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경전의 번역과 유통

1. 서론

2000년대 이후 불교 관련 지식의 폭발적인 증가는 그동안 한국불교에서 한역경전이 차지했던 절대적인 위상의 약화와 더불어 새로운 불교 지식의 창조와 확장, 종교 경험의 변화 등 불교계 지형에 중요한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특히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티베트어 등 새로운 원전 언어들을 번역한 번역서의 유통은 주목할 만한데, “사유의 과제가 번역의 과제”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처럼 새로운 번역본의 유통은 한국불교의 지식 지평을 확장하는 동시에 새로운 불교를 창조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한편, 한문경전의 지위 약화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구태의연한 우리말 번역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말 대장경은 그 완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바로 재번역의 필요성이 제기될 정도로 완성도에서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그 때문에 오래전에 완역되었음에도 우리말 대장경의 학문적, 신행적, 대중적 효용성은 최근 완간된 니까야보다 못하다. 유통의 실패는 다시 역경사업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면서 악순환이 심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래의 이야기들에 대한 대중적 취향이 크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역경사업은 과거지향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경은 조계종단 출범 이래 종단의 3대 과제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지금까지 재번역을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조계종단 외곽에서 몇몇 번역가의 헌신과 후원으로 4부 니까야가 완역되어 대중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작은 지방 사찰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티벳대장경연구소의 티베트대장경 역경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처럼 한문경전의 우리말 번역은 성서의 우리말 번역에 위기감을 느낀 용성 스님을 비롯한 몇몇 스님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용성 스님의 한글 번역은 한국 근대불교의 출발점이며 그 노력은 해방 후까지 이어진 우리말 역경사업의 원동력이다. 용성 스님의 우리말 번역은 불교가 처했던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과 불교발전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행해진 것이다. 이 문제의식이야말로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헤쳐 가는 추진력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역경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의 유무가 역경사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관건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장경 역경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 지정기부 등의 형태로 후원을 받는 방법 등을 통해 재정적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어 보인다.

현재 우리말 대장경은 도서관 서가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대중적인 확산은커녕 학문적 기초자료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말 번역본에 기초해서 인문학, 문학, 예술 등 영역에서 2차 생산물이 산출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전산화 사업 역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과거에 한문경전이 수많은 주석서와 2차 생산물들을 낳았던 것과 비교해보아도 아쉬운 성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번역 과정에서 얻어진 지식과 체제가 제대로 축적되어 다음 발전을 위한 자료로 활용되지 못하는 점이다. 이는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것처럼 기존의 역경사업이 시간에 쫓겨 결과물 산출에만 급급했던 결과이다.

주지하는 바처럼 빨리 경전이나 티베트 경전 등의 번역은 최근 한국불교계에 형성되고 있는 다불교 상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빨리 경전 번역은 초기불교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를 불러일으켰으며, 의례와 기도 중심에서 독서와 경험 나누기로 변화하는 최근의 신행 양상과도 관계가 깊다.

불교경전 번역이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중요성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여러 관계자들이 지적하듯 역경사업에 필요한 안정적인 재원이 확보되어야 하며 국고 지원 없이도 지속적으로 역경사업을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지원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더 시급한 문제는 불교계에 산적한 현안들 중에서, 또는 그 해결의 방법으로서 한역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의 필요성과 의미, 그 파급 효과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전망의 부재이다. 본지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조직과 기구 등의 문제에 대해 발표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번역 담론의 문제를 중심으로 우리말 역경사업의 현황을 살펴보겠다.

2. 번역 담론의 필요성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인문학 전반에 일어난 새로운 흐름은 번역이 원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을 위하여 낯선 언어로 된 작품의 의미를 재현하거나 포착하는 작업으로 보는 기존의 견해를 크게 바꾸었다. 언어학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화용론 등 담론 분석과 역사학에서 문화사·지성사 연구, 그리고 문학과 철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번역이 본질적으로 언어 해석의 문제와 동시에 문화적 이해의 문제를 수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 불교학계는 이러한 학계의 흐름을 외면한 채 19세기의 번역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지금까지 불교문헌 번역의 가장 주된 관심은 원천언어의 금구성언을 대상언어로 완벽하게 옮겨놓느냐의 여부에 있었다. 잘된 번역이란 원문의 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가독성이 높은 것이며 거기에 주석을 붙여서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지식을 전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한문에 능통하기만 하면 된다는 안이한 판단에서 번역 행위와 결과물에만 관심을 두었지만, 대중적으로는 우리말 대장경 가운데 단 몇 편만 읽힐 뿐, 불교학 기초자료로서 가치뿐 아니라 불교문화와 신행을 주도할 수 있는 파급력도 충분하지 못하다.

번역 이론은 기껏해야 당송 시대 역경의 원칙과 방법을 참조하는 정도였으며 ‘당대적 번역학적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과거에 “불경을 역해하던 이들은 역해를 하는 순간 주의할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기한 바 있고, 조선시대 언해(諺解)를 주도했던 그룹들도 왜 우리가 언해를 하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단편적으로, 혹은 장문의 글로 남겨놓았으며, 근대 이후 서양과 만났던 이들은 번역(飜譯)/번안(飜案)/역해(譯解)/역술(譯述) 등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규정짓기도” 했던 것과 비교해 보아도 오늘날 역경 이론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일천인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역경을 단지 한문에서 우리말로 언어를 바꾸는 일로 간주하는 인식의 피상성에 의해 가중되고 있다. 한문경전의 번역을 일종의 문화적 행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문이든 산스끄리뜨어든 빨리어든 영어든 관계없이 오늘날 불교경전을 번역하는 일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들을 연결하고 소통시키는 일이다. 번역된 경전들은 해당 언어의 세계에서 새롭게 의미를 산출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요소로 기능한다. 한역경전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한역경전의 주석서 저술, 그것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신행은 인도문화와 중국문화 쌍방 간의 교류와 소통의 결과였다.

김용옥이 지적했듯이 한문 고전의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사어를 활어로, 문어를 구어로, 고대를 현대로, 한문문화권을 한글문화권으로 옮기는 대작업”이다. 최근 들어 고전 번역에서도 현대적 번역 이론의 성과를 수용하여 ‘번역 담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한문경전을 비롯한 모든 불교경전의 번역에도 번역 이론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아직까지 그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전성기가 지적하듯이 “번역학 일반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들은 대부분 인문학 번역론에서 충분히 활용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에, 인문학 번역론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을 해당 분야의 일정한 발전 후로 미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학 번역론의 발전을 위한 디딤돌로 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1) 종교언어와 번역

번역에 대해 제기되는 근원적인 문제는 언어 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모국어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괴테의 말처럼, 번역은 단지 원천언어(source language)로 기술된 텍스트를 대상언어(target language)로 전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다시 말해 “하나의 언어로 기술된 것을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인간의 사상과 생활, 감정 따위를 언어로 기술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언어와 인간의 삶과 행위의 해석 가능성,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더구나 인간의 이해 범위를 초월하는 근원적인 경험을 재현/전달한다고 주장하는 종교 문헌의 경우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될 수 없기 때문에 번역은 더욱 중요하고 어렵다. 낯선 언어로 번역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의미의 이반이 종교가 표명하는 진리에 대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종교 문헌의 번역에서 가장 큰 미덕은 원전에 대한 충실성이며, 직역이든 의역이든 원전의 최종적 권위는 도전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불교에서 언어는 자내증의 경험에 대한 불충분한 재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성서중심주의와 달리 언어적 기록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천언어를 대상언어로 충실하게 등치시키는 것으로 종교 저술이 표방하는 가치와 의미를 다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불교의 대답은 긍정적이지 않다. 경전은 번역본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원음과 일정한 거리를 갖는 일종의 재현, 다시 말해 일종의 번역이다.

언어와 진리를 등치시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불교의 입장은 역설적으로 번역가에게 상대적인 자유를 허용해준다. 경전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면 어떤 언어로 쓰여 있든 달을 가리키는 것은 모두 달의 재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원천언어에 대한 충실성의 요구는 그것이 재현하는 원본, 즉 붓다의 깨달음에 대한 충실성을 앞설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번역본은 원본에 대한 이중적 재현이 아니라 원전과 동일한 위상을 가진다. 과거 역경장에서 역경의 충실성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이 경전의 의미를 증명하는 ‘증의’에 달려 있었다는 점은 당시 번역가들이 고심한 것이 정확한 언어적 등가물이 아니라 원본의 정확한 전달/재현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벤야민은 ‘의역이냐, 직역이냐’는 기존의 문제를 다른 차원에서 화해시켰다. 그에게 언어의 다양성은 인간의 상호이해에 장애가 되는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 장점이며, 상호보완적 형성 과정을 통해서 서로 보충을 통해서 역동적으로 변화 발전하는 것이었다. 벤야민의 번역론은 그가 직접 보들레르 시의 독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얻은 통찰이므로 철학적 논의지만 번역의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2) 문화적 번역의 필요성

번역할 때 종종 부딪치는 문제들이 있다. 첫째, 아무리 쉽고 직설적인 어휘라고 할지라도 그 개념이 사용되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문맥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 살려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언어는 하나의 체계이기 때문에 대상언어로 번역할 때 원천언어와 대상언어를 일대일로 등치시키지 말고 그 단어가 속해 있는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올바른 번역을 위해 하나의 단어가 사용되는 문화 전체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하다.

둘째, 한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단어 중에는 다른 문화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종종 있다. 그것들은 “타 문화권의 언어기호를 통해서 정확히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어떤 번역 방법으로도 정확히 번역할 수 없다.” 이때 ‘대상언어 속에서 그것에 가장 유사한 단어로 의역하느냐, 또는 원천언어를 그대로 직역하느냐’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벤야민은 번역가의 언어를 원전의 언어를 향해 확장 변형시키는 데에 번역의 생산적 기능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번역을 통해 모국어를 확대 발전시킬 것을 요구했다.

벤야민의 조언대로 최근 원천언어를 그대로 가져와 대상언어의 어휘를 확장시키는 방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한역경전에서 ‘프라즈나(prajñā)’는 ‘지혜’로 번역하지 않고 그것을 음역한 ‘반야’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번역을 통해 중국어를 확장시켰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동안 ‘Way’로 번역되었던 ‘도(道)’의 영어 번역어가 최근 중국어 발음대로 ‘Dao’ 또는 ‘Tao’로 바뀌고 있으며, ‘breath’ ‘air’ ‘gas’ 또는 ‘vital energy’ ‘life force’ 등 여러 가지 번역어가 시도되었던 ‘기(氣)’도 점차 중국어 발음을 음사한 ‘qi’로 정착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원천언어에 내포된 다양한 의미를 갖는 단어를 발견할 수 없을 때 원천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점에 대한 동의가 학계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상에서 보듯 번역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이다. 의미 된 것이 갖는 기능이 문화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훌륭한 번역이란 필연적으로 문화적 해석의 행위를 수반”한다. 따라서 번역은 문화의 이식과 창조를 포함하는 문화적 번역 행위이다. 그러므로 번역가는 언어 배후에 깔려 있는 문화적 상징성이나 뉘앙스의 차이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함축적이고 구체적인 특징을 갖는 한문 번역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3) 문화적 언어적 친숙성의 문제

일반적으로 번역은 시간, 공간, 문화,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데 한문경전의 번역은 동아시아 내부의 번역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황과 다른 점이 많다. 중국과 한국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언어적으로 한자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오랫동안 중심국과 주변국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문화적·언어적·공간적 유사성 때문에 한문경전의 번역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간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실상 “상당량의 한자와 한자 어휘 내지는 한 문장까지도 모국어의 그것처럼 인식”한 조상들과 달리, 삶의 모든 영역이 서구화된 오늘날 현대 한국인에게 한문은 다른 외국어와 마찬가지로 언어적으로 낯선 것이다. 한역경전은 오랫동안 번역되지 않은 채 유통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한국 사상의 고전으로서 흡수되었지만, 전통과의 단절을 극심하게 경험한 한국인에게 그것은 문화적으로 서양 고전보다 더 낯선 것이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단절을 극복하는 것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역경전을 대하는 승려나 불자들의 태도는 과거 한자어를 상용했던 시절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거의 없다. 심재관이 비판한 것처럼 “대개의 불교 연구자들이나 승려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언어로 대중을 설득하려고” 하며 “학생들은 선생들 자신도 소화하지 못한 말을 들을 때,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도 모른 채 스스로 도취되었을 때, 자신이 가고 있는 학문의 좌표에 대해 회의하게”될 뿐만 아니라 종교적 경험 자체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말 번역의 첫 과제는 일반 독자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들에게 익숙한 한자어로 번역된 불교 용어를 반성 없이 계속 고집하는 한국의 불교 연구자들이나 승려들에게 설득력 있는 설명의 언어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언어와 문화가 시대에 따라 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두 현토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편함과 한국어답지 않음을 가중시키고 있다. 한자 한 글자 한 글자를 대응시키는 축자적 번역 방식이 계속 사용되는 것도, 한자어가 우리말이 아닌 외국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탓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고유명사를 번역할 때 한국어 한자음을 적용할 것인지, 혹은 중국 발음을 한국어로 표기할 것인지도 새롭게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한문 번역에 내재한 문제들 중 상당 부분이 양국의 언어가 동일한 한자문화권에 속한다는 공통성으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다.

불교 용어를 그대로 한국식 발음표기로 하는 것 역시 편리함은 있겠지만 독자가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사무애(事事無碍)’와 같은 구절을 아무 해석이 없이 ‘사사무애’라는 한국식 한자음으로 번역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번역은 이 방면의 기본 지식이 없는 대부분의 독자에게 해독 불가능한 암호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한문경전 번역은 다른 번역에 비해 문화적 유사성과 언어적 친숙성이 높으며 공용 용어도 많을 뿐 아니라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까지 구별 가능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역경전 번역의 어려움은 바로 이 친숙성 때문에 배가되고 있다. 친숙한 듯한 외양을 벗기면 오히려 텅 비고 낯선 것이 남는다. 그러므로 우선 한자가 현대 한국인에게 영어나 불어와 마찬가지로 외국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며, 현대 한국인 독자에게 과거 동아시아 문화가 현대 서양문화보다 더 생소하다는 가정하에서 번역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달리 한자어를 현대어로 풀어쓰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원로 한문학자 성백효는 예전에 한문을 공부하던 식으로 ‘족히’ ‘가히’ ‘써’ ‘시러곰’ 따위의 낱글자까지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풀어주는 언해식의 축자번역을 반대하면서도 ‘가독성’을 위해 어려운 한자 용어를 쉬운 말로 풀어쓰는 것에 대해 독자를 무식하게 만드는 일이라며 반대한다.

그는 초기 한문 고전 번역이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 강조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규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은 우리말을 유려하게 구사할 수 있으므로 한자어라고 무조건 거부하기보다 조상들이 쓰던 말들을 실제 번역에 사용하면 또 다른 문화유산으로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의 주장은 우리말 대장경의 가독성 문제로 고민하는 한국불교계가 쉬운 번역과 대중성을 강조하는 것과 다르지만,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친숙한 한자 용어나 특수한 불교 한자어를 현대 한국어로 풀어쓸 경우 그 의미가 왜곡되거나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벤야민이 지적한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소통시키고 현재 우리말의 인식 지평 확장을 위해서도 필요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찬술한 한문 불교문헌은 더 복잡한 문제를 갖고 있다. 현재 한문이 공용어는 아니지만 한국문화와 역사에서 가지는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한국에서 찬술된 불교문헌이 중국의 한문 문헌과 다른 특수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한국 한문문헌을 접할 때 한자어를 우리말 어순과 말투에 따라 번역하는 것을 특히 유념해야 하는데, 그 역시 한국 한문문헌을 중국의 한문문헌이나 외국 문헌과 다른 특수한 대상으로 보아야 할 이유이다.

언어적 문제 외에도 한국 한문문헌은 동일한 문화권에서 생산된 저술이기 때문에 외국문헌과는 다른 역사성 및 특수성을 갖고 있다. 한국 한문문헌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태도와 시각은 번역의 실천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동일한 공간 내에서 일어난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사실이 지닌 모종의 친화감을 빙자하여 과거의 발굴이 곧 나의 현존의 전부를 규정한다는 환상, 즉 전통문화의 발굴이 우리 민족 전체의 당위라는 환상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김용옥의 비판은 한국불교에도 적용될 수 있다.

김용옥은 “특권을 배제한 정보의 대중화·민중화” “동양학도의 시대착오적 가치관 경계” “간주관적 나의 관점에서 오늘의 언어를 과감하게 써야 할 것” 등을 주장한 반면, 고전 번역의 대표적인 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는 지금까지도 충실한 직역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의 고전 번역은 주관적 해석보다 원전에 대한 정밀한 이해를 강조하며 독자층 또한 연구자 집단에 한정한다. 비록 대중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 결과물이 학계의 신뢰를 받으면서 학문적 토대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경전 역경에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고전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독자를 한정하고 있으나 민족문화유산을 충실하게 소개한다는 점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을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쉬운 번역이 반드시 원전의 뜻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전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할 경우 쉬운 우리말 번역은 원전의 뜻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대중적으로 유통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한글대장경이 그 예라고 생각된다. 그 원인은 번역가들 스스로 문화적, 시간적 차이를 고려할 정도로 번역에 대한 훈련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문헌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한문을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번역에 가담했던 데 있다.

4) 번역가 양성의 문제

번역은 장기적 사업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 특히 한문경전의 번역은 숙련된 번역가를 양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의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번역가들이 개인적인 희생을 감내하며 역경에 힘쓰고 있지만, 시간과 노력에 비해 결과가 뚜렷하지 않고 그에 따른 보상도 낮은 편이어서 한문 번역가가 되려는 사람이 날로 줄고 있다.

개편된 승가교육 체제에서 한역경전의 비중이 낮아지고 불교적 지식의 원천으로서 한역경전의 중요성이 축소됨에 따라 승려들의 한문 학습을 위한 노력도 상당히 감퇴했다. 이 역시 실력 있는 번역가 양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대안으로 조계종 교육원은 한문경전 전문대학원 제도를 마련하고 있으나 기존의 강학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교육 방법이 소기의 효과를 거둘지는 더 지켜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편으로 최근 역경 전문가 양성을 목표로 동국대학교에 불교융합학과가 설치되었지만, 다른 한편 오래전에 비슷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던 승가대학교 역경학과의 폐과가 결정되었다. 짐작해보면 역경 전문가 양성과 활용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정책적 결정만 있는 것이 같다. 역경사 양성은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인 만큼, 장기적인 계획하에 종단 전체의 역량을 모아서 단일하면서도 지속적인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번역 과정에서 생성된 새로운 지식과 번역 기법, 그리고 번역에 관한 이론적 탐구가 잘 축적되어 다음 세대로 전수될 때 번역사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양성된 역경사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체제도 시급히 구축되어야 한다. 한문 습득이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졸업 후에도 동일 기관에서 배출된 역경 인재들이 꾸준히 실력을 양성하고 활동할 수 있는 안정적인 연구 터전과 지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번역가의 자질이 번역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최근 번역가의 역할이 새로운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번역은 단순히 기호의 전환이 아니고 변화된 인식체계 내의 재구성 또는 새로운 구성이다. 경전의 뜻을 유려하고 쉬운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둔 혜거 스님의 ‘번안역’도 문화적 번역의 탁월한 사례로 간주할 수 있다.

한문의 경우, 번역가들에게 언어학적 지식보다 ‘문리(文理)’를 통하는 것이 강조되지만, 실제 번역 과정에서 언어학적 지식이 매우 유용하다. 번역가는 대상언어의 어휘, 발음, 의미, 문법, 작문뿐 아니라 습득 과정에서 그 언어가 담긴 문헌의 이해, 역사문화에 대한 포괄적이고 비교문화적 지식 등을 배워야 한다.

한역 불교경전의 번역은 중국 저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지만, 경전 주석서와 기타 문헌은 고대 중국인들이 자기 언어로써 구사한 문헌들이기 때문에 유가경전 등이 자유롭게 인용되어 있다. 또한 고전 중국어는 서면어지만 오랜 기간 상당한 변화를 거쳤으며 다양한 문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문과 한문 고전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한문 문법은 주어와 술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고 고의적으로 문법을 파괴하는 경우도 많다. 전통 강원에서 행해진 축자적 해석 방식은 오역의 위험을 높일 뿐 아니라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을 그 내용의 어려움으로 전가하는데, 그런 태도가 한문경전의 번역본에 대한 신뢰도를 낮추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불교경전은 다른 중국 문헌에 비해 언어적 문제가 복잡하지 않지만, 내용 이해를 위해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강독은 한문 실력 향상과 오역의 확률을 줄이기 위해 효과적인 학습방법이다. 실제 역경 과정을 살펴보면, 과거 중국 역경 시스템을 재현한다고 하지만 하나의 텍스트를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번역가에게 맡겨 번역하게 한 후, 그 초안을 다른 번역가가 교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은 여러 명의 번역가가 하나의 텍스트를 함께 강독하는 것이다. 필자가 속한 서울대학교 미학과 동양미학 분과에서도 전공교수, 박사급 연구원, 그리고 대학원 석박사 과정생들이 모여 20여 년 동안 강독을 계속하고 있다. 그 경험에 비추어볼 때 강독은 문장 이해뿐 아니라 여러 가지 전거와 고사성어, 전문용어의 판독에서도 오류의 가능성을 줄인다. 그 후에 책임자 한 사람이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정리하면 공역이면서도 전체적 일관성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문 번역에는 각종 공구서(工具書)를 찾고 자료를 뒤지는 성실성이 필요하다. 익숙한 단어라도 다시 한 번 용례를 확인하면 경우에 따라 전혀 다른 용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단어를 축약적으로 사용하는 중국어의 특수성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의 뜻에 의존하여 번역할 경우 오류가 될 확률이 높다. 이 점을 감안하여 다양한 용례를 참고해야 한다.

훌륭한 번역을 위해 외국어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국어 능력이다. 정확하고 간결하며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할 뿐 아니라 새로운 조어를 만드는 능력, 두 언어의 차이와 공통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고문의 문체와 우리말 문체가 서로 부합하지 않지만 서로 유사한 율격을 갖는다. 〈이산혜연 선사 발원문〉에 보이는 4·4조 리듬은 병려체나 부체에 적합하며, 나옹 화상의 게송으로 알려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는 3·4조 시조체로 되어 있어 한문 원문보다 번역문이 더 뛰어나다.

번역은 글 속에 숨겨진 이치를 파악하고 수미일관 적절한 말로 독자에게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에, 불교한문에 대한 어학적 지식만으로는 부족하고 언어 외의 맥락과 문장의 패턴에 대한 지식이 더해져야 한다. 불교경전의 문학적인 특징과 함께 사변적인 특징 때문에 번역가는 문학적 능력과 함께 철학적 개념의 활용에도 능통해야 한다. 많은 한문학자가 권하듯이 번역과 공부를 병행해야 하며 정확한 번역을 위해 상세한 주석이 필요하다.

고전 번역의 경우 원전에 대한 깊은 탐구와 사색의 과정을 거쳐야만 그 내용을 충분히 살려낼 수 있다. 따라서 오랫동안 경전 연구에 천착했던 중진 연구자의 참여가 절실히 요청된다. 이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현재 등재지 논문만 학문적 업적으로 간주하는 학문적 여건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번역학은 학제간 연구이므로 실제 번역 과정에서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언어 능력보다 문화 이해 능력이 더 중시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UBS) 훈련 워크숍을 통해 번역 관련 정보를 교환하고 다양한 이슈들을 토론하고 있다. 한국불교도 이 제도를 벤치마킹하여 신진 번역가 양성을 위한 워크숍을 개최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번역가 양성을 위한 전문기관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교한문뿐 아니라 고전 한문 전반에 능통한 번역가를 발굴하는 한편, 잘못된 번역문화를 비판하고 바로잡기 위해 번역비평을 활성화하여 우수한 번역서를 발굴하고 포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3. 결론

벤야민은 원작 속에 번역 가능성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번역은 원작이 번역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나타내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작업이다. 외국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그 원작에 명성과 영광을 안겨준다.

상당한 시간과 재정적 어려움을 감내하고도 4부 니까야와 티베트대장경 번역에 뛰어드는 번역가들을 보면 역경에 대한 사명감과 원전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믿음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믿음과 열정에 비추어보면 한역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에 대한 노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다. 현재 상황에 비추어보면, 한문경전의 우리말 번역사업이 부진한 원인은 한문경전의 가치에 대한 회의에서 찾을 수 있다. 니까야와 티베트대장경에 대한 인식 변화는 한문경전의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문경전의 우리말 번역을 위해 한문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가치의 발견이 선행되어야 한다. 벤야민의 지적처럼 번역을 통한 원전의 새로운 이해와 이면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야 한다. 정확한 번역은 한문경전의 가치와 의미를 격상시키고 역경에 대한 관심도 고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그렇거니와 이상적으로도 대장경 전체 문헌을 대상으로 번역을 시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대장경의 목록 속에 있는 문헌 중에는 현재적인 가치가 소멸된 것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번역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경전을 선별하여 우선 번역 순서를 정하고 그 작업이 완료된 후에 2차적 중요성이 있는 문헌들을 차례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단지 구색 맞추기를 위한 번역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한 시대가 얼마만큼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면 그 시대가 번역을 어떻게 다루며 과거 시대와 과거의 서적들을 어떤 방식으로 흡수하려 하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돌이켜본다면, 한 언어와 한 문화의 자기 이해에 번역이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세계화 시대에 불교 역시 다른 종교 전통들, 다른 불교 전통들과 교섭하고 있다. 번역을 통하여 낯선 것과 관계를 맺어간다. 그 결과 모국어는 자신과의 차이를 만들어가고, 원문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던 지향점을 발견할 수 있다. 경전을 읽는 것도 그렇다. 번역을 통해 타자와 만나고 전통적인 불교 속에 차이가 만들어진다. 전통 불교는 현대 한국어 또는 다른 외국어로 번역됨으로써 스스로 알지 못했던 지향점을 자각할 수 있다.

한문경전의 우리말 번역은 과거와 소통하는 작업이며 전통을 재창출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익숙한 것과의 대화가 아니라 익숙한 것들을 끊임없이 낯설게 만들면서 자신 밖에 서려는 노력이며, 그러한 노력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보고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글쓰기가 필요하다. 번역이란 새로운 글쓰기이며 새로운 해석의 과정이다. 그것은 불교에 대한 수용 방식을 변화시키고 그 미래를 바꿀 것이다. ■

 

명법 / 능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동 대학원 미학과 졸업(박사).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 운문승가대학 졸업.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등과 〈서양 현대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한국불교의 세계화 담론에 대한 반성과 제언〉 외 논문 다수가 있다. 원효학술상 수상.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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