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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의 대장경 간행과 번역 과정 / 윤기엽
특집 | 불교경전의 번역과 유통
[65호] 2016년 03월 01일 (화) 윤기엽 ykync@hanmail.net

일본은 서기 770년경 백만탑다라니(百萬塔陀羅尼)를 제작하여 최고의 목판 인쇄물을 보유하였지만, 방대한 양의 대장경(大藏經, 또는 一切經)은 오랫동안 간행하지 못했다. 부분적인 경전은 간행했지만, 삼장(三藏)을 갖춘 대장경을 갖게 된 것은 17세기 에도(江戶) 시대에 접어들어서였다. 이후 일본은 근대 시기에 들어와 여러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편찬, 간행하면서, 일본 국내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불교계 전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 파장이 정상적이었든 때로는 굴절되었든,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던져진 파급효과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시점에서 우리가 일본의 대장경을 주목할 필요성과 의의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일본의 대장경은 에도 시대의 천해판(天海版)과 황벽판(黃檗版)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17세기에 제작된 대장경으로 중국의 대장경을 모방한 전근대기의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이었다. 근대 시기에 들어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신활자판에 의한 축쇄대장경(縮刷大藏經), 만자장경(卍字藏經), 만속장경(卍續藏經) 등이 간행되며 초기 근대 불교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뒤를 이어서 나온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 일본대장경(日本大藏經) 등은 일본에서 찬술된 불교문헌을 집성한 대장경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이 10년(1924~1934)에 걸쳐서 편찬, 간행되었다.

근대 불교학의 발전을 선도한 이상의 한역대장경과 함께 일본어(日本語)로 번역된 대장경도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출판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과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을 들 수 있다. 국역일체경은 주요 한역(漢譯) 불전을 일본어로 번역한 대장경으로 대동출판사가 1988년까지 반세기에 걸쳐서 간행하였다. 그리고 남전대장경은 빨리어(巴利語) 원전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으로 대장출판사가 1941년까지 간행하여 소승 상좌부(上座部) 계열의 남방불교를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일본의 대장경 역사는 17세기에 중국의 것을 모방하는 수준에서 출발하여 근대기에 가장 완비된 형태의 한역대장경을 편찬, 간행하였고 또 그것을 국역(國譯)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장대한 파노라마(panorama)였다.

1. 에도 시대의 대장경 간행

일본에서 대장경이 간행되기 시작한 것은 백제에서 불교를 수용한 후 천여 년이 지난 후였다. 1637년(寬永 14) 천태종 승려 덴카이(天海, 1536~1643)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의 명(命)을 받고 도쿄의 관영사(寬永寺)에서 대장경을 인출(印出)했다. 일본에서는 서기 770년경 백만탑다라니(百萬塔陀羅尼)가 목판으로 인쇄되고 이후 부분적으로 경전이 간행되었지만, 대장경(또는 一切經)의 간행은 아니었다. 에도 시대 이에야스의 최측근으로도 활동한 덴카이는 관영사에서 중국 남송(南宋)의 사계판(思溪版)을 저본으로 하여 목활자(木活字)로 대장경을 간행했다. 이 사업은 덴카이가 입적한 후에도 계속되어 1651년(慶安 4)에 1,453부 6,323권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대장경 천해판(天海版 혹은 寬永寺版)이다.

이후 일본 황벽종(黃檗宗)의 데쓰겐 도코(鐵眼道光, 1630~1682) 선사가 1669년(寬文 9) 교토의 황벽사(黃蘗寺)에서 대장경 간행을 시작하여 1681년(天和 1)에 1,618부 7,334권으로 완성하였다. 중국 명(明)의 만력판(萬曆版)을 저본으로 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것을 철안판(鐵眼版 혹은 黃檗版) 대장경이라고 한다. 이 대장경은 간행 부수가 많아 일본 전역에 널리 유포되어 대장경의 열람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내용상의 오류가 많아 학술적 가치는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은 대장경 제작에서 17세기 에도 시대(1603~1867)에 들어와 비로소 그 역량을 갖출 정도로 주변 국가에 비해 후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14세기 말(고려 말)부터 17세기(조선 효종 대)까지 우리에게 80여 차례에 걸쳐서 대장경을 구걸할 정도로 집요하게 요구했던 역사적 사실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다. 하지만 막부(幕府) 정권이 무너지고 19세기 말 일본의 근대화를 불러온 메이지기(明治期)에 접어들면서 사태는 돌변하게 되었다. 일본 근대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근대식 활자에 의한 대장경이 연이어서 간행된 것이다.

2. 근대기 한역대장경(漢譯大臧經)의 편찬과 간행

신활자(新活字)로 간행된 일본 최초의 대장경은 대일본교정축쇄대장경(大日本校訂縮刷大藏經)(혹은 축쇄대장경)이다. 시마다 반콘(島田蕃根, 1827~1907)이 중심이 되어 1880년(明治 13)부터 1885년(明治 18)까지 도쿄 홍교서원(弘敎書院)에서 고려장(高麗藏)을 저본으로 하고 송(宋)·원(元)·명(明) 3본을 대교하여 40질(帙), 1,916부, 8,534권을 간행하였다. 축쇄대장경은 종래에 없던 구점(句点, 마침표)을 찍어 해독(解讀)을 보다 편리하게 하는 등 학술적 가치를 높여 당대 불교교학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마에다 에운(前田慧雲, 1857~1930)과 나카노 타슈(中野達慧, 1871~1935) 등이 주재하여 1902년(明治 35)부터 1905년(明治 38)까지 교토 장경서원(藏經書院)에서 대일본교정장경(大日本校訂藏經)(혹은 만자장경)을 간행하였다. 36투(套), 1,625부, 7,082권으로 이루어진 만자장경(卍字藏經)은 전권(全卷)에 반점(返点)을 붙인 것이 큰 특징이다. 그리고 러일전쟁(露日戰爭, 1904.2~1905.9)의 승리를 기념하여 1905년 4월부터 1912년(大正 1)까지 장경서원에서 만자장경(卍字藏經)을 보완한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혹은 만속장경)을 간행하였다. 만속장경(卍續藏經)은 인도 찬술서(撰述書)와 함께 주로 중국 찬술서를 수록한 중국불교 총서로 분량은 150투, 1,660부, 6,957권이었다.

메이지 시기의 몇 차례에 걸친 대장경 편찬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일본 찬술서를 보완한 편찬, 간행 사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마쓰모토 분자부로(松本文三郞, 1869~1944)를 회장으로 하여 1914년(大正 3)부터 1921년(大正 10)까지 일본대장경(日本大藏經) 48권을 간행하였다. 일본에서 찬술된 경전 주석서와 각 종파의 종전(宗典)을 수록한 일본불교의 대장경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불교의 교리, 역사, 문학 등을 총망라한 일본불교 총서도 편찬되었다. 1911년(明治 44) 난조 분유(南條文雄, 1849~1927)를 회장으로 한 불서간행회가 설치되어, 1912년(大正 1)부터 1922년(大正 11)까지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 151권을 편찬, 간행하였다. 일본불교의 거의 모든 전적을 정리한 최대의 자료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본 근대기, 19세기 말부터 한문으로 된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은 장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는데, 그것이 양적으로나 질적인 면에서 그 정점에 이른 것은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이었다. 불교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1866~1945)와 와타나베 가이교쿠(渡邊海旭, 1872~1933)가 중심이 되어 1923년(大正 12) 대정일체경간행회(大正一切經刊行會)를 조직하였고, 여기서 1924년(大正 13)부터 1934년(昭和 9)까지 정장(正藏) 55책, 속장(續藏) 30책, 도상(圖像)·목록부 15책, 총 100책(3,493부, 13,520권)을 간행하였다. 세계 학계의 일대 금자탑으로 평가된 신수대장경이 간행되고 있던 중에 일본 불교계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문으로 된 대장경을 자국어인 일본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는 요구에 부응하여 일본어 번역본(國譯本)의 불교전적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이다.

3. 일본어 번역의 대장경

일본에서 출간된 한역대장경 중 대정신수대장경이 최고봉의 위치에 있다고 한다면, 일본어로 번역된 대장경 중에는 단연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이 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28년(昭和 3) 대동출판사(大東出版社)에서 국역일체경 제1권이 간행되기 시작했지만, 이에 앞서 국역대장경(國譯大藏經) 소화신찬국역대장경(昭和新纂國譯大藏經) 등이 번역, 출판되었다. 국역일체경의 출판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들 국역대장경을 간단히 개관해 보도록 한다.

1) 국민문고간행회(國民文庫刊行會)의 국역대장경

국역대장경은 국민문고간행회에서 1917년(大正 6)부터 1928년(昭和 3)까지 번역, 출판되었고 경부(經部) 14권, 율전을 포함한 논부(論部) 15권, 부록 2권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야마시타 소겐(山下曹源), 사에키 조인(佐伯定胤), 시마지 다이토(島地大等) 등이 번역자로 참여했고, 편집 겸 발행인은 쓰루타 큐사쿠(鶴田久作)였다. 당시 국역대장경의 판매는 신문광고를 이용하여 구매자를 확보한 후에 책을 출판하는 예약출판 방식을 택했다. 이 때문에 국민문고간행회는 2만 부에 가까운 책을 판매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렸던 것으로 전한다.

국역대장경의 번역문은 전체가 가키구다시(書き下し) 문장이고, 후리가나(振りがな)를 표기하였으며 번역문과 함께 한문 원전을 병기하여 실었다. 특히 한역(漢譯) 불전과 함께 빨리어 원전도 번역하여 수록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논부의 《대품》과 《소품》은 빨리어 율장을 번역한 것이다. 비록 그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불교계가 빨리어 원전을 통해 남방불교(南方佛敎)를 연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빨리어 삼장(三藏) 전체가 소개되고, 남방불교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일본어 번역의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 65권 70책(1935~1941년)이 완간된 후였다.

2) 동방서원(東方書院)의 소화신찬국역대장경

소화신찬국역대장경(昭和新纂國譯大藏經)은 1928년(昭和 3)부터 1932년(昭和 7)까지 미쓰이 쇼지(三井晶史)가 설립한 동방서원(東方書院)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편집 대표였던 미쓰이는 다카쿠스 준지로와 가깝게 지냈던 인물로 알려져 있고, 처음에는 신광사(新光社)를 설립하여 계몽적인 불교서적을 출판하는 것과 함께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도 간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1923년(大正 12) 관동대지진으로 신광사를 폐업하고, 소화(昭和) 시기에 들어와 동방서원을 설립하여 소화신찬국역대장경을 비롯하여 《모범불교사전(模範佛敎辭典)》 등을 출판했던 것이다.

소화신찬국역대장경은 경전부 12권, 논율부 12권, 종전부 22권, 해설부 2권 총 48권으로 구성되었고 시대와 학파, 종파 등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편찬, 번역한 것이 특징이다. 번역 형식은 국역대장경(國譯大藏經)과 마찬가지로 가키구다시(書き下し) 문장에 후리가나(振り仮名)를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소화신찬국역대장경은 쇼와(昭和) 시기에 불교사상의 부흥을 타고 3만 부 이상이 판매되어 당시 일본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과 교학 연구가 상당한 활기를 띠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동방서원의 대표자이고 발행인이었던 사카토 야이치로(坂戶彌一郞)는 소화신찬국역대장경이 서점에서 3만 부 이상 판매된 사실을 두고, 일본문화의 모태를 불교사상으로 여기는 많은 일본인의 불교서적에 대한 요구에 출판사가 부응한 결과라고 평하며, 불교출판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이처럼 일본어 번역본 대장경이 출판시장에서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을 보이며, 상당한 판매 부수를 올렸다. 이것은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의 출판기획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4. 국역일체경의 번역과 간행

·인도(印度) 찬술부 155권(1928~1935년)
·화한(和漢) 찬술부100권(1936~1988년)

근대기(近代期)에 일본불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불교서적을 간행한 출판지식인들의 업적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듯하다. 한 불교서(佛敎書)의 출판이 부모로부터 자식으로 세대를 이어가는가 하면, 남편에게서 아내 또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각고의 세월을 경과하면서 훗날 엄청난 대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근대 일본불교의 굳건한 초석이 되어 교학 연구에 뜨거운 불을 지핀 것은 물론이고, 대중들의 불교에 대한 많은 관심과 호응을 불러왔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을 발행한 대동출판사의 이와노 신유우(岩野眞雄)와 그의 아내 이와노 기쿠요(岩野喜久代)가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어로 번역된 대표적인 불교전적으로 꼽히는 국역일체경의 발행 과정은 한 불교출판인의 생애와 그 궤적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는 국역일체경이 간행된 배경과 과정을 이와노(岩野)의 생애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 살펴보자

1) 이와노 신유우와 아내 이와노 기쿠요

이와노 신유우(岩野眞雄, 1893~1966)는 정토종(淨土宗) 출신의 승려였다. 그는 1893년 도쿄의 정토종 사찰인 정한사(淨閑寺)에서 태어났다. 이와노가 태어난 정한사는 연고자가 없는 사망자나 죽어도 인수자가 없는 창녀(娼女)들을 매장한 절이라고 하여 나게코미 데라(投げ込み寺, 버려진 것을 담는 절)라고 불렸다. 실제로 도쿄 상인들의 마을에 있는 정한사에는 1885년 안세이에도 지진(安政江戸 地震) 때 연고자가 없는 많은 사망자가 경내의 구덩이에 매장되었다. 지금도 정한사 경내에 있는 공양탑은 그 비극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와노는 이러한 비화를 간직한 절에서 아버지 정토종 승려 이와노 신류우(岩野眞隆)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신류우는 보살의 경지를 몸소 실천한 스님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신류우는 자기 주변에 있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먼저 달려가 도왔고, 또 생활형편이 어려워 공부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교육시키는가 하면 자광학원(慈光學院)을 설립하여 사회사업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신유우(眞雄)의 한평생은 또 다른 보살 정신의 구현이기도 했다.

이와노는 병약한 아이로 태어나 청년기에도 늘 병마와 싸우며 생활했다고 한다. 특히 그를 가장 괴롭힌 질병은 결핵이었고, 그 병은 결국 그를 출판계로 투신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천태종 대학(天台宗 大學)에 연원을 두고 있는 지금의 다이쇼 대학(大正大學)에 재학 중일 때 평생의 스승인 와타나베 가이쿄쿠(渡邊海旭, 1872~1933)를 만났다. 스승 와타나베 역시 정토종 출신의 승려로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1866~1945)와 함께 도감(都監)의 직무를 맡아 대정신수대장경의 편찬사업을 주재하였던 당대 불교계의 대학자이고 교육자였다. 신수대장경의 편찬을 총괄 지휘했던 다카쿠스도 와타나베의 죽음을 앞두고 “이 사업은 와타나베가 없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사업이었다”고 할 정도로 신수대장경의 완간에는 그의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와타나베는 신수대장경 100책이 완간되기 1년 전인 1933년 1월에 타계하고 말아 그의 제자와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이와노는 다이쇼 대학을 졸업한 후, 스승 와타나베가 주관하는 정토종 기관지 《정토교보(淨土敎報)》의 간행을 도우면서 출판업무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는 지병인 결핵으로 폐를 잃게 되어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되자, 강연 대신 문서와 출판으로 포교활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번역과 출판 업무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다. 이 무렵 이와노는 평생의 동반자인 기쿠요(喜久代)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와노의 출판사업을 이어받아 국역일체경의 발행을 완간한 장본이기도 한 아내 기쿠요는 1922년에 도쿄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도원소학교에(桃園小學校)의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녀가 남편 이와노를 만난 것은 다이쇼 연간(1912~1925년)으로 문학, 사상, 교육 등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분위기가 고조된 시기였다. 이러한 풍조는 불교계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교학연구와 함께 불교 전적에 대한 정리와 편찬 사업이 활기를 띠던 시기였다. 당시 이와노는 《정토삼부경》 《유마경》 《승만경》 등을 번역하였고, 기쿠요는 와카(和歌)의 작가로 활동한 문인(文人)이었다. 그리고 기쿠요는 이와노의 스승인 와타나베의 강연을 열렬히 경청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고 하니, 결국 와타나베의 포교 활동이 두 사람의 부부 연을 맺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2) 대동출판사와 국역일체경

이와노는 34세가 되던 1926년(昭和 1) 문서를 통한 전도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고자 대동출판사(大東出版社)를 설립하였다. 불교 전도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출판사를 설립했고, 그 이름은 그의 스승인 와타나베가 지었다. 대동출판사를 설립한 이와노는 출판의 방침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첫째, 불교의 기초적인 기반이 되는 제대로 된 학술서를 간행한다. 둘째, 일반 대중들이 알기 쉽고 편하게 불교를 즐길 수 있도록 포교를 위한 불교서적을 발행한다는 것이었다. 대동출판사가 창립되던 1926년은 대정신수대장경이 한창 발행되던 시기였다. 1924년(大正 13) 5월에 제1책 아함부(阿含部)가 발행되기 시작하여 1928년 11월 목록부(目錄部)의 발행으로 신수대장경 100책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정장(正藏; 인도, 중국, 한국 찬술서) 55책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다카쿠스와 와타나베가 처음 기획했던 대장경의 편찬사업이 한고비를 넘어서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인 신수대장경을 접한 이와노는 자신과 같이 한문으로 된 불교전적을 자유롭게 읽을 수 없어서 한탄하는 불교신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하며, 무학(無學)의 사람들도 불전(佛典)에 가까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생각하던 끝에, 바로 일본어로 번역한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의 편찬을 기획하게 되었다. 신수대장경의 간행이 국역일체경을 출판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와노는 스승 와타나베와 같은 정토종 승려이며 교육자, 사회운동가, 정치인이기도 한 시이오 벤쿄(椎尾辨匡, 1876~1971)의 자문을 받아 신수대장경 가운데 주요 불전을 선별하고, 또 그것을 저본으로 하여 일본어로 번역된 국역일체경을 간행하기로 하였다. 번역하게 될 불교전적을 엄선한 결과 ‘인도(印度) 찬술부’ 155권, ‘화한(和漢) 찬술부’ 80권을 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편찬 책임자는 사업 기획단계 때부터 참여한 와타나베 가이쿄쿠(渡邊海旭), 시이오 벤쿄(椎尾辨匡, 1876~1971), 그리고 도키와 다이조(常盤大定, 1870~1945), 기무라 다이켄(木村泰賢, 1881~1930) 등 대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번역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 구성되어 1928년(昭和 3)에 국역일체경 제1권이 간행되었다. 이 해는 신수대장경의 정장 55책이 완간되면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높이 평가되자, 일본 불교계가 매우 고무되어 들뜬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본 불교계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바로 뒤를 이어 자국어로 번역된 국역일체경 발행 원년(元年)을 맞고 있었다.

국역일체경 발행 당시 1권의 책값은 정가 1엔(円)으로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었다고 한다. 다카쿠스는 신수대장경을 편찬할 때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간행한다는 기본 방침을 세웠는데, 그것은 이와노가 국역일체경을 간행할 때도 그대로 적용되어 일반 대중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저렴한 책값 때문이었는지 당시 국역일체경에 대한 독서계의 반응은 예상외로 뜨거웠다. 책을 구입하겠다는 예약자가 1만 명을 돌파했던 것이다.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는 도저히 믿기기 어려운 일이었다. 출판사와 번역자 모두 경제적인 이익보다는 양질의 불서를 통해 불법을 전파하겠다는 열정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여기에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 일어난 불교 붐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대동출판사는 국역일체경의 간행과 함께 1933년(昭和 8)부터 오노 겐묘(小野玄妙, 1883~1939)가 중심이 되어 편찬한 《불서해설대사전(佛書解說大辭典)》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대중들이 국역일체경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편찬된 《불서해설대사전》은 불교 관련 단어 약 8만여 개의 항목을 해설한 불교 대사전이었다. 국역일체경과함께 대동출판사의 최대 역작인 《불서해설대사전》은 이렇게 탄생했다.
1935년 11권으로 완간된 《불서해설대사전》은 불교문헌 학자인 오노(小野)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오노는 이와노와 같은 정토종 승려로 일찍부터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 1869~1948)가 주재한 《모치즈키 불교사전(望月佛敎大辭典)》(10권)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일본불교의 최대 자료집인 대일본불교전서(151권)의 편집주임으로 일했다. 그리고 최고의 한역대장경으로 평가되는 신수대장경(100책)의 편찬을 총괄한 편집주임이기도 했다. 오노는 이렇게 일본 근대불교사에 길이 남을 대편찬사업 때마다 최일선에서 실무를 담당한 정열적인 학자였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 탓이었는지 57세의 나이에 뇌내출혈로 급서(急逝)했다. 그의 대작(大作)에는 《불교경전총론》 《대승불교예술사》 《불상개설》 등이 있다.

대동출판사는 1941년부터 시작된 태평양전쟁 시기에도 국가의 ‘기업 통제’를 면하고, 또 오카모토(岡本經一)가 편집한 《대동명저선(大東名著選)》이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보이며 사업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대동명저선》의 호조로 정한사(淨閑寺)가 지고 있던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은 다카쿠스의 경우와는 정반대였다. 다카쿠스는 신수대장경을 완간한 후, “나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집도 없고 땅도 없는 무일푼으로서 평생 지불해야 할 거금의 부채였다”고 회고했다. 다카쿠스는 신수대장경과 뒤이은 남전대장경을 완간한 후 당시 돈 30만 엔이라는 거액의 빚을 지고 채권자에게 시달렸다고 한다.

3) 전후(戰後)의 국역일체경 간행과 대동출판사

태평양전쟁 중에도 비교적 순탄하게 운영되었던 대동출판사였지만 1945년 일본의 패전에 의한 참화는 벗어날 수 없었다. 1945년 3월 도쿄대공습으로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대동출판사의 사옥과 책도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정한사에도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는 피난민들로 넘쳐났다. 당시 국역일체경의 간행은 인도찬술부 155권은 완간되었지만, 화한(和漢) 찬술부 80권 가운데 65권이 간행되고 중단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와노는 여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1946년에 다시 출판사를 열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문을 연 대동출판사였지만 사업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의 출판 서적이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동출판사는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맞았다. 1946년 1월 ‘공직추방령(公職追放令)’이 반포되면서 군인을 포함하여 정치지도자, 군국주의자들 21만 명이 파면되었다. 그리고 경제민주화를 목표로 10여 개의 재벌 회사가 해체 명령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이와노는 전쟁 중에 국가주의 서적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대동출판사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출판사는 지인에게 맡겨졌지만, 횡령사건 등에 연루되면서 파산하고 말았다. 대동출판사가 창사 20년 만에 폐업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노의 불교출판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1950년 ‘공직자추방령’이 해제되자 새로 동성출판사(東成出版社)를 설립하여 출판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이후 국역일체경의 간행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와노는 인도 불교유적지 탐방과 아내 기쿠요의 격려를 받고, 1957년 화한찬술부를 85권에서 100권으로 개편하여 나머지 35권을 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출판사 이름도 동성출판사에서 이전의 대동출판사로 되돌아갔다. 이와노 대동출판사의 새 출발이었다.

4) 국역일체경 155권 전권 완간

1957년 대동출판사를 다시 연 이와노는 이후 국역일체경을 계속 간행하였지만, 생전에 그가 목표로 한 화한찬술부 100권을 완결하지 못하고 12권을 남긴 채 1968년 세상을 떠났다. 1965년 《일영불교사전(日英佛敎辭典)》을 간행한 후에 생긴 혈전(血栓)이 원인이었다. 대동출판사에 불어닥친 또 한 번의 위기였다. 이 위기를 극복한 사람은 이와노의 평생 동업자이기도 한 아내 이와노 기쿠요였다. 기쿠요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국역일체경의 간행을 계속 이어갔다. 자금 문제로 일은 다소 더디게 진행되었지만, 1988년(昭和 63)에 화한찬술부〉 논소부 18하권(下卷)을 간행함으로써 인도찬술부 155권, 화한찬술부 100권, 전 255권을 완간하였다. 대동출판사가 창립된 지 반세기 이상이 흐른 55년 만이었다. 여기에는 대동출판사의 창립과 파산, 그리고 재창립, 창업자 이와노의 죽음과 아내 기쿠요의 유업 계승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였다. 무엇보다도 출판을 통해 불교 포교에 전념하겠다는 이와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이와 같은 대사업이 완수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대동출판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번역가협회로부터 제24회 일본번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5) 국역일체경의 구성과 신국역대장경

국역일체경은 인도찬술부와 화한찬술부 2부로 구성되었고, 인도찬술부 155권은 1928년부터 1936년까지, 화한찬술부 100권은 1988년에 완간되었다. 그리고 각 찬술부에 색인이 한 권씩 있다. 인도찬술부는 대정신수대장경의 순서와 같이 아함부, 본연부, 반야부, 법화부, 화엄부, 보적부, 열반부, 대집부, 경집부, 밀교부, 율부, 석경론부, 비담부, 중관부, 유가부, 논집부 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화한찬술부는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찬술된 불서로 경소부, 율소부, 논소부, 제종부, 사전부, 호교부 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한역대장경인 신수대장경이 이미 출판되었기 때문에 국역일체경에는 한문 원전을 병기하지 않았다.

국역일체경의 번역 유형은 오쿠리가나(送り仮名)를 넣은 가키구다시(書き下し) 문장이었다. 가키구다시 문체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국역일체경이 안고 있는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에 대장출판사(大藏出版社)는 그 문제점을 보완하여 1993년부터 새로운 체재에 의한 신국역대장경(新國譯大藏經)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역시 신수대장경을 저본으로 하고, 주요 불전을 선별하여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

신국역대장경은 1993년부터 인도찬술부가 간행되기 시작하여 현재 50권이 나왔다. 그리고 2011년부터는 중국찬술부의 간행이 시작되었고, 2015년 3월까지 12권이 출판되었다.

5. 국역남전대장경의 번역과 간행

일본 근대기 이후에 일본어로 번역된 대장경은 두 종류로 분류된다. 먼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한역대장경을 일본어로 번역한 대장경이 그것이고, 또 다른 하나가 빨리어(巴利語) 원전을 일본어 번역한 대장경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 국역일체경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대표하는 것은 국역남전대장경(國譯南傳大藏經)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빨리어 원전을 번역한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이 간행된 배경과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

남전대장경은 남방불교(南方佛敎)에서 근거로 하는 빨리어 삼장을 일본어로 번역한 불전을 말한다. 다카쿠스 준지로 기념사업회(高楠順次郞記念事業會)가 1935년부터 1941년까지 영국 런던의 빨리어성전협회(Pali Text Society)에서 출판한 빨리어 삼장(PTA본)과 약간의 장외전적(藏外典籍)을 번역하였고, 이것을 대장출판사(大藏出版社)가 65권 70책으로 간행하였다. 번역에는 다카쿠스의 제자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1882~1963), 나가이 마코토(長井眞琴, 1881~1970)를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 44명이 참여하였고, 다카쿠스는 이것을 직접 감수했다.

남전대장경의 번역사업은 최고의 한역대장경인 대정신수대장경의 편찬사업을 총괄한 다카쿠스의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다카쿠스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빨리어 원전을 일본어로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은 동경제국대학에서 빨리어 강의를 시작하기 전이었다고 한다. 다카쿠스는 1870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1897년에 귀국하여 동경제국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기 때문에, 빨리어 원전의 번역 구상은 남전대장경이 출판되기 거의 40년 전인 1897년 전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카쿠스는 1898년(明治 31) 난조 분유(南條文雄, 1849~1927)와 함께 제국동양학회(帝國東洋學會)를 조직했다. 학회의 설립 목적은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을 검토하는 것과 함께 빨리어대장경을 번역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제국동양학회는 대정신수대장경편찬과 남전대장경 번역의 맹아(萌芽)였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다카쿠스가 난조와 함께 설립한 제국동양학회의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중단되었다. 그러나 다카쿠스는 빨리어대장경에 대한 번역만큼은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빨리어대장경의 내용이 일반불교의 연구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일본 불교학계의 연구수준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일반 불교인의 상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빨리어대장경이 일본어로 번역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카쿠스가 동경제국대학에서 빨리어 강의를 한 지 거의 35년이 흐르고 그가 기획, 편찬한 신수대장경 100책이 완간된 다음 해인 1935년(昭和 10) 4월에 남전대장경 제1권이 간행되기 시작했다.

다카쿠스는 남전대장경을 간행하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첫째, 불교를 이해하고자 할 경우 신수대장경에 수록된 한역불전(漢譯佛典)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남방불교의 원전을 참조해야 한다. 둘째, 종래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비방해 온 잘못을 바로잡는다. 셋째, 남방의 불전이 한문불전보다는 인간으로서 불타(佛陀)를 잘 그려내고 있다. 넷째, 한문이 아니고 국역(國譯, 일본어 역)이라는 스타일이 대중 교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 불교계는 1930년대부터 그동안 대승불교권에서 소승불교로 폄하한 남방불교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 잘못된 편견을 불식시키고자 본격적인 행보를 내디디고 있었다. 그 작업은 단순히 소수의 불교학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원전 번역을 통한 대중 교화까지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19세기, 근대기 이후 동아시아 불교를 선도해 간 일본 불교계의 한 단면이었다.

1934년 4월 남전대장경이 간행되기 시작하면서 대장출판사는 불교 잡지 《현대불교》에 대대적인 광고를 실어 독자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당시 대장출판사는 《남전대장경》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홍보했다.

첫째, 이전 국역(國譯)이라고 칭하는 한문 요미쿠다시(讀み下し)식의 번역이 아닌 순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둘째, 한역(漢譯) 경전과는 다른 내용이 많고, 한역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많은 불교전적이 실려 있다.

셋째, 불타의 교설(敎說)을 직접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한역경전에 훨씬 앞서며, 흥미 있는 설화는 불교예술의 모태를 이룬다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남전대장경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을 “남방불교권에서 전해오는 불타의 교설을 집성한 대장경으로 그것은 대승불교의 시원이 되고 불교의 정수가 된다”고 하였다.

비록 책 판매를 위한 광고 문구이긴 하여도 남방불교가 갖는 의미와 가치를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남전대장경을 출판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본전(남전대장경)을 읽지 않고 불교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한 문구에서는 책을 간행한 출판사의 당당한 자부심과 함께, 남방불교에 무지한 기존의 불교계를 질타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당시 남전대장경의 책 1권(평균 400면)은 3엔(円)이 넘는 가격에 판매되어 비교적 고가(高價)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다카쿠스는 신수대장경에 뒤이은 남전대장경을 완간한 후 당시, 30만 엔이라는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책이 완간된 후 다카쿠스 개인에게 돌아온 것은 거액의 빚과 오랫동안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만년(晩年)의 고단한 삶이었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국역일체경을 완간한 이와노 기쿠요가 “나는 국역일체경 덕분에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때때로 살아도 소용없을 정도의 참괴(慚愧)의 눈물로 흘리곤 한다”고 회고한 사실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더구나 다카쿠스는 만년에 아내 시모코(霜子)를 먼저 보낸 까닭에, 그의 마지막 여생은 더욱 외롭고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다카쿠스는 80세(1945년)로 타계하기 1년 전에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일본에서는 남전대장경이 완간된 후에도 불완전한 여러 부분을 보완하여 최근까지 다수의 빨리어 원전들이 번역되어 암파문고(岩波文庫), 춘추사(春秋社), 대장출판사(大藏出版社) 등에서 간행되고 있다. 참고로 우리의 빨리어 원전 번역 현황을 보면, 1997년 한국빠알리성전협회(Korea Pali Text Society)가 설립되어 빨리어대장경을 현재까지 한글로 번역하여 출판하고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대표 전재성)는 빨리어대장경의 핵심부에 해당하는 경장(經藏)의 다섯 니까야(nikaya; 모음집) 중 쌍윳타니까야(Samyutta-nikaya; 相應部)를 전 11권(전재성 역주, 1999~2002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맛지마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를 전 5권(전재성 역주, 2002~2003)으로, 앙굿따라니까야(Anguttara-nikaya; 增支部)를 전 11권(전재성 역주, 2007~2008)으로 간행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 이미 남전대장경을 완간한 일본에 비하면, 우리의 행보는 한참 늦었음에 틀림없다. 일본은 17세기까지도 우리에게 대장경을 구걸하던 신세였지만, 어느새 우리의 가시권을 훨씬 벗어나 질주해 가고 있었다. 동아시아 대장경사(大藏經史)의 대반전이었다. ■

 

윤기엽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연구원. 연세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졸업(석사, 박사). 고려시대 중심의 한국불교사를 전공하고 일본 근대불교사를 연구함.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서울대 일본연구소 연구원 역임. 주요 논문으로 〈북한산성의 승영사찰〉 〈일본 大正時代 불교계의 편찬사업〉 등이 있고, 저서로 《고려 후기의 불교-사원의 불교사적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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