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하는 열린논단(11월 19일, 불교평론 세미나실)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글머리에

그동안 필자는 출가수행자가 승가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적 보장 문제에 관하여 몇 차례 글을 쓴 적이 있다. 주로 대한불교 조계종단(이하 조계종)을 향하여 발표한 것이었는데, 초기에는 개신교와 천주교 등 타 종교계나 타 불교종단들의 경우를 참조·비교하며 조계종이 분발하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사실 개신교나 천주교의 성직자 처우와 불교 수행자에 대한 그것을 비교한다는 것은, 종교집단의 사회적 체면이랄까 드러나는 겉모양새에 신경을 써서 너무 단순한 발상이었던 것 같다. 각각의 종교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이 서로 다르고, 종단의 역사와 전통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구성원에 대한 처우를 엇비슷하게 비교하던 논의 방식은 다시 고쳐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출가자의 경우, 출가의 목적이 근본적으로 수행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기초적 보장이라는 것은 사찰에서 수행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최소한도로 제공한다는 의미라 하겠다. 누구나 알다시피 전통적으로 출가자 생활은 삼의일발(三衣一鉢)로 상징되는 극소한의 소유와 소비여야 하기 때문에 ‘복지’라는 용어가 어쩌면 거북하게 들리기도 할 것이다. 간혹 어떤 스님들께서 ‘출가자로서 수행하다가 언제든지 죽게 되면,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복지를 말하는가’라며, 오히려 냉담한 태도를 보이시는 그 배경과도 상통하는 정서가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자들과 불교종단이 출가자 생활의 여건을 염려해야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재가자가 출가자의 수행생활을 지원해야 한다는 경장과 율장의 원칙적인 가르침에 공감하고 따를 뿐만 아니라, 현행 조계종법을 근거로 하더라도 승려복지 시행의 주체와 시행을 위한 방법론에서 재가자의 책임 부분이 엄연하게 있음을 중점적으로 논의하려는 것이다.
출가자란 혈육 공동체인 본가(本家)를 벗어나 형식상 집 없는 사람이 되기는 하지만, 불교수행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승가의 일원이 되어서 공동체적 생활방식으로 지고지선(至高至善)의 가치를 성취하려는 사람이다. 자칫 이기적일 수 있는 혈연(血緣) 가족의 작은 경계를 넘어서, 법연(法緣)의 승가공동체에 귀의함으로써 훨씬 더 큰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그와 같이 경계 너머 확장된 생애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출가중(出家衆)인 것이다. 그러므로 승가대중의 일원인 재가중(在家衆)이야말로 출가중의 토대이고 외호자라고 본다.
재가자는 출가수행의 외호자

잘 알다시피 한역 《우바새계경》이나 《선생경》 《육방예경》 팔리어본 《교계 싱갈라경》 등은 재가불자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재가자의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방침들이 제시된 가운데 특히 스승과 사문을 예우하는 가르침이 명백하게 나와 있다. 예컨대 《우바새계경》 권3 〈공양삼보품(供養三寶品)〉에 의하면, 복전에 세 가지가 있는데 보은전(報恩田), 공덕전(功德田), 빈궁전(貧窮田)이 그것이다.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면 보은전, 공덕전, 빈궁전이 된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이미 우바새계를 받았으면, 또 어떻게 삼보께 공양하나이까?”
선남자여, 세간에 복 밭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보은전(報恩田)이요, 두 번째는 공덕전(功德田)이며, 세 번째는 빈궁전(貧窮田)이니라. 보은전이란 이른바 부모와 스승과 윗사람과 화상(和尙)이요, 공덕전이란 난법(煖法)을 얻는 데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에 이른 이까지이며, 빈궁전이란 온갖 궁하고 괴로운 사람인데, 여래 세존은 보은전과 공덕전이 되고, 법도 역시 이 두 가지 밭이 되며, 승려들은 보은전도 공덕전도 빈궁전도 되느니라. 이러한 인연이므로 보살이 이미 우바새계를 받았으면,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삼보께 공양하여야 하느니라.

같은 경의 〈수계품(受戒品)〉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재가자가 우바새계를 받고자 할 때부터 원칙적으로 승보공양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

“재가보살은 어떻게 우바새계(優婆塞戒)를 받을 수 있나이까?”
선남자여, 재가보살이 만약 우바새계를 받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차례로 동방과 남방과 서방과 북방과 하방과 상방에 공양하여야 하느니라…… 남방이란 곧 스승이니 만약 사람이 능히 스승에게 의복·음식·침구·탕약을 공양하고 존중, 찬탄, 공경, 예배하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면서 착한 가르침을 받아 행하면 이 사람은 곧 남방을 공양하는 것이니라…… 북방이란 곧 선지식(善知識)을 말하는 것이니, 만약 사람이 착한 벗에게 함께 베풀되 힘닿는 대로 주고, 공경하고 부드럽게 말하며 예배 찬탄하면 이 사람은 능히 북방을 공양하는 것이니라. 이 선지식은 다시 네 가지 일로써 다시 갚으니, 첫 번째는 선법을 닦게 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악한 법을 여의게 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공포가 있을 때 능히 구원하여 풀어주는 것이요. 네 번째는 방일할 때에 능히 제거하여 버리게 하는 것이다…… 중략 ……
선남자여, 만약 우바새가 계를 받고 나서 능히 부모와 스승을 공양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바새로서 실의죄(失意罪)를 얻는 것이며…… 만약 우바새가 계를 받고 나서 달마다 6일 동안에 팔계를 지키고 삼보께 공양하지 못하면, 이는 우바새로서 실의죄를 얻는 것이며…… 만약 우바새가 계를 받고 나서, 승가에 음식을 돌릴 때, 편파적으로 스승만을 위하여 특별히 좋은 것으로 주면 이는 우바새로서 실의죄를 얻는 것이며, ……만약 우바새가 계를 받고 나서 악한 마음으로 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이는 우바새로서 실의죄를 얻는 것이며…… 만약 우바새가 계를 받고 나서 구걸하는 자를 보고도 조금도 주지 않아 빈손으로 가게 한다면, 이는 우바새로서 실의죄를 얻는 것이며…… 만약 우바새가 계를 받고 나서, 비구·비구니·장로 등 법랍이 높은 분들과, 모든 우바새·우바이들을 보고도 일어나서 맞이하고 예배하고 문안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바새로서 실의죄를 얻는 것이며, 타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를 청정하게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불교신자로서 계를 받았다고 하면,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가 구체적으로 이행되어야 할 덕목임이 분명한 가운데 ‘삼보공양이 필수’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그에 관련되는 전거(典據)를 다 열거할 수야 없겠지만, 단적으로 재가자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복을 얻는 방법으로서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것을 적시하는 경전들도 많이 있다.
즉, 비구들에게 방사(房舍)와 당각(堂閣), 방사 안에서 사용할 침구와 의복·음식을 보시하고, 또한 동산지기를 보내서 비구들이 도움을 받게 하며, 일기가 불순할 때는 동산으로 나아가 보시를 더 하며, 공양을 마친 뒤에 날씨가 불순하여 의복이 젖을까 비구들이 걱정하지 않게 하고, 밤낮으로 편안히 선정에 들 수 있도록 해 주는 재시(財施)를 가르치고 있다. 한편 출세간의 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어느 곳에서 유행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고,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청정한 마음으로 찾아뵙고 예경하고 공양하고, 삼보에 스스로 귀의(自歸)하는 법을 받고 금계(禁戒)를 받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불교는 통상의 기복(祈福)이 전부가 아니며 기복이 불자 신행의 궁극적인 목적도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팔리어 경전 《꾸따단따경(究羅檀頭經)》에 의하면, 사람들이 복을 비는 제사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지내서 그 과보와 이익이 크게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는 계를 갖춘 출가자를 위해 보시하는 것이 더 많은 과보와 이익을 주며, 사방승가를 위해서 승원을 짓는 것과, 스스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과 깨끗한 믿음으로 학습 계목(戒目)을 받아 지니는 것과 계정혜(戒定慧)를 구족하는 것이 더 많은 과보와 이익을 주는 제사라고 설명한다. 비록 경전에 ‘기복’과 ‘제사’라는 표현을 쓰기는 하지만 그 복덕이 오직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내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불자로서 올바른 신행을 하면 그 업보로 좋은 결과[복덕]가 생기는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인과법을 가르치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점은, 위와 같은 부처님 교설이 재가자로 하여금 출가중에게 무조건 공양을 올리라고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어떻게’ 공양을 바쳐야 하는지, 공양을 받는 그 상대방 수행자의 ‘자세와 자격’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울러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잡아함 권4 《생문경(生聞經)》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계를 지키는 사람에게 하는 보시와 계를 범한 사람에게 하는 보시는 같지 않다…… (사람이 제각각 그 태생이 달라도) 다만 깨끗한 계를 지키고 무거운 짐인 번뇌를 떠나 순일하게 범행을 닦기만 한다면 그는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요, 바로 이 세간의 선서(善逝)이니 그에게 보시하면 큰 과보 얻으리…… 어리석은 사람으로 지혜가 없고 일찍이 바른 법을 들은 적이 없는 그런 자에게 보시하면, 큰 과보가 없나니 착한 벗을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이라.

이어서 《걸식경(乞食經)》에 의하면, “이른바 비구란 걸식하기 때문만은 아니네. 세속의 법을 받아 가지면서 어떻게 비구라 이름하리요. 공덕과 허물을 모두 떠나 바른 행을 닦고 그 마음에 두려움 없으면 그를 곧 비구라 부르느니.”라고 가르친다. 잡아함 권18 《정구경(淨口經)》에서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문 바라문으로서 일에 밝은 사람[明於事者]이고 횡법에도 밝아[明於橫法] 삿된 방법으로 의복과 음식을 구하는 사람이면, 그와 같은 사문 바라문은 하구식(下口食) 하는 사람입니다. 사문 바라문으로서 별을 우러러 관찰하는 삿된 방법으로 의복과 음식을 구하는 사람이면, 그 사문 바라문은 앙구식(仰口食) 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사문 바라문으로서 남의 심부름을 하는 삿된 방법으로 의복과 음식을 구하는 사람이면, 그는 방구식(方口食) 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사문 바라문으로서 의술과 방술로 갖가지 병을 다스리는 삿된 방법으로 의복과 음식을 구하는 사람이면, 그런 사문 바라문은 사유구식(四維口食)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오직 법으로써 의복과 음식을 구하여 스스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때 외도 출가자 정구 비구니는 왕사성의 네거리로 나가 찬탄하여 말하였다. 사문 석종의 아들들은 청정한 방법으로 스스로 생활하고, 지극히 청정한 방법으로 스스로 생활합니다. 보시를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사문 석종의 아들들에게 보시하십시오. 만일 복을 짓고자 하는 사람이면 마땅히 사문 석종의 아들들에게서 복을 지으십시오.

무릇 옳지 못한 방법으로 생계를 구하는 사람을 부정활명자(不淨活命者)라 하며, 승가에서 말하는 적주비구(賊住比丘)도 바로 그런 경우가 될 것이다. 출가중을 외호할 책임이 있는 재가자가 수행자에게 보시하지 않는 것은, 앞서 《우바새계경》에 의하면 ‘실의죄’에 해당하고, 그래서 보시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계행이 청정하고 올바르게 수행생활을 하는 출가중에게 올바른 방법으로 보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예컨대, 공양물을 올릴 때 시주자가 자기 마음에 드는 스님만 따로 모시거나, 그에게만 더 나은 공양물을 골라서 제공해도 안 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공양을 받는 수행자의 입장에서도 혼자만 공양에 응하거나 사방승가의 공양물을 자신의 것처럼 혼자만 사용하지 말도록 가르친다. 《법망경》 권하 보살계본(菩薩戒本)의 48경계(四十八輕戒)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그것이다.

26. 혼자만 이양(利養)을 받지 마라.
어느 절이 되었든지 먼저 와서 있을 때…… 보살이나 비구가 손님으로 오면 먼저 와 있던 대중은 일어나 맞고 보내야 하며, 음식을 공양하고, 방과 이부자리와 평상과 좌복 등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하느니라…… 만약 신도가 와서 대중을 청하면 손님으로 온 스님도 공양받을 자격이 있으므로 절의 주지(住持)는 차례대로 손님으로 온 스님도 공양을 받도록 해야 하느니라. 만약 먼저 있던 사람들만 초청을 받고 손님으로 온 스님은 초청을 받지 못하게 되면, 절의 주지는 한량없는 죄를 얻을 것이며, 짐승과 다를 것이 없고, 사문(沙門)이 아니며, 불제자가 아니니, 만약 일부러 그렇게 한다면 죄[輕戒]를 범하는 것이니라.
27. 자기만을 따로 청하는 초대를 받지 마라.
자기만을 따로 청하는 초청을 받아 자기만의 이양을 취하지 마라. 모든 이양은 시방의 스님들이 함께 받아야 할 것인데 혼자만 초청을 받는다면, 시방 스님들의 몫을 자기 혼자서 차지하는 것이니, 부처님과 성인과 한 분 한 분의 스님들과 부모님과 병든 이 등 여덟 가지 복전의 물건을 혼자서 수용(受用)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輕戒]를 범하는 것이니라.
28. 스님들을 따로 초청하지 마라.
출가한 보살이나, 집에 있는 보살이나, 모든 신도들이 복전인 스님을 초청하여 소원을 이루고자 할 때는 응당 절에 가서 소임을 맡고 있는 이에게 ‘저는 지금 스님들을 차례대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하면, 곧 시방의 거룩한 스님을 초청할 수 있느니라. 저 세속의 사람들은 5백 나한이나 보살을 따로 청하는데, 이것은 차례에 따라 한 사람의 보통 스님을 초청하는 것만 못하니, 따로 스님을 청하는 것은 외도들의 법이며, 7불(佛)은 따로 청하는 법이 없으며, 효순하는 도가 아니니라. 일부러 스님들을 따로 초청하면, 죄[輕戒]를 범하는 것이니라.

전통적으로 소승률의 근거라고 생각되는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 십송률(十頌律)이나 대승률이 담긴 《범망경(梵網經)》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 등을 보면 의법(衣法), 의약법, 피혁법, 와구법(臥具法), 방사(房舍), 걸식 규범, 당사(堂舍) 건축 등 의식주 및 공동체 생활에 관한 규범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승가란 재정상 생산공동체가 아니고 공양된 승물(僧物)을 공주(共住)하는 대중이 나누어 쓰는 소비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 종종 분배에 대한 불만과 분란이 생긴 탓으로 부처님 당시부터 자세하게 여러 가지로 계율 조항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승려복지’라는 과제 역시 사방승물 개념의 사찰 자원을 대중이 어떻게 나누어 써야 하는지의 측면에서 보면,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재가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현전의 사찰과 승가공동체가 존립하는 데 필요한 시주를 하여 왔다. 다만, 그 공양이 재가자 자신을 위한 기복이었든지 제사였든지 간에, 보시된 재화가 사찰의 모든 스님을 위해서 공평하게 쓰여야 한다는 인식을 우리는 갖고 있었던가? 사찰의 소임자인 스님들 외에 기타 스님들의 생활재정이 훨씬 곤궁하고 거처조차 불안정하다는 진단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승보공양 의무자로서 재가자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시주물은 사중(寺衆)의 누구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므로, 출가중이 그 승물을 얼마나 법과 율에 맞도록 나누어 쓰는지를 살펴보았어야 한다. 출가중의 생활 여건이 혹시라도 수행자로서의 위의(威儀)와 법도를 해치는지 여부를 따져보는 것이 재가중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가르침을 분명히 명심했어야 한다.
조계종이 2014년도 발표한 바에 의하면, 65세 이상인 스님 가운데 매월 고정수입이 있는 경우는 약 14%뿐이고, 소임자인 경우에 받는 보시금도 편차가 크다. 월평균 30만 원 이하가 약 26%, 50만 원 이하는 43%, 100만 원 이하가 74%, 100만 원 이상이 26%라는 것이다. 사찰마다 여건이 다르고 사중에서의 지위나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보시금 차등을 예상하기가 어렵지는 않으나, 소득의 그런 편차에 대해서 여태껏 공동체 단위로 명백한 보정의 노력도 없다는 점이 생각해볼 거리가 된다. 해당 조사에서 응답자(65세 이상 노스님 842명)의 희망 용채는 월평균 약 68만 원(평균 지출액 약 65만 원)이고, 전체 생활비 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의료비(약 60%)가 차지한다. 국민 개보험(皆保險)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노스님이 2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님 약 1만 명과 약 3천 개 공찰로 구성된 조계종단 출가중 사이에서 소득 편차 문제는 그 실태가 자세히 규명되지도 않은 채, 의료 서비스나 의식주의 기본생활에 안정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해 일각에서는 ‘사찰의 자산이 시방상주물(十方常住物)임에도 소수 스님들에 의해 사유화되고 있어서, 전체 승가의 기본적 후생복지와 전법교화 활동에 지원되지 못한다. 사찰예산회계법을 시행하고는 있으나 전체의 30% 정도만 예산을 보고하고 그나마 내용을 신뢰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점들을 종단이 속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단일종단·화합승가의 존속이 위태롭게 되고, 이대로 손을 놓고 있으면 5년 이내에도 종단이 붕괴될 수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 있다.
이러한 조계종 승가의 현실에서 출가수행자를 외호할 책임이 있는 재가중이 당장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지금처럼 사찰의 권력자에 의해서 승보 공유의 공양물이 사유화되고 불공정한 분배가 계속되도록, 모르는 척 외면하고 말 것인가. 이것은 여러 경로로 부처님이 승가공동체에 가르치셨던 바람직한 공양의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사찰운영위원회의 승려복지 관장의무

조계종 총무원에 ‘승려복지회’라는 부서가 있으니, 교구 본·말사별로도 업무 전담자가 있어야 할 것이나 아직까지 충분히 기능한다고 볼 수 없다. 현재 승려복지회는 국가의 건강보험(장기요양보험 포함)과 연금보험에 보충적 역할을 할 뿐, 승가공동체 본연의 수행생활 기초보장과 같은 성격이 전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스님들의 거처 불안정과 모든 연령층에 필요한 최소한의 고정적 소득 대책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려복지회의 의료비 지원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건강보험에 가입한 스님이 ‘입원진료’를 받은 경우에 일부 제한된 항목에만 해당한다. 모든 일이 재화(財貨)와 교환되어야 하는 이 시대에 소속 공동체[종단, 寺衆]의 지원 없이, 최빈층으로 전락한 무소유 납자(衲子)가 이대로 가면 수행자의 품격과 기상(氣像)을 과연 지킬 수 있을 것인가.
2010년에 ‘조계종 선원청규’가 만들어졌고 2013년에 ‘승가 청규’가 만들어졌으며, 그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 수행생활과 복지가 포함되었지만, 아무런 결실을 맺은 바 없이 표류하고 있다. 좋은 의미의 청규가 종단에 정착되지 못한 원인에 관련하여, 금강 스님은 “조계종의 구성원들 중 대다수는 법정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열악한 현실에 존재하고 있으며, 종단의 부와 권력은 상위 5% 정도의 상층집단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와 같이 극명하게 양극화가 심한 집단 중 하나가 바로 조계종이다. 이처럼 모순된 현실을 직시하고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종단의 승가복지가 이해된다.”고 진단하였다. 따라서 어떤 청규의 제정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승가공동체 ‘구성원의 의식 수준과 도덕성 확립’에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조계종 승려복지의 모든 것은 종단의 재정 형편 탓인 것처럼 미루어져 왔으나, 실은 사찰의 투명하지 못한 재정운용을 당장 바로잡지 않고 묵인하는 종단을 비롯하여 각급의 결정권에 관계된 사부대중의 무능과 무책임 탓이 더 크다고 볼 일이다.
그러므로 사찰 재정에 대해서 공신력이 없는 가운데 행정가 스님들이 주도하는 승보공양운동은 애당초 실효성이 낮은 것이다. 오히려 사찰마다 구체적으로 공양할 당사자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승보공양 쇄신운동에 착수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듯하다. 조계종의 사찰 운영위원회법이 2012년 7월에 제정되고 그 시행령이 2013년 8월에 발효되었으므로, 운영위원회 역할 가운데 해당 사찰의 실질적인 구조개혁을 거쳐서 수행공동체의 안정과 존속을 위한 승려복지를 설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을 토대로 특히 재가자라면 잘할 수 있고, 또 마땅히 해야 할 책무를 중심으로 제안해보기로 한다.
조계종의 단위사찰 운영위원회는 출·재가 운영위원을 5인 이상 30인 이내로 두며 그 임기는 1년이고 연임할 수 있다. 그중 재가위원으로는 신도회 회장과 부회장을 당연직으로 하고 3년 이상 재적한 신도들 가운데서 신도회가 추천하여 추가 위촉할 수 있다. 운영위원회의 역할은 사찰의 예산·결산 심의 및 특별불사와 수익사업, 부동산의 처분 승인신청, 신도의 상벌, 사찰 자체감사, 기타 주지가 부의한 사항 등을 다루는 것이다. “주지는 운영위원회 구성 및 운영 현황을 본사 경유하여 총무원에 보고해야 하고, 이 법을 시행하지 않거나 중대하게 위반한 자는 종무원법상의 징계에 처하고, 해당 사찰에 대해서는 행정상의 제재를 할 수 있다”(동법 7, 8조)고 되어 있다. 단, 공찰의 적용유예 기간은 법 시행 후 최대 3년, 1회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2015년 10월 현재 대부분의 조계종 공찰에서는 운영위원회가 정상 가동되고 있어야 한다. 실제는 전혀 그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의 관심은 운영위원회의 가동 여부 이전에, 운영위원회가 다룰 사안 가운데 ‘승려복지’를 명확하게 적시하고 그 추진에 중점을 두자는 것이다. 현응 스님의 전망처럼, 향후 5년 이내라도 종단이 붕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면, 하루속히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야만 한다. 사찰운영위원회에 승려복지 담당을 두게 된다면, 그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사중 스님들의 생활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며, 고르게 필요한 경비의 예산을 실질적으로 짜는 것이다. 어쩌면 사찰에서 나눠줄 것이 없고 나눠 쓸 뜻이 없으니 사중 스님들의 형편을 자세히 물을 일도 없었겠지만, 이제부터는 아예 순서를 바꿔서 권속의 수요(need)를 먼저 파악하는 것을 중요한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생활자원의 필요성이 명확하면 아무래도 대중을 설득하기가 쉽고 자원의 조달이 좀 더 수월해진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선 승려복지회가 다루지 않는 스님들의 거처 문제와 관련하여, 율장에서 말하듯이 사찰에 최소한 4명의 스님이 공주(共住)하거나, 현응 스님의 제안대로 9명 이상의 공주를 하나의 현전승가로 간주하는 규칙을 종단이 만들면 된다. 공찰만 3천여 개를 가진 조계종이니 평균적으로 12,000~27,000명의 스님이 안정되게 머물 곳은 이미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왜 스님들이 갈 곳이 없다고 하시는가? 사찰에 먼저 와 있는 스님이라고 해서 사찰의 주인인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스님이라도 확실한 종도(宗徒)의 신분이면 시방승가에 머물 때 평등한 공양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원래 승가에서 별주(別住)는 범계 행위가 있을 때 당사자가 참회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혼자 지내게 하는 규칙이므로 그 자체가 수행자로서는 불명예스러운 상황인 셈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간혹 어떤 스님들은, 세간의 추세처럼 개별적으로 혼자 사는 거처를 마련하고 싶은 듯하다. 불교승가란 대중이 일미화합하고 조직규율을 지키는 수행으로써 공동목표를 추구하는 결사체인데,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면 승가답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혼자 살면 기본적인 생활비용이 늘어나게 마련이고 결과적으로는 시주물을 과소비하는 일이 된다. 율장에는, 평소 너무 헌신적으로 공양하던 보시자의 집에 당분간 걸식을 가지 말도록 당부하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있는데, 출가중일수록 시방승물을 귀중하게 알고 아껴서 함께 살아가는 태도가 옳을 것이다.
한편, 스님들의 거처 문제 다음으로는 기본적인 용돈이 문제다. 의료비나 교통통신비, 교육비 등 기본비용을 마련해야 하는데 무엇에든 소임자가 아니면 고정된 수입원이 있을 수 없다. 출가중의 무소유 원칙을 입버릇처럼 말은 하지만 무소유의 상태로도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 토대가 최소한 갖춰져 있어야 맞는 말이 된다. 무엇보다도 당장 필요한 것은 일상적인 의료비와 부대비용인데, 다음 페이지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조계종 승려복지회는 외래진료비를 지원하지 않는다. 날마다 병원에 가게 되더라도 입원을 하지 않으면, 그 치료비는 스님 본인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취지다. 그처럼 종단의 지원요건을 자세히 보면 제한규정들이 많으니까, 개별 스님으로서는 아예 지원신청 자체에 관심이 생기지 않을 상황이다.
또한 승려복지회에 지원신청을 할 수 있는 사안이라 하더라도, 말사 단위에서 신청하는 절차가 그리 수월하지 않고, 종단과 교구와 사찰로 분산된 책임소재 때문에 스님 개인으로서는 어느 곳에 지원신청을 하도록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는 서비스 정책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구의 본·말사 사찰운영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사중 스님들의 후생비용을 충분히 예산해야 하고, 소위 기와불사나 개금불사와 같은 하드웨어 공양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인재불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자의 위의(威儀)와 존엄을 지켜주지 못하는 사찰이라면, 어떻게 삼보공양의 토대로 존속될 수 있겠는가.
위의 표에서 보듯이 현행 조계종 승려복지는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의료비 외에, 건강보험료와 연금보험료를 당장 사찰에서 지원하고자 하면 스님 1인당 56,000원 정도가 필요한 것으로 설계되었고, 그 보험료를 납부함으로써 국가 사회보장체계 안으로 편입해 최소한의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세간에서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소요되는 최소한의 비용”이라는 최저생계비는 2015년 1인 가구 기준으로 약 62만 원, 현금급여기준으로는 약 50만 원으로 고시되었다. 어떻게든 스님들에게 최소 50~60만 원 정도의 급여가 매월 기본적으로 제공되고, 사찰마다 가능한 한 많은 출가중이 모여 살게 된다면, 스님들이 그 비슷한 수준의 재가자 세간살이보다는 다소 여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네 사찰에서 그 정도 수준의 지원이 정말 불가능한가?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 같다. 승가공동체의 외곽에 있는 재가중의 판단으로가 아니라, 앞서 종단행정에 책임 있는 여러 스님들의 판단을 빌려 볼 때도, 종단의 자산이 승가규범에 맞게 도덕적으로 분배되기만 하면 일반 스님들의 재정 형편은 지금의 양극화 사태로부터 한결 개선될 것이라고 한다. 이야말로 스님 각자의 후생복리 차원을 넘어서 불교 승가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여러 율장에서 그렇게 강조했던바, 개인 소유는 아니되 공유하고 공존하는 승가 원리를 조계종단 일부가 심각하게 훼손하여 왔기 때문이다.
 

승가공동체성 확립을 위한 공양

불행히도 지금 화합해야 할 승가공동체에서 양극화를 우려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공공연해졌다. 이런 때일수록 재가중이 오히려 더 큰 애종심(愛宗心)을 가지고 승보공양의 원칙을 지키도록 발심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다 같은 사중권속이지만 권력 없고 말 없는 스님들을 위해서 기본생활의 고충과 재화의 수요를 솔직하게 알아내야 한다. 아주 긴급하게 법당이나 전각을 보수해야 할 정도가 아니라면, 향후 5년쯤은 사찰 살림살이를 긴축하며 크고 작은 공양물을 모두 모아서 오직 스님들의 수행보장기금을 자체적으로 조성하도록 선도(先導)해야 한다. 모인 자산과 그 배분의 결과는 정기적으로 공개하고 사부(四部)의 회중에 보고되어야 한다.
혹시라도 재가자가 개별적으로 어느 스님을 더 챙겨서 공양하거나, 어느 스님 개인만을 위해서 직접 공양하는 것도 옳지 않음을 이미 앞서 율장에서 확인했다. 모든 보시는 자신과 출가중의 수행 증진을 위해서 승가공동체의 공영(共榮)을 위해서 공양되고, 그렇게 했을 때만이 보시 행위가 복전(福田)이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실무적으로 종무[복지] 담당자는 사찰에 거주하는 출가중의 명부를 작성하고, 전입·전출에 대한 관리를 정확히 하며, 대중을 주지 스님의 동거인으로 등록게 하여 국민건강보험료 등을 납부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비용을 낮출 수 있다. 모든 사중권속들도 이러한 사찰운영 방식을 이해하고 책임감 있게 동참해야 하며, 재가중의 확고한 공양 의지를 신뢰하기 바란다.
모름지기 사방승물의 분배는 마치 발우공양과 같이, 이웃 도반의 필요를 감안하며 자기 몫을 덜어내는 아름다운 공동체성 나눔이다. 지금처럼 누군가는 아파도 병원에 갈 형편이 되지 못할 때, 또 다른 누군가는 호사스럽게 돈 장난질로 화합승가에 누를 끼치고 적주(賊住)로서 무거운 범계(犯戒)를 하는 형국을 보면, 어찌 지금의 조계종을 부처님 따르는 승가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나라에서 조계종 사찰이 역대로 물려받은 재산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은 출가중이 관리할, 출가중만의 자본은 아니다. 행여 재가중 가운데서도 사찰의 유산을 출가중의 소유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공양된 모든 승물은 정재(淨財)로서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사용하고, 사부대중의 성실한 유지 관리의 노력으로 후대에 길이 남겨주어야 할 공유자산이다. 이러한 인식이 출가와 재가 모두에게 확산될 때 승가복지의 여러 과제들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

 

이혜숙 / 금강대 응용불교학과 객원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국제교류위원 등 역임. 저서로 《종교사회복지(편저)》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운동(공저)》 역서로 《불교사회복지학》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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