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이상으로 사회개혁을 꿈꾸다*

1.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매우 다르다. 허균이 살았던 16~17세기에는 학문을 어지럽힌 사문난적이자 임금과 통치 질서에 항거한 역적으로 평가되었으나, 개개인이 나라의 주인이 된 20세기 중반부터는 시대를 앞선 혁신적 사상가로 평가되었다. 이것은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교산이 살았던 16~17세기는 유학의 교조성(敎條性)이 우심했던 시기였다. 섬나라로 우습게 여겼던 왜국에게 7년이나 국토가 유린당하고 무고한 백성들이 어육처럼 짓밟힌 참혹한 전란을 겪은 조선사회는, 균열되는 지배체제와 사회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통치이념인 유학은 더욱 교조성을 띠게 되었다. 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학자가 될 수 없었으며,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없었다. 유학은 삶을 규정하는 준거이자 평가의 척도였고, 유학의 이념과 규범에 벗어나는 일체의 사고와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교산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유학의 이념에 충실하기보다는 이단으로 배척한 불교에 경도되었고, 신분차별을 반대하고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했다. 유학의 허례와 허식을 거부했으며, 본성에 따라 육체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그의 자유분방한 생각과 행동은 기득권층과 권력층의 분노를 유발했고, 그는 타도의 대상이 되어 결국 역모로 몰려 참형에 처해졌다.

교산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당대의 지배층을 자극하고 화를 초래할 것을 알지 못했을까? 그는 유학의 이념에 반하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이 화를 초래할 것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열 살 무렵 지은 시로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면 그는 왜 그런 삶을 살았을까?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2.
 
교산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였으나, 유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당대의 통치 체제를 거부하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그는 유학자들이 입에 담기를 꺼리고 금기시했던 육체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았고, 신분차별을 반대하며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했다. 그런 그의 주장과 행동은 기득권층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고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교산은 모친상 중에도 고기와 술을 마셨고 기생들과 어울리며 즐겼다. 그래서 당시의 선비와 학자들은 그를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늘이 허균이라는 괴물을 세상에 내셨는데 ……중략…… 허균이 평생 동안 한 짓은 온갖 악행을 다 갖추고 있는데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행실은 다시 사람의 도리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상중에 창기를 데리고 놀아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위의 글은 교산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무렵 홍문관 언관들이 광해군에게 올린 차자(箚子)의 일부다. 당시 부모상을 당하면 삼년상을 지내는 것이 법도였다. 이 기간에는 고기도 먹지 않고 부부 사이에도 합방하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다. 그러나 교산은 어머니상 중에도 고기와 술을 마음대로 먹었고, 기생들을 데리고 놀아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질타를 받았다. 당시의 예법과 규범으로 볼 때 교산의 행동은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교산의 자유분방한 삶은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31세 때 황해도 도사로 부임한다. 도사는 지방 관리의 부정과 불법을 사찰하여 규탄하는 것이 주요 임무인데, 그는 임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서울에서 정분이 있었던 기생까지 데리고 와서 즐기며 임무에 태만하여 백성과 수령들의 비난을 받았다.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자 사헌부에서는 그의 비행을 왕에게 주달(奏達)하여 파직을 요청하였고, 그는 결국 파직되었다. 황해도 도사가 된 지 7개월 만이었다.

교산은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고, 남녀 간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본성이기 때문에 하늘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런 그의 삶은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용납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의 삶은 고단했고 파란의 연속이었다. 교산은 26세 때(1594년, 선조 27)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외교문서를 맡아보는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하여 종사관으로 중국 사신을 다녀오기도 하지만,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몇 차례나 파직당한다.

황해도 도사에서 파직당한 이후, 35세 때는 맏형 허성의 딸과 선조의 제8남인 의창군과의 혼사에 휘말려 신율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고, 36세 때 수안 군수로 재직하였다가 사림(士林)의 규탄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리고 39세 때는 삼척 부사가 되었으나 부처를 숭배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 40세 때는 공주 목사가 되었으나 성품과 행실이 경박하고 검소하지 않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러다가 50세에는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결국 이이첨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유교의 교조성에 갇힌 조선사회가 자유분방한 그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산은 이러한 조선사회를 비판하며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유교의 교조적 획일성을 비판하고 거부했다. 

지난번 이른바 다섯 현인을 사당에 모신 적이 있었다. 의논을 벌이는 자들이 “이 다섯 사람 말고는 사당에 모실 수 없다.”고 하니,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어진 사람을 어찌 다섯으로만 꼭 정해야 한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후세에 비록 공자나 안자와 같은 학문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사당에 모실 수 없다는 말인가.

당시 문묘 배향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교산은 오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만을 문묘에 배향하여야 한다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의 주장과 같이 받들고 존경해야 할 어진 사람을 한정할 수 없는 일인데도, 당시의 기득권층이 이것을 불가침의 규범으로 정해버렸다. 기득권 세력은 자신들이 내세운 유교의 예교주의와 교조주의로 사회질서와 개인의 삶을 통제하고, 그것에 저촉되는 일체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학 경전에 대한 해석도 주자(朱子)의 해석을 벗어나면 사문난적으로 몰아 멸문이라는 극단적 처벌을 가하기도 했다.

교산은 그런 당시의 유교적 교조주위와 예교주의를 거부하며 유학자들의 자세와 학문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비판했다.
 
요즘 세상의 이른바 학문하는 이들은 우리 유학이 높임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고 또 자기의 몸만이라도 착하게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입으로 지껄여 댄 것과 귀로 들은 것을 되는대로 주워 모아 겉으로 말을 번지르르하게 꾸며대고 몸가짐을 그럴듯하게 꾸며 거드름을 피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스스로 일컫기를 “나는 도를 밝힌다” “나는 이치를 깊이 공부한다”고 떠들어 한때의 모든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을 어지럽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것을 끝까지 살펴보면 높은 명망이나 낚아챌 뿐이요, 참 이치를 높이고 도를 뒷세상에 전하는 실제 일에는 곁눈질이나 흘금흘금 하다 보니 조금도 엿본 것이 없는 듯하다. 이것은 그들의 뜻이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둔 탓이다. 그렇다면 공평과 사사로움이 불 보듯 나누어지고 참과 거짓이 해 보듯 뚜렷해진다. 

교산은 당시의 학자들이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배운 것을 실천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학행일치와는 거리가 먼 허황한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높은 명성이나 얻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교산의 이런 비판은 부패하고 탐악한 관리와 집권층에 대한 불만도 한 요인이었다.

교산은 임진왜란으로 어머니와 가족을 데리고 함경도로 피난하던 중 만삭인 아내를 잃게 된다. 그는 아내의 주검을 장사 지내기 위해 타고 다니던 소를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 왜군이 공격해온다는 소문에 제대로 무덤을 쓰지도 못하고 다시 피난길을 재촉해야 했다. 그런 피난살이를 하면서 목격한 관리들의 수탈과 횡포에 분노를 토로했다.

老妻殘日哭荒村   해는 지는데 늙은 아내가 황폐한 마을에서 통곡하네
蓬髮如霜兩眼昏   헝클어진 머리엔 서리 내리고 두 눈동자는 흐릿하네
夫乞債錢囚北戶   사내는 빚 갚을 돈이 모자라 차가운 감옥에 갇혀있고
子從都尉向西原   아들은 도위를 따라 청주로 떠났다네
家經兵火燒機軸   집안은 난리를 겪느라 기둥 서까래마저 불타고
身竄山林失布褌   숲 속에 몸 숨기느라 베옷마저 잃어버렸네
産業蕭然生意絶   살림도 썰렁하고 살 의욕마저 없는데
官差何事又呼門   관가 아전은 또 무슨 일로 이 집 대문 두드리나

위정자들이 나라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섬나라 오랑캐라고 얕보던 왜적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백성들은 고난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탐학한 관리들은 백성을 착취하고 핍박하는 것을 보고 교산은 비판과 분노를 토로했다. 그는 함경도까지 피란을 갔다가 아내와 갓 난 아들을 잃고,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피난하여 국방과 관련한 글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도 지어 국정과 시폐를 비판하고 지적했다.
위정자들과 관리들은 백성의 고난은 돌보지 않고, 학자들은 그럴듯한 명분과 형식적인 예교주의만 내세우는 것을 묵과하지 않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산의 태도는 기득권층과 권세가들의 미움을 샀고 배척의 빌미가 되었다. 그 자신도 학행일치의 삶을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였으니, 기득권층들은 그에게 작은 흠이라도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질타하고 관직에서 제거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교산은 관리의 부패와 국정의 혼란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했고, 나라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라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상을 펴기도 했다.

서얼 차별은 조선사회의 모순 중의 하나였다.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형제들까지 죽이면서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도전이 서류였기 때문에 난을 일으켰으니 서류의 벼슬길을 막자는 서선(徐選)의 주청을 받아들여 서얼들은 대대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교산은 이런 신분차별을 납득할 수 없었다.

예부터 지금까지 시대가 멀고 오래이며, 세상이 넓기는 하더라도 서얼 출신이어서 어진 인재를 버려두고, 어머니가 개가했기 때문에 그의 재능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으니 어머니가 천하거나 개가했으면 그 자손은 모두 벼슬길의 차례에 끼지 못한다. 변변찮은 나라로서 두 오랑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니, 모든 인재가 나의 쓰임으로 되지 않을까 염려해도 오히려 나라의 일이 이룩되기를 점칠 수 없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이 그러한 길을 막고는 자탄하기를 “인재가 없군, 인재가 없어.” 하니 월나라로 가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웃 나라에 알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교산은 스승인 손곡 이달을 비롯한 전 오자(權韠, 李安訥, 趙維韓, 許積, 李再榮)와 후 오자(鄭應運, 趙喜述, 趙纘韓, 奇允獻, 任叔)라 불리는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물들이 서류라는 이유로 등용되지 못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일찍부터 보았다. 교산이 서얼 차별을 반대하는 개혁적 사상을 지니게 된 데는 이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나, 그의 거침없는 호방한 성격 또한 지배층들이 독점하고 있는 관직 사회를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개혁사상이 잘 드러나고 있는 《홍길동전》 《남궁선생전》 《장생전》 등의 문학작품과 〈호민론〉 〈유재론〉 등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3.

불교는 교산이 파란 많은 삶을 살게 된 한 요인이자 의지처이기도 했다. 그는 스님들과 가까이 지내며 불교에 깊이 심취했다. 경직된 유교 이념에 대한 반발과 불교의 심오하고 개방된 세계가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잘 부합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사림의 비난을 받고 삼척 부사에서 파직당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산이 살았던 16, 7세기는 유학의 교조성이 우심했던 시기로 당시의 유학자들은 불교를 이단시하고 배척했고, 불교와 친밀하거나 신봉하는 사람들을 풍속과 기강을 어지럽히는 사람으로 매도하고 배척했다. 유학자들의 경직되고 폐쇄된 사고가 다양한 학문과 진리의 세계를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교산이 불교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중형의 벗인 사명당과의 만남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명당은 중형 허봉의 죽음을 슬퍼하며 만사(挽詞)를 지었고, 교산에게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休說人之短與長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게
非徒無益又招殃   이로움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까지 불러온다네
若能守口如甁去   만약 입 지키기를 병마개 막듯 한다면
此是安身第一方   이것이 바로 몸 편안하게 하는 으뜸 방법이라네 
— 〈贈許生〉

사명당은 교산이 재주는 뛰어나지만 경박한 언행으로 화를 당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사명당은 교산보다 나이가 25살이나 많아 두 사람의 교분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교산은 사명당의 문집 서문과 비문을 지었다. 《사명당집》 서문에서 교산은 사명당과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떤 스님이 갑자기 나타나 뱃머리에 서서 읍을 하는데 헌걸찬 체구에 용모가 단정했고, 함께 앉아 담화를 나누는데 말이 간단하였으나 그 뜻이 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바로 종봉(種峰) 유정사(惟政師)였다. 나는 그만 진심으로 선모(羨慕)하고 말았다.

교산은 사명당을 처음 만나고 그의 예사롭지 않은 인품에 흠모하게 되었다고 했으니, 사명당으로 인해 교산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기존의 유학자들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가 불교를 접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글에서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갖고 불경을 읽게 된 이유가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동파(蘇東坡)가 《능엄경》을 읽고 나서 해외의 문이 더욱 지극히 높고 묘해졌고, 근세의 양명과 형천의 글도 모두 불경을 말미암아 깨우친 바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아름답게 여기어 자주 상문(佛家)의 스님을 따라 소위 불교의 경전을 구하여 읽어보니, 그 달견은 과연 도랑이 파이고 하수가 무너지는 듯하며, 그 뜻을 놀리고 말을 부리는 것은 나는 용이 구름을 탄 듯하며 아득해서 도무지 형상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글에 있어서는 귀신같은 것이었다. 시름겨울 때 그것을 읽으면 즐거워지고 지루할 때 읽으면 정신이 나서, 이것을 읽지 않았으면 이 생을 거의 헛되이 넘길 뻔하였다고 생각하고, 1년이 못 되어 1백여 상자를 모두 읽었는데, 마음을 밝히고 성(性)을 정(定)하는 대목이 환하게 깨달아짐이 있는 듯하여 마음속에 엉켜 있는 세속의 일들이 훨훨 그 매임을 벗어버리는 듯하였다. 글이 또 따라서 술술 나와 넘실거림이 한계를 잡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남몰래 마음에 얻음이 있다고 자부하여 아껴 보며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위의 글은 교산의 〈기달산(怾怛山)으로 돌아가는 이나옹(李懶翁)을 전송한 글(送李懶翁歸怾怛山序)〉로, 그가 불경의 독특한 문체에 매혹되어 불경을 읽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소동파를 비롯한 문장가들도 불경을 읽고 나서 문장이 더욱 높고 깊어졌고, 왕양명과 당순지(唐順之)도 불경을 말미암아 깨우친 바가 있었다며 불경의 깊고 오묘한 세계를 찬탄하고 있다. 그는 불경을 통해 문장의 깊이와 다양성을 추구하였으며, 때때로 불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밝히고 세속의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교산이 불경을 읽고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은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파란 많은 삶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산은 기득권층의 미움을 받아 몇 차례나 파직되는데, 그것은 불교와도 관련이 있다. 삼척 부사로 부임한 지 13일 만에 파직당했는데, 그것은 불교를 신봉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음은 사헌부에서 교산이 불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파직을 요청한 상소이다.

삼척 부사 교산은 유가의 아들임에도 그의 아비와 형에 반하여 불교를 숭신하고 불경을 욉니다. 평소에는 승복을 입고 배불(拜佛)하였으며, 수령이 되어서는 재를 올리고 중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면서 많은 이들이 보아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중국 사신이 왔을 때는 제멋대로 선과 부처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여 우리나라의 풍속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게 현혹하였습니다. 이는 지극히 해괴합니다. 파직을 명하고 다시는 기용하지 않기를 청하오니 이로써 공무원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헌부의 상소에 대하여 선조는 ‘자고로 문장을 좋아하는 이들은 간혹 불경을 보기도 하였다’고 하면서 응하지 않았으나, 사헌부에서는 다시 계를 올려 교산을 중의 무리라고 하여 파직을 주장하자, 선조도 어찌할 수 없이 그를 해임하였다.

그러나 교산은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탄핵한 사람들에게 승복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의 방식대로 불교를 좋아하고 행동했다. 파직 이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久讀修多敎   예부터 불경을 읽었던 것은
因無所住心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였다.
周妻猶未遣   주처(周妻)는 아직 보내지 못했고
何肉更難禁   하육(何肉)은 다시 금하기 어렵다. 
已分靑雲隔   내 분수 벼슬과 멀어졌으니
寧愁白簡侵   어찌 탄핵을 근심하랴.
人生且安命   인생은 운명에 맡기리니
歸夢尙祗林   꿈은 오히려 사원(寺院)으로 돌아간다.

위의 시에서 보듯이 교산은 불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파직된 것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교에 의지하고자 했다. 그가 오랫동안 불경을 읽은 것은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어서였다”고 했다. 그의 굴곡 많은 삶에 견주어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한다. 

교산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주위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았다. 그가 아홉 살 때 지은 시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훗날 문사(文士)가 될 것이라고 칭찬을 했지만, 그의 자형(姊兄) 우성전(禹性傳)은 훗날 문사가 되겠지만 허씨 집안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남달리 뛰어난 재주가 시속과 영합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게 한 것이다.

우성전의 우려와 같이 교산의 불운은 일찍 찾아왔다.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된다. 경상도 관찰사이던 부친 허엽은 병으로 체직되어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세상을 떠났다. 교산은 “일찍 부친을 여의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탄방(誕放)하게 다사(茶肆)와 주방(酒房)을 빈번하게 출입하여 보는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겼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교산을 돌봐주고 이끌어준 이는 중형 허봉이었다. 교산보다 18세 많은 허봉은 일곱 살 때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열여덟 살에 생원시에 장원한 인물로 기개가 호방하고 강직했다. 교산은 중형 허봉을 통해 당대의 문장가들을 만났고, 두 명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천재 시인인 이달과 임진왜란을 총괄하여 수습한 명신 유성룡이다. 허봉은 아우의 재주와 장래를 위해 이 둘을 스승으로 삼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허봉은 교산이 15세 때, 선조의 친할머니이자 명종의 후궁인 안빈의 사당을 대궐 안에 봉안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고,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도성 출입이 금지되어 도성 밖을 떠돌다가 교산이 20세 때 병사한다. 교산이 스승처럼 모시고 아버지처럼 여기며 의지했던 중형의 죽음은 그에게 큰 상처일 수밖에 없었다. 교산은 중형의 시문을 모아 《하곡집(荷谷集)》을 엮었고, 중형의 호방하고 강직한 기개를 자랑스럽게 여긴 글을 짓기도 했다.

교산은 중형을 통해 만난 스승 이달에게 시를 배우고, 중형 밑에서 공부를 하며 과거를 준비하여 21세 때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가정적인 불행은 계속되었다. 22세 때 누이 허난설헌이 세상을 떠나고, 24세에는 부인과도 사별한다. 교산은 17세에 두 살 아래의 김 씨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홀어머니와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피난하던 중에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지만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아내의 장사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계속 피난을 다녀야 했다. 이와 같은 가정적인 불행과, 파직과 복직을 거듭한 관직 생활은 그의 비판의식과 개혁사상이 싹튼 요인이 되기도 했고, 그가 노불(老佛)에 관심을 가지고 불교 의지한 계기도 되었다고 하겠다.

교산은 삼척 부사에서 파직된 이후에도 복직과 파면을 거듭하게 되는데, 파직되어 정배되어 있는 동안에 더욱더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함열의 정배에서 풀려나 부안에 있는 동안 스님 해안을 만나 자기의 신세와 견주어 쓴 글에서는 자신이 불교의 교리에 침잠했음을 밝히고, 이로 인하여 세상의 비난이 있다 하더라도 꺼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일찌기 그 글을 읽어보니 환하여 마음에 깨달음이 있었고, 만상을 꿰뚫어서 모두 공(空)한 게 마치 원각을 바로 증거하고 여래지(如來地)에 넘어들어갈 듯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해안에 은둔한 것은 본래 한 대사의 인연을 마치고자 함이니, 비록 예법을 지키는 인사들의 나무람과 탄핵을 입는다 하더라도 나는 꺼리지 않겠다. 그 무생인(無生忍)을 얻어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 고요히 소림황매(少林黃梅)가 해탈한 것과 함께 하게 된다면 머리 깎고 가사를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해안과 나는 똑같은 부처의 무리이다.

교산은 달마대사가 해탈한 것과 같이 하게 된다면 머리 깎고 가사를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스님인 해안과 자기는 똑같은 부처의 무리라며, 승려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불교 궁극의 목적인 해탈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피력하며 불교에 깊이 심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간혹 교산의 불교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는 글이 보이기도 한다. 친구 임자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교산은 불교를 심심파적으로 즐겼다고 했다.

나는 부처를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네. 그 글을 좋아하여 읽으면서 한가로움을 달래고자 한 것이네. 몇 천척(千尺) 정도의 고을을 얻으려 해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부처가 되기를 도모하겠는가. 이는 전혀 그렇지 않네. 그러나 권력에 아부하여 떠들어대기만을 잘하는 무식배에 비한다면 다만 조금 우월하다고 할 것이네.

위의 글은 앞에서 보았던 글들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교산이 자신의 불교관을 솔직하게 나타낸 것이라기보다는 불교를 이단시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편지를 보낸 서산대사에게 네 차례나 편지를 보내 가르침을 청하였고, 그해 가을에는 금강산 도솔원 미타전의 비문을 지으면서 ‘유학과 불교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산이 추구했던 불교적 지향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을 추구한 것일까? 아니면 불교의 가르침으로 폐쇄된 조선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가 불교에서 추구했던 바는 자신이 지은 사명당의 비문에서 엿볼 수 있다.

오호라! 스님의 생애는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 군대가 핍박하여 국가가 강적과 대적해 싸우는 난시를 당하였으므로 법실을 선양하여 미혹한 중생의 번뇌를 털어 없애주고, 씻어주는 일을 제대로 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다. 스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명 스님이 중생으로 하여금 미진인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네주는 일을 등한히 하였고, 구구하게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급급하였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이 어찌 나라를 침범한 악마를 죽이고, 국난을 구제하는 것이 곧 불교의 한량없는 공덕을 짓는 일인 줄 알 수 있겠는가! 유마거사의 무언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가는 것이어늘, 어찌 요란스럽게 말로 훈도할 필요가 있으랴!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교산은 현실을 외면하고 산속에서 수도에만 전념하는 스님이나 수도자를 탐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는 외적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고 백성이 도륙당하는 상황에서 외적을 무찌르고 국난을 구제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한량없는 공덕을 짓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운 사명당을 존경하고 비문을 짓고 문집의 서문도 쓴 것이다. 교산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중생구제에 앞장서는 실천적인 불교를 지향했다고 하겠다. 이것은 그가 바라던 신분차별의 타파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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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교산의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고, 신분차별을 반대하고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며 유교 이념에 갇힌 조선사회를 개혁하려 했던 그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먼저 윤리의식과 자기관리의 중요성이다. 그는 유교 이념에 갇힌 조선사회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모친상 중에도 기생들과 놀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유교의 예법에서 강요한 3년상이나 시묘살이 등은 지나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정서를 거스르는 행동은 절제해야 한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지도자를 비롯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일반인보다 더 엄격한 윤리의식과 자기관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지도자로서 자격도 있고, 추구하는 일도 호응을 받을 수 있다.

다음으로 명분과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산은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이이첨과 손을 잡았다. 이이첨은 권력과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이첨과 손을 잡고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아무리 의도와 명분이 좋고 훌륭해도 수단과 방법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 일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교산이 이이첨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그의 한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불교에 대한 자세도 반성의 거울이 된다. 불경을 읽고 불교에 심취했던 교산은 불교의 교리에 충실한 삶을 살기보다는, 자기의 방식대로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에 의지했다. 불교는 심심풀이나 현학적 사유 놀음의 도구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수행자이고 불교인의 자세이다. ■

 

조구호 / 남명학연구원 사무국장. 문학박사. 경남도민일보 논설위원 역임. 저서로 《한국근대소설연구》 《소설의 분석과 이해》 등과 《아시아의 민속과 춤 연구》(공저), 《남명학과 현대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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