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깨달음에 관한 여덟 가지 담론

요가(Yoga), 인디아 문화의 꽃

요가(Yoga: dhyāna, 禪)의 깊은 명상수행은 직관, 즉 단숨에 진리를 꿰뚫어버리려는 독특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에게는 진리를 탐구하는 유일하고도 진실한 방법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여 요가(dhyāna, 禪)의 깊은 명상을 하면, 그 이름이나 형상은 사라져버린다. 말로 표현하여 보려고 하는 것, 마음으로 사유하여 보려고 하는 것, 어떤 표시로 표현하여 보려고 하는 것, 지각하여 보려고 하는 것, 분별하여 보려고 하는 것은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최후에 남는 것은 실상 그것뿐이다. 실상(實相), 그것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형상으로도 그려낼 수 없고, 시간적으로도 무한하며, 공간적으로도 무변하다.

요가라는 깊은 명상수행의 전통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인디아의 문화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통찰하지 않고서는 그 진상을 이해하기 힘들다.

인디아의 성지를 순례한 불자라면, 누구나 다 거의 이런 광경을 목격할 것이다. 아득히 저 멀리 펼쳐지는 광활한 지평선, 비옥하고 기름진 땅에 싱싱하고 풍요롭게 자라는 곡창의 보고. 우리나라처럼 춘 · 하 · 추 · 동 네 계절이 분명한 것이 아니라, 삼제시(tri-kāṇḍaka, 三際時)라고 하여 열제시(grīṣma, 1.16~5.15) · 우제시(varṣā, 5.16~9.15) · 한제시(hemanta, 9.16~1.15)의 세 계절을 반복하는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더운 날씨, 크고 작은 강들이 많이 흐르는 풍부한 수량, 이런 기후 · 풍토의 조건들이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디아에 한번 발을 붙인 민족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그곳에 정착하여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일찍부터 인디아를 다민족 사회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민족마다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가 있을 것이고, 자신들이 정립한 사상이 있을 것이며,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일군 관습도 있을 것이고, 민족적 특성을 지닌 사유체계도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요소들이 모여 거대한 인디아의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상/철학/종교/관습도 다양성을 특성으로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삶이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문화를 창조하는 힘이 강하게 작용한다. 원활한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사회질서나 공중도덕과 같은 사회규범을 확립한 다음에는, 새로운 지성의 세계를 개척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욕구가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디아는 일찍부터 이와 같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 놓았기 때문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근원을 묻는 철학/종교의 사유체계를 정립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정신세계의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며, 창안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를 캐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길을 텄다. 그것이 고행(苦行, Tapas)이며 요가(Yoga)이다.

어느 학문이나 그렇듯이 요가도 인디아의 6파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이론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빠딴잘리(Patañjali)의 《요가경전(Yoga-sūtra)》처럼 완성된 이론체계가 형성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린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 기원을 선주민인 문다족(Muṇḍa)과 드라위다족(Draviḍa)에 두는 것이라면, 그 역사가 결코 짧은 것은 아니다.

흔들리는 마음, 요동치는 마음, 산란한 마음, 복잡한 마음, 호오를 가리는 분별 작용으로는 진리를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보는 사람은 우주의 실상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우주의 실상을 보는 사람은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주의 근원적인 문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놓고 대론을 전개할 수 있는 인디아의 지성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인디아에서 출현한 거의 모든 종교는 자신의 몸을 던져 요가와 고행(Tapas) 수행을 하고 있다. 불교도 역시 불교의 독창성과 정체성을 내세우면서도, 어느 부분은 불교 이전에 형성된 인디아의 문화를 수용하여 더욱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요가경전》에서처럼 8지 요가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리적인 면에서는 요가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식 · 조신 · 조심의 원융무애한 창조성 

완전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려면, 뿌리, 줄기, 가지, 잎, 나무껍질, 수액, 꽃과 열매를 모두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요가도 이와 똑같이 금계(禁戒), 권계(勸戒), 조신(調身), 조식(調息), 제감(制感), 응념(凝念), 선정(禪定), 사마디(Yoga has Yama, Niyama, Āsana, Prāṇāyāma, Pratyāhāra, Dhāraṇa, Dhyāna and Samādhi.)의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모두 갖추어 닦을 때 완전하고 온전한 수행이 되는 것이다.

이들 구성요소는 각각 분리된 주체성을 가지지만, 각 구성요소 하나로는 나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요가도 그와 꼭 같은 이치이다. 모든 부분이 모여서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것처럼, 여덟 가지 요소들이 모두 조화를 이루어야 진정한 요가의 수행이 된다.

예를 들면 감정조절(Pratyāhāra)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요가를 완성할 수 있을까! 흥분한 마음, 들떠 있는 마음, 불안한 마음으로는 아무리 가부를 틀고 앉아 있어도 정신통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감각의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아 안정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마치 현미경으로 미세한 사물을 관찰하려고 할 때, 먼저 현미경을 깨끗이 닦고 완전히 조립되어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음에는 글라스 위에 관찰하려는 물체를 올려놓고 볼록렌즈의 초점을 맞추는 작업을 한다. 이때 거리가 맞지 않거나 볼록렌즈를 자꾸 움직이거나 더럽히거나 하면 초점이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동요하거나 흥분한 상태거나 망상이 많거나 산란하거나 술이나 마약에 취해 버리면 마음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볼록렌즈의 초점이 맞지 않으면 관찰하려는 물체의 미세한 조직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마찬가지이므로 잡다한 잡념을 말끔히 씻어버리지 않으면 응념(Dhāraṇa)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응념은 볼록렌즈를 통과한 햇빛을 모으는 초점처럼, 자신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은다는 말이다. 탐욕에 불타거나, 몹시 분노하거나, 남을 원망 · 질투 · 시기하거나, 간교한 계책으로 속이려고 하는 마음이 치성하면 절대로 마음을 통일할 수 없다.
볼록렌즈를 통하여 초점을 잘 맞춘 다음에는 관찰하려는 물체의 조직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을 현미경에 가까이 하여 접촉을 한다. 눈을 마구 움직이지 않고 살며시 붙이고 잘 들여다보면 관찰하려는 물체의 섬세한 조직이 훤히 보일 것이다. 이 단계가 선정(Dhyāna)이며, 우리는 이때 선정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미경 속에서 관찰하려는 물체의 섬세한 조직이 명료하게 보이는 것처럼, 세상의 이치, 만물의 실상, 우주의 원리,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현미경에 눈을 붙인 채, 보이는 대로 조직을 종이에 그려보기로 한다. 눈을 떼었다 붙였다 할 일이 없다. 신통하게도 현미경의 렌즈를 통하여 보이는 대로, 그 모양이 종이 위에 옮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종이에 관찰하려는 물체의 섬세한 조직을 옮기는 일에 몰입하면, 조직을 관찰하거나 그린다는 의식도 없이 종이에 섬세한 조직이 드러날 것이다. 이와 같은 단계를 사마디(Samādhi, 三昧)라고 한다. 이미 불교가 출현하기 이전에 인디아에는 이와 같이 요가를 닦아 깨달음을 얻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인디아에서 발원한 종교는, 요가의 원리를 잘 살려가면서,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내연을 과학적/종교적/철학적으로 심화시키고, 외연을 넓혀서 더욱 섬세하고 구체화시켜 수행의 풍토를 형성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조식(調息, Prāṇāyāma) · 조신(調身, Āsana) · 조심(調心, dhyāna)을 요가의 핵심으로 삼아, 절묘한 방법으로 회통하여 수행을 지도한다. 연기의 법칙으로 보면, 몸과 마음이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몸이 없는 마음은 귀신이고 마음이 없는 몸은 송장이다. 몸과 마음을 함께 한 사람이 극락/천당에 가야지, 어느 한 쪽만 극락/천당에 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바디-마인드 요가(Body-mind Yoga)의 수행법은 종교적일 뿐 아니라, 과학적이고 의학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불교는 사마디의 단계로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완성하는 길로까지 더욱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지혜는 지식과는 다르다. 달걀의 알맹이가 흰자와 노른자이듯 지혜의 알맹이는 대자(大慈)와 대비(大悲)이다. 달걀에서 흰자와 노른자를 빼버린 빈 껍질은 달걀이 아닌 것처럼, 대자와 대비를 빼버리면 지혜가 아니다. 지혜의 알맹이는 대자와 대비이다. 대자와 대비로 홍익중생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가수행의 전통은 인디아에서도 꾸준하게 이어져 오고 있고, 불교의 내부에서도 꾸준하게 계승되고 있다. 다만 오랜 세월과 지역적인 특성 그리고 경전의 해석이나 수행자의 체험에 따라서 많은 유파가 형성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문화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에서 깨달음의 정의

깨달음에 관하여 《묘법연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성문에게는 사제팔정도를 갈고 닦도록 가르쳐서 생로병사를 제도하여 니르와나(nirvāṇa, 涅槃)를 성취하게 하고, 연각에게는 십이연기를 갈고 닦도록 가르쳐서 니르와나를 성취하게 하며, 그리고 보디싸뜨와에게는 6빠라미따를 갈고 닦도록 가르쳐서 안웃따라쌈역쌍보디(Anuttarayam samyak saṃbodhi,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하여 일체종지를 성취하도록 한다.

소승과 대승의 수행의 전통으로는, 인아견(人我見)을 깨뜨리고 인무아(人無我, pudgala-nairātmya)를 요해하는 것은 공통이지만, 법아견(法我見)을 타파하고 법무아(法無我, dharma-nairātmya)를 성취해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수행법에 관해서는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인무아와 법무아를 모두 증득하는 것을 완전한 깨달음으로 본다.

범부나 이승을 보면. 범부는 유(有)에 집착하는 아집, 이승은 무(無)에 집착하는 법집에 매달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범부는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五蘊, pañca skandha)가 가화합하여 인간이 구성된 것임을 모르고, 우리의 신체 속에 아뜨만(我, ātman)이 실재한다는 헛된 생각을 하는 인아견에 빠져있고, 이승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五蘊)가 실체가 아닌 것임을 모르고, 실체로서의 법(法, dharma)이 집합하여 성립된 것이라는 헛된 생각을 하는 법아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법을 실체로 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그렇게 되면 생사의 고뇌도 논리적으로는 실재가 되기 때문에, 이승에게는 고뇌가 두려움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성문 · 연각의 이승은, 법무아를 알지 못하고, 오온이 실제로 생성 · 소멸하는 실체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태어남과 죽음의 고뇌가 실재한다고 생각하며, 태어남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니르와나를 얻으려고만 한다. 니르와나를 증득해야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므로, 생사의 세계 속에서 니르와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밖에서 니르와나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 니르와나는 허무한 것으로 되어버린다.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는 공(空)의 입장에서 우주의 실상을 바라보면, 세간은 그대로가 니르와나이므로, 성문·연각과 같이 세간을 싫어하고 니르와나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문 · 연각의 이승은 니르와나를 성취해야 세간에서의 생사윤회가 끊어져버릴 것이라는 헛된 생각을 하고 있으므로 무(無)에 집착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승에서는 그것을 진실한 니르와나로 보지 않기 때문에, 생사의 세계 속에서 니르와나를 희구하는 것이지 생사의 밖에서 니르와나를 따로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대방광불화엄경》 〈이세간품 제38〉에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니르와나를 얻으려는 수행을 삶과 죽음을 끊어버리지 않고 상속하면서 한다.
요가행파의 인 · 법 이무아(二無我)에 관하여

요가행파(瑜伽行派, Yogācāra)는 깨달음에 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미 《유식삼십론송》 제1 게송의 첫 줄에서 아(我)와 법(法)을 전제하는 것을 보더라도, 요가행파에서의 깨달음에 관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추론할 수 있다.
 
거짓 꾸며서 我 · 法을 말한다(ātma dharma upacāra).

진리 그 자체는 언어를 벗어난 것이므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은 호오(好惡) · 시비(是非)의 분별을 하기 때문에, 언어 그 자체는 진실이 아니므로 진리를 언표하면, 상대적인 개념에 의하여 그것이 바로 세속화되어 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언어를 빌리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 개념의 언어를 빌려서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는 아(我, ātman)와 법(法, dharma)이 집착의 대상이 되면, 그것이 바로 병이 되는 것이므로, 도리어 아와 법을 빌려서, 그것을 차단하려고 한다.

요가행파는 어떻게 하면 인무아(人無我, pudgala-nairātmya)와 법무아(法無我, dharma-nairātmya)를 통하여 진여를 드러나게 할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삼는다. 진여(眞如, tathatā)란, “사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욱 넓고 포괄적인 의미로는 모든 존재의 궁극적 진리를 의미한다. 아공 · 법공의 진여란, 자아(我, ātman)가 실재한다고 믿는 아집, 그리고 사물/존재(法, dharma)가 실재한다고 믿는 법집을 깨뜨릴 때 나타나는 진리이며, 그것이 자기를 포함한 전 우주의 참된 실상이다. 이 우주의 참된 모습을 가리고 있는 미혹/망상이 아집과 법집이라고 하는 인간의 내적인 마음의 추하고 더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아집에 의하여 번뇌장(煩惱障, kleṣa-āvaraṇa)이 생겨나며, 법집에 의하여 소지장(所知障, jñeya-āvaraṇa)이 일어난다. 이 두 장애 때문에 우리 인생은 생사윤회를 반복하므로, 깨달음을 얻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번뇌장이란 정의적(情意的)인 것으로 마음이 추하고 더럽게 물든 현상이며, ‘자아는 실재한다’고 믿는 아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지장이란 지적(知的)인 것으로 마음이 추하고 더럽게 물든 현상이며, ‘외계의 사물이 실재한다’고 고집하는 법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번뇌장이 동인이 되어 생사의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윤회를 하며, 소지장의 힘에 의하여 깨달음을 장애하므로 붓다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인무아 · 법무아, 두 무아의 진여에 관한 바른 앎을 얻어, 번뇌장을 끊어버리면 생사의 바다에서 벗어나서 참된 해탈을 성취하며, 소지장을 끊어버리면 보디(bodhi)를 증득하여 붓다가 된다.

여기에서 ‘해탈’과 ‘보디(bodhi)’라고 하는 두 용어의 개념은 어떻게 다른가?

‘해탈’이란 mokṣa 또는 vimokṣa의 번역어로서, mokṣa는 √muc(해방하다)에서 비롯된 말로 ‘해방을 맞은 상태, 자유를 얻은 상태’가 본래의 뜻이다. 인디아의 사상계에서는 ‘깨달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많이 쓰이고 있다. 괴로움의 존재, 생사윤회의 생존의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더 이상 태어나는 일도 죽는 일도 없는 안락세계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해탈을 니르와나라고도 말한다. 니르와나는 탐 · 진 · 치, 삼독의 번뇌의 불꽃이 꺼져버린 평화롭고 안락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소승의 수행자들이 번뇌장만을 끊어버리고 인무아를 얻어 니르와나에 안주하면서 만끽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보다 고차원의 깨달음의 세계, 진실의 세계를 주창하는 것이 보디(菩提, bodhi)이다.

‘보디(菩提)’란 bodhi의 음사로서, bodhi는 √budh ‘깨닫다’에서 비롯된 단어로 ‘지적인 증오(證悟)’가 본래의 뜻이다. 샤끼야무니 붓다(Śākyamuni-Buddha, 釋迦牟尼佛)께서, 스스로 “나는 붓다(Buddha)이며, 안웃따라쌈약쌍보디(Anuttarayamsamyaksaṃ-bodhi,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었노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보디(bodhi)는 붓다인 것을 드러내는 내용이며, 붓다의 핵심이다.

보디(bodhi)란 무엇에 대한 바른 앎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소지장마저 끊어버리고 법무아를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法, dharma)은 자기의 마음을 떠나서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통달하는 것이다. 법집을 벗어나서 소지장을 끊어버리고 대보디(mahābodhi)를 증득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대승불교에서의 깨달음은 단순하게 자기의 본질인 인무아만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사물의 본질인 법무아마저도 성취해야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주장한다. 번뇌장 · 소지장의 이장(二障)과 인무아 · 법무아의 이무아설(二無我說)은 인디아의 대승불교에 있어서 소승에 대한 대승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교설이기 때문에, 소승과 대승을 구별하는 용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승불교에서 보디(bodhi)를 얻은 붓다를 일체지자(一切智者, sarva-ākārajñatā)라고 높이 숭앙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여래장사상의 인 · 법 이무아(二無我)에 관하여

한편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을 해석하기 위하여 미리 저술한 《이장의(二障義)》에서 이장(二障)에 관하여 아주 독창적이고 독특한 해석을 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것을 번뇌애와 지애, 이애(二碍)라고 부르는데, 그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명에 의하여 생겨나게 된 ‘더럽게 물든 마음’은, 마음이 분열하여 주관으로 갈라서는 심리상태와 그곳에 마음이 분열하여 객관으로 갈라서는 심리상태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더욱 망념에 의한 분별을 거듭하여 객관의 모습에 집착하며, 평등을 근본으로 하는 진여근본지에 위배함으로, 이것을 ‘번뇌에 의한 장애(煩惱碍, kleśa-āvaraṇa)’라고 부른다.

또 일체의 모든 것은 본래 적정하며, 그곳에는 망념에 의한 분별이나 출렁거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진여의 진실한 상태에 대한 무명이 존재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마음의 본성을 위배하는 것이며, 거룩한 붓다가 모든 미혹하는 세계에 출현하여 많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특질에 맞춰 자비를 베푸는 지혜의 작용을 방해함으로, 이것을 ‘지혜의 장애(智碍, jñeya-āvaraṇa)’라고 부른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이애(二碍)를 해석하기 위하여, 《기신론소(起信論疏)》를 쓰기 전에 먼저 《이장의》를 저술했다. 이는 원효의 《기신론소》의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하여 명확하게 알 수 있다.

二障의 뜻을 밝힌다. 현료문(顯了門) 가운데에서는 二障이라 부르고, 은밀문(隱密門) 안에서는 二碍라고 부른다. 이 뜻은 모두 《二障義》에서 해설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장의》의 내용을 크게 과분하면, 현료문과 은밀문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현료문이 요가행파의 이장(二障)을 분석적으로 서술한 것이라면, 은밀문은 여래장 사상의 이애(二碍)를 총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요가행파의 번뇌장과 소지장을 현료문에 배당하고, 분석적 · 조직적 · 체계적 · 논리적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현료문에서의 번뇌 · 소지의 이장(二障)을 은밀문의 번뇌애로 흡수하여 버리는 논법을 구사하고 있다. 지애(智碍)를 해석하면서는 《슈리말라데위씽하나다경》(Śrīmālādevī-siṃha-nāda-sūtra,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과 《보살영락본업경》에서의 무명주지(無明住地)를 근거로 하여 해석하고 있다.
원효는, 육염심을 번뇌애로 해석하고, 번뇌애 속에 현료문의 번뇌 · 소지 이장을 흡수하여 버린다. 이것을 근거로 추론하면, 원효는 은밀문 안에 현료문을 내속시키는 논리의 전개인 것이 명료하므로, 여래장 사상을 중심축으로 하여 유식사상을 융회 · 통섭하려고 하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론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무아를 성취하여 니르와나를 증득하고, 법무아를 성취하여 보디(bodhi, 菩提)를 증득해야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고해의 바다인 유전연기의 세계를 어떻게 하면 환멸연기의 세계로 전환시킬 수 있느냐를 문제로 삼는 것이다. 요가행파에서는 전의(轉依, āśraya-parāvṛtti)의 이론을 중심으로 하고, 여래장 사상은 훈습(熏習, vāsanā)의 이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요가행파에서 전의(轉依)란 어떤 내용인가?

그것은 번뇌장 · 소지장의 두 가지 추중(麤重)을 잘라버리므로, 바로 광대한 전의를 잘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依, āśraya)란 소의(所依)를 가리키며, 의타기를 말한다. 그것은 염(染)과 정(淨)의 법을 위한 소의가 되기 때문이다. 염(染)이란 허망한 변계소집을 가리키며, 정(淨)이란 진실한 원성실성을 가리킨다. 전(轉, parāvṛtti)이란 염과 정의 두 가지를 전사(轉捨, 버림)하여 전득(轉得, 얻음)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무분별지를 수습하여, 알라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에 내재되어 있는 번뇌 · 소지, 이장(二障)의 추중(麤重)을 단절하기 때문에, 의타기의 변계소집을 잘 전사하며, 그리고 의타기 속의 원성실성을 전득한다. 번뇌장을 전사하는 것에 의하여 마하니르와나를 얻으며, 소지장을 전사하는 것에 의하여 무상보디(無上菩提, anuttarabodhi)를 깨닫는다.

어떻게 해서 두 가지 전의를 증득하는가?

십지(十地) 가운데에서 열 가지 수승한 만행을 닦아, 열 가지 중장(重障)을 단절하고, 열 가지 진여를 깨달으며, 두 가지 전의를 이것에 의하여 증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허망한 분별에서 올바른 변별로의 전환 구조를 전의(轉依, āśraya-parāvṛtti)라고 하는 개념을 활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추론하면 전의라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의(依, āśraya)를 바꾸는 것(轉, parāvṛtti)’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의(āśraya)’란 염법(허망한 것)과 정법(진실한 것)의 의지할 곳을 가리키며, ‘전(parāvṛtti)’이란 염법을 버리고(轉捨), 정법을 얻는 것(轉得)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구(假構)된 존재형태(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와 완성된 존재형태(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는, 타자에 의존하는 존재형태(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에서의 미망의 측면(雜染分)과 오도(悟道)의 측면(淸淨分)을 형성하고 있으며, 미망의 측면인 가구된 존재형태를 전사하고, 오도의 측면인 완성된 존재형태를 전득한다고 하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래장 사상에서는 훈습(熏習, vāsanā)에 관하여 어떻게 해설하는가? 《대승기신론》에서는 훈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훈습(vāsanā)이란, 예를 들면, 의복은 본디는 향기가 없는 것인데, 이것에 향내를 배게 하면 본디는 향내가 없던 의복에도, 향내가 배기 마련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진여의 맑고 깨끗한 작용은 본디 때 묻지 않은 아주 깨끗하고 고운 작용이며, 그곳에는 아무런 더러움도 존재하지 않는데, 무명이 진여에 훈습하여, 그 작용을 발휘하게 되면, 본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진여도 무명에 동화되어서 더럽고 추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또 무명의 더럽고 추한 작용은, 본디 아무런 깨달음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진여가 무명에 훈습하여 그 작용을 발휘하게 되면 도리어 거기에 마음을 정화시키는 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진여의 힘이 내부로부터 그 본래의 힘을 발휘하는 것과 진여의 힘이 외부로부터 붓다 · 보디싸뜨와의 교화 작용으로서 발휘하는 것을 가리킨다. 전자를 내훈(內熏)의 힘, 후자를 외훈(外熏)의 힘이라고 말한다. 훈습이란 강력한 힘이 다른 것에 작용하여, 상대를 동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꽃의 향기가 의복에 옮겨 퍼지는 것을 비유로 들 수 있다. 이 경우는 알라야식(阿梨耶識, ālaya-vijñāna)으로서 자기에게, 진여가 내훈과 외훈으로 작용하여 알라야식에 깨달음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을 말한다.

땡감이 익어서 홍시가 되는 이치

밥을 굶고서도 배가 부를 수 있는가?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전미개오(轉迷開悟) ·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원리는 오뉴월 땡감이 익어서 동지섣달 홍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범부가 수행을 하여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대승에서의 수행법은 육바라밀이고, 근본원리를 진여인 법성에 두고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첫째, 먼저 진여인 법성에는 인색함과 탐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법성의 공덕을 따라서 다나 빠라미따(dāna-pāramitā; 布施)를 수행한다.

둘째, 진여인 법성에는 번뇌가 전혀 없고, 자성이 맑고 깨끗하며 오욕의 쾌락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더럽게 물들음이 없고 탐욕이 사라진 법성을 따라서 쉴라 빠라미따(śīla-pāramitā, 持戒)를 수행한다.

셋째, 진여인 법성에는 고뇌가 전혀 없으며, 분노심이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법성의 공덕을 따라서 끄샨띠 빠라미따(kṣānti-pāramitā, 忍辱)를 수행한다.

넷째, 진여인 법성에는 몸과 마음을 차별하는 일이 없다. 몸과 마음을 차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을 알고, 이 법성의 공덕을 따라서 위리야 빠라미따(virya-pāramitā, 精進)를 수행한다.

다섯째, 진여인 법성은 언제나 고요한 마음에 들어있으므로 망념이 없다. 망념이 없으므로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법성의 공덕을 따라서 디야나 빠라미따(dhyāna-pāramitā, 禪定)를 수행한다.

여섯째, 진여인 법성은 그 자체에 밝은 지혜를 갖추고 있으며, 무명을 벗어났다는 것을 알고, 이 법성의 공덕을 따라서 쁘라갸 빠라미따(prajñā-pāramitā, 智慧)를 수행한다.

특히 육바라밀 가운데에서도 디야나 빠라미따와 쁘라갸 빠라미따를 ‘샤마타(ṡamatha, 止)와 위빠쉬야나(vipaśyanā, 觀)’의 지관문(止觀門)으로 함축함과 아울러, 이 두 가지를 함께 닦는 것을 수행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수행의 첫 단계에서는, 샤마타와 위빠쉬야나를 따로따로 분리하여 가르치지만, 오랫동안 닦아서 정(定)과 혜(慧)를 성취하면, 움직일 때 · 멈출 때 · 앉을 때 · 누울 때의 일상생활에서 샤마타와 위빠쉬야나를 함께 닦는 것이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샤마타를 닦아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자성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사유한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위빠쉬야나를 닦아서 인연화합에 의하여 생겨나는 선 · 악의 까르마와 고락의 과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파괴되는 것도 아니라고 사유한다.

거꾸로, 위빠쉬야나를 닦아서 인연화합에 의하여 생겨나는 선·악의 까르마를 사유한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샤마타를 닦아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은 불가득이라고 사유한다.

또 샤마타를 수행하는 사람은, 아직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에 욕심을 부려 집착하는 것을 대치함과 동시에, 성문 · 연각의 생사를 싫어하여 세간을 버리는 겁약한 견해를 버려야 한다.
또 위빠쉬야나를 수행하는 사람은, 성문 · 연각의 자비로운 마음을 내지 않는 편협하고 졸렬한 마음의 과실을 대치함과 동시에, 아직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며, 해탈에 매달려 선근을 수행하지 않는 과실을 피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지므로 샤마타와 위빠쉬야나의 두 부문은 서로 도와서 이루어지며,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마타와 위빠쉬야나를 함께 닦지 않으면 거룩한 붓다가 가르치신 깨달음의 길에 들어갈 수 없다.

이와 같이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음으로써 드디어 금강유정(究竟覺)에 이른다. 금강유정에서 깨닫는 순간을, 요가행파에서는 알라야식의 종자가 돈단(頓斷)한다고 말하고, 여래장 사상에서는 알라야식의 화합상이 돈파(頓破)한다고 말하며, 선가에서는 돈오(頓悟)한다고 말한다.

깨달음을 얻는 참되고 바른 자세를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만일 색신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고 하면,
이런 사람은 그릇된 도를 닦는 것이므로,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으로 드러나는 것은 붓다가 아니며, 안 · 이 · 비 · 설 · 신 · 의로는 붓다를 볼 수 없다는 의미이다. 붓다는 진리이며, 진리는 관념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형상으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붓다는 외계 실재가 아니라는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럼 무엇이 참된 붓다인가를 《대방광불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몸도 또한 붓다가 아니며
붓다도 또한 몸이 아니니라.
다만 법으로 몸을 삼으면,
모든 법을 통달한 것이니라.

법신(法身, dharma-kāya)이란 말은, 다르마(dharma, 法)를 몸(kāya, 身)으로 삼는다는 말이며, 이는 곧 진리를 몸으로 삼는다는 가르침이다. 깨달음만이 진리와 만나는 길이며, 너 스스로가 온통 한 덩어리의 진리라는 각성을 하면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깨달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불교의 지상 목표는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인 것이다. ■

 

 

이평래 / 충남대 철학과 명예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일본 고마자와(駒澤) 대학원 졸업(박사). 고마자와대학교 대장경학술용어연구회 연구원, 충남대학교 인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불교학회 이사장, 한국선문화학회장, 원효학연구원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대승기신론 연구〉 〈불교철학에 있어서 심성설에 관한 고찰〉 등의 논문과 《신라불교 여래장사상 연구》 《천수천안 우리님》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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