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2015년도에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으로부터 촉발된 깨달음 관련 주장이 각종 반론을 불러일으키면서 일대 논쟁으로 확대된 바 있다. 이번 논쟁의 출발점은 학문적 연구 성과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불교의 수행풍토에 대한 지적이라는 성격이 컸다. 그런데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다.

깨달음에 대한 논쟁은 사실상 그 본질보다는 완전한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도달하는 방법에 관한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는 경향을 보여준다. 부처님의 성도로 제시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무엇인지, 어떤 상태인지 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궁극의 깨달음은 그것에 도달한 부처님만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인 니까야의 내용을 살펴보면 깨달음과 관련된 논쟁이 부처님 재세 시부터 이미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은 궁극의 깨달음, 해탈과 해탈지견의 체득, 취착 없는 행복의 상태에 도달해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근기의 차이가 작용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부처님은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라고 정해진 바 법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제자들은 다양한 방법과 단계를 거쳐 열반에 도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깨달음의 방법론에 대한 의견 차이가 나타날 수 있었고, 그것은 대론(對論)의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됨으로써 종료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드신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에 관한 논쟁은 누구도 쉽게 결론을 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부처님 재세 시의 직제자와 같은 수준에 도달한 수행자들이라도 많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는 중생’들은 결국 자기 분상(分相)으로 깨달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양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깨달음과 관련된 논쟁은 논쟁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럼에도, 불교계는 각종 논쟁을 지속하였다. 심지어 부처님 재세 시에도 있었고, 불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국의 돈점 논쟁, 티베트의 삼예 논쟁, 스리랑카의 불교와 기독교의 대론, 최근 한국불교계에서 전개된 돈점과 깨달음 논쟁 등 다양하다. 또한 불교계는 이웃종교와의 논쟁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불교와 도교의 논쟁 결과는 억불과 탄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스리랑카에서 전개된 파나두라 논쟁은 불교가 승기를 잡았고, 불교국가를 만드는 데 기여한 면도 있었다.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모든 논쟁을 다 다루지는 못하고, 부처님 재세 시에 전개된 대론과 삼예의 논쟁, 그리고 최근에 한국불교계에서 진행된 논쟁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2. 부처님 재세 시의 대론

부처님 재세 시의 논쟁은 제자들 사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의 차이, 실천 방법의 차이 등에서 비롯되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깨달음과 관련하여 제기된 몇 가지 사례들이 언급되어 있다. 첫 번째 사례는 세 부류의 수행자들 중에서 누가 가장 훌륭하고 고결한 깨달음에 도달한 수행자인가를 논하는 내용이다.

사리뿟따 존자는 사윗타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사리뿟따] “사윗타 존자여, 이 세상에는 몸으로 체험한 자, 견해로 얻은 자, 믿음으로 해탈한 자 등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 가운데 존자는 누가 가장 훌륭하고 고결하다고 보십니까?(A3:21)

이 인용문을 살펴보면 가장 훌륭하고 고결한 상태에 도달하는 부류에 세 종류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부류는 몸으로 체험한 자인데 이들은 신증자(身證者)라고도 하며, 비물질적 선정의 단계까지 성취한 수행자를 의미한다. 둘째 부류는 견해로 얻은 자들인데 이들은 견도자(見到者)라고도 하며, 지혜에 탁월한 수행자를 일컫는다. 그리고 셋째 부류는 믿음으로 해탈한 자들인데 수신행자(隨信行者)라고도 하며, 이들은 삼법인을 체득한 수행자들에 속한다. 수신행자 중에서 그 원리를 지혜로써 통찰하는 자를 진리의 행자 수법행자(隨法行者)라고 한다.

사실, 이와 관련하여 “수행자들이 누가 가장 훌륭하고 고결한 수행자인가를 논하는 것은, 재물을 중시하고 정법을 중시하지 않는 모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부처님의 설법이 있었다. 수행자들이 서로 모여서 누구는 양면해탈을 성취하였고, 누구는 심해탈, 누구는 혜해탈 등을 성취했다고 서로 칭찬하거나 비난하며, 그것으로 이득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논쟁을 통해서 이득을 얻고, 이득을 얻어서 거기에 결박되고 혼미해지고 탐착하게 되어 위험을 보지 못하고 여읨의 지혜가 없어 그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부처님 재세 시에 있었던 두 번째 논쟁 사례는 해탈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부처님께서 설한 네 가지 해탈을 성취하는 방법을 두고 각자 어떤 방법으로 도달했는가를 말하는 내용이다.

[사리뿟따] “존자 목갈라나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이 있습니다. 네 가지란 무엇입니까? 더디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힘든 실천, 빠르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힘든 실천, 더디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쉬운 실천, 빠르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쉬운 실천 등이 있습니다. 존자 목갈라나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실천 가운데 어떤 실천을 통해 스님은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였습니까?” [목갈라나] “벗이여 이러한 네 가지 실천 가운데 나는 빠르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힘든 실천을 통해서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앞서서 사리뿟따는 목갈라나의 질문에 대하여 “빠르면서 곧바른 앎을 수반하는 쉬운 실천을 통해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였다”고 먼저 말하였다. 두 수행자는 빠르게 해탈하였지만 쉽게 혹은 힘들게 성취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이 문답은 앞에서 언급한 심해탈과 혜해탈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사리뿟따가 체득한 해탈은 사선정(四禪定)과 오력(五力)이 조화를 이룬 방법이었다. 목갈라나가 체득한 해탈은 부정관(不淨觀)과 오력(五力)이 조화를 이룬 방법이었다. 이 대론에서도 어떤 해탈 방법이 바람직한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기에 따라서 해탈에 이르는 수행 방법이 다르다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또한 누가 더 바람직한 방법으로 해탈하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깨닫고 나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깨달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밖에도 부처님 재세 시에 데바닷따가 제시한 오사(五事)의 논쟁도 벌어졌다. 데바닷따는 계행의 강화를 통해 법주의 지위를 차지하려는 명분을 제시하였다. 그가 제시한 계목의 내용은 모든 수행자는 평생 숲에서 거주하고, 탁발에 의지하고, 분소의를 입고, 나무 아래에서 머물며, 식육을 금하는 등의 다섯 가지였다. 부처님은 이러한 데바닷따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였다. 데바닷따의 제안은 모든 수행자가 두타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계의 정신을 위배하지 않는다면 근기에 따라서 계행의 실천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에 든 이후 상좌부와 대중부 사이에 벌어진 십사의 논쟁도 계율의 문제였다. 야싸 비구와 바이샬리 비구들 사이에 벌어진 이 논쟁에서 제시된 열 가지 문제는 모두 비법(非法)으로 결정되었고 이로 인하여 교단의 분열상이 나타났다. 당시 벌어진 논쟁의 핵심은 재가신자로부터 금전을 보시받아 수행에 필요한 자구(資具)를 마련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모였다. 불멸 후 약 100년이 지난 후에 벌어진 결집에서 바이샬리 밧지족 출신 비구들의 행위가 정법으로 인정받지 못하자 그들은 1만여 명의 수행자들을 모아서 별도로 율장을 결집하였다. 이로 인해 불교교단 내에 상좌부와 대중부라는 두 개의 부파가 나타났다.

3. 중국 · 티베트불교의 깨달음 논쟁

1) 중국불교의 논쟁

중국불교에서 최초의 대중적인 논쟁이 시작된 것은 남북조시대에 들어와서 ‘정신의 소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여산혜원(334~ 416)이 《사문불경왕자론》에서 ‘형진신불멸(形盡神不滅)’을 주장하면서 격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혜원은 “신체는 사라져도 정신은 소멸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유송(劉宋)의 화가 종병(宗炳, 375~443)이 ‘신불멸(神不滅)’을 옹호하면서 법신상주와 연결시켰다. 이에 대하여 천문학자였던 하승천(何承天, 370~447) 등이 나서서 ‘신멸론(身滅論)’을 주장하면서 반박하였다. 그리고 범진(范縝, 450~515)이 ‘정신과 신체는 불이일체(不二一體)’라고 하는 관점에서 유물론적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분명하게 정신의 소멸을 옹호하였다.

정신의 소멸 여부에 관한 논쟁은 불교계 내부에서보다는 유교(儒敎) 혹은 다른 분야의 인물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엄밀히 불교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불교에서는 일체의 소멸을 주장하는 단견(短見)이나 영구불멸을 주장하는 상견(常見) 모두를 배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불교계에서는 또 다른 논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으로 그 중심에 도생(道生, 372∼434)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생의 ‘돈오론(頓悟論)’은 불교의 중국화에 기여함과 동시에 선종의 핵심원리로 자리 잡았다. 돈오 논쟁은 제7지부터 무생법인을 얻는다는 ‘소돈오(小頓悟)’와 십지(十地) 이상에서 구경각을 깨우칠 수 있다는 ‘대돈오(大頓悟)’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돈오성불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수행자는 도생과 같이 혜원(慧遠) 문하에서 동문수학하고, 구마라집(鳩摩羅什)에게 배운 혜관(慧觀)이었다. 혜관은 〈열반경서(涅槃經序)〉를 저술하면서 점차수행법을 주장하였다. 이 논쟁은 후에 신수(神秀, ?~706)의 북종선과 혜능(慧能, 638~713)의 남종선으로 나뉘어 돈점논쟁으로 이어졌다.

732년 대운사(大雲寺) 활대(滑臺)의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남종의 하택신회(荷澤神會, 668~760) 선사와 북종의 숭원(崇遠) 법사에 의하여 선종의 정통성을 정하기 위한 논쟁이 벌어졌다. 745년 하택신회는 《현종기(顯宗記)》를 저술하고 남돈북점의 현상을 개념화하였다. 그리고 달마(達摩) 이후의 육대 조사들은 “하나하나 모두 단도직입을 말하였고, 곧바로 요달하여 성품을 보며, 점차를 말하지 않았다[一一皆言, 單刀直入, 直了見性, 不言階漸]”라고 주장하였다. 신회(神會)는 당시 부흥했던 북종선에 대항하였다가 유배되었다. 그러나 안녹산의 난 이후 국가정책에 호응한 대가로 숙종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남종선의 흥기에 기여한 바도 있다.

중국불교는 역사 속에서 ‘삼무일종의 난’이라는 엄청난 탄압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 북주의 무제(武帝, 543~578)에 의해 자행된 법난(法難)은 잘못된 논쟁의 결과가 어떤 화를 불러들이는가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되고 있다. 당시 승려의 신분이었던 위원숭(衛元嵩)은 567년 무제에게 불교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불교 승단의 모순점을 비판하면서 불교를 파괴해야 한다는 극단적 상소를 올리고 환속하였다. 이후 무제는 569년 삼교논쟁대회를 7회 개최하였는데 그 결과 불교 사원은 파괴되고 불교 경전은 모두 불태워지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위원숭과 도교의 도사 장빈(張賓)이 벌인 이 사건은 결국 불교와 도교 모두 폐지당하는 의도하지 않았던 법난으로 확산되었다.

중국불교계 내부에서 벌어진 다양한 논쟁은 다양한 종파의 출현과 교학 및 수행체계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정치와 관여되거나 타 종교와의 경쟁 관계 속에서 벌어진 논쟁들은 부메랑이 되어 불교에 타격을 주는 역기능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중국불교계의 사례를 보면 불교다운 논쟁은 ‘서로의 향상과 발전을 위한 대론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2) 티베트불교의 삼예사 대론

티베트에서 전개된 삼예사(bSam yas dgon pa)의 대론은 792년부터 795년 사이에 인도불교계와 중국불교계의 대립과 논쟁의 과정을 말한다. 이 대론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인도불교계와 중국불교계의 기록물들 사이에 다소의 차이가 발견되고 있다. 대론의 핵심 내용과 결과에 대해서도 몇 가지 부분에서 이견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자료만으로 삼예의 대론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면 논쟁의 전개 과정과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삼예사에서 대론은 불교를 국교화시킨 티베트의 티송데첸(742~ 797) 왕이 경전 번역을 위해 인도의 승려들과 네팔의 적호, 주술에 능한 연화생 등을 초청하면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775년 삼예사 건립 불사를 시작하여 3년 후에 대본당을 준공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티송데첸 왕은 대본당 준공을 마치자 샨타락스시타를 초청하여 계사로 정하고 티베트인들에게 구족계를 수지케 하고, 승단을 형성케 하였다. 그리고 779년 불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781년에는 중국 당(唐)을 방문한 티베트 사절단의 요청으로 건중 2년 양수(良琇)와 문소(文素) 등이 라싸로 파견되었다. 786년 티베트가 둔황 지역을 점령한 후 이 지역에서 선풍을 드날리고 있던 선승 마하연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티송데첸 왕의 초청을 받았다. 791년에는 왕자를 잃은 슬픔에 잠겨있던 왕비 몰노(Khri rgyal mo btsan)가 마하연의 가르침을 듣고 제도되었다. 왕비는 동생 쑤짼모갤(Sru btsan mo rgyal) 등 백여 명과 함께 바라뜨나(rBa ratna)를 친교사로 해서 출가하였다.

792년, 당시 경쟁 관계에 있던 인도불교계의 승려들은 마하연의 활동을 제어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들은 중국불교 선종을 대표하는 마하연이 주장하는 돈오선종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근본 교설이 아니므로 정폐(停廢)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마하연이 3년간 서면으로 대론을 함으로써 삼예의 대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들이 앞장서서 중국계 불교를 대표하는 선종을 배제하기 위해 포교금지 조치를 내리도록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대항하여 걸사미(乞奢彌, Myang Sha myi)와 시비마라(尸毘磨羅, rNgegs Byi ma la) 등 티베트 승려 두 사람이 강력하게 항의하며 자살하였고, 30여 명의 승려들은 연판장을 만들어 금지조치가 해제되지 않으면 환속하거나 자살하겠다는 결사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 결과 794년 정월 보름에 포교금지령은 해제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인도불교계는 까말라실라(740~797)를 초청하여 티베트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삼예사의 보리원에서 어전 논쟁이 전개된 것으로 티베트의 저술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마하연의 제자였던 왕석이 편집한 《돈오대승정리결》에서는 이러한 논쟁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논쟁의 전개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자료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쟁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서면 대론과 어전 논쟁의 진위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결과적으로 누가 논쟁에서 승리했는가의 문제이다. 서면 대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전 논쟁의 유무는 마하연 측과 까말라실라 측 기록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인도불교계를 대표하는 까말라실라 측 기록 즉, 티베트의 역사서인 《바섀(sBa bshed, 桑耶寺誌)》의 기록에서는 어전 논쟁이 있었으며, 거기서 마하연이 패하여 물러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마하연 측의 기록인 《돈오대승정리결》에서는 어전 논쟁 자체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돈오선종 금지령이 폐지된 것을 보면 일방적으로 패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중립적 관점에서 삼예의 논쟁을 살펴보면 어떤 형태로든 티베트에서 마하연과 까말라실라와의 대론은 전개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론은 까말라실라가 마하연을 상대로 하여 일방적으로 질문하는 형태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삼예의 논쟁 과정에서는 두 가지 핵심적인 수행 방법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첫째는 성불을 위해서는 선업(善業)의 닦음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이며, 그리고 둘째는 법성 또는 공성의 증득에는 반야에 의한 관찰 또는 위빠사나[觀修]가 필요한지, 아니면 단지 불사(不思)와 부작의(不作意)와 같은 선정(禪定)만으로도 성불이 가능한가이다.

마하연은 북종선 계열의 선사로서 돈오적 해탈론을 주장하였으며, 까말라실라는 유가행중관파에 속하는 샨타락시타의 제자로서 단계적 해탈, 즉 점오적 해탈론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관점은 사실상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논쟁이 일어난 시기에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는지도 불분명하다. 다만 기존의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마하연의 경우, 수행자의 근기를 둔근(鈍根)과 이근(利根)으로 구분하고 예리한 근기를 가진 수행자는 불사불관(不思不觀), 즉 분별심이 타파된 상태에서 곧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까말라실라의 경우는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야의 지혜를 포기하는 것으로 반야의 지혜 없이는 무분별의 법계를 여실히 관찰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반야의 지혜로 여실한 관찰이 없으면 무자성성이라는 공의 이치를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이 까말라실라의 주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돈오와 점오의 문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대론이다. 근기에 따라 깨달음의 접근 방법이 다르다는 마하연의 주장과 반야의 지혜로 사유하고 관찰함이 없으면 올바로 깨우칠 수 없다는 까말라실라의 주장은 전혀 상반된 것도 아니다. 삼예의 종론은 깨달음에 이르는 본질적 논쟁이라기보다는 티베트불교계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잡기 위한 대론의 성격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후 티베트불교에서는 《보리도차제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근기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차제의 수행법이 전통을 형성하였다는 점은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티베트불교는 까말라실라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금강승 불교의 전통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삼예의 대론은 티베트 불교사에 큰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4. 한국불교의 돈점논쟁

1) 성철의 지눌 비판

1981년 출간된 《선문정로》의 저자이며, 종정을 역임한 성철(性撤, 1912~1993) 스님은 한국 선수행에 큰 영향을 미친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돈오점수 사상을 강한 톤으로 비판하였다. 성철이 비판한 핵심 요지는 “지눌의 선사상이 중국의 하택신회, 규봉종밀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은 돈오점수를 신봉하는 지해종도(知解宗徒)”라는 것이다. 또한 지해종도는 “납승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지해는 “정법을 장해하는 최대의 금기”로 “선문의 정안조사들은 모두 통렬히 배척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지눌은 《수심결》에서 돈오(頓悟)를 “마음이 부처인 줄 몰라 밖으로 헤매다가 선지식의 도움으로 홀연히 자신의 본성을 보아 이 성품에는 원래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의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점수를 “본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을지라도, 오랜 기간의 습기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기초하여 공을 이루고 소질을 길러 성인이 되는 수행”으로 정의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깨우치고 나도 닦을 것이 있다’라는 돈오점수적 수행관을 드러낸 것이다.

성철에 의해 촉발된 돈점논쟁은 약 8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지눌을 대상으로 한 비판이었기 때문에 당사자의 직접적인 대론이라기보다는 후학의 일방적인 비판의 형식으로 제기된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뚜렷한 시각 차이가 있었음에도, 시대적 간극 때문에 두 논사들 사이의 직접적인 대론이 전개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이 제기된 지 10년이 지난 1990년 송광사에서 개최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주제의 학술세미나에서 성철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학문적으로 반박하는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이어서 1993년 백련문화재단 학술회의에서는 돈오점수에 대한 비판적 논문이 발표되면서 논쟁을 이어갔다. 그 이후 돈점논쟁을 다룬 단행본과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강건기와 김호성(1992) 등이 《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를 출간하면서 포문을 연 이후, 학계에서는 이효걸(1995)의 《돈점논쟁의 새로운 전개를 위하여》 이덕진(1998)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 등의 논문이 속속 발표되었다.

《선문정로》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돈점논쟁은 성철의 열반 이후 후학들에 의하여 찬반 논쟁으로 이어졌다. 법성과 법정, 김호성 등은 성철의 주장에 대하여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김호성은 ‘해오와 증오는 서로 깨달아가는 양식의 차이이지 해(解)와 증(證)이 지해와 깨달음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논지로 성철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반면에 박성배와 원택 등은 성철의 주장을 옹호하는 글들을 발표하였다. 성철의 상좌인 원택(2006)은 “돈오점수는 능력이나 결심이 모자라는 사람을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돈오돈수는 깨달음의 지름길인 셈이다.”라는 논지로 스승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그렇지만 돈점논쟁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논문은 두 주장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형식을 띠면서 가치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논자들이 많았다. 이런 입장에 선 대표적인 학자는 박태원(2001)이다. 그는 〈돈점논쟁의 비판적 검토〉에서 “보조의 돈오점수는 깨침과 닦음의 관계를 밝히는 것인 데 비하여, 성철의 돈오돈수는 어떤 수행자의 깨침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밝히려는 것이므로 초점이 다르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보조의 돈오점수설은 종합적 수행이론으로 보현행의 구체적 전개를 설하고 있고, 성철의 돈오돈수설은 특수한 수도이론으로서 깨침에 대한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라고 평가하였다.

돈점논쟁은 이웃종교에서도 관심을 갖는 주제가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서명원(2005)이 “돈오돈수 없이는 그리스도교가 무너진다”라는 주제로 《불교평론》과 《보조사상》에 기고한 바 있다. 서명원(2015)은 이러한 논지를 확장하여 “예수님의 돈오돈수적 특징 열두 가지”를 《성서와 함께》라는 잡지에 연재하고 있다.
이후 돈점논쟁은 선학연구에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고 있으며 다양한 연구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까지 이 문제를 다룬 단행본이 4권, 석사학위 논문이 3편, 그리고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40여 편 발표되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학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주제가 되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행자들의 관점에서 돈점의 문제를 다루는 글들을 찾기가 어렵고, 깨달은 이후 사회적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구체적 방안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 현응의 ‘깨달음과 역사’에 대한 논쟁

한국불교계에서 약 15년 동안 지속되던 돈점논쟁의 열기가 식어갈 무렵인 지난 2015년,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깨달음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 글에서 현응(2015)은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루는 깨달음’으로 구분하고 문명사회의 현대인이 잘 깨달으려면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잘 깨닫기 위해선 경전과 어록, 그리고 다양한 독서를 하면서 탐구하는 마음으로 사유하면서 읽는 것으로도 가능하다”라고 부연하였다. 또한 “보디(깨달음)만 있고 사트바(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소승적 아라한일 뿐이다. 또한 보디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깨달음과 실천이 동시에 성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현응의 발표가 있었던 장소에서 즉각적으로 반론이 제기되었으며, 그 반론은 언론매체를 통해서 공개적인 논쟁으로 확산되었다. 가장 신속하게 장문의 글로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울산대 철학과 박태원 교수였다. 그는 “선불교의 언구를 공/불성/여래장의 언어에 의거해 ‘이해 방식’으로 소화하는 태도, 간화선을 신비주의 수행기법으로 간주하는 시선은, 선불교의 생명력을 짓밟는 내부 자해”라고 비판하였다. 더불어서 “세속과 역사를 향해 ‘깨달음과 역사의 결합’을 소리 높이는 것은, 멋진 말이긴 하지만 자칫 공허하거나 지적 자위행위에 그칠 수 있다.”라고 경고하였다.

김재성은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이해로서의 깨달음을 넘어서서 선정삼매로 마음을 집중하는 힘을 바탕으로 연기법을 통해 열반을 체험하는 깨달음”을 제시하면서 현응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다만 김재성은 “한국불교가 깨달음에 매달려 역사의식이 빈곤하다”라는 현실에 대한 현응의 지적은 긍정적으로 보았다.

논쟁이 격화되면서 선수좌회에서 입장문을 발표하였다. 수좌회에서는 “부처님이나 조사들은 원래 ‘이해하는 깨달음’을 말씀하셨지만 이후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질된 것”이며, 깨달음과 역사가 통일되어야 한다는 현응의 주장에 대하여 “불조의 가르침을 너무 가볍게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수좌회에서는 종지종풍의 훼손을 우려하면서 “철저히 공함을 체득하지 못한 이해를 깨달음으로 삼게 되면 알음알이를 지혜로 여기는 것이니 마치 도둑으로 자식을 삼는 것과 같다”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더불어 말하기를 “생각을 따라가면 중생이요, 돌이켜 반조하면 수행자요, 생각을 생각 아닌 생각으로 돌이켜 쓰면 부처”라고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법을 강조하였다.

비판이 난무해지자 현응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몇 가지 입장을 다시 강조하였다. 첫째 “조계선풍은 육조의 혜능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있으며, 닦아 증득함과 선정수행을 배격하고 있음”을 재삼 강조하였다. 이어서 “조계선은 남종선이고 조사선으로 돈오와 견성을 강조하며 반야지로 ‘곧바로 아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자신도 이를 지지하고 있음을 밝혔다.

둘째,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하며 오랜 기간의 선정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언명은 “대승의 반야지를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취지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오랜 선정수행에만 몰두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일부 풍조를 비판하기 위한 것”임을 천명하였다.

셋째, “깨달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완성되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이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깨달음은 스케일, 부피와 무게, 깊이, 색깔과 디자인 면에서 점점 더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양해지고, 멋있어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시대와 중생계와 자연계가 점점 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가르침의 폭과 내용 또한 덧붙여지고 다양해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은 현응의 반론에 대하여 실참수행을 강조하고 있는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이 공개적인 반론에 나섰다. 수불은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며, “깨달음이란 연기관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 이해는 웬만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현응의 주장은 불교의 근간인 깨달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또한 현응의 “잘 이해하는 깨달음”이란 혜안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금강경》에서 언급한 오안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범주의 오류”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런 오류는 “간화선에 대한 오해와 유상(有相)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도몽상”이라고 비판하면서 조사어록의 표현들을 빌려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의 근거들을 제시하였다. 수불은 “실참을 통해 생사일대사를 해결하고 불법에 대한 안목을 열지 않고서는 중도불이(中道不二)는 영원한 불가사의로 다가온다”라고 하면서 “이는 장님이 다른 사람들을 끌고 절벽으로 다가서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큰 해를 미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현응이 주장한 ‘깨달음과 역사’와 관련된 논쟁은 약 40여 명의 논사들이 불교 언론과 각종 세미나의 발제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면서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현응의 주장에 찬성하는 의견을 제시한 학자들 중에는 홍창성, 조성택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에 반론을 제기한 학자들 중에는 박태원, 서재영, 한자경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논쟁은 다시 철학자들의 논쟁으로 옮겨지면서 서로 논박을 주고받는 단계로 확산되었다.

아쉽게도 깨달음에 대한 불교계의 논쟁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다. 깨달음 논쟁이 약 6개월 정도 만에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난 것은 깨달음에 대한 본질적 논쟁은 언설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체득된 상태에서의 주장이 필요하기 때문에 논쟁의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원인은 대중매체의 발달로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이 여러 매체를 통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모처럼 세인들의 관심을 끈 깨달음 논쟁은 일정한 담론을 형성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5. 결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 재세 시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깨달음과 연관된 다양한 논쟁이 불교계에서 벌어졌다. 논쟁의 배경에는 계율과 수행법, 실천 등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다. 그중에서도 깨달음과 관련한 돈점논쟁은 우리 불교계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주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쟁의 주제는 이미 오래전 중국에서 시작된 것을 다시 재론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중국불교계에서도 돈점논쟁의 출발점이 생각했던 것만큼 수행 지향적이거나 깨달음을 성취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택신회가 주도한 돈점논쟁의 배경에는 제7조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화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 둔황석굴에 보존되어 있던 불교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중국불교의 기존의 돈점논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근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티베트에서 전개된 삼예의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논쟁이라고 표현하는 현상들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 아니라 후학들이 해석과 판단을 가미하면서 논쟁으로 확대시킨 면도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행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사자들이 직접 대론을 벌인 사례는 많지 않다. 다만 그 문하생이나 문도들이 문헌을 통해서 견해를 제시한 것들을 논쟁으로 이름하여 해석한 사례들이 있다. 후학들은 어느 일방의 주장에 경도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앞으로도 더 많은 자료를 대조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성철로부터 시작된 한국불교의 깨달음 논쟁은 정체된 한국불교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일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당시 한국불교의 수행풍토에 일대 혁신적 자극이 되었으며, 많은 국민에 의해 회자되면서 전법교화에도 기여한 바 크다. 그렇지만 이후 한국불교는 위빠사나를 비롯한 남방불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지는 아이러니한 현상도 나타났다.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나타난 부수적인 효과라는 분석도 있으나 현재 그 영향력은 불교 전반에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에 촉발된 깨달음의 논쟁에서도 이 같은 시대적인 경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논쟁의 결과가 수행의 영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지상 논쟁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이다. 깨달음 논쟁은 관련 분야의 학문적 성과뿐만 아니라 실참실수의 풍토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 논쟁의 결과가 학문적 성과로 축적되고 수행 현장으로 회향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성철이 제기한 돈점논쟁은 10여 년이 지난 다음 다시 후학들에 의하여 차분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많은 성과를 축적해 가고 있다. 반면에 현응의 주장으로 촉발된 최근의 논쟁은 아직 그 성과를 말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논쟁이 진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논쟁의 초점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의 주장을 재확인할 뿐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대론도 성사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시론의 입장에서 서로의 의견을 옹호하는 태도가 등장하면서 논점을 흐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향후의 전개 방향을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 불교계의 풍토를 보면 논쟁은 논쟁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서로 무관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논쟁이라는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개인적 가치관의 대중적 피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적 실천의 문제까지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한국불교계에서 다양한 논쟁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결과가 한국불교의 수행풍토 개선과 신행 활동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되려면 논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장하는 바를 실천하고 실천적 성과를 바탕으로 서로의 주장과 견해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

 

김응철 / 중앙승가대학교 포교사회학과 교수. 경기대학교 행정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행정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사회복지정보화 및 정보체계 구축에 관한 연구〉 〈사회복지 지도감독 기능의 강화방안에 관한 연구〉 〈사회복지활동과 종교발전의 상관성〉 등이 있으며, 저서로 《불교지도자론》(공저) 《포교이해론》(공저)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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