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인간과 자연의 교감 통로이자 공존의 공간이다. 숲은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의 보고로 건강과 사유, 다양한 문화예술의 무대이다. 숲이 한 폭의 그림이라면 산사는 화룡점정이다. 산사의 독경과 종소리는 숲의 깊이를 더욱 그윽하게 한다. 불교적 깊이와 전율은 일상에 찌든 이들을 배려와 여백, 적멸의 시공간으로 포용한다. 산문에 기대어 시를 짓고 조국을 걱정하던 선승의 뒤안길을 따라가다 보면, 숲과 산사의 존재 그리고 그 이유를 깨닫게 한다.  

특히 소나무는 선의 분위기를 뿜어내는 하늘과 땅 사이를 교통하는 매개이다. 궁궐, 고택, 산사를 에워싸는 소나무는 그 안에 있는 인물의 인품과 정서를 상징하여 ‘은사의 거처’ ‘노승의 거처’라고 불렀다. 소나무는 탈속의 상징이면서 솔잎을 씹어 배를 채우는 벽곡(辟穀)의 근원이면서 건축의 근원이기도 했다.

섬을 여행하면서 절경을 자랑하는 해안 절벽 위에는 반드시 한 그루 소나무와 암자가 자리 잡고 있어 경이로웠다. 특히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사유에 젖어 있다. 석모도 낙가산 자락 천년고찰 보문사 관음송은 암반에 뿌리를 내린 채 수평으로 자란다. 소원이 이루지는 길로 일컬어지는 마애불 가는 솔숲을 지나면 거대한 마애석불이 서 있는데 이곳에서 소원을 빌고 나서 고개를 들면 바다의 파도소리가 산사의 종소리와 마주치며 오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남해 금산 보리암에도 명품 소나무가 있는데 기암괴석마다 한 폭의 수채화를 연출한다. 중국 진시황의 아들 부소의 유배지 부소암 주변도 소나무가 암자를 감싸 안으며 청정 남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낙산사 홍련암 소나무는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영상에 등장하는데 해안 기암절벽 위로 쭉쭉 뻗어 지조와 원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산림청 조사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30년째 소나무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임산부는 소나무 아래 좌정하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태교를 해왔고, 출산하면 사립문에 금줄을 치고 솔가지를 매달았다. 집과 집안 장롱 역시 소나무가 재료였고 솔잎은 사찰음식뿐 아니라 추석 송홧가루 떡과 송편 밑에 깔았을 정도로 전통음식 재료였다. 

그런데 이 소나무가 죽어가고 있다. 소나무재선충병 때문인데 90여 개 지방자치단체에서 피해가 잇따랐고, 70개가 넘는 지자체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고사목만 860만 그루가 넘는다. 소나무재선충병은 매개충인 솔수염하늘소가 재선충을 몸속에 지니고 소나무의 어린 가지 수피를 갉아먹을 때 전염된다. 전염되는 순간에 소나무는 급격하게 말라죽는다. 감염된 소나무는 100% 죽는다. 그래서 ‘소나무 에이즈’라고 부른다. 죽은 소나무는 산불의 불쏘시개 역할을 해서 귀중한 불교유산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아픔도 겪었다. 매년 수백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지만 완전 방제작업은 요원하다. 완전치료약 개발도 없다. 아직 정확한 피해 면적과 장기적인 치유 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해 안타까움만 더한다.    

어느 해 늦가을 세 개의 산사를 품고 있는 용화산을 찾았을 때 태풍이 할퀴고 간 참혹한 현장 앞에서 가슴 먹먹했었다. 수백 년 살았음 직한 소나무, 참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닥에 드러누웠다. 도토리가 지천인데 줍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살붙이, 우리네 생명의 탯줄이므로. 나무들은 서로 의지하며 새 생명력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때 그 숲에서 나는 이런 시를 썼었다.

지금 숲에는 물빛, 마찰음, 허공에는 사선의 가지들이/ 햇살줄기를 가위질하고 있다/ 잘려나간 햇살들이 방아깨비처럼 톡톡 튀어 오르는 것을 보면/ 숲의 생명력은 팔짝팔짝 뛰는 햇살의 힘에 있다/ 햇살 풀무질하는 것은 차고 돌리는 물소리이다/ 물소리는 기도하는 나무들의 종소리이다/ 종소리 구르는 나무의 울타리는 여백이다/ 여백과 여백 사이에 바람이 불고 인정이 쌓인다/ 생목이거나 노거수이거나 더 큰 여백을 위해/ 낙엽이 지고 열음한 나무들은 드러눕는다/ 넘어지면 넘어진 대로 서로의 목침이 되고/ 팔베개가 되어주는 사선의 삶/ 경계 없는 세상이 숲을 이루고/ 숲에서 노래하는 새들은 숲의 일원이다

― 졸시 〈상수리나무 숲에서〉

숲은 지구촌의 허파이고 소나무는 숲의 숨구멍 역할을 한다. 우리는 숲에서 윤동주의 〈서시〉처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하고, 성철 스님처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설파하기도 한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달라진다고 해서 산과 물이 없어지거나 혹은 산과 물이 서로 뒤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깨닫는다.

자연은 신의 예술이다. 예술가는 이런 위대한 자연을 모방할 뿐이다. 자연의 극치는 사랑이다. 대책 없는 세월이 흐른 시간에 황량한 숲에 앙상한 건물로 사찰이 남지 있을까 우려된다. 우리 곁에서 무심히 동행하면서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서 있을 저 숲들의 존재 이유와 그 가치에 대해 한 번쯤, 스스로 반문해보았으면 좋겠다. 숲은 모든 자연 풍경의 시작이요 끝이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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