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두기와 뛰어듦의 이중주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자음과모음, 2015년 12월 발행, 840쪽
우리 현실 속에서 지성인의 위상과 역할은 크게 부각되고 있지 못하다. 시대의 흐름에 발 빠르게 동참하면서 더 많은 이익을 챙기는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나, 그런대로 괜찮은 연봉을 받으면서도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는 눈감는 경우가 대부분인 중산층 지식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기능적 지식인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나 그에 따른 책임과는 상관없이 그 권한을 행사하는 데 몰두하거나 별다른 생각 없이 하루를 살아가곤 한다.

이런 지식인의 모습은 시민과 지식인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현대 시민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식인이라고 해서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고, 우리나라와 같이 고등교육을 받는 비율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특별히 그들을 구별할 방법이나 이유 또한 분명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일상적 차원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지식인을 그리워하고, 그들을 지성인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부르면서 존경하기도 한다.

그런 그리움과 존경은 두 가지 원천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우리 현실이 갈수록 척박해지는 현실 속 고통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현실이 지속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문제이다. 고통과 불안감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불안감은 특히 나와 자식의 미래라는 시간적 층위가 더해지면서 어떻게든 극복해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열망까지 수반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안감의 문제는 주로 미래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자연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장치들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있고, 그것에 근거해서 찾아낸 자연재해 관련 정보들이 인터넷망을 타고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시간이 거의 찰나 수준으로 단축되면서 불안감 또한 그에 비례하여 확산되고 있다.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 무기나 끊이지 않는 국제분쟁과 그로 인한 처참한 희생 또한 뉴스 화면을 가득 채우며 다가오곤 하지만, 그것에 대한 공감 능력은 갈수록 떨어져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광풍은 외적 풍요 속 내적 빈곤과 함께 빈부 격차의 지속적인 심화로 인한 ‘세계적인 비참’을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그 광풍을 20세기 후반 구제금융사태와 21세기 초반 세계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할 만큼 경험했지만, 불과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그 흐름에 휩쓸려 더 이상의 성찰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순간 이런 삶의 흐름이 언제까지 가능할지에 생각이 미치면 전율하다가도 금세 일상으로 복귀하고 만다.

지난해 말 이런 폭력적이면서도 무기력한 일상에 경종을 울리는 한 권의 책이 우리 앞에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이도흠 교수(이하 저자로 칭함)의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인류의 미래에 대한)》(자음과 모음, 2015)이다. 800쪽이 넘는 분량만으로도 이미 우리를 압도하는 이 책은 자본주의를 정점으로 삼아 전개되고 있는 인류의 삶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전제하면서, 그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7세기의 원효와 19세기의 마르크스를 대화의 상대자로 초청하고 있다. 7세기 한반도의 원효와 19세기 유럽의 마르크스를 각각 대화의 상대자로 초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요 초점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그 둘 사이의 대화에 맞춰져 있다.

‘우리 진보이론’의 모색

저자는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이 책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제시하고 있다.

지금의 이 미친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데 마르크스주의만 한 것은 없다. 마르크시즘을 비롯해 근대성의 사유를 극복하는 데 불교만 한 것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학문의) 수입오퍼상을 넘어 우리의 진보이론을 모색하고 싶었다. 붓다가 아니라 원효를 내세운 이유다.
— 《교수신문》 2016. 1. 20(www.kyosu.net 검색)

붓다가 아닌 원효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우리의 진보이론’을 모색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는 목차를 통해서도 상당 부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 위기’(1장)를 출발점으로 삼아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2장)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3장)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4장) ‘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상품화’(5장) 등을 주제로 삼아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는 사회생태론과 불일불이의 연기론을 대비시키는가 하면 과학기술주의 비판과 일심(一心)의 체용론을 대비시키고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현상의 분석 도구로 서구 중심의 현대 학문적 관점과 함께 원효의 관점을 대비시킴으로써 저자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형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근대성 자체의 위기를 다루는 6장이나 분단모순의 심화와 동아시아의 전쟁 위기를 다루는 7장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고, 욕망의 과잉(8장)이나 정보화 사회의 모순(9장), 가상성과 재현의 위기(10장)를 다루는 곳에서도 일관성 있게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 틀을 가지고 자본주의의 위기로 상징되는 인류의 위기 징후를 각각의 주제로 나누어 분석한 후에, 결론적으로 자본주의는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는 체제임을 객관적 근거를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자본주의는 50년 안에 붕괴될 수도 있다. 이윤율 저하, 기술혁신에 따른 재생에너지 사용, 공유경제의 확대 때문이다. 지금 자본주의는 정점에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는 거의 모든 동력을 소진했다. ……(중략)…… 자본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확대재생산을 해야 하는데, 동력이 남았더라도 이 체제가 더 확대될 ‘빈틈’이 없다. 이는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 원리가 더 진전되기 어려움을 의미한다. 물질대사를 하지 못하면 생명이 죽는 것처럼, 확대재생산을 하지 못하는 자본주의는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다.(‘맺음말, 768쪽, 밑줄은 필자)

이 주장이 어느 정도의 예측력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확실하게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저자의 분석과 주장이 사회현상의 분석이라는 거시성과 인간의 마음이라는 미시성의 통합을 비교적 적절하게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그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마음에 다가오는 여러 사태를 통해 체험적으로 살아내고 있다. 물론 그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곧 사회적 사태 자체는 아니다. 우리들의 본성과 성장 과정의 문화적 세례를 통해 형성된 상(相) 또는 관점이라는 거름 장치를 통해 외부의 사태를 받아들여 재구성하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표출해 내면서 사회와 상호작용한다.
20세기 서양사상은 대체로 이러한 거시성과 미시성의 조화를 마르크스(K. Marx)와 프로이트(S. Freud)라는 두 사상가의 이론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시도해왔고, 우리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프롬(E. Fromm)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꿈의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분석학과 자본주의 체제의 상품화와 노동의 소외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경제학적 사회비판의 통합을 통해 프롬은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적 위기의 뿌리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소외 현상과 맞닿아 있음을 밝혀냈고, 우리는 그것을 1980년대에 마르크스에 접근할 수 있는 간접적 통로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저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대신에 원효의 일심(一心)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마음론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연계시키면서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원효는 한국사상의 새벽이라는 평가를 받는 주체적인 한국 사상가이다. 그 주체성의 맥락은 당시까지의 불교사상에 관한 독자적인 해석과 현실 적용이다. 그는 한편으로 불교 경전에 관한 주석을 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학문 방법론을 채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독자적인 관점으로 재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시 자신이 살고 있는 신라 사회의 모순과 연결 짓는 실천적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독자성과 실천의 적절성이 곧 우리 학문의 중심축이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도흠 교수의 시도 또한 우리 학문의 독자성과 실천성을 일정하게 담보하고 있는 의미 있는 결과물이라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삶과 학문의 거리 극복이라는 화두(話頭)

우리 시대의 학자는 대체로 자신의 전문성과 그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는 학계의 폐쇄성 속에서 안주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P. Bourdieu)의 적절한 지적과 같이, 자신들만의 장(場)을 만들어놓고 자신들만의 언어로 전문적인 견해를 주고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서 기대하는 지성인의 역할을 학자가 해낼 수 없는 학문구조가 정착되어 버렸고, 결과는 세상으로부터의 소외와 그 전문성 자체에 대한 의구심 확산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땅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추운 길거리를 걷기도 하고, 때로는 형편없이 위축된 이 땅의 진보를 어떻게든 살려보기 위해 ‘진보연석회의’를 제안하여 이끌기도 한다. 이러한 실천들은 그에게서 삶과 학문의 일치라는 내면적 욕구에의 충실이기도 하고 실천과 학문, 일상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에 관한 직시(直視)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서평자는 사실 이 책과 저자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할 수 있는 거리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해야만 할 것 같다. 저자의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며 머리를 끄덕이는 것도 어쩌면 그러한 거리 두기의 불가능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하는 성찰을 하게 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서평자의 역할을 거부하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 오히려 그 가까운 거리를 역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평자는 저자의 자본주의 미래에 관한 예측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자본주의는 늘 위기를 겪어왔고, 그 위기를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과 사회주의라는 거울을 동시에 이용해 극복해왔다. 지금의 위기가 더 위험한 지점이 있다면, 바로 그 거울인 ‘사회주의’의 정당성과 유효성에 관한 인식이 부정적이라는 점이다. 그 사회주의의 뿌리는 당연히 마르크스주의이고, 마르크스주의의 뿌리는 다시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에 닿아 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사회주의 체제의 불완전함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론 자체의 흠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 흠결은 마르크스 자신에게도 가 닿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비판 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유효할 테지만, 비판은 항상 대안을 전제로 할 때에만 온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유효성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서 저자는 사회의 변혁과 함께 나 자신의 변혁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자신의 변혁에 관한 관심의 통로로 원효를 호출하고 있다. 핵심은 인간의 이기성과 그것을 가져오는 배경인 상호의존성에 관한 인식의 부재라는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인지 모른다. 우리 시대 지성의 한 표본을 보여주고 있는 저자의 삶과 학문을 통해 그 인식과 실천의 연결고리가 공감(empathy)이라는 매개를 통해 더 튼실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그것이 우리 지식인 사회와 대중의 삶 속에 지속적으로 확산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서평을 마무리한다. ■

 

박병기 /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윤리학, 도덕교육학 석사·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윤리를 수학했으며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현재 동양윤리교육학회 회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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