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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삶은 둘이 아니다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27호] 2006년 09월 10일 (일)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1. 들어가는 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역사는 약 150억 년 정도이다. 그런데 만일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조건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더라면, 우리는 현재 이 순간 반만년의 문화전통을 이어받은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란 구절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각자 지금 숨쉬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롭고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이를 체득하기 위한 좋은 실천 방안을 하나 소개하면, 지난 30여 년 동안 선(禪) 수행과 더불어 전문인(물리학자)으로서의 삶에 투신해 온 필자가 체험한, 대혜종고(大慧宗) 선사에 의해 확립된 간화선(看話禪) 수행법이다. 그의 저서 『서장(書狀)』1)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혜 선사는 승려들이 아닌, 주로 삶의 구체적인 현장 속을 누비던 사대부(오늘날의 전문인)들과의 서신교류, 즉 서신점검을 통해 간화선 수행 체계를 확립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재가에서 과연 삶과 조화를 이루며 지속적인 선수행이 가능한가를 독자적인 재가수행 주체의 하나인 선도회를 통한 필자의 선 수행 과정을 중심으로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2. 재가 수행 주체의 한 사례: 선도회를 중심으로

1) 종달 노사와 선도회 : 노사 입적 이전

-종달 노사
불교 언론·출판계에서는 이희익(李喜益: 1905~1990) 거사로, 재가선(在家禪)의 세계에서는 선도회 제1대 지도법사였던 고부헌(辜負軒) 의현종달(義賢宗達) 노사로 알려진 그는 1905년 2월 18일(음력) 함경남도 함흥에서 매우 엄격하셨던 만석꾼 이용우(李慂禹)의 12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나니와 상업학교와 법정대학 상과를 거쳐 일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귀국 후 『조선불교』의 편집인이었던 나까무라(中村)씨 밑에서 편집을 돕다가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까무라 선생은 ‘삼소(三笑)’라는 거사호까지 받은 참선의 고사(高師)였는데, 그에게 일요일만 되면 일본 제3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고승으로 남선승당 조실이셨던 스승 화산대의(華山大義) 노사의 법문을 들으러 가자고 자주 권유했다. 그러던 중 어느 일요일 그를 따라 나섰다. 이 날 그는 입실점검을 포함한 질서정연한 참선법회를 목격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즉시 나까무라 선생에게 별원에 들어가서 노사 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며칠 후 노사의 승낙을 얻자 그는 아무 미련 없이 삭발하였으며, 3년 후 마침내 비구승이 되었다. 승적에도 입적했고 불명(佛名)은 종달(宗達), 도호(道號)는 의현(義賢)이었다. 그는 노사 문하에서 조석으로 입실한 결과 11년만에 인가를 받고 일본 임제종 최대파인 묘심사파(妙心寺派)의 한국개교사(韓國開敎師)라는 사령장을 받았다.2)

그런데 종달 노사께서는 사가(師家)의 자격을 인정받았으나 스스로 개교의 일선에 나서기는 아직 이르다고 겸허하게 생각하셔서 여러 다른 노사들을 찾아 탁마를 하면서 9년간 오후(悟後) 수행을 계속하셨다. 그러다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재가에 머무시면서 해인대학(지금의 경남대학) 교수, 동국대 강사, 위인전 출판, 월간 『대한불교』 발간, 법시사 참여 및 최초의 한국 선전문지인 월간 『선문화』 발간 등 교육계 종사 및 불교 언론 잡지분야의 기초를 다지는 일들을 지속해 오셨다. 이처럼 여러 가지 선불교 관련 일들에 종사해 왔으나 노사의 전공은 선이었기 때문에 자나 깨나 참선을 지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잊어본 적이 없으셨다.

-선도회의 성립
그러던 어느 날 선도회 첫 번째 제자가 되는 이창훈이란 청년이 좌선을 지도해 달라고 찾아왔는데 신심이 견고한 청년으로 여겨져 ‘무(無)’자(字) 화두를 참구해 보라고 하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 전 이른 아침에 찾아와 입실을 하다 6개월쯤 될 무렵 드디어 ‘무’자 공안을 투과했는데, 이 사건은 노사께서 일반인에게 참선을 지도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1965년 재가수행 모임인 선도회(禪道會)를 조직하시고, 효봉 선사의 후원 아래 조계사 법당을 빌어서 노사로서 당당히 재가수행자들을 위한 참선 지도를 시작하셨다. 그런데 노사께서 선도회를 조직하시고, 문하생들을 입실 지도하기 시작하여 1990년 입적하실 때까지 25년이란 세월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재가수행자들의 참선 모임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로 인해 조계사 법당에서부터 출발해 장소를 성약사, 백우정사, 불심원, 다시 백우정사, 백운암, 원각회 등으로 옮겨 다니며 선도회 참선 법회를 계속하시다, 결국은 입적하시기 전까지 목동 노사의 자택에서 참선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한국 불교계에 ‘무문관’을 새롭게 제창하신 일과 더불어 이 일이 노사의 일생을 통해 가장 핵심적이며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확신한다.

2) 선도회의 핵심 수행 가풍

-귀의삼사(歸依三師 : 세 분 스승께 귀의하기)
여기서 세 분은 ‘부처[佛]’이신 ‘석가세존(釋迦世尊)’과 ‘진리[法]’의 정수를 담고 있는 공안집 『무문관(無門關)』을 저술한 남송 시대의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 그리고 재가의 간화선풍 진작에 온몸을 던지시며 선도회 문하생들의 입실지도를 하셨던 ‘스승[僧]’ 종달 이희익 노사이다. 그 결과 노사 생존시 ‘무문관’을 끝까지 투과해 법사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필자를 포함해 열 명에 이르면서 선도회는 입실점검체계를 온전히 갖추고 안정된 법사 양성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며 재가의 간화선 입실 점검의 대중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입실점검(入室點檢 : 정기적으로 입실해 점검받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선도회의 화두 점검 체계는 세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심자를 위한 첫 번째 과정은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이란 점검 과정이다.

여기에는 ‘외짝손소리[隻手聲]’ 등 초심자들이 붙들고 씨름하기 쉬운 20여 개 정도의 화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입실시 스승을 경외하던 마음속 초긴장 상태는 사라지며, 법호(法號)를 받고 ‘무문관’에 있는 48개의 화두들을 본격적으로 점검받는 두 번째 과정으로 들어간다. 끝으로 『벽암록』을 포함해 조사어록에 있는 화두들을 가지고 점검을 받는 세 번째 마무리 과정이 있다. 이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자들을 입실 지도할 수 있는 사가(師家)로서의 역량을 나름대로 갖추게 되는 것이다.

-좌일주칠(坐一走七: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 하루를 부리기)
‘좌일주칠’이란 선어(禪語)의 뜻을 유추해 보면 이러하다. 우리가 잠자는 시간을 충분히 잡아도 8시간 정도이므로 깨어 있는 시간은 16시간 정도이다. 따라서 이 깨어 있는 시간의 1/8은 2시간이므로 2시간 정도 좌선하고 7/8인 나머지 14시간은 ‘주어진 하루 일과에 100% 뛰어든다[走]’는 뜻이다.

필자의 경우 ‘하루 향 한 대 타는 시간 앉지 않으면 한 끼 굶는다’라는 가풍을 한 평생 선양한 종달 노사 문하에서 매주 주말마다 입실점검과 더불어 매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루의 계획 및 1시간 좌선’(일상의 원동력),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직전 ‘하루의 반성 및 1시간 좌선’(숙면의 원동력)을 통한 간화선 수행을 지속한 결과, 10년 정도 지나면서부터 가슴에 맺혀 있던 모든 의심이 일시에 사라지고,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坐一走七]’ 늘 있는 그 자리에서 필자가 속한 공동체(가정, 직장, 선도회)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함께’ 주어진 일에 차별적인 분별심 없이 온전히 투신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불교의 진정한 포교는 출가와 재가를 불문하고 수행자들이 각자의 깊은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수처작주(隨處作主)’하며 있는 그 자리에서 맡은 바 본직을 포함해 하루 일과3)에 철저할 때 ‘걸음걸음 마다 청풍이 일어[步步淸風起]’ 주위 사람들을 진심으로 감화시킬 수 있으리라! 참고로 운서주굉 선사께서 말년에 저술하신 『죽창수필』4) 에 출가와 재가에 관한 경책의 글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출가의 사료간(四料簡): 집에 있으면서 출가한자[在家出家], 출가했으면서 집에 있는자[出家在家], 집에 있으면서 집에 있는 자[在家在家], 출가했으면서 출가한 자[出家出家], 이를 출가 사료간이라 부른다.

세속에 처하여 부모와 처자를 두고 살면서, 마음은 항상 도에 머물러 세진에 물들지 않는 자가 재가출가자요, 가람에 처하여 부모와 처자의 번거로움이 없으면서도 명리에 골몰하여 속인과 다름없는 자가 출가재가자며, 세속에 처하여 종신토록 이 속에 묶여 한 번도 해탈을 구할 생각을 내지 않는 자를 재가재가자라 하며, 가람에 처하여 종신토록 정진하여 한 생각도 퇴타함이 없는 자가 출가출가자다.

그러나 출가출가자는 덕이 훌륭한 자라 논외로 하거니와, 출가재가자보다는 차라리 재가재가자가 낫다고 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가사를 입고 사람 몸 잃는 것이 못난 중에 더욱 못난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족의 생계는 배우자에게 맡기고 하루에 열 시간 이상씩 참선을 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다니거나 자기의 본직(本職)은 등한시하고 틈만 나면 이 절 저 절, 이 스승 저 스승을 쫓아다니는 얼빠진 분들은 결코 ‘집에 있으면서 출가한 자’가 아니다.

3) 필자의 선도회 입문

-독서를 통한 불교와의 만남
돌이켜보면 맨 처음 대학시험을 칠 당시 필자가 대학에 가려는 목적은 그저 막연하게 학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서강대학교에 입학한 후 필자의 첫 학기는 거의 고등학교와 비슷하게 시킴을 당하는 생활이었다. 이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학문과 삶에 관한 필자의 가치관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차츰차츰 삶에 관해 강한 회의에 빠져들어 가기 시작해 거의 1년간 진통을 겪었다.

2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그 당시 필자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큰 책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다 읽고 나면 또 다른 책을 사서보곤 하는 방식으로 책을 접했다. 이때의 심정은 ‘물속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것’과 똑같은 상태였다.

그러다 1975년 7월 27일 종로서적에서 석가가 활약하던 초기 불교시대에 관한 『숫타니파아타』5) 란 책을 대하게 되었다. 이 책을 차분히 읽어 가면서 들뜬 상태에서 헤매던 방황기도 서서히 막을 내려갔다. 인간답게 살아간 석가의 물 흐르는 듯한 가르침 속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뚜렷하게 찾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잘못된 교육을 받아 옴으로써 갖게 되었던 분석적인 사고방식을 내던져 버리고 석가의 길을 따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이른바 직관하는 방법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불교학생회 선배를 통한 노사와의 만남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서강대 불교학생모임인 혜명반(慧命班)에 발을 들여놓았다. 불교학생모임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다. 몇 번 모임에 참가하다 1975년 10월 18일(토요일) 선배 한 분이 일반인을 위한 선(禪) 모임에 가자고 해서 무작정 따라나섰다.

법당 맨 앞쪽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시고 그 뒤로 일반인들이 십여 분 앉아 계셨다. 비어 있는 맨 뒷자리에 방석을 하나 깔고 그냥 앉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맨 앞쪽의 할아버지께서 내게 다가오시더니 허리와 어깨를 손으로 짚으시며 자세를 바로잡아 주셨다. 그리고 얼마 있다 죽비소리가 나서 눈을 떠 보니 그 할아버지께서 옆방으로 들어가시고 뒤를 이어 앞줄부터 한 분씩 차례차례 그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시는데 들어갈 때 이 분들의 진지하면서도 초긴장 상태의 모습이 필자의 마음을 통째로 사로잡았다. 맨 마지막으로 필자도 초긴장하면서 그 방으로 들어가 정면에서 할아버지를 첫 대면했는데, 손자를 대하시는 듯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필자의 긴장 상태를 일시에 녹여 버렸다. 이렇게 해서 노사 문하에서의 선 수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짧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값진 방황기를 끝내고 참선 수행과 더불어 삶과 학문에 관한 뚜렷한 가치관을 확립해 가는 동시에 열심히 학업에도 열중해 학점이 짜기로 소문난 서강대에서 3학년 두 학기를 모두 4.00만점에 4.00을 받았다. 이는 물론 필자가 남보다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참선으로 하루를 열고 밤 10시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참선으로 하루를 닫는 대학생으로서의 일상사에 전념하려는 치열한 선 수행의 결과라 확신한다.

물론 선 수행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선도회에 입문해 8개월쯤 지날 무렵 학교 공부가 바빠지기도 하고 입실해서 화두의 경계를 제시하는 것마다 퇴짜를 맞고 쫓겨나오게 되자 더 제시할 것도 없어서 선도회 모임에 한동안 참석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서의 수행은 혼자서 꾸준히 계속하였다.

그런데 ‘줄탁동시(啄同時)’라는 선어(禪語)처럼 묘한 일이 벌어졌다. 일 년쯤 되는 어느 날 아침 참선하며 화두를 들다 마음이 밝아지는 체험을 했는데 노사께서 마침 그날 저녁 “요즘은 왜 선모임에 나오지 않느냐?” 하시며 집으로 전화를 주셨다. 필자가 전화를 받은 그 주 주말이 되자마자 노사께 입실해 집안이 떠나갈 듯이 큰 소리를 내며 경계를 제시하니 환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처음 왔을 때는 모기만한 소리를 내더니 언제 그런 힘을 키웠냐고 매우 기뻐하셨다. 필자 또한 이때의 기쁨과 노사의 환한 미소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대학원 시절과 결혼
참선을 통해 삶의 참뜻과 학문을 하는 뚜렷한 목적을 바르게 세운 뒤 1978년 2월 학부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하였고 1980년 2월 석사 과정을 마치면서 필자는 워낙 눈이 나빠서 신체검사에서 병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바로 박사 과정에 입학을 하였다.

1982년 1월에 국제학술지인 미국물리학회지에 처음으로 연구 논문을 게재하기 시작하면서 국제 학술지에 모두 6편의 논문을 게재하고 무난히 1983년 2월 졸업하였다.

참고로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필자의 이런 학문적인 성취는 필자가 특별히 똑똑해서라기보다는 참선을 통해 길러진 아랫배의 힘을 가지고 연구를 하다 부딪치는 어려운 문제들을 화두를 뚫어내듯이 투과하였으며 또한 참선을 통해 길러진 부드러운 심성(心性)으로 인해 학문하는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한 개성이 강한 여러 분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기에 여러 사람들과 지속적인 공동 연구가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라 확신한다.
한편 박사 과정 3학기 째였던 1981년 5월, 집안끼리 아는 분의 소개로 성심여대 불문과를 갓 졸업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만난 첫날 투명한 눈빛에 반해 5개월쯤 사귀다 1981년 10월 9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막상 결혼 생활을 시작하다 보니 서로 소년, 소녀로서 만날 때와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바뀌었다. 물론 근본 원인은 20여 년 이상을 서로 다른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때 그동안 행했던 참선 수행의 힘이 그 위력을 잘 발휘해 주었다. 아내와 다툴 일이 있으면 서재에서 다리를 틀고 앉아 ‘무’자 화두와 한 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면 다시 본래의 무심한 상태로 되돌아와 아내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려고 애를 썼고 아내도 그런 필자의 노력에 호응해 무난히 넘어갔기 때문에 결혼 후 1년쯤 지날 무렵부터는 별로 다툴 일이 없어져 버렸다.

-강원대학교 재직 시절과 노사의 인가
1983년 2월 서강대에서 서강대 물리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의 틀을 만들어가면서 박사 1호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1983년 3월부터 강원대학교 물리학과에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필자는 이 당시 아직 종달 노사 밑에서 ‘무문관’에 있는 화두들을 들고 참선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강원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또한 매주 서울에 종달 노사께 입실 지도를 받으러 왔다가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세미나에도 꾸준히 참석할 수 있어서 최신 연구의 흐름도 계속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위를 받은 후에도 공동 연구를 통해 국제 학술지에 연구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다 뉴욕 주립대 연구원으로 떠나기 직전인 1987년 9월 5일 노사의 인가(印可)가 있었다. 입문 12년만의 일이였다. 사실 노사의 인가는 이제 혼자서도 잘 제자도 지도할 수 있는 동시에 스승의 도움 없이도 수행을 제대로 해 갈 수 있다는 뜻이지 석가세존과 같은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뉴욕 주립대 연구원 시절
1987년 9월부터 1988년 8월까지 미국 뉴욕 주립대 부설 이론물리연구소의 연구원으로 1년간 연구 활동을 하였다. 이때 ‘초중력이론’ 분야의 창시자였던 피터 반 니엔호이젠 교수를 2년간 지도교수로 모셨었던 한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인 일화를 들었다.

이 유학생이 2년간 지도교수의 혹독한 단련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분야로 전공을 바꾸었는데 하루는 교정을 산책하다 반 니엔호이젠 교수를 만났었는데, “요즈음 어떻게 지내냐?”고 묻기에 이 유학생이 무심코 “지금 지도교수는 당신처럼 엄격하게 밀어붙이지 않아 행복합니다”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러면 왜 자네가 지도교수를 밀어붙이지 않느냐?(Why don’t you push him?)”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일화를 통해 ‘지도교수와 박사과정 학생이 꾸준히 좋은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상대방을 밀어붙여야 한다’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고 이 일화는 선가에서도 더욱 빛을 발하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스승에게 받은 화두를 제대로 붙들기 위해서는, 즉 화두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투과하려는 처절한 노력으로 온몸이 의심덩어리가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스승이 부르지 않더라도 조실 방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쳐들어가 얻어터지고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부단히 입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재 선도회 광주 지부 사가(師家)인 혜정(慧頂) 거사(조선대 미대 김인경 교수)는 주말에 비행기를 이용해 노사께 입실점검(길어야 1분)을 받고 광주 집으로 돌아가기를 수년 간 지속한 치열한 수행 끝에 인가를 받았다.

4) 선도회의 전개 : 노사 입적 이후

1990년 노사 입적 이후 10명의 법사들과 함께 필자가 제2대 지도법사를 맡으면서 선도회는 확고한 입실 점검 체계를 바탕으로 종교와 종파를 떠나 대학생, 예술가, 종교인, 교수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약 80여 명의 회원들을 입실 지도하며 지속적으로 거사와 대자 및 법사들을 배출하고 있는 전국(목동, 정릉, 광주, 서강1, 인천, 성남, 잠실, 독립문, 퇴계원, 외국인 대상 모임인 서강2 등의 모임으로 성장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노사 입적 이후의 선도회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숭산 노사와의 만남
종달 노사의 뒤를 이어 선도회의 지도법사로서 참선 모임을 지도하던 중 필자의 경계를 확인 받아 볼 필요성을 느껴 1991년 미국에 계신 숭산(崇山) 노사께 편지를 드렸다. 한동안 편지를 잊고 있었는데 노사께서 ‘서울국제선원’ 건립 관계로 화계사에 나오셔서 연락처와 함께 필자에게 4쪽 분량의 편지를 보내셨다.

즉시 제자인 무심 스님과 연락을 취해 숭산 노사를 찾아뵙고 입실 지도를 청했다. 아침 8시부터 거의 2시간 동안 독대(獨對)를 했다. 필자의 소개를 간단히 드리고 본격적으로 화두에 관한 문답을 나누었다. 노사께서는 화두들에 관한 필자의 제시에 관해 아주 자상하게 하나하나 대해 주셨다.

특히 ‘무문관’ 제14칙의 ‘남전참묘(南泉斬猫)’에 관한 문답을 통해 숭산 노사의 역동적인 가풍을 낱낱이 살필 수 있었던 것은 필자의 선 수행에 또 하나의 새로운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리고는 맨 마지막에 이제 바탕은 잘 길러졌으니 보다 세밀한데 까지 철저히 살피라는 조언을 주셨다. 필자는 이날 이후 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입실 지도를 하게 되었으며 수행의 깊이도 훨씬 깊어진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두 문을 동시에 투과하다』 저술
필자가 노사 입적 후 선도회의 지도법사가 되어 입실 지도를 하다 보니 초심자들을 위해 무언가 안내 책자가 필요한 것 같아 작은 책자를 하나 만들었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1996년 11월 새롭게 책으로 출판6) 하였고, 이 책을 출간한 다음 즉시 숭산 노사께 보내드렸더니 한 번 또 만나자고 직접 전화를 주셔서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1시간 동안 두 번째 독대를 했다.

이때 『벽암록』 제3칙의 ‘마대사불안(馬大師不安)’에 대한 필자의 점검 요청에 자상히 응해 주신 것은 필자에게 있어서 또 한 번의 큰 수확이었다. 한편 저술 직후 서옹 노사의 법제자이셨던 종성 노사께서도 친히 전화를 걸어 격려해 주시고, 손수 편찬하셨던 서옹노사어록 I, II, 선필(禪筆) 등도 보내주셔서 주석하시던 임제선원을 답방하기도 했다.

-무문관 제창을 다시 시작하다
필자가 1975년 10월 18일 불심원에서 열리던 선도회 참선법회에 처음 참가했을 때 종달 노사께서는 1974년 출판하신 『무문관』7)을 교재로 매주 화두 1칙씩 제창하고 계셨다. 그러다 여기저기 법회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안타깝게도 장소 사정상 무문관 제창이 중단되었다. 늘 ‘이 전통을 살려야 하는데…’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선도회가 어느 정도 틀이 잡힌 1997년 9월부터 1칙씩 다시 제창하기 시작했었다. 어느덧 삼 년의 세월이 흐른 2000년 8월 27일 첫 번째 무문관 제창을 마쳤다. 한편 이 제창을 통해 단지 선도회 문하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필자의 사가(師家)로서의 지속적인 역할의 중요성과 수행자로서의 공부가 그 깊이를 더해 감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서강대에서 선(禪) 강좌를 열다
1997년 9월 서강대학교 수도자대학원에서 ‘선정사상사(禪定思想史)’ 강좌를 열었다. 이때 이 강좌의 준비를 통해 그동안 필자가 선 수행자의 입장에서 조각조각 알고 있던 선정사상사를 한 꼬치에 꿸 수 있는 매우 유익한 계기도 되었다. 한편 1999년 3월 학부 교양강좌로 ‘참선’이란 과목이 개설되면서 학부생들에게 매주 기본적인 선정사상사 1시간 강의 및 좌선 실수를 1시간 지도했는데, 이 강좌는 매년 봄 학기마다 열리고 있다. 참고로 이 선 강좌들이 인연이 되어 수강생들 가운데 몇 사람은 선도회에 입문해 선 수행을 지금껏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2006년 1학기에는 인문사회계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자연과 인간 : 자연법칙과 인생’이라는 교양강좌를 통해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참선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강의를 시작했다.

-법사(法師) 배출 전통을 다시 잇다
종달 노사 입적 이후 선도회 제2대 지도법사의 자격으로, 노사께 입문해 무문관 과정을 반 정도 진행하시던 혜봉(慧峰) 거사와 입문은 종달 노사께 했지만 무문관 과정을 처음부터 필자 밑에서 수행하신 혜연(慧淵) 대자(퇴계원 사가) 두 분의 무문관 투과를 처음으로 인가하고 선도회 사가로 위촉하였다.

그 후 혜운(慧雲) 거사와 지천(智川) 거사께서 두 번째로 무문관을 투과했는데, 혜운 법사께서는 성남에서(직장을 옮긴 관계로 요즈음은 쉬고 있음), 지천 법사께서는 인천에서 선도회 지부 모임을 잘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2005년 3월부터는 무문관 점검을 마치신 천흠(天欽) 거사(수학과 박성호 교수)와 천보(天堡) 거사(화공생명공학과 박형상 교수)께서 필자를 대신해 서강 견주굴 모임의 사가직을 활발히 수행해 오고 있으며, 대신 필자는 2005년 3월부터 잠실 지부 모임을 새롭게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무문관’ 점검을 마치고 사가직을 부여 받은 천달(天達) 서명원 신부(종교학과 교수)께서는 2005년 9월부터 외국인을 위한 서강 영어 모임 법사로 수고해오고 있다.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 하루를 부리네』 출간
이 책은8) 선도회 문하생들이 재가선풍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종달 노사의 입적 10주기를 기리기 위해 편찬하였다. 여기에는 종달 노사의 삶의 흔적과 그 속에 남겨진 사상을 더듬고 있으며, 또한 노사께서 설립한 재가자들의 선수행 모임인 ‘선도회’의 활동 과정을 담고 있는데, 이를 통해 참선 수행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특히 제3부 ‘인생의 계단’은 노사의 자전 기록으로 자신의 성장부터 선도회를 이끌기까지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 통해 지난했던 재가 선의 확립과정은 물론, 개인적으로 차마 남들에게 드러내기 싫었음직한 사실들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는 노사의 진솔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

3. 마치는 글 : 선 속에 약동하는 인생

필자가 체험한 바로는 간화선 수행법은 간결할 뿐만 아니라 뜻만 있다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승만 제대로 만나면 간화선만큼 쉬운 수행이 없으며,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을 누벼야 하는 재가자(전문직 종사자)들에게 특히 효과적인 수행법이다. 향 한 대 타는 시간 동안(40분 정도) 어떤 잡념도 없이 철저히 수식관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대개 6개월이면 충분), 누구나 화두 공부에 온전하게 몰두할 수 있게 되며, 입실점검을 통한 화두참구로 길러진 집중력은 번잡한 생활 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각자 맡은 바 본업을 포함한 하루 일과에 무심(無心)히 몰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실제로 필자는 1987년 9월 종달 노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1990년 노사 입적 이후 맡게 된 선도회 법사직과 본업인 교수직이 둘이 아님을 온몸으로 체득하면서, 즉 하루 24시간이 선정 속의 삶이라는 것을 철저히 자각하게 되면서, 늘 있는 그 자리에서 필자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학교의 경우는 교수, 연구원 및 대학원생, 학교 밖의 경우는 선도회 문하생 및 가정에서는 가족)과 ‘더불어 함께’ 주어진 일(주중 근무시간에는 교육과 연구, 근무시간외 및 주말 자유 시간에는 참선지도, 가장으로서 할 일 등)에 거의 100%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별로 학자적인 소양은 없지만 좌선을 통해 길러진 아랫배의 힘을 바탕으로, 동료교수, 연구원 및 대학원생들과의 원만한 공동연구를 통해 교수직에 재직해오고 있는 지난 24년 동안, SCI급 국외 저명 학술지에 120여 편의 논문을 게재해 오고 있으며, 아울러 박사학위 수여 제자도 12명 배출했다. 또한 노사 입적 이후 선도회의 지도법사로서 문하생들을 꾸준히 지도해온 결과 간화선 수행을 지도할 수 있는 필자와 똑같은 자격을 갖춘 사가(師家)도 6명 배출했으며, 결혼 24년 동안 지금껏 권태기라는 것을 모르고 아내와 함께 가정(평등한 부부 수행공동체)도 원만히 잘 유지해 오고 있다.

끝으로 지금까지 선도회 종달 노사 문하에서의 개인적인 선적 체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왔는데, 이 속에 담긴 필자의 삶의 태도가 비록 필자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으나 결코 모두에게 최상의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천차유로(天差有路) 투득차관(透得此關) 건곤독보(乾坤獨步)’란 선어처럼 대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바르게 수행하는 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또한 가까운 주위를 잘 둘러보면 각자에게 맞는 좋은 수행법과 좋은 스승도 만날 수 있다.

부디 여러분들도 나름대로의 최선의 선택을 통해 모두 확고부동한 인생관을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도 수행과 삶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 자리에서 각자가 하고자 하는 하루 일과에 철저히 투신하며 자리이타(自利利他) 및 자각각타(自覺覺他) 하시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바이다.

박영재
선도회 법사 /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서강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원대 교수, 뉴욕 주립대 이론물리연구소 연구원 등을 역임했으며, 1989년 9월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금까지 120여 편의 학술논문을 SCI 국외학술지에 게재하였다. 1975년 종달 노사 문하에 입문하여 1987년 인가를 받았으며, 1990년 노사 입적 이후 지금까지 선도회 제2대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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