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문득 뒤돌아본다. 낯설다. 앞만 보고 걸을 때 앞사람의 뒷모습만 반복적으로 본 탓이다. 하지만 앞만 보고 걸을 때도 마주 오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기에 전혀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뒤돌아본 세상은 왜 낯선 것인가. 그것은 앞의 세상과 뒤의 세상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앞만 보고 살아간다. 간혹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거나 뒤돌아보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가늠하거나 반추하기도 한다. 모두 앞을 향한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을 향해 걸으면서 뒤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걷지 않는다. 오직 눈앞의 세상을 향해 직진한다. 각각의 익숙한 제 걸음걸이에 의존하며 보폭을 조절한다. 그것은 매우 오래된 인간의 습성인데 왜 지금 이 부분이 걸리는 것인가. 길을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는 행위, 보통 뭔가 문제가 있을 때 발생한다. 길을 잘못 들었거나 목적한 곳을 지나쳤을 때이다. 실수이거나 알지 못했거나 속도에 밀렸을 때 일어나는 이 현상은 앞만 보고 걷는 삶의 습관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분명 있다.

얼마 전 경험한 일이다.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한 공연장에서 폴 포츠 내한 공연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았고 모처럼 많은 인파 속에서 흥겨운 음악 연주와 더불어 공연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고자 했다. 그동안 학교 강의, 글 쓰는 일에 매달려 바쁘게 살아온 탓에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었고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반짝반짝 화려한 조명등이 우리 가족의 발길을 환히 밝혀주었고 초가을 낭만의 열기에 맘껏 환호했다. 하지만 즐기는 것도 습관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차가운 밤공기에 몸도 으슬으슬해 공연 마지막을 조금 남겨두고 우린 자리를 떴다.

호수의 야경을 즐기며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손을 보았다. 휑했다. 가방이 없었다. 아차, 이럴 수가, 내 손에 있어야 할 가방이 보이지 않다니. 혼돈스러웠고 맥이 풀렸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십여 분이 흐른 뒤라 아득했다. 뒤의 세상은 조명 불빛이 현란했고 보행자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뒤엉켜 있었다. 움직이는 물체와 어둠만 출렁일 뿐이었다. 뒤의 세상은 이미 내가 앞만 보고 걸어온 세상과는 너무도 딴 세상이었다.

모른 채 그대로 직진했으면 아예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 이상 그냥 모른 척 직진할 수 없었다. 나는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잔뜩 여유를 부리며 걸어온 길을 빠른 속도로 달렸다. 숨이 턱에 닿을 무렵 좀 전에 앉았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비슷비슷한 의자를 모두 살폈으나 예상대로 가방은 없었다. 많은 인파가 오가는 길목이니 가방이 온전할 리 없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었지만 자꾸 누구 탓이라는 강박이 나를 압박했다. 우선 사태를 진정시키고 신용카드 분실신고를 했다. 하지만 정작 나를 괴롭힌 건 휴대폰이었다. 나에 대한 모든 정보뿐만 아니라 수많은 연락처, 메모 등이 빼곡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 못지않게 당황한 남편이 자신의 전화로 내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기적같이 누군가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러 번의 전화 끝에 누군가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상대 남자는 가방을 습득한 후 분실신고를 할 참이었는데 마침 잘되었다고 했다. 얼마 후,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물건을 건네 후 그 남자는 감사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온 길을 그대로 달려갔다.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가방을 잃어버린 것을 몰랐을 때는 행복했다. 하지만 분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망연자실했다. 뒤돌아서 달려갈 때도 가방을 찾으리란 확신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휴대폰이야 다시 구입하면 될 일이었다. 신용카드도 재발급받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빚어지는 성가신 일들과 귀찮은 일, 아쉽고 속상한 마음과 자책이 두고두고 더 나를 힘들게 할 것이었다.

휴대폰 분실이야 흔한 것도 아니지만 흔치 않은 일도 아니다. 휴대폰에 절대 신뢰를 쌓아놓은, 오직 직진인 욕망의 삶에 제동이 걸렸던 것이다. 그저 습관적으로 앞만 보고 걸어갔던 길, 내가 가야 할 방향만 보고 걸었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누군가 지나쳐 온 길과 알지 못한 누군가의 가던 길이 되감겨 있었다.

개부구족(開敷具足)이라는 말이 있다. 연꽃은 피면 필히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다. 사람도 꽃피운 만큼의 선행, 꼭 그만큼의 결과를 맺는다는 말이다. 즉 연꽃 열매처럼 좋은 씨앗을 맺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연꽃을 좋아했다. 불교적 의미의 연꽃과 화훼의 한 종류로서 맑고 아름다운 연꽃을 만나는 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진흙 속의 연꽃은 비단 종교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상 이치와도 부합되는 것도 그러하다.

바쁘게 앞만 보고 걷다가 알지 못한 누군가를 생각하며 문득 걸음을 멈추어본다. 온 길을 다시 되돌아본다. 이쯤 해서 나를 저만치 떼어놓는다. 어두운 밤길에서 자신의 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는 알지 못할 많은 누군가가 또 있을 것이다. 분명 연꽃 열매와도 같은 사람일 것이다. 이들 선행의 대가는 혼탁한 세상에서 작은 기적을 일으킬 것이고 앞만 보고 가는 숱한 나만의 욕망에 제동을 걸 것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그 속에는 목적한 곳을 지나쳤거나 길을 잘못 들었을 때만 되돌아가는 곳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 되돌려서 온 이타적 길도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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