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佛家)에서 법명(法名)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된 일이리라.

불법의 세계를 구현하시려는 부처님의 나라에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불가의 이름을 부여받은 것이니 어찌 영광이 아니랴! 나는 불가에 이름을 올릴 만한 불자도 아니면서 외람되게도 법명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도 종단의 큰 어른 되시는 석주 스님에게서 김법계화(金法界華)란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사는지를 돌아보면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운 데가 많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산 너머에 있는 마곡사엘 자주 가셨다. 마곡사는 충청도 지방의 조계종 사찰을 관장하는 유서 깊은 큰절이었다. 마곡사로 가는 길은 큰 시냇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고 고목들이 울창한 길을 지나야 하는, 언제나 나에게 설렘을 안겨주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그해 추수한 첫 번째 작물 중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 맨 먼저 부처님께 불공을 올리시는 정성을 해마다 거르지 않으셨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면 발소리 낮게 탑을 돌기도 하고 커다란 목어가 매달린 툇마루에서 방안을 훔쳐보기도 했다. 어머니는 큰스님을 뵙는 자리에서는 세 번 절하라고 가르쳐주었는데 절을 받는 큰스님이 부처님처럼 자비롭게 웃던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나는 나이가 들어 여러 가지 풍파를 겪었다. 사업실패라는 아픔에다 갑자기 악화된 허리 디스크는 나를 몹시 우울하게 했다. 마음의 위로가 필요했으나 절에는 자주 가지 못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무렵 나는 신병치료차 아산에 있는 신동춘 교수 댁에 잠시 머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연찮게 만나게 된 전규태 교수께서 지금 자기가 머무는 절에 석주 스님이 와계신다며 찾아뵙기를 권했다. 나는 주저주저하다가 아산의 보문사로 석주 스님을 뵈러 갔다. 보문사는 소나무가 몇 그루 위엄 있게 서 있는 들판의 작은 동산을 돌아드는 곳에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보문사 요사채는 새로 지은 다실처럼 소나무 향기가 가득했다. 그 향기를 맡으며 앉아 있으려니 한참 뒤 석주 큰스님께서 나오셨다. 자그마한 체구에 깡마르신 스님은 연세에 비해 매우 정정하셨다. 저 작은 체구 어디에 이 나라의 시끄러운 불교 교단을 휘어잡은 위엄이 깃들어 있을까. 스님은 우리에게 차를 권하시며 신동춘 교수와 정담을 나누셨다. 나는 곁에서 두 분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제방에 있는 큰스님들의 근황을 말씀하시던 석주 스님께서 갑자기 내가 입고 있던 옷에 관심을 보이셨다.

“이건 비단옷이구먼!”

나는 석주 스님의 뜬금없는 이 말씀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큰스님을 친견한다고 나름 신경을 써서 갖추어 입은 옷인데 아뿔싸, 스님의 눈에 너무 화려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난초가 수 놓인 폭넓은 긴치마에 윗저고리는 연분홍 실크 블라우스였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불가의 검박함에 거슬릴 수도 있는 차림이었다. 나는 부끄럽고 송구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일순, 속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주지 스님이나 신 교수는 웃으셨지만 나는 마시던 차가 목에 걸릴 정도로 당황했다. 그런 나의 태도에 스님은 껄껄 웃으시며 “아니야 아니야, 그 모습이 고와서 물어본 게야! 이름이 무언고?” 하셨다.

내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하자 “무슨 일을 하는고?” 하고 재차 물으셨다. 어설픈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기가 민망하여 대답을 못 하고 쩔쩔매자 전 교수님이 대신하여 나를 소개해주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절에 다녔다니 법명은 가졌는가?” 하고 물으셨다.  

“이 사람이 원래는 불자인데 요즘 예수를 믿는다고 외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고 신동춘 교수가 나를 거들었다. 이럴 때 나는 어찌해야 하는지…….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기도 무안하여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땀만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줘야겠구먼!” 석주 스님의 갑작스러운 말씀에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방안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큰스님께서는 잠시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작은 종이에 ‘김법계화(金法界華)’라고 써 주셨다. ‘온 세상을 빛나게 하는 보살’이 되라는 뜻이라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두 분 교수님은 법명을 받은 나보다 더 좋아하셨다. 불가에 오래 몸을 담은 불자들도 이런 행운을 얻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며 삼배를 올리고 법명을 받으라고 일러주셨다. 내가 절을 올리자 스님은 ‘내년 4월 서울 칠보사에서 수계식이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해의 수계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석주 스님이 적어 주신 그 법명을 지갑의 맨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큰스님의 존성이나 족적을 바람결에 들을 때마다 지갑 속에 간직한 내 법명을 떠올리곤 한다. 온 세상을 환하게 빛나게 하라고 지어준 이름 법계화. 그러나 짐이 무거워 내가 가지 못한 그 길! 어머니가 밟고 가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길에 닿지 못한 내 아쉬움은 요즈음도 가끔 바람결에 휘날린다. ■               gabae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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