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큰 선비, 불교를 포용하다

1. 머리말

한 사람의 사유세계는 일차적으로 그 사람을 길러낸 사회와 문화의 산물이다. 세상에 태어나 생존마저 위협받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보살펴주는 존재에 대한 애착을 시작으로 점차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한 소통이 가능해지고, 그 소통 과정은 사회에 존재하는 문화적 전통에의 입문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자라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 사람의 사유세계가 그 사회와 문화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다른 한편, 인간의 사유는 자신을 길러낸 세계와의 지속적인 긴장 관계 형성을 통해 깊어지고 넓어진다. 이 긴장 관계는 인간에게 부여된 자율성이라는 속성으로 인해 형성되고, 그 배후에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와 같이 급속한 사회변화를 경험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정체된 상태를 유지하던 사회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조선이나 고려를 그런 사회로 상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상대적인 기준에 의한 평가이거나 현재의 기준에 치중한 허구적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한 인간의 삶과 사유세계는 이처럼 자신이 속한 사회 또는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형성되면서 점차 그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율성 영역의 확장으로 나타난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어느 누구도 어린 시절의 사유세계를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어른이 되지는 못한다. 이 맥락에서 어른은 자신을 형성한 배후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가능한 존재를 가리키는 개념이고, 그 비판적인 인식과정을 우리는 철학함(doing philosophy)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해볼 수 있다. 그렇게 규정하고 나면 우리 모두는 자기 나름의 철학함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는 셈이다.

지성이란 바로 이 철학함의 능력을 전제로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고, 이 지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지성인 또는 지식인이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지식인이라는 말이 단지 지식을 갖추고 있을 뿐 그것을 자신의 신념체계와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지식인 또는 지성인이라는 말이 선호되기 시작했다. 인류 사상사의 초기부터 부각된 이 문제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제대로 알면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명제로 표현되기도 했고 고타마 붓다에 의해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보면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명제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들 자체는 앎과 함의 거리라는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이미 붓다와 소크라테스 당시에도 이 문제는 심각한 논쟁거리였고, 이천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현재에는 거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마저 있다. 선불교에서는 ‘알음알이’라는 보다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이런 경향을 경계했지만, 현재의 한국불교계에서는 이 경계를 이용하여 올바른 이해로서의 깨달음[解悟]조차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한계마저 드러내고 있다.

말과 그 말을 매개로 하는 앎, 그리고 그 앎에 기반한 함은 일련의 연결고리를 지니면서 우리 삶의 심연을 이룬다. 말과 앎, 함은 그 순서를 바꾸어 함에서 말에 이르는 과정을 밟아오기도 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경구는 그 순방향의 흐름이 지니는 힘을 강조한 것이지만, 우리는 ‘함이 앎이 되고 말이 된다.’는 역방향의 흐름에 대해서도 충분히 유념해야만 한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일상의 경구 또한 그런 점에서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앎과 함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많은 지성인들이 우리 역사 속에서 출현했지만, 조선 선비로 한정 지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공자나 맹자에 의해 이미 우리가 알아야 하는 앎은 충분히 제시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남은 과제는 그 앎을 함으로 연결시키는 일 뿐이라고 설파했던 조선 중기의 선비,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바로 그다. 그는 오늘의 진주 지방을 중심으로 평생을 재야에 머물면서 물러남[處]의 모범을 보여준 대표적인 조선 선비다. 퇴계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나 서로를 의식하면서 편지를 통해 불편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던 그들은 각각 삶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기도 하다.
조선을 대표할 만한 선비를 꼽으라고 하면 쉽게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떠오른다. 그 둘은 각각 처(處)와 출(出), 즉 물러남과 나아감의 전형을 보여준 선비의 표상으로 꼽힌다. 율곡은 평생 벼슬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이념을 정치를 통해 구현해보고자 했고, 퇴계는 학문과 관련된 벼슬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물러나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러내는 데 삶을 바쳤다. 그런데 남명의 경우는 벼슬살이 자체를 거의 온전하게 거부하면서 자신이 배운 앎을 실천하고 제자를 길러내는 데 치중했다. 따라서 조선 선비 중에서 물러남의 표상은 바로 남명 조식이라고 할 만하다.

시대의 의(義)가 자신의 원칙과 맞으면 나아가[出] 정치를 통한 안인(安人)의 삶을 꾀하고, 맞지 않으면 물러나[處]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는 수기(修己)의 삶을 사는 것이 조선 선비가 지향한 삶의 모습이었다면, 전자의 모형을 율곡으로 후자의 모형을 남명으로 삼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늘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제자들이 주로 속했던 북인의 몰락과 함께 한때 역사의 뒤안길로까지 물러선 선비가 남명이다.

2. 남명의 학문적 포용성과 실천 지향성

1) 남명의 학문적 포용성

남명 조식(曹植, 1501~1572)은 성리학자일까? 남명은 조선 성리학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를 관통하며 조선 중기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그런 배경에서 보면 남명 또한 당연히 조선 성리학자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조선 성리학을 어떻게 규정짓느냐에 따라 그 분류 자체가 달라질 수는 있지만, 최소한 조선 성리학이라는 개념의 내포(內包)를 이기론(理氣論)과 그것의 심화로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주희(朱熹)의 주자화(朱子化)라는 세 개념을 기준으로 설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 성리학은 주자학이다.

이 기준을 갖고 보면 남명은 조선 성리학자의 범주에서 일정하게 벗어난다. 그가 주희를 주자로 표현하고 존경하고 흠모한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희의 주장과 해석만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명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즉 선진유교의 가르침으로 이미 일정하게 유교는 이론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다고 판단했고, 주희에 의해 그 가르침이 좀 심화되었다는 입장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남명의 학문적 자세는 자신의 호를 장자에게서 빌려온 데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남명(南冥)은 남쪽에 있는 큰 바다라는 의미로, 《장자》 〈소요유편〉에 나오는 이 개념을 자신의 호(號)로 선택한 조식의 행동은 그 자체로 논란이 될 수 있기도 했다. 실제로 남명의 공부는 선진유교의 공맹과 성리학의 주희에 그치지 않고, 도가적 사유와 불교적 사유를 동시에 접하면서 넓은 의미의 유학자이자 선비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에서 남명 연구를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오이환에 따르면, 퇴계가 남명을 비판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혐의가 바로 남명사상에 나타난 도가적 사유이다. 남명이라는 호 외에도 일관된 출사의 거부와 직선적인 국정 비판, 시문 등에 보이는 파격적인 조사와 웅장하고도 강건한 기상 등이 퇴계로 하여금 남명이 유자(儒者)로서 중용의 도를 일탈하여 도가 쪽으로 기울었다는 혐의를 갖게 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동의할 만한 주장이다.

남명 당시가 이른바 사문난적의 극단적인 이단 규정이 작동하는 시대는 아직 아니었지만, 몇 번의 사화가 발생하면서 그런 경향이 조금씩 강화되는 추세였음을 감안한다면, 남명의 이러한 파격은 충분히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될 만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외부의 비판이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직선적으로 표현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분노를 금하지 못하게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을묘사직소〉의 ‘궁궐의 과부’ 표현이다. 당시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왕후를 가리키는 이 단어는 ‘꼭 그렇게까지 표현해야만 했을까’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남명의 의도를 보다 극적으로 드러내는 수사학으로서는 충분히 돋보이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남명은 도교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해서도 비교적 포용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불교를 배척하는 척불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이 또한 파격적인 것으로 남명의 학문적 포용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명이 불교에 대해 일방적인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불교의 기본 교리를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비교적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남명의 불교관을 연구한 김경수에 따르면, 남명은 진리 그 자체의 측면에서 본다면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다만 불교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인륜(人倫)을 저버리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당시 섭정을 하고 있던 문정왕후가 불교에 기운 것을 지적하면서 명종이 유학의 도에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정도전 등의 성리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었던 불교관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을묘사직소〉를 통해 이러한 사실 또한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성리학이 유불도의 삼교 중에서 유교를 중심에 두고 다른 두 사상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고자 했음을 감안한다면, 남명의 학문적 포용성은 충분히 주목받을 만하다. 특히 미국 중심의 서구학문에 종속되어 있는 우리 학계와 학자들의 자세와 견주어본다면 상당한 정도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열린 마음으로 학문하고 그 학문을 기반으로 삶을 이끌어 가고자 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진리 그 자체의 측면에서 보면 유교와 불교가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공공연하게 하고 있는 남명의 용기와 포용성은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2) 실천 중심 삶의 지향

남명의 삶과 사상을 지성사적 관점에서 평가할 때 주목받을 수 있는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실천 지향’이다. 지성의 핵심은 앎과 함의 일치, 즉 이론과 실천의 일관성이다. 우리가 지성인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척도로 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일관성과 일치이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최근 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둘러싸고 노정되고 있는 일부 기능적 지식인의 표변과 후안무치이다. 교수로 있을 때는 다양한 논거를 들어 국정화를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비판하다가 알량한 자리나 연구비 등에 욕심이 팔려 얼굴도 바꾸지 않고 국정화 지지를 펼치는 이른바 유명 교수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시대의 부끄러운 지식인상이다. 그들에게서 지성은 찾아볼 수 없고, 소인배의 이익지향만 추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기본예절도 갖추고 있지 못하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도리를 논하고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도리어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고 있으니, 선생 같은 어른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유교 교육론의 핵심 텍스트인 《소학(小學)》의 첫 구절에 등장하는 쇄소응대진퇴의 예절, 즉 주변을 정리정돈하고 드나들 때 반드시 어른께 여쭙고 인사하는 기본예절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들이 입으로만 하늘의 도를 논하고 헛된 이름이나 알리려고 하고 있다는 시대 진단과 비판, 그리고 당시에 이미 유명세를 갖고 있었던 퇴계 이황의 역할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 포함되어 있는 이 편지글을 통해 우리는 남명이 얼마나 일상 속의 실천을 중시했는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 지향은 그 보편적인 지향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인 좌절과 불완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주희의 경우에도 자신의 학문을 현실에 기반을 둔 실학(實學)으로 설정하고자 했지만, 이미 당대에 왕양명에 의해 그 실천성을 의심받았고, 조선 성리학 즉 주자학에 이르면 더 심한 실천적인 허점을 드러내면서 경직된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역사를 보여주고 말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이 이러한 허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지난한 노력으로 등장하게 되지만, 권력의 흐름에서 소외된 실학자들의 노력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기는 구조적으로 난망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우리는 지켜보아 왔다.

반대로 우리 현대 지성사는 어설픈 이론을 현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고려 없이 함부로 적용하고자 하는 시행착오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특히 교육과 경제 분야에서 미국의 일부 대학을 중심으로 제3세계 학자와 관료들에게 의도를 갖고 주어진 가벼운 박사학위를 기반으로 삼아 다양한 정책을 실험하는 장으로 전락하는 현상이 반복되었고, 불행히도 그 역사는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다. 우리 현실은 이론적 분석의 대상임과 동시에 바로 그 이론을 이끌어내는 원천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개발된 이론들은 당연히 미국적 상황의 한계 안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고, 비록 일정한 부분에서 그 적절성이 확보될 수 있는 경우에라도 전체적으로는 다른 적용의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남명의 학문과 지성세계에서 실천 중심의 지향은 우리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수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에 유행처럼 밀려들던 주자학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불교와 도교에 관한 공부와 관심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실천 지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의 출발은 그 담보자인 지성인이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이어야 한다. 물론 그 현실에의 함몰이 아닌 일정한 거리 두기와 그것을 전제로 하는 비판적 사유와 성찰, 그리고 그것을 다시 실천으로 연계시키고자 노력하는 역동적인 자세가 바로 지성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남명은 한국 지성의 흐름을 대표하는 선비로 규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대표성은 특히 현재의 우리 사회와 같이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론적 종속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거꾸로 지나치게 현실에 함몰되어 거리 두기에 실패하는 지식인들이 점증하는 시대에 요청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남명의 불교 인식과 그 한계

1) 남명의 불교 인식

남명이 불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의 불교 관련 내용과 시구에 담긴 절 또는 승려에 관한 언급 정도를 통해 유추해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일행과 함께 쌍계사로 놀이를 갔다가 돌아오면서 주지의 청을 받아들여 고을 수령에게 세금을 감해주라는 편지를 써주는 일화 등을 통한 간접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먼저 〈을묘사직소〉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소 자체의 내용이 많지 않은 데다가 불교 관련 내용은 더 적어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는 하나의 진리로서의 가치를 따질 때는 불교나 유교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윤리의 차원으로 내려오면 유교 윤리와 비교하여 불교 윤리는 반인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사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眞定)이란 것도 다만 이 마음을 간직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니,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하게 되는 데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의 일을 시행함에서는 (불교는) 다리가 땅을 밟지 않으므로 우리 유가에서는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시니, 그것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유가의 일입니다. 이는 어렸을 때 집을 잃었던 아이가 자기 집을 찾아 부모와 친척, 형제, 친구를 만나보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명은 불교의 선정(禪定)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본래 우리의 마음을 간직하는 데 달려 있다는 점에서 유교의 수행과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이치와 통하는 데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움직이는 진리를 하늘과의 연계성 속에서 파악하는 유교의 진리관과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선정에 드는 불교의 진리관이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불교는 머리가 하늘과 진리를 향하고 있으면서도 다리가 땅에 닿지 않고 있는 결정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한다. 실천 지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남명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비판일 수도 있다.

이러한 남명의 비판은 현실의 일을 무시하면서 진리를 향한 깨달음에만 머물거나 세속의 일을 경계하면서 산속에만 머무는 불교의 외형적인 면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부모를 버리고 출가하여 독신의 삶을 고집하는 승가 집단의 계율을 인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반인륜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에 관한 이러한 남명의 해석은 주희와 정도전으로 상징되는 성리학자들 일반의 불교관과 통하는 것이다. 특히 성리학자들이 인간관계의 출발점이자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파악한 효(孝)를 다하지 않고, 집을 떠나 출가하는 행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불효의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효가 그 출가를 통한 깨침의 획득과 그 깨달음의 확산 범위를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하여 무명(無明)의 고통으로부터 부모를 벗어나게 하는 진정하고 근원적인 것임을 감안한다면, 남명을 비롯한 유자들의 불교 비판은 일정한 논점일탈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역비판 또한 가능하다. 더 나아가 임금이 학문하는 일로 관심을 돌리면 그것이 곧 유교의 일이 된다는 비판 또한 불교가 지니는 학문성에 대한 무지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불교의 학문은 한편으로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지혜의 그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존재자에 대한 자비의 눈길과 손길이라는 실천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남명의 불교 인식이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은 당대의 승려들과 주고받은 시문(詩文)들을 통해서이다. 희감 선사나 경온 스님같이, 우리 불교사에서 큰 이름은 드러나지 않고 있는 스님들과의 교류를 통해 남명이 불교와 불교적 사유에 관한 최소한의 존중감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僧同雲入嶺   스님은 구름과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가고
客向塵歸兮   나그네는 티끌 세상 향해 돌아간다네
送爾兼山別   그대 보내면서 산마저도 이별했으니
奈如山日西   서쪽으로 지는 산에 걸린 해 어찌하랴?
— 〈경온 스님과 이별하면서(別敬溫師)〉

上房岑寂鎖黃昏   암자는 쓸쓸히 황혼에 젖는데
竹影松聲道自存   대나무 그림자와 솔바람 소리에도 도가 흐르네
斷盡機心詩癖在   어지러운 마음 끊어도 시 좋아하는 버릇은 남아  있어
强將佳句扣入門   억지로 아름다운 시구에 기대 남의 문 두드리네.
— 〈희감 선사에게 주다(贈熙鑑師)〉

두 시편 중에서 특히 희감 선사에게 주는 시는 남명이 불교적 사유와 명상의 세계에 일정 부분 동참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어지러운 마음 끊어도 시 좋아하는 버릇은 남아 있다”는 표현이나, 그런 시구에 기대 남의 문, 즉 불문(佛門)을 두드린다는 표현은 불교의 세계를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존중하면서 그 세계와 교유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남명은 특히 진리 인식의 영역에서 불교를 유교와 같은 반열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승려들과 적극적으로 교유하면서 불교의 사유와 세계를 함께 향유하고자 하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런 남명의 비교적 적극적인 불교 인식은 다음 시를 통해서 더 잘 드러난다.

名字曾羞題月脇   이름자를 산기슭에 쓰기를 일찍이 부끄러워했고
笑把蚊觜下蟬官   변변찮은 입 갖고서 웃으며 절간에 들었네
人綠舊是三生累   예로부터 사람의 인연은 삼세(三世)에 얽힌 것이니
半日歸來擬赤松   한나절 만에 돌아오며 적송자를 떠올리네.
— 〈오대사에서 쓰다(題五臺寺)〉

자신이 살던 진주 인근의 절인 오대사에 들어서 사람의 인연이 전생과 현생, 내생에 걸쳐 있다는 삼세의 세계관을 전제로 하여 신선의 이름까지 언급하고 있는 남명을 통해 우리는 그가 단순한 유자가 아니라 불교의 세계관과 도가의 세계관을 모두 섭렵하면서 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남명의 불교 인식이 지니는 한계와 그 현재적 해석

남명이 당시의 다른 유자들과 비교하여 불교에 관한 비교적 적극적인 인식과 호감은 물론 일정 부분에서는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음을 우리는 위의 전거들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삼세의 세계관과 함께 시를 통한 승려와의 교유를 통해 각각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서로 존중하고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남명은 조선 선비 중에서 불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호감을 보이기도 한 학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크게 무리한 결론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남명의 불교 인식은 불교가 현실의 일을 멀리하는, 즉 발을 땅에 딛지 못하고 하늘의 일이나 추상적인 공론(空論)에 머무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비판을 명료하게 포함하고 있다. 자신의 실천 지향성이나 당대의 불교 인식의 주된 흐름을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인식 틀은 당연히 불교의 관점에서 쉽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가 깨달음이라는 다르마에의 지향을 중심 테제로 삼고 있고 그 과정에서 일정한 추상적인 논의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정한다고 해도, 불교의 본래 영역은 현실에 대한 직시, 즉 여실지견(如實知見)과 그것에 근거한 자비행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철저히 실학이자 윤리로서 성격을 지닌다.

물론 남명의 시대에 마주해야 했던 불교는 오늘날 우리가 만나고 있는 불교와는 양상이 달랐다.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왕실불교로서 위상을 지니고 있던 불교는 원효와 같은 실천불교의 선구자들이 없지 않았지만, 주된 흐름은 역시 권력과의 결탁을 통한 지배이념화와 경제적인 풍요였다. 그 풍요는 자연스럽게 승려의 도덕적인 타락과 사원경제의 비정상적인 팽창을 가져왔고, 그로 인한 폐해로 불교에 관한 인식이 긍정적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등장한 것이 성리학이다. 이 성리학은 철학적 사유체계를 불교로부터 일정 부분 빌려옴으로써 이론적 무장에 성공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성리학자 또는 신유학자들에게 불교는 극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명의 경우도 이러한 조선 성리학자들의 일반적인 불교 인식이 지니는 한계, 즉 필자가 ‘《불씨잡변》의 오류’라고 부르고자 하는 의도적인 왜곡과 비방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오류는 불교 교리에 관한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 학자들, 특히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철학체계가 지니는 불교철학적 전거를 감추기 위한 목적과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고자 의도적으로 불교를 왜곡하는 오류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오늘 한국의 동양철학계에도 그 강한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화엄의 이사무애(理事無礙)의 불이론(不二論)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그 이론적 심화와 확장이라는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점과 기본 구도에서 불교철학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주희와 정도전이 의도적으로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불교 이론의 허점으로 연결시키는 성리학 이데올로기 저서로 모두 ‘불씨잡변류’의 저서를 남겼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불교 전공 이외의 동양철학자들은 물론 서양철학자들까지 불교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 요인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지어 우리 지성계의 상황 속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잘못된 정통의식이다. 이 정통의식은 단순히 주희를 출발점으로 삼는 작위적인 도통(道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육조혜능 이후 그 구체적인 물증이 없어져 버린 불교의 법통(法統)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와 올바른 삶에 대한 열정으로서 도통의식(道統意識)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성인이라면 이런 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정통의식은 이미 그러한 법통의 흐름에서 일탈하여 특정한 대학 출신이거나 지역 출신들끼리 자신들의 엘리트 의식과 이해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외형적으로 정통의식이 가장 잘 통하는 곳은 군과 경찰 같은 계급사회에서의 사관학교나 경찰대학 출신의식일 가능성이 높지만, 학문 공동체의 경우에도 그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시대별로 유학파 지식인이 정점에 있었고, 그 유학의 대상이 중국에서 일본,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미국 유학파 지식인이 정통성을 독점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 지성사의 흐름이 항상 그것을 주도하는 곳에서 출발하여 주변으로 확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현실에 대한 천착을 근원적으로 어렵게 만들 가능성과 위험 또한 충분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외적인 기준에 집착하는 정통의식은 전형적인 허위의식이자 반지성적인 것이라고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남명 또한 자신의 시대정신과 사상적 배경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그런 점에서 조선 선비가 상징하는 특성과 한계를 동시에 갖추고 있음을 부정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의 지성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불교와 도가에 관한 포용력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조선 중기의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으로서의 실천력이다. 이미 앞선 논의를 통해 일정한 수준에서 검증된 이 두 가지 특성은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지성론에서도 의미 있게 작동해야 하는 것들이다.

우리 사회의 지성이 가진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미국적 기준을 보편적인 기준과 동일시하는 획일화된 문화식민지적 지식인상의 만연이다. 어떤 정책을 택하든지 미국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선진국의 정책이면 무조건 수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종교 신념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지식인을 만나는 일이 불행히도 어렵지 않다. 이미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그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났음에도 그 오류를 반복하는 것은 반지성적인 신념화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지식인 사회는 미국 지식 공동체에 포섭되어 그 독자성과 고유성을 상실할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이다.

남명과 퇴계, 율곡이라는 조선 선비의 상징들이 살아냈던 시기는 16세기 초·중반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의 상황 속에서 그들은 주희라는 성리학자를 모두 존중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그의 경전 해석만을 온전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유연한 자세를 갖고 있었다. 남명은 말할 것도 없고, 율곡의 경우에도 기(氣)가 발할 때만 비로소 이(理)가 올라탈 수 있다는 명제를 통해 주희와의 차별화에 성공하고 있다. 퇴계의 경우에도 기대승과의 논쟁 속에서 주희와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의 현 지식인 사회는 그러한 건강한 거리 두기에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학문 조류를 빠르게 수입해서 소개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일정한 독점적 지위까지 누리는 이른바 지식 소매상들이 우리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형이다. 물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흐름이 미약하지만 끊이지 않고 있고 현재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주도권은 미국 유학파 지식인들인 지식 소매상들에게 주어져 있다. 이 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면, 먼저 우리의 현실 자체에 대한 직시가 필요하고 그것은 바로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실천, 즉 함(doing)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서양 학문의 보편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수용하면서도 그 특수성의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경계하는 자세를 지닐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 지성의 회복이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남명의 실천 지향과 지적 포용력은 우리 지성의 회복 과정에 하나의 해독제로 제시할 수 있는 장점일 것이다.

4. 맺음말

자신의 시대를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은 항상 자신의 시대와 사회를 가장 어렵고 문제가 많은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대이자 한때 중국의 모방 대상으로까지 떠오른 한국 현대사의 영광은 사라지고, 이제 지옥 같은 신분제 사회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헬조선(hell朝鮮)’이라는 자조적인 신조어가 등장하는 절망의 사회와 시대로 전락한 듯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고, 그 절망은 희망과 인간관계의 포기까지로 소리 없이 확장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관한 명료한 인식과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고 있는 한국 지식인 사회는 이미 그 책임의 인수를 포기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과 같이 동일한 문제를 놓고 자신의 이익이나 자리를 위해서는 학문적 소신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강한 자의 말과 이익이 곧 정의(正義)’라고 생각한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런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을 논파하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자신은 죽음을 맞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외롭게 대학 민주화와 정상화를 외친 한 국립대학 교수의 죽음이 금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남명이라는 조선 선비를 소환함으로써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이 글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최소한 그는 시대가 자신의 올바름의 지향과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실천으로 옮기는 일관성을 보여준 처사(處士)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뜻을 숨기고 숨어 산 은둔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상소와 교육이라는 통로를 통해 적극적인 방식의 또 다른 참여를 시도했다. 이러한 그의 처사적 실천 지향은 불교와 도가에 관한 포용력과 연결되면서 일정한 한계 내이기는 하지만, 승려들과의 교류와 불교적 세계관의 수용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현재의 우리 불교계는 시대정신의 흐름을 주도하지 못한 채 휩쓸려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지속적으로 노정하고 있다. 승단 추방죄인 바라이죄를 범한 것으로 의심받는 승려들의 일상화된 범계와 세상의 흐름에 대한 돌이킴[返]으로서의 불교 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종단의 지속적인 자본주의화, 그리고 불자들 자신의 삶과 불교 정신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거리감 등이 그런 전형적인 모습들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외적으로 천대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남명 같은 꼿꼿하고 까다로운 유자들을 감동시키면서 다른 문으로서 불문(佛門)에 대한 외경심을 자아냈던 조선 중기의 희감 선사와 같은 선지식을 떠올리게 된다. 동시에 그 선지식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고서 최소한 진리의 인식 차원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왕에게 상소를 올릴 정도의 소신을 가졌던 남명의 추상같은 지성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는 시절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초반 한국의 지성사는 실천성과 포용력을 기반으로 다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 요청으로부터 우리 모두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

 

박병기 /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윤리학, 도덕교육학 석사·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윤리를 수학했으며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현재 동양윤리교육학회 회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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