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글을 왜 쓰는가

《불교평론》과 인연을 맺으면서 불교에 대한 사유의 지평을 넓힐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더불어 붓다의 정치철학을 정립하고 체계화를 시도해볼까 하는 유혹도 느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아나키즘과 불교 사상의 유사성이다. 18세기에 등장한 아나키즘이 2,500여 년 전 붓다의 사상과 매우 흡사함을 항상 느껴왔다. 아나키즘은 청년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고 결국 학위 논문도 이 주제를 가지고 썼다.

프랑스 혁명과 볼셰비키 혁명 사이의 사상사적 불연속성의 시대에 구체화된 아나키즘은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아나키즘은 거의 논의되지 않아 사라진 이데올로기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아나키즘은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처방 능력을 상실한 채, 복잡한 이론적 변명으로 채색된 기존 이데올로기에 대한 염증 및 저항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와 함께 아나키즘의 사회인식 체계가 오늘의 사회에 높은 적실성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각종 시민사회운동의 뿌리로서 아나키즘이 거론되고 있고, 일제강점기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의 재조명, 자치 공동체 운동, 아나키즘 문예론 등 여러 갈래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아나키즘을 다른 사상과 비교하는 작업도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노·장자, 초기 기독교 사상 및 무교회주의, 유가와 양명학, 간디와 헨리 소로(H. Thoreau) 같은 다양한 개인들과 그린피스 같은 운동 단체에 이르기까지 아나키즘 이론으로 접근하는 영역은 매우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불교와 아나키즘의 비교는 보지 못했다. 이것은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로만 본 오해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의 교리를 정치철학으로 치환한다면 아나키즘과 매우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해온 필자로서는 항상 아쉬운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아나키즘과 불교를 비교해 보는 잡문 형태의 글을 써보기도 했고 지난해 12월엔 아나키즘 학회에서 불교와 비교하는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치와 종교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 ‘정경분리’는 내숭일 뿐이다. 이것은 긴 종교의 역사 속에서 생생한 발자취를 찾을 수 있고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불교의 하화중생과 자비정신을 사바세계에서 구체화하는 작업 중에는 정치적 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과제가 많다. 이에 붓다의 사상을 정치철학으로 치환하여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연구를 위한 글이 아니라 불교 정치철학을 정립하는 틀을 만드는 데 조그마한 디딤돌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는 글이다. 따라서 논문의 틀을 벗어나는 자유스러운 글쓰기가 될 것이다.

2.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1) 어떤 아나키즘과 불교를 비교할 것인가

사상이나 종교는 하나의 생물체와 같아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고정불변한 사상이나 종교는 없다. 아나키즘과 불교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 다양한 내용에는 언뜻 상반된 모습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아나키즘은 개인주의 아나키즘에서 공동체주의 아나키즘에 이르는 연결 선상에 다양한 모습의 아나키즘이 있다. 그리고 실천 방법을 두고 여러 갈래의 아나키즘이 있다.

아나키즘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마치 변신술에 능한 제우스의 경호신 프로테우스(Proteus)와 씨름하는 것과 비유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독선과 권위를 배제하고, 완벽한 이론을 거부하면서 자유와 개인적 판단의 우위를 강조하는 아나키즘의 자유인적 태도의 성격은 각양각색의 견해가 발생할 가능성을 이미 열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도 유사하다. 불교는 여러 갈래의 확장 과정에서 다양한 줄기를 가진 큰 나무가 되었다. 줄기만 보다가는 불교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고뇌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지만 그 바탕에는 사유의 원형질이 있다. 이것은 마치 식물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이 사유 원형질을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다양한 아나키즘 속에서 합의된 공통의 사유 원형질은 무엇인가? 아나키즘 사유의 뿌리는 크게 네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 즉 ‘자연론적 세계관’ ‘자주인적 개인’ ‘공동체 지향’ ‘권위에의 저항’ 등이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의 사유의 중심에는 위의 네 가지 요소가 뿌리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 원형질의 틀로 보는 아나키스트의 현실인식 내용과 특징은 무엇인가? 이를 크게 정리해 보면 ‘통치 기구에 대한 혐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참여 정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 ‘불평등 사회에 대한 비판’ ‘테크놀로지의 양가성’ 등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아나키즘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아나키즘이 ‘뒤죽박죽 혼란된 설교자’로 비판받는 것도 실천 방법의 다양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위에서 기술된 내용은 글의 전개과정에서 상론될 것이다.

모든 불교도가 합의한 내용이 있다. 이것은 연기론, 팔정도, 중도, 열반, 해탈, 공사상, 자비, 보살 등이다. 여기에 제시된 것들은 불교 교리의 키워드라고 볼 수 있다. 이의 구체적 설명은 될수록 간단하게 언급할 것이다. 문제는 두 사유를 직접 비교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마치 바다와 강을 비교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는 불교 교리의 내용을 어떻게 정치철학적 용어로 치환하여 비교하느냐의 문제이다. 이것은 글의 전개과정에서 계속 유의해야 할 내용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밝혀둘 것은 불교를 정치 이념으로 통치한 역사적 사례들은 비교 자료로서 제외할 것이다. 붓다의 정치 이상을 실천한 사례는 아직 지구 역사상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2) 어떤 틀로 비교할 것인가

아나키즘과 불교를 ‘이데올로기의 구조 틀’로 비교하고자 한다. 정치 이념과 종교는 믿음이라는 틀에서 보면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지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너무 다양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에서 가장 파악하기 힘든 개념으로 평가된다. 다양한 개념을 사전트(L.T. Sargent)는 포괄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어떤 집단의 이해 사실이나 진리로서 받아들여진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이다. 이것은 사회의 다양한 제도와 절차에 관한 일련의 구성이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세계에 관한 사실적이면서도 당위적인 청사진을 제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엄청나게 복잡한 세계가 아주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재구성된다.

결국 이데올로기는 사회집단이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해 가지고 있는 행동 지향적이고 일관성 있는 신념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구성요소에 대한 이론을 종합하고 정리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상황규정’ ‘지향가치’ 그리고 ‘실천방안’이다. 첫째, 상황규정은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나 정치 상황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어느 정도 경험성과 사실성을 갖게 된다. 둘째, 지향가치는 이데올로기가 지닌 유토피아적 요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규범적 당위성을 띠게 된다. 셋째, 실천방안은 상황규정을 토대로 하고 지향가치를 구현하려는 여러 가지 수단, 처방, 정책 등을 나타낸다.

이상과 같이 이데올로기는 인간 상황에 대한 표상과 앞날에 대한 전망과 이상, 이에 따르는 실천방안들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성적으로 성찰하고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 세 가지 요소에 문제점이 있고 오류가 있다면 그 이데올로기는 허위나 기만이 되어 실패하고 만다.

정치 이념과 종교는 출발의 기원은 다를지 몰라도 그 구조와 기능은 매우 닮았다. 마치 이란성쌍둥이처럼. 종교의 기원이 어떻든 간에 종교의 믿음체계가 지닌 구성요소와 기능은 이데올로기와 동일하다. 그러나 믿음의 마술에서 벗어난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체계는 이데올로기의 구성요소로 체계화시켜 볼 수 있지만, 믿음의 마술에서 벗어난 열린 종교이다. 불교는 교리상 ‘절대적 타자’가 없다. 앞으로의 글 전개는 위에서 살펴본 아나키즘과 불교 교리의 기본 사유 원형을 이데올로기의 세 구성 요소에 맞추어 유사한 내용을 짝으로 병렬시켜 비교해 보고자 한다.

3. 세계관, 우주관의 비교

이데올로기의 첫 번째 구성 요소인 ‘상황규정’의 특성은 각각이 제시하고 있는 세계관, 우주관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론적 세계관과 연기론’ ‘상호부조론과 자비정신’을 짝을 지어 비교해 보면서 공통된 특징을 살피고자 한다.

1) 자연론적 세계관과 연기론

다양한 아나키스트 학파는 그들의 철학의 핵심을 연결하는 일군의 공통된 가설에 의하여 결합되고 있다. 그것은 자연론적 세계관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자연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은 타고나면서부터 자유와 사회적 조화 속에서 살 수 있기 위한 모든 속성을 자기 속에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호로비츠(I.L. Horowitz)는 “아나키즘은 자연이라는 아이디어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실 자연이라는 아이디어에 강박당해 있다고 보일 정도로 ‘자연’ 개념은 모든 아나키즘의 주도적인 이론가들의 저작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개념은 아나키즘의 기본 교의, 즉 권위의 거부, 국가에 대한 혐오, 상호부조, 소박성, 분산화, 정치의 직접 참여 등의 원천이자 토대가 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식, 즉 자연의 유일성, 화합성, 무위성, 자율성이 아나키스트들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와 질서 정연한 사회생활과의 조화 내지 통일을 믿게 한 이유일 것이다. 호혜적인 자연성의 문제는 프랑스의 대표적 아나키스트 프루동(Proudhon)에 의해 ‘정의’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자연론적 세계관과 짝을 이루는 것이 바로 연기론이라고 생각한다. 연기론은 붓다 사상의 핵심으로 불교 교리의 출발이자 근원이며, 깨달음과 자비의 원천이다. 연기론적 세계관과 우주관은 아나키즘의 자연론적 세계관과 맥을 같이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수많은 원인과 조건으로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연기론은 존재의 구성 원리에서부터 해탈로 향하는 수행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연기론은 붓다의 계시나 도리도 아니며, 붓다의 존재 여부와는 관계없이 예로부터 엄연히 존재하는 법칙이다. 붓다 자신은 이 법칙을 찾아 밝힌 것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다.

두 세계관의 공통점은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의존적 상호 발생(de-pendent co-arising)’으로 본다는 점이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 집단과 개인과의 관계, 집단과 집단의 관계, 나와 자연의 관계, 생물체와 무생물체의 관계 등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으며, 이 관계에서 모든 새로운 관계도 형성된다고 본다. 두 세계관은 아나키즘과 불교가 쌍둥이처럼 닮을 수 있게 하는 핵심적 요소이자 출발점이다.
 
2) 상호부조론과 자비정신

상호부조론은 러시아의 성자적 아나키스트이자 《상호부조론》의 저자인 크로포트킨(Kropotkin)이 제시한 이론으로 아나키즘 이론의 핵심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자연론적 세계관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것이라 볼 수 있다. 1914년 출판된 《상호부조론》은 결코 책상머리에서 쓰인 책이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서론에서 이 책의 탄생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다. 젊었을 때부터 동시베리아와 북만주를 여행하면서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동물들이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가를 면밀히 관찰하고, 그리고 탐사 장소를 옮겨 다시 확인하는 긴 과정을 통해 나온 책이다. 그는 어떤 교조의 선전자가 아니라 과학과 진리의 탐구자라는 자세를 굳건히 견지한 사람이다. 이 책은 생물학 지리학의 범위를 넘어 인간 삶의 양식과 비전에 많은 지혜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호부조론》에 나타난 사상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인류의 생존은 바로 상호부조 내지 상호협력에 절대적으로 힘입은 바가 크고, 따라서 갈등보다는 협조가 역사 과정이나 그 전개의 근본적인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주장하는 홉스(Hobbes)의 견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 유행되고 있던 적자생존의 진화론에도 반대하고 있다. 그는 상호부조의 정신이 없다면 약탈을 일삼는 동물이나 노예를 거느리는 개미가 멸망하듯이 인간도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상호부조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 ‘윤리학’이라는 대저에 몰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필자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읽으면서 자비사상의 체취를 흠뻑 느낀다. 즉 상호부조론은 붓다의 연기론 변용이고 화엄사상의 한 지류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의 논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상호부조론과 붓다의 연기법, 자비사상은 완전한 동일 선상에 있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ULlich Beck)은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윤리적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자비 윤리의 정립과 실천을 한국불교의 제일 중요한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붓다가 제시한 지혜의 목적은 모든 존재에게 행복을 주고 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열반의 경지는 모든 존재가 행복을 누리며, 정토 즉 바른 사회에서 사는 것이다. 자비는 바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우리 사회를 바르게 만드는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불교는 자비라는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깨달음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만 의외로 자비 실천에 대한 것은 미흡해 보인다. 불교가 현대사회와 인간 삶의 현장에서 생동감 있고 효율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자비 실천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실천이 필요하다.

4. 지향가치의 비교

이데올로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지향가치’를 비교하는 틀로 ‘자주적 개인과 대자유인’ 그리고 ‘공동체 구현과 평등 사회’로 짝을 이루어 논의해 보고자 한다. 물론 다양한 지향가치가 있지만 정치철학적 틀에서는 이 짝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1) 자주적 개인과 대자유인

개인의 자율과 자주는 아나키즘의 핵심 지향가치이다. 자주적 개인 없는 아나키즘은 없다.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에고적 아나키즘, 고드윈(Godwin)의 인도적 아나키즘, 터커(Tucker)의 자유방임적 아나키즘 등 다양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에고적 아나키즘을 주창한 슈티르너는 대체할 수 없는 개인의 고유한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비도덕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억압하는 대상이 무엇이고, 이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여러 형태의 아나키스트가 등장한다. 개인의 자율과 자주성의 불꽃 같은 강조는 사회주의에 의문을 품게도 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체제가 더 낫다는 확신도 갖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아나키즘의 이상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체제가 무엇인가를 두고 아나키스트의 입장에 분열이 생기기도 한다.
오늘날 개인의 자율과 자주에 대한 훼손은 외부 물리적인 형태를 띠지 않는 무형의 억압 기제도 많아지고 있다. 푸코가 현대인은 ‘파놉티콘’에 종속되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수감자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파놉티콘의 원리에서 엿볼 수 있는 권력 작용이 단순히 감옥이라는 제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모든 영역에 파고들었다고 말한다. 이와 함께 자기도 모르게 종속의 주체가 되어 개인의 자주와 자율이 포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적 저항 운동 등 다양한 아나키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대자유인은 불교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로서 해탈을 지향하는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해탈은 깨달음의 최고 단계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경지를 말한다. 해탈을 정치철학적 용어로 치환시켜 보면 자유와 자주, 그리고 해방적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행복하고 바른 삶을 저해하는 장애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주적 개인과 해탈의 기본 정신은 자유와 해방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와 해방의 길은 스스로가 이루어 나가는 자주인의 길이다. 일반인에게는 해탈이라는 용어는 바람과 구름의 냄새가 나는 초월의 언어로 보기 쉽다. 이를 땅으로 끌어내려 정치적 삶에서 대자유인이 가는 길이 무엇인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2) 공동체 구현과 평등 사회

아나키즘에는 공동체(communities)라는 주제가 깊게 깔려 있다. 아나키즘의 다양한 이념적 분포도는 ‘자주적 개인’과 ‘공동체’ 간의 연결 양태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현대 아나키스트들은 수평적 조직을 바탕으로 하면서 자주와 자율 관리를 실천하는 자치 공동체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생태 공동체 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먼저 공동체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공동체는 지역적인 차원, 사회적 사회 작용의 차원, 공동의 연대 또는 유대의 차원 등 다양한 차원들과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다. 공동체의 개념을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들을 열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만큼 공동체는 ‘열린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공동체의 속성이나 특성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공유된 가치와 신념’ ‘직접적이며 다면적인 관계’ 그리고 ‘호혜성의 실천’을 들 수 있다.

공동체의 핵심적 특징 중에서 제일 기본적인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공유된 가치와 신념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공동체는 공유된 가치와 신념의 범위와 강도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진다. 실례로 현대의 공동체는 19세기의 공동체와는 달리 많은 개방성을 띠고 있으며 다원적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다. 공동체의 두 번째 특징은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직접적이어야 하고, 이 관계들이 다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의 직접성은 공동체의 특성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개인들이 어떤 가치와 신념을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개인들은 고립된 채 살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거래를 하기 어려워, 국가 등과 같은 대행자를 통하거나 공동체 자체의 형식적 규약, 이데올로기, 혹은 추상적 개념에 호소함으로써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들의 관계가 간접적인 경우는 직접적인 경우보다 상대적으로 공동체성이 약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다면적인 관계를 맺은 개인들의 집단일수록 관계가 전문화되고 하나의 영역으로 협소하게 한정된 집단보다 공동체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들의 관계가 얼마나 직접적이고 다면적인가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과 강도가 달라진다.

공동체의 세 번째 특성은 호혜성(reciprocity)이다. 이 호혜성은 공동체의 특성 중 제일 중요한 것이다. 호혜성은 상호부조, 협동과 분담의 조정, 관계 및 교환의 범주를 포괄하는 용어이다. 호혜성의 구조가 변하면 공동체도 변하며, 공동체의 변화는 사회의 변화를 의미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공동체가 시대적 상황과 사회제도에 따라 다양한 특성을 지녀 왔음에도, 인간들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기능, 즉 생존을 위한 욕구충족과 자아를 실현하려는 개인들의 노력은 지속되어 왔다. 이러한 논의는 공동체를 인간들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활동무대, 즉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장(life field)’이라 말할 수 있다. 삶의 장이란 인간의 육체적 생존과 이상 추구를 위해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물리적 사회문화적 범주를 말한다. 삶의 장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호혜성이다.

공동체에 나타난 공통적인 이념은 무엇인가. 공통적 이상이라고 생각되는 요소들을 도출해 보면 크게 셋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완전성과 전인사상이요, 둘째 평등주의사상이요, 셋째 박애정신 또는 형제애이다. 먼저 완전성과 전인사상을 살펴보자. 공동체 이념에 나타난 인간은 부분적이거나 단절적인 방식이 아닌 사회적 역할의 총체성 속에서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되며, 공동체 내의 모든 상호작용은 포괄적인 유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음으로 공동체 사상에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평등주의적 요소이다.

많은 공동체주의자는 산업사회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서 개인과 사회는 분절화되었으며 이전 공동체의 가치들인 박애와 평등 및 공동 정신은 갈등과 경쟁에 의해 대체되어 버렸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곧 고립화와 분리화의 과정으로 이해되며 화폐와 경쟁이 지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 사회가 이루어지면 경제적 지배와 함께 사회계급은 사라질 것이며 또한 전문화된 기능에 얽매이는 것도 없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평등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박애정신 또는 형제애이다. 사회가 우주의 자연법칙과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듯이 인간들도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공동체 사상에 나타나 있다.

상기한 세 가지 공동체의 이념들은 매우 고전적인 내용들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공동체 이념들로 거론하기에는 부적절한 측면도 있을 수 있겠으나 기본 뼈대로서 속성은 가지고 있다고 본다. 1980년대에 자유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등장한 공동체주의자들의 지향가치들은 고전적인 공동체의 기본이념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공선의 우선, 덕 윤리의 함양, 사회적 책임과 의무의 강조, 질서와 자율과의 조화, 공동체의 부의 분배, 사랑의 실천과 참여 등 현대 공동체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덕목들은 고전적 공동체의 이념들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연기론과 자비 정신에서 보면 공동체 정신은 붓다의 평등 사회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 사상은 인간의 ‘사회적 삶의 양식(Way of Social life)’의 성격으로 볼 수 있지만, 불교의 평등 사회는 삼라만상의 존재론에 대한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따라서 불교의 평등관을 정치철학적 명제로 치환시켜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정의’나 ‘불평등’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오늘날 정의나 불평등 문제는 대부분 ‘재화의 공정 분배’에 치중되어 있다. 불교의 정치철학에서 평등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불교가 탐구하고 고뇌해야 할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의 불평등이론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본다. 센은 롤스의 정의론이 재화와 자원의 재분배에만 집중함으로써 물신숭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기본적 잠재능력’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평등사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센의 이론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종래의 평등과 자유의 이분법적 틀을 넘어 윤리적 과제로서 평등의 문제에 접근한 것은 불교 정치철학의 정립과제에 많은 팁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5. 실천방법의 비교

이데올로기의 세 번째 요소인 ‘실천방법’의 비교는 ‘자기 조직화와 중도’ ‘아나키즘 윤리와 공업의 윤리’로 짝을 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아니라 실천의 방법과 방안의 큰 틀을 비교하는 것이다.

1) 자기 조직화와 중도

아나키즘의 특성 중의 하나는 대안과 실천방안의 다양성이다. 이것은 아나키즘이 ‘뒤죽박죽 혼란된 설교’로 비난받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기질상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교의로서 내세우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 갈등도 여기서 출발한다. 바쿠닌(Bakunin)은 자신을 마르크스와 같은 학설 고안자가 아닌 실천적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떤 선험적인 사고나 예정되거나 예측된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혁명을 그려낼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을 추상적인 사회학적 공식이라는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강제로 밀어 넣을 수 없다고 믿었다. 바쿠닌은 마르크스가 노동 대상에게 논리를 가르침으로써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혁명에의 열정과 저항의 신성한 본능을 억제시켰다고 주장한다. 바쿠닌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는 달리 아나키즘은 순수하고 본능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의 실천방안은 자기 조직화 과정을 통해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본다. 자기 조직화 이론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프리고진(Iliya Prigogine)이 ‘비평형 계열역학’에서 제시한 이론이다. 프리고진은 그의 저서 《있음에서 됨으로(From Being to Becoming)》에서 그의 사상에 대한 핵심적인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있음의 세계’는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이며, 뉴턴이 발전시킨 고전역학적인 세계관이다. 이에 반해 ‘됨의 세계’는 진화론적, 유기체적, 비결정론적이며, 이 영역에서는 열역학과 엔트로피 법칙이 적용된다. 엔트로피 법칙은 원래 자연은 질서로부터 무질서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프리고진은 이 엔트로피 법칙을 비평형 통계역학 속에서 새롭게 발전시켜, 질서에서 무질서가 나타나는 것보다 무질서에서 질서가 나타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자연현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기 조직화가 자발적, 자율적, 자연 발생적 질서 형성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자기 조직화는 외부의 명령이나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부 규칙의 생성에 따른 자유롭고 자율적인 구조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개체의 자발성이 전체의 질서를 자연히 만들어낸다는 창발적인 특징이 바로 자기 조직화의 프로세스다. 이러한 자기 조직화의 프로세스에서는 설계와 제어의 기능을 무시한다. 설계와 제어는 기계론적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 조직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 하나는 ‘미래 비전’의 창출이다. 자기 조직화의 프로세스에서 미래는 결코 결정된 어떤 구체적인 모형이 아니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상상력과 창조력을 구사해서 그려보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자기 조직화 이론과 중도를 짝으로 비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논의가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거를 제시하려면 많은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중도가 독선과 독단을 거부하고 권위적인 방법에 저항하면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정(中正)의 길로 가는 것이라면, 이것은 자기 조직화 이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본다. 또한 자기 조직화 이론과 중도 사상은 권위에 대한 저항, 그리고 비판과 자주 정신이 함께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치고 불교의 중도 정신이 오늘의 한국사회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
 
2) 아나키즘 윤리와 공업(共業)의 윤리

아나키즘과 윤리의 관계는 서먹서먹한 사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많은 아나키스트는 역사상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 개인과 집단을 억압하고 기만한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를 지적하고 있다. 기실 도덕과 윤리라는 기제를 통해 억압적 권위체제를 유지한 역사적 사례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아나키스트들이 도덕, 윤리 자체를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쿠닌이 죽기 직전에 윤리학 책을 집필하려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크로포트킨은 말년에 《윤리학의 기원과 발달》을 집필했다. 그는 상호부조의 감정 및 정의의 개념과 함께 특히 사람에 대한 관용성, 나아가서 자기부정-자기희생이라고 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상호부조, 정의, 자기희생, 이 세 가지 요소가 도덕의 근간이다. 크로포트킨은 이 세 가지 요소야말로 ‘인간 행위의 물리학’이라고 하면서 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주의 윤리와 국가주의 교육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경계를 한다. 이에 ‘대응 사회화(counter sociali-zation)’라는 개념에 유의하고 있다. 대응 사회화는 독립적인 사고와 정치적 자유의 핵심이 되는 사회비판을 할 수 있도록 의도된 학습이다. 이것은 적극적이며 활발한 추론을 장려한다. 이것은 성인으로 하여금 독립적으로 자신이 어렸을 때 배운 것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하도록, 사회화 과정에서 학습해 온 것에 대한 재평가를 포함한다. 대응 사회화 과정이 초기 사회화 과정에서 배운 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 사회화 과정에서 획득된 내용들이 대응 사회화 과정과 균형을 이룰 때 효과가 있고 영속성이 있다고 하겠다. 사회화 과정과 대응 사회화 과정의 조화를 ‘반성적 사회화(reflective socialization)’라 할 수 있겠다.

아나키즘 윤리와 불교의 공업 윤리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불교의 업(業) 이론은 붓다 재세 시 외도들의 숙명론을 비판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업 이론을 숙명론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자신의 행위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적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업 이론은 인간 스스로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주체적 자유를 실천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개인 차원의 업뿐만 사회적 차원의 업도 중요시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공업(共業)이다. 공업은 사회윤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개인윤리는 개인의 도덕성, 즉 개인 의지와 결단에 바탕을 둔다. 반면 사회윤리는 사회구조와 제도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진다. 여기서 사회정의의 문제가 등장한다. ‘행복하고 바른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라는 두 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할 것이다. 사회의 비윤리성에 책임을 지는 공업사상은 불교의 사회참여에서 윤리적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아나키즘 윤리와 공업의 윤리는 모든 존재와 현상을 의존적 상호 관계로 보는 ‘상호윤리(Mutual Ethics)’이다. 상호윤리는 타자에 대한 나의 무한한 책임을 강조하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와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을 강조하는 ‘배려 윤리’ 등의 내용을 다 포괄하고 있다고 본다. 상호윤리는 현대사회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적 틀이라고 생각한다.
 

6. 맺음말

아나키즘과 불교를 비교하면서, 불교의 교리로 아나키즘을 해석해 보았다. 비교의 적절성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문과 논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비교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교 과정에서 불교 정치철학의 방향과 체계화에 어떤 시사점을 얻는 데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저서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마음 치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불리는 미국 정치의 타락성과 부도덕성에 절망하면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현상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훨씬 더 근원적인 차원에 있는 ‘자아의 핵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앎의 방식들이 수렴되는 중심부를 말한다. 그는 “우리가 자아와 세계라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마음이라고 불리는 중심부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인간적으로 행동할 용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기백 이상을 뜻한다.

 온갖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절망할 때, 체념하지 않고 자아의 중심을 붙들 수 있어야 한다. 자아의 중심을 붙든다는 것은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집단 숭배에 열광하거나 사적인 안위와 소비주의에 탐닉하지 않고, 내면의 풍경을 그대로 응시해야 한다. 그래서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가슴에 품고 견디는 ‘비통한 자들(the brokenhearted)’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비통한 사람은 창조적으로 긴장을 끌어안고 사는 치열한 사람이다. 파머는 이러한 마음을 키우기 위한 여러 사회화 과정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종교의 역할도 강조하고 있다. 미국 기독교가 이 역할을 방치하고 있다고 통탄하면서. 나는 이 저서를 읽으면서 ‘비통한 자’들은 바로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정치적 자아’는 바로 긴장을 끌어안고 사는 수행자의 비통한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글을 끝내면서 나의 사유 원형 틀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불교, 아나키즘, 복합체계이론이라는 삼각 벨트 안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와 복합체계이론 간에는 매우 친화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꽤 많은 연구가 있다. 아나키즘과 복합체계이론과의 관계도 매우 가까운 이웃사촌으로 보고 있다. 필자는 이에 관한 논문을 쓴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아나키즘과 불교의 관계를 쓴 글이니 나는 계속 삼각지 로터리를 헤매는 것이리라.

필자가 보기에는 이 세 가지 사유 특징들의 제일 핵심적인 공동 요소가 ‘자기 조직화’라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조직화는 ‘요동(fluctuation)’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프리고진이 창안한 비평형 계열역학에서 보면, 불안정한 비평형 상태의 작은 요동이 큰 파동으로 변환되어 거시적인 안정적 구조가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조직화이다. 지금 한국불교와 불교도는 어떤 모습의 요동을 하고 있는가? 글을 끝내면서 불교의 정치철학을 중정주의(中正主義)로 작명하고 싶은 마음이 언뜻 생긴다. ■
 
 *  이 글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하는 열린논단(2월 18일, 불교평론 세미나실)에서 발제한 내용이다.

 

방영준 / 성신여자대학교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서울대 대학원 졸업(윤리 및 사회사상 전공). 성신여대 사범대학장, 자유공동체 연구회 회장 등 역임. 우관상 수상. 주요저서로 《아나키즘-저항과 희망》 《공동체, 생명, 가치》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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