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을 바탕으로 조선문예를 빛내다

1. 머리말

‘지식사회학’을 수립한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의 이른바 ‘존재구속성(Seinsgebundenheit)’에 의하면, 사회적 존재로서 개인은 성장 배경과 교육, 시대 상황 등 환경적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추사의 불교인식 파악에서 추사의 기질적 특성, 당시 시대적 환경들의 영향을 분석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추사는 이전 유학자들과 달리 불교를 적극 수용하였고, 서자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이상적·오경석 등 역관 출신 중인들을 지인으로 두었고, 중인인 화가와 천민인 스님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적·사상적 분위기 영향도 있겠지만, 그의 기질적 특성도 반영된 듯하다. 이에 대해 살펴보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정조 10~철종 7)가 살았던 조선 후기는, 통치이념인 성리학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기존 질서가 흔들리던 시기이다. 성리학을 비판하며 실학이 등장했고, 서학이 청으로부터 유입되어 사상적·문화적 변화가 컸다. 조선 초기 사원 소유의 전지(田地)와 사노(寺奴)의 몰수로 승려의 신분이 천민으로 격하되었고, 1910년 초까지 사찰 중 15.5%만이 유지되었을 정도로 불교의 위상은 낮았다. 그나마 종교로서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법맥을 계승하고자 한 선승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국불교로서 많은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불교의 공식적 위상은 사역 집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억불의 분위기가 약화되고 서양과학과 천주교가 유입되면서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상대적으로 완화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천주교 때문에 가족들이 귀양을 가는 등 가문이 어려움을 겪은 다산과 달리, 추사 가문이 불교로 인해 고역을 당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학자들의 불교 접촉은 다산과 혜장, 추사와 초의의 교류에서 보듯이 유학자들과 선사들의 교류가 하나의 문화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추사의 불교인식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배경들을 고려하면서도 불교의 다기적(多岐的) 측면을 반영하여야 한다. 추사 집안은 원찰이 있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으며, 추사도 기회가 될 때마다 사찰 현판이나 불교 관련 작품을 많이 남겼다. 또한 그는 스님들과 교류하며 불교시를 많이 지었고, 백파선사(白坡禪師, 1767~1852)와 선(禪)에 대해 논변을 할 정도로 불교 지식이 높았다. 추사의 서독(書牘)에 쓰인 불교 용어들, 그가 읽은 경전들을 보아도 단순히 접하는 수준을 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추사에게 불교는 유교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삶의 토대였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유학자이자 고증학적 실학자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사상과 예술의 저변에는 불교적 인식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추사의 개인적 기질에 대해 살펴보자. 문사철(文史哲)과 학예(學藝)를 두루 갖추어야 했던 선비들에게 학자와 예술가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지만, 굳이 이 둘 가운데 선택한다면 추사는 전자보다 후자의 성향이 강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였고, 제주 유배지에서도 가족들에게 끝없이 읽을 책을 주문할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또한 그의 학문적 탐구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비문과 금석학에 대한 열정, 진흥왕 순수비와 진흥왕릉 고증 과정과 무장사비 파편을 찾아 나선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사상적 결과물은 그의 학문적 능력이나 탐구심에 비해 결코 많은 편이 아닌데, 그 이유를 다음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젊은 시절 엮은 것들을 두 차례나 태워버려 현재 세상에 전하는 것은 일상 왕복한 서신에 불과하다.

나) 저는 평생 저술들로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문자들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장 단지나 식초 항아리 덮는 데 쓰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이것을 즉시 명하여 찢어버리라고 하십시오.

그를 평한 글(가)이나 권돈인(權敦仁)에게 쓴 편지(나)에서 보듯이 추사는 저술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학문적 능력과 지적 탐구심을 좇아 저술에 천착했다면 아마도 상당한 연구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추사에게 이처럼 논리적 저술이 적은 이유는 저술에 대한 무상관(無常觀)과 그의 기질 탓이 아닌가 싶다. 그의 편지글과 시에 드러난 낭만성과 문학성을 보면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하다. “70년 동안에 걸쳐 10개의 벼루를 갈아 닳게 했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으나”라고 말할 정도로 추사는 글씨나 그림에 철저하였다. 그는 지적 탐구열과 환희를 인지적 논문보다는 감성적 예술을 통해 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2. 추사의 정체성
   
추사가 불교 공부를 어떻게 하였는지 구체적인 기록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가 서독(書牘)에서 불교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것을 보면, 체계적으로 불교를 공부했거나 경전 등 관련 서적들을 많이 읽은 듯하다. 한 세대 위인 다산과 비교해도 추사가 얼마나 불교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는지 알 수 있다.

다산은 육시(六時), 유순(由旬), 도솔천(兜率天), 결하(結夏) 등 불교 용어들을 쓰고 있지만,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그의 학문 기반은 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혜장선사(惠藏禪師, 1772~1811),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두루 왕래하였고 해박한 불교 지식을 지녔지만 다산은 사상적으로 드러내어 논술하지는 않았다. 다산이 혜장선사의 탑명(塔銘)에 “아암(兒菴)은 외전(外典) 중에서 《논어(論語)》를 매우 좋아하여, 그 지취(旨趣)를 연구하고 탐색하여 빠뜨린 온축이 없도록 기했다.

기윤(朞閏)의 수와 율려(律呂)의 도(度), 그리고 여러 가지 성리서(性理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확하게 연마하였으니, 속유(俗儒)들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었다.”라고 쓸 정도로, 오히려 혜장선사가 다산으로 인해 유학에 경도되었고, 다산은 이어 “묵(墨)의 이름 유(儒)의 행실은 군자가 어여삐 여긴 바로세.”라고 그를 평하였다.

반면, 추사는 불교가 체화된 듯 아주 자연스럽게 불교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은 말과 글을 통해 표현되기 마련이다. 스님들과 동암(桐庵) 심희순(沈熙淳)에게 쓴 편지에서 복전(福田), 번뇌해(煩惱海), 조주구(趙州狗), 관정(灌頂)이란 용어를 비롯하여 《유마힐경(維摩詰經)》의 “불 속에서 솟아난 연꽃[火中之湧現蓮花]”, 방할(棒喝), 향적반(香積飯), 종승가(宗乘家) 등 불교 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제주 병사 장인식(張寅植)에게 쓴 편지에 야마(夜摩)와 도리(忉利), 팔만사천 길상(吉祥), 《전등록(傳燈錄)》의 간목(竿木)이란 말이 나오고,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쓴 편지에도 《수능엄경(首楞嚴經)》의 파익(波匿)의 추백(皺白), 《원각경》의 “손끝으로 달 가리키기[指端摽月]”를 인용하였다.

 다산의 아들인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에게 보낸 편지에는 “계족산(鷄足山) 중에 있는 하나의 금란가사(金襴袈裟)로서 필경 미륵(彌勒)이 세상에 나와 사용하길 기다리는 것”이라고 미륵신앙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연화풍(蓮花風), 공안(公案)이란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으며, 홍현보에게 쓴 편지에서는 “수미산을 풀씨 속에 들여보내려는 격이니” “산승(山僧)을 인하여 비로소 연어(蓮馭)가 도성에 들어갔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법(法)의 인연이 속(俗)의 인연보다 나아서란 말인가”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편지글에 불교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그의 신앙심이 돈독하였고, 그의 의식 저변에 불교적 사유가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추사는 편지나 글에서 자신이 유가(儒家)임을 주장한다. 《주역(周易)》의 〈기제(旣濟)〉를 설명하며 권돈인에게 쓴 편지(가)와 백파선사에게 쓴 글(나)을 살펴보자.

가) 불씨 무리[佛氏輩]들은 이 경계를 불생· 불멸·부증·불감이란 것으로 보아 위도 없고 남은 것도 없는 것[無上無餘]으로 여기고 있으나, 그들은 실상 정해진 후 또 끝없이 생생(生生)하는 묘(妙)가 있어 사생(死生)과 종시(終始)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 우리 유가[吾儒]의 성인(聖人)이 세간법을 절실하게 말하면서 명(命)과 인(仁)을 드물게 말한 것은 출세간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범우(凡愚)들이 공견(空見)에 집착할까 염려한 때문입니다. 불씨(佛氏)가 출세간법을 절실하게 말하면서 시(是)와 비(非)를 드물게 말한 것은 세간의 법을 버린 것이 아니라 범우들이 유견(有見)에 집착할까 염려한 것입니다.

가)에서는 불교를 ‘불씨 무리[佛氏輩]’라고 일컬으면서 《주역》의 이른바 평균(平勻)의 의미는 물마다 각각 제자리를 얻는 것인데, 불교는 이처럼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치를 보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나)에서는 ‘우리 유가[吾儒]’라고 사상적 입지가 유학임을 밝히고 있지만 추사는 유견(有見)과 공견(空見)을 가지고 유불(儒佛)의 특징을 균형 있게 분석하고 있다. 전반부는 “공자께서는 이(利)와 명(命)과 인(仁)은 드물게 말씀하셨다[子罕言利與命與仁].”라는 말에 근거하는데, 주자는 “이익을 도모하면 의리를 해친다. 천명의 이치는 미묘하고 인(仁)의 도(道)는 크다. 그래서 공자께서 드물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석하였다. 후반부는 육조혜능이 깨달음을 얻은 《금강경(金剛經)》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처럼 시비분별 등 집착이나 얽매임을 넘어서는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유불(儒佛)의 분별과 공유(空有)의 분별을 넘어서라는 말이므로, 궁극적으로는 그가 불교적 사유에 근거해 논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가장 친한 벗 권돈인에게 쓴 편지에서 “서방의 극락국은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면 즉시 갈 수 있다던데, 소인의 생각은 아직 미진한가 봅니다.”라고 하였고, 《화엄경》 《금강경》 《법화경》 《유마경》 《능엄경》 등 대승경전은 물론이고 《아함경》과 들숨날숨 명상법을 위주로 한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권돈인에게 쓴 편지에서 《안반수의경》에 나온 호흡법을 다 익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으며,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에서 무상의 묘법인 《안반수의경》을 선가(禪家)에서 알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또 하룻밤의 길이가 1년처럼 느껴져 잠깐 졸다가 이내 깨곤 하면서 새벽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마치 사면(赦免)받기를 바라는 심정과 같으니, 일찍이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한 법문을 공부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지난날 우리 친구와 더불어 이것을 논하였으나 깊이 연구하지 못하고 보니, 다만 끝까지 뜻만 거스를 뿐입니다.

근자에 《안반수의경》을 얻었는데 이는 선장(禪藏)에도 드물게 있는 것이지요. 선가에서 매양 맹방할할(盲棒瞎喝)로써 흑산(黑山)의 귀굴(鬼窟)만을 만들어가고 이러한 무상(無上)의 묘법을 알지 못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비민(悲憫)을 느끼게 하는구료.”

또한 초의선사에게 《전등록(傳燈錄)》을 구하여 새 목사 편에 보내주기를 청하고 있으며, 불교백과사전에 해당하는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을 구하여 읽었고, 영명연수(永明延壽)의 《종경록(宗鏡錄)》 100권 전부를 구하여 읽었을 정도로 불교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불경을 구하여 읽으면서 불교의 세계관에 심취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유배지에서도 꾸준히 불교를 공부한 결과 그는 스님들까지 평가할 정도가 되었다.

이 승려 한민(漢旻)은 스스로 운구(雲句)라 호칭하는 사람으로서, 작년부터 소인에게 내왕하였는데, 신근(信根)이 대단히 있고 원력(願力)도 대단히 있습니다. 비록 미처 제승(諸乘)을 두루 섭렵하지는 못했으나 《금강경》 《능엄경》에 대해 공부를 퍽 많이 하였고, 그 정진하는 정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3. 신앙으로서 불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추사의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은 집안 환경의 영향이 매우 크다.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月城尉)가 된 김한신(金漢藎)에게 영조는 예산 일대를 별사전으로 내렸고, 당시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건립비용을 분담하여 53칸짜리 집을 지은 것이 오늘날 추사고택이다.

증조부 김한신 때부터 오석산(烏石山) 화암사(華巖寺)를 중건하여 원당(願堂) 사찰로 삼았기 때문에 추사는 어릴 때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안 사찰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불교 분위기에 젖었을 것이고, 당연히 원찰에 대한 애착도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추사는 화암사 대웅전 뒤에 있는 병풍바위에 “시경(詩境)”을 새겨 놓고 오른쪽에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 새기기도 하였다. 그가 제주에 유배가 있을 때 화암사 중건을 주도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회갑을 맞은 추사가 멀리서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며 계획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오석산 화암사 상량문〉과 현판을 써서 육지로 보낼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그의 부친인 김노경(金魯敬)도 경상감사 시절, 해인사의 대적광전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중수하도록 시주하였는데, 그때 33세이던 추사가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을 썼다. 부친이 평안감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추사 나이 43세로 예조참의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묘향산의 보현사(普賢寺)에 가면서 《금강경》을 호신부적으로 가지고 갈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일정 중에 상원암(上元庵)에 들러 현판 글씨와 《옥추보경(玉樞寶經)》 판각본의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추사의 불심이 잘 드러나는 것은 53세 때 정성 들여 단정하게 해서체로 쓴 〈반야심경첩(般若心經帖)〉이다. 아마도 서사(書寫)의 공덕(功德)을 위한 사경(寫經)인 것 같은데, 글자 수를 세어 행의 배치까지 계산한 초본이 있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 한편 글자 순서가 틀렸는데도 그것을 다시 쓰지 않고 교정부호로 교정한 것을 보면,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추사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도 있다.

또한 초의선사에게 쓴 편지에서 글씨와 시헌력(時憲曆)을 보냈는데 바람에 표류하여 전해지지 못한 것에 대해 언급하며 “배 안의 사람들은 《관음경(觀音經)》 한 구절도 읽을 줄 아는 자가 없었더란 말인가.”라고, 위기의 순간에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파도가 잠잠해지는 공덕을 왜 기원하지 않았는지 힐문하고 있다. 이는 기도와 염불을 통해 구원을 추구하는 그의 신앙인으로서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추사는 또한 스님들과 교류가 많았는데, 제주 유배 시절 6개월, 이후 강상(江上)에서 2년을 함께한 초의선사와의 관계는 단순히 벗을 넘어 학문적 동지였던 듯싶다. 40여 통에 가까운 편지를 보면, 안경을 보내고 효험을 보았는지 묻거나 차를 보내주는 그런 일상적 교류를 넘어선다. 추사에게 초의선사는 불교적 사유를 공유하는 붕우이자 불교에 대한 탐구를 검증하는 사우(師友)였던 것이다.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을 구득하여 좋이 날을 보내고 있는데 사(師) 같은 이가 옆에 있어 입증을 못해 주니 한이외다.

뒤이어 또 《종경록(宗鏡錄)》 100권을 전부를 얻었으니 이것도 한 가지 문자의 인연인데 사(師)와 더불어 고증할 수 없어 한이외다.

《법원주림》 《종경록》 신편 어록은 와서 서로 고증하고 싶지 않은가? (……) 봄이 따뜻하고 해가 길면 빨리 석장(錫杖)을 들고 와서 《법원주림》 《종경록》을 읽는 것이 지극히 묘한 일일 걸세.

이처럼 추사와 초의선사는 단순한 만남을 넘어 경전을 읽고 깨우침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였다. 추사는 초의선사 외에도 호봉(虎峰), 운구(雲句), 미암(彌庵), 혜암(慧庵), 우담(優曇), 태허(太虛) 등 많은 스님과 편지로 교유하였고, 향훈(香薰), 제월(霽月), 무주(无住), 연담(蓮潭) 등 스님들에게 여러 견향게(見香偈), 안게(眼偈), 정게(靜偈), 사경게(寫經偈), 적게(寂偈), 성담상게(聖潭像偈) 등 다양한 게문(偈文)을 지어서 드렸다. 스님들과의 교류는 인간관계를 넘어 불심(佛心)을 바탕으로 한 만남이었던 듯하다.

만년의 추사는 더욱 불도(佛道)에 귀의하여 일흔 살에는 봉은사에 기거하면서 발우공양하고 자화참회(刺火懺悔)하며 살았고,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자로서 생을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봉은사 ‘판전(板殿)’ 현판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그의 마지막 불심이 담겨 있다.

4. 예술로서 불교

추사의 창의성과 독창성이 드러나는 것은 180여 개의 별호를 자유자재로 짓고 활용한 것이다. 그중 불교와 인연을 나타낸 이름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불노(佛奴) 등이 있다. 불심이 깊었던 추사는 원찰인 화암사 현판뿐만 아니라 혼허지조(混虛智照) 스님의 부탁으로 경북 영천 은해사(銀海寺)의 현판들, 즉 “은해사” “대웅전” “보화루(寶華樓)” “불광(佛光)” “시홀방장(十笏方丈)” 등을 흔쾌히 써주었으며, 또 여러 사찰 스님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절집 암자의 현판을 자주 써주었다. 부안 변산의 “소요암(逍遙庵)”, 계룡산 동학사의 “자묘암(慈妙庵)”도 있다.

추사의 불교적 사유는 그림에도 잘 드러나는데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난을 치면서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추사의 염원을 담고 있다.

不作蘭花二十年    난화를 치지 않은 지 스무 해
偶然寫出性中天    우연히 본성을 훤히 그려 냈구나
閉門覓覓尋尋處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此是維摩不二禪   경지가 바로 유마의 불이선이라네

재가신자로서 유마거사의 삶을 본받고자 하였던 그는 《유마경》의 가르침, “보살은 본래 병이 없으나 중생이 병들기 때문에 보살도 병이 든다.”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보살행과 “지혜를 어머니로 하고 방편(方便)을 아버지로 한다.”는 경전의 맥락을 그의 삶에서 꾸준히 추구하며 살았다. 그것을 그림으로 승화시키고 그 기쁨을 ‘제란(題蘭)’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마거사를 자처하였던 추사는 글을 쓸 때나 그림을 그릴 때 대립과 차별을 버리고 분별의식과 집착을 벗어난 불이(不二)의 경지를 추구하였다. 비록 세속에서이지만 유마거사처럼 이 삶 속에서 해탈을 추구하였고 번뇌와 해탈, 중생과 붓다의 불이적 사유야말로 추사가 추구했던 바이다.

추사가 지은 불교 관련 시(詩)를 살펴보자. 〈산사(山寺)〉 〈수락산사(水落山寺)〉 〈부왕사(扶旺寺)〉 〈관음사(觀音寺)〉 〈화암사에서 돌아오는 길에[華巖寺歸路]〉 등 사찰 관련 시에서는 자연과 산사와 불심의 삼위일체를 추구하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세모승(細毛僧)〉 〈우사연등(芋社燃燈)〉 〈서엄(西崦)〉 등의 시에서는 불교적 의식과 사유가 구현되고 있다.

또한 〈중흥사에서 황산시에 차함[重興寺次黃山]〉 〈증초의(贈草衣)〉 〈유초의선(留草衣禪)〉 〈희증초의(戲贈草衣)〉 〈증혼허(贈混虛)〉 〈관화에게 주다[贈貫華]〉 〈은어를 쥐에게 도둑맞고서 초의에게 보이다[銀魚爲鼠偸示艸衣]〉 〈승가사에서 동리와 함께 해붕화상을 만나다[僧伽寺與東籬會海鵬和尙]〉 〈관음사에서 혼허에게 주다[觀音寺贈混虛]〉 〈옛 글귀를 그대로 써 혼허사를 위하다[仍題舊句爲混虛師]〉 〈초의의 불국사시 뒤에 쓰다[題草衣佛國寺詩後]〉 〈관음각에서 연운 심설과 더불어 시선의 모임을 갖다[觀音閣與硯雲沁雪作詩禪會]〉 〈가을밤에 연생과 더불어 함께 짓다[秋夜與蓮生共賦]〉 〈산영루(山映樓)〉 등의 시에서는 스님들과 교류하면서 느끼는 불심과 불교적 감성을 드러내고 있다.

5. 사상으로서 불교

추사의 불교 인식의 정점은 백파선사와의 선(禪) 논쟁과 〈천축고(天竺攷)〉에서의 불교관이다. 먼저 〈천축국에 대한 상고[天竺攷]〉는 불교의 탄생지 인도에 대한 그의 방대한 지식과 생각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글인데, 논리적 오류를 지적한 내용에서 추사의 불교에 대한 관점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사리(舍利)가 중국에 들어와 우리 동방에까지 오게 된 것은 제불(諸佛)의 사리 또한 많이 있었으니, 이 모두가 석가의 사리는 아닐 것이다. 부처의 정골도 중국에 흘러들어와 우리 동방에까지 들어왔는데, 오천축 안에 있는 부처 정골 또한 한두 개가 아니니, 이것이 어찌 다 석가의 정골이겠는가? 그리고 진신(眞身)이 파괴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 어떻게 정골만 따로 전해진단 말인가.

《열반경》 또한 어떻게 번역의 오류가 없을 수 있겠는가. 관곽 속에서 두 발등을 내보였다[槨示雙跗]는 한 가지 안건이 천만 가지 설(說)들을 일으켜 뭇 장님이 코끼리를 논하는 격이 되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게 한다.

경(經)을 번역하는 데는 매양 전해 들은 것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범어(梵語)를 당어(唐語)로 번역하는 데 있어 한 번 두 번 바꾸는 데에 따라 점차로 더욱 오류가 나오게 되는 것은 필연의 이치인 것이니, 달마(達摩)가 이 때문에 일체 다 쓸어버렸던 것이다.

추사는 부처의 진신사리에 대해 의심하고 있으며 《열반경》의 내용을 포함하여 여러 경의 오류에 대해 산스크리트어가 중국에 들어와 한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생긴 필연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달마의 선종이 나오게 된 원인이 바로 이러한 불경의 번역과정에서 나온 오류들 때문이라고 파악한 듯하다.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지리적 지식에 더하여 불교에 대한 고증학적 분석을 볼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추사의 삶에서 완당바람이라는 예술적 교류와 더불어 사상적으로 의미가 큰 것은 백파선사와의 선(禪) 논쟁이다. 제주 유배 4년째인 58세 때, 77세의 백파선사와 편지를 통해 벌인 선(禪) 논쟁에는 추사의 불교에 대한 인식과 화두선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두드러진다. 백파선사는 법명이 긍선(亘璇)이고, 전주 이씨로 선조(宣祖)의 부친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10세손이다. 18세 때 연곡화상(蓮谷和尙)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24세 때 당시 화엄종장인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에게 구족계를 받고 《화엄경》을 배웠다. 26세 백양사 운문암 강사 스님이 되었고, 30세 때는 구암사에서 사미계를 설해 율사로서 발을 디디고, 49세 때부터 정읍의 용문동에 들어가 8년간 습정균혜(習定均慧)하였다. 한국 선종의 역사에서 백파선사는 서산휴정(西山休靜)과 그 문하에서 주도해왔던 조선 선문의 체질 강화 작업을 착실히 계승한 인물이며, 그의 《선문수경(禪文手鏡)》은 전통적인 선종 각 종파의 미묘한 차이를 ‘중도’와 ‘돈오’를 기준으로 종합, 정리한 저술로,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몰락해가는 선종의 중흥을 시도한 것이기도 하다. 그의 삼종선(三種禪) 논의는 법통이라는 다분히 유교적인 방식을 통해 일방적으로 선포되었던 임제선의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객관화해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논쟁은 백파선사가 지은 《선문수경》이 발단이었는데, 핵심은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의 구도에서 그것을 임제삼구(臨濟三句)에 배당시키고 선종오가에서 하택종을 의리선에, 법안종과 위앙종과 조동종을 여래선에, 운문종과 임제종을 좌선에 배당하고, 운문종과 임제종 가운데 기용(機用)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최상승종은 임제종이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추사가 그 주장에 대한 오류를 편지로 보내고, 백파선사가 ‘13가지로 논증한 답신’을 보냈으며, 다시 추사가 ‘백파망증15조(白坡妄證十五條)’로 논증한 글을 보낸 것이 핵심이다. 초의선사도 백파선사의 주장을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추사는 화두선을 비판하며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불교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화두로 사람을 가르치는 자도 역시 자신이 깨치고 또 남을 깨칠 수 있다고 보는가? 자신의 깨침이 없이 다만 옛사람의 성어만을 사용하여 그 깨치고 안 깨치고를 논할 것 없이 마구 사람 가르치는 방편으로 삼으며 따라서는 또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 경솔히 화두도 추겨 들지 말며 염송사(拈頌師) 되기를 좋아도 말며 머리를 숙이고서 《안반수의경》을 읽으면 거의 혹 일선(一線)의 광명이 앞에 있게 될 거외다.

오늘날 산가(山家)에서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고 단지 맹할할방(盲喝瞎棒)으로써 마침내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어찌 크게 슬프고 민망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반드시 하나의 눈 밝은 사람이 나와 이 화두를 일소하여 없애 버려야만 법당(法幢)을 다시 일으킬 수 있고 혜등(慧燈)을 다시 불 붙일 수 있을 거요.

지난번에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를 읽으라고 권한 것은 어찌 《반야경》과 《법화경》를 몰라서리요. 특히 사(師)의 근기(根器)와 식해(識解)가 이로 말미암아 들어가야만 문로(門路)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안반수의경》으로써 이 방편의 교체(敎體)를 세워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비유하자면 《법화경》 중의 화성(化城)과 같아서 비유하여 말한 것이니 실로 사(師)를 슬퍼하고 민망히 여겨서 그런 것이며 사(師)를 얕잡아 보거나 업신여긴 것은 아니오.

추사의 당시 불교에 대한 관점은 화두선에 대한 비판, 불교 정신과 수행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추사는 백파선사의 삼종선 주장에 대하여 비판하고는 있지만, 새로운 선풍으로 선문의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한 백파선사의 주장을 전면 거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세간/출세간, 공견/유견, 유교/불교 등 서로에 대한 비판들이 상대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근거하였다고 보면서, 궁극적으로는 백파선사의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선가(禪家)가 공연스레 유불(儒佛)의 동이(同異)를 가지고 망령되이 갈등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근일에 백파의 결사문(結社文)에서 말한 내용이 나의 말과 부합되는 점이 있으니, 선림(禪林) 속에서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추사는 백파선사가 《선문수경》과 《정혜결사문》에서 조사선과 여래선의 우열을 가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선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방안으로 삼종선을 제기한 것임을 인식한 듯하다. 당시 선문은 휴정 사후 법통 논쟁의 핵심에 임제선을 통한 불교계의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이 있었던 시기로, 선종의 법통설에 근거하여 임제종의 법맥을 정비하고자 하였다. 백파선사는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격외선과 의리선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만 의리선을 선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임제종을 중심에 놓고 조사선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도 있지만, 중하근기자들도 선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여래선에 더하여 의리선까지 선에 포함시킴으로써 일반 재가자들이나 하근기자들도 선을 통한 수행이 가능하게 하고자 함인 듯하다.

추사는 제주 해배 길에 선운사를 떠나 순창 구암사에서 선을 강론하던 83세의 백파선사를 만나고자 하였다. 구암사에 전갈을 보내 정읍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하룻길을 지체하는 바람에 종일 기다리던 백파선사를 만나지 못하고 3년 뒤 백파선사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추사가 ‘화엄종주’ ‘율사’라고 칭한 것은 앞에서 본 백파선사의 경력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가 쓴 〈백파비의 전면 글자를 지어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라 써서 그 문도에게 주다〉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貧無卓錐       가난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氣壓須彌       기상은 수미산(須彌山)을 누를 만하였네
事親如事佛   부모님 섬기길 부처님 섬기듯 하니
家風最眞實   가풍(家風)이 가장 진실하도다 
厥名兮亘璇   그 이름 긍선(亘璇)이라 일렀으니
不可說轉轉   더할 말이 없구나

추사의 불교 지식이 해박하였다 하더라도 당시 화엄의 대가요 선풍을 주도한 백파선사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유학자이면서도 불교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갖추었다는 것, 그리고 당당하게 화두선을 비판하며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불교의 본질을 강조한 것은 오늘날에도 의미 있다 할 수 있겠다.

6. 맺음말

《철종실록》에 나온 추사의 졸기(卒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전 참판(參判) 김정희(金正喜)가 졸(卒)하였다. 김정희는 이조판서[吏判]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서 총명(聰明)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金石文)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隷書)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境地)를 신기하게 깨달았었다. 때로는 혹시 거리낌 없는 바를 행했으나, 사람들이 자황(雌黃)하지 못하였다. 그의 중제(仲弟) 김명희(金命喜)와 더불어 훈지(壎篪)처럼 서로 화답하여 울연(蔚然)히 당세(當世)의 대가(大家)가 되었다. 조세(早歲)에는 영명(英名)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서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귀양 가서 온갖 풍상(風霜)을 다 겪었으니,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에게 견주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라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살았던 추사의 모습은, 개방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하고 치열했던 예술인으로서 삶, 가족을 비롯한 많은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였던 인간으로서 삶, 비문을 탁본하고 고증학적 탐구를 그치지 않았던 학자로서 삶 등 다면적이다. 그의 삶에 가장 큰 기반이 된 것은 물론 유교였다. 유교 경전을 공부하여 3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주역》을 비롯한 경전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의 토대를 이루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것은 불교였다. 연행(燕行) 경험에 대한 자부심, 백파선사에 대한 다소 무례한 표현, 이광사와 이삼만의 글씨에 대한 자의적 평가 등도 그의 기질적 열정에 기인한다. 이러한 패기와 호방함은 유배의 고난 속에서 예술가로서의 추사의 감수성을 꽃피우는 계기가 되었고, 그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불교가 아니었을까. 그의 열정과 감수성이 불교, 그리고 제주의 자연과 만나 추사체로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

 

장승희 /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 수학. 서울대학교, 동국대학교 출강. 주요 저서로 《다산 윤리사상 연구》 《유교사상의 현재성과 윤리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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