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류도 많았지만, 불교 배척한 배불론자

1. 정도전의 부활

분열과 불안의 시대이다.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집, 꿈, 희망을 포기한 세대)를 넘어 모든 걸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대를 의미하는 n포 세대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 게다가 평안하게 잘 수 있고 쉴 수 있어야 하는 집조차도 전세대란, 하우스푸어, 렌트푸어라는 말로 불안을 더해 가고 있다. 인간생활의 기본 요소라고 하는 의식주 가운데 먹고 자는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도 개혁가, 혁명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 시대의 과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개혁가들이 바꾸고자 한 전제(田制)와 정치, 민생고 해결 등과 동일한 주제들이다. 민생은 어려워지고 소수의 부원배를 비롯한 구가세족들이 토지와 부를 독점함으로써 백성들은 도탄에 신음하고 있었다. 이들 개혁적인 젊은 성리학자 중에 주목받는 인물이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었다.

최근 고려 말과 조선 초를 배경으로 한 역사 콘텐츠가 여러 편 만들어져 대중의 주목을 끌고 있다. 2014년 1월 4일부터 6월 29일까지 KBS 1TV에서 50부작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되어 2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고려 말 조선 초를 배경으로 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다룬 〈용의 눈물〉 같은 사극이 없지 않았으나, 정도전을 중심인물로 한 것은 처음이었다. 현재도 2015년 10월 5일부터 시작한 SBS TV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이들에서 묘사되는 정도전은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불교적인 내용은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을 수도 있다. 다룬다고 하여도 긍정적인 모습만을 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본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부각될수록 백성을 위한 그의 개혁적인 정치가로서의 면모와 성리학적인 사상만이 아니라 고려 말 조선 초의 불교 폐단과 그로 인한 당시 벽이단(闢異端)의 벽불사상(闢佛思想)이 함께 부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혁 대상으로서 부패하고 민중의 삶과는 유리된 정치권과 결탁한 화려한 불교의 일면이 오늘날의 전반적인 종교와 오버랩되면서 부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정도전의 부각과 동시에 주목을 받는 그의 불교적 인식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필자는 불교비판의 종합서인 《불씨잡변》과 《심문천답》 《심기리》를 중심으로 그의 불교적 인식을 다룬 바 있다. 여기에서는 《삼봉집》의 시문(詩文)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스님 등 불교계와의 교유와 그의 인식 변화를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고, 현대적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2. 시대적 상황과 정도전의 생애 구분

고려 말 조선 초의 시대적 상황은 세 가지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고려 말 원의 간섭이라는 지배적인 구조를 벗어나고자 하는 개혁정치와 그를 둘러싼 개혁세력과 사상사적 전환이 그것이다. 첫째는 원 간섭기의 자주적인 노력은 민의 저항에 대한 지배층의 대응이든지, 권력집단 내부의 투쟁 산물이든지 간에, 원의 제도를 참고하여 고려의 관제를 정비한 개혁이었다. 즉 반원개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둘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개혁 세력은 흔히들 성리학자(신진사대부, 신흥 유신 등)들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실은 승려를 비롯한 불교계 인사도 적지 않았다. 성리학적 사대부들은 중소 지주나 향리 출신의 새롭게 등장한 세력만이 아니라 호족 출신들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고려 말의 고관으로 권문세족과의 대립을 통해 성장한 세력들로, 불교의 비판 세력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중추는 군사력을 가진 무신들과 중앙 정계에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문신들이었다. 개혁과 왕조 교체는 무신인 이성계 일파와 문신들의 합종연횡을 통한 상호 권력투쟁의 결과물이었다.

다음은 성리학의 수용이다. 성리학은 북송 시대에 출현한 사대부들의 신학문이었으며 남송 시대의 주자에 의해 집대성되어 허형에 의해 원에 소개되었다. 원의 성리학은 과거제에 반영하는 등 체제 유지를 위한 관학(官學)으로 받아들여져 철학적 관심보다는 실천윤리적 측면과 경세론적 측면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안향에 의해 유입된 이래 원의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널리 유통되었고, 또한 공민왕의 성균관 중영과 과거제의 정비 등으로 국내 성리학 확산의 토대가 마련됨에 따라 정치세력화를 이루면서 조선 건국의 사상적 밑받침이 되기에 이르렀다. 성리학의 수용은 우리나라 역사상 사상적인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곧 조선시대의 강한 벽불정책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이에 반해 불교계의 개혁적인 세력들이 결사 등의 이름으로 사회의 개혁에 역할을 하고자 하였으며, 실질적으로 무학자초를 비롯한 조선 왕조 창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세력들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대부들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벽이단의 사상적 논리와 사회개혁의 명분을 만들고 있을 때, 불교계에서는 이에 대응할 만한 논리나 세력, 사회개혁적인 안을 성사시킬 인물들을 배출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도전의 생애는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탄생에서 초기관료 시기이다. 초기관료 시기란 공민왕 11년(1362년) 과거 급제로 벼슬에 나갔다가 유배형에 처해지기 전인 우왕 1년(1375년) 5월까지이다. 2기는 유배 시기로 1375년 5월부터 우왕 3년(1377년) 7월까지이다. 비록 짧은 2년여의 기간이지만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가치관을 형성해 가는 시기이기에 별도로 분류하였다. 3기는 유배 이후의 유랑기로 유배에서 풀려나서 우왕 9년(1383년, 42세) 이성계의 막료가 되어서 함주로 가게 되는 시기까지이다. 4기는 우왕 10년(1384년) 복직된 이후부터 조선이 개창되던 1392년(51세)까지이다. 5기는 조선 개국 후부터 이방원에게 살해되는 태조 7년(1398년, 57세)까지이다.

불교와의 교유적인 측면에서 보면, 1기는 이색 문하 등에서 성리학을 배운 시기로 벽이단 사상이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교와의 교유는 2기와 3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불교의 사회적 개인적 위무의 기능으로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도전이 유배를 통해 이론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백성들의 사회적 처지와 역량에 대해 대사회적인 실질적 경험을 하며 사회적 안목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인물들에 대해 모색한 모색기이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4기를 거치면서 조선왕조 창업에 대한 구체적인 정치적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벽이단 사상의 대사회화 작업이 강화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스님들에 대한 시문도 앞 시기와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5기는 실전의 제목만 있는 시 1편과 《불씨잡변》으로 대표되는 벽불서가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크게 세 시기, 성장·유배기와 유랑기, 그리고 혁명·창업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3. 《삼봉집》의 시문에 나타난 정도전의 불교 교유

정도전의 《삼봉집》에는 스님들과의 교류가 적지 않았으며, 불교를 공부한 흔적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불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앞에서 나눈 그의 생애의 기점으로 시문에 나타나는 글들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본다면 그의 사상적 궤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삼봉집》은 범례에서 “연기(年紀)를 상고하여 선후가 착란됨이 없게 하였으며, 상고할 수 없는 것은 다 빼버렸다.”고 하여, 시문의 대략적인 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라서 그의 시문 중 스님이나 사찰 등 불교와 관련된 것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불교계와의 교류 관계를 중심으로 파악해 보고자 한다.

1) 성장·유배기

첫 번째 시기는 탄생 및 성장에서부터 공민왕 9년(1360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공민왕 11년(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충주목 사록, 그다음 해에는 개경으로 돌아와서 전교주부(종7품)에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인 공민왕 14년(1365년)에는 통례문지후(정7품)를 거쳐 우왕 1년(1375년) 원나라 사신을 둘러싼 외교문제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그해 5월에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 유배기는 우왕 3년(1377년) 7월까지로, 2년여의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가치관을 형성해 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보(田父), 야인(野人), 승려 등을 만나게 된다. 승려들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기 중의 하나이다. 이들로부터 순박한 인정과 의리 그리고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실천을 모르는 유자의 박학이 얼마나 허위인가를 깨닫게 된다.

정도전의 10대는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며, 동문들을 형성한 시기였다. 성리학적 기초를 다진 시기로 이색을 중심으로 하는 신흥 유학자들의 집단에 속할 수 있었다. 이들 그룹에는 박상충, 정몽주, 박의중, 김구용을 비롯하여 연하인 윤소종, 이숭인, 하륜과 권근 등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성리학을 매개로 동문수학하면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격동의 시기를 주도하게 된다. 정도전은 공민왕 11년(136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좌주-문생 및 동년 관계를 통해 교유관계를 확대하게 된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공민왕 14년(1365년)에 시작된 신돈의 개혁과 공민왕 16년 12월의 성균관 중영, 과거삼층제(향시·회시·전시)의 정비였다. 성균관은 공교롭게도 승려 신돈이 문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유교 정치 운영 원리를 이상국가로 삼은 것과 맥을 같이하면서 1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다시 만들어지게 된다. 이색은 대사성이 되어 성균관 중영과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성리학을 보급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토대가 되었다. 정도전도 부모상을 연이어 당해 영주에 있다가 탈상 이듬해인 1369년에 개경으로 올라와서 태상박사로 복직하였고, 예의정랑, 예문응교, 상균사예가 되어 성균관에 합류하였다.

良朋共鄰曲   좋은 벗이 이웃에 함께 살아서
門巷相接連   골목이 서로 연접했다오.
晨征寒露濡   찬 이슬에 젖으면서
夜會燈火然   등불 밝혀 밤에 모이네.
相與玩奇文   마주 앉아 기문을 감상하다가
理至或忘言   이치의 극을 보면 말을 잊는다.
日月復如玆   날로 달로 언제나 이와 같으리니
此樂矢不諼   이 즐거움을 잊지 말자 맹세를 했네.
— 〈夜與可遠子能讀陶詩賦而效之〉

당시의 감정을 담은 위의 시를 보면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고 기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시기는 주로 이색 문하에서 교유한 인물들이 중심을 이룬다.
이 시기에 불교와 관련한 시문은 위의 〈표 1〉과 같다.

《금남잡제》와 《금남잡영》은 그가 나주 유배지에서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여가에 지은 시문들을 묶어서 만든 것으로 전자는 산문집이고, 후자는 시집이다. 금남은 나주의 유배지가 있던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그의 시문들은 대개 이 두 책에 수록된 것을 다시 《삼봉집》에 정리하여 싣고 있다. 오언고시 1수, 오언율시 7수, 칠언절구 3수, 서 3편, 설 1편, 기 1편 총 16편과 유배지에 간 해 12월에 저술한 심문·천답까지 17편이 있다. 이들 시문에 나타난 그의 불교와 승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겠다.

山深千萬疊   산은 깊어 천만 겹인데
何處著高僧   어느 곳에 고승을 만나 보랴.
石徑封蒼蘚   돌길은 푸른 이끼에 덮여 있고
溪雲暗綠藤   구름은 푸른 등나무에 가렸네.
禪心松外月   선심은 소나무에 걸려 있는 달이니
端坐佛前燈   단정한 불등 앞에 앉아 있네.
應笑儒冠誤   응당 유생의 잘못을 비웃겠지만
歸歟苦未能   돌아가려다 끝내 발길을 멈추었네.
— 〈단속사 문 장로에게 부치다(寄斷俗文長老)〉

이 시는 유생으로서 고승을 만나러 온 사실이 밝혀지면 비웃음거리가 되겠지만 그래도 고승과의 만남을 쉬 끝내지 못하고 아쉬워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마음을 담고 있다. 단속사는 8세기 중엽에 창건되어 신행과 탄연의 비가 전하였다고 하며 진주 일원에서 대찰로 고려 무신 집권기에는 진각국사 혜심, 만전 등이 머물면서 고려 팔만대장경을 판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신 집권기 이후의 사료는 거의 없어 정도전의 시에 등장하는 문 장로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

〈산사에 노닐다〉도 마찬가지로 깊고 깊은 숲 속 두어 칸의 암자에 10여 년을 머문 스님을 찾아가 서로 대하여 번거롭던 모든 생각이 초연해짐을 느끼면서 평안해 하는 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 두 편의 시는 정도전이 유배를 가기 전에 쓴 것으로 정도전이 어떤 인연으로 그곳을 찾았는지는 미지수이다.

유배지에서도 스님을 만나는 것에 대한 즐거움과 그리움은 그대로 묻어난다. 〈정림사 명 상인을 찾다〉에서는 명 상인을 만나고 싶은 반갑고도 기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走馬尋僧亦快哉   말 달려 스님을 찾으니 이 또한 유쾌한 일
蕩搖蘿蔓破莓苔   등 덩굴 흔들리고 이끼는 부서지네.
扣門剝啄嫌遲晚   문 두들기는 탁탁 소리조차 더딜까 하여
急喚沙彌報客來   사미를 급히 불러 손이 왔다 알려 주네.
— 〈정림사 명 상인을 찾다(訪定林寺明上人)〉

〈서봉사 관 상인에게 부치다〉에서는 “……뉘라서 길이 멀다 말을 하는가. 발돋움하면 바라뵈는 걸 어쩌다 그물 속에 갇혀 있어 그 곁에 날아가질 못하네. 만나보는 대신으로 시를 지으니 청광을 대한 것과 방불하구려.”라 하여 유배지에서 찾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서나마 전하고자 하고 있다. 〈운공 상인이 불호사에서 자야의 시를 외기에 차운하여 불호사 주지에게 부치다〉에도 “서로 만나 한 번 웃고 돌아서니 공이로세 …… 푸른 산 어느 곳에 선의 지팡이 머물렀나.”라고 하고 있다. 비록 유배 시절이긴 하지만 유쾌하게 스님을 찾고 그리워하는 정도전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30대의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정도전은 유배 이전에는 물론 유랑기에도 더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스님을 찾는다.

그럼에도 1375년 5월 유배 이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정달가에게 올리는 글[上鄭達可書]〉에서는 달가인 정몽주가 《능엄경》을 읽는다는 말을 듣고는 “달가가 《능엄경》을 보지 않으면 어찌 그 설의 사특함을 알 것인가? 달가가 《능엄경》을 보는 것은 그 속의 병통을 알아서 치료를 하자는 것이지 그 도를 좋아하여 정진하자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서는 “옛날에 한창려(韓昌黎)가 승려 태전(太顚)과 더불어 한 번 이야기한 것이 뒷세상에 구실(口實)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달가는 사람들의 믿음과 존경을 받고 있는 처지여서 그 소위가 우리 도의 흥폐(興廢)를 가름하고 있으므로 자중(自重)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여 승려와의 교유를 자중하라고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면 정도전 자신도 승려들과의 교유를 줄이거나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이 글을 쓴 이후에 승려들과의 교유나 간절함이 시문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소재동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소재동은 그의 유배지였던 나주의 거평에 있던 부곡명이다. 여기에 있었던 소재사와 노년에 스님이 된 안심(安心)과의 교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정달가에게 올리는 글〉에서 지적한 내용에 대한 입장의 변화이다. 이런 변화는 기득권을 상실하고 의지가지없고 찾는 이 드문 유배지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감성이 아닐까 한다. 또한 실제 민중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삶을 수용해 가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이론가에서 이론과 실제, 이념과 현실을 조화롭게 겸비해 가는 과정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유배기를 마치고 유랑기를 거쳐 다시 관료로 나가서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정도전은 시문에서 드러나듯이 불교를 물리치는 데 앞장섰던 이미지는 엿볼 수 없다. 이 젊은 정도전을 맞이한 정림사의 명 상인, 불호사 주지 등은 어떻게 대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2) 유랑기

정도전은 1377년 5월, 2년 2개월의 유배에서 풀려나서도 대원외교의 재개에 반대한 임박, 박상충, 정도전, 김구용, 이숭인, 권근, 정몽주 등과는 달리 관료로 복직되지 못하였다. 그 이후 7년 동안 영주, 삼봉, 부평, 김포 등지로 전전하게 된다. 이처럼 우왕 9년(1383) 그의 나이 42세에 이성계의 막료가 되어서 함주로 가게 되기까지 유랑기를 보내게 된다.

유랑기는 유배기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에서 고향 영주로 돌아왔으나 왜구에 시달려서 단양, 제천, 안동, 원주 등으로 피난을 다니게 된다. 이때도 유배에서 풀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종편으로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개경 부근의 삼각산으로 옮겨 왔으나 이곳 재상이 집을 헐어 부평부로 옮기고 다시 집이 헐려서 김포로 이사하는 등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때도 이렇게 옮겨 다닐 수 있었던 까닭은 유배에서 풀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종편으로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1382년 김포로 이사한 뒤 지은 〈집을 옮기다[移家]〉에서 “오 년간 세 번이나 이사했는데 올해에 또다시 집을 옮겼네. …… 옛 친구는 편지조차 끊어버렸네.”라고 한 데서도 어려운 시기를 보냈음을 엿볼 수가 있다. 그로 인해서인지 이 시기에도 여러 스님과 교유하였으며, 이전에는 승려들과의 교유를 위해 사찰에 들르기는 했으나, 머물렀다는 시문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원당사에 묵다[宿原堂寺]〉에서처럼 사찰에 묵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쓰인 시문은 다음의 〈표 2〉와 같다.

정도전은 찬영과의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1377년 정도전이 회진에서 돌아와 삼각산 아래에 초려를 짓고 살았다. 그 무렵 찬영이 지나다가 일부러 그를 만나기 위해 들렀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도전은 찬영에게 군중을 이간질하는 요민(妖民)인 이금(伊金)과 석가모니의 말이 다르지 않고 망령되다고 찬영을 말없이 떠나가게 했다.

1385년 지은 〈목암 스님의 시권에 쓰다[題僧牧庵卷中]〉의 목암도 고려 말 왕사를 지낸 찬영(粲英, 1328~1390)이다. 고려 말에 호를 목암(木庵)으로 쓴 스님은 찬영과 체원이다. 체원은 충숙왕 대 활동한 화엄종 계통 승려로 해인사에 주로 주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찬영에 대한 기사는 부록 사실에서 이금(伊金)의 문답 등에도 보이나 체원에 대한 시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으로 보아 정도전이 교유한 목암은 찬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시권에 쓴 내용도 교학적인 내용이 아니라 심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종 계통의 스님인 찬영에게 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찬영은 충주 억정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한 당대 고승이었는데, 14세에 삼각산 중흥사로 출가하여 보우의 제자가 되었고, 가지산 총림에 참여하여 제2좌가 되었으며 우왕과 공양왕의 왕사로 봉해지기도 했다.

백정 선사에 대한 시가 두 편이 있다. 〈수행하러 가는 백정에게 주다[贈柏庭遊方]〉와 〈백정 선사에게 기증하다[寄贈柏庭禪]〉가 그것이다. 포은 정몽주는 백정의 시권(《포은선생문집》 권2)에 “삼봉이 누구에게나 허락이 적으니 눈이 있어 진가를 구별하네. 스님을 위한 정념이 마침내 이와 같으니 백정은 반드시 헛되이 내닫는 자 아니리라.”라고 하여 정도전의 강직한 성품에 빗대어 백정 선사의 도량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그의 시 〈수행하러 가는 백정에게 주다〉에서 “흐르는 물 뜬구름 가는 대로 가는데 맑은 바람 밝은 달 유독 서로 따르네. 멀리 닦아 구경에 이르면 마침내 무엇을 얻을 건가. 어서어서 돌아와 내 마음 위로해다오.”라고 백정 선사의 수행을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수행자의 희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백정 선사를 전송하는 모임에서 이색, 김구용, 정몽주, 권근 등과의 교유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백정 선사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성장·유배기와 유랑기를 거치면서 지은 시문을 통해 본 정도전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10대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이색의 문하에서 유학을 배우면서 그들 그룹과 친분 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벽불에 대한 인식은 유배기까지도 이어지고 있었겠지만, 절대적인 단절과 불교를 도외시할 정도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퇴지, 주자 등 선유의 가르침에 따른 이론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배기 이전의 승려와의 교류에 대한 시문은 드물며, 이전에 교류했던 인물들과 지속적인 교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직접적인 교류는 소수에 불과했다. 유배기에 지은 시문에 새롭게 문 장로, 이름 모를 일명(逸名)의 승려, 호 장로, 조명 상인, 신 장로, 서봉광 상인, 무설 산인, 명 상인, 각봉 상인, 담 상인, 운공 상인 등과 유랑기에 보이는 고헌 화상, 등암 상인, 백정 선사, 찬영 등 다양한 승려들과 가깝고 친근하게 지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가 유배 이전까지는 성리학의 이론으로 벽이단을 익혔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들 승려와 어떤 문답이 오갔으며 이들로 인해 그의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읽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3) 혁명·창업기

혁명기는 우왕 10년(1384) 복직된 이후부터이고 창업기는 그의 나이 51세에 조선 왕조 개국(1392)한 후부터 이방원에게 살해되는 태조 7년(1398)까지이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불교 관련 시문을 보면 다음 페이지의 〈표 3〉과 같다.

이 시기에도 여러 스님과의 교유를 이어가고 있다. 목암찬영은 앞의 시기에도 만난 것으로 보아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가 전에 면식이 있었던 유일한 인물로 고암 도인도 보이고 있다.
〈고암 도인 시권에 쓰다[題古巖道人詩卷]〉에서 보면, 20대 초반을 전후하여 그의 스승이었던 최병부에게서 유학을 같이 공부한 사이였다. 20여 년이 지나 도은 이숭인의 재실에서 승려가 된 그를 보고는 한탄하였다. 고암은 1371년 무렵 조계종의 대선이었던 고암천긍(古巖天亘)과 동일인물로 보인다. 그는 최병부의 동생으로 구곡각운의 제자였다. 보우의 문도가 주로 머물렀으며 공민왕 대 후반과 우왕 대 초반에 걸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능침사찰인 광암사(광통보제선사)에 머물렀다.

1386년 〈화엄종사 우운을 전송하는 시의 서[送華嚴宗師友雲詩序]〉를 쓰기는 하였지만, 우운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서의 내용 중 “한산 목은 선생이 시를 지어 그를 전송하니, 여러 사람이 그를 이어 화답하는 자가 많았다. 그의 문인인 의침이 선생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서문을 청하였다.”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다. 우운을 전송하는 시의 서를 쓴 이들을 보면, 정총(1358~1397), 정도전, 권근, 유방선(1388~1443) 등이다. 우운은 주공으로 《고려사》 〈열전〉 23 김륜조에 “김륜(金倫)의 아들은 김가기,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가 있었고, 그 가운데 2인은 출가하였다.”는 기사 등을 보면, 시중 죽헌 김윤산의 아들로 조계종의 잠공(岑公)과 함께 당대의 고승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여러 사찰의 주지를 맡았다. 천희가 입적한 1382년경 우운이 왕명으로 개경의 법왕사 주지를 할 무렵은 조계종의 무학자초가 이성계에게 혁명을 종용할 때였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그는 고려 말 개혁적인 신진사대부들과 교유하며 조선 건국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고려 말 승려들이 신진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뜻을 같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의 시문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무학과 조우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 함주에 갔던 시기이며, 조선 왕조 창업 후에도 동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시문에 등장하는 스님들은 생애를 파악할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했던 스님들과 교유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도 주목해볼 만하다. 정도전의 벽이단 사상에도 불구하고 스님들과의 교유가 적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교유는 그리 폭넓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왕사였던 태고보우 국사가 입적하자 문인 달심(達心)이 석종비를 세우는 데 정도전이 석종명을 쓰게 된다. 이것이 〈미지산사나사원증국사석종명〉이다. 정도전은 이 해(1385년) 4월에 성균좨주(成均祭酒) 지제교로 임명을 받았다. 고려시대에는 고승이 입적하면 왕에게 부음을 전하고 감호단을 파견하고 비용을 후원하며 장례 이후 고승의 행장을 모아 왕에게 탑비 건립을 주청하면 당대 최고의 문장가에게 비문을 찬하게 하여 탑비를 건립하게 된다. 당시에도 이러한 과정이 선례에 따라 적용되었을 것이다. 정도전은 지제교로 왕의 교서를 짓는 요직이었기에 비문을 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임금의 명을 언급하지 않은 점과 2년 뒤에 태고사원증국사탑비를 세우고자 교지로 사리탑비문을 이색에게 짓도록 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보우국사 문하에서 자체적으로 정도전과의 반연에 의해 의뢰한 것이 아닌가 한다.

〈미지산사나사원증국사석종명〉에는 “스님은 두 차례 이 고을에 오시는 덕을 베풀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사모하여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다. 그들이 스님을 스승으로 섬기고 사리를 모시는 까닭은 역시 본심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내가 명(銘)을 짓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보우 국사가 고을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고을 사람들이 사모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본인이 명을 짓는다고 하고 있다. 이 탑비와 사리를 모신 석종부도는 현재에도 양평 사나사에 있다. 보우의 비문을 지었다는 사실은 이때까지만 해도 정도전이 불교계에 대해 그리 적대적인 태도로 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양왕 3년(1391)은 벽불의 흐름에 중요한 시점이다. 왜냐하면 1월에 우군총제사(이성계는 삼군도총제사, 조준은 좌군총제사)로 임명되어 병권의 일부를 장악하였다. 우왕의 숭불행사를 맹렬히 비판하여 본격적인 벽불의 신호탄과도 같은 역할을 때문이다. 그 이듬해(1390) 6월에 윤이, 이초의 옥사를 해명하기 위해 명을 다녀왔다. 그럼에도 명을 짓는다고 밝히고 있어 벽이단의 사상에도 스님 개인의 활동 여하에 따라 그 인식을 달리하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공신에 책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시기에도 목암 스님(찬영), 와운 산인, 은계 상인, 고암 도인, 화엄종사 우운, 달심, 일본 무 상인 등이 시문에 등장하고 있어 불교계와의 교유는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술 경향을 보면, 유배기와 유랑기에 시문이 많은 편이며, 창업 이후에는 《조선경국전》 같은 법전(法典)이나 사서(史書)인 《고려국사》, 기(記)로서 〈경복궁〉 〈강녕전〉 등이나 경전(經典)인 《경제문감》 등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교유가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왕조 개창 이후 스님이나 사찰 관련된 시문은 제목만 전하는 〈진관사에 머물다[遊眞觀寺]〉만 보이고 있다. 성장·유배기와 유랑기에 보이는 스님과의 교유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창업 이후 불교 관련 글은 1394년(태조 3) 여름에 지은 《심기리》 3편과 1398년에 지은 《불씨잡변》만이 《삼봉집》에 수록되어 있다. 조선 왕조의 개창에 동참했던 개혁적인 스님들도 없지 않았음에도 이렇듯이 불교계와의 교유를 단절한 것은 단순히 사상적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그의 신념으로만 보아야 할 것인지는 더 궁구해야 할 과제이다.

4. 정도전의 불교 교유의 현대적 의미

정도전은 조선시대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벽불의 흐름을 만든 인물로 지목되어 스님과의 관계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의 시문에는 이러한 단편적인 평가를 불식이나 하듯 그의 문집인 《삼봉집》에는 스님과의 교유한 모습과 스님을 그리워하는 모습 등이 나타나고 있다.

1391년 과전법의 시행으로 전제개혁이 단행되면서 그는 구 권문세족들의 반발로 9월에 봉화를 시작으로 나주, 영주로 이배되었으며 그의 두 아들은 출신성분을 이유로 서인으로 폐해지기에 이른다. 물론 이듬해 봄에 짧은 유배에서 풀려나 영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4월에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함에 따라 사태는 역전되어 왕조 창업 세력이 주도권을 잡게 되고 정도전도 충의군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사상은 더욱 배타적이고 견고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를 비롯한 도교나 무교 등에 대한 벽이단 사상도 더욱 배타적으로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는 성장기에 이색을 통해 성리학을 익히면서 이론적인 벽이단 사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정치적 문제로 유배기와 유랑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스님과 교유를 하였고, 친불교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이 시기에 그와 교유한 스님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함허의 사례에서 보듯이, 강한 인상이나 기존의 사고를 바꿀 만한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함허득통(1376~1433)은 조선 태조 4년(1396)에 21살의 나이로 출가하기 전까지는 성균관에 몸담고 있으면서 유교를 공부했으며 승려인 해월에게 《논어》를 가르칠 정도의 유학자였다. 그런데 불교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계율인 ‘불살생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정도로 불교 자체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불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지식이란 오직 유교경전과 사서, 정주학 등을 통해 벽불론자들이 전해주는 불교에 대한 비난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해월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고 《현정론》을 저술하기에 이른다.

정도전의 시문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그가 불교와는 담을 쌓고 산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당시 성행하던 선과 화엄 등 여러 종파의 스님들과 교유하고 여러 불교경전을 섭렵하였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유배와 유랑의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만난 스님들이 그가 고민하고 있던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해결방안을 불교적으로 제시했는지는 미지수이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아마도 그가 찾고자 하는 방안을 나누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조선왕조의 건립 이후 나타난 대불교정책을 통해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선은 개혁적인 문신 관료와 무신, 승려들의 합작으로 개창되었다. 성리학계는 성균관을 중심으로 하여 젊은 유신들을 길러 관료로 만들면서 사상적인 정체성과 정치적 기반을 확립해 갔다. 불교계는 태고보우, 나옹혜근으로 대표되는 고승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계의 폐단을 자체적으로 정화하거나 불교계의 역량을 사회적 시스템으로 작동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정치에 참여할 재가불자들을 육성해 내지도 못했다. 또한 성리학 관료들은 오히려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하고 있던 나옹혜근을 귀양 보내는 등 조직적이고 공식적으로 방해하기까지 이른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방비책이나 자구책을 내어놓지 못한 불교계는 물리칠 대상으로 전락되어 고해의 조선시대를 넘게 된다.

정도전의 생애와 시문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 현대적인 의미는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시대를 종횡할 수 있는 사상의 결집체로서의 교육기관의 탄탄한 자리매김이다. 성균관을 통해 이색을 중심으로 한 정도전 등의 초기 성리학자층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적 개혁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들을 꿈꾸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도전은 성균관제조로서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교육을 통해 2세대를 육성하였으며 이는 그의 주살 이후에도 조선시대의 벽불 정책이 그대로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게 하였다.

다음으로는 사회적인 안목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스님들의 존재이다. 정도전은 유배기와 유랑기를 거치며 적지 않은 스님들과 깊이 있는 교유를 하고 있다. 스님에 대한 찬사에서 그리움, 존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종국에 그가 선택한 길은 어린 시절 텍스트로 배운 벽불로의 회귀, 아니 그보다 훨씬 정교해진 벽불사상을 갖추게 되었다. 유배기 이전의 정몽주의 《능엄경》 읽기 비판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만난 스님들과의 교유는 그의 이런 사상을 흔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인생 2막을 열어가는 데 훨씬 강화된 사상의 근거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스님들과의 만남이 불교적인 사유나 사상의 경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해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아직 그 이유는 밝히지 못했지만, 그의 조선왕조 창업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리학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창업은 그의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현재도 많은 이들이 개인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스님들을 찾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의 지도자로서 스님들의 폭넓은 사회적인 인식과 안목의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득도와 해탈의 중요성 못지 않게 그것의 사회적 환원과 방안 제시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불교계, 오늘날 종교계의 문제이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계의 비대화와 그에 따른 각종 비리, 세습, 성 문제 등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중생의 안락과 사회의 목탁과 소금이 되어야 할 종교가 종교를 믿는 이들만이 아니라 비종교인들에게까지도 걱정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반사회적 세습, 호화롭고 거대한 교회(성당)이나 사찰 건축 조형, 성직자의 성 문제 등을 스스로 정화하지 않으면 많은 종교인은 새로운 사회의 걸림돌이 되는 자기 종교나 이웃 종교를 향한 벽종(闢宗) 운동, 즉 종교 물리치기 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고려 말 조선 초의 개혁적인 인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또 다른 정도전을 기다리고 있다는 지하철의 광고 문구가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정도전은 말했다.

芳草長堤春雨微   풀 우거진 긴 둑에 봄비는 부슬부슬
牧牛終日却忘歸   종일토록 소 치며 집에 갈 걸 잊었구려.
請君須辦耕田力   여보쇼 그대 부디 밭 가는 힘 넣어 주고
莫使無爲空自肥   아예 저 혼자만 살찌게 말아다오.
— 〈題僧牧庵卷中 乙丑春〉 ■

 

고상현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근무. 동국대 문화예술학 박사학위 취득. 한국불교사와 불교문화, 무형문화유산, 축제, 문화콘텐츠 등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연등회를 통한 궁궐 문화유산콘텐츠의 창의적 활용 방안 연구〉 〈고려시대 수륙재 연구〉(선리연구원학술상 수상) 등과 저서로 《정도전의 불교비판을 비판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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