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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사상 / 이승하
[65호] 2016년 03월 01일 (화) 이승하 shpoem@naver.com

서구의 작가들은 두 개의 큰 보물창고를 갖고 있다. 그것은 서구인들의 정신사를 추동해온 두 개의 축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서구의 대다수 작가는 어릴 때부터 성경과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는다. 그 책자에 실린 내용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서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유하는 것이며,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정서와 정신에 깊숙이 작용한다. 예컨대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어느 작가가 자기 작품에 썼을 때 각주를 붙여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모세, 욥, 카인, 아벨, 베드로, 유다……도 마찬가지다. 크로노스, 포세이돈, 레아, 헤라, 아프로디테, 아폴론……. 이런 신의 이름뿐 아니라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영웅의 이름과 성격과 행적에 대한 이해는 작가의 성장과 함께 이루어진다. 서구의 작가들에게 성경과 신화의 내용은 우리 조상 중 사대부 계급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했던 사서삼경의 내용처럼 아주 어릴 때부터 삶 그 자체에 녹아들어 가 있다.

설사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더라도 다 익히 아는 이야기여서 서양의 문학작품에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들어 가게 된다. 성경과 신화라는 정신의 양대 축이 없었더라면 셰익스피어는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단테는 《신곡》을, 괴테는 《파우스트》를, 존 번연은 《천로역정》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톨스토이도 도스토옙스키도, 빅토르 위고도 카잔차키스도 전혀 다른 소설을 썼을 것이다. 존 던, 존 밀턴, 윌리엄 블레이크, 횔덜린, 릴케, 엘리엇, 오든, 딜런 토머스……. 모두 신과 인간 사이를, 신성과 세속을 오가면서 시를 썼던 시인들이다.

이 땅의 시인들 가운데 불교의 정신 혹은 붓다의 가르침, 불경의 심오한 사상에 감화받아 시를 쓴 시인들로 어떤 이를 꼽을 수 있을까? 20대 중반에 출가하여 40년 동안 스님이었던 한용운, 10여 년 승려 생활을 했던 고은, 한국불교계의 대덕 조오현……. 불교설화를 모티브로 한 시를 종종 썼던 서정주와 붓다의 전생 일대기를 시로 썼던 김달진, 재가승이나 마찬가지였던 박희진……. 이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하지만 한국 현대 시문학사를 수놓았던 시인들과 지금 이 시대의 시인들 가운데 불교의 교리 혹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윤회, 인연, 구도, 해탈, 자비, 무상 등을 주제로 시를 쓴 시인은 그 수가 결코 적지 않다. 불경이 워낙 어려워서 성경을 옆에 두고 읽듯이 읽지는 않지만, 시인이 불교도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작품 속에 불교사상이 투영된 것이 적지 않다. 이 글은 현대시 속에 나타난 시인들의 불교사상 이해에 관한 것이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 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이 시에서 윤회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윤회(samsara, reincarnation)란 원래 인도에서 형성된 하나의 ‘설’로서, 《리그베다》 《우파니샤드》 등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인간은 해탈하기 전까지는 생사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이때 취하는 몸과 태어나는 세계는 자신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는 인도의 관념을 불교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윤회라는 말은 중생이 미혹의 세계에서 삶과 죽음을 반복하기를 수레바퀴처럼 멈추지 않고 유전함을 뜻하기에 윤회전생(輪廻轉生)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 윤회는 생명체가 죽어 다른 생명의 종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이 시에서는 생명체가 죽어 사물이 되고, 사물이 죽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이 사물이 되고, 사물이 식물이 되고, 식물이 광물이 된다.

이런 생각은 서구의 변신 모티브와도 다르고 합리적 사고와도 거리가 멀다. 지극히 동양적인 사고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은 현대물리학의 세계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현대물리학이 원자의 존재를 실증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양자와 중성자 및 기타 수많은 아원자입자(亞原子粒子)들을 발견한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우주의 온갖 별과 성간물질이 아주 역동적이고 불가분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모든 입자는 다른 입자들로 바뀔 수 있으며, 전 우주가 따로 떼어질 수 없는 에너지 모형들의 역동적인 그물[網]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을 관통하는 이러한 개념에 정확히 들어맞는 시가 바로 서정주의 〈내가 돌이 되면〉이다. 시인은 살아생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불교의 윤회설을 믿네”라고 말했다. 〈국화 옆에서〉나 〈귀촉도〉에도 윤회설이 다소 비치기는 하지만 만물이 유전하고 생명의 종이 바뀌는[轉生] 윤회설에 부합하는 시가 바로 〈내가 돌이 되면〉이다.

꼬부라진 胎兒들이

비린내를 풍기며
이 문으로 감쪽같이 들어오고

꾸부정한 늙은이들이
퀴퀴한 냄새를 풍기면서
이 문을 거짓말처럼 빠져나간다

덧없으니까 비워둔
누군가의 삶
거기도 덧없으니까 비워둔 來世

그렇다면 회전문을
들락날락
흩어지는

구름떼
 — 최승호 〈윤회를 위한 회전문〉

회전문은 사람들이 건물에 들어오고 나갈 때 손을 쓰지 않고도 문을 열 수 있게 만들어놓은 문명의 이기다. 그런데 회전문이 이 시에서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강 같은 역할을 한다. 건물 안은 이승이고 건물 밖은 저승이다. 또한 건물 안은 현생이고 건물 밖은 내세다. 시인이 보건대 현생도 내세도 덧없기는 마찬가지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죽고…… 회전문을 들락거린다. 들고나는 사람들로 회전문이 계속해서 뱅글뱅글 돌고 구름은 무심하게 떼를 지어 모였다 흩어진다. 시인은 인생무상에 대해 말한다. 집착을 끊고 해탈을 꿈꾸는 시인의 마음도 읽힌다. 태아는 꼬부라진 몸으로 태어나고, 늙은이도 꼬부라져 삶을 마감한다. 현생과 내세를 가르는 문은 언제나 열려 있고, 그 틈으로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부단히 넘나드는 생멸현상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다. 현생 너머 내세, 내세 너머 현생에 우리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우리에게 언제나 피안(彼岸)이다.

불교에서는 인연(因緣, hetu-pratyaya)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因]과, 그 원인과 협동하여 결과를 만드는 간접적인 힘이 되는 연줄[緣]이 있는데, 모든 생명과 사물은 이 인연에 의해 생멸한다는 것이다.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존재의 생멸은 진실한 모습이 아니므로 ‘불생불멸’이라고 했다. 미라를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은 죽어도 뼈와 머리카락, 그리고 손톱·발톱이 우주의 한 귀퉁이에 남는다. 화장을 할 경우에도 굴뚝 연기를 통해 살과 머리카락은 소각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뼈는 고스란히 남는다. 육신의 일부가 여전히 이 우주에 미세한 먼지의 형태로라도 남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전세의 인연이다”란 것이 있는데 이를 봐도 우리 선조들이 불교의 사상과 교리를 일상생활에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언제던가 나는 한 송이의 모란꽃으로 피어 있었다.
한 예쁜 처녀가 옆에서 나와 마주 보고 살았다.

그 뒤 어느 날
모란꽃잎은 떨어져 누워
메말라서 재가 되었다가
곧 흙하고 한세상이 되었다.
그게 이내 처녀도 죽어서
그 언저리의 흙 속에 묻혔다.
그것이 또 억수의 비가 와서
모란꽃이 사위어 된 흙 위의 재들을
강물로 쓸고 내려가던 때,
땅 속에 괴어 있던 처녀의 피도 따라서
강으로 흘렀다.//
그래, 그 모란꽃 사윈 재가 강물에서
어느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
그 血肉에 자리했을 때,
처녀의 피가 흘러가서 된 물살은
그 고기 가까이서 출렁이게 되고,
그 고기를, 그 좋아서 뛰던 고기를
어느 하늘가의 물새가 와 채어 먹은 뒤엔
처녀도 이내 햇볕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라서
그 새의 날개 곁을 스쳐 다니는 구름이 되었다.
— 서정주 〈인연설화조(因緣說話調)〉 전반부

이 시에는 윤회설과 인연설이 뒤섞여 있다. 모란꽃이었던 화자가 죽어 흙의 일부가 되었고, 한 예쁜 처녀가 죽어 그녀의 피가 강의 일부가 되었다. “억수의 비”가 온 날 화자는 물고기의 배로 들어가 “그 혈육에 자리”하고, 처녀의 피가 뒤섞인 물살은 물고기 가까이에서 출렁이니 다시 만난 셈이 된다.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물고기를 “어느 하늘가의 물새가 와 채어 먹은 뒤엔/ 처녀도 이내 햇볕을 따라 하늘로 날아올라서/ 그 새의 날개 곁은 스쳐 다니는 구름이 되었”으니 인연이 또다시 이어진다.

그러나 그 새는 그 뒤 또 어느 날
사냥꾼이 쏜 화살에 맞아서,
구름이 아무리 하늘에 머물게 할래야
머물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구름은 또 소나기 마음을 내 소나기로 쏟아져서
그 죽은 샐 사간 집 뜰에 퍼부었다.
그랬더니, 그 집 두 양주가 그 새고길 저녁상에서 먹어 소화하고
이어 한 嬰兒를 낳아 양육하고 있기에,
뜰에 내린 소나기도
거기 묻힌 모란씨를 불리어 움트게 하고
그 꽃대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이 마당에
現生의 모란꽃이 제일 좋게 핀 날,
처녀와 모란꽃은 또 한 번 마주 보고 있다만,
허나 벌써 처녀는 모란꽃 속에 있고
전날의 모란꽃이 내가 되어 보고 있는 것이다.
— 〈인연설화조(因緣說話調)〉 후반부

둘의 인연에 사냥꾼이 개입하고, 소나기가 또 내리고 결국 다시 모란꽃과 화자가 만나는데, 이번에는 처녀가 모란꽃 속에 있고 전날의 모란꽃이 내가 되어 있으니 처지가 바뀌었다. 윤회의 과정을 거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모란꽃으로 피어난 인연에는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원인이 되는 순환의 고리가 있다. 하나의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로 바뀌는 데에는 죽음 현상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화자와 처녀가 같은 모란으로 피기까지에는 이들의 죽음에 지상의 온갖 생명체들이 관여한다. 생명을 벗은 몸이 다른 물상과 하나로 섞일 때 화학작용이 일어나고, 이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개별적인 존재자로는 이룰 수 없는 탄생의 기쁨은 인연이 있기에 가능하다. 지금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와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가을
우리는 어디로 떠나야 합니까

내년
이 아침에도
풍요로이 돋아나서
미련 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빛을 내려주시고

타는 풀잎
서걱이는 갈증
앙금처럼 적셔 오는
한 방울
이슬이듯

이제 헤어져도
뒷날
後生의 연분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머니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 허영자 〈이파리의 노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엽의 계절’이라 함은, 나무에서 이파리가 떨어지는 계절인 가을에 대한 비유다. 시인이 보건대 이파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다. 낙엽은 땅에서 썩음으로써 거름이 되어 나무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란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의 한 구절은 과학적으로도 틀린 것이 아니다. 이파리는 “이제 헤어져도/ 뒷날/ 後生의 연분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하고 소망하는데, 시인은 나무와 이파리와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과의 관계로 확장시켜 생각한다. 같이 살아도 때가 되면 헤어지는 것이 부모·형제간이니 회자정리(會者定離)인 것이다. 아무리 살가운 사이, 절친한 사이라도 때가 되면 이별은 필연적임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불교가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는 해탈(解脫, moksha)이다. 인간의 영혼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속세간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심경에 이르면 해탈했다고 한다. 영혼이 일단 육체 속에 들어간 뒤에는 해탈을 이루는 완전함이나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윤회를 계속해야 하고, 그것이 곧 업이다. 업(業, karma)이란 인도철학에서 온 것으로, 과거의 행위가 미래 세상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불교나 자이나교는 인도인들의 정신적 유산인 업보설을 자신의 사상체계에 받아들였고, 특히 불교에서는 도덕적인 인과응보라는 개념으로 업을 명확히 해석하였다. 살아서 열심히 도를 닦고[自利], 남을 위해 줄기차게 보시하면[利他] 다시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 고통을 받는 업이 소멸되므로 이를 가리켜 해탈 혹은 열반(涅槃, nirvana)이라고 한다.

푸른 觀世音菩薩像
寂照 속 慈悲의 涅槃

서라벌 千年을 微笑하시는
忍辱 柔和의 相好
맑숙한 어깨
蓮꽃 봉오리의 젖가슴
몸은 보드라운 均齊의 線에 神韻이 스며서

(……)

돌이
無心한 돌부처가
그처럼
피가 돌아 生命을 훈길 수야 있을까

갈수록 多情만 하여
아 문둥이 우는 밤
煩惱를 잃고
돌부처 觀世音菩薩像
大超越의 涅槃에
그리운 情 나도 몰라

生生 世世
歸依하고 살고 싶어라
— 한하운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부분

한평생 한센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주옥같은 시를 남긴 한하운이 쓴 이 시는 관세음보살상의 미소를 보고 쓴 것이다. 시인은 관세음보살이 지상의 업보를 다 벗고, 안전히 열반의 경지에 들었기에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다고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열반을 이루었기에 “청초(淸楚)한 눈동자는 천공(天空)의 저쪽까지/ 사생(死生)의 슬픔을 눈짓하시고/ 대초월(大超越)의 자비(慈悲)로,/ 신래(神來)의 비원(悲願)으로,/ 요계혼탁(澆季混濁)한 탁세(濁世)에 허덕이는/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시고/ 정토왕생(淨土往生)시키려는 후광(後光)으로/ 휘황(輝煌)”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표정을 본 석공이 돌에다 새길 수 있었으려니 생각한 것이다. 나도 돌부처 관세음보살상처럼 “대초월의 열반”에 들어 “그리운 정 나도 몰라”도 영원무궁 “귀의하여 살고 싶어라”고 소망해보는 것이다. 내 얼굴은 비록 병으로 말미암아 흉하게 일그러져 있지만, 마음은 저 관세음보살상처럼 밝은 미소를 지닌 채 열반의 경지에 들고 싶다는 것이 한하운의 간절한 소망이었나 보다.

극락왕생하는 이는 서러움 없으리라
괴로움에 가슴 죄인 아픔으로 눈 감으면
잊었던 옛 무등 밖에 불빛으로 빛나리

타오르는 땅 위에 시름은 옛 이야기
풀잎에 구르는 듯 바람 앞에 피어나면
멀리 마음 하나가 자리잡고 울어라

잊어라 가슴 좁혀 타오르면
보이는 것 극락정토 마른 나무 꽃잎 피어
오늘을 기억하는 달 눈썹 속을 날은다.
— 박진관 〈우민별곡(憂民別曲)〉

‘우민(憂民)’이란 백성의 일을 근심하는 것을 일컫는다. 세상 잡사는 늘 근심을 가져오는데 그것을 다 떨쳐버리고 자리이타의 삶을 실천하면 극락정토에 가서 다시 태어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서러움과 괴로움, 아픔과 시름을 다 잊어버리지 않으면 해탈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속세의 인연 때문에 번민하고 속세의 범사 때문에 고뇌하면 결코 해탈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지훈이 쓴 〈승무(僧舞)〉의 유명한 구절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에 잘 나타나 있듯이, 번뇌를 떨쳐버리려 승무를 춘 저 여승은 결국 먼 하늘의 한 개 별빛을 발견한다. 번뇌란 것은 떨쳐버리고 싶어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별과 달이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밤이면 하늘에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불도를 닦는 사람이라도 끊임없이 수양하고 참선해야 하는 것이다. 보시의 이타행을 죽을 때까지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득도했다고 하여 참선하지 않으면 금방 도로나무아미타불이 된다고 붓다는 이런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비구들아, 모든 것은 쉴 사이 없이 변해가니 부디 마음속의 분별과 망상과 그 밖의 여러 가지 대상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서 부지런히 정진하라. 부지런히 정진하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방일함을 원수와 도둑을 멀리하듯이 해라. 나는 방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정각을 이루었다. 마치 낙숫물이 떨어져 돌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이 끊임없이 정진해라.            
— 《대반열반경》 중에서

방일(放逸)이란 개망나니 짓이나 하면서 제멋대로 함부로 노는 것을 이름인데, 왜 붓다가 입적 시에 이런 말을 했을까. 수도의 길이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다.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한 망상을 끊어낼 수 없고, 그런 망상과 번뇌가 우리의 의식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는 한적한 곳에서 정진하라고 했다. 수시로 변하는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불변하는 정신의 구도에 온몸을 맡기라고 했다. 번잡한 세상사는 우리에게 아집과 번뇌만 안겨줄 뿐이므로 보리심을 가지라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십우도 이야기를 통해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見牛
어젯밤 그늘에 비친
고삐 벗고 선 그림자

그 無形의 그 裂傷을
初犯으로 다스린다?

태어난 목숨의 빚을
아직 갚지 못했는데

하늘 위 窀穸에서 누가 앓는 喘滿이다
상두꾼도 없는 喪輿 마을 밖을 가는 거다
어머니 邪戀의 아들 그 목숨의 反耕이여.

得牛
삶도 올가미도 없이
코뚜레를 움켜잡고//
매어둘 刑法을 찾아
헤맨 걸음 몇 萬步냐

죽어도 旱雷로 우는
生靈이어, 强盜여.

과녁을 뚫지 못하고 돌아오는 鳴鏑이다
짜릿한 感電의 아픔 複寫해본 살빛이다
이 天地 돌쩌귀에 얽혀 죽지 못한 운명이여.
— 조오현 〈심우도(尋牛圖)〉 부분

불교 선종에서, 본성을 찾는 것을 초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禪畫)를 ‘심우도’라고 한다. 선의 수행 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으로, 수행의 단계를 10단계로 하고 있어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중국 송나라 때 만들어진 보명(普明)의 십우도와 곽암(郭庵)의 십우도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데 조오현은 이 가운데 곽암의 순서를 취해 10편의 연작시를 썼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소도 동자도 안 보이고 강도가 나온다. 강도는 태생도 불우했고 성장환경도 아주 안 좋았다. “천만금(千萬金) 현상(懸賞)으로도/ 찾지 못할 내 행방(行方)”이니 홍길동이나 임꺽정쯤 되는 인물이다. 세상에 나가 온갖 죄를 짓던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데, 그것이 일부 ‘견우(見牛)’에 나와 있다.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이 어떤 계기가 되었는지 강도는 새로 태어나는 개심의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죽어도 한뢰(旱雷)로 우는/ 생령(生靈)이어, 강도(强盜)여.”에서 강도가 죽었다고 보면 안 되고 새로 태어났다고 봄이 옳다. 원래 ‘견우’는 동자가 멀리서 소를 발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본성을 보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상징한다. ‘득우’는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맨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경지를 선종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땅속에서 아직 제련되지 않은 금돌을 막 찾아낸 것과 같은 상태라고 흔히 표현한다. 실제로 이때의 소는 검은색을 띤 사나운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아직 삼독(三毒: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에 물들어 있는 거친 본성이라는 뜻에서 검은색을 소의 빛깔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고난을 통해 스스로 깨쳐 나가는 존재를 이 작품(시조)에서 그리고 있는 셈이다. 10단계 중 마지막 두 단계를 보자.

返本還源
석녀와 살아 白丁을 낳고
金利 속에 사는 뜻을

스스로 믿지를 못해
내가 나를 收監했으리

몇 劫을 姦通당해도
아, 나는 아직 童眞이네
길가에 돌사자가 내 발등에
놀라 나자빠진 세상 일으킬 將帥가 없어
스스로 일어나 만져보는 삶이여.

入廛垂手
생선 비린내가 좋아
肩帶 차고 나온 저자

장가들어 本妻는 버리고
小室을 얻어 살아볼까

나막신 그 나막신 하나
남 주고도 富者라네.

일금 삼백 원에 마누라를 팔아 먹고
일금 삼백 원에 두 눈까지 빼 팔고
해 돋는 보리밭머리 밥 얻으러 사는 문둥이여, 진문둥이여.
— 〈심우도(尋牛圖)〉 부분

반본환원이란 있는 그대로의 자연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산수풍경으로 나타낸다는 뜻이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조그마한 번뇌도 묻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참된 지혜를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시에서는 반대로, 완전히 타락한 화자가 나온다. 세상도 타락했고 나도 타락했다. 득도의 경지가 아니라 추락이요 전락이다. 입전수수는 원래 동자가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 큰 포대는 중생들에게 베풀어줄 복과 덕을 담은 것으로,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 제도에 있음을 상징한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시의 화자는 저잣거리에서 죄업의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 왜 조오현은 ‘심우도(尋牛圖)’라는 제목의 시를 쓰면서 죄업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타락한 인물을 내세운 것일까.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욕심을 버리고 살기가, 죄를 짓지 않고 살기가 어렵다는 말을 해주기 위해서 이 시를 쓴 것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마음을 비웠다’느니 ‘다 내려놓았다’느니 말하지만 인간의 본성 자체가 욕망을 추구하기에 이 〈심우도〉는 바로 인간의 그러한 본성에 천착하고 있다.

불자의 길이란 이성에 대한 욕망도 끊고, 재물욕도 끊고, 명예욕도 버리고, 결국은 다 비워야 하는 것임에, 그것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소설로 치면 앙티로망이다. 정형화된 심우도로는 찾아들어 갈 수 없는 지점을 역으로 통찰하고 있다. 화자는 결국 마누라를 팔아 치우고(가정을 버리고) 두 눈까지 빼 팔고(지혜를 버리고) “해 돋는 보리밭머리 밥 얻으러 사는 문둥이”처럼 짓무른 삶을 사는 신세가 되고 만다. 시인이 생각하건대 보통 사람들은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하지만 불도를 닦으려면 참선 정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시 속 인물처럼 더러운 세속의 진흙탕을 구르게 될 터이니, 마음과 몸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고 조오현은 타락의 극을 달리는 인물을 내세워 역설하고 있다. 허영자의 시도 수행자의 어려움을 말해주고 있다.

꽃아

井華水에 씻은 몸
새벽마다
參禪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
그 어둠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 허영자 〈연(蓮)〉

흔히 연꽃은 ‘염화미소’라는 고사에 나와 있듯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불법을 상징한다. 탁한 못에서 너무나도 청정하게 피워내는 연꽃인지라 이 혼탁한 사바세계를 밝히는 불·법·승의 총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에서 화자는 연꽃이 육체적 욕망의 불을 끄는 물의 역할을 해주기를 갈망한다. 수도의 과정 혹은 구도의 길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머리를 깎고 불도를 닦는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행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우리 시 가운데 어느 사찰이 나오거나 붓다나 고승이 나오는 것은 부지기수다. 제목이 ‘산사’거나 ‘○○寺 가는 길’ 같은 시가 아주 많다. 그 절에 얽힌 고사를 시의 바탕에 깔기도 하고 절 마당에 있는 나무를 등장시켜 불교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담아낸 시도 있다. 사찰의 역사가 전개될 때도 있고, 그 사찰에 관련된 인물들이 등장할 때도 있다.

남도 끝
황토 먼지 이는 길
큰 산을 만나러 간다.
西山과 草衣가 시간을 뛰어넘어
禪答 나누며
茶 한 잔 끓고 있는
동백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다.
침략자들 무서워 달아나고
시기하는 자들 입 다물게 하고
말하지 않아도
하늘엔 부처님의 미소 가득 퍼지니
서방정토가 여기가 아니고 어덴가
— 박주관 〈대흥사(大興寺)에서〉 전반부

전남 해남에 있는 대흥사는 임진왜란 후 서산대사가 자신의 의발을 대둔산에 전할 것을 부탁하여 중창하게 된 절이다. 그래서 대흥사의 건물 중 하나인 표충사에는 서산대사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가 중건한 대광명전도 대흥사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시인은 대흥사의 역사와 유래를 몇 줄의 시 안에 써넣고 있다.

유배 가는 길에 김정희는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 글씨가 영 안 좋다고 떼라고 하고선 자기 글씨로 교체했다고 한다. 9년 뒤에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가는 길에 다시 들른 대흥사에서 자기 글씨를 본 김정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광에 처박혀 있던 이광사의 글을 다시 걸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시인은 이것을 시의 후반부에서 “추사(秋史)가 노 저어 올 때/ 관세음보살도 타고 오신다.”는 말로 상징화한다.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추사가 마음의 수양을 확실히 하고는 유배지를 떠나는데, 이것을 가리켜 “관세음보살도 타고 오신다”라고 하니 얼마나 시적인 표현인가. 시는 “지금은 가고 없는 이들/ 어제도 오늘도 살아서 걸어오는 길가에/ 연꽃들 두런 슬쩍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로 끝난다. 이심전심·교외별전인 불교의 사상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이, 마지막 3행으로 깔끔히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十方世界가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리석은 중생에겐
한낱 진토로 비칠 게 아닙니까.
나이 서른이 오히려 부족해서
다섯이 더하도록 見性은커녕
단 한 번의 발심도 아니한
제가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그 자신을 미루어서밖에는
남을 이해할 수 없다는 한 가지.
— 박희진 〈부처님께 드리는 글〉 제2연

박희진의 이런 시는 외국어로는 번역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시방세계, 연꽃, 중생, 진토, 견성, 발심, 깨달음에 대해 각주를 붙이지 않고서 외국인을 이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 전래의 역사가 1,600년이 넘은 이 땅에서는 연꽃이며 중생이며 발심이며 하는 낱말이 그렇게까지 난해한 것은 아니다. 불교 정신이 우리네 정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생활화·체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리는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다. 껍질 하나를 벗기면 더 단단한 껍질 하나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세계가 불교의 세계다. 사성제(四聖諦)나 팔정도(八正道), 무아, 공(空), 돈오점수, 중도 등의 세계는 평생 참선 수련을 해도 다다르기 힘든 경지다. 큰스님, 대사, 선사는 그러한 세계에 근접한 이들에 대한 존칭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많은 시인이 자신의 불교 정서를 시에 담아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시인이 불자가 아닐지라도 우리의 습속과 문화에 불교사상이 무르녹아 있기 때문이다. 사상의 근원이 명확하게 불교에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윤회·인연·구도·해탈·자비 같은 주제들에 시인의 정서가 맞닿아 있는 시가 많다. 불교사상은 수많은 시인을 성장케 한 중요한 정신문화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

 

이승하 / 시인,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저서로 시집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감시와 처벌의 나날》 등과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 2》 등 다수가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지훈상, 시와시학상 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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