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백운거사 이규보의 유명한 차시(茶詩)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생에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오직 차 마시고 술 마시는 일이라. 예와 지금의 풍류가 여기서 비롯하네(喫茶飮酒遺一生 來往風流從此始).”

나는 이 시를 그저 먹물 든 방외지사의 한가한 풍류로만 읽지 않습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 중에서 ‘놀이’의 중요성을 말한 것으로 읽습니다.

놀이는 곧 재미입니다. 재미가 있는 삶은 즐겁고 행복합니다. 우리는 자칫 놀이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됩니다. 놀이는 소모적인 것, 쓸데없는 짓, 혹은 돈 벌기 위한 노동 끝의 휴식이나 충전으로 생각합니다. 놀이에 대한, 삶에 대한 심각한 오류입니다. 놀이는 곧 그 자체로 의미이고 기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재미없는 삶이 행복한가요? 그렇다면 놀이를 통해서 재미를 느끼는 일은 우리 생의 소중한 행복의 절대 요소입니다.

나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규정한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의 관점을 매우 존중합니다. 하위징아는 노동과 사유보다 놀이에 더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사실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남아도는 시간에, 심심하기 때문에 이리저리 별별 짓 다 하는 것이 곧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논어》에서도 최고의 고수는 즐기면서 노는 듯이 하는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잘 놀아야 재미있고 재미있어야 행복합니다. 그러니까 행복의 비결은 잘 노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보다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합니다. 때문에 노는 것은 돈 벌기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하는 휴식의 여가로 종속되었습니다. 슬프고 아프고 억울합니다.

그런데 놀이는 의미가 있을 때 생기 있는 재미를 만들어냅니다. 컴퓨터로 하는 게임과 도박이 진정한 놀이가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의미와 내용이 부실하고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놀이에도 격이 필요합니다. 수준과 차원이 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놀이가 싫증이 나지 않고 새록새록 솟아나는 기쁨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공부가 필요합니다. 공부란 다름 아닌 정신을 성장하고 성숙하는 일입니다. 공부와 놀이의 ‘협업(協業)’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어느 것 하나만으로 그 하나의 내용이 채워지거나 완성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행복의 조건으로 다음 다섯 가지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이규보가 노래한 시의 형식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에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공부하고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함께하는 것이네. 예나 지금이나 행복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라네.” 이 다섯 가지 항목은 실은 내 나름의 진지한 사유와 경험을 토대로 결론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과 유시민 선생의 책을 읽다 보니 그분들도 삶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군요. 공감의 기쁨과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행복을 몸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람이 화목하게 사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행복론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론에는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 혹은 마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관점입니다. 인간은 정신 혹은 감정이나 사상들은 고여 있거나 오래되면 싫증과 피로를 느낍니다. 세상의 진리나 정신은 단일하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끝없이 다양하고 낯선 것들과 만나면서 새로이 눈뜨고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 내면서 살아가는 재미와 기쁨을 누립니다. 그것을 지탱하고 발생시키는 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공부는 읽고 듣고 경험하면서 생각하고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 공부의 힘, 정신의 성장과 성숙의 힘으로 노동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공부와 노동의 협업입니다. 이 공부가 바탕이 되면 놀이가 그대로 재미가 되면서 사람 사이의 사랑이 만들어집니다. 다시 그러한 사랑은 사람과의 사이를 더욱 튼튼하게 합니다. 또 모든 공부와 일과 놀이와 사랑은 오직 사람과 함께 해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함께하는 공부, 함께하는 노동, 함께하는 놀이,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연대라고 합니다. 최근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읽었는데, 연대는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연대,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이 함께 도움을 주고받는 일은 그대로 생명의 질서이고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깊이 그리고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공부하고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함께하는 일이 세속에서의 수행이 됩니다. 수행의 힘이 없이 돈과 건강만으로 행복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불자들의 수행도 진지하고 치열하되, 무겁고 어렵고 힘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재미있고 즐기듯 하는 수행의 문화를 기대합니다.

또 가을인가요? 벌써 산중의 나뭇잎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습니다. 곧 겨울이 올 것입니다. 속절없이 변하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놓아버리고 어떤 것들에 마음을 주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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