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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깨달음은 탐진치를 해소해주는가 / 박병기
특집 | 깨달음에 관한 여덟 가지 담론
[66호] 2016년 06월 01일 (수) 박병기 bkpak15@knue.ac.kr

1. 머리말

우리는 일상 속에서 생존의 욕구를 기반으로 삼아 살아가는 존재자이다. 만약 생존 욕구가 없다면 먹을 것을 찾고자 하는 노력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고,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도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생존 욕구는 식욕(食慾)과 안전에의 욕구로 이어지고,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주장과 같이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유한성에 대한 본능적인 자각을 전제로 하여 자손을 보고자 하는 성욕(性慾)으로 이어져 인류 역사 존속의 기반이 된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에 대한 논쟁을 벌인 맹자와 고자(告子)가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주제도 바로 이 식욕과 성욕이다. 그들이 식색(食色)의 본능으로 표현한 식욕과 성욕을 인간이 타고나는 본성 속에 포함시킬 것인가가 논쟁의 핵심이었고, 고자는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펼쳤다. 그에 비해 맹자는 그런 본능은 동물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에만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전제 속에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지금 우리는 맹자와 고자 중에서 어떤 쪽에 더 가까울까? 아마도 맹자보다는 고자 쪽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이미 인간의 유전자 속에 존재하는 생존을 위한 이기성(利己性)이 경험 연구를 통해 검증되었고, 그러한 이기성을 인간의 핵심 본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21세기 들어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이기성과 함께 이기성을 제대로 충족시키기 위한 협력의 경향성 또한 인간의 본성에 포함되어 있음이 밝혀지고 있는 점이다. 합리적 이기주의라고 표현되는 이런 사실은 자신의 이기성을 제대로 지켜내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서 협력의 경험이 인간의 유전자 속에 새겨져 있거나 추론을 통해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등장한다는 실천적 논의로 이어진다.

물론 인간의 본성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주로 뇌과학과 신경과학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공감(empathy)에 관한 주목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인간을 포함하는 유인원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고, 그 능력이 이른바 거울뉴런이라는 뇌세포의 활성화와 관련되어 관찰된다는 가설이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다. 어찌 되었건 우리에게 생존 욕구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주어져 있고, 그것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향하는 탐욕(貪慾)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철학과 과학 영역 모두에서 받아들여지는 진리 수준의 것이 되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존 욕구는 이처럼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갖고자 하는 탐욕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그 생존을 영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성욕으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그것은 안전에의 욕구로 연결되기도 하고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강한 저항으로서 분노로 이어지기도 한다. 불교의 욕망론에서 탐욕[貪]과 성냄[嗔]이 어리석음[痴]과 함께 세 가지 중심축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은 인간의 생존 영역에 대한 붓다의 관찰에 기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어리석음은 생존이라는 현상에 대한 무지, 즉 무명(無明)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지닌다.

이처럼 탐욕과 성냄은 생존경쟁이 일상화된 상황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본능적 욕구들인데, 붓다는 왜 그것이 어리석음에 기반한 것이어서 극복 또는 해소되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해소가 무명의 깨침인 깨달음을 통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서로 연결된 이 두 물음이 우리의 중심 화두이다.

2. 삶과 사회에 대한 어리석음과 깨달음의 요청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리석음을 지닌 채 살고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은 맞는 것일까? 나름 세상의 흐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하고, 그 관심을 보다 적극적으로 펼치기 위한 공부도 계속해가고 있는 21세기 초반 한국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최소한 상대적으로는 그리 불리한 위치에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매우 높은 수준의 학교 교육을 받고 있고, 자신과 세상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을 때 찰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접속 속도에서도 결코 불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휴대전화를 매개체로 삼는 이른바 모바일 접속 속도는 세계적인 휴대전화 생산 업체들을 갖고 있다는 이점 때문에 꾸준히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도구나 매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엄청난 분량으로 쏟아지는 자기계발서와 명상 책들,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템플스테이 같은 성찰의 기회 등으로 인해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돌아보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다. 몸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곳곳에 자신의 신체 조건에 맞춘 근육단련(personal training)을 해준다는 헬스클럽이 있어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같은 외부인들의 시선을 통해 부러움을 사는 의료체계 속에서 쉽게 병원에 갈 수 있고, 정기검진을 통해 자신의 몸속을 정기적으로 관찰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외적 요건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외부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함으로써 그 시선에 근거한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순간적으로 오가기도 하고, 사회연결망 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많은 시간과 공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인간이 타자 의존적인 존재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온전한 자유로움을 얻는 일은 불가능한 과업에 속한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의 타자 시선에 대한 종속은 자신의 삶 자체를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정도는 나이 든 세대나 젊은 세대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삶이 위태로운 이유는 특히 우리가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를 내면화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는 모든 것들을 상품화하여 팔 수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 질서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타인과의 연결고리를 상품소비의 과시를 위한 연결 말고는 철저히 차단함으로써 고립성과 이기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요하는 질서이기도 하다. 이런 질서가 이념으로만 존재하다가 우리 사회에서도 20세기 말 구제금융사태(IMF)를 계기로 모든 구성원의 삶의 질서로 자리 잡았고, 이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에 포섭된 삶은 주로 돈을 전제로 하는 소비의 가치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다른 것들은 모두 그 가치로 흡수되는 양상을 지니게 된다. 우리에게도 정의에 관한 책으로 잘 알려진 미국 하버드 대학의 윤리학자 샌델(M. Sandel)은 우리 시대가 시장 지상주의 시대가 되었고, 그 결과 모든 것들이 거래 가능하다는 믿음이 횡행하는 거래만능 시대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하면서 그 질서의 속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시장경제를 가진 시대에서 시장사회를 이룬 시대로 휩쓸려 왔다. ……종교의식이나 자연의 경이로움을 사고팔 수 있는 재화로 다루는 것은 그것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태도가 아니다. 신성한 재화를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바꾸는 행위는 그 가치를 잘못된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종교나 자연 같은 신성한 영역조차 거래가 가능한 재화로 만들어버리는 시장사회 속에서 그 구성원인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 엄혹한 질서를 내면화시켜야 한다는 압박 속에 놓이게 된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 내면화시키지 못하거나 그럴 의사가 없다고 버티는 사람에게는 무능한 사람, 요즘 표현으로는 루저(loser)라는 딱지를 붙여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과 사회를 직시하는 일은 결코 쉬운 과업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직시(直視)를 위해 잠시 물러서서 고민하고자 하는 사람을 우울증 환자의 범주에 쉽게 포함시켜 버리기도 한다.

실제로 필자는 최근에 어느 종합편성채널의 프로그램에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의미 물음에 관심을 갖고자 하는 사람을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규정짓는 정신과 전문의를 본 적이 있다. 그에게 정상인은 그런 물음 없이 이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에 적절하게 순응하는 사람인 것으로 보이고, 그 궤도를 벗어난 순간 자신에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분류되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례 하나를 통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은행에서 금리가 극히 낮은 정기예금을 하고자 할 때 창구 직원들이 건네 오는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 속에서도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엄연한 사실임을 부정할 길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어리석음 속에서 살고 있다. 스스로 영리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어리석음의 깊이에서 앞서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과 사회가 속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 아는 지혜, 즉 여실지견(如實知見)은 불교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기본 요건이다. 그런데 이 요건은 자본주의적 삶의 질서가 심화될수록 달성하기 힘들어지는 목표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문제는 그런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데서 생긴다. 소비를 통한 욕구 충족 자체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에 속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는 이미 그 기본욕구 충족을 넘어서는 과시와 중독의 그것으로 변해 버려서 마치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빚고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차원의 갈증은 사회구조적인 차원과 함께 전 지구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 우리 시대는 이전 시대에는 들어본 적 없는 지구 자체의 존속 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생태계 위기와 핵전쟁의 위협은 이미 20세기에 시작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일상 속 불길한 느낌인 미세먼지와 황사의 공포로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중국, 북한의 핵무기와 우리나라의 원자핵발전소에 대한 무감각으로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협력을 강화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하다. 모두가 하나의 지구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람직한 지구공동체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하는데, 이 시기에 꼭 필요한 말은 협력과 대화, 상호의존, 창의성 등이다.

고등학교 수학교사 출신의 미국 교육철학자인 나딩스(N. Nodd-ings)의 이와 같은 경고는 사실 새로울 것이 없을 만큼 식상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이 이제 스스로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음을 인식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더 이상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자본주의적 명령이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위기 국면임을 깨달아야 하는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해야 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자신과 사회에 관한 직시라는 의미에서의 깨달음이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적 요청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3. 깨달음을 통한 탐욕과 성냄의 해소는 가능한가

1) 지눌의 깨달음 개념의 재해석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서 깨달음이라는 개념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불교의 깨달음 개념에 토대를 두고 마련된 조선 성리학의 깨달음은 천명(天命)으로 상징되는 우주와 자연, 인간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질서로서의 성(性)과 이(理)에 관한 깨침으로 자리 잡았다. 불행히도 이러한 성리학의 깨달음은 온전히 전승되지 못했지만, 불교의 그것은 대한불교조계종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의 현재성 속에서 살아남아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골프계의 돌부처’ 김경태는 지난해 큰 깨달음을 얻었다. ‘스윙은 늘 흔들리기 마련이어서 돌아갈 곳, 기본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예술이 미를 추구한다는 근본적 테제에 동의하지만, 편안함과 친근감을 넘어서서 진정한 깨달음, 때로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환기시킵니다. 그래서 모든 예술작품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필자가 깨달음과 관련된 다른 글(〈깨달음의 사회화, 그 가능성과 방향〉 정의평화불교연대 학술대회 발표문, 2016. 1. 15)에서도 인용한 적이 있는 위의 두 신문기사에서 우리는 불교계 이외에서 깨달음이라는 개념이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앞의 골프선수의 깨달음은 일상 속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깨달음, 즉 어떤 현상과 관련된 바른 인식을 의미하고, 두 번째 인용문의 깨달음은 그보다는 조금 더 삶 속으로 스며든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의미한다. 물론 이 둘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명시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앞의 정의를 뒤엣것으로 흡수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즉 불교계 이외의 담론체계에서 깨달음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보다 깊이 있게 그 현상 자체를 인식하는 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과 조사의 성실한 말씀을 의지하여 밝은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마음이 본래부터 신령스럽고 밝아 맑고 깨끗하며 번뇌의 성품이 공함을 비추어보고, 다시 올바름과 그름의 분별에 쉽게 빠지지 않는 수행을 더해 가면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으며 혼란이나 잘못된 견해에 빠지지 않고 어떤 개념에도 붙들리지 않는 지혜를 깨달아 항상 밝음을 유지하게 된다.

홀연히 선지식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 성품은 원래 고통이 없고 온전한 지혜를 갖추고 있어 본래의 부처님과 한 점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문득깨침[頓悟]’이라고 한다.

부처와 조사가 어떻게 일반 사람과 다를 수 있겠는가, 다른 이유가 있다면 다만 스스로의 마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단박깨침’은 비록 부처와 같지만, 여러 생의 습기가 남아 있으니 바람은 멈추었지만 파도가 계속 일고 있고, 이치는 깨달았지만 헛된 생각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앞의 일반적인 깨달음 담론과 비교해볼 때 지눌의 깨달음 논의는 어떤 차이를 지닐 수 있을까? 그 차이점을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마음속에 온전한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음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박깨침’과 점진적인 수행의 실천적인 연계라는 수행론이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전자는 일반적인 깨달음 담론에서 생략되거나 각자의 사적인 믿음 또는 추론의 영역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로서 불교가 지니는 깨달음 개념이 돋보이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로서 불교에서 종교의 기본 속성으로 꼽히는 믿음이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란이 있지만, 최소한 우리는 인간의 깨달음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그 가능성의 뿌리로서 자신의 본래적 성품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를 볼 수 있다. 이른바 자력신행(自力信行)으로서 불교적 믿음의 세계가 지니는 기본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경험적인 근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다.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정신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시켜 왔고 그것은 각각 과학과 철학 등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삶의 의미 물음이나 죽음에 관한 의식에서는 여전히 일정한 신비의 영역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신비의 영역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면서 기존의 종교적 영역은 물론 과학으로 쉽게 답변을 찾을 수 없는 철학적 물음 영역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인간의 깨달음 가능성에 관한 믿음 역시 이 차원의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그것은 넓은 의미의 종교적 믿음 영역에 속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지눌의 깨달음 개념과 일반적인 깨달음 개념을 차별화시켜 주는 첫 번째 지점이다.
차별화의 두 번째 지점은 지눌이 보여주고 있는 수행론의 이론과 실천 영역에서 비롯된다. 그는 돈오와 더불어 점수(漸修)를 지속적으로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점수를 구체화할 수 있는 다양한 수행법과 자세를 제안하고 있기도 하다. 허우성(1996)은 지눌의 수행법이 몸과 마음의 긴밀한 연계성에 주목하면서 수행자의 몸을 누일 수 있는 공동체를 전제로 구체적인 행위 규범으로서의 청규(淸規) 수준까지 마련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즉 나쁜 벗을 멀리하고 어진 벗을 가까이하라거나,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지 말라는 행위 규범까지 《계초심학인문》을 통해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 개념과 수행 사이의 긴밀한 연계성에 관한 지눌의 주목은 수행자로서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이 수행론이라는 이론적 차원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수행 공동체 안에서의 삶과 그 삶을 영위해가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행위규범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달음 자체의 실천적 성격에 비추어볼 때 당연하면서도 바람직하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오히려 그 당연한 사실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론과 실천의 분리라는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문제이다. 근대 이후의 서양윤리학이 지닌 가장 결정적인 결함 또한 바로 이러한 수행론 또는 실천론의 배제이다. 그로 인해 윤리학은 옳고 그름에 관한 메타적 분석에 그치거나 기껏 도덕규범을 찾아내는 이론적 논의로 끝나는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 지눌의 깨달음 개념 속에 내재한 수행론과 실천 지침에 관한 현재적 주목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 깨달음을 통한 탐욕과 성냄의 해소는 가능할까

지눌을 비롯한 대승불교권의 깨달음 개념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부처가 존재함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고,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보전해가는 과정의 수행을 필수 요건으로 삼는다. 이런 의미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 자체가 무명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탐진치라는 세 가지 인간의 욕망 중에서 치(痴)는 조금 다른 차원을 지닌다는 것이 우리 논지의 맥락 중 하나다. 그렇다면 그 어리석음의 극복 또는 해소로서의 깨달음을 통해 성냄과 탐욕 또한 자동으로 극복되거나 해소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우리를 돈오와 점수 논쟁으로 이끌 수 있다. 돈오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탐욕과 성냄을 단숨에 제거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거나, 깨달음 이후의 수행을 통해 점차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두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택하고 있는 지눌의 깨달음 개념에 따르면, 당연히 후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내 마음속에 부처가 있음을 알아차리는 깨달음은 그 자체로 자신과 세상의 실상에 관한 직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습기가 온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쌓일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지눌의 깨달음은 그 과정의 전후 맥락 모두에서 수행의 실천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지눌의 깨달음 개념을 신해(信解)에 주목하여 해석하고자 하는 한형조(1996)는 이 신해가 알음알이로서 깨달음, 즉 지해(知解)와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신해는 지적 확신으로서 신(信)과 지적 통찰, 즉 돈오로서 해(解)가 합해진 경지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지적 확신은 지적 통찰에 이르는 준비이고, 지적 통찰은 지적 확신을 종교적 확신으로 심화시켜 주는 상보적 관계’에 있는 개념들이라고 말한다. 돈오 개념을 신해와 동일한 개념으로 설정하면서 지눌의 깨달음을 지해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한형조의 논의는 이해(理解)라는 개념을 오늘날의 우리 상황 속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현대 교육학의 개념으로서 이해는 주로 지적 이해를 의미하고, 그것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실천 또는 실제 영역과의 괴리 또는 구분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이해란 주로 머리로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해 개념은 오늘날 학교 교육의 목표를 ‘숙고할 수 있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려 깊은 시민을 길러내는 것’으로 규정해온 존 듀이와 넬 나딩스의 교육철학적 논의에서도 쉽게 확인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이 목표 속에 포함된 숙고나 판단, 사려 등의 이해 관련 개념이 실천을 배제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실천과 직접적인 연계성을 갖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지눌의 깨달음 개념을 현재적으로 해석한 바탕 위에서 논의를 전개해 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현대 교육학의 이해 개념이 침투될 가능성을 염려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 일상적인 담론체계 속에서 전통종교로서 불교를 전제로 하는 깨달음과 관련된 이해 개념을 떠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내 안에 부처 또는 불성(佛性)이 자리하고 있다는 대승적 믿음이 지눌의 깨달음 개념이 지닌 첫 번째 특징임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형조의 표현에 따르면, 깨달음의 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지적 확신으로서의 믿음이 전제된 이해 개념이 바로 지눌의 깨달음이다.

그런데 내 안에 부처, 또는 불성(佛性)이 있음을 믿는 이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이 명제는 사실 우리에게 구체적인 어떤 내용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추상적 수준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하다. 필자는 이 명제를 존재의 실상과 관련된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과 그 존재의 실상을 깨닫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으로부터의 물러섬을 전제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존재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존재의 실상에 관한 온전한 이해로서의 깨달음이다. 이 실상은 일차적으로는 지적 이해의 대상으로 규정지을 수 있고, 붓다는 그 지적 이해의 과정을 존재의 실상에 관한 외부를 향하는 시선과 자신의 내면을 향하는 내면적 시선을 적절히 조화시킴으로써 온전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21세기 초반 한국 상황 속에서도 존재의 실상에 관한 이해는 중요한 실존적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자신의 존재가 지니는 관계성 또는 연기성(緣起性)에 관한 이해와 수용은 인류가 직면한 존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절박한 요청으로 다가오고 있기도 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기심과 함께 공감 능력을 찾아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이 최근 구체화되고 있는 것도 이런 절박함과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실상에 관한 이해와 수용으로서의 깨달음이 관련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닐 수 있을까?
이 물음은 깨달음을 통한 탐욕과 성냄이라는 감정적 영역의 욕구와 충동의 극복 또는 해소 가능성을 찾고 있는 우리 논의와 직결된다. 이해가 주로 지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수용은 그 영역을 넘어서서 정의적 영역, 즉 가치관의 영역 속에까지 확장되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감안하면 올바른 이해와 그것의 수용으로서 깨달음이 탐욕과 성냄을 극복하거나 해소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주장은 상당한 정도의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 그런 상황과 직면했을 때 어느 정도 구체적인 성과로 연결될 수 있을지는 쉽게 단언하기 어렵다. 오히려 부정적인 사례와 마주하게 되는 일이 더 많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가능성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존재 실상에 관한 지적 이해와 체험적 수용은 그 실상에 부합하는 삶에 관한 지향성을 가져올 수밖에 없고, 그 지향성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반드시 그 실천적 흔적을 남기게 된다. 물론 지향성이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 더 많은 경험적 증거를 들어 가능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실상에 관한 이해의 실패를 의미할 수 있다. 자신의 탐욕과 성냄이 존재의 실상과 일정하게라도 부합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분노해야 할 일을 보고 성냄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그 분노를 자아내는 존재자는 물론 나 자신의 존재성에 부합하는 일이 될 수 있다.

탐욕의 경우는, 우리의 생존 자체가 최소한의 소유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시 일정한 정당화 근거를 지닌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고, 따라서 불교윤리의 지향점은 무소유라기보다 무집착(無執着)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 실상, 즉 최소한의 소유와 타자 의존적인 소비, 타자와의 연기적인 관계성이라는 우리 존재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과 결과로서 깨달음은 그 자체로 어리석음의 극복일 뿐만 아니라, 탐욕과 성냄으로 상징되는 존재의 독소를 극복하거나 그 자체로 해소하게 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남는 문제가 있다면, 이러한 가능성을 우리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하는 일상적 실천의 과제이다.

3) 일상 속 깨달음과 탐진치의 관계

존재 실상에 관한 직시를 중심으로 하는 깨달음 개념에 근거해서 일상 속 늘 마주해야만 하는 분노와 탐욕을 극복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우리의 기본 테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실천적 과제를 통해 일정하게 그 정당화 기반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 존재 실상을 직시하는 과정은 다시 외부의 사태, 즉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세상일들에 관한 관찰(觀察)과 그것과의 관련 속에서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관한 성찰(省察) 또는 관조(觀照)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세상일들에 대한 관찰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신의 관점, 즉 상(相)의 형성을 통해 가능하다.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자신만의 관점으로서 상은 《금강경》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설정되지만, 그 극복의 전제는 바로 상의 형성이다. 자신의 관점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데 그것을 넘어서는 일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세상 공부를 통해 자신만의 관점을 형성하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교사나 부모, 학문에 근거한 다양한 지식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상의 형성은 이러한 의도적인 노력과 함께 자신의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단계를 넘어설 경우 자신의 상이 지닌 한계, 즉 선입관이나 편견 등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만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관한 성찰, 또는 관조는 세상에 대한 관찰보다 더 어려운 과제에 속한다.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성찰의 대상으로 내놓는 일 자체가 의도적인 거리 두기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데, 자신과의 의도적인 거리 두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명상 같은 수행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명상의 구체적인 성과에 초점을 맞추는 전현수(2013)에 따르면, 명상의 핵심 특징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불교 명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다시 자신의 몸과 마음 상태의 변화를 관찰하는 위빠사나와 마음을 하나에 모으는 훈련인 사마타로 구별될 수 있다. 들숨과 날숨을 대상으로 하면 위빠사나는 그 변화와 흐름 자체에 주목하여 관찰에 초점을 맞추는 데 비해, 사마타는 들숨 날숨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주력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와 사마타의 수행 중에서 한국불교의 주된 수행법인 간화선은 사마타에 속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흩어지는 마음을 화두에 집중하여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 곧 간화선이다. 이때의 화두는 전통적인 화두부터 현재 자신의 생활세계 속에서 스승으로부터 부여받았거나 스스로 설정한 것 모두가 될 수 있다. 필자 자신의 수행 방법은 숫자를 하나부터 백팔에 이르기까지 세면서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인데, 스스로 ‘일상의 백팔 수행’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전철이나 버스 속에서, 아니면 소란스러운 커피점 같은 곳에서 들숨과 날숨을 하나로 묶어 숫자로 세어가는 이 방법은 사마타 수행의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 거기에 특정한 화두를 더하면 간화선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 수행법은 특히 분노를 조절하는 데 효과가 있고, 무언가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을 다스리는 데도 일정한 성과를 보고 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분노와 탐욕이 온전히 모두 극복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일상 속 수행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일에 분노하고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는 자신의 깜냥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자 노력하는 정도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공(空, emptiness)의 진리 세계에 거주하는 것은 자신이 몸과 마음을 통해 느끼는 모든 현재에 집중해서 더 이상은 습관적인 반응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고자 하는 지난한 노력의 과정 자체’일 수 있다. 자신의 일상과의 거리 확보를 전제로 하는 외부를 향한 관찰과 내면의 몸과 마음을 향한 성찰의 과정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명상의 과정이다. 이러한 명상을 일상 속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마련하고, 더 나아가 주말이나 휴가 등을 활용하여 수행공동체에 스스로를 소속시키는 노력을 병행해감으로써 즉각적인 분노와 탐욕의 감소는 물론, 그 유혹에 저항할 힘을 내장하는 성품의 형성 또한 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다.

이 목표 달성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전통적인 방법은 계율 준수이지만, 우리에게 계율은 사분율과 대승계 모두를 포괄하는 복잡성과 시대적 불일치 문제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실천적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계율이 ‘이기적인 탐욕의 삶을 극복하고 무아적인 종교적 삶으로 인도하는 가교적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계율, 특히 시민으로서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제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그 종교적 삶이 일상의 삶과 분리되지 않게 하는 깨달음의 일상화가 함께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4. 맺음말

우리의 시대는 자신 삶의 공간을 사소한 일에 대한 성냄으로써 짜증과 불필요한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이끌어가는 군상들로 가득한 시간이자 공간이다.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소유를 이미 넘어서 버린 집착은 그 존재성을 지속적으로 무너뜨리는 기제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고, 불의한 상황에 대한 정당한 분노나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에 대한 정상적인 분노를 넘어서는 짜증으로서 성냄은 타자와의 관계는 물론 자신과의 관계를 무너뜨려 인격 자체의 훼손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탐욕(貪慾, greed)의 시대를 넘어서 공감(共感, empathy)의 시대로 가야만 한다는 요청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그 구체화된 모습은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 이 시대와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속도와 함께 그림자를 동반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밝음만을 추구하는 문명의 흐름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 실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고, 우리는 이것을 우리 시대의 깨달음에 대한 정의로 차용하고자 했다. 깨달음은 자신의 존재 실상에 관한 직시이고, 그 직시는 다시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관찰과 내면을 향하는 성찰을 포함한다. 이 관찰과 성찰의 과정은 또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삶의 의미 물음으로 이어진다.

깨달음의 과정은 그 자체로 어리석음의 극복 과정이고, 더 나아가 꼭 필요한 소유와 정당한 분노를 넘어서는 탐욕과 성냄을 다스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생과 붓다의 근원적인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 안에 있는 붓다를 바라볼 수 있는 수행을 강조한 대승불교의 정신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으로서 소유와 분노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지 않는 걸림없음[無碍]의 미학과 윤리로 구체화된다. 꼭 필요한 것을 찾아 소비하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여여함의 경지가 대승불교에 기반한 수행자로서 보살이 추구하는 윤리적 지향점이자 종교적 지향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향을 자신의 일상 속에서 구현해갈 수 있는 자신만의 수행법 실천과 함께 지속적인 사부대중 수행공동체의 울타리에 자발적으로 속하고자 하는 실천을 통해 삶의 의미 물음을 보다 굳건하게 간직해낼 수 있을 것이다. ■

 

박병기 /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장으로서 2015 초 · 중 · 고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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