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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의 불교학자 <17> 이영무 / 김광식
기획연재 | 현대한국의 불교학자
[65호] 2016년 03월 01일 (화) 김광식 jiher77@hanmail.net

   
재출가 후에도 연구에 매진한 만년의 운제.
   
운제(雲霽) 이영무(李英茂, 1921~1999)
전통 불교학에서 근대 불교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불교학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특별한 행로를 걸어간 학자의 한 사람이 운제(雲霽) 이영무(李英茂, 1921~ 1999)이다.

인문학에서 불교학은 학문의 영역 및 성격이 광대무변하고 특수하다. 그래서 불교학을 온전하게,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학자에 이르는 길은 간단치 않다. 즉 불교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자질, 열정, 소양 등이 어우러져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영무는 불교학자가 갖추어야 할 제반 조건을 두루 갖춘 학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선 그는 10대에 출가하였던 경험이 있어 불교와 승가의 진면목을 분명하게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그는 대학교수를 정년 퇴임한 뒤 재출가를 하였다. 이 같은 그의 출가 이력은 불교에 대한 이해 수준이 범상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한문에 능하였던 그는 월등한 한학 실력으로 불교를 포함한 동양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했다. 또한 그는 불교의 전법, 포교에 대한 열정도 강했다.

불교학을 하나의 학문으로만 여기지 않고 신앙, 포교 차원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던 그는, 대학교수 시절에는 불교학생회 지도교수 소임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한편 승려 시절에는 강원, 선원에서 공부했지만 세속으로 나온 후에는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반 대학교(조선대, 건국대)에서 교수로 재임했다. 이런 다양한 이력을 거친 그의 불교학 연구는 학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청장년 시절에는 어찌 보면 외곽의 무대(재가승, 태고종, 건국대)에 있었기에 그의 생애와 사상, 학문 등이 지금껏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영무 교수가 건국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당시 필자는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포부도 미약했고, 더욱이 불교를 연구하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은사인 이영무의 가치와 귀중함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보이지 않는 인연법에 따라 필자도 불교학계의 말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필자는 청춘 시절 은사의 소중함을 알아보지 못했던 어리석음에 대해 속죄하는 심정으로 이영무의 불교학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 글이 불교학자 이영무의 존재를 재평가할 수 있는 작은 디딤돌이 된다면 다행이라 하겠다.

입산과 구법

이영무는 1921년 음력 3월 5일, 충북 괴산군 장연면 조곡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인 부친 이기종(李基種)과 모친 이진구 사이의 넷째 아들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총기가 있고 암기력이 뛰어나서 향리에서는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3~4세 때부터 부친에게 한문을 배워, 8세 때에는 한문으로 일기를 쓰고, 10세 무렵에는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의 이해에도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193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임제종 계열의 동산중학교를 다녔다. 그가 일본 유학을 하게 된 구체적 연유나 집안 환경, 경제적 지원 여부 등은 알 수 없다.

그는 일본의 유학 생활에 순탄하게 적응하지 못했다. 일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차별 대우와 빼앗긴 나라에 대한 울분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자 귀국한 그는 세상에서 크게 숨는 곳은 바다이고, 중간으로 숨는 곳은 도회지이며, 작게 숨는 곳은 산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궁벽한 괴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막 일어나던 시절인 1930년대 중반, 서울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서울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그는 삶의 탈출구를 찾아 입산했는데, 그곳이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釋王寺)였다. 그가 왜 석왕사로 갔는지, 입산 당시 부모에게 동의를 받았는지 등은 전하지 않는다. 그는 산중 생활에 만족하였다. 도회지 생활에 비해 단조로웠지만 사찰의 일상과 불교의 분위기에 적이 만족을 느꼈다. 더욱이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경전을 대하니, 경전의 뜻이 환하게 들어오고 답답했던 마음도 풀리면서 상쾌한 법열까지 느꼈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준 발심 출가였다.

그의 나이 17세인 1937년, 그는 한재순(韓在淳)을 은사로 삼고, 향림(香林)이라는 법명을 받아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한문 실력 덕분에 그는 행자 생활을 건너뛰고, 석왕사 강원에서도 사집과정을 건너뛰어 바로 사교과정을 배우게 되었다. 그 시절을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옛날 공부라는 것은 글을 외워야 하는데 한 번만 봐도 자연적으로 외워지고, 그 의미가 환하게 들어오니 월반 아닌 월반을 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사집부터 꼼꼼하게 배웠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략) 그렇게 건너뛰다 보면 습관적으로 남은 영 어설퍼 보이고 남의 말은 도대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시원찮아 보이기 마련인데,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자만심입니다. 자만심은 결코 자신의 성장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석왕사 강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참선 공부에 나섰다. 금강산에서 가장 유명하였던 선원인 마하연의 설석우 회상에서 한 철 공부를 하였다. 그 후에는 오대산 상원사 선원의 방한암 회상에서 두 철을 정진했다. 이 기간에 그는 경전공부를 하면서 느낀 부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굳혔다. 그 시절의 수행이 이영무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불교학을 공부하고자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상원사 선원에서 수행할 때는 출몰하는 무수한 뱀을 지켜보면서 승려의 본분에 대해 자각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1943년 하안거 해제일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상원사 조실 방한암 스님으로부터 특별한 당부를 받았다.

내가 너와 함께 두 철을 지내면서 살펴본 바로는 네가 가진 재주와 한학의 경륜을 보아 너는 산문 안에서만 살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다. 참선을 하여 견성하기도 어렵지만 세속에서 공부 잘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너의 한학 공부가 그만큼 익었으니 세속에 나가 더 공부해서 불법을 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는 참선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러자 한암은 “부디 내 말을 명심하거라. 흐르고 스며서 약수가 될 물이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탁해지고 썩고 마는 법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이렇듯이 한암으로부터 간곡한 당부를 받은 그는 상원사를 떠나 서울로 오게 되었다. 1944년경, 그는 서울 강남에 있는 봉은사 강원의 강사로 부임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가 봉은사 강원으로 온 전후 사정은 전하지 않는다. 한암의 부촉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인연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학문의 길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봉은사 강사로 있던 그는 해방 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나라 재건의 기운이 용솟음치고, 불교혁신의 기운이 높아 가던 1946년 9월 동국대학교 사학과 1기생으로 입학하였던 것이다. 그는 불교학과가 아닌 사학과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출가 전부터 사학에 관심이 많았었고, 우리나라의 역사에 미친 불교의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사학 연구도 불교학 연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택했지. 별로 다른 뜻은 없었어.

동국대 사학과 1세대의 주역으로서 불교사를 연구하는 개척자의 길에 입문한 그의 동국대 수학 과정이나 재학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그 당시 동국대 학장은 허영호였다. 허영호는 범어사 출신으로 만해 한용운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항일 결사인 만당의 당원이었다. 그는 일본의 동양대학과 대정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중앙불전의 학감을 역임하였다. 《불교》의 편집인도 역임하고, 불교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가 동국대 책임자가 되면서 사학과가 개설된 것이다.

이영무는 동국대 재학 중에 성동중학교의 사생과(社生科) 교사 생활을 병행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학자금 마련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는 1950년 5월에 동국대를 졸업하고, 곧이어 발발한 6·25로 인하여 대구로 내려갔다. 1953년에는 대구 능인고등학교 사생과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 시절부터 한국불교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하면서, 법사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다. 대구 시절, 그는 경북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1960년에는 광주의 조선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7년간 재임하면서 조선대학교 국사연구원장을 역임했고, 그 무렵에 출범한 동국역경원의 역경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그가 조선대와 인연을 맺은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조선대 설립자인 박철웅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8년에는 조선대를 떠나 서울의 건국대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건국대 사학과의 동양사 전공 교수로 활동하면서 건국대 사학과 학과장, 박물관 위원, 인문과학연구소 소장 등의 직책을 맡아 교육과 연구에 주력하였다. 또한 건국대 재학생들의 동아리인 불교학생회의 지도교수, 대학생 불교연합회의 지도법사 등을 맡았다. 그 무렵 그는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개인 사찰(慈元寺)을 마련해, 자신은 물론 건국대 불교학생회의 학생들도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한편으로는 대학원생, 불교학자, 학승, 교수 등 불교학을 연찬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문과 경전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건국대 교수 시절에 그는 한국의 불교사, 고승(원효, 보우 등) 등에 대한 연구를 중점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다양한 잡지에 활발하게 기고 활동을 하였다. 특히 원효의 저술을 많이 번역했다. 이렇듯 건국대에서 20년간 왕성하게 교수 생활을 한 그는 1987년, 정년 퇴임을 하였다. 정년을 기념하여 펴낸 책인 《한국의 불교사상》의 머리글인 〈자서(自序)〉에서 불교사상을 연구한 자신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교육계에 몸을 담은 지 벌써 40년이 지나갔다. 학생들에게 조국의 문화와 사상을 말하고 동양인의 긍지와 자각을 부르짖으면서 정열과 이상을 바쳐 청춘을 불사른 지 엊그제 같은데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하여 정년이 된다고 하니 인생이 무상함을 새삼 느낀다. (중략) 회고하여 보건대 분단된 조국의 현실 속에서 교수라는 직분을 가진 나에게는 연구·수업·지도라는 삼대 책무가 주어졌으며,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들이지만 특히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교단에 서면서부터 동양사상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왔다. (중략) 이러한 조국의 문화사상에서 전통사상을 찾아보니 그 역사성으로 보나 사상성으로 보나 문화재로 보나, 불교가 주종을 이루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신라 전성기로부터 고려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불교가 가진 사상성과 그 사상을 이 땅에 펴는 데 활약한 고승들의 경륜을 다루었다.

위의 글에서 보듯 그의 학문적 관심사는 동양사상사, 한국 전통사상, 불교 사상 및 고승 등이었다. 그가 수행한 학문적 연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았다.

재출가, 끝나지 않는 학문의 여정

이영무 교수는 1987년 2월, 40년간 머물렀던 정든 교단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불교학에 대한 연찬은 거기에서 단절되지 않았다. 그는 정년 퇴임 후, 즉시 재출가를 하였다. 교수 시절에도 학자, 법사였지만 재가승(在家僧)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1971년 5월, 서울 광화문 오른쪽에 자리한 사찰 법륜사에서 박대륜(朴大輪)을 법사로 건당(建幢)하여 운제(雲霽)라는 법호를 받은 바 있었다. 그리고 세속에서 교수 신분이면서도 은연중 재가승임을 자각하였다.

   
이영무의 저서 《한국의 불교사상》(1987)
그래서 그는 재출가의 형식으로 박대륜이 소속된 종단이자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는 태고종에 승적을 두었다. 박대륜은 불교정화운동이라는 격변을 거친 후 1970년에 출범한 태고종의 초대 종정이었다. 이런 연고로 이영무도 1970년에는 태고종단의 중앙종회 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1973년에는 태고종단의 부탁으로 태고종의 종조인 보우 국사에 관한 책 《태고보우 국사 법어집》 출간의 주역을 맡기도 했다. 그 밖에도 그는 태고종단과 많은 인연을 가져 태고종 승려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정년 퇴임을 하자, 조계종단에서 그를 상임법사로 추대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즉시 삭발하고, 납의(衲衣)로 갈아입고, 태고종단에 승적을 둔 운제(雲霽) 스님이 되었다. 이후 태고종 종립대학인 동방불교대학 학장, 태고종 총무원장, 선암사 승가대학장, 태고종 승정(僧正), 대륜문도회 부총재, 대륜불교문화연구원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그의 승려로서 활동은 태고종단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그는 원주에 있었던 개인 사찰 자원사를 정리하고, 1992년에는 충북 영동군 황간에 왕산사(王山寺)를 설립하여 수행처로 삼았다. 그리고 1996년 11월 9일, 원효연구원을 설립하여 원효사상 정립에 나서기도 하였다. 1997년에는 왕산사를 정리하여 원효연구원의 운영기금으로 내놓았다. 말년에는 후학들에게 한문, 불교, 원효 등을 가르치면서 경기도 청평의 대성사에 주석하였다. 그리고 염불선 수행을 주로 하였다. 이영무에게 원효 연구는 그의 불교학 연구를 대표한다고 할 만큼 중요하다. 여기에서 그의 발원이 담긴 원효사상연구원의 설립 취지를 살펴보자.

한평생 불교학과 사학에 파묻혀 살면서 원효 성사야말로 한국불교사상에 있어서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아니 세계 어디에도 원효 성사 같은 분이 없습니다. 화쟁회통 사상과 일심사상으로 축약시켜 표현할 수 있는 원효 성사의 사상은 시대와 민족, 종교의 벽을 뛰어 넘는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남북통일뿐만 아니라 세계를 한마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원효 성사의 사상으로 오늘날 갈팡질팡하는 정신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원효사상연구원을 개설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원효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남달랐다. 그렇다면 그는 원효의 어떤 측면에 매력을 느낀 것일까? 그것은 원효의 화쟁회통 사상과 일심사상이었다. 그는 이 같은 원효사상이 세상의 온갖 모순과 갈등, 특히 한국의 분단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문제의 원인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립과 불평등에서 오는 것이 많습니다. 각 나라 간에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계층 간, 빈부 간, 심지어 부부지간, 부모와 자식 간에도 대립하고 있는데 본질적인 차원에서 보면 너와 나를 나누고 분별하는 데서, 불평등하다고 여기는 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중략) 분명히 오늘날 각박해질 대로 각박해진 병든 사회를 치유할 대안은 불교사상에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세계의 석학들도 미래사회의 희망은 불교에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나는 절대평등한 화합의 진리를 설파한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신 원효 성사의 사상으로 미래사회를 행복하게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렇게 그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원효사상으로 풀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원효연구원을 개설하여, 원효 연구를 말년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수행법인 염불선을 강조했다.

경전 공부는 기본이에요. 불교는 경전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마음을 닦는 수행의 종교로서 경전 공부도 마음을 닦기 위함입니다. (중략) 내 한평생 학문에 치중하면서 수양 정도에 머물렀지 수행에 힘쓰지는 못했는데, 말년에 염불선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나는 일심으로 염불을 하고 있는데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수행을 하면 신비한 현상이 나타나는 줄 아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염불선을 통해 무애가를 부르며 천촌만락을 다니면서 염불을 권장한 원효 스님의 뜻은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성품이나 남의 성품이나 똑같이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고 할까요.

그는 1999년 4월 16일, 그를 흠모하던 사부대중의 기대를 뒤로한 채 입적하였다. 수많은 대중은 그를 학덕과 수행력을 겸비한 보살승으로 살다 간 학승이라고 칭송했다. 그의 비석과 부도는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의 범륜사에 위치하고 있다.

저술과 논고에 나타난 그의 불교학

이영무 교수는 50년간 교육자, 학자, 수행자로서 치열한 행보를 보였다. 그가 남긴 번역서와 논문, 저서를 중심으로 학문적 업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① 번역서
《大智度論》(동국역경원, 1970)
《東文選》 30권, 70권(민족문화추진회, 1971, 1970년대 중반)
《東史綱目》 3권(민족문화추진회)
《司馬遷 史記》(전 6권, 신태양사, 1973)
《太古國師 法語集》(태고종 총무원, 1973)
〈元曉: 菩薩戒本持犯要記〉(《법시》 100~103호, 1973)
《東國輿地勝覽》(민족문화추진회, 1974)
《諶憲書》 2권(민족문화추진회(1974~1979)
《東國文獻備考》 74권(민족문화추진회, 1980)
《涅槃經 宗要》(대성문화사, 1984)
《元曉全集》(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梅月堂 別集》(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0)
《미국기행 한시집》(1984)
《禪詩 100수》(불교영상, 1994)
《침굉집》(불교춘추사, 2000)

②저서
《태고 보우국사의 인물과 사상》(한국불교 태고종, 1977)
《維摩經 講說》(월인출판사, 1989)
《韓國의 佛敎思想》(민족문화사, 1987)
《이영무 불교선집》(불교영상회보사, 1991·1996) : 1집 《祇園의 꽃》 2집 《불교교리사상사 1》 3집 《불교교리사사상 2》

 ③논고(기고문 포함)
〈화엄경의 小考察〉 《녹원》 2집, 1947.
〈新羅佛敎의 思想的 特徵〉 《맥》 7호, 1967.
〈원효대사의 인물과 사상〉 《학술지》(건국대) 10집, 1968.
〈김시습의 인물과 사상〉 《상허 유석창박사 고희논문집》 1969.
〈매월당에 대한 소고〉 《건대학보》 23집, 1970.
〈신라의 초전불교에 대한 소고〉 《건대사학》 1집, 1970.
〈태고국사의 宗乘〉 《불교》 30~33호, 1970.
〈元曉大師의 思想〉 《법시》 19~35호, 1969·1970.
〈신라불교의 문화사상적 고찰-五敎를 중심으로〉 《건대사학》 2·3집, 1971·1972.
〈慧超 『往五天竺國傳』殘文〉 《건대학보》 25집, 1972.
〈元曉大師 著 《判比量論》에 대한 고찰〉 《학술지》(건국대) 15집, 1973.
〈太古國師法語 : 禪敎兩宗과 諸宗包攝〉 《불교사상》 1집, 1973.
〈재가불교의 재조명〉 《법륜》 82집, 1975.
〈보조국사 지눌의 인물과 사상-한국불교종조론을 중심으로〉 《인문과학논총》(건국대), 14집, 1976.
〈大覺國師가 고려사회에 미친 영향〉 《불광》 19호, 1976.
〈태고 보우국사의 인물과 사상〉 《건대사학》 5집, 1977.
〈태고국사의 인물과 사상〉 《불교》 68~70호, 1977.
〈한국불교사상 태고 보우국사의 지위-한국불교의 宗祖論을 중심으로〉 《한국불교학》 3, 1977.
〈원효대사의 정토사상-《유심안락도》를 중심으로〉 《학술지》(건국대) 20집, 1979.
〈韓國佛敎史上 한용운의 위치-《조선불교유신론》을 중심으로〉 《인문과학논총》(건국대) 14집, 1982.
〈진정한 僧伽의 사명과 위치-승려란 대체 누구인가〉 《불교》 133호, 1983.
〈매월당 김시습〉 《법륜》 169~170집, 1983.
〈이조 말의 불교-암흑기의 불교, 그 모습〉 《불교사상》 21호, 1985.
〈신라불교의 계율관-戒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 《불교》 157호, 1985.
〈민중과 더불어 산 생애-한국불교의 얼: 원효사상의 재조명〉 《금강》 8호, 1985.
〈원효사상에 나타난 인권론-《열반경종요》를 중심으로〉 《인문과학논총》(건국대), 17집, 1985.
〈蓮潭私記를 통해 본 조선시대의 화엄학〉 《한국화엄사상연구》 동국대출판부, 1986.
〈원효사상의 현대적 조명〉 《민족불교》 창간호, 1989.
〈원효대사의 행적과 사상〉 《세계불교》 6~10호, 1990·1991.
〈보조는 선교의 통합을 종단적으로 실천한 일이 없다〉 《불일회보》 166호, 1994.
〈만해 한용운의 자유사상〉 《한용운사상 연구》 3집, 1994.
〈태고 보우의 법통과 문손〉 《태고보우 논총》 대륜불교문화연구원, 1997.
〈원효대사: 불교의 모든 종파 회통〉 《불교춘추》 10호, 1998.

지금까지 이영무의 번역, 저서, 기고문, 논문, 저술 등을 살펴보았다. 학술 논문과 함께 대중적인 성격의 일부 기고문도 함께 소개했는데, 여기서 드러난 그의 학문적 경향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이영무 교수의 불교학에서 여타 학자와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번역을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유년시절부터 한학을 제대로 배웠던 이력과 승단에서 경학을 연찬한 경험이 어우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 동년배의 학자들은 어느 정도 번역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는 했지만, 이영무 교수처럼 폭넓은 분야에서 번역을 남긴 경우는 흔치 않다. 우선하여 주목할 번역 작업은 《열반경 종요》를 비롯한 원효의 저술이다. 물론 원효 저술의 대부분을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원효에 대한 탄탄한 이해가 뒷받침된 그의 번역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또한 그는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다수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이영무의 저서  《유마경 강설》(1989).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동문선》과 《동사강목》을 비롯한 동양사, 일반 역사, 한시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특히 《사기》를 40대 후반에 번역하여 50대 초반에 펴냈음은 학문적 열정의 소산이라 하겠다. 또한 그는 한시, 선시를 다수 번역하였는데, 유년 시절부터 한문으로 일기를 썼을 정도의 실력과 운율에 맞추어 한시를 지을 수 있는 능력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처럼 불교와 역사, 한시, 선시를 망라한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번역했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번역과 논문 작성이 양립하지 못하는 작금의 학문적 풍토를 고려한다면, 이영무는 그 양쪽을 병행했다는 점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의 연구 경향의 특징은 재가주의적 관점이 투영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20대 중반에 환속하여 대학에서 교수로 정년을 마칠 때까지 40여 년간을 재가에서 연구 활동을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재가승의 정체성을 띠고, 승려 결혼을 인정하는 태고종을 배경으로 활동하였기에 이런 성격이 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원효, 김시습, 한용운에 대하여 우호적이었으며 그들에 대한 글을 집필하였다. 《유마경 강설》을 펴낸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즉 그는 승속불이(僧俗不二) 사상을 갖고 있었다. 승속을 넘나드는 삶의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재가주의가 투영되었던 것이다.

셋째, 이영무의 한국불교사상 연구는 고승 연구가 중심이었다. 특히 원효, 보우, 지눌이 그 대상이었다. 이는 불교사상의 전개, 토착화, 대중화 등에 있어서 고승이 차지하는 역할과 위상이 지대하다고 본 것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가 근현대기 한국불교를 통불교로 이해하였던 측면과 자신이 연고를 맺었던 태고종단이 종조를 태고보우로 비정하였던 저간의 사정도 작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불교 종단의 종조에 관심이 적지 않았다.

넷째, 이영무 불교학의 주된 테마는 원효에 있었다. 그는 일생 동안 한국불교 사상, 고승을 연구하면서 최종적으로 원효가 가장 뛰어난 사상가임을 논문으로, 대중적인 기고문으로, 대중강연으로 다양하게 피력하였다. 그는 원효를 신라불교계에서 제일의 위인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사상사에서도 가장 훌륭한 인물로 내세우면서 원효를 위인, 고승, 대종교가, 대문호, 대저술가, 대연설가 등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이영무 불교는 번역, 재가주의, 고승, 원효라는 몇 개의 코드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불교학을 당대의 현실적인 문제와 연관 지어 살펴보자. 무릇 학문은 현실과 무관할 수 없고, 동시에 학자는 자기가 생활하였던 현실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때로 학자는 자기의 현실을 학문을 통해 개입한다. 학문 연구를 함으로써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영무가 현실과 교류하면서 선택한 불교학의 소재를 다시 들추어 볼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종조 문제와 원효이다. 종조 문제는 불교정화운동으로 조계종과 태고종이 대립하였던 현실과 연관된다. 원효사상은 우리 민족 내부의 분열과 통일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염원의 산물이었다.

우선 종조 문제를 말해보자면, 종조 문제가 근현대 불교에서 제기된 것은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이 성립한 전후 시기였다. 당시에도 논란이 적지는 않았지만, 태고보우 국사를 종조로 인식하는 것이 주류였다. 그러면서 도의국사를 종조로 해야 한다는 이견이 잠복해 있었는데, 8·15 해방공간에서는 종조를 표방하지 않다가, 1954년 6월에 도의국사를 종조로 내세웠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종조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정화운동을 주도한 일부 승려와 학자들이 조계종단의 종조를 보조지눌로 내세우자, 만암은 그를 환부역조라고 주장하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만암은 보우를 종조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화운동 당시에는 비구 측이나 대처 측도 공론화하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하였기에 종조 문제는 수면 아래로 잠복하였다. 그러다가 1962년 4월 통합종단인 조계종단이 출범하면서 선종의 정체성을 표방한 조계종은 도의국사를 종조로 내세웠다. 그러나 1970년에 창종한 태고종은 태고보우 국사를 종조로 내세웠다. 그런데 조계종단은 도의국사를 종조로 내세우면서도 태고보우 국사를 중흥조로 받들었다. 그러나 일부 승려들은 태고보우와 보조지눌을 종조로 인식하기도 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당시의 불교학자와 고승들은 한국불교의 종조 문제를 학문적으로 인식하면서 다양한 글을 기고했다.

 
   
원효연구원 개원식에서 혜남·성타 스님, 고준환 교수 등과 함께(1996. 11).

이런 배경에서 이영무는 국가에서 불교 문제에 개입하였던 정화운동과 이승만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태고종에 대한 우호적 관점을 견지하며 그 현실적 논란에 참여했다. 이영무는 한국불교의 종조 문제를 태고보우 국사의 위상과 임제 법통설을 통해 접근했다. 즉 그는 태고는 한국불교의 중흥적 중시조(中始祖)로서 위상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동시에 한국 근현대기 불교도들 거의가 태고보우 국사의 문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성철과 지관이 주장했던 임제종 법통을 부정하였다. 임제종 법통을 강조함은 중국 임제종에서 전래, 전법한 법통을 강조하는 것이기에 비주체적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태고의 법통은 국내적 요소와 국제적 요소 양면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과거(고려 말)의 법통도 중요하지만, 태고가 추구한 원융정책으로 종파불교를 지양한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태고의 영향으로 한국불교는 통불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태고보우 국사의 법통은 곧 한국불교의 법통이니 위로는 불타의 정법통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통합을 이룩한 중흥조로서의 법통을 수립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한국불교의 종단과 승려는 태고를 종조로 추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불교는 선불교(禪佛敎)보다는 통불교(通佛敎)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종조론, 한국불교 정체성)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원효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겠다. 앞에서 간략히 지적한 대로 이영무의 원효 이해와 연구는 단순한 학문적 정리에 머물지 않았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 사상으로 원효를 인식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된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예증으로 〈원효사상에 나타난 인권론〉이라는 논고를 거론할 수 있다. 이 논고는 그가 1985년에 건국대 《인문과학논총》 17집에 기고한 글이다. 이영무의 학문적 정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이 글로 그는 1986년도 뇌허학술상을 수상했다.

그 글의 서두에서 이영무는 인권의 개념, 역사성 등을 거론하면서 인류 역사상 인본주의에 대한 진정한 이론을 가장 먼저 제시했고, 인권운동의 실천에 가장 앞섰던 당사자가 원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원효의 이론을 더듬어 구명함으로써 오늘날의 인권운동과 비교 검토하여 인권운동의 이론 정립 및 실제적 전개에서 원효가 재조명되기를 바랐다. 그는 본론에서 원효사상의 불교적 수용과 인간관, 원효사상의 바람직한 인간상을 대별하여 분석하였다. 그리고 결론에서 원효는 올바른 인간관을 정립하였고, 동시에 진정한 인권론자라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원효는 서양의 인간관과는 달리, 인간 자체를 가장 훌륭한 존재로 보면서 누구라도 훌륭하게 잘살 수 있는 요소를 지녔다고 강조했음을 지적했다. 그래서 원효가 언급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보신(報身)이 곧 원효의 인간상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런 입론하에서 그는 “원효의 인간관의 본질은 인간이 빨리 중생적(衆生的) 조건을 개선하여 자신을 불(佛)과 같은 훌륭한 존재로 향상시키고 아울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토와 사회를 극락세계와 같은 모든 부조리가 제거되어 청정과 평등과 평화가 충만된 정토(淨土)를 이루는 데에 있다 하겠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원효사상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현대적 해석, 현실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방법론적 원용 등을 통해 탁월한 논지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불교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이 논고에서 언급하지 못한 부분은 이영무 교수가 찬술한 수많은 비문에 대한 것이다. 수십 편에 달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 수많은 비문은 아직도 정리와 분석이 미진한 채로 남아 있는데, 필자의 후일 연구 과제로 넘기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영무 교수의 불교학 특성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영무 불교학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면, 당연히 이영무의 생애에 대한 천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점과 관련하여 이영무 교수의 후배이면서 유식학을 전공한 불교학자인 오형근 교수가 《이영무 불교선집》의 〈발문〉에서 이영무의 삶을 요약한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태고종 총무원장으로 계시는 운제 이영무 원장님은 일찍이 불교학을 연구하시고 또 역사학을 전공하신 대학자이시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대학교에 계실 적에는 역사학을 교수하시고 또 시중에서 설교하실 때에는 불교학을 강의하시는 등 폭넓은 사상을 널리 보급하셨다. 그러므로 원장님은 대학에서는 역사학자였지만 우리 불교계에서는 불교학자로 알려진 만큼 불교를 전파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신 분이다. 경전(經典)과 율전(律典) 그리고 논전(論典)을 함께 연구하시고, 나아가서 선학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원효대사의 저서를 번역하고 또 천태 선사의 《지관론(止觀論)》을 강설하는 등 많은 역서와 논서를 남겼다. 그리고 신문과 잡지에도 많은 글을 발표하여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시고 올바른 교리관과 신앙관을 심어주셨다.
뿐만 아니라 원장님은 각종 법회에 참여하고 심지어는 학생들의 수련대회까지도 참여하시며 따듯한 지도를 하여 청년 불자들을 발심케 하고 미래의 포교사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오셨다.

이는 우리 한국불교가 비교적 대중화가 되지 못한 것을 염려하시며 불교의 이념과 보살사상의 생활화에 앞장서시고 대중교화하는 데 생애를 바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으로 원장님이 걸어온 발자취는 보살불교 구현의 표상이며 현대의 불자들이 본받아야 할 표본인 것이다.

오형근 교수의 이 글은 학자로서 또 승려로서 살아온 이영무의 삶을 핵심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영무 불교의 정확한 본질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 글에서 표현한 그의 보살행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점에서 필자의 이 글은 불교학자 이영무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추후에는 그의 행적과 전체적인 논고, 어록 및 인터뷰 내용, 그의 학문적 계승 등 총괄적인 측면에서 전체상과 특성을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영무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도 ‘이영무 불교학’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아, 자괴심을 지울 수 없다. 철없던 시절, 은사의 귀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였던 우치의 만용을 성찰하면서, 앞으로 은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불교학자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해 본다. ■
 

김광식 / 동국대학교 특임교수.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학술부장, 조계종 불교사 연구위원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불교 근대화의 이상과 현실》 등 저서 40여 권. 유심작품상(학술부문), 불교평론학술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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