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톱 속에는 슬픔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어 그 슬픔과 말갛게 만나기 위해 손톱에 색칠을 하지 않는다. 손톱을 깎는 일은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그 시간을 오래오래 끌고 싶어 했으나 나는 금세 마치기를 바랐다.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 창가에 신문지를 널게 펴고 손톱깎이를 들고 앉으면 수세미처럼 억센 수염의 감촉이 뒷덜미에서 살아나는 듯 까끌하다. 시공간을 훌쩍 넘어 시골집 마루에서 아버지 무릎에 앉아 또깍또깍 손톱을 깎는 시간으로 되돌아가면 마당 가 노란 국화 향도 한 무더기 훅 끼쳐오고 뒤꼍 감나무에서 때까치 소리도, 대숲 서걱대는 바람소리도 들릴 듯하다.

아버지가 힘을 줄 때마다 건강한 내 손톱은 톡톡 터지는 풀씨처럼 신문지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버지는 손톱 조각을 하나라도 잃어버릴세라 그 부스러기를 찾아왔다. 손톱은 두 번 깎았다. 한 번 깎고 나서 다시 깎으면 열 손가락 중 한 두 손톱에는 피가 맺혔다. 너무 바싹 깎아서다. 그래서 아버지가 손톱 깎는 날이면 나는 멀리 튀는 손톱을 따라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친구 그림자라도 지나가면 핑곗거리를 찾아 도망가곤 했다. 아버지는 깎은 손톱을 신문지에 싸서 불에 태웠다.

나는 아버지가 손톱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이가 그때 내 나이가 될 즈음 아버지 마음이 십분 가늠되었다. 말씀이 없는 아버지가 말수 적은 가시 같은 막내딸과 함께하고 싶었던 시간, 지금 생각해 보면 지상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했을 때부터 더욱 내 손톱 깎는 일에 집착했다. 병든 아버지로부터 멀어지려는 딸과 겨자씨만 한 딸과의 시간이라도 붙들고 싶었던 아버지 필사의 매달림이었다.

고1 가을, 아버지 상태가 좋지 않다며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 옆을 지키길 원했다. 여섯 해째 투병 중인 아버지 곁에 잠이 들었다. 새벽 변방서 오는 종소리가 나를 깨웠다. 자는 척했다. 달밤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달빛에 잠시 깨었다고 생각했다. 추석이 지나고 다시 달이 만삭이 될 무렵, 차고 맑은 달이 뜰에 넘쳐 방안까지 기웃거렸다. 온기가 달아난 방바닥에 손을 더듬거리시더니 발밑에 뭉쳐진 이불을 목까지 덮어 다독였다. 포근했다. 내 엉클어진 머리를 쓰다듬고 솜이불 위로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떨렸다.

당신이 깎고 남은 짧은 손톱 끝을 만지고 또 만졌다. 비스듬히 들어온 달빛으로 밝아진 방안을 쭉 둘러봤다. 벽에 걸린 오래된 가족사진, 벽 한쪽에 걸어진 아버지 점퍼로 시선이 옮아갔다. 벽지 무늬 하나까지도 눈 안에 담는 듯했다. 그리고 긴 합장을 했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가 학교에 갔다. 아버지와 딸의 심장은 맥박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수업시간에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렘과 다른 떨림이었다.

저녁, 막차로 집이 보이는 고개를 넘을 때 알았다. 아버지가 다시는 내 손톱을 깎아 줄 수 없다는 것을. 마을 가로등을 몽땅 우리 집에 옮겨놓은 것처럼 어둠 가운데 나의 집만 밝았다. 대문을 들어와 멍하니 서 있자 누군가 안방으로 끌고 갔다. 곡을 하라고 했다. 준비 없는 죽음 앞에서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흰 천으로 덮인 아버지 손을 더듬어 보았다. 억세었으나 따뜻했던 손이 나무 막대기처럼 굳고 차가웠지만 놓을 수가 없었다. 놓치면 다시는, 다시는 잡아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독한 딸내미여. 딸자식 이뻐해야 소용없어”

그해 가을, 그 이후의 가을은 늘 아팠다. 손톱은 슬플 때 자라고, 발톱은 기쁠 때 자란다는 시 구절처럼 나의 손톱은 빨리 자랐다. 긴 손톱은 부러지기도 하고 나 혼자 어설프게 깎기도 했다. 왼손으로 깎는 오른 손톱은 아버지가 없는 삶처럼 뒤뚱거리고 서툴렀다.

피붙이 최초의 죽음 이후 절집은 나의 통각점이었다. 아버지와 가끔 들렀던 곳, 천왕문 사천왕의 부리부리한 눈과 괴기스러운 표정, 매캐한 향냄새로 아버지 손을 꼭 잡고도 덜덜 떠는 허약한 나를 들쳐 업고 계단을 오르는 등에서는 땀 냄새가 물큰 피어올랐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향냄새에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으로 절집을 꺼리다가 아이가 고 3이 되고 나서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에라도 빌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인지 남편을 따라 간간이 여러 사찰을 찾는다.

이제는 매캐한 향내와 오래된 나무 냄새에 더 이상 울렁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묵은 냄새가 공중에 떠 있던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아버지가 신발을 벗고 들어섰던 대웅전 문 앞에 섰다. 아픈 아버지가 합장하던 모습과 마음으로 빌었을 그 간절함이 어떤 것인지 아렴풋이 전해왔다. 오래된 기억은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선명해지기도 하는지 아버지와의 기억 일부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남아 있다.

가을이 사찰 문턱까지 와 있다. 절집 마당에서는 돌탑도 저절로 불심이 깊어지는지 아니면 돌탑도 자비를 아는지 단 한 줄의 불경도 알지 못하는 내가 층층 탑에 돌 하나 얹고, 근심 위에 근심 하나 얹어도 쓰러지지 않는다. 곁눈으로 남편을 따라 깊게 합장을 하고 점심 공양을 따라 한다. 아들을 위해 찾은 절에서 내 묵은 상처를 다독이고 온다. 서른 해 넘게 삭혀 온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도 내려놓고 아이들에 대한 욕심도 덜어 두고 온다.

사찰을 다녀온 날이면 신문지를 펼치고 아들들을 부른다. 안고 깎기에는 너무나 커버린 아이들이 나와 똑같이 손톱을 너무 짧게 깎았다고 투덜댄다. 방 안 어디선가 아버지가 가만히 지켜보는 듯 국화 향이 은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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