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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나를 돌아보다 / 성전
[65호] 2016년 03월 01일 (화) 성전 남해 염불암 주지

미얀마는 내게 하나의 서정이다. 그래서 미얀마의 모든 것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세상 어느 곳이 이토록 깊은 의미의 속살을 가지고 있겠는가. 나는 그곳의 먼지와 때 묻은 아이들과 슬퍼 보이는 가난과 안개처럼 자리한 탑들 속을 거닐며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만난다.

나도 그렇게 살았다. 먼지가 나는 좌판에 앉아서 뽑기를 하고 흐르는 콧물을 손으로 훔치며 자랐다. 길바닥에 넘어져 무릎이 까지면 손으로 꼭 누르고 피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동무들의 놀이에 합류하고는 했다. 스피커를 매달고 영화 광고를 하는 차가 거리에 등장하면 우리는 소리치며 그 차를 뒤쫓으며 그날 밤 어떻게 해서든 영화관에 가는 것을 꿈꾸고는 했다. 마치 변사처럼 영화의 내용을 소개하는 영화관 총무의 연기는 내가 가장 흉내 내고 싶은 것 가운데 하나였다.

미얀마에는 이런 내 과거의 모든 삶의 모습들이 다 보이는 것만 같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의 모습들이 그곳에는 고스란히 간직된 것만 같다. 지나가는 아이들 가운데 누구든 톡 건드리면 고개를 돌리는 아이의 얼굴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미얀마 거리에서 내가 눈을 감고 가만히 미소를 짓는 것은 내 어린 시절 시간의 강물이 내 심장을 조용히 흐르기 때문이다. 심장이 가만히 그리움으로 뛰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생의 모든 시간이 연둣빛 새순으로 피어난다. 나이가 들었으나 나를 관통하는 시간이 푸르다는 사실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헤호의 직조공장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일하다가 쉬는 시간이었는지 네 명의 여인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들의 표정을 사진에 담았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순했다. 도시민들이 지닌 눈빛 속의 불안과 긴장과 경계가 그들의 눈빛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절망의 눈빛 또한 없었다. 그냥 순하고 착한 눈빛뿐이었다. 그중 가장 어려 보이는 여인의 눈빛은 닮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눈빛과 소유의 상관관계를 찾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가난해도 불안하지 않고 가난해도 미워하지 않는 저 눈빛의 부드러움은 몇 생의 수행을 통해야만 비로소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평화는 소유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그 여인의 눈빛은 일깨워 주었다.

나는 마음을 잃어버려 모든 것을 잃고 살아왔던 셈이다. 무엇을 찾고 무엇을 소유하려 했던 모든 것이 역설적이게도 잃음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 깨달아 가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소유와 얻음은 이슬과 같고 그림자와도 같은 것이었을 뿐이다. 내가 내 것이라고 추구하는 모든 것이 개념이었다는 사실의 허망함을 이제 알아가고 있다.

언제나 겉만을 말하고 겉만을 추구했던 삶 속에서 나는 안을 잃고 살아왔다. 사랑을 말하나 사랑을 모르고 자비를 말하나 자비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이해이고 자비의 본질은 연민이다. 이해와 연민 없이 사랑과 자비를 말해온 날들이 문득 부끄럽다. 승복을 입었으나 간절한 깨달음의 서원이 없었고 뼈를 깎는 듯한 정진 또한 없었다.

바간의 쉐산도 파고다에서 노을을 바라보다 나는 문득 울고 싶었다. 내 삶은 허망함의 연속이었다. 삶의 고운 빛 하나 가지지 못한 내 삶은 얼마나 허술한 것이었던가. 생의 어느 한때를 나는 저 노을처럼 산 적이 있었던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피를 토하며 살아온 시간이 있었던가. 없었다.

노력하지 않은 시간들은 결코 아름다운 색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노을 앞에서는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났다. 삶의 모든 시간과 자신에게 미안했다. 삶에 고운 빛 하나 물들이지 못한 시간을 향한 죄의식이 노을빛을 따라 강하게 명치를 강타해 왔다. 이 아픈 후회가 다시 일어서는 동력이 되기를 나는 기도했다.

노을이 지고 난 그 자리에도 다시 해가 찾아온다. 여행의 마지막 날 오후 로카찬타 파고다에서 나는 미얀마 여행 중 가장 평화로운 한 때를 맞았다. 대불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미얀마 스님과 여인과 아이들. 기도하는 그 모습이 마치 부드러운 햇살을 닮은 것만 같았다. 신성을 향한 자의 마음이 그대로 몸 밖으로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도를 통해서 성인과 범부는 하나가 되고 속됨은 신성을 향해 열리는 연꽃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조용히 합장하고 앉아 대불을 우러러보았다. 눈의 거리는 가까웠으나 마음의 거리는 아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부처가 되기보다는 부처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꿈을 이루기보다는 꿈을 꾸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왠지 내게는 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라져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모든 생명을 위해 기도하며 아침을 열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겠는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가슴에서 샘솟는 기도를 올릴 수만 있다면 내 남은 삶에도 아름다운 빛 하나가 깃들 것만 같다.

삶은 끊임없는 노래다. 모든 순간의 변주가 모여 삶이라는 하나의 노래를 만든다. 나는 아직 저 가슴 깊은 곳의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미얀마는 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노래를 들려준다. 미얀마에서 돌아와 그 노래를 가만히 흥얼거려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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