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절에서는 청국장과 누룽지를 보내왔다. 어느새 8년이 지났다. 네모 반듯하게 일일이 랩에 싸서 보내준 청국장을 냉동실에 넣다가 잠시 보살님 생각을 한다.

절에 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떡을 찌셨다. 곱게 빻은 콩가루, 쌀가루, 흑임자 가루를 켜켜이 시루에 안친 뒤 김이 새나가지 않도록 떡시루를 쌀가루 반죽한 것으로 띠를 둘러 봉했다. 그 모습은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식구들의 생일이나 명절 때에도 어머니는 어김없이 집에서 떡을 만드셨다. 그렇게 떡과 함께 지성으로 치성을 드려서인지, 사람들은 어머니를 ‘대덕화’라는 법명 대신 ‘떡보살님’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따라 종종 절에 갔다.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선 터라 절은 시늉으로만 하고 곧바로 법당을 나와 마당을 돌아다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어머니도 더는 내게 억지를 부리지 않아서 그때부터 절은 나와 상관없는 곳이라고 여겼다. 어머니가 병상에서 그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는 그랬다.
“내가 가봤던 모든 절의 음식 중에서, 그 절의 공양주 보살님이 해준 밥과 떡과 반찬이 제일 정성이 들었고 맛나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누누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49재를 지낼 곳을 스스로 정하셨다. 원래 어머니가 다니시던 절은 그 절보다 크고 훨씬 유명한 곳이었다. 오랫동안 어머니는 그곳의 신도회 회장이었다. 그런데 왜 그보다 훨씬 작고 유명하지도 않은 절에서 49재를 지내고, 그 옆에 수목장을 지내달라고 하셨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 그 절의 스님을 처음 뵈었다. 장례식장의 모든 소음을 일거에 제압할 만큼 스님의 독경은 낭랑하고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 뜻을 모를지라도 저절로 귀 기울이게 하는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그 뒤부터 나와 여동생은 매주 목요일 그곳에 갔다. 첫 재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작약이 피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작약이 맨드라미로 바뀌고, 맨드라미 옆에 채송화가 필 때쯤 49재가 끝났다. 재를 지낼 때마다 스님의 《금강경》 독송이 하도 곡진해 한창 슬퍼져서 울먹일라치면 스님은 또 다른 톤으로 불경을 읽으셨다. 눈물이 떨어질락 말락 하다가 눈 안으로 다시 쏙 들어가 고이는 듯, 타이밍이 참으로 절묘했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야 10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그곳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로 법당에 있다가 절집으로 내려오면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훌쩍 넘어 있었다. 그 시간쯤이면 공양간에는 어김없이 점심이 차려져 있었고 슬퍼도 배가 고팠다. 앞마당에서 보살님이 손수 기른 채소와 마른 나물로 차린 음식은 구수했다. 처음 먹어보는 다시마부침이나 고사리부침도 맛나고, 시금치와 무나물도 맛나고, 들깨를 갈아 넣고 끓인 머위탕은 고소하고 부드러워 씹지 않고도 목구멍으로 그냥 넘어가는 듯했다. 허겁지겁 반찬을 집어 먹다가 남은 밥에 갖은 나물을 넣고 비벼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나는 살아 있다고 이리 맛나게 먹어도 되는 건가. 씀바귀가 무채와 섞이면서 입에서 단맛이 날 때면 문득문득 죄책감이 일었다. 《금강경》을 들으며 다잡았던 마음이 맛난 음식 앞에서 마구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이제껏 내가 느껴보지 못한 맛이었다. 고추장을 넣고 슬픔과 맛남을 비벼 먹는 것 같은, 묘하게 매운맛이었다.

스님의 독송을 듣다가 곧이어 내가 먹을 절 음식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젓가락으로 호박전을 집다가 스님의 《금강경》 한 구절을 생각할 때도 있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가 떠날 시간이 되면, 보살님은 어머니처럼 주섬주섬 깻잎 장아찌나 마늘장아찌, 열무김치 등등을 담아주셨다. 마치 친정 나들이를 왔다 가는 길인 듯했다. 어머니께서 가끔 절에서 우리에게 먹이려고 싸오시던 봉지 생각이 났다.

어느새 8년이 지났다. 왜 다니시던 큰 절이 아니고 이 절을 택하셨는지, 요즘에야 겨우 어머니의 의중을 짐작하게 되었다. 자신의 사후, 일가친척 없이 남게 될 우리 처지를 염려하신 까닭이었으리라. 그와 더불어 스님의 불경을 듣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여동생과 나는 어머니의 기일에 그곳을 찾는다. 흑임자 인절미를 보자기에 싸들고서. 그런 날, 스님은 영가를 위해 《금강경》 대신 《반야심경》을 독송하신다. 전나무 아래에 계신 어머니 귀에까지 가닿을 만한 목소리로. 그러고 나서 우리는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린 음식을 나눠 먹는다. 언젠가 내가 통화 중에 울먹였을 때, 스님이 내게 했던 말이 있다.

“한참을 울다가 눈물이 다 떨어지면 인공눈물을 넣어가며 울면 된다.”

이제는 동생이 밥을 먹다가 스님의 어조를 흉내 내기도 한다. 맛나게 흑임자 인절미를 드시던 공양주 보살님이 웃음을 터트린다. 보살님의 잇새에 낀 검은 흑임자가 정겨운, 여기는 세상에서 가장 맛난 절밥 집이다. 영가와 함께 이승과 저승을 비벼 먹고 싶은 날 들르면 좋은 친정 같은 절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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