견하여, 석가부처님의 금동불상 1구. 불구(佛具) 약간. 불경 몇몇 권을 올려 바쳤다. 별도로 왕에게 여쭙기를 부처님을 널리 예불하는 공덕을 찬양하면서, ‘이 불법(佛法)은 세상 모든 법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깨닫기 어려우며 들어가기도 어려워서 주공과 공자 조차도 아직 이 법을 터득하지 못한 처지였으나, 이 법은 헤아릴 길 없고 끝간 데 없이 복덕과 과보를 베풀고, 가장 훌륭한 보리(菩提)를 이루게 하며, 이를테면 사람이 수의보주를 품고 무엇이고 간에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입니다. 멀리 천축(옛날 인도 : 필자 주)으로부터 삼한(마한, 진한, 변한 : 필자 주)에 이르기까지 교리에 따르며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백제왕 신(臣) 명(明)은 삼가 거느리는 시신 노리사치계를 파견하고 제국에 전하여 나라 안에 유통시킴으로써, 부처님이 우리 불법은 동방으로 전하라고 하신 사명을 다하려하는 바입니다’고 말했다. 이날 천황은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

우선 이와 같은 『일본서기』의 기사는 뒷날 조작된 역사 왜곡의 한 전형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일본에는 ‘천황’이라는 왕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뿐아니고 서기 5백년 당시 일본의 국호는 ‘왜국(倭國)’이었으며, 더더구나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인 ‘제국(帝國)’이라는 국호는 미개했던 섬나라 왜국에는 가당치 않은 황당무개한 표기이다. 토쿄외국어대학 동양사학과 교수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씨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보더라도 역사 날조가 들어난다.

“‘천황’ 왕호는 서기668년의 텐찌(天智)천황의 왕호가 『선수왕후묘지명』의 구리쇄판의 발굴로서 나타난 것이 가장 오래된 확실한 사료이다.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실제로 사용된 것도 서기 670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까지는 왜국(倭國)이었다”(岡田英弘『倭國』1977)

그 당시 불교문화의 선진국이며 또한 신라와 고구려를 침공하는 등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던 백제 성왕이 보잘 것조차 없던 섬땅 왜국왕에게 불교를 전파하면서 ‘금동불상을 올려 바쳤다’느니, 왜왕의 신하라는 ‘신명’으로 성왕을 비하하여 기술한 의도는 무엇인가. 이 역사 기사의 날조의 이면에는 ‘백제 성왕의 왜국왕 겸임 사실’을 역으로 은폐하기 위한 흑막이 개재하였음을 쉽게 간주할 수 있다. 그 뿐아니고 백제 불교 전파가 서기538년인 것을 은폐시킨 또 하나의 연대 조작은 킨메이 천황의 등극년도를 1년 뒤로 밀어 ‘서기539년으로 조작한 사항’도 지적된다. 더구나 흥미로운 것은 성왕이 왜국에다 불교를 전파시켰다는 그 전년인 서기538년 3월의 『일본서기』 기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음처럼 백제의 막강한 군사력이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이 해에 백제 성명왕은 몸소 자국(백 : 필자 주)과 신라 및 임나 두 나라 군사들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漢城)을 회복했다. 또한 군사를 전진시켜 평양을 쳤다. 모두 6개 군(郡)의 땅을 회복했다.”
성왕 신주 금목대신 모신 교토의 히라노신사

서기794년부터 서기1867년까지 장장 1천73년 동안 이어진 일본의 오랜 역사의 왕도가 지금의 교토(京都)땅이다. 이 일본 고대의 왕도 교토에 가면 그 곳에는 일본 왕실에서 대대로 백제 성왕을 신주(神主)로 모시고 해마다 4월2일에 제사 모셔 온 대규모의 일본 왕실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의 명칭은 ‘히라노사’(平野神社/京都市北區平野宮本町)이다.

이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에 모시고 있는 성왕의 신주의 대표적인 이름은 ‘금목대신(今木大神/이마키대신)’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금목신(今木神/이마키신)’을 비롯하여 ‘히라노신(平野神)’ 또한 히라노대신(平野大神) 그리고 ‘명신(明神)’으로도 각기 고대 역사 문헌에 표기하고 있다. ‘명신’은 일본 역사서에서 성왕을 명왕(明王)으로도 부른데서 사후의 신주로서 역시 명신이라고 함께 썼다. 이렇듯 여러 가지 신주의 이름으로 백제 성왕은 일본 왕실에서 지극하게 숭배되어 왔다. 어째서 일본 왕실에서는 왕실 사당 ‘히라노신사’에다 백제 성왕의 신주를 제신(祭神)으로 극진하게 모셔놓고 오늘날까지도 제사를 지내 오고 있는 것인가.

이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에는 모두 다섯 분의 백제왕과 왕족의 신주를 사당의 각 신전에 제신으로서 모셔 오고 있다. 말하자면 히라노 신사는 백제왕들의 종묘(宗廟) 격이다. 이 왕실 사당의 첫 번째인 제1신전에 모신 신주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백제 성왕이다. 이 사당 히라노 신사에 성왕의 위패가 처음으로 봉안된 것은 지금부터 1천73년 전인 서기 794년의 일이다. 성왕의 위패를 봉안한 사람은 그 당시 이 곳 교토땅으로 왕도를 천도하여 온 일본 제50대 칸무 천황(桓武天皇 : 781~806재위)이었다. 우선 여기에 간략하게 지적하여 두자면 칸무천황의 생모(生母) 화신립 황태후(和新笠<高野新笠>皇太后)는 백제 제25대 무령왕(武寧王 : 501~523재위)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 내용은 일본 고대 왕실 편찬 정통 역사서 『속일본기(續日本紀, 서기797년 편찬, 총40권)』에 밝혀져 있다. 상세한 것은 뒤에서 밝힌다.

칸무 천황의 천도 당시부터 이 새로운 왕도의 명칭은 ‘헤이안경(平安京)’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칸무 천황은 왕도 헤이안경의 천도 직후에 왕궁 북쪽 땅에다 왕실 사당으로서 히라노 신사를 건설하고 백제 성왕을 왕실에서 제사 모시도록 칙명을 내렸다. 그 때부터 이 히라노 신사는 헤이안경에서 거룩한 왕실 사당으로 존엄하게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이 서기927년에 편찬된 일본 왕실 법도(法度)인 왕실 고문서 『연희식(延喜式, 서기927년 왕실 편찬 총50권)』에 기록되어 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일본 왕 칸무 천황이 백제 성왕의 사당을 새로 천도하여 온 왕도에 건설하고 또한 해마다 성왕에 대한 왕실 제사를 모시게 된 것일까.

만약에 백제 성왕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왕을 겸임한 것이 아니고, 다만 일본에다 불교만을 포교시킨 백제왕이었다고 하더라도 일본 왕실에서 이 히라노 신사를 세우고 성왕을 왕실에서 제사 모셨을 것인가. 그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칸무 천황이 스스로 새로이 천도하여 온 왕도 헤이안경의 왕궁 북쪽 터전에다 백제 성왕의 신주를 모시는 성스러운 큰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를 세운 그 자체 만으로서도 칸무 천황의 직계 조상이 백제 성왕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쉽사리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문헌사학의 견지에서 필자가 장기간에 걸쳐 일본에서 발굴한 고문헌들을 고증 자료로 삼아, 하나하나 그 실상을 차분하게 살피면서 일본 왕실의 백제 핏줄을 살펴보기로 하자.

교토의 일본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에는 제1신전(神殿)으로부터 제4신전에 이르기까지 4동의 신전 건물이 잇대어 줄지어 서있다. 그러나 이 히라노 신사의 4개의 신전이 각기 누구 누구 신주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인지에 관해 전혀 일반 일본인에게는 바르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일본 고대사학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은 거의 누구도 히라노 신사의 존재 내용조차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사당의 내력이며 역사의 발자취에 관해 일본의 정부 관계 기관들이 내용 공개를 철저하게 금하여 온 것이며, 이에 교토 관광 안내 책자거나 역사 지리 안내 책자들은 좀처럼 그 역사적 사항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의 일부 양식 있는 역사 학자들에 의하여 그동안 이 일본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의 제1신주가 백제 성왕이며 그 밖의 신주들도 백제왕과 왕족들임이 고증되었다.

지금부터 약 2백년전에 히라노 신사의 주신이 백제 성왕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것은 일본 무사정권인 에도막부(江戶幕府 : 1603~ 1867) 후기의 국학자 한 노부토모(伴信友 : 1773~1846) 씨였다. 한 노부토모 씨는 그가 평생 동안 저술한 책이 3백여 권에 이르며, 또한 자신이 집록(集錄)한 일본의 고전은 1백50권, 직접 연구하여 교정한 고전도 2백60권에 달하는 대학자이다. 그의 주저(主著) 연구론으로서 특히 주목받아오는 것은 『신사사고(神社私考)』와 『신명장고증(神名帳考)』 등 일본 고대 왕실의 제사와 신도(神道)에 관한 고증이며, 일본 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도 그의 연구 성과가 높이 평가되어 온다.

한 노부토모 씨는 그가 쓴 『번신고(蕃神考/伴信友全集)』5, 저자의 사후 뒷날인 1909년 간행)에서 고증하기를, 히라노 신사(平野神社)의 제1제신(第一祭神)인 “금목신(今木神)은 백제신(百濟神)인 백제 성명왕(百濟 聖明王)이다”라고 규명했다. 이 고증에서 그도 역시 성왕의 왕호 이름에는 “명(明)”자를 넣어 백제 성명왕(百濟聖明王)으로 쓰면서 또한 다음처럼 히라노 신사에서 제사모시는 모든 신주들이 백제 왕족들임을 일본 역사상 최초로 다음과 같이 규명하였다.

“今木神은 百濟聖明王
久度神은 土師氏始祖 土師部臣某
古開神은 桓武天皇外曾祖父大江朝臣某.”

이상과 같은 고증은 에도막부 후기의 일본 사학계 뿐 아니라 정계에 까지 크게 주목시켰다. 물론 그는 일본 왕실 고문헌 자료들을 연구 조사함으로써 이와 같은 중대한 역사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낸 것이었다. 한 노부토모 씨의 뒤를 이어, 일본이 서양 문화를 도입하여 개화되고 있던 이른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 이후에도 히라노 신사의 “제1제신(第一祭神)은 백제 성왕의 신주”라는 한 ‘노부토모 학설’을 보강하는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밝혀져 학계를 다시금 긴장시켰다. 즉 그 당시 저명한 동양사학자였던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사학과 교수 나이토우 코우난(內藤湖南 : 1866~1934) 씨는 그의 일본 신도 연구 저서 『近畿地方に於ける神社』에서 다음처럼 고증했다.

“금목신(今木神)은 외국(外國)에서 건너온 신(神)
구도신(久度神)은 성명왕(聖明王)의 선조(先祖)인 구태왕(仇台王)
고개신(古開神)은 고(古)와 개(開)로 두 신을 나누어서, 고(古)는 비류왕(沸流王)이고 개( 開)는 초고왕(肖古王)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첫머리에서 ‘금목신’은 “외국에서 건너 온 신”이라고 백제 성왕의 신주를 완곡하게 둘러대어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 당시 삼엄한 일본 군국주의 감시하 정권의 관립 제국대학의 교수로서 그는 히라노 신사의 백제 성왕의 신주인 금목신을 직접 사실대로 지적하기를 주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외국에서 건너 온 신’이라는 표현으로 둘러댔다.

그러나 히라노 신사 제2신전에 모신 신주인 ‘구도신은 백제 성왕의 선조인 구태왕(仇台王)’이라고 밝혔다. 일본 역사에서 ‘구태왕’은 백제 건국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이다. 또한 제3신전에 합사된 고개신 신주의 고(古)는 백제 비류왕(沸流王)의 신주이고 또한 ‘개(開)’는 백제의 초고왕(肖古王)의 신주임을 각각 구체적으로 고증했다. 비류왕은 온조왕의 친동생이며, 초고왕은 백제 제 5대왕이다.

이상과 같이 두 사람의 일본 저명 사학자에 의해서 차례로 왕도 교토의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의 주신은 ‘백제 성왕’이라는 것이 고증되었을 뿐 아니고, 제2신전의 신주는 백제 개국왕인 온조왕이며, 제3신전에도 역시 백제 왕족 비류왕과 초고왕이 신주로서 함께 한 신전에 합사 봉안되어 왔다는 것을 상세하게 입증했다.

일본 왕들이 히라노 신사의 백제 성왕과 온조왕 등 일련의 백제왕들에게 제사 모셨다는 기사는 일본 고대 왕실 법도인 『연희식』에도 밝혀져 있다. 여기서 거듭 지적하거니와 어째서 일본 왕들이 백제 성왕을 주축으로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에서 백제왕들에게 제사를 지낸 것인가. 그들 일본 왕들이 그들의 조상이 아닌 남의 나라 타국왕의 신주들을 자신들의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에 모시고 제사지내 왔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일본 왕실이 백제인의 혈통을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히라노 신사 관련 일본 왕실 고대 문헌들의 고증을 통해서도 낱낱이 들어나고 있다.

19세기의 저명 사학자들 뿐 아니고 현대의 일본 사학자들도 저마다 히라노 신사의 제1신주인 금목대신(금목신)이 백제 성왕괌이라고 속속 밝혀 왔다. 필자는 이 사실을 찾느라 30여년간 잇대어 각종 일본 왕실 역사 문헌 자료들을 발굴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좀 더 일찍 우리 사학계가 히라노 신사 등 일본 왕실 사당에 관한 연구에 참여했더라면 보다 큰 성과가 있지 않았겠는가 하고 여기면서, 앞으로 후학들의 적극적인 연구 참여를 권장한다.
현대의 저명한 고대사학자 나카가와 토모요시(中川友義) 씨도 그의 연구론 『渡來した神』)에서 히라노 신사의 성왕을 비롯한 백제왕 제신(祭神)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칸무 천황이 헤이안경(平安京)으로 천도하면서, 히라노 신사를 지어 신주를 옮겨다 모신 이 사당 제1신전의 금목신은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며, 제2신전의 구도신(久度神)은 성명왕의 선조이다. 제3신전의 고개신(古開神)의 고(古)는 개(開)와 똑같이 나누어서, 고(古)는 비류왕(沸流王)이며 개(開)는 초고왕(肖古王)으로서, 누구이고 간에 모두 조선의 왕이다. 제4신전에 모시고 있는 신주는 히매신(比賣神)이다.”

히라노신사 제4신전의 신주인 히매신은 앞에서 밝힌 일본 제50대왕 칸무 천황의 생모인 백제 왕족 화신립 황태후이다. 나카가와 토모요시 씨의 연구는 앞의 나이토우 코우난 씨의 연구를 계승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추가된 것은 제1신전의 신주가 백제 성왕이라는 사실을 에도 시대의 한 노부토모 씨의 연구대로 계승하여 밝힌 것이며, 제4신전의 신주 히매신은 칸무 천황의 생모 화신립 황태후라는 것을 밝힌 점이다.

스스로 천도하여 온 헤이안경에다 백제 성왕의 신주를 위해 히라노 신사를 세웠던 칸무 천황이 자신의 생모 화신립 황태후의 사후에는 역시 이 사당에다 제4신전을 건립하고 어머니를 ‘히매신’ 즉 ‘공주신’으로서 그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 모시게 되었던 것을 살피게 한다. 무령왕의 직계 후손인 화신립 황태후에게 있어서 역시 무령왕의 왕자였던 성왕도 그의 직계 조상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 밖에도 현대의 고대사학자 이마이 케이이찌(今井啓一 : 大阪樟蔭女子大學 교수) 씨는 “‘히라노신사의 주신인 금목대신은 칸무 천황의 친어머니이신 황태후 고야씨(御生母贈皇太后高野氏/백제왕족 화신립 황태후 : 필자 주)의 조신(祖神)인 화씨(和氏)의 조상신인 백제 성왕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贈皇太后高野氏と平野神』1974)하고 역시 히라노 신사 제1신전의 금목대신은 백제 성왕임을 지적했다. 이마이 케이이치 씨는 성왕의 신주를 금목대신으로 쓰고 있다.

2006년 현재 이 히라노 신사에 관해 가장 상세하게 연구하고 있는 저명한 일본 고대사학자는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京都産大 古代史 교수 겸 京都歷史資料館長 : 1940~)씨이기도 하다. 이노우에 미쓰오 씨는 그의 저서『渡來人の神--高野新笠と平野神社』 平安京の風景 1994)에서 “히라노 신사에서 제사모시고 있는 신주들은 백제에서 건너 온 백제 도래인(百濟 渡來人)의 신(神)이다. 히라노신사에서 신주를 제사드리는 제신(祭神)들을 가리켜 한반도(韓半島)에서 ‘지금 오신 신(神)’이라는 뜻에서 금목신(今木神/いまきのかみ/이마키노카미)으로 부르면서 제사를 모셔왔다”라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다시 소상하게 논술했다.

“헤이안경을 창건한 칸무 천황은 도래인의 핏줄을 타고 났다. 칸무 천황이 도래인들을 왕실 조정에다 조신으로 많이 등용시킨 것은 자기 자신이 도래인의 핏줄을 타고 났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 어머니 쪽의 조부가 도래계(渡來系) 집안 출신이었다. 즉 어머니는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본래 和新笠이며 改姓했다 : 필자 주)이며, 이 가문은 ‘백제 무령왕의 왕자인 순타태자(純陀太子)의 후손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서기815년 일본 왕실 편찬, 총31권/:필자 주)』에 기록되어 있듯이 명백한 도래계이다.

칸무 천황의 도래계 씨족들에 대한 중시의 방침이 헤이안경(平安京 : 794~1185)으로 나타난 것은, ‘금목신’으로 호칭하는 신주를 제사모시는 히라노 신사의 창건에 있었다. ‘금목(今木/이마키/いまき은 <방금 왔다>(万葉名/한국 이두식의 漢字 표기법 : 필자 주)’, 즉 ‘새로이 일본으로 건너 왔다’는 의미로서 생긴 말이다. 그 무렵에 한국으로부터 건너 온 도래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나라(奈良) 땅의 아스카(飛鳥) 지방의 땅이름도 ‘이마키군(今來郡/뒷날 高市郡으로 개칭)’으로 불렀듯이, ‘금목(今木)’은 도래인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들 도래인들 특히 ‘이마키’라고 호칭되던 백제 계열의 도래인들이 제사를 모시던 분이 금목신(今木神)이다”(『渡來人の神--高野新笠と平野神社』)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희식』의 제1 편인 「신기(神)」에는 엄연히 교토 헤이안궁의 북쪽에 위치한 “히라노 신사는 왕실 법도에 의해 왕궁에서 직접 관할하고 있는 중대한 사당(祠堂/神社)”으로 정해져 있다.

이상과 같이 일본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한결 같이 지금의 교토 땅 히라노 신사에서 옛날부터 현재까지 장장 1천2백여년 동안이나 꾸준하게 일본 왕실에서 제사 모셔오는 신주들은 모두 백제왕들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곳의 으뜸인 주신(主神)은 금목신(금목대신)으로 호칭하여 온 ‘백제 성왕’이다. 따라서 히라노 신사 터전은 서기 794년에 칸무 천황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본땅에 있는 한국 민족사의 영원한 성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히라노 신사’의 명칭의 유래는 무엇인지도 간략하게 살펴본다.

쉽게 설명한다면 칸무 천황의 직계 후손의 왕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칸무 천황의 헤이안(平安)시대(794~1192) 말기의 무장이며, 조정의 최고위 신하인 태정대신(太政大臣)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 : 1118~1181)였다. 그는 일본 역사상 무장으로서도 천황가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으며, 칸무 천황 직계 왕족 성씨인 ‘平氏(헤이씨/へいし)’이다. 그러기에 히라노 신사의 히라(平) 자는 칸무 천황 직계 후손인 히라씨(平氏)가 그의 조상신인 백제 성왕 신주 ‘히라노대신(平野大神/히라 씨 가문의 대신)’의 제사를 모시는 헤이씨 가문(平野)의 사당(祠堂)이라는 뜻의 명칭이다. 역시 비타쓰 천황의 왕성 가문은 오오하라노(大原野) 등으로 일본 고대 왕실에서는 왕실 가문을 표기할 때 ‘들 야(野)자’를 써오고 있다.

일본 왕실 법도 『연희식』에 보면 히라노 신사의 성왕 등 백제 왕족 제삿날을 해마다 4월 2일의 ‘히라노 마쓰리’(平野祭)라고 부른다는 것 등 제사에 관한 일체 사항이 상세하게 밝혀져 온다. 금목대신인 성왕에 대한 히라노 신사의 제사 ‘히라노마쓰리’에 관해 국학자 니시쓰노이 마사요시(西角井正慶, 國學院大 교수 : 1900~1971) 씨는 일찍이 다음처럼 해설했다.

“히라노마쓰리(平野祭)는 해마다 4월 2일에 히라노신사에서 거행하는 제사이다. 이 신사는 옛날부터 황실의 존숭(尊崇)을 두텁게 받던 곳으로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 1603~1867) 이후에는 황실의 칙사가 참여하여 봉폐 의식(奉幣 儀式/祭祀) 등을 거행했다. 옛날에는 2월과 11월의 첫 원숭이날(上申日)을 제삿날로 삼았으며, 이 날은 황태자를 비롯해서 친왕(親王/천황의 형제 및 왕자·공주) 등이며 대신과 고관들도 참례하여 성대하게 제사 의식을 거행했다. 또한 옛날에는 4월 10일 거행하는 ‘히라노 사쿠라 마쓰리’(平野櫻祭) 당일에는 천황이 몸을 깨끗이 목욕하며, 칙사는 히라노 신사에 참례하여 봉폐 의식을 지냈고, 말달리기 등의 행사도 거행했다. 현재도 기마행렬이며 고대 의상을 입은 풍류 행렬(風流 行列)이 화려하게 행해지는 등 이것은 옛날 왕도의 꽃놀이 축제이기도 하다”(『연중행사사전(年中行事辭典)』東京堂, 1958).

이와 같이 히라노 신사의 제사 의식은 일본 왕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엄하게 받들어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새로이 인식해야 할 것 같다. 그러기에 일제의 군국주의 치하였던 1940년에도 그 당시 ‘인간신(人間神)’으로 군림했던 히로히토 천황(裕仁天皇 : 1901~1989)이 직접 히라노마쓰리 제사에 참례하고, 몸소 히라노 신사의 경내에다 소나무를 기념식수까지 했다. 살아 있는 인간신 히로히토 천황이 백제 성왕의 신주 앞에서 조상신으로서 제사 모셨던 것은 매우 주목된다.

더구나 근년에 이르기까지도 일본 역대 황태자와 친왕과 대신 등이 히라노 신사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입증하는 것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 곳 제1신전의 신주인 금목대신(히라노대신) 백제 성왕을 비롯한 제2신전과 제3신전의 백제왕들이며 제4신전의 화신립 황태후가 일본 왕실의 혈통을 고스란히 이어 준 일본 왕실의 백제인 조상들이라는 것을 실질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이어 여기서 칸무 천황이 헤이안경(교토)에다 히라노 신사를 건설하고 성왕의 신주를 모셔 제사지내게 된 발자취를 간략하게 검토해 본다. 본래 일본 왕실에서 백제 성왕의 신주를 제사 모시기 시작한 것은 이미 칸무 천황 이전의 나라시대(奈良時代 : 710~784)부터였다. 즉 칸무 천황이 헤이안경에 천도하기 이전까지 본래부터 성왕의 신주를 모시고 있던 사당은 과거의 왕도였던 나라 땅인 나라경(平城京)의 타무라후궁(田村後宮)이었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칸무 천황 이전의 왕들도 이 곳 타무라후궁에다 백제 성왕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려 왔던 것이다. 여기서 굳이 참고로 지적한다면 ‘나라경(平城京,ならきょう)’의 ‘나라(平城,なら)’는 ‘나라’로 읽어야하며, 오늘날 흔히 쓰고 있는 ‘나라(奈良,なら)’라는 한자와 똑같이 이두식의 한자로 옛날부터 두 가지 한자 지명을 썼다( 大槻文彦 『大言海』富山房 1934).

칸무 천황(781~806 재위)은 서기781년에 나라경(平城京)에서 즉위하자 그 해 11월 19일에, “타무라후궁(田村後宮)의 금목대신(今木大神)의 품계(品階)를 종4위상(從四位上)에 서(敍)했다”(『속일본기』). 또한 칸무 천황은 그 후 14년째인 서기794년에 헤이안경으로 왕도를 천도하면서 성왕의 신주를 나라땅으로부터 새로운 왕도 헤이안경으로 옮겨 신축한 사당 히라노 신사로 옮겨 모셔 왔다.

우지타니 쓰토무 (宇治谷 孟,滋賀文敎短大 사학과 교수 : 1918~ ) 씨도 “금목대신의 금목(今木)은 금래(今來,いまき/지금 왔음)로서, 지금 오신 도래계(渡來系)의 신(神)이다. 백제왕족인 칸무천황의 어머니 고야신립황태후(高野<和>新笠皇太后)가 제사를 모셨기에 금목대신을 타무라후궁(田村後宮)에다 모시고 제사 지내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뒷날의 히라노신사에서는 금목신, 구도신, 고개신, 히매신(今木神,久度神,古開神,比賣神)의 4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일본서기』1992)라고 밝혔다.

우지타니 쓰토무 씨도 금목대신은 백제에서 도래한 성왕이라는 사실(史實)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 부기한다면 이와 같은 일본 권위 사학자들의 히라노 신사 백제 성왕 신주에 대한 고증에 반론을 편 일본 학자는 현재까지 한 사람도 없다.

타무라후궁이라는 궁전은 나라시대의 일본 왕실에서 품계 정1위(正一位) 벼슬의 최고위 조신을 지낸 백제 왕족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 : 614~669)의 증손자인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 706~764/성씨를 바꿈)가 최초로 거주하기 시작했던 궁전이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제47대 준닌 천황(淳仁天皇 : 758~764 재위)이 황태자가 되기 이전까지 준닌 황태자와 이 저택에서 함께 살았으며, 또한 그의 파워로서 황태자를 천황으로 등극시켰다.

그 뿐 아니라 제46대 코우켄 천황(孝謙天皇 : 749~758 재위)도 한 때 이 저택에 살았기 때문에 뒷날 이 저택을 존칭하여 이른바 궁전으로서의 ‘타무라궁(田村宮)’ 또는 ‘타무라후궁(田村後宮)’으로 부르게 되었다. ‘후궁’이란 나라궁의 뒷 편에 이 궁이 섰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타무라궁의 직접적인 명칭은 더 뒷날에 왕실 최고의 대납언(大納言) 벼슬의 조신이었던 백제인 출신의 조신이며 최고위의 무장이었던 타무라 마로(田村麻呂 : 758~811)가 역시 이 궁에서 살았던 당시에 붙여진 궁 이름이기도 하다. 그가 살았던 저택에 궁의 이름이 붙여진 것 하나만으로서도 백제 왕족 타무라 마로는 왕에 버금가는 당당한 실권자였음을 살피게 한다. 더구나 이 궁은 장기간 금목대신인 백제 성왕의 사당으로서의 궁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제46대 코우켄천황은 여왕이며 제45대 쇼우무 천황(聖武天皇 : 724~749재위)의 둘째 공주이면서도 황태자로 책봉되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쇼우무 천황은 몸소 백제인 승려 행기 큰스님(行基 : 당시 일본 왕실 최고위직 승려인 대승정에게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 때문에 공주는 부왕 쇼우무 천황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여왕으로 등극했다. 코우켄 천황의 이름은 타카노 히메타카(高野姬尊)이며, 따라서 이 여왕을 타카노(高野) 천황으로도 부른다. 뒷날 화신립 황태후의 백제 왕족 성씨인 화씨(和氏)를 타카노씨(高野氏)로 개성(改姓)한 까닭은 백제 성왕을 모셨던 타무라궁의 타카노 히매타카(高野姬尊)와 백제 성왕과의 혈연관계 때문이다. 즉 타카노씨도 일본 왕실의 백제 왕실 관계 성씨이다.

앞에서 일본 학자들이 한결 같이 진솔하게 증언했듯이 히라노 신사의 ‘주신(主神)’은 백제 성왕이고, 그 밖의 여러 신(神)들은 백제 온조왕(溫祚王)을 비롯하여 비류왕(流王), 초고왕(肖古王) 및 일본 칸무천황의 생모 ‘화신립 황태후(和<高野>新笠皇太后)’라는 것이 일본 사학자들의 정설이다. 더구나 근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역대 황태자와 친왕과 대신 등이 히라노 신사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입증하는 것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곳의 신주인 백제 성왕을 비롯한 백제왕들이며 화신립 황태후가 역대 일본 왕실의 혈통을 이어준 백제인 조상들이라는 것을 실질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백제 성(명)왕과 킨메이 천황의 사실상(史實上)의 존재 고찰

왕실 학자였던 후지와라노 키요스케(藤原淸輔 : 1104~1177)의 저서 『대초자(袋草子 : 1158)』에 보면, 백제 성왕이 일본 칸무천황의 직계 선조임을 시사하는 ‘와카’(和歌)가 밝혀져 있다. 이 책은 고대 일본 왕실에서 역대의 일본왕들이며 왕족과 귀족들이 와카를 노래했던 우타아와세(歌合)의 종합 연구서로 왕실에서 편찬한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바로 이 연구서에는 한 수(首)의 와카가 가장 주목된다. 즉 이 와카를 일컬어 이른바 일본 왕실의 히라노어가(平野御哥)로서 호칭하고 있다. 이 와카는 일본 왕실의 사당인 히라노 신사의 ‘어가(御哥)’라는 특별한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히라가나(ひらがな)로 와카가 쓰여져 있다.

“しらかべのみこのみおやのおほちこそひらののかみのひひこなりけれ.”
이 와카를 한자어로 쓴 것은 다음과 같다.
“白壁の御子の御祖の祖父こそ平野の神の曾孫なりけれ.”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코우닌 천황(光仁天皇)의 어자(御子 : 칸무천황)의 어조(御祖)되시는 조부(祖父/죠메이천황)야말로 히라노신(平野神/성왕)의 증손자이노라.”

코우닌 천황(光仁天皇 : 770~781재위)은 일본의 제49대왕이며, 바로 그는 백제 왕족 화신립 황태후와의 사이에 제50대 칸무 천황을 낳은 생부이다.

일본 왕실에서 노래불러왔던 이 ‘히라노미카’가 담고 있는 참뜻은 부연할 것도 없이 ‘칸무 천황의 증조부는 백제 성왕이다’라는 사실(史實)을 입증하고 있다. 이 히라노미카야말로 칸무 천황의 생부는 백제 왕족인 코우닌 천황이며, 생모도 역시 백제 왕족인 화신립황태후라는 사실도 밝혀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 제50대 칸무 천황은 완벽한 백제 왕족을 친부모로 두고 태어났음을 이 히라노미카가 입증한다.

히라노신이 백제의 성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이 『대초자』의 히라노미카를 통해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서기1158년에 『대초자』가 저술이 된 지 약 5백여년이 지난 후, 옛날의 『대초자』의 전본(傳本)에서 ‘히라노어가’에 대하여 덧붙여 쓴 해설문을 읽어보면 더욱 주목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즉 서기1648(慶安元年)년에 세이진(淸尋)이 『대초자』를 베껴 필사했다는 이 전본에 실린 히라노어가의 해설문은 다음과 같다.

“今案白壁ハ光仁天皇也其曾祖父ハ舒明天皇其曾祖父ハ欽明天皇也是平野明神云了.”

“지금 생각건대 시라카베(白壁)는 코우닌 천황(光仁天皇)이며, 그의 증조부는 죠메이천황(舒明天皇)이고, 또한 그의 증조부는 킨메이 천황(欽明天皇)이니라. 이 분을 히라노명신(平野明神)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라.”

즉 금목신(今木神)이며 히라노신(平野神)은 백제 성왕의 신주라는 것이 일본의 권위 학자들의 공통된 연구 결과이다. 그런데 1648년에 쓴 『대초자』 전본의 해설문에서는 “히라노신(平野神)은 킨메이 천황의 신주”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견해는 사실상(史實上) 일치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즉 ‘백제 성왕은 일본 킨메이천황과 동일 인물’이라는 왜국왕의 겸임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히라노명신인 백제 성왕은 일본의 킨메이천황이다’라는 확증이다. 이와 같이 ‘백제 성왕은 일본 킨메이 천황을 겸임했다’는 것을 17세기 『대초자』 전본이 거듭 입증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 왕실 문헌 이외의 칠지도(七支刀)와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의 금석문에 의한 고고학적인 고찰도 간략하게 곁들인다. 백제 제20대 비유왕( 毗有王)과 세자(뒷날의 개로왕)가 왜나라를 다스리던 백제 왕족 후왕(侯王)인 오우진 천황(應神天皇 : 5C경)에게 서기429년에 보내준 백제 왕실 ‘칠지도’가 있다. 왜의 제15대왕으로 기사화되어 있는 오우진 천황(『일본서기』의 서기270~310년간 재위는 역사 날조라는 것이 통설이며, 5C경의 백제인 왜왕임)은 ‘백제 비유왕이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길이 74.9cm)를 받은 백제의 후왕(侯王)이다’라는 것이 현존하는 칠지도(일본 나라현 텐리시 이소노카미신?lt;石上神宮> 소장, 일본 국보)에 새겨져 있는 음각 글씨로서 입증된다. 백제 왕실에서 이 칼에 새긴 한자어 문자는 다음과 같다.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 正陽造百練鐵七支刀 以百兵 宜供供候王 作(칼의 앞면)”과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慈王世子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칼의 뒷면).”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태화4년(서기429년)5월11일 병오날 정양 때에 무수히 단금질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어 모든 적병을 물리치도록 후왕에게 주노라(앞면)”와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및 세자(뒷날의 개로왕, 455~475 재위 : 필자 주)는 성스러운 말씀으로써 왜왕을 위해 만들었도다. 후세에 까지 잘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뒷면)”고 새겨져 있는 금석문이다.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 1927~ ) 씨는 이 칼을 직접 3번이나 조사하고 쓴 연구론에서 “그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보내준 것을 밝힌 것이며, 칼에 새긴 글투는 윗분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서(下行文書)의 형식의 명문이다”(上田正昭 『倭國の世界』1976)고 단정했다. 즉 백제 비유왕이 왜나라에 건너 가서 왜를 지배하고 있던 백제의 후왕 오우진 천황에게 왜나라를 잘 지키면서 백제의 속령으로서 번창할 것을 하명한 것이다.(상세한 내용은 졸론 「일본 천황가 연구(연재 제4회)」 『月刊朝鮮』1998.4월호와 졸저 『일본문화사』서문당,1999 참고).

도쿄대학 사학과 교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 1917~1983) 씨도, 거듭 지적하자면 그 당시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를 전해 받은 왜왕 오우진천황은 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천황 가문)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 온 일본 이주자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건너 온 많은 사람들을 칸무 천황이 조정에 등용시켰던 것”(『日本國家の起源』 1960) 이라고 밝힌 것도 진솔한 연구였다고 본다. 그런 사실에 관한 와세다대학(사학과 교수) 미즈노 유우(水野 祐 : 1918~2000) 씨는 “오우진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 천황은 백제국 왕가의 정복왕조이다”(『日本古代國家の形成』1978)라는 연구가 저명하다.

오우진 천황의 왕자가 닌토쿠 천황이며, 근자에는 고대시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우(石渡信一郞/東京都立千歲高校 敎諭 : 1926~ )씨의 저서 『백제에서 건너 온 오우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2001)이 사학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시와타리씨는 그의 저서로서, “오우진릉(應神陵)의 피장자는 5세기 후반에 건너 온 백제의 곤지왕자이다. 그는 5세기말에 백제계 왕조를 수립했다”고 단정했다.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橋本市)에는 오우진천황의 신주(神主) 하찌만신(八幡神)을 제사 모시는 스다하찌만(隅田八幡) 신사가 이름 높다. 특히 이 곳 스다하찌만신사에는 모두 47글자가 새겨 있는 청동 구리쇠로 만든 백제 왕실의 ‘스다하찌만신사화상경(隅田八幡神社畵像鏡)’이 있어서 더욱 이름 높다. 이 고대 청동 거울이 이 곳 백제신을 모신 하찌만신사에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오우지 천황 하찌만신과 백제 왕실과의 밀접한 혈연관계를 추찰케 한다.

이 스다하찌만 신사에 고대 백제 왕실에서 보내준 인물 그림들이 함께 새겨진 화상경이 전해오던 것을 발견한 것은 고고학자 타카하시 켄지(高橋健自 : 1871~1929) 씨에 의해서였다. 타카하시 켄지 씨는 이 인물화상경을 발견하자, 그 발자취를 담아 1914년 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그로서 이 인물화상경에 새겨진 글씨의 판독으로, 백제왕이 일본을 지배한 사실을 입증하는 금석문이 일본 사학계에 알려졌다. 타카하시 씨가 이름붙인 이른바 인물화상경은 6세기 초 백제 왕실에서 만들어 왜왕에게 보내준 청동 거울이다. 이 청동 거울(지름 19.8cm)의 금석문에 의하여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왜의 제26대 케이타이천황(繼天皇 : 507~531재위)이 친형제 사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이 거울에 새겨진 원문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 念長壽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銅二百作此鏡.
서기503년 8월10일,대왕<백제 무령왕 : 필자 주>시대, 남동생인 왕 왜국의 케이타이천황(오호도 : 필자 주)이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살 때에, 사마(斯麻/백제 무령왕의 이름 : 필자 주)께서 아우의 장수(長壽)를 염원하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두 사람을 파견하는 데,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상세한 것은 졸저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2000. 참고).

그런데 처음부터 타카하시 켄지 씨는 이 거울의 제작 연대를 가지고 역사 왜곡을 하여 말썽을 일으켰다. 그는 계미년(癸未年)을 서기263년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거울을 만든 무령왕의 시대의 계미년은 서기 503년이다. 이 거울에 새겨진 글자 그대로 ‘사마(斯麻)’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타카하시 켄지 씨가 엉뚱한 주장을 했던 이유가 있다. 일본 케이타이천황이 무령왕의 친동생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연대를 240년(60갑자 4바퀴)이나 윗쪽으로 끌어 올린 것이었다. 그와 같이 엉뚱한 연대 조작을한 타카하시 씨가 작고한 지 42년이 지난 1971년7월에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의 묘지석(墓誌石)에 의해 사마라는 무령왕의 이름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고 그의 역사 조작은 들어났다.

일본을 최초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인 오우진 천황 시대부터라는 것은 오늘의 통설이다. 이 사실을 고증하는 일본 오우진천황의 전신 초상화도 큐슈의 우사하찌만궁(宇佐八幡宮/오우진천황 신주를 최초로 봉안한 사당) 신전에 하찌만신(八幡神)으로서 봉사(奉祀) 되어 있다. 이곳의 하찌만신 고대 초상화를 보면 오우진천황은 도포를 입고, 놀랍게도 머리에는 한국의 옛날 겨울철 방한모인 가죽을 댄 기다란 ‘남바위’ 모자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남바위는 일찍이 서기 5세기 경에도 백제 등 한국에서 방한모로 썼던 귀중한 복식이었음을 추찰케 한다.

일단 여기서, ‘히라노어가’의 <해설문>이 내세우고 있는 제49대 코우닌 천황의 윗대의 제29대 킨메이천황(欽明天皇/백제 성왕) 당대부터, 왕통 직계 가보를 아랫 쪽으로 차례대로 어떤 인물들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1)킨메이천황(539~571 재위)은 서기 539년에 즉위한 것으로 『일본서기』가 엮고 있다. 그러나 일본사학 교수 아오키 카즈오(靑木和夫)씨 등 52명이 함께 편집·집필한 『일본사연표』(日本史年表 日本歷史學硏究會編·岩波書店,1968)에 의하면 킨메이 천황의 즉위년은 서기 531년이다. 이 해부터 성왕은 킨메이 천황을 겸임하기 시작했다. 즉 『일본서기』 기사 보다 8년 윗대에 이미 킨메이 천황은 즉위한 것으로 『일본사 연표』에 표기되어 있다. 그 뿐 아니라 서기538년에 백제 성왕이 왜국에다 불상과 경론(經論)을 보내와 왜국에 불교가 정식으로 전해졌다고도 밝히고 있다.

즉 『일본서기』는 킨메이 천황의 즉위년을 자그마치 8년이나 뒤로 밀어 내렸으며, 더구나 백제 불교의 일본 포교도 장장 14년이나 뒷쪽으로 끌어 내린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백제 성왕의 왜왕 겸임을 은폐하기 위한 철저한 역사 날조이다.

(2)킨메이천황의 제2왕자는 비타쓰(敏達)천황(572~585 재위)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비타쓰 천황이 ‘백제 대정(大井)땅에다 궁’을 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부상략기』(扶桑略記, 13C 불교 왕조실록)에서는 왕궁명이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으로 명기되어 있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할 사항은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왕실 족보격인 『신찬성씨록』 이라는 왜왕실의 씨족분류본( 氏族分類本/총31권/皇別,神別,諸蕃)에서 보면 제30대 천황인 “비타츠 천황은 백제 왕족이다”라고 못 박고 있다. 즉 대원진인(大原眞人>이라는 백제인 일본 왕족의 출신 성분이 기술된 『신찬성씨록』의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뚜렷하다.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대원진인의 출신은 비타츠라는 시호를 가진 백제 왕족의 손자이노라).”

대원진인이 백제 왕족이라고 한다면 대원진인의 할아버지인 비타쓰 천황은 두 말할 나위 없는 백제왕족이다. 따라서 비타쓰 천황의 아버지인 성왕 즉 킨메이 천황도 엄연한 백제왕족이다. 『신찬성씨록』에서의 백제왕이란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왕족을 가리킨다. 그것은 일본 역사 기록에서 정설임을 지적해 둔다. 또한 ‘대원진인’의 진인(眞人)이란 그 당시 일본 왕족(황족)으로서 여덟 가지의 성(八色の姓)들 중에서 제1위의 최고위 왕족의 성씨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대원진인’은 일본 왕실에서 으뜸가는 최고 가문의 왕족이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귀중한 『신찬성씨록』의 전본을 보존하고 있는 역사학자는 교토대학 사학과 명예 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 1927~ ) 박사이다. 필자는 지금부터 2년전(2004.7. 11)에 직접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댁에서 그 『신찬성씨록』을 살펴보았다. 이 당시 우에다 박사는 필자에게 “비타쓰 천황은 백제왕족입니다”라고 확언했다. 이 자리에는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의 수제자인 저명 사학자(京都産大. 고대사 교수)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씨도 배석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최근에 우에다 박사가 『신찬성씨록』에 관해 필자가 강연(「일본고대사의 문제점의 새로운 규명」 2005.11.18 제37회 국제학술심포지움/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주최)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필자에게 보내준 친필 서신의 내용이다.

“백제왕(『신찬성씨록』인용)은 백제 의자왕의 핏줄로 연결되는 백제왕씨(百濟王氏)인 백제왕족이라고 봅니다. 진인(眞人)은 지적하신대로 왕족의 여덟 가지 신성(新姓) 중에서 최고의 왕성입니다.”(2006.1.15.).

비타쓰 천황이 통치하던 고장인 그 당시에 나라(奈良)땅의 지명이 백제였다는 사실은 『일본서기』등 모든 역사서에 밝혀져 있다. 거듭 밝히자면 제30대 비타쓰 천황이 나라(奈良)땅에서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지었고, 그의 친손자인 제 33대 죠메이(舒明) 천황도 나라땅의 “백제강(百濟川) 옆에다 백제궁(百濟宮)을 짓고,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세웠으며, 백제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백제대빈’(백제왕실 3년상)으로 장사를 지냈다.”(『일본서기』720)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부연할 것조차 없다고 본다.

『신찬성씨록』에 대한 서지학적 연구는 세이죠우대학 사학과 교수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 씨의 대저로 평가되는 『신찬성씨록 연구(新撰姓氏錄硏究,1970)』가 지금까지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에키 아리키요 씨는 이 책을 칸무 천황이 왕자인 만다친왕(万多親王)에게 편찬토록 칙명한 가장 큰 목적은 “율령체제’(律令體制) 가 흔들리는 것을 미연에 막아보자는 한 방지책에서 편찬시켰다”고 한다. 즉 왕실에서 법률과 법령을 정하여 왕권의 흔들림 없는 유지를 위한 왕·귀족들의 신분 확립에 역점을 두었던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칸무 천황의 율령체제 동요의 방지책으로 『신찬성씨록』이 다른 어떤 왕도 아닌 칸무천황의 칙령에 의해서 편찬하게 된 배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칸무 천황이 칙명으로 지시한 “한일 동족관계 서적의 분서 사건(焚書事件)”이다. 즉 백제 왕족인 코우닌(光仁) 천황과 백제왕족 화신립 황태후를 부모로 하여 태어난 칸무 천황 시대의 한일 동족 관계의 역사책 분서는 다름 아니고, “옛날에 일본은 삼한(三韓 : 마한, 진한, 변한)과 동종(同種)이었느니라고 하는 책이 있어서, 그 책을 칸무 천황 어대(御代)에 불태워버렸도다” 라고 하는 것을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帛親房 : 1293~1354)가 밝힌 바 있다.

칸무 천황은 그 당시 일본 각지의 관가(官家)에 대해 칙명으로 한일 동종(韓日同種) 관계의 모든 책자들을 불태워서 분서시켰다(『홍인사기(弘仁私記)』이 엄청난 역사 기록인 『코우닌사기』는 그 뒷날 칸무 천황의 제2왕자였던 사가천황(嵯峨天皇 : 786~842)의 조칙(詔勅)에 의해 코우닌 연간(弘仁年間 : 810~823)에 쓰여진 일본 왕실 최초의 강서(講書)이다.

이것만을 보더라도 백제 왕족 칸무 천황 이래로 일본 왕실이 ‘백제 혈통’이라는 데서 일찍이 ‘야요이시대’(BC·3~AD·3) 이전부터 일본 열도에서 먼저 살아 온 일본 선주민(先住民)들의 백제인 왜왕실에 대한 반항이 각지에서 적지아니 발생했던 것을 쉽게 살피게 한다.

그 당시 특히 가장 강력한 반정권 저항 집단은 일본 열도의 동북지방으로 계속하여 남하하고 있었던 화태(樺太/사할린 섬)와 북해도(홋카이도) 쪽의 아이누족(에조/えぞ·えみし)대집단이었다. 이들은 동북 지방 등의 남방 계열(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에서 해류를 타고 떠올라온 종족들) 선주민들과 손잡고 오사카(大阪)며 나라(奈良/平城) 지역 중심의 백제 계열의 야마토 정권(和政權)을 몹시 괴롭혀 왔던 것이다.

특히 그들 동북지방의 대규모 아이누족 에조 집단의 저항을 강력하게 격퇴시킨 역대의 명장들은 모두가 백제 왕족들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간단히 밝혀 둔다. 즉 왜왕실의 법무장관인 ‘형부경(刑部卿)’을 지낸 동북 지방 태수(太守)였던 쿠다라 케이후쿠(百濟敬福/백제 경복 : 698~766)을 비롯하여, 앞에서 타무라궁에 살았다는 왜왕실 최초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된 백제 왕족 타무라 마로(田村麻呂 : 758~811)를 들 수 있다.

특히 칸무 천황 시대에 왕도 나라땅에 대공세를 펼쳐 왔던 에조 대집단을 완전하게 파멸 시켜 정복한 것이 타무라 마로였기 때문에 그는 항상 칸무 천황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 최고의 장관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칸무 천황이 두 번씩이나 왕도를 옮겨 천도하며, 그의 세 번째 왕도가 된 헤이안경에 옮겨와서야 마침내 국가의 안정된 자리가 굳건히 잡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제인 정이대장군 타무라 마로의 강력한 무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 후 칸무 천황의 아들 시대에 이르러서도 타무라 마로의 막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마침내 왕실에서는 대망의 『신찬성씨록』을 완성하는 등 율령 제도의 강화에 힘쓸 수 있었다. 거듭 밝히자면 고대로부터의 에조 민족 등 일본 선주 민족들의 백제인 왕실에 대한 크고 작은 저항을 백제인 무장들은 강력하게 물리치며 그들을 탄압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선주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신찬성씨록』에는 왜왕가의 혈통이 백제 왕족들로부터 비롯된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것이 제30대 비타쓰 천황의 백제 왕족 출신 기사이기도 하다.

그 뿐아니라 왕실 법률인 『정관식(貞觀式, 서기, 871년 성립)』이며 『연희식』에 이르면 이 왕실 법도에서는 놀랍다고 할까, 대대로 왜왕들은 오로지 한국의 고대 천신(天神)인 <백제신>, <신라신>, <가야신>(百濟神, 新羅神 伽倻神)에 대한 왕실의 제사 의식(祭祀 儀式)이 맨 앞줄에 당당하게 명문화 되어 있다는 사실(史實)에 우리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게 된다. 즉 그것은 연희식의 최초의 항목인 제사에 관한 신기(神祇) 제1(第一)에 다음처럼 법도가 정해져 있음이다.

“宮內省坐神三坐, 月次祭 新嘗祭, 園神社, 韓神社二坐. (왕실에 모신 3신주, 매달 제사와 신상제, 신라신사당, 백제신, 가야신 사당)”

여기서 정하고 있는 월차제(月次祭)는 일본 왕실의 안녕을 위해 매월 제사를 모시는 것이며, 신상제(新嘗祭)는 해마다 11월23일에 한번 거행하는 가장 큰 제사이다. 칸무 천황은 교토 헤이안경 천도 때 히라노 신사와 별도로 두 곳의 사당을 왕궁(헤이안궁) 안에다 세운 사실도 우리가 살필 필요가 있다. 즉 왕궁 안의 북쪽에는 한신사(韓神社, 카라카미노야시로)와 남쪽에는 원신사(園神社, 소노카미노야시로)를 세웠다는 것이 연희식에 밝혀져 있다.

연희식 에 의하면 한신사에서는 두 분의 한신(韓神/카라카미,からかみ)의 신주, 즉 백제신과 가야신을 모시고, 원신사에서는 한분의 신라신인 원신(園神/소노카미,そのかみ)의 신주를 모셨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며, 이 세 분의 신주를 가리켜 ‘왕궁안에 계신 세분의 신주’(宮內省坐神三坐)라고 최고 위에 모셔 놓고 하는 것을 주목케 한다. 더구나 이 세분의 신주들에 대해서만 천황이 직접 제관(祭官)들을 거느리고 제사 모시는 일이다. 일본 왕실 관계의 신은 모두 285명의 신이 있으나, 천황이 몸소 직접 제사 모시는 것은 이 세분의 한국 천신뿐이라는 것이 연희식에 기록되어 있다.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上田正昭 博士)는 그의 연구론 「神樂の命脈」1969)에서, “한신(韓神)은 백제계(百濟系)의 신(神)이고, 원신(園神)은 신라계(新羅系)의 신이다. 이 신들은 함께 일본으로 도래하여 온 신이다” 라고 단정하고 있다.

즉 『연희식』에 등장하는 3분의 신(神三坐) 중에서 두 분의 한신(韓神)과 신라신(園神/원신) 한분을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가 지적하고 있다. 필자는 원신은 신라신에 동의하나, 한신 두분 중에서 한분은 백제신이며 다른 한분은 가야신으로 보고 있다. 이 것에 관하여는 고를 달리하여 쓰기로 한다. 여하간에 중대한 점은 일본 고대 왕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천황이 직접 한국신 세분 만을 모시고 제사 지내오고 있다. 칸무 천황이 직접 왕궁(平安宮)의 신전(園神社/韓神社) 안에서 한국신 제사를 거행하여 왔다는 것이 역시 『연희식』에 밝혀져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神話) 기사에 있어서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이야기(承)를 보면 그것에는 조선 신화와 유사한 요소가 적지 않다. 그런 사실은 고대에 있어서의 한일 관계를 생각해볼 때, 서로간의 공통된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은 중시해야 할 점이다…『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의 마무리에서 보면 전승의 근저에 있어서 그 이야기의 결론이 왕실의 궁정신화(宮廷神話)로서 결실(結實)되었을 때에, 어찌하여 그런 형(形)을 취했는가. 그것이야말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에 접근하는 유력한 ‘열쇠 하나’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된다”(上田正昭 『古代再發見』 角川書店 1975) 라고 우에다 마사아키 씨는 지적한다.

여기서 ‘유력한 숨겨진 열쇠’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대 한국과 왜국의 왕실 서로는 곧 하나의 공통분모로 이루어진 똑같은 핏줄을 숨길 수 없는 하나의 혈족이었다는 사실을 비유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도쿄의 황거(천황궁)에서는 천황이 직접 천황궁 안의 신전안에다 한신들을 모시고 해마다 11월 23일 밤에 신상제라는 제사를 몸소 지내고 있다.

필자는 일본 천황가가 제사 지내 온 고대 한국신의 제사 내용을 고증하기 위해 일본 도쿄의 천황궁인 황거(皇居) 안을 직접 방문(2002년 7월 11일)한 바 있다(EBS교육방송 ‘일본황실제사의 비밀’ 2002. 8. 15, 오후 8 : 30~9 : 20방영).

필자는 천황궁의 모든 제사를 항상 지휘 관장하는 아베 스에마사(安倍季昌, 1943~ /宮內廳式部職樂部 樂長補 )씨와 궁내청 직악부에서 장시간 면담했다. 아베 스에마사 씨는 지금의 일본 아키히토천황(明仁, 1989년 등극~)이 몸소 참석하는 천황궁 안 신상제(新嘗祭)며 한신제(韓神祭) 등 제사의 ‘어신악’(御神樂’/제사 축문 노래)에서, 하늘의 한국 천신을 불러 모셔오는 초혼가(招魂歌)로서 한신이라고 하는 제목의 축문이 직접 낭창(朗唱)되고 있음을 필자에게 진솔하게 밝혔다.

아베 스에마사 씨는 현재의 일본 국왕 아키히토천황도, 또한 고대로부터의 궁중 제사에서처럼 ‘원신(園神)’ 및 ‘한신’의 제사에도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 사실은 이세신궁(伊勢神宮,미애현 이세시)의 공보 담당 신관(神官)인 요시카와 타쓰미(吉川 辰) 씨도 확언했다(앞 EBS교육방송 ‘일본황실제사의 비밀’).
(3)압판언인대형황자(押坂彦人大兄皇子)는 비타쓰 천황의 왕자이며, 죠메이(舒明) 천황의 생부이다.

(4)죠메이(舒明) 천황은 『일본서기』에 상세한 기사가 말해주듯이 비타쓰 천황의 손자이다. 비타쓰 천황이 일본 역사상 최초로 나라땅에다 백제대정궁을 지었던 백제 터전의 현재의 행정 지명 조차도 아직은 백제(百濟/奈良縣北葛城郡廣陵町百濟))이다. 바로 그 고장에서 그의 친손자인 죠메이 천황도 조부인 비타쓰 천황의 뒤를 이어 역시, 다음처럼 백제궁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밝혀져 있다.

“(舒明天皇十一年)秋七月,詔曰,今年,造作大宮及大寺. 則以百濟川側爲宮處.是以,西民造宮,東民作寺. 十二月,於百濟川側,建九重塔.十二年十一月,徙於百濟宮.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酉,天皇崩于百濟宮. 丙午,殯於宮北.是爲百濟大殯.”

“죠메이 천황 11년 가을7월(음력)에 왕이 조칙을 내리기를 금년에는 대궁과 대사를 짓토록 하라. 즉 백제강옆에 궁을 세우느라 강의 서쪽 백성들은 궁을 세웠고, 동쪽 백성들은 절을 세웠다. 12월에는 백제강 옆에 9중탑을 세웠다. 왕12년 10월에 백제궁으로 이사했다. 왕13년 겨울철 10월9일에 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하셨다. 18일에 궁의 북쪽에 가매장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이라고 한다.”

더구나 이 백제 지역에는 그 무렵 백제강(百濟川/쿠다라가와)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 『일본서기』에도 기사가 보이나, 이 기사에서 말하는 백제강(百濟川)은 지금의 나라현 키타카쓰라기군 코우료우정 쿠다라(奈良縣北葛城郡廣陵町百濟) 지역을 흐르는 강이다. 그러나 이 백제강이라는 명칭은 일제 치하에 없애버렸고, 현재의 강 이름 ‘소가강(曾我川)’으로 바꿔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대빈(百濟大殯)이란 본국 백제 왕실의 ‘3년상 장례 의식’이다. 즉 국왕이 서거했을 때에 왕궁의 북쪽에다 빈궁(殯宮)을 설치하여 가묘(假墓)를 만들고, 3년째 되는 해에 정식으로 왕릉을 만들어 안장한다. 『일본서기』에 보면 실제로 죠메이 천황이 서기 641년 10월9일에 서거한 지 3년만인 서기 643년 9월6일에, 죠메이 천황의 시신을 오시사키릉(押坂陵,지금의 櫻井市 大字忍坂字段の塚)에 안장한 기사가 전한다.

또한 본국 백제왕국에서의 백제대빈의 실례가 고고학적으로 고증되는 실례는 지금의 충남 공주 땅 무령왕릉에서 발굴(1971년 7월)된 무령왕의 묘지석이 입증하고 있다. 이 묘지석에는 “사마왕(斯麻王/무령왕의 이름)은 62세 되는 계묘년(서기523년) 5월30일에 서거했다. 그 후 3년만인 을사년(서기525년) 8월12일에 대묘(大墓/현재의 충남 공주 무령왕릉)에 안장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일본의 백제 계열의 왜왕실에서도 왕이 승하하면 백제대빈 3년상 장례를 지냈던 것을 입증하는 것이 죠메이 천황의 『일본서기』 기사이다. 그와 같이 왜왕실의 3년 동안의 백제대빈을 치룬 그 사실 하나만 살피더라도 모름지기 왜국이 백제의 후국(侯國)이었다고 하는 칠지도 금석문과 ‘인물화상경’의 고증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고 본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해 둔다. 학승 아자리 코우엔(阿者梨皇圓, 13C)이 저술한 일본 불교왕조실록 『부상략기』에 의하면 죠메이 천황이 승하한 다음 해인 서기 642년 2월조에 보면 놀랍게도 “임인 2월에 백제사신이 내조하여 선제의 상을 조문했다”(壬寅二月 百濟使來朝 弔先帝之喪)라고 하는 기사가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이와 같은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즉 그 당시 백제왕국 의자왕(義慈王 : 641~660재위)의 조문 사절 사신이 왜왕실에 찾아 가서 “선제(先帝)의 상(喪)을 조문했다”고 하는 것은, 왜의 백제계 왕인 죠메이 천황은 백제왕국의 의자왕보다 왕실 가계상으로 그 서열이 윗대라는 뜻이다.

백제 의자왕은 죠메이천황의 왕자인 텐찌 천황(天智天皇 : 661~667 재위)과 사촌 형제간이다. 즉 서거한 죠메이 천황과 의자왕은 숙질간이다. 따라서 백제왕실에서 건너간 의자왕의 조문사(弔問使)는 의자왕의 ‘선제의 상’ 을 조문했던 것이다. 즉 죠메이 천황은 의자왕의 부왕(父王)인 백제 무왕(武王 : 600~641)과 사촌형제간이다. 앞에 예시한대로 일본 고대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 박사가 필자에게 보내준 친필 서한에서 “일본 왕실은 의자왕의 계열”이라고 지적한 것과도 부합되는 사실이다.

『신찬성씨록』 연구 학자 사에키 아리키요(세이죠대학 사학 교수) 씨는 “죠메이 천황은 재위 당시에 백제천황(百濟天皇)으로 호칭되었을 것이다”(『新撰姓氏錄』 「硏究篇」 吉川弘文館 1970)고 지적한 바 있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5)죠메이 천황의 태자였던 텐찌 천황은 660년, 백제가 망하던 시대인 663년 8월에 일본 큐슈땅으로부터 모국 백제를 살리기 위해 그 당시 왜왕실에서 살고 있었던 백제의 풍장왕자(豊璋王子)와 함께 5천여명의 왜군 병사들을 백제땅의 백촌강(白村江)으로 보냈으나 전멸당했다. 당시 모두 27,000명의 일본군이 백제로 원정했다가 패전하고, 그들은 9월에 백제 유민들과 함께 일본땅으로 돌아왔다(『일본사연표(日本史年表)』 岩波書店 1968).

665년, 텐찌 천황은 일본으로 건너 온 백제 유민 400여명을 오우미(近江/神崎)땅에 살도록 모두에게 토지와 주택까지 친히 마련해주었는가 하면, 667년 3월에는 텐찌 천황 스스로도 백제 유민들에게 새 터전을 마련해준 오우미(近江)땅으로 왕궁을 천도(大津宮)한 것(『일본사연표』 岩波書店 1968)을 필자는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텐찌 천황이 “왕도를 오우미땅에 옮겼다. 이 때 천하의 백성들은 천도를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비웃고 비판하는 자가 많았다. 얄궂은 풍자의 노래(童謠)가 널리 퍼졌다. 낮이나 밤이나 여러 곳에서 화재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일본서기』)고 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것은 일본 선주민들의 방화사건 등은 텐찌 천황의 백제 유민들에게 대한 지극한 우대에서 야기된 커다란 불만의 폭발이었다. 왜냐하면 텐찌 천황은 오우미에로의 천도 직전인 서기666년11월, 겨울철에도 백제에서 건너 온 유민들이,

“백제인 남녀 2천여명을 동국(東國)에서 살도록 자리를 잡아주었다. 백제인들에 대하여는 승속을 따지지 않고 3년 동안이나 국비(國費)로서 식량을 베풀어 주었다”(『일본서기』)고 하는 사실에서이다. 텐찌 천황의 백제 유민들에 대한 이와 같은 끔찍한 특별 우대 정책은 그의 오랜 모국에 대한 철두철미한 애정과 일본에서의 백제 계열 왜왕실의 든든한 유지 정책이었음을 살피게도 한다. 텐찌 천황의 오우미 천도와 백제 유민 특별 우대에 관한 그동안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의 정설은 텐찌 천황이 오랜 백제계 왜왕실의 옛터전인 나라땅 “아스카(飛鳥) 지방 구세력들의 거센 반항을 회피하여 인심을 일신한다”(『일본서기』補注27-九,岩波書店 1979)는 데에 있었다고 한다.

(6)시키황자(施基皇子)는 텐찌 천황의 왕자이다.

(7)코우닌 천황은 시키황자의 제6왕자이다. 백제 무령왕의 직계 후손으로서 왜왕실에서 “백제조신(百濟朝臣)”이라는 관명으로 벼슬하던 화을계(和乙繼, 8C)의 딸 화신립(和新笠 : 생년미상~789)과 코우닌 천황(光仁天皇)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왕자가 다름 아닌 칸무 천황이며, 둘째왕자는 사와라친왕(早良親王)이다. 앞에서 예시한 후지와라노 키요스케 저서인 고대 왕실 문헌 『대초자』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시라카베왕(白壁王/光仁천황)’이다.

(8)칸무 천황은 서기781년에 즉위하자 그 해 11월 19일에, “타무라후궁(田村後宮)의 신주인 금목대신(今木大神/今木神)을 종4위상(從四位上)에 서(敍)했다”고 앞에서 지적했드시 백제 성왕의 신주를 극진하게 모시기 시작했다. 타무라궁에다 신주로서 모신 성왕의 금목대신에 관해서, 우지타니 쓰토무(宇治谷 孟,滋賀文敎短大 사학과 교수) 씨는, “금목대신(今木大神)의 금목(今木)은 금래(今來/いまき/지금 왔음)로서, 지금 오신 도래계(渡來系)의 신(神)으로 생각된다. 백제 왕족인 칸무천황의 어머니 타카노 니이가사 황태후(高野<和>新笠皇太后)가 제사를 모셨기에 금목대신을 타무라후궁에다 모시고 제사 지내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뒷날의 히라노 신사에서는 금목신, 구도신, 고개신, 비메신(今木神,久度神,古開神,比賣神)의 4좌를모시고 제사지낸다”(『속일본기』 講談社 1995)라고 밝혔다.

여기서도 금목대신이 도래한 백제 성왕이라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이렇듯 백제 성왕의 신주를 일본왕실에서 왕실사당에다 모시고 제사지내왔다는 것은 백제 성왕은 왜나라에서 살다가 승하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더욱이나 성왕의 사후 신명(神名)을 일본 왕실에서 금목대신으로서, 최고의 대신(大神)이라고 하는 경칭(敬稱)까지 올려 존칭하면서 그 당시의 왕도 나라땅의 타무라 후궁에서 왕실 제사를 모셔 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일본 역사에서 대신으로 존칭한 신은 신화에 등장하는 개국신이라는 소위 천조대신(天照大神) 등이 대표적인 호칭이며, 그 이후 실존 인물의 신주로서는 백제 성왕의 금목대신이 유일한 대신 칭호라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그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감안할 때 백제 성왕의 일본 내에서의 위상은 최고위 정복왕으로서의 중대한 역사적 발자취를 능히 간주할 수 있지 않은가 한다. 그것은 성왕의 일본에 대한 불교 포교라고 하는 차원을 초월하는 군왕으로서의 절대 권력자의 위상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백제 성왕의 신위를 최상의 경칭인 금목대신으로서 제사모셨던 왕도 당시의 나라(平城/나라/なら)땅의 타무라후궁(田村後宮)에 살았던 주인공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당시 권세가 칸무 천황에 버금가는 정이대 장군(征夷大/서기797년에 임명됨) 타무라마로였다.

그의 손짓에는 “하늘을 날던 새도 떨어졌다”는 속설이 따르던 당대 제일의 왕실 무장이었다. 그는 백제 왕족으로서 그의 조상은 일본 역사에 이름난 아지사주(阿知使主)이다( 三省版 『인명사전(人名辭典)』 1978). 아지사주는 백제 왕자 “왜한직(倭漢直) 벼슬의 아직기(阿直岐 : 4C~5C)의 선조로서 오우진 천황 20년 가을에 아지사주는 그의 아들 도가사주(都加使主)와 함께 17현(縣)의 부하들을 이끌고 왜땅으로 건너 왔다”(『일본서기』)는 백제 왕실의 절대적인 지배 세력 왕족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백제인 계열의 일본 왕실에서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홍인사기(弘仁私記)』).

타무라마로는 특히 일본 고대사에서 가장 말썽스러운 동북지방의 침입 세력인 아이누 족 등의 에조 정벌에 눈부신 공로를 세움으로써 조정의 최고위 대신으로서 벼슬이 대납언(大納言)에까지 올랐다. 그는 칸무 천황에 뒤이어 헤이제이 천황(平城天皇 : 806~809) 및 사가 천황(嗟峨天皇 : 809~823)시대에도 잇대어 왕실 최고위 대신으로서 평생 영화를 누린 백제 왕족이었다. 그의 외동딸 하루코(春子)는 칸무 천황의 후궁이었으며, 하루코 왕후는 카도이 왕자(葛井親王 : 800 ~850/兵部卿,常陸太守 등 역임)를 낳았다.

타무라 마로의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는가 하면 그는 당시 자기 처의 병이 치유되도록 왕도 헤이안경에다 왕실이 아니고는 감히 누구도 세울 수 없었던 키요미즈테라(淸水寺) 사찰을 스스로 세웠을 정도이다. 더구나 오늘의 교토의 명찰 키요미즈테라 건물의 대부분은 뒷날 에도막부(江戶幕府) 제3대 쇼군(將軍)으로 이름났던 토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 1604~1651)가 낡아진 사찰을 재건할 정도의 명찰이다(石川晴彦 『京都紀行』主婦の友社, 1988). 그의 생부인 제1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1542~1616)도 그의 선조가 칸무 천황의 후손인 세이와 겐지(淸和源氏) 가문으로서 백제 왕족이다. 그러기에 제3대 쇼군 토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키요미즈테라 수호에 앞장섰던 것이다.

타무라마로가 사망했을 때 왕실에서는 그의 묘지로서 우지군(宇治郡)에다 3정보(町步)의 거대한 토지를 하사했고( 石川晴彦 『京都紀行』主婦の友社, 1988), 현재 이 묘역(京都市山科區勸修寺東栗栖野町)의 묘표(墓標 / [征夷大將軍/正二位左大臣/坂上田村麻呂公墓])에는 타무라 마로의 돌비석이 우뚝하다(井上滿郞 『平安京の風景』 1994). 현재 일본 도쿄의 국립박물관(우에노)에는 ‘타무라마로의 장송 풍경(田村麻呂の葬送風景]/淸水寺緣起)’이라는 그림이 전시되고 있기도 하다. 그림에는 큰 묘지와 조정의 5명의 대신들과 9명의 승려와 수많은 호위 장병들이 장지에 운집하고 있는 장중한 광경이다.

이상에서 여러모로 고찰했드시 타무라후궁(田村後宮)은 백제인 왕족 타무라마로가 영광스럽게 살았던 왕도 나라땅의 궁궐이다. 더구나 이 궁궐에는 칸무 천황이 천도한 헤이안경(교토)으로 성왕의 신주 금목대신을 옮겨 모셔 가기 전까지 이 곳에다 금목대신의 신주며, 칸무 천황의 모후 화신립 황태후 등의 신주를 모셔 놓고 역대 일왕들이 제사지내 왔던 왕실 사당의 터전이다.

다각적인 고증의 고찰로서의 同一人物

이제 여기서, “백제 성왕은 일본에 건너 와서 킨메이 천황이 되었다”(小林惠子 『二つの顔の大王』 文藝春秋社 1991)고 주장하는 일본의 고대사학자 코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 : 1936~ )씨의 연구 내용도 다음에 간략하게 소개키로 한다.

“성왕18(서기540)년에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다 패한 백제 성왕은 곧장 왜국으로 망명했다. 그 때부터 그는 왜국의 카나사시노미야(金刺宮) 왕궁에다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왜국왕이 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이 일본에 망명한 서기540년이 킨메이 원년이 되는 셈이다. 성왕이 남조(南朝)인 양(粱)나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그것을 왜국에 전했다는 것은 유명한데, 이 시대의 양나라는 백제와 왜국이 함께 친밀한 관계였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일본서기』에는 센키 천황(宣化天皇)은 케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의 제2왕자로 되어 있고, 그가 센카 천황4(서기539)년 2월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과연 사실상으로 그가 죽은 것인가. 그렇다면 이듬 해(서기 540년) 왜국에 입국하여 왜국왕인 킨메이 천황이 된 백제 성왕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닌가. 단 성왕은 일본에 건너 왔다하여도 본국의 백제왕 자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며, 이른바 백제국왕과 왜국왕을 겸임하고 있었던 것이다”(小林惠子 『二つの顔の大王』 文藝春秋社 1991).

필자도 백제 성왕이 왜국 킨메이 천황과 동일한 인물이라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왕이 왜국땅에 직접 건너가서 현지의 왜국왕 왕위를 겸임(兼任)하기 시작한 시기는 앞에 제시한대로 서기 540년이 아닌 서기 531년이다. 즉 서기 531년 2월7일에 성왕의 숙부인 케이타이 천황이 향년 82세를 일기로 슬하에 왕자가 없이 서거했기 때문에 서둘러 그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왜국땅으로 건너갔다.

성왕은 먼저 숙부 케이타이 천황의 장례를 마친 다음 왕위를 계승했다. 앞에서 살핀 인물화상경의 명문의 고증처럼 케이타이 천황은 백제 제24대 동성왕(東城王 : 479~501재위)의 제2왕자였다. 동성왕은 왜왕실에서 살고 있다가 백제 제23대 삼근왕(三斤王 : 477~479, 제22대 문주왕의 태자)이 서거하자, 그동안 살고 있던 일본땅에서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 『일본서기』(雄略23年 4月條)에 기사가 보인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왜왕실에는 백제 왕족들이 여럿이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은 『일본서기』에도 소상한 기사들이 보인다. 무슨 까닭에 왜왕실에 백제 왕자들이 건너가서 살고 있었던가. 약소국이던 왜국에 강대국 백제 왕자들이 결코 볼모로 잡혀간 것은 아니다.

동성왕에 대하여 『일본서기』 기사에서는 “동성왕자는 유우랴쿠 천황(雄略天皇) 당시의 왜왕실에서 ‘곤지왕자(昆支王子)의 제5왕자 말다왕(末多王)’으로 호칭했다. 동성왕자는 백제 제22대 문주왕(文周王 : 475 ~477재위)의 친동생으로서, 왜국 왕실을 장악하고 있었던 친아버지인 곤지왕자, 즉 오우진 천황 밑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 오우진천황이 승하한 뒤에도 줄곧 왜왕실에서 살다가 뒷날인 유우랴쿠 천황 시대에 5백명의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백제로 귀국하여 동성왕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동성왕자인 ‘말다왕’이 왜왕실에서 얼마나 당당한 백제왕자였던가 하는 것은 『일본서기』의 다음 같은 기사로서 입증되고 있다.

“왜왕실에서 유우랴쿠 천황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며 왕실의 말다왕(末多王)으로 호칭 받던 동성왕이 백제로 돌아가던 귀국 길에는 쓰쿠시(築紫)의 병사 5백명의 호송을 받았다.”(『일본서기』)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우 씨도 “곤지왕자가 바로 오우진 천황이다. 지금의 오우진왕릉의 피장자는 곤지왕자이다”(앞의 저서 『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 2001)고 단정하고 있다. 여기 한 가지 첨가하여 둘 것은 지금의 일본 오사카의 곤지왕자의 사당인 아스카베(飛鳥部) 신사는 본래 곤지왕(昆支王) 신사였던 명칭을 함부로 일제 치하에 없애고 지금처럼 개칭했다는 것을 밝혀 둔다. 바로 이 아스카베 신사 근처에 오우진왕릉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굳이 지적해 둔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도 지난날 왜왕실에서 승하한 백제 왕족 곤지왕자(오우진 천황)의 위용을 후대에서 우리가 능히 추찰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해 두어야할 중대한 사항은 “곤지왕자는 백제 개로왕의 동생이다”라는 『일본서기』의 허위 기사이다. 이것은 매우 악의적인 일본의 역사왜곡이다. 왜냐하면 “곤지왕자는 개로왕(蓋鹵王)의 왕자이다”(『백제본기(百濟本記)』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곤지왕자가 오우진왕으로 왜나라에 최초로 군림한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뒷날 『일본서기』의 기사를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은 확연하다.

왜나라 왕실에서 살고 있다가 백제로 건너와 왕위에 오른 제24대 백제동성왕을 『일본서기』에서는 ‘히코우시노오오키미(彦主人王,ひこうしのおおきみ)’로도 불렀으며, 일본 고대 왕실 성덕태자 문헌인 『상궁기일문(上宮記逸文)』에서는 ‘우시노오오키미(斯王,うしのおおきみ)’로 쓰고 있다. 즉 이 명칭들은 한결같이 ‘큰 소왕’ 즉 ‘우대왕(牛大王)’이다. ‘우시(斯,うし、牛, 소)’라는 한자(漢字) 표기의 이두식 만엽가나(万葉名)로 된 한자 어 표현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또한 『삼국사기』에서도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牟大)’이다. 즉 ‘소 울 모’(牟) 자와 큰 대(大) 즉 “크게 우는 소”로 쓰고 있다. 이와 같이 한일 양국 고대 사료 어느 것에서나 한결 같이 백제 동성왕을 “소”(牛)와 연관지어 “큰 소왕”의 왕호로서 호칭하여 온 것이 주목되기도 한다.

성왕은 서기 538년에는 백제 불교를 직접 왜국에서 스스로 포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그보다 앞서서 성왕은 서기 531년에 왜국에 건너갔고, 왜국왕의 왕위를 겸임하고 있은 지 7년째 되던 해에 스스로 백제 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먼저 살핀 대로 『일본서기』는“서기 552년 10월에 신하인 백제 성명왕이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를 왜에 파견하여 불상과 경론 등을 올려 바쳤다”고 내세우고 있다. 일본의 권위 사학자들의 정설은 ‘백제 성명왕은 서기 538년에 왜에 불교를 포교했다. 서기 552년에 포교했다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단정한다. 그들은 일본 고대 불교 문헌들(『上宮聖德法王帝說』,『元興寺緣起』)로서 고증했다.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중요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 천황을 서기 539년에 즉위한 것으로 쓰고 있는 점이다. 즉 이것은 불교가 성왕에 의해서 킨메이 천황 당시인 서기 538년에 일본에 포교된 사실 뿐 아니라 성왕의 왜국왕 겸임 사실을 아울러 의도적으로 은폐하기 위한 역사 왜곡이다. 왜냐하면 백제 성왕이 킨메이 천황을 겸임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서기 531년이기 때문이다(앞 『上宮聖德法王帝說』등).

또 하나의 참고 사항을 적어두자면 바로 이해인 서기 532년에 금관가야국(金官伽倻國) 김구해왕(金仇亥王)이 신라에 투항했다. 김구해는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일본서기』에 따르자면 그동안 백제는 왜국(백제인 케이타이 천황 시대 이래)과 더불어 가야를 차지하려는데 힘을 기우려 왔다. 즉 “가야에는 일찍부터 백제와 왜의 세력이 압박을 가해 왔다”(千寬宇 “復元加耶史” 『文學과知性』 1977).

그런데 가야연맹이 완전히 신라에 병합된 것은 서기562년이며, 그 당시 왜국은 성왕(킨메이 천황 겸임) 치하였다. 『일본서기』에 준하면 성왕(킨메이 천황으로서)이 승하한 것은 서기 571년 4월이다. 여기서 또한 크게 주목하자면 그해 4월15일에 성왕(킨메이 천황)은 병상에서 제2왕자인 태자(제30대 비타쓰 천황)를 급히 불러 유언했다. “과인은 중병이다. 후사는 네게 맡긴다. 너는 신라를 쳐서 임나(任那/伽倻)를 차지하여라.”(『일본서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성왕은 몸소 서기 554년 7월에 신라의 구천(狗川)땅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여 부상을 입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성왕의 제1왕자 여창(餘昌)이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 : 554~598)으로 등극한 것으로 쓰여 있다. 그러나 성왕은 그 당시 전사한 것이 아니며, 그는 본격적으로 왜국을 전담하여 통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사를 위장하고, 여창왕자에게 후사를 일단 떠맡기고, 이미 그가 겸임 통치하고 있던 왜국의 나라 백제인땅의 카나사시노미야(金刺宮/금자궁)으로 완전히 떠나간 것이었다.

성왕은 그 이후 줄곧 금자궁에서 킨메이 천황으로만 살았다. 킨메이 천황(성왕)을 계승한 제30대 비타쓰 천황은 『일본서기』 기사에, “비타쓰 천황은 킨메이 천황의 제2자이다”라고 되어 있다. 물론 제1왕자에 관한 기사는 일본 고대사서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타쓰 천황은 백제 왕족’이라는 기사는 『신찬성씨록』에서 살핀바 있다. 성왕(킨메이 천황)의 제1자인 제27대 위덕왕을 입증하여 주는 것은 필자가 발굴한 일본 나라땅 법륭사(法隆寺)의 고문서인 『성예초(聖譽抄)』에 명기되어 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는 “킨메이 천황15(서기554)년 12월에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전사”했으며, 이듬해인 “킨메이 천황16년 봄 2월에 백제왕자 여창(餘昌)이 자기 동생인 혜왕자(惠王子)를 왜왕실로 파견했다”(十六年 春二月 百濟王子餘昌, 遣王子惠, 王子惠者威德王 之弟也)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서 왜국으로 완전히 건너간 성왕(킨메이 천황)은 그 이듬 해(서기555년)에 제3왕자인 혜왕자를 왜국의 금자궁으로 불러드렸다. 그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일본서기』의 기사가 중대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즉, “서기 556년 1월에 혜왕자가 백제로 귀국하게 되자 , 조정의 아베신(阿倍臣) 등 조신들이 거느리는 용사 1천명이 혜왕자를 호위하여 백제로 돌아가게 해주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일개 백제왕자의 귀국 길에 호위하는 용사 1백명도 아닌 1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효의 호위군을 충당시킨 것일까. 그 당시 성왕은 킨메이 천황으로서 왜국에서 당당하게 군림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 한 가지 기사만으로도 실증할 수 있지 않을까. 다름 아니고, 이 혜왕자는 뒷날 친형인 위덕왕을 계승한 백제 제 28대 혜왕(惠王 : 598~599 재위)이다.

여기서 또 다른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에 관한 것도 지적하여 두고 싶다. 그것은 이미 살펴왔듯이 일본 역사서에서는 성왕의 왕명(王名)에다 ‘명(明)’ 자를 한 글자 더 첨가시켜 ‘성명왕(聖明王)’으로 쓰고 있는 것과 왜의 킨메이 천황의 왕명에도 역시 ‘명(明)’ 자가 한 글자 들어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로 간주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에서의 ‘천황호(天皇號)’ 칭호는 서기670년 이후의 일이었다(岡田英弘 『倭國』中央公論社, 1977). 따라서 한일간의 왕호의 혼동을 피하고자 필자는 본고에서 부득이 일본 사서에 준하여 ‘천황호’를 따라 쓰고 있음을 밝혀둔다.

칸무 천황과 생모 화신립 황태후

백제 성왕의 신주인 금목대신(금목신)을 끔찍이 여겨 스스로가 왕도를 천도한 교토땅 헤이안경 왕도에다 새로히 왕실 사당 히라노 신사를 건설한 제50대 칸무 천황은 아버지 제49대 코우닌 천황과 백제 왕족 여성 화신립(和新笠 : 생년 미상~789)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생전의 어머니를 끔찍이 위하던 효자였다. 『속일본기』에서는 화신립 황태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휘(諱/돌아간 높은 어른의 이름 : 필자 주)는 신립(新笠)이며 증정일위(贈正一位/작고한 분에게 준 일본 왕실에서의 최고위의 벼슬의 서열 : 필자 주)인 화을계(和乙繼)의 따님이다. 어머니는 증정일위의 대지조신 진매(大枝朝臣 眞妹)이다. 황태후의 조상은 백제의 무령왕(武寧王 : 재위 501~523)의 아들인 순타태자(純陀太子)로부터 이어 나왔다. 황태후는 덕망이 뛰어나며 용모와 자세가 훌륭하고 아름다워서 젊은 시절부터 평판이 드높았다.”

이 기사에서처럼 백제왕족 화신립 황태후는 서기 8세기 당시에 일본왕실의 조신이었던 백제왕족 화을계(和乙繼 : 8C)의 딸이다. 화신립 소녀는 제 아비가 백제인 왜왕실의 조신이었기 때문에 왕실의 제6왕자였던 시라카베 왕자(白壁王子, 709~781,뒷날의 제49대 코우닌 천황)와 결혼했다(三省版 『인명사전』 1978. 81).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 야마베(山部)왕자이며 뒷날의 칸무 천황이다. 화을계 조신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서기660년 백제가 망한 뒤에 왜나라로 망명해 온 백제왕족의 후손이다.

백제 멸망 당시인 서기 663년 3월에 일본의 제38대 텐찌 천황은 백제를 구하기 위해 2만7천명의 일본군을 백제로 파병하였거니와 그와 같은 정황을 살필 때 텐찌 천황의 백제인 핏줄 의식이 누구보다 투철했던 것을 실감시킨다. 시라카베왕자는 텐찌 천황의 친손자이다.

화신립 황태후가 백제 여성이라는 사실에 관한 역사책 『속일본기』는 서기797년에 왕실 조신 스가노노 마미찌(菅野眞道 : 741~814) 등이 왕명을 받고 편찬한 왕실 정사로서, 여기에는 연력8년(서기789년) 12월28일에 서거한 화신립 황태후에게 왕실에서 시호를 베푼 다음과 같은 연력9년(서기790년) 1월14일 부터의 사후 기사가 실려 있다.

“연력9년. 1월14일, 중납언. 정3위의 후지와라 조신 오구로 마로(小黑麻呂)는 뢰인(人 : 왕실에서 역대 왕조의 조상님들에게 제사 축문 등을 올리는 직책 담당관)을 대동하고 와서 황태후 영전에서, 천고지일지자희존(天高知日之子姬尊)이라고 하는 시호(諡號)를 말씀드려 바쳤다.

1월15일 황태후를 오오에산릉(大枝山陵)에다 장사 모셨다. 황태후의 성씨는 화씨이고 휘(이름)는 신립이며, 조정의 벼슬 정1위인 화을계의 따님이다. 어머니는 조정의 벼슬 정1위인 오오에조신 마이모(眞妹)이다. 황태후의 조상은 백제의 무령왕의 자식인 순타태자로부터의 출신이다.

황후는 덕망 넘치는 품위를 갖춘 우아한 모습이어서 젊은 날부터 평판이 드높았다. 코우닌 천황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인 때에 부인으로서 결혼했다. 황후는 금상(지금의 칸무 천황 : 필자 주). 사와라친왕(早良親王). 노토내친왕(能登內親王)을 낳았다.

호우키(寶龜 : 서기770~780년 : 필자 주) 연간에 성씨를 타카노 조신(高野朝臣)으로 바꾸었으며 금상 천황이 즉위하자,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존칭하게 되었다. 연력9년에는 거슬러서 황태후라는 칭호를 추서하였다.

백제의 옛조상인 도모왕(都慕王/주몽 : 필자 주)은 하백(河伯/강물의 신 : 필자주)의 딸이 태양(太陽)의 정(精)에 감응하여 그 몸에서 태어났다(『삼국유사』에서 하백의 딸 유화부인이 천신의 아들신 해모수와의 사이에 알로서 태어났는데, 항상 햇빛이 이 알을 쫓아다니던 끝에 알에서 탄생한 것이 주몽이었다 : 필자 주). 황태후는 그 후손이다(주몽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인 동시에 백제 건국의 시조 온조왕의 친아버지이다. 따라서 『속일본기』에서는 주몽을 백제의 옛조상이라고 일컫고 있다 : 필자 주). 그 때문에 천고지일지자희존이라는 시호를 바쳤던 것이다.

『속일본기』의 원문을 참고한다면 다음과 같다.

“明年正月十四日辛亥.中納言正三位藤原朝臣小黑麻呂率人奉上諡曰天高知日之子姬尊.壬子葬於大枝山陵.皇太后姓和氏.諱新笠.贈正一位乙繼之女也.母贈正一位大枝朝臣眞妹.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太子.皇后容德淑茂.夙著聲譽.天宗高紹(光仁)天皇龍潛之日.而納焉.生今上.早良親王.能登內親王.寶龜年中.改姓高野朝臣.今上卽位.尊爲皇太夫人.九年追上尊號.曰皇太后.其百濟遠祖都慕王者.河伯之女感日精而所生.皇太后卽其后也.因以奉諡焉.”

코우닌 천황의 황후 화신립의 성씨는 코우닌 천황에 의해서 뒷날 백제식 복성을 써서 ‘고야신립’(高野新笠, 타카노노 니이가사)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 왕족과 귀족들은 그 당시 대개 복성을 썼는데, 이것은 본국 백제에서 상류 계층이 흔히 복성을 썼기 때문이다(홍윤기 「일본인의 성씨고찰」『월간조선』1997. 8월호). 화신립 황후의 아버지 화을계는 왜왕실에서 ‘야마토노 아소미’(和朝臣) 또는 ‘쿠다라노 아소미(百濟朝臣)’이라고 우대받던 조정의 신하였거니와 그의 ‘야마토’(和) 성씨는 백제 무령왕의 왕성(王姓)이다. 따지고 본다면 ‘일본’을 상징하는 ‘야마토’(和)는 그 옛날의 백제 왕실을 웅변으로 입증하는 표현이다. 백제인 왕인(王仁 : 4~5C) 박사가 백제로부터 직접 일본 고대 왕실에 건너 가서 일본 최초의 와카(和歌) 『난파진가(難波津歌)』(홍윤기 「일본 和歌를 창시한 왕인박사와 韓神歌」『현대문학』통권506호/1997.2월호)를 지었거니와 와카는 곧 백제가(百濟歌)를 뜻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베왕자(山部王子,뒷날의 칸무 천황)가 태어난 것은 서기 737년. 그러기에 코우닌 천황이 등극했던 당시에 야마베왕자도 이미 그 나이 33세의 청년이었다. 이 당시 어머니 화씨부인은 50세 전후였다. 그녀는 뒷날 아들 칸무 천황(야마베왕자)이 등극한 뒤 8년만인 서기 789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므로 남편과 아들 부자 두 천황대에 과연 얼마나 큰 영화를 누렸을까. 서로 금슬이 좋았던 코우닌 천황과 화씨부인 사이에는 단명했던 둘째 왕자 사와라왕자(早良親王 : 생년미상~785)와 노토공주(能登內親王) 등 모두 3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백제인 칸무 천황이 서기 794년에 오늘의 교토땅으로 천도하여 ‘헤이안궁’ 궁전을 세울 때, 궁전의 북쪽 땅에 ‘백제 성왕 사당’인 ‘히라노 신사’도 건설하고 제사드렸던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조상에 대한 봉사(奉祀)가 아닌가 한다. 더구나 이 사당에 백제 ‘성왕’ 뿐 아니고 성왕의 조상인 ‘구도왕(온조왕)’, ‘비류왕’, ‘초고왕’ 등 백제인 네 왕과 칸무 천황의 어머니인 ‘화신립황태후’(히매신)까지 다섯 분의 백제 왕족들을 제사 지내게 했던 것은 칸무 천황의 조상신 숭경의 참다운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하겠다.

화씨부인의 아들 야마베왕자가 드디어 서기 781년에 즉위하여 칸무 천황이 되었다. 그러자 칸무 천황은 즉시 어머니 화씨부인을 황태부인으로 칭호했고, 친동생 사와라왕자를 자신의 후계자인 황태자로 책봉했다. 칸무 천황은 서기 794년에 천도하여 지금의 쿄우토땅에다 왕궁(平安宮)을 짓고, 왕궁 북쪽에 히라노 신사를 세웠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 왕실 족보격 문서인 왕족과 귀족 가문 계보 『신찬성씨록』은 다름 아니고 칸무 천황이 왕실에서 왕족과 귀족의 가문을 정리하여 쓰도록 칙명하였기 때문에, 칸무 천황 생존 당시에 왕자와 왕실 조신들이 문헌을 조사하여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록이 완성되기 이전에 칸무 천황이 승하하여 세상을 뜨자, 그의 제5왕자인 만다친왕(万多親王 : 788~830)이 조신들과 계속 집필하여 끝내 완성시켰다. 또한 칸무 천황은 실제적으로 본다면 고대 일본의 한국인 씨족사격인 『신찬성씨록』의 편찬에 몸소 착수하며 그 완성을 칙명으로 지시했던 업적(水野 祐 『일본민족(日本民族)』1963)을 또한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제30대 비타쓰 천황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기사가 나와 있다는 것은 ‘일본왕이 백제인이다’라고 입증하는 유일한 고대 문헌상의 고증이다. 거듭 지적하거니와 비타쓰 천황의 아버지가 킨메이 천황 즉 백제 성왕이다. 일본을 지배한 고대 백제인 왕족들의 혈맥은 오늘에도 고스란히 일본 왕실에 이어져 오고 있다.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라고 지금의 아키히토 천황(明仁天皇 : 1989~현재 재위)이 지난 2001년 12월 23일에 도쿄의 황거(천황궁)에서 자신의 68회 탄생일을 기념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공언한 것은 아키히토 천황의 일본 왕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제인의 핏줄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중대한 고증이기도 하다.

“제50대 칸무 천황의 생모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황태후는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이 『속일본기』에 실려 있습니다. 나는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일본 아사히신문 2001. 12.23)

이와같이 진솔하게 발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이 중대한 사실을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이외의 다른 모든 일본 유력 신문들은 전혀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키히토 일왕의 기자회견 석상에서의 “일왕의 백제 왕족과의 핏줄 관계” 발언은 그 당시 예정된 기자회견 발표문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내용으로서, 돌발적으로 일왕의 입에서 퉁겨 나왔다고 한다.

그 때문에 황거(천황궁)를 관장하는 일본 정부 궁내청 관계관들은 몹시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궁내청 관계자들은 서둘러 “일왕의 백제 혈연 발언”에 대한 언론 보도를 중지할 것을 각 언론 기관에다 긴급 요청한 것이라는 게 그 당시 일본 전문가들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만은 충실하게 독자들에게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의 알 권리를 옹호한 목탁 구실을 했다.

일왕의 발자취는 고대 백제 왕족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오사카를 위시하여 나라, 아스카 등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일본 선주민들을 지배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일왕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입증할 만한 매우 중요한 행사가 바로 2004년 8월 3일에 모국 한국땅에서 거행되었다. 지금의 일본 왕실의 한 왕자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왕자가 아키히토 천황의 윤허를 받고, 2004년 여름에 충남 공주에 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武寧王, 501 ~523 재위) 왕릉에 찾아 와서 제사를 드리고 나서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다.

“2004년 8월3일, 충남 공주 무령왕릉(송산리 제7호 고분)에는 현재 일본왕실의 아사카노미야(朝香宮 : 1942~ )왕자가 무령왕에게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직접 왕릉에 찾아 왔다. 그는 무령왕릉 안에서 직접 가지고 온 1천3백년전에 일본 왕실에서 만든 일본왕실에서 제사지낼 때만 사용하는 향로와 귀중한 향을 피우며 제주인 술과 제사용 과자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서 머리를 깊게 숙이며 절을 올려 참배하였다.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이 사실을 일본에서 아키히토 천황에게 직접 보고하고 한국으로 건너 왔으며, 또한 일본으로 귀국한 다음에는 다시 아키히토 천황에게 제사 모시고 돌아 온 사실을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8월2일에 그의 수행원과 친척(왕족)을 거느리고 충남 공주로 무령왕릉을 찾아 왔다. 아키히토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무령와릉을 두루 돌아보고 나서 이번에는 일행이 함께 공주시청으로 가서 오영희 공주시장을 예방하였다. 이 자리에서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공주시장에게 일본 왕실에서 가지고 온 향과 향로까지 기증하였다.

그가 기증한 향은 지금부터 1300년 전에 침향목으로 만든 매우 귀중한 일본 최고급향이다. 충청남도 관계관의 말에 의하면 “일본 왕족의 백제 무령왕릉 참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아키히토 일왕은 2001년 “무령왕의 후손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和新笠)가 일본 제50대왕인 칸무 천황을 낳은 생모이기 때문에 나는 백제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말하여 일본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아사카노 마사히코 왕자를 무령왕릉으로 안내한 신화용 충청남도 관광과장은 “무령왕의 후손인 일본 왕족들이 무령왕릉에 매우 관심을 크게 나타냈다”고 하면서 아사카노미야 왕자의 이번 방문은 일본 내에서의 여론을 의식하여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신과장은 “아사카노 마사히코 왕자는 5일 일본으로 귀국하면 돌아가서 일왕에게 이번 방문 결과를 상세하게 보고키로 하겠다”며 “앞으로 충남도 차원에서 일왕의 무령왕릉 방문도 본격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 2004.8.5.日字).

그러나 이러한 아사카노미야 왕자의 무령왕릉 참배에 관하여 일본의 어떤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일체 보도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일본 매스컴은 함구한 채 보도를 묵살한 것일까. 그와 같은 연유에서 도쿄의 황거(천황궁)를 관장하고 있는 일본 정부 담당 관청인 궁내청에서 신경을 곤두 세우는 것은 어느 의미로나 ‘한일 왕실 동족 관계’가 세계에 널리 들어나는 것이 몹시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 왕실이 ‘순수한 백제 계열’이라는 일본 고대 문헌 사료 등이 낱낱이 입증하고 있는 것을 어찌 더 이상 숨길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여기서 ‘대관절 백제 무령왕은 누구인가?’라는 무령왕의 존재에 관하여 간략하게 언급한다. 백제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나 청소년 시절을 성장하여 일본 왕실에서 줄곳 살다가 생부인 백제 제24대 동성왕(東城王 : 479~501 재위)이 서거하자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 제25대왕이 되었다. 『일본서기』 역사 기록에는 무령왕은 개로왕의 왕자로서 간난 아기 때 일본 섬에서 태어났으며 백제로 귀국시켰다고 조작되어 있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탄생에 관한 기사가 써있지 않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태생에 대하여 다음처럼 역사 날조를 했다.

“곤지(昆支)왕자는 형인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물려준 배가 잔뜩 부른 임부(姙婦)인 왕비를 거느리고 백제로부터 왜나라 왕실로 가던 뱃길에 일본 쓰쿠시(筑紫/지금의 큐우슈의 옛날 지명 : 필자 주)의 ‘카카라노시마(各羅嶋)’ 섬에서 태어난 아기를 백제로 돌려보냈다. 이 아이가 뒷날의 무령왕이다.“

이와 같은 『일본서기』의 기사가 황당무개하다는 것은 일본 사학자들도 지적한 바 있다. 무령왕은 곤지왕자의 친손자이고, 무령왕의 아버지는 백제 제24대 동성왕이다. 동성왕이 서거하자 왜왕실에 살고 있던 동성왕의 제2왕자였던 휘가 사마(斯麻)였던 왕자가 백제로 귀국하여 등극한 무령왕이다. 동성왕의 제1왕자는 일본 제30대 비타쓰 천황이다.

일본 나라땅의 ‘회외릉’은 킨메이 천황 즉 백제 성왕의 왕릉이다. 바로 그 백제인 킨메이 천황의 왕릉 터에 회외(檜, 히노쿠마)라는 고장은 다름 아니라 나라의 아스카 본 터전이며, 이곳에 있는 거대한 솟대를 백제왕자인 아직기 재상의 직계 후손 동한판상직(東漢板上直)이 세웠다고 하는 역사의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본 고대사에서 솟대가 세워진 사실은 이것이 인간의 실명(實名)으로는 최초의 기사이기 때문이다.

왜 나라의 왕실이며 신사·신궁의 제사 때에는 축문을 소리높이 외운다. 일본에서는 축문을 축사(祝詞, 노리토)라고 일컬어 온다. 이 축사라고 말하는 축문은 연희식에 가장 많은 28편이 전해오고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연희식에 기록된 축문들 속에는 신성한 산에서 잘라 온 큰 나무와 작은 나무로써 사당인 신사·신궁의 신전에다 솟대를 세우고 제사를 거행했다는 것이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우리 민족이 고조선 시대부터 천신을 제사 드리는 신성한 터전에다 솟대를 세웠다는 것은 고대 중국 역사에도 자세하게 기사가 전해오고 있다.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의 ‘한(韓)’의 항목을 보면, 고조선 시대에 솟대를 세우고 천신에게 제사를 드린 대목이 다음처럼 나타나고 있다.

“나라의 고을마다 한 사람씩을 내세워서 천신제(天神祭)를 관장시켰다. 이 제주(祭主)를 천군(天君)이라 이름 지었다. 또한 여러 고장에 각기 별도의 제사 드리는 고을이 있고, 이곳을 이름 지어 소도(蘇塗)라고 하였다. 그곳에는 큰 누대를 세우고 방울을 달아서 귀신을 섬겼다.”

큰 나무인 솟대는 신목(神木)으로서 그 나무에는 천신이 깃들이는 신성한 나무이다. 이미 고조선시대부터 우리는 조상 대대로 솟대를 섬기면서 마을이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 드리고 축제를 거행했던 것이다. 신목에 대한 솟대신앙은 고대 일본으로 건너 간 정복왕들에 의해서 왜 나라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우에다 마사아키 씨는 고조선 사람들이 솟대를 섬긴 천신 신앙이 바로 일본의 신목제사(神木祭祀) 터인 신리(神籬, 히모로기)라고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소도라고 부르는 별읍(別邑)이 있고, 그곳에 큰 누대를 세워 방울을 걸어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하는 『위지동이전』의 한(韓)의 항목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것은 실로 고대 일본의 신리인 것이다. 신이 깃들이는 나무인 신목을 제사 드리는 것이 마쓰리였다(『古代日本の女帝』 講談社, 1996).

일찍이 에도시대의 저명한 국학자 토우 테이칸(藤貞幹 : 1732~1797) 씨는 “신리는 신라어(新羅語)이다”라고 단정했다.

결론(백제와 일본왕실의 혈연 왜곡)

일본 고대 왕실이 백제 왕족들과 혈연적으로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각종 일본 고대 문헌에 낱낱이 밝혀져 있다. 더욱이나 주목되는 것은 일본 고대의 왕실편찬 문헌들이 고대 한국과의 혈연관계를 사실대로 기록하여 온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고대의 관찬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 만은 한일 왕실간의 혈연관계를 전혀 다루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와 같은 연관성을 은폐하는 역사 왜곡을 자행해 왔다는 데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적하게 된다.

『일본서기』의 역사 기사가 다방면에 걸쳐 왜곡 또는 조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여러 권위 있는 역사학자들이 일찍부터 문헌비판해 왔다. 그런 비판자들에게 일제는 가혹한 박해를 가했다. 이를테면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교수 쿠메 쿠니타케(久米邦武 : 1839~1931) 씨가 일본 천황가와 고대 한국의 신도가 원천적으로 서로가 똑같은 조상의 동일한 맥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하는 연구 논문(「神道は祭天の古俗」, 1891)을 발표하자, 쿠라모찌 찌큐우(倉持治休) 등 4명의 황국 신도가들이 떼지어 쿠메 쿠니타케 교수댁에 침입하여 일본도 긴 칼을 교수에게 드리대며 “논문을 취소하라고 협박했다(東京日日新聞 1892.3.4).

무카이사카 이쓰로우(向坂逸郞) 씨는 “이 논문 때문에는 쿠메 키타케 씨는 도쿄제국대학 교수직에서 추방당했으며, 논문이 실린 사해(史海)와 『사학회잡지(史學會雜誌)』는 압수 판매금지 처분되었다”(『嵐のなかの百年-學問彈壓小史』 1965)라고 논박했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교수 쓰다 소우키찌(津田左右吉 : 1873~ 1961) 씨는 『일본서기』등의 기사 내용이 천황의 정당성을 꾸며서 만들기 위해 조작된 역사 기사라는 점을 학문적으로 규명했다. 특히 그는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복설이 허위라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의 기사에서 간지(干支,60년간) 두 바퀴(二運, 120년간)를 윗쪽으로 늘려 바꿔 놓으면서, 일본의 역사를 실제 보다 더 길게 변조한 사실”을 철저하게 문헌비판했다.

그는 『일본서기』 등이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 346~375 재위)으로부터 구이신왕(久爾辛王 : 420~427 재위) 시대까지의 치세에다 뜯어 맞추기 위해, 고의로 간지 두 바퀴를 윗쪽으로 끌어올려서 조작한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시대에다 일치시킨 것 역시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던가”(津田左右吉 『日本上代史硏究』 1930)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뿐 아니라 또한 “일본 초대왕(初代王)인 진무(神武) 천황부터 제9대(第九代)의 카이카(開化) 천황까지는 역사상 전혀 있지도 않았던 실재하지 않은 꾸며서 조작해낸 이름만 써넣은 거짓된 왕들이다. 따라서 사실상의 실제의 초대왕(初代王)은 역사 기록에서 제10대왕으로 되어 있는 제10대의 스진(崇神) 천황이다”(津田左右吉 『古事記及日本書紀新硏究』 19244)라고 일본 고대 역사책인 『일본서기』 등의 허위 날조를 철저하게 분석 비판했다.

이와 같은 쓰다 소우키찌의 『일본서기』의 역사 조작 비판에 당황한 일제 당국은 드디어 1942년에 쓰다 소우키찌 씨를 재판에다 걸어서 금고형에 처했으며, 또한 그의 저서들을 압수ㆍ판매 금지시켰다. 일제가 쓰다 소우키찌 씨를 강력하게 탄압한데 대한 다음 기록을 주목하고 싶다.

“쓰다 소우키찌(津田左右吉)는 소화(昭和)5(1930)년에 그의 저서인 『일본상대사연구(日本上代史硏究)』 등을 발표하면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시대의 설화가 천황 지배에다 그 정당성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후세에 와서 누군가에 의하여 조작되었다”고 논증했다. 1940년에 그의 주저인 4권의 책은 판매 금지되었고, 또한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였다 하여 1942년에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형 3개월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上田正昭外 監修 三省版 『인명사전(人名辭典)』1978).

이와 같은 사건 이후에 쓰다 소우키치 씨는 일제의 탄압아래 마침내 학자로서의 양심을 외면하고 변절했다. 즉 그는 1942년 이후 일제에 순응하며 역사적으로 한국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의 초기 기사를 터무니없이 부정하며 한국을 비하하는 등 급기야 그는 학문의 변절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쓰다 소우키찌 씨의 온당치 못한 『백제본기』 비판에 대해서 도쿄대학 사학과 교수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 1917~1983) 씨는 쓰다 소우키찌 씨의 부당한 역사 왜곡 처사를 지적하면서, “설사 『백제기(百濟記)』라는 책이 정확하더라도 과연 『일본서기』가 그것을 충실하게 인용하여 전하고 있는지 어떤지도 문제이다”(『日本國家の起源』 岩波書店 1967)라고 비판했다.

여기에서 밝혀 두자면 『백제본기』하고 『백제기』는 각기 별개의 백제 관계의 역사서이다. 즉 『백제기』라는 역사책은 『일본서기』에서만 인용되고 있을 뿐, 이 역사책이 사실상 백제시대에 있었는지 그 존재 여부는 전혀 확인된 바 없는 수수께끼의 인용서라는 점을 굳이 지적해 둔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기』라는 책은 정체불명의 가공의 책이다. 따라서 『일본서기』가 『백제기』를 인용했다는 것은 전혀 신빙할 수 없는 것일 따름이다.

오사카시립대학 사학과 교수 나오키 코우지로우(直木孝次郞 : 1919~) 씨도 “일본의 역사 기사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자체 안에서 조차도 개작ㆍ변형되어 있다”( 『日本神話と古代國家』 講談社, 1990)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일본 역사책이 ‘한국의 고대 신화’를 베껴다 옮겨간 것을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 1927~ ) 씨가 지적하는 것도 그들 일본 역사책의 역사 조작이 뚜렷한 것이기도 하다.

즉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 기사에 있어서 천손강림(天孫降臨)의 이야기를 보면 그것에는 조선신화와 유사한 요소가 적지 않다. 그런 사실은 고대에 있어서의 한일 관계를 생각해볼 때, 서로간의 공통된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은 중시해야 할 점이다…『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의 마무리에서 보면 전승의 근저에 있어서 그 이야기의 결론이 왕실의 궁정 신화로서 결실되었을 때에, 어찌하여 그런 형(形)을 취했는가.

그것이야말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에 접근하는 유력한 ‘열쇠 하나’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된다(『古代再發見』 角川書店, 1975)”고 우에다 마사아키 씨는 지적한다. 여기서 ‘유력한 숨겨진 열쇠’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대 한국과 왜국의 왕실 서로는 곧 하나의 공통분모로 이루어진 피를 숨길 수 없는 혈족이었다는 사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의 ‘한국인 핏줄’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우리는 그의 새롭고도 강력한 ‘한일 동족론(韓日同族論)’의 일단으로서 고려해 볼 의미가 충분하다고 보련다. 왜냐하면 아키히토 일왕의 ‘한국 혈연관계 언동’은 이미 그 보다 8년 전인 1994년 11월18일에 공언한 사실을 지금까지 누구도 주의 깊게 지적한 일이 없었다.

그 날은 일본 제50대 칸무 천황이 지금의 교토땅인 헤이안경으로 새로운 왕도를 정하고 천도하여 온 지 1200년이 된다는 ‘헤이안 건도(建都)1200년 기념식’이 거행된 날이었다. 이날의 기념식에서 아키히토 일왕은 “교토는 1200년 전에 헤이안경으로 창건된 왕도이며, 부조(父祖)의 땅으로서 정답고 그리운 고장입니다”(아사이신문. 2001.12.23일자) 라고 깊은 속마음을 피력하여 듣는 이들을 감동시켰다.

아키히토 일왕은 직계 조상인 칸무 천황이 창건한 유서 깊은 고도(古都) 쿄토가 백제 왕족들에 의해 세워진 역사의 발자취를 역연하게 피력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아키히토 일왕은 1989년 제125대 왕위 계승 이래 지금까지 벌써 6회나 교토를 공식 방문할 정도로 헤이안경에 대한 절절한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다.

그 동안 아키히토 일왕이 교토에서 방문한 백제 왕실 연고의 터전의 하나는 이와시미즈 하찌만궁(石淸八幡宮) 등 여러 곳을 들 수 있다. 이 ‘이와시미즈 하찌만궁’은 서기 5세기 경에 왜땅에서 처음으로 백제왕실을 세운 ‘오우진 천황’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큰 사당이다. 이 사당은 소위 ‘아마테라스 오우미카미(천조대신)’의 신주를 제사지낸다는 이세 신궁과 나란히 일본 왕실의 숭경을 받아오는 신궁이라는 것도 끝으로 밝혀 둔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양학부 일본문화 담당교수.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 졸업. 일본 센슈우대학 대학원 문학박사 학위 취득. 일본 센슈우대학 겸임교원(어문학 담당교수), 한국외국어대학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문화 담당. 단국대학 대학원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 교양학부 일본문화 담당교수와 한일국제왕인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日本문화사』『日本속의 한국 문화유적을 찾아서』 『日本의 역사왜곡』 『한국인이 만든 日本국보』 『일본 행기 큰스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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