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현대한국의 불교학자

1. 시작하며

현강(玄岡) 김인덕(金仁德, 1935~1999)
현강(玄岡) 김인덕(金仁德, 1935~1999)

현강(玄岡) 김인덕(金仁德, 1935~1999) 선생은 필자의 지도교수이다. 필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건 아마 대학원에 입학하고 난 후 두 번째 학기를 맞이했을 때일 것이다. 그때 나는 선생의 화엄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불교한문을 처음 마주쳤기에 단순한 문장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 때였지만, 발표 준비를 하면서 또 선생의 《화엄경》 강의을 들으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이 즐거움 덕분에 필자는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다.

이후 필자는 중관학 수업 시간에 경전을 읽었던 화엄학 수업 때와는 달리 논서를 읽는 또 다른 분위기를 접하며, 용수의 《중송》과 청목의 《중론》을 심도 있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중송》 27품의 450여 게송들이 모두 흥미를 당기는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송》을 대표하는 〈관거래품〉의 게송들이 필자의 사색을 붙잡아놓고 있었다. “가는 이는 가지 않는다” 등의 문장을 두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만 하면 왜 “내리는 비는 내리지 않는다”고 했을까, 의문을 품으면서 말이다. 내리는 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 풀릴 줄 알았던 그 말들의 의미가 좀처럼 잡히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매혹적인 말들을 두고 사색한다는 게 보통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게송들이 당시 내 삶에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리라.

사실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 우연히 청목의 《중론》을 통해 용수의 《중송》을 읽으며 언젠가는 이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이 《중송》의 게송들에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이 그 무엇을 꼭 알아내고 싶었다. 혼란스러운 내 삶에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평화를 안겨준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공부가 용수의 《중송》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대학원에 들어와 용수의 《중송》과 청목의 《중론》을 읽을 기회를 선생님의 수업을 통해 얻게 되었다. 이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 해도 반가운 일이었는데, 선생의 수업을 들으며 내가 알아내고 싶었던 것들이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했으니, 예감은 항상 예감 이상의 것과 함께 온다는 평소의 생각이 운이 좋게도 적중하고 있었다.

용수가 《중송》에서 던지는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조금씩 깨닫게 되면서, 필자는 내처 선생의 삼론학 강의를 들었다. 길장의 저서와 이 저서들에 대한 선생의 해설, 그리고 선생의 지도교수였던 김잉석 교수의 논문들을 읽어가며 공부를 했다. 천태학과 화엄학 같은 다른 중국불교와 마찬가지로 좀 도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 삼론학은 점점 필자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삼론학을 다시 만난 건 교수가 되고 나서 길장의 《삼론현의》와 《대승현론》을 강의하기 위해 공부할 때였고, 그 후 한참 세월이 지나 이렇게 선생에 대해 글을 쓰는 지금에서이다. 글 쓸 준비를 하기 위해서 선생의 저서를 다시 읽고, 또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 불교 대중잡지에 실린 짧은 글들을 읽어보면서, 선생께서 승랑과 길장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분들의 사상에 입각해서 용수의 《중송》을 이해하는 한편, 나아가 천태학이나 화엄학 같은 중국불교 전반을 이해하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덕분에 필자도 지금은 천태학과 화엄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승랑에서 비롯된 길장의 삼론학이 새롭게 제시한 사상을 이해해야 중국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전개된 우리 불교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게 되었다.

김인덕 선생은 1935년에 경남 함양군 지곡면 공배리에서 태어나, 합천 해인초등학교, 중동중학교, 해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7년에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해서 1965년에 졸업했고, 졸업한 해에 바로 대학원에 입학해서 〈삼론학상의 반야와 중도 연구〉로 석사학위를, 〈삼론현의현정론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간강사를 시작으로 1981년에 조교수로 임용된 후, 1999년에 별세할 때까지 동국대 불교학과의 교수로 재직했다. 또 1998년 1월에 한국불교학회장에 취임해서 별세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저서로는 《삼론학연구》(1982, 불교사상사), 《삼론종학의 역사와 교의》(1987, 삼론종교육원), 《중론송연구》(1995, 불광출판부) 등이 있다. 《한국불교학》 제20집은 선생님의 화갑기념논총이다.

선생은 저서 《삼론학연구》에 길장의 《중관론소》 《대승현론》 《이제의》 등에 보이는 삼론학의 사상을 담았으며, 또 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삼론에 관한 많은 논문을 썼다. 선생의 마지막 저서 《중론송연구》에 실린 논문들은 용수의 《중송》의 여러 품을 탐구하고 있다. 필자는 이 저서가 삼론학을 연구했던 앞의 저서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 저서에서 선생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삼론종의 교학을 익히고 난 후에 얻은 성과를 용수의 《중송》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고, 또 용수의 티베트역본 《무외소》, 청목의 《중론》, 월칭의 《정명구론》, 청변의 《반야등론석》, 무착의 《순중론》, 안혜의 《대승중관론석론》등 여러 주석서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선생이 《중송》의 여러 주석서를 비교해서 얻는 결과를 보여주는 일은 생략하고, 수업 시간에 자주 말씀했던 〈귀경게〉의 팔부, 〈관인연품〉의 사종불생, 〈관거래품〉의 불거(不去), 〈관사제품〉 게송 18의 연기, 공성, 가명, 중도 등의 논제들을 선생의 해설을 중심으로 풀어 가보겠다. 〈관사제품〉 게송 18에서는 길장의 《중관론소》에 보이는 4종의 해석방법 중 삼론학의 이제합명중도설과 관련이 있는 세 번째 해석, 그리고 천태학의 일경삼게(一境三諦), 화엄학의 일즉다(一卽多)와 관련이 있는 네 번째 해석을 다루되, 전반부 〈관인연품〉과 〈관거래품〉에서는 《청목석》을 어떻게 정리하고 해석하고 있는지, 후반 〈관사제품〉에서는 삼론학의 근본 교리를 어떻게 삼시게(三是偈)에 적용해서 이해하고 있는지 고찰해보겠다. 이렇게 하면 용수의 《중송》과 청목의 《중론》에 대한 견해, 그리고 삼론학의 근본 교리에 대한 선생의 견해가 꽤 드러나리라 생각된다.

2. 팔부 그리고 불생

팔부(八不)는 네 짝으로 된 여덟 가지 부정, 즉 불생불멸, 불상부단, 불일불이, 불래불거이다. 이 팔부는 용수의 《중송》의 벽두 〈귀경게(歸敬偈)〉에 나온다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常住)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희론(戱論)이 잘 적멸해 있는 이 연기(緣起)를 설해 주시고
설법자 가운데 으뜸이신 부처님께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한역 〈귀경게〉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은 발생하지 않음과 소멸하지 않음, 불상부단(不常不斷)은 상주하지 않음과 단멸하지 않음, 불일불이(不一不異)는 같지 않음과 다르지 않음, 불래불거(不來不去)는 오지 않음과 가지 않음으로 풀어 이해해 볼 수 있다. 희론은 발생함과 소멸함, 상주함과 단멸함, 같음과 다름, 옴과 감이고, 이 희론들의 부정 곧 팔부가 바로 희론이 적멸해 있는 연기이다(구마라집 한역 《중론》에서 연기는 인연으로 번역돼 있다. 인연은 인과 연들의 의미로도 쓰이기에, 가능한 한 인연은 연기로 바꿔 쓰겠다.). 이 연기는 아래에서 살펴볼 〈관사제품〉 게송 18의 “연기는 공성이고, 가명이고, 중도이다.”라고 할 때의 바로 그 연기이다. 팔부는 중도로 해석될 수 있어서, 삼론학에서는 이를 팔부중도라고도 한다.

삼론학의 길장은 청목의 생각을 그대로 품고 가면서 승랑의 생각을 적용하기에, 먼저 청목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목은 우선 팔부는 불생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을 “발생함을 부정하는 발생하지 않음은 필연적으로 소멸하지 않음을 불러온다. 발생해야 소멸하는데, 발생하지 않았기에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논증한다. 부정되는 발생함과 소멸함을 다시 활용해서 발생함과 소멸함을 부정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발생하지 않기에 소멸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기에 상주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기에 단멸하지 않고, 단멸하지 않기에 같지 않고, 같지 않기에 다르지 않고, 다르지 않기에 오지 않고, 오지 않기에 가지 않는다고 논증한다.

팔부는 불생으로 귀결되고, 불생은 없음으로 귀결된다. 발생함은 발생함이 있음이고, 발생하지 않음은 발생함이 없음이다. 또 소멸함은 소멸함이 있음이고 소멸하지 않음은 소멸함이 없음이다. 발생함과 소멸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발생함의 있음과 소멸함의 있음이라는 있음의 견해[有見]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 사람들을 올바른 견해로 이끌기 위해 이 집착을 발생함의 없음과 소멸함의 없음으로 해체시킨다. 이렇듯 팔부를 논증해 가는 과정은 있음을 타파해서 없음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있다는 집착[有執]에 젖어 있기에 ‘있지 않다’ ‘없다’라고 말해서 이 있음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있지 않음’ ‘없음’은 있음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이 없음은 없음이라는 집착마저 해체시키는 공(空)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발생함이 있지 않기에 발생함이 없다고 하면 소멸함이 있다고 하고, 소멸함이 없다고 하면 상주함이 있다고 하고, 상주함이 없다고 하면 단멸함이 있다고 하고, 단멸함이 없다고 하면 같음이 있다고 하고, 같음이 없다고 하면 다름이 있다고 하고, 다름이 없다고 하면 옴이 있다고 하고, 옴이 없다고 하면 감이 있다고 하는 집착에 빠진다. 우리는 이렇게 있음의 집착에 빠져 있다. 그래서 발생함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발생함이 없다고 해서 있음의 집착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발생함이 없음, 소멸함이 없음 등의 없음은 있음의 집착과 같은 없음의 집착이 아니다. 있음의 집착을 해체시켜 본래의 자리 곧 공성으로 돌아가게 하는 없음이다.

구마라집 한역 《청목석》에는 ‘세간에 분명하게 보인다’는 세간현견(世間現見), ‘세간에서 눈으로 본다’는 세간안견(世間眼見)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팔부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눈으로 ‘발생하지 않음’을 본다.”는 말을 볼 수 있다. 이 ‘발생하지 않음’의 자리에 ‘소멸하지 않음’ ‘상주하지 않음’ ‘단멸하지 않음’ ‘같지 않음’ ‘다르지 않음’ ‘오지 않음’ ‘가지 않음’이 들어갈 수 있다. 팔부는 이렇듯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이기에, 경험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발생함과 소멸함 같은 희론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발생함이 없다는 논주의 말을 들을 때 반론자는 소멸함이 있다고 이해한다. 발생함과 소멸함을 각각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니까, 발생함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 소멸함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팔부를 논증해 가는 언어를 청목은 경험에 바탕을 둔 언어로 이해한다. 그렇기에 있음과 없음은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을 이루기도 하지만, 이 견해들을 해체시키는 언어가 될 수도 있다. 팔부 중 불생불멸과 부단불상을 들어 이 점을 보여주면 다음과 같다.

세간에서 눈으로 겁초의 곡식이 발생하지 않음을 본다. 겁초의 곡식이 없기에 지금의 곡식을 얻을 수 없다. 겁초의 곡식이 없는데도 지금의 곡식이 있다면, 발생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눈으로 겁초의 곡식이 소멸하지 않음을 본다. 만약 소멸한다면 지금 곡식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곡식이 있다. 그러므로 소멸하지 않는다. — 불생불멸.

세간에서 눈으로 모든 사물이 상주하지 않음을 본다. 곡식의 싹이 틀 때 씨는 변해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주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눈으로 모든 사물이 단멸하지 않음을 본다. 곡식의 씨에서 싹이 튼다. 그러므로 단멸하지 않는다. 만약 단멸한다면 상속(相續)하지 않을 것이다. — 부단불상.

이 팔부의 논증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곡식은 생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불생이다. 불생이면 멸일까, 멸은 아니다(不滅). 불멸이면 상일까, 상은 아니다(不常). 불상이면 단일까, 단은 아니다(不斷)”라고 하는 연속적 사유와 부정형식, 즉 ‘만물→불생→멸?→불멸→상?→불상→단?→부단’과 같은 계속적인 반대사유가 전개되고 이에 대해 연속적으로 부정해 나가는 논리형식에 의해 팔부가 전개됨을 설명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생·불멸·부상·부단’인 까닭에 대해 한결같이 ‘世間現見故(세상에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거나, ‘世間眼見萬物(세상 눈에 보이는 만물)’은 ‘불생·불멸·부상·부단이다’처럼 설명하여, ‘팔부’의 각각은 어느 것이나 세상 만물의 실제적 현실현상(現實現狀) 즉 여실상(如實相)·실상(實相)에서 바라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 《중론송연구》 72쪽


3. 사종불생

사종불생(四種不生)은 발생하는 모든 경우 곧 자생(自生), 타생(他生), 공생(共生), 무인생(無因生)의 4구로 볼 때 발생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먼저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발생함이 부정되면 소멸함이 부정되고, 나아가 팔부의 다른 짝들도 부정될 수 있음을 확인해보도록 하자.

중론 제1장인 〈관인연품〉의 제3게에서 마지막 제16게까지는 우선 ‘생하지 않음’이나 ‘생함이 없음’을 뜻하는 ‘불생(不生; anutpāda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불생’의 설명을 바탕하여 ‘불멸’의 내용을 이해됨은 물론, 나아가 ‘불생불멸’의 경지나 ‘팔부’ 전체의 설명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왜냐하면 ‘생함’이 없는 곳에서는 ‘멸함’도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하므로, ‘생함’ 그 자체만 충분히 검토되고 ‘불생’의 내용이 자세히 설명된다면 ‘불멸’의 내용은 자연 이해될 수 있고, 나아가 생·멸의 연장상태라고도 할 수 있는 상·단이나 일·이 또는 거·래 등 모두가 성립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팔부’ 전체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중론송연구》 87쪽

발생함을 부정하면 다른 모든 팔부의 짝들이 부정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 곧 4구를 들어 논증하면서 이 발생함을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4종불생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인중유과(因中有果), 인중무과(因中無果)에 대해 말해야 하겠다. 우리가 앞에서 팔부의 각 짝은 모두 유와 무로 귀결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청목의 《중론》 서두에서 말하듯이, 인(因)에서 과(果)가 발생할 때 인에 과가 미리 있는 경우가 인중유과이고, 인에 과가 미리 없는 경우가 인중무과이다. 인에 과가 있어도 발생하지 않고 없어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있음과 없음 양변 곧 양 극단이 모두 타파된다.

사실 앞에서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이는 발생함의 있음을 타파하는 것이자 동시에 결국 발생함의 없음을 타파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 점은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인을 씨로, 과를 싹으로 바꿔놓고 말한다면, 씨에 싹이 있다면 이미 있는데 무엇하러 싹이 나오며, 씨에 싹이 없다면 이미 없는데 싹이 나오겠는가 하는 식으로 발생함을 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씨에서 싹이 나온다. 그런데도 씨에서 싹이 나오지 않는다,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씨를 말하고 싹을 말하는 사람이 씨의 자성(自性), 싹의 자성을 집착하기 때문이다. 씨도 싹도 연기한 것이기에 자성이 없다, 공하다. 임시로 씨라고 싹이라고 말할 뿐이다. 씨에서 싹이 나올 때 씨도 변해가고 싹도 변해 간다. 변해 가는 씨 중에서, 또 변해 가는 싹 중에서 어느 시점의 씨를 씨라고 하고, 어느 시점의 싹을 싹이라 하겠는가? 또, 씨가 싹으로 변해 간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필요 때문에 임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지, 씨가 싹으로 변해가는 일은 없다. 씨의 없음이 싹의 있음도 아니요, 씨의 있음이 싹의 없음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관인연품〉의 4종불생을 살펴보겠다. 〈관인연품〉 게송 1은 팔부의 불생불멸 중 불생에 관해 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諸法不自生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是故知無生

둘에게서, 원인이 없이 발생하지 않네. 그러니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법(法)은 자기에게서 발생하지 않네. 다른 것에서도 발생하지 않네.

이른바 부자생, 부타생, 불공생, 불무인생의 사종불생이 주장되고 있다. 이와 같이 《중송》에서는 팔부게의 불생불멸 중 불생을 설명하고자 자(自), 타(他), 공(共), 무인(無因)의 4구를 통해 발생함이 없다는 사종불생을 우선 제기한다. 청목은 이 사종불생을 하나하나 논증하고 있는데, 선생은 이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기에 필자가 보강하면 다음과 같다. 발생한다면 원인이 있어서 발생하거나 원인이 없어서 발생할 것이다.

 

《중론송 연구》(1995, 불광출판사)

원인이 있는 경우는 자기로부터 발생하거나 타자로부터 발생하거나 이 양자로부터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첫째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한 법에 발생하게 하는 것과 발생하는 것 둘이 있게 될 것이다. 또 자기가 자기를, 또 자기가 자기를…… 하며 무한하게 발생하게 되어 어떠한 일정한 결과도 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둘째 타자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자기가 있기에 타자가 있는 것이다. 이제 자기가 없다면 타자도 없다. 그러므로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기에 타자로부터 발생하는 일도 없다. 셋째 양자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양자란 자기와 타자이다. 자기로부터도, 타자로부터도 발생하지 않기에 양자로부터 발생하는 일은 없다. 넷째 원인이 없이 발생하는 일은 없다. 원인이 없을 때 결과도 없기 때문이다. 발생하는데 결과가 없다면 이 발생은 발생이라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종불생의 의미를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매듭짓고 있다.

결국 실유 독존하는 ‘자성’이 연에도 과에도 없으므로 ‘부자생’이고 ‘부타생’이요, 부자생·부타생 등 ‘사종불생’이므로 ‘생’은 성립하지 않아 ‘불생’이며, 이처럼 ‘생’이 성립하지 않는 자리에 멸이 있을 수 없으므로 ‘불멸’이라는 주장이 이루어져, ‘불생불멸’의 주장을 비롯한 ‘팔부’의 선언의 이루어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팔부’의 선언을 가능하게 하는 까닭으로서 ‘무자성’은 희론을 거부하는 불타의 연기·무아를 구체적으로 설명해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중론송연구》 99쪽


4. 불거(不去), 가지 않음

앞의 〈관인연품〉에서는 팔부 중 불생불멸을 다루었다면, 〈관거래품〉에서는 팔부 중 불거불래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은 이 〈관거래품〉의 게송 하나하나를 번역하며 분석하고 설명해 가는데, 여기서는 그중 세 가지 논제, 즉 첫째 ‘지금 가고 있는 곳을 가지 않는다’ 둘째 ‘가는 이는 가지 않는다’ 셋째 ‘가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를 다루겠다.

1) 지금 가고 있는 곳을 가지 않는다

불생불멸을 논하고 난 후 이어서 불래불거를 논하는 것은, 물(物)이 생겨나고 없어짐을 뜻하는 생멸의 개념은 물(物)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오고, 또 현재로부터 과거로 가는 것을 뜻하는 거래(去來)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기에, 불생불멸은 바로 불래불거를 지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생을 다루면 굳이 불멸을 다루지 않아도 되었듯이, 불거(不去)를 다루면 굳이 불래(不來)를 다루지 않아도 된다. 앞에서 팔부를 다룰 때 보았듯이, 거(去)가 성립하지 않으면 내(來)도 자연히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지금 가고 있는 곳을 가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해서 불거 곧 가지 않음이 성립한다는 것을 살펴보자.

已去無有去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去時亦無去

이미 간 곳에 감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곳에도 감이 없네.
이미 간 곳과 아직 가지 않은 곳을 떠나 지금 가고 있는 곳에 감이 없네.

이미 간 곳은 이미 갔기 때문에 감 곧 가는 활동이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곳은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에 감 곧 가는 활동이 없다. 그리고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이미 간 곳이자 아직 가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감이 없다. 방금 이미 간 곳의 감과 아직 가지 않은 곳의 감이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미래, 과거, 현재의 감이 타파된다.

그런데 이미 간 곳과 아직 가지 않은 곳에 감이 없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지금 가고 있는 곳에 감이 없다는 것은 좀처럼 수긍이 되지 않는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이야말로 걷는 동작이 행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용수는 논주가 되어 지금 가고 있는 곳에 감이 없다는 것을 귀류법을 활용해서 논증한다. 만약 지금 가고 있는 곳에 감이 있다면, 다시 말해 지금 가고 있는 곳을 간다면, 지금 가고 있는 곳의 감과 간다의 감 이렇게 두 가지 감이 있게 된다.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두 명의 가는 사람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오류이다. 애초에 가는 사람은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이렇게 논증하기도 한다. 지금 가고 있는 곳을 간다면, 즉 지금 가고 있는 곳에 간다는 것이 성립하려면, 지금 가고 있는 곳에 감이 없어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감이 없는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성립하겠는가? 지금 가고 있는 곳에 감이 없다면 지금 가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가는 이는 가지 않는다.

가는 이는 가지 않는다를 논하는 게송들 중 첫 번째 게송을 들어 용수와 청목의 논증을 따라가 보겠다.

去者則不去不去者不去
離去不去者無第三去者

가는 이는 가지 않네. 가지 않은 이는 가지 않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가는 이는 있지 않네.

간다면 가는 사람이 가거나 가지 않는 사람이 간다. 제3의 가는 사람은 없다. 형식논리학의 배중률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가는 이도 가지 않고 가지 않는 이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감이 없는 것이다. 가는 이가 간다는 것은, 앞에서 지금 가고 있는 곳을 간다를 타파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논증해서 이를 타파한다. 만약 가는 이가 간다면, 가는 이의 감과 간다의 감 두 가지 감이 있게 되고, 따라서 두 명의 가는 이가 있게 된다. 혹은, 만약 가는 이가 간다가 성립하려면, 가는 이에 감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가는 이에 감이 없다면 가는 이라고 할 수 없다.

3) 가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

가는 이가 간다는 것이 부정되었으니까, 이제 가는 이가 머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도 머문다면 가는 이가 머물거나 가지 않는 이가 머물지 제3자가 머무는 일은 없다고 하며, 형식논리학의 배중률을 적용한다. 또, 모순율을 적용해서 ‘가는 이가 머문다’ ‘가지 않는 이가 머문다’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去者則不住不去者不住
離去不去者何有第三住

가는 이는 머물지 않네. 가지 않는 이는 머물지 않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에 어찌 제3자가 머무는 일이 있겠는가?

용수와 청목은 가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감을 떠나가는 이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는 이는 항상 가는 이이기에 머무는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가는 이가 머문다면, 이미 간 곳이나 아직 가지 않은 곳이나 지금 가고 있는 곳에서 머물 것이다. 그러나 앞의 게송 1에서 이미 간 곳, 아직 가지 않은 곳, 지금 가고 있는 곳의 감이 부정되었다. 이렇게 부정되어 감이 없는데 어떻게 머무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는 이는 감이 있기에 가는 이이고, 이런 가는 이야말로 머무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해서 설명한 후 선생은 끝에 가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불거’의 설명 논리를 통해서, 과현미(過現未)와 같은 삼세시간(三世時間)의 분별심에서 벗어나고, 거자(去者)와 거용(去用)과 같은 능작(能作)·소작(所作)의 능소차별심(能所差別心)을 초월하고, 또 유·무·역유역무 등과 같은 사구사유(四句思惟)를 넘어서서, 불일부이의 경지인 중도실상(中道實相)을 깨닫게 하는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 《중론송연구》 99쪽


5. 연기, 공성, 가명, 중도

1) 관사제품 게송 18과 《청목석》

선생님이 가장 공들여 연구한 품은 아마도 〈관인연품〉의 〈귀경계〉와 함께 이 〈관사제품〉일 것이다. 〈관사제품〉에는 이른바 삼시게(三是偈) 또는 삼제게(三諦偈)로 알려진 게송 18이 있으며, 또 승의제와 세속제를 말하는 게송이 있다. 삼론학에서는 게송 18을 이 승의제와 세속제 이제에 의거해서 풀어낸다.
청목은 다음과 같이 이 두 게송을 묶어 주석하고 있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인(因)과 연(緣)들에서 발생한 법을 나는 무([無)라고 말하네.
가명(假名)이라고도 하고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하네. (18)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인과 연들에서 발생하지 않는 법은 하나도 없네.
그러니 모든 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네. (19)

먼저 청목의 주석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장행은 길장이 게송 18에 대해 제시하는 4종의 해석 중 넷째 삼시의에 의거한 해석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기에 잘 번역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인(因)과 연(緣)들에서 발생하는 법을 나는 ‘공한 것’[空]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인과 연들이 다 갖춰지고 화합해서 사물이 발생한다. 이 사물은 인과 연들에 귀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있지 않다. 자성이 있지 않기에 공하다. 공함[空]도 또 공하다.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말하는 것이다. ‘있다’[有]와 ‘없다’[無]의 양 극단을 여의었기에 중도(中道)라 한다. 이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공하지 않기 때문에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면, 인과 연들에 의존하지 않고서 있는 것이다. 만약 인과 연들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법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은 없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何以故? 衆緣具足和合而物生, 是物屬衆因緣, 故無自性. 無自性, 故空. 空亦復空. 但爲引導衆生故, 以假名說. 離有無二邊, 故名爲中道. 是法無性故不得言有, .亦無空故不得言無. 若法有性相, 則不待衆緣而有. 若不待衆緣, 則無法. 是故無有不空法.)

〈관사제품〉에서 사제가 공하다고 할 때 사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없다’와 구별하려고 때로 ‘공하다’는 말을 쓰고 있지만, 설사 ‘없다’라고 말했다 할지라도 이 ‘없다’를 ‘실제로 없다’란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고, 집, 멸, 도 사제가 연기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없다’ ‘공하다’란 말은 가명이다. 이러한 가명은 중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중도란 자성으로 있음과 자성으로 없음, 곧 있음과 없음을 부정할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마라집 역 《청목석》의 내용을 간단하게 짚어본 뒤 선생은 길장의 독특한 삼론학적 해석, 이른바 사종해석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2) 사종해석 중 중가의(中假義)

길장은 《중관론소》에서 이 게송 18에 대해 네 종류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취파병점사석(就破病漸捨釋), 둘째 직의인연정의석(直依因緣正義釋), 셋째 취중가의석(就中假義釋), 넷째 의장행취삼시의석(依長行就三是義釋)이다. 첫째 취파병점사석은 이 게송 18을 네 구로 나누어 각각의 단계에서 병집(病執)을 파해서 점진적으로 이를 내버리게 하며 해석하는 방법이고, 둘째 직의인연정의석은 연기의 정설에 의지해서 곧바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셋째 취중의석은 중(中)과 가(假)의 이치에 의거해서 해석하는 방법이고, 넷째 의장행취삼시석은 장행(長行)을 따라가며 삼시(三是)의 이치에 의거해서 해석하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첫째와 둘째의 해석 방법은 생략하고, 삼론학의 교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셋째와 넷째의 해석을 정리해보겠다.

먼저 셋째 취중의석. 제1구 ‘인연소생법’은 세속제를, 제2구 ‘아설즉시무’는 승의제를 나타낸다. 제3구 ‘역위시가명’은 앞의 이제가 모두 가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제1구는 세속제의 유, 제2구는 승의제의 무이다. 세속제의 유는 자성(自性)의 유가 아니라 가유(假有)이다. 무가 완연히 유이기 때문이다. 승의제의 무는 자성의 무가 아니라 가무(假無)이다. 유가 완연히 무이기 때문이다. 제4구 ‘역시중도의’는 유와 무의 가명이 중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유는 유에 머물지 않기에, 유는 비유이다. 가무는 무에 머물지 않기에, 무는 비무이다. 비유비무는 곧 중도이다. 가명의 유와 무 곧 가유와 가무는 비유비무이기에 바로 중도로 나타낸다고 보는 것은 삼론학 특유의 사상이다.

선생이 “불생불멸 등의 팔부로 유소득(有所得)의 생멸 등이 완전히 파척되면, 비로소 가명의(假名義)나 인연상대(因緣相待)의 이제를 알게 되고, 또 이들의 중도에 직통하는 것이므로, 중가의가 갖춰진다고 설명했던 것이다.”(위의 책, 279쪽)고 말하고, 이어서 “삼론학에서만 교설하는 3중·4중의 이제설이나 삼종중도론 전개의 기본형태로 삼시게를 풀이하고 있는 점이 뚜렷이 보인다.”(위의 책, 286쪽)고 말했으니, 여기서 3중, 4중 이제설과 삼종중도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3중이제와 4중이제. 이 3중이제와 4중이제는 이 게송 18을 해석하는 한 방법인 중가의석(中假義釋)의 유, 무, 가유가무, 비유비무 4구의 원리에 의거할 때,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는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단계의 이제 곧 일중(一重)의 이제에서는 유가 속제[세속제], 무가 진제[승의제]가 된다. 둘째 단계의 이제 곧 이중(二重)의 이제에서는 유와 무가 속제, 비유비무가 진제가 된다. 첫째 단계에서 속제의 유, 진제의 무가 이 단계에서는 모두 속제가 되고, 그러면서 이 유와 무를 부정하는 비유비무가 진제가 된다. 유와 무는 ‘둘[二]’이므로, 비유비무는 ‘둘이 아님[不二]’이다. 유와 무 곧 ‘둘’이 속제가 되고, 비유비무 곧 ‘둘이 아님’이 진제가 된다. 셋째 단계의 이제 곧 삼중(三重)의 이제에서는 둘째 단계의 속제 곧 유무와 비유비무가 속제가 되고 이 속제를 부정하는 비유무 비비유비무가 진제가 된다. 유무 ‘둘[二]’과 비유비무 ‘둘이 아님[不二]’이 속제가 되고, ‘비이(非二) 비불이(非不二)’가 진제가 된다.(〈삼론학상의 이제설〉(《불교학보》 제8집, 228-231쪽, 1971.9)

첫째 단계에서 속제를 부정하면서 진제가 되고, 둘째 단계에서 첫째 단계의 속제와 진제가 세제가 되고 다시 이 속제를 부정하면서 진제가 된다. 셋째 단계에서 둘째 단계의 속제와 진제가 세제가 되고 다시 이 속제를 부정하면서 진제가 된다. 앞 단계의 속제와 진제는 뒷 단계의 속제 속에 포섭되어 있다. 그렇기에 각각의 이제를 ‘중(重)’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이다. 삼중이제는 이처럼 가르치기 위한 교문(敎門)이지만, 앞의 셋이 아닌 제4의 이제는 앞의 3종이제와는 달리 아무 의지처가 없기에 절대적 이(理)이다.(위의 논문, 228-231쪽)

다음은 이제합명중도. 3중이제 또는 4중이제를 전개하는 과정도 사(邪)를 파하고 정(正)을 드러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과정이지만 이 과정에서는 파사에 중점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제합명중도를 전개하는 과정은 진정한 의미에서 현정(顯正)이 나타나는 과정이다. 삼론학 특유의 중가의(中假義)에 의거해서 이 게송 18을 풀이하는 과정은 진제중도, 속제중도, 진제합명중도가 나타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제1구와 2구는 각각 속제의 유와 진제의 무를 나타내는 것이며, 제3구는 제1구와 2구를 모두 가명의 유와 무 곧 가유와 가무로 밝혀내는 것이며, 제4구는 가유가무에서 비유비무의 중도를 밝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3구에 입각해서 중도로 파악하면 제1구의 유는 불유불무(不有不無)가 되고, 제2구의 무는 비불유비불무(非不有非不無)가 된다. 각각 세제중도와 진제중도이다. 이제합명합명중도는 이 두 제를 합명한 것이니 둘을 포섭하면 비유비불유 비무비불무가 된다. 다시 말해, 세제중도는 불유불무(不有不無) 곧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이고, 진제중도는 비불유비불무(非不有非不無) 곧 있지 않음도 아니고 없지 않음도 아님이다. 이제합명중도는 비유비불유(非有非不有) 비무비불무(非無非不無) 곧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진제중도의 비불유(非不有)는 세제중도의 불유(不有)를, 비불무(非不無)는 세제중도의 불무(不無)를 부정한 것이다. 이제합명중도의 비유비불유(非有非不有)는 세제중도의 불유(不有)와 진제중도의 비불유(非不有)를, 비무비불무(非無非不無)는 세제중도의 불무(不無)와 진제중도의 비불무(非不無)를 포섭한 것이다.(위의 논문, 231-235쪽)

선생은 이 취중가의석(就中假義釋)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며 마무리 짓고 있다.

……여기서는 이제(二諦) 개념으로 해석하는 특징이 보인다. 곧 앞의 2구는 이제를 나타내는 것이며, 제3구는 제1구와 제2구 모두를 가유가공(假有假空)인 것을 말하고자 하고, 제4구는 그 가유가공인 비유·비공(非有非空, 비유비무)의 중도임을 밝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음이 보인다. 삼론학에서만 교설하는 삼중·사중의 이제설이나 삼종중도론의 전개의 기본 형태로 삼시게를 풀이하고 있는 점이 뚜렷이 보인다.

3) 사종해석 중 삼시의(三是義)

〈관사제품〉 게송 18을 두고 삼론학에서 삼시게(三是偈)라고 부르는 것은 2구, 3구, 4구에 각각 ‘시(是)’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뭇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을 나는 무이다 하고 설하네.
이는 또한 가명이고, 또한 중도의 이치이네.

산스끄리뜨 게송에서는 “연기는 공이고, 이 공이 가명이고 중도이다.”로 되어 있는데, 구마라집 한역 게송에서는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이 무[공]이고 가명이고 중도이다”로 되어 있다. 한역 게송에서는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이 주어이고, 이 주어에 대해 공, 가, 중이 술어가 되어 있기에, 삼시게라 하는 것이다.

이 넷째 의장행취삼시의석(依長行就三是義釋)은 장행(長行)을 따라가며 삼시(三是)의 이치에 의거해서 해석하는 방법이므로, 먼저 청목의 석(釋) 곧 장행(長行)을 잘 읽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앞에서 제시한 바 있다. 이 장행을 따라가며 길장은 소승의 논사들도 대승의 논사들처럼 법이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다고 논하고 있지만, 그들은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이 실제로 있다고만 알지 이 법이 공이고 가이고 중이라는 것, 즉 삼시(三是)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이 해석방법을 써서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이 삼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첫째 (인연소생법은) 무[공]이다.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은 필경 공이다.

왜냐하면, 자성이 있다면 인과 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이미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에 공인 것이다. 연기한 것은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는 것은 공성이라는 용수의 《중송》의 사상에 충실하게 제1시(是)를 보여주었다. 둘째 (인연소생법은) 가명이다.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은 가명이다. 가(假)라고 일컫는 것은, 앞에서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을 나는 공이라고 설한다”고 밝혔기에, 인과 연들에서 생한 법은 이미 본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또한 없지 않은 것이기에, 이를 무엇으로 지칭할지를 알지 못하기에 가명으로 있다고 설하고 또한 가명으로 공하다고 설하는 것이다.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을 제2구에서 ‘없다’ ‘있지 않다’고 설했을 때, ‘실제로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 ‘없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것을 지금은 가명으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2구의 ‘있지 않음’ ‘없음’이 여기서 가명임이 드러난다. 셋째 (인연소생법은) 중도이다. 인과 연들에서 생겨난 법은 자성이 있지 않기에 공이다. 그래서 있지 않은 것이다. 이미 있지 않다고 했으니 또한 다시 공이 아니다. 있지 않고 없지 않으니 이를 중도라 한다. 있지 않음[비유]은 그대로 없지 않음[비무]이다. 이렇게 해서 제2구의 가명의 비유비무와 구분하고 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서 선생은 이 의장행취삼시의석(依長行就三是義釋)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짓고 있다.

이와 같이 ‘삼시의(三是義)’에 의해 ‘삼시게(三是偈)’를 설명한 내용은 일경삼제(一境三諦), 원융삼제(圓融三諦), 상즉상입(相卽相入), 육상문융(六相門融) 등을 주장하는 한문 문화권의 대승특수사상의 수립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6. 마치며

김인덕 선생의 연구 과정과 성과를 팔부, 4종불생, 불거, 중가의(中假義), 삼시의(三是義) 등을 표제로 삼아 정리해보았다. 독자가 순탄하게 따라가며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보려고 했는데, 용수의 《중송》이 워낙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잘 전달이 됐나 모르겠다. 무엇보다 삼론교학을 깊이 탐구했던 선생의 노력을 그르치지 않았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 글이 선생의 생애와 학문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선생은 ‘포용(包容)’ ‘융섭(融攝)’이란 용어를 연구의 초창기부터 최후기까지 중요하게 여겼다. 〈천태(天台) 원교(圓敎)의 원융원리(圓融原理)〉(《한국불교학》 3, 1977. 11)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의 수행과 육바라밀(六波羅蜜) 상섭(相攝)〉(《한국불교학》 25, 1999, 12) 같은 논문을 읽어보면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선생은 《중송》 〈관사제품〉 게송 18의 의미를 삼론학과 천태학에서 각각 삼시게와 삼제게의 이름으로 하나에 셋이 융섭되고 하나가 셋을 포용하는 관계를 발견했다고 보고 있다. 또, 이런 방식의 포용과 융섭은 동북아시아에서 이룬 새로운 사상이며, 이 사상은 근본적으로 용수의 《중송》, 청목의 《중론》, 길장의 《중관론소》 등에 기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렇듯 선생은 삼론학을 연구한 성과에 힘입어 연구의 범위를 천태학과 화엄학까지 넓히려고 했고, 실제로 넓히기도 했다는 것은 위의 논문을 보아도 분명하다.

김인덕 선생은 서로를 밝게 웃고 포용하면서 사람과 사람이, 그리고 사람과 모든 생명이 융섭(融攝)하는 세상을 꿈꾸어 왔고, 또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 이래의 전통 곧 철학과 수행을 함께 해나가는 전통이 계속 유지되기를 희망해 왔다. 그래서 용수의 《중송》, 청목의 《중론》, 길장의 《중관론소》 등에서 이 포용과 융섭의 사상을 만나게 되었고, 이 사상이 승랑과 길장의 삼론학에서 비롯되어 천태학과 화엄학으로 퍼져나가길 바라셨던 것 같다

이 글이 제자들을 항상 따뜻하게 이끄셨던 선생께 고마움을 표하는 작은 글이 되었으면 한다. 선생의 사상을 이어받는 필자의 학문 활동이 선생께 선생의 따뜻한 웃음 못지않은 웃음을 보내드렸으면 한다. 그리하여 이 웃음들이 추운 겨울날 모든 이의 마음을 녹이는 따뜻하고 환한 햇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

 

박인성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부 교수.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 동국역경원장, 불교학술원 부원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법상종 논사들의 유식사분의 해석》과 역서로 《유식삼십송석》 《유식사상과 현상학》 《불교인식론 연구》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