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파 지식인, 불교에 빠지다

1. 머리글

최치원(崔致遠, 857~?)은 시인·문장가이자 정치인이고 사상가다. 그는 조선시대에 여러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서원에 종향(從享)될 정도로 높은 위상을 갖는 대표적인 유학자였지만 불교와 도교에도 능통하였다. 한국 한문학의 비조인 그의 《계원필경(桂苑筆耕)》은 한국 최초의 개인 문집이며, 그의 한시는 문학성과 국제적 명성을 함께 얻었다. 그는 당시 문명의 중심인 당나라에서 벼슬살이한 외국인이자 시대의 부조리에 앞장서서 분노하고 이를 개혁하려 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한국의 지성을 논할 때 그가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 그가 당대 최고의 유교 지성으로서 어떤 연유에서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활용하였을까. 최치원이 복합적인 지식인이었기에, 불교를 수용한 연유와 양상은 시인, 유교 관료, 사상가로서 입장에 따라 같으면서도 그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 차이의 주름과 결을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1차 텍스트를 중심으로 당시의 정치, 사상, 사회문화적 배경을 종합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2. 시인으로서 본 불교

최치원은 위대한 시인이자 다양한 형식의 글을 쓴 문장가다.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지은 글이 표·장·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제문(祭文)·소계장(疏啓狀)·잡서(雜書)·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으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 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내었다. 당 황제는 그의 문재와 공로를 기려 정5품 이상에게 주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했다.” 중국에서 그를 먼저 알아보고 “《全唐詩》 《唐宋百名家集》 《唐宋五十家集》에 그의 시를 수록하였으며, 《中國文學家大辭典》 《辭海》 등도 그의 생애와 창작에 대해 소개했다. 아울러 그를 당대의 저명한 시인의 무리 속에 넣었다.” “2007년에는 장안과 낙양에 이어 제3의 도시이자 그가 〈토황소격(討黃巢檄)〉 등 많은 글을 쓴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에 중국 당국이 ‘최치원기념관’을 세웠다. 이는 중국 최초의 외국인 기념관이다.” 중국에서만 최치원이 쓴 글에 대해 50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도 한중정상회담 때 그의 시 〈범해(泛海)〉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두 나라의 우의를 다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대시인이자 문장가인 그가 불교를 수용한 이유와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불교의 교리는 그가 시를 통하여 널리 백성을 교화하려는 방편으로 타당하였다. 불교는 한마디로 위로는 지혜를 깨달아 아래로 중생을 구제하자는 것이다. 시 또한 이와 유사하다. 공자가 306편의 시를 모아 《시경(詩經)》을 편찬하고서 일갈한 대로, 시란 “생각함에 있어 삿됨이 없음(思無邪)”이다.

다시 말하여 시의 목적은 인간의 성정(性情)을 바르게 하는 데[性情之正] 있다. 그럼, 어떻게 세상을 밝게 할 것인가. 이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간서론(諫書論)은 세상이 어두운 것은 지배층의 타락과 부조리, 횡포 때문이라 간주하고 천심(天心)을 가진 백성이 지배층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시를 써서 올바른 세상으로 바로잡고자 한다. 다른 하나는 세상이 혼미한 것이 백성이 무지한 때문이라 보고 이미 성정의 바름에 이른 군자들이 어리석은 백성을 잘 가르치고 깨우치는 시를 써서 인륜을 바로 잡는 것이다.

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시란 군자들이 어리석은 백성을 교화하는 방편이다. 이것이 상이풍화하(上以風化下)의 교화론(敎化論)이다. 충효(忠孝)의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설파하는 훈민가(訓民歌)에 잘 드러나듯, 교화론을 따르는 유교의 시는 상층의 군자가 아래에 있는 백성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아 교화하려 한다. 하지만 불교는 이와 다르다. 유리창의 먼지를 제거하면 청정한 하늘이 드러나듯, 중생의 마음속에서 어리석음을 없애고 그 속의 불성(佛性)을 드러내려 한다. 전자가 상층에 의한 강요라면 후자는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고, 전자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라면 후자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최치원은 이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狐能化美女    여우는 쉽게도 미인으로 변하고
貍亦作書生    너구리 그 또한 선비로 둔갑하네.
誰知異類物    그 누가 알리요 또 다른 동물들이
幻惑同人形    사람인 척 속이고 홀린다 하더라도.
變體想非艱    육신을 바꾸기는 어려움이 없지만
操心良獨難    마음을 다잡기는 참으로 힘들구나.
欲辨眞與僞    진실과 거짓을 가려서 보려거든
願磨心鏡看    마음의 거울을 닦고서 비춰보오.
— 〈옛 생각(古意)〉

수련(首聯)은 전설에서 차용하였다. 구미호는 미인으로 변하고 천 년 너구리 또한 선비로 둔갑한다. 그들만이 아니다. 호랑이, 늑대, 쥐, 지네 등이 사람으로 변하여 진짜 사람을 유혹하고 속인다. 이 바람에 사람들은 귀중한 것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육신을 변장하고 바꾸기는 오히려 쉽다. 인간의 마음을 다잡아 새로이 어진 마음으로 바꾸기는 정녕 어렵다. 미인 여우에 홀려 목숨을 내주는 무지한 사람이 되지 않듯,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려거든 마음의 거울을 잘 닦아서 거기서 어리석음과 욕심과 성냄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본래 면목을 곧바로 직시해야 한다. 이처럼 고운은 위 시에서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 나의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 자체를 닦아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다음으로 시인으로서 최치원이 불교를 끌어들였던 까닭은 일종의 치유 글쓰기가 가능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글과 정치력 모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이를 잘 발휘하였음에도 외국인이기에 벼슬살이가 한정되어 있었고, 조국인 신라에서도 육두품으로 또 제한을 받았다. 중국에 머물 때 쓴 시, 〈가을밤 비 내리는 속에(秋夜雨中)〉 등을 보면 절절하게 잘 드러나지만, 그는 중국에서는 변방의 외국인으로 일종의 디아스포라를 심하게 겪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쇠락해가는 신라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하다가 수많은 권신들로부터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모함을 받았다. 이럴 때마다 불교 경전을 읽으며 마음의 평안을 되찾고 그래서도 마음이 혼란하면 절로 가서 청산과 합일을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절과 청산을 그렇게 노래한 시가 다수가 있으며, 다음 시에도 그런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狂奔疊石吼重巒    바위로 내달리며 산을 보고 부르짖어
人語難分咫尺間    곁 사람 소리조차 알아듣기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    저 세상 시비 소리 귀 닿을까 두려워서
故敎流水盡籠山    일부러 물 돌려서 모든 산을 감쌌다네.
— 〈가야산 독서당에서(題伽倻山讀書堂)〉

말년에 서라벌을 떠나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며 쓴 시다. 해인사 결계(結界) 도량의 기문에 쓴 대로, 가야산은 “석가모니께서 정각(正覺)을 이룬 불타가야(佛陀伽倻)와 이름이 같아 특별한 곳이다.” 친형인 현준(賢俊)이 승려로 머물고 있었고 서라벌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산천이 수려하여 중앙의 정치에 지친 마음을 달래기도 좋았을 것이다.

비가 오자 홍류동 계곡의 물이 첩첩 바위 사이로 미친 듯 쏟아졌다. 이는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간 이후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 고변의 종사관 등 벼슬살이를 하며 미친 듯 달려온 그의 젊은 시절과 은유 관계를 형성한다. 계류는 아래로 흐르는 것만이 아니었다.

바위에 부딪치고 절벽을 때리면서 겹겹 쌓인 가야산을 보고 울부짖었다. 그도 장안까지 점령하여 황제를 칭하던 황소가 침상에서 굴러떨어질 정도로 격한 글로 타인을 때리기도 하고, 고운(顧雲), 나은(羅隱) 등 당대 최고 시인들이 무릎을 칠 시를 짓기도 하고, 신라를 쇄신할 열 개의 개혁책을 올려 진성여왕과 신라 조정이 흔들리게도 하였다. 하지만 해인사에 머물고 보니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저 물소리로 인하여 곁에 있는 사람 말소리도 듣기 어렵듯, 사람들은 그의 진실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를 모함하고 비난하였다. 도망치듯 가야산으로 오니 마음이 평안하였지만, 간혹 서라벌로부터 험담이 들릴 때마다 최치원은 마음의 평정심이 흔들렸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홍류동 골짝으로 내려와 물소리를 들었으리라. 물소리가 다른 소리를 모두 삼켜 적멸에 이르듯, 물소리에 침잠하면 분노와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런 마음을 저 세상 시비 소리가 그의 귀에 닿을까 보아 두려워서 일부러 물을 돌려서 온 산을 감쌌다고 표현한 것이다.

사찰과 그 주변의 청산이 처음부터 자연귀의의 마당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찰로 대변되는 임천은 성스러운 공간이고 그가 지향했던 세계였지만, 그가 산문 밖으로 부끄러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자로서의 야망과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상세히 서술하겠지만, 그는 여러 곳의 글에서 명리(名利)를 버리고 마음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을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추론하면, 고운이 불교에 심취하여 유교 관료로서 야망을 버린 후에는 사찰이 자연합일과 평정심을 이루는 처(處)로 자리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불교, 특히 선의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담아내고 고도의 상징과 절제의 형식미를 안겨주었다. 《당시고취(唐詩鼓吹)》로 유명한 금나라의 문필가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은 〈증숭산준시자학시(贈崇山雋侍者學詩)〉에서 “시는 선객에게 꽃에 비단을 더해주고, 선은 시인에게 옥을 다듬는 칼이다”라고 하였다. 이 옥도란 다름 아니라 ‘생략과 절제의 미학, 언어를 통한 언어 너머의 의미 표출’이다. 선이 오직 마음을 가리켜[直指人心] 부처를 이루듯[見性成佛], 시는 마음을 가리켜 언어를 넘어선 참의 의미에 다다르게 한다.

雲畔構精廬    구름이 이는 곳 정사를 지어놓고
安禪四紀餘    선정을 닦은 지 반백 년 흘러갔네
筇無出山步    지팡이 없어서 산문 밖 안 나서고 
筆絶入京書    붓 들어 서울로 글 보낸 일도 없네.
竹架泉聲緊    대나무 홈통엔 감기는 샘물 소리,
松欞日影疏    소나무 창가엔 버성긴 해 그림자.
境高吟不盡    그 높은 경지를 시로도 표현 못해
瞑目悟眞如    가만히 눈감고 진여를 깨치려네.
— 〈운문사의 지광 스님께(贈雲門蘭若智光上人)〉

위는 고운이 운문사의 지광 선사에게 바친 시다. 선사가 4기(紀), 곧 48년을 하고도 남는다 했으니, 50년 선정을 하여 깨달음에 이른 경지를 시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구름이 이는 높드리에 사찰을 지어놓고 50년 동안 선정을 닦았다. 그동안 산문 밖으로 지팡이 짚고 나선 적이 없고, 붓을 들어서 서라벌의 왕과 귀족은 물론 친인척에게조차 편지를 보낸 적도 없다. 오로지 선정을 수행하는 데 몰두하며 탐욕과 어리석음을 끊는 지(止)와 마음속의 부처를 곧바로 들여다보는 관(觀)을 닦았다.

경련(頸聯)이 이 시를 절창으로 만든 구절이다. 이를 직역하면 “대나무 홈통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감기고, 소나무 창가엔 해 그림자가 버성기다(竹架泉聲緊 松欞日影疏)”이다. 이는 고운이 두보(杜甫)의 시에서나 볼 수 있는, ‘대장(對仗)의 신묘(神妙)한 운용(運用)’을 구사한 것이다. 형식과 내용에서 대구이자 대조이고,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조차 대조를 이루면서 결합한 공감각적 표현을 하였다. 경련은 두 구가 대구를 이루는 가운데 ‘긴(緊)’과 ‘소(疏)’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자는 ‘꽉 차다, 감기다, 팽팽하다, 굵게 얽다, (속이) 차다, 단단하다, 오그라들다’ 등의 뜻을 갖는다. 반면에 후자는 ‘드물다, 성기다, 트이다, 멀어지다’ 등의 뜻을 가진다. 전자는 꽉 차고 틈이 없이 촘촘한 것이고, 후자는 성기고 틈 사이가 먼 것이다.

전자는 청각을 두드리고, 후자는 시각을 훔친다. 시간을 따지면 전자는 아침이자 출가를 막 시작한 50년 전의 젊은 시절이며, 후자는 저녁이자 말년이다. 경련은 시적 화자가 50년을 수행한 양상을 두 구절로 압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차를 마시기 위하여 대나무 홈통을 잇대어 돌확으로 연결하였더니 연이어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머리를 꽉 채운다. 그렇게 그 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또 그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며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수행을 하노라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소나무로 만든 창가에는 해 그림자가 버성기게 놓여 있다. 새벽에 시작한 선정이 저녁에 이르도록 깊은 삼매에 든 것이다. 그런 하루를 일 년 360일에 50년을 곱한 것만큼이나 반복하였다. 그렇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렀으니 그 스님이 도달한 지극히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어찌 시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 깨달음의 세계는 언어를 넘어섰다. 그러니, 눈 감고서 스님이 이룩한 진여(眞如)의 한 자락이나마 다가가려 시도할 수밖에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시인으로서 그는 불교를 통하여 백성들이 마음속의 부처를 만나기를 원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향한 탐욕으로 물든 서라벌을 떠나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고, 선을 빌려서 생략과 절제의 미학으로 반짝이는 언어를 통해 언어 너머의 세계를 드러내는 시를 쓸 수 있었다.

3. 유교 관료로서 본 불교

고운이 혼신을 다하여 추구한 것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유교 관료다. 그는 높은 자리를 원했다. 세간에서 말하는 그런 권력욕은 아니었다. 그런 권력을 추구했다면, 왕과 권신들에 반하는 개혁책을 제시하여 권력을 잃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을 잘 부려서 백성을 널리 편안하고 이롭게 하려는 것이 그의 실존적 의미였고 인생의 최대 목표였다. 공맹(孔孟)을 진실로 따르는 모든 목민관이 위민(爲民)과 애민(愛民) 정치를 펴겠지만, 이것이 불교의 정치관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당시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 진성여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채 환락에 빠져 있었고, 곳곳에서 도적들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양길, 기훤, 견훤 같은 이들이 일어나서 큰 세력을 형성하여 일정한 지역을 할거하였다. 도탄에 빠진 신라 백성 전체를 구제하고자 하였으나 왕과 조정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대신 지방관으로 가서 지역의 수장이 되면 그 지역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다스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 듯하다. 그는 태산군(太山郡, 전북 태인), 부성군(富城郡, 충남 서산), 천령군(天靈郡, 경남 함양) 등의 태수를 맡으며 지방을 떠돌았다.
고운이 백성을 위하여 불교를 어떻게 이용하였는지 한 예만 들어 본다. 그가 천령군의 태수로 부임하니 군의 가운데를 흐르는 위천이 넘쳐 자주 홍수가 일어났다. 논과 밭이 잠기고 넘치는 물에 집과 가축과 사람이 떠내려가 죽는 등 참상이 연이어 일어났을 것이다.

그는 원효 화쟁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연기론에 따라 홍수를 막기 위하여 둑을 쌓는 대신 숲을 조성하고 숲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게 하였다. 씨가 스스로 공(空)하지만 자신을 없애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물이 자신을 소멸시켜 나무의 양분이 되고, 나무는 흙 속에 구멍을 뚫어 물을 품게 하였다. 일제 강점 시대에 벌채를 하여 하림(下林)은 사라져버리고 상림(上林)만 남았으나, 지금도 폭 200~300m, 길이 2㎞에 걸쳐 200년 된 갈참나무를 비롯하여 114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목이 원시림과 같은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서양의 이항대립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반대다. 그는 전혀 다른 연기적 세계관으로 상림을 만들어 1천여 년 동안 홍수를 막으면서도 물이 더욱 맑게 흐르게 하였다.

그는 〈대숭복사비명〉에서 “유가에서 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은 불가에서 삼보(三寶)를 소륭(紹隆)하는 것과 통한다. 하물며 옥호(玉毫)의 광채가 밝게 비치는 것과 금구(金口)의 게송이 흘러 전하는 것이 서토(西土)의 생령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방의 세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는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라 했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을 보면, 요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고조(高祖)로부터 현손에 이르기까지 구족이 화목해지자 백성들을 평등하게 다스렸고, 그러자 만방의 제후국도 화목하게 되었다 한다. 이는 불가에서 부처님과 불법과 스님을 드높이며 섬기는 것과 통한다. 부처님의 백호에서 진리의 빛이 뻗어 나와 시방세계를 비추고 부처님의 입에서 게송이 흘러나와 온 중생의 귀를 맑게 하면, 극락정토만이 아니라 이 땅의 백성까지 구제를 받는 것이다.

결단코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아마도 불사(佛事)를 융성하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라는 바는 어두운 곳이 생기지 않게 하고 길 잃은 중생들을 널리 깨우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법등(法燈)을 높이 매달아 병화(兵火)를 속히 해소해야 하겠다.

고운은 효공왕 12년(908)에 중알찬(重閼粲)으로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을 지내던 이재(異在)가 국가의 경사를 기원하고 병란을 없애기 위하여 남령(南嶺)에 팔각등루(八角燈樓)를 세웠기에 그 기문을 썼다. 고운이 이재를 빌려서 밝힌 대로, 진정한 충(忠)이란 임금에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거니와 아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올바른 충이란 불사를 융성하는 것이다. 임금은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니 중생을 널리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임금을 위하는 것이다. 임금은 나라를 대표하는 자이고 나라는 외침으로부터 안위가 존립의 전제이니 법등을 높이 달아 불법의 힘으로 병화를 없애는 것이다. 당시에는 호국삼부경이었던 《인왕경》 《법화경》 《금광명경》의 가르침에 따라 1백 명의 스님을 청해 1백 분의 부처님을 모셔놓고 공양을 하여 부처님의 힘으로 호국을 기원하였다. 적들에 맞서서 싸우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그들이 아예 외침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은 부처님의 영역이었다. 그도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이 땅 신라가 외침을 받지 않는 화평(和平)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유학 관료로서 인유입불(因儒入佛)의 태도를 견지하고 불교를 수용하였다. 하지만 그 지향점은 왕이나 나라가 아니라 백성에 있었다. 오로지 백성을 깨우쳐서 편안하게 하고 나아가 구제하자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러기에 왕과 귀족층을 위한 충효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중생을 널리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진정 임금을 위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4. 사상가로서 본 불교

주지하듯 고운은 유불선 삼교 모두에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모두가 하나로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바탕엔 인본주의가 있다.

사람이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도(道)이다. 사람이 도를 크게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도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 혹 존귀해진다면 사람도 자연히 존귀해지게 마련이다. 도를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의 덕을 높이는 일이다. 그렇다면 도야말로 존귀한 것이고, 덕이야말로 귀중한 것이라고 하겠다. 

고운은 도란 것이 모든 것 가운데 으뜸이자 궁극적 진리로 우리가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어떤 도(道)든 사람을 떠나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도를 따를수록 사람이 존엄해지며, 거꾸로 사람의 덕이 높아야 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라면 공맹의 도든, 붓다의 도든, 노장의 도든 서로 헤살을 놓지 않은 채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고운은 여러 군데서 삼교를 아울러서 인간과 진리에 대하여 말하였다. 

지금 불법이 장차 쇠하려 하면서 마군(魔軍)이 다투어 일어나고 있으니,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먼 것을 살펴보면서, 연기가 짙게 일어나 불타 없어질 것을 걱정해야 할 때이다. 도가(道家)의 교훈에 이르기를 “안정된 상태에서 미리 조심해야 지탱하기 쉽다(其安易持)”라고 하였고, 유가(儒家)의 글에 이르기를 “미리 경계하지 않고서 성공을 요구하는 것을 폭이라고 한다(不戒謂暴)”이라고 하였다. …… 마음을 씻어내는 것을 재(齋)라고 하고, 환란을 방지하는 것을 계(戒)라고 한다. 유자(儒者)도 이와 같이 하는데, 불자(佛者)가 그냥 있을 수 있으리오.

여기서 마군(魔軍)은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삼독(三毒)이고, 형이하학적으로 보면 삼독을 씻어내지 않은 채 물든 자들, 더 나아가 도적들일 것이다. 고운은 도적과 반란군이 들끓어 신라가 쇠멸하는 상황에서 왕족과 귀족은 물론 온 백성들이 탐욕을 씻고 미리 환란을 경계하고 예방을 하여 나라를 살릴 것을 불교 경전과 《논어》 《도덕경》을 인용하며 간곡하게 청하였다. 이러지 않는 것을 폭력이라 비판하였다. 하지만 결국 탐욕을 씻어내지 않고 미리 방비하지 않아 신라는 망하였다.

고운이 추구한 바람직한 인간상 또한 유교적이면서도 불교적이다. 그는 〈선안주원벽기(善安住院壁記)〉에서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라를 나눠 주더라도 하찮게 여기면서 신하 노릇도 하지 않고 벼슬도 하지 않는다. ……《주역(周易)》에서 “왕이나 제후를 섬기지 않고 자기의 지조를 지키는 일만을 고상하게 한다”라고 한 사람이요, “마음이 조용하고 안정된 사람이라야 바르고 곧으며 길하다”라고 한 사람이요, 정도를 밟고 가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겠다. 마음이 조용하고 안정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불교의 승려가 어쩌면 여기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는데, 이는 유가의 말을 빌려서 불가를 비유해 본 것이요, 옛것에 비추어서 지금의 일을 묘사해 본 것이다.

고운이 바라는 이상적 인간은 권력과 명예와 이익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이를 떠나서 언제나 자신에게 충실하고 마음이 곧으면서도 평안한 사람이다. 최치원이 사산비명(四山碑銘)에서 낭혜(朗慧) 화상이든, 진감(眞監) 선사든, 지증(智證) 대사든 왕의 요청을 거절하고 명예와 권력과 이익을 쭉정이처럼 여긴 사례를 도드라지게 기술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또한 그런 인간이 되고자 불혹의 한창나이에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였다. 그 후 아무도 그가 어찌 되었는지 과연 몇 살에 죽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하였다.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떠돌고 그의 구체적 행적이 없는 것은 그가 속세와 인연을 확실히 끊고 살았음을 입증한다. 청렴과 지절(志節)을 정체성의 바탕으로 삼는 선비도 이런 인간형에 가깝지만, 이에 꼭 부합하는 이들은 승려다. 친형 현준(賢俊)이 승려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가 이런 인간형을 추구하였기에 승려를 좋아했고 그 또한 그처럼 살았던 것이다.

고운은 교와 선을 모두 아우르고자 했다. 그는 “반야(般若)로 간과(干戈)를 삼고, 보리(菩提)로 갑주(甲冑)를 삼아” 진리에 이르고자 하였다. 그는 화엄과 유식에 모두 밝았다. 그는 “《법장화상전》에서 법장의 행적을 그의 저술인 《화엄삼매관》에서 설한 발심(發心) 가운데서 ‘직심(直心)’의 열 가지 의미에 맞추어 전기를 구성했다.” 간단하게나마 유식학자(唯識學者)인 원측(圓測)과 대현(大賢)에 대해 언급하였고, 〈무염화상비명〉에서 밤중에 노끈을 뱀으로 착각하는 사례를 들어 유식학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대해 말하였다.
고운은 중관과 유식을 화쟁한 원효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경덕왕의 입을 빌려서 “유(有)만 집착하거나 무(無)만 고수하면 단지 한쪽 면으로 치우쳐서 이해하기 십상이다. 진원(眞源)을 찾아가려고 한다면 경계가 끊어진 반야[般若之絶境]의 경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고운은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려면 언어를 넘어선 선적 깨달음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멀리 사물에서 취하려 하는 것보다는 그대 안의 부처를 인식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선은 “닦되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고, 증득하되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을 증득”하는 것이며, “고요히 있을 때는 0산처럼 서 있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처럼 응하며, 무위(無爲)의 유익함으로 다투지 않고도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최치원은 선을 긍정하면서도 언어도단(言語道斷)만을 선언하지 않았다. 그는 진여와 언어 사이에서 중도를 추구했다.

불교에서 심법(心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일컬을 수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 경지를 체득했다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멀리 오르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니, 언어로 비유를 취해서 말한들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겠는가. …… 그러고 보면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서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도 하겠다. …… 하지만 하늘이야 말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일반인들이야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의사를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궁극적인 진리는 말을 떠나 있다. 그래서 언어도단(言語道斷)과 불입문자(不立文字)를 선언하고 선정을 통해서만 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무지한 대중은 어찌 이에 이를 것인가. 그래서 찾은 대안이 인언견언(因言遣言)의 논리다. 달을 물으면 손가락을 이용하되 손가락을 떠나서 달을 보아야 하는 것처럼, 말을 방편으로 이용하되 말을 떠나는 것이다. 원효가 이를 계승하여 문어(文語) 대신 의어(義語)를 통하여 진여에 이르는 논리를 편 것처럼, 고운 또한 이를 따랐다.

고운은 돈오와 점수에서도 한 편에만 기울지 않았다. 그는 돈오와 점수 또한 어느 하나를 버릴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이라고 본다.

뜻이 삼귀(三歸)에 절실하였고 몸은 육도(六度)를 행하였다. 돈오(頓悟)를 하면 아침에는 범부(凡夫)였다가 저녁에는 성인(聖人)이 될 것이요, 점수(漸修)를 하면 소(小)가 가고 대(大)가 올 것인데, 이는 모두 자기를 꾸짖기를 원수처럼 하고 승려를 공경하기를 부처처럼 하는 데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부처와 불법과 스님에 귀의하고 육바라밀을 철저히 수행하면서 갑자기 깨달으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것이요, 점수를 하면 할수록 점점 작은 깨달음에서 큰 깨달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 돈오로 퍼뜩 깨달을 수도 있지만, 점수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며, 돈오든 점수든 육바라밀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다.

지금 누구나 개탄하듯, 그 뒤 한국 불교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외치며 교와 종을 종합한 통불교로 나아가면서도 선에 치우쳐 선방에만 머물며 중생구제를 등한히 하고, 돈점(頓漸)의 논쟁을 21세기까지 행하고, 화두에만 집착하여 계율과 육바라밀을 지키는 것을 방일하게 하는 바람에 승려들의 타락이 종단의 쇠락을 부르고 있다. 고운이 이미 9세기에 주장했던 것이 한국불교의 큰 흐름이 된 것을 보면 그가 대단한 선견지명을 지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그는 교와 선을 모두 종합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선을 통해서 궁극적 진리를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으며, 진여와 언어 사이에서 중도를 취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을 닦고 계율을 지키고 철저히 수행 정진을 하면서 돈오든 점수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5. 맺음말

최치원이 불교를 수용한 이유와 양상에 대해 시인, 유학 관료, 사상가라는 세 관점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시인으로서 최치원은 불교를 통하여 백성들이 마음속의 부처를 만나기를 원하였다. 자신도 부와 명예와 권력을 향한 탐욕으로 물든 서라벌을 떠나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고, 선을 빌려서 생략과 절제의 미학으로 반짝이고 언어를 통해 언어 너머의 세계를 드러내는 시를 쓸 수 있었다.

유학 관료로서 최치원은 인유입불(因儒入佛)의 태도를 견지하고 불교를 수용하였지만, 그 지향점은 왕이나 나라가 아니라 백성에 두어 그들을 널리 깨우쳐서 편안하게 하고 나아가 구제하고자 하였다.

사상가로서 최치원은 교와 선을 모두 종합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선을 통해서 궁극적 진리를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으며, 진여와 언어 사이에서 중도를 취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을 닦고 계율을 지키고 철저히 육바라밀을 지키며 수행 정진을 하면서 돈오든 점수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종단의 타락이 극에 달한 오늘의 시점에서 이미 9세기에 최치원이 깨달음의 전제조건으로 육바라밀을 지킬 것을 내세운 것은 오늘 한국의 불자들이 깊이 성찰할 지점이다. ■

 

 

이도흠 /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의상만해연구원 연학실장, 한국학연구소 소장, 《문학과 경계》 주간, 실상사 화엄학림 외래강사,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등 역임.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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