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일치를 천명한 주자학자

1. 들어가는 글
 
거대 담론이 이미 흘러간 유행가처럼 되었지만, 한국사의 시대구분 논의에서 고려에서 조선왕조로의 전환은 같은 중세라는 범주에서 다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거의 천 년간 지속되었던 불교 중심의 사회구조가 유교 중심의 사회구조로 전환되었으므로 고려와 조선을 동일한 성격을 가진 중세사회로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상사적 전환은 중국사상사에서 송 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형성되었던 흐름과 연관되며,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로 확대해서 보더라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기존의 연구는 표면적인 현상만을 이야기하거나 유교 중심의 사회구조로 전환된 흐름을 강조하는 데에 치우쳐 사상사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나 이유에 대한 해명이 경시되었다. 곧 결과론적인 시각에서 주자학 중심으로 전환된 양상을 강조하거나 불교의 폐단과 같은 부정적인 양상을 대비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자학이 불교와 도교에 대응하면서 성립된 사상이므로 불교의 사상적인 한계를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어떻게 구축하였는지, 나아가 그러한 과정에서 불교의 영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이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고려 말에 불교에서 주자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는 유교사, 불교사로 분리하여 접근하거나 유교와 불교와 관계에 대해서 단순히 교섭,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불교사 연구에서 일종의 호교론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사상사 전체 차원에서 엄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색(李穡, 1328~1396)은 이러한 사상사적 전환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원 제국의 지배기와 원, 명 교체라는 국제 관계의 변화, 고려왕조의 몰락과 조선왕조의 개창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인생의 영광과 좌절을 체험하였다. 그는 당시 사상 초유의 제국을 형성한 몽골의 중심인 대도(大都)에 유학하여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며, 고려 유학계에 주자학을 수용, 확산하는 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색은 불교와의 인연이 깊고, 불교 관련 시문을 적지 않게 남길 정도로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색의 불교 이해는 흔히 거사로서 불교를 이해하는 범주나 유불 관계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상사적 전환 문제라는 거시적인 구도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2. 이색의 생애와 불교계와 관계
 
이색의 집안은 본래 충청도 한산의 향리였지만, 그의 아버지인 이곡이 원의 제과에 합격하여 고위 관직으로 나아가면서 세족으로 성장하였다. 이색은 1341년에 국자감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이어 그는 1348년에 고려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원의 국자감에 입학하였고, 1350년까지 수학하였다. 1351년에 부친상으로 인해 유학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3년상을 치르게 되었다.

그는 상중에 공민왕에게 복중상서를 올렸고, 1353년에 상을 마친 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나아가 그는 정동행성 향시, 원의 회시, 전시 등에 차례로 합격하였다. 그는 원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1356년에 고려로 돌아왔다. 이후 공민왕의 반원개혁이 진행되면서 이색은 승진을 거듭하여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36세에 재추의 반열인 밀직제학이 되었으며, 2년 후에는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여 많은 문생과 정치적, 학문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나아가 그는 신돈 집권기에 다른 사대부와 달리 신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성균관이 중영될 때에 대사성이 되어 성균관에서 주자학을 가르치면서 고려 사상계에서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이색은 신돈이 몰락한 후에도 타격을 입지 않고 공민왕의 신임을 받았으나, 공민왕 20년(1371년)에 모친상으로 관직에 물러났으며, 우왕 5년(1379년)에 복직될 때까지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 대에 신흥사대부가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면서 이색은 정치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왕 3년(1377)에 이색이 공민왕을 기리기 위한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의 비문을 짓게 되면서 2년 후에 정당문학으로 복직되었다. 그러나 이색은 실권이 없는 재상직에 만족하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도당에서 자문을 하거나 외교 문서 작성에 참여하는 데에 그쳤다.

이후 이색은 복직과 사직을 거듭하는데, 우왕 14년(1388년)에 이인임 등 권신들이 모두 축출되면서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후 정치적인 흐름은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고려왕조의 몰락이 가속화되는 등 정치적인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이색은 전제 개혁 문제 등에서 공양왕 편에 서서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는 등 정치적으로 역성혁명파에 반대하는 노선에 서게 되었다.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가 몰락하고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이색은 논죄의 대상의 되었으나 사면되었고, 고향 한산으로 돌아갔다. 태조 이성계가 여러 가지로 예우하였으나 그는 신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지내다가 태조 5년(1396)에 신륵사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이색의 불교계 교류와 불교 인식은 그의 방대한 문집을 통해 알 수 있다. 《목은시고》 35권에 수록된 시는 4,246수에 이르며, 이 가운데 불교 관련 시는 약 510수로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의 불교시는 1377~1382년 사이에 거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특정 시기에 집중되었다. 다만 《목은문고》의 불교 관련 글은 전체 글 가운데 4분의 1 이상이나 되지만 특정 시기에 집중되지는 않는다.

이색의 시에는 불교 비판적인 내용이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불교와의 교유 관계나 우호적인 내용이 훨씬 많다. 이색은 일찍부터 불교계와 관계를 맺고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한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8세 때에 숭정사(崇政寺)에서 백린(白璘)과 함께 독서를 하였다. 이색은 16, 7세 때에는 선비 18인과 함께 나잔자(懶殘子), 천태원공(天台圓公), 환암혼수(幻菴混修) 등과 교유하면서 결계(結契)를 하였다. 고려 시기 사대부의 일반적인 경향과 마찬가지로 이색은 어린 시절부터 산사에서 독서하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에 인연을 가지게 되었고 다양한 승려와 교유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이색은 화엄종, 천태종 등 다양한 종파의 승려들과 교류하였지만, 선승들과 가장 폭넓고 깊이 있는 교유 관계를 맺고 있었다. 100여 명이 넘는 선승과의 관계는 일본승인 중암수윤, 원의 사대부와 폭넓은 교유 관계를 지닌 옥전달온과 같은 인물도 있지만, 나옹혜근의 문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옹의 문도 가운데 환암혼수는 이색의 10대 시절부터 함께 결계 모임을 가질 정도로 인연이 깊다. 《목은시고》에 그들의 교유 관계를 보여 주는 수십 편의 시가 남아 있다. 그 외에 회암사(檜巖寺) 주지를 지낸 익륜절간(益倫絶磵), 고암일승(杲菴日昇) 등 다양한 선승들을 들 수 있다.  

이색과 나옹과의 관계는 그들의 출생지가 영해이고, 죽음을 맞은 곳도 우연찮게 여주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옹이 입적한 이후 그의 사리석종은 수많은 곳에 세워졌는데, 그의 문도가 비문을 모두 이색에게 청탁하였다. 이색은 나옹과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8곳의 비문을 지어주었다.

고려 말의 선종계는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을 중심으로 당시 선종계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이색이 태고와의 관계는 거의 없는 데에 비해 나옹 문도와 교유하였던 것은 당시 나옹 계열이 선종계를 주도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색이 현실 정치에까지 개입하였던 태고의 성향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옹과 같이 선승 본연의 분위기를 선호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한편, 고려 말에 주자학이 수용되면서 불교 비판론이 점차 확산하고 있었다. 이색의 경우에도 그의 행적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제기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공민왕 원년(1352년)에 올린 복중상소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글에서 이색은 사원경제의 폐단에 대한 개혁책을 제기하였다. 그는 함부로 세운 사찰을 철거하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곧 군역에 편입시켜야 하며, 양민이 함부로 출가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중상소문은 이색이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다는 근거로 자주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글은 이색 열전의 전체 내용 중 3분의 1 이상이나 될 만큼 길게 서술되어 있으며, 조선 초의 이색 평가를 둘러싸고 《고려사》 이색 열전에 추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복중상소문은 고려 말에 비대해진 사원경제의 폐단이 국가 차원의 사회적인 모순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색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원경제의 폐단에 대한 지적과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던 내용이었다. 더욱이 그는 불교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긍정하거나 옹호하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당시의 척불론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 자체가 불효가 되고 윤리를 없앤다고 하는 관점에서 비롯된 내용이 많았다. 이색은 기복을 명분으로 지나치게 사치스럽거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곤란하지만, 불사를 하는 것이 선조와 국왕에게 충과 효를 다하는 것이라면 당연하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나 《우란분경(盂蘭盆經)》을 통해 불교적인 효의 윤리를 이해하고, 효의 개념을 유교의 입장에서만 고집하지 않는 자세를 보였다. 당시 불교 비판이 점차 확산하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각종 시와 글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보다는 변호에 가까운 글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1379년에 환암혼수가 청룡사에서 《호법론(護法論)》을 간행할 때에 이색에게 부탁한 발문에서 잘 드러난다. 이 글에서 이색은 장상영이 《호법론》을 저술하여 한유와 구양수 등의 척불론을 비판한 것에 대해 옹호하였고 《호법론》이 세상에 성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글을 맺고 있다. 당시 사대부의 척불론에 대항하기 위해 불교계에서 《호법론》을 간행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색이 단순한 친분이나 수사에 그친 것이 아니라 《호법론》에 공감한다는 표현까지 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색이 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본래 부친인 이곡이 충정왕 2년(1350년)에 모친상을 치른 후에 상총의 권유에 따라 대장경을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1379년에 나옹의 문도들에 의해 본격적인 불사가 시작되어 우왕 7년(1381년)에 대장경이 완간되었다. 다음 해 정월에 영통사(靈通寺)에서 대장경의 전독회를 열었고, 4월에 여주 신륵사에 대장경을 옮겨 새로 준공한 대장각에 안치하였다.

대장경 불사는 처음 이색 집안의 발원에서 비롯되었으나 국가적인 사업으로 승격되었다. 이 불사에는 특히 나옹의 문도들이 다수 참여하여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실제 대장경 불사의 단월에 국사, 왕사를 비롯하여 왕족, 이인임, 최영, 홍영통, 조민수, 임견미, 염흥방, 권중화, 우현보 등 거의 모든 재추들, 왕비를 비롯한 내, 외명부 등이 대거 참가할 정도였다.

이색이 대장경 불사를 실천에 옮긴 것은 당시 그의 처지와 불교계와의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44세 되던 해인 공민왕 20년(1371년)에 모친상을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나고 52세 되던 해인 우왕 5년(1379년)에 복직할 때까지 9년간 실직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경제적 어려움에다 건강이 좋지 않아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가난, 질병과 함께 인간적인 고독감을 토로할 정도로 인생 최악의 곤경에 시달릴 때, 그를 위로하고 도와준 이들이 승려들이었다. 승려들은 그에게 시문을 청탁하고 그 대가로 양식, 의복, 술 등을 주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색은 일찍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 관계는 생을 마칠 때까지 이어졌다. 물론 그가 남긴 시문을 통해 보면 관료의 길로 나아가면서 관직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을 때는 불교와의 관계가 그렇게 폭넓게 보이지 않다가, 중년기 이후에 불교 관련 작품을 많이 남기는 등 시기에 따른 부침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년기 이후는 생의 고비만이 아니라 고려의 정치 상황이 격변하면서 역성혁명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불교 비판론이 정치적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색은 적극적으로 불교 비판으로 전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불교와의 관계가 심화되었다.

3. 이색의 불교 이해와 특징 

이색은 일찍이 홍영통(洪永通), 이무방(李茂方) 등과 함께 백련회(白蓮會)를 결성하고 활동할 만큼 정토신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불교 신앙과 함께 불교 경전에 대한 그의 관심도 다양했는데, 선불교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져 보인다. 《목은시고》에 이색이 《유마경》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 등 선과 관련되는 경전을 섭렵하고 그와 관련된 시를 남기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경전의 이해를 토대로 승려들에게 각종 기문을 지어 주었다. 후술하듯이 이색은 경전의 이론적인 이해만이 아니라 선적인 깨달음을 통해 깊은 경지를 보일 정도였다.

한편, 이색은 각종 선적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갖고 섭렵하였으며, 선의 실천까지 수행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의 시문집을 통해 《경덕전등록》 《조파도(祖派圖)》 《종경록(宗鏡錄)》 《증도가(證道歌)》 《황벽어록(黃蘗語錄)》 《십우도송(十牛圖頌)》 등 어록, 전등사서 등 다양한 선적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선적을 각종 시에서 인용하면서 이색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끽다거(喫茶去)’ ‘무자(無字)’ 화두 등 다양한 공안을 언급하고 있어 공안선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 그는 평생 참선을 하였다는 술회와 함께 참선을 통한 나름의 오도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일상적으로 항상 화두를 참구하였던 면모를 다양한 시로 표현하였다. 그는 선승들에게 간화선 수행에 대한 경책이나 조언을 할 만큼 이해의 경지가 깊은 면을 보였다. 아울러 그가 화엄곡(華嚴谷)에게 나옹이 권한 화두를 참구하면 백복의 장엄함이 서서 기다릴 것이라고 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이색의 간화선 이해는 나옹을 비롯하여 고려 선종계에서 성행한 ‘무자(無字)’ 화두 일변도로 나아갔던 흐름이 반영되어 있다.
이색은 선적인 깨달음의 경험을 시로 지어 스스로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음을 표현했는데, 그의 깨달음의 경지가 어떠한가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가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의 시는 이색의 선적 깨달음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아이 우는 소리에 비 오는 소리.
백발노옹은 정이 무한하네.
천년 도연명의 한잔 술에 유유(悠悠)한 천운은 마침내 밝기가 어렵다.
소년은 누가 명성을 세우지 않으려 하겠는가.
만년에는 응당 모름지기 성정을 기르려 하네.
사방에 비가 쏟아지니 인적이 끊어졌고
생각이 맑고 잡념을 떠나 스스로 밝아지네.
솔 소리 절벽에 있는데 샘물 흐르는 소리를 걸어
귀에 들리니 상쾌하여 도정(道情)이 나네.
부질없이 산중을 향해 그윽한 흥을 부치니
때때로 자리 깔고 밥 먹고 천명을 기다리네.
빈 당에 고요하여 새소리 들리고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으니 유연(悠然)하여 세정(世情)을 잊네.
음탕한 비는 열흘을 내리다가 그치고 다시 내리니
작은 창에 종일 어두웠다가 이에 밝아지네.
마음으로 통하여 귀에 들어가 남은 소리가 있으니
일을 만나 끝없이 스스로 정에 적당하네.
육근을 끊고 소제하여 찌꺼기가 다하여
비로소 즐거워 하늘이 밝음을 아네. 

위의 시에서 이색은 아이 우는 소리, 비 오는 소리, 솔 소리, 샘물 소리, 새소리 등의 다양한 소리를 감각기관인 귀가 듣지만, 소리 자체를 분별하고 아는 것은 마음이라는 의미를 스스로 체득하였음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능엄경》 권6에서 강조하는 관음보살이 문성(聞性)을 반문(反聞)하여 이근원통(耳根圓通)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는 이색의 다른 글에서 확인된다. 그는 천지만물에 통용되는 도는 일체가 마음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든지, 불보살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 본래 하나이며, 일체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고 마음자리에서 부처나 중생이 차별이 없으므로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더라도 그 본래면목을 깨달으면 불보살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하였다. 나아가 이색은 선승들에게 선에 대한 가르침과 선 수행에 대한 방향 제시를 할 만큼 그의 선에 대한 경지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4. 주자학의 수용과 불교

고려 말에 이르면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심화된 정치·사회적인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고, 당시의 사대부는 사회개혁을 모색하면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주자학은 사상체계의 형성과정 자체가 불교와 도교 등에 대한 대결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주자학은 불교나 도교의 사상적 영향을 받으면서도 거꾸로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몰고 스스로를 정통으로 간주하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사상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수용되면서 종래와 차원이 다른 불교 비판이 사대부 사회에서 점차 대두하였다. 그러한 비판의 배경에는 물론 당시 고려사회의 개혁이라는 과제와 사원경제의 모순 등 불교계의 부패도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개혁의 방향이나 방법의 차이, 정치적 이해관계의 차이, 불교와의 관계 등 다양한 노선의 차이로 인해 사대부 사회도 단일한 노선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 중국 사상사에서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되었던 주자학이라는 새로운 사유체계를 고려의 유학자들이 수용하는 과정은 동시대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고려는 송과 마찬가지로 요, 금의 압박을 받아 오랫동안 북방민족의 왕조와 공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송과의 직접적인 교류 관계를 갖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12세기 이후 백 년간 진행된 무신정권, 나아가 몽골의 장기적인 공격 등으로 인해 고려 사상계가 직접 주자학을 접할 기회를 얻기가 곤란하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고려의 지식인들이 주자학이라는 새로운 사조에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315년에 원이 과거제를 부활하고 주자학을 국가 교학으로 수용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주자학을 고려의 지식인들이 단기간에 쉽게 수용하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종래 통설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유불대립이라는 도식적인 이해로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의 사상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의 사대부는 불교비판론에서 유불조화론 내지 유불일치론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 이색은 유교와 불교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주자학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의 불교 이해가 미친 영향은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색은 적극적으로 불교비판론을 제기한 경우가 별로 없으며, 오히려 유교와 불교가 다르지 않고 그 도가 같다는 유불일치론의 입장을 제기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를 자주 인용한다든지 유가나 불가나 그 실천의 성격이 마찬가지라는 견해를 피력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이색은 유교의 성현이 천하를 위해 행한 일과 번뇌와 고통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대승보살도의 실천이 같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유교나 불교나 그 사회적 실천과 기능이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다시 그러한 실천을 하기 위한 전제가 되는 수양론의 견해를 제기할 때에도 공부나 수행의 방향과 목표가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들 유교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으로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이룩한다면 불교의 맑은 마음과 지관(止觀)으로서 본원(本源)과 자성(自性)의 천진함을 보는 것이나 또는 부처가 사람을 생사의 물결 속에서 건져내어 적멸로 돌아가게 하는 것과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위의 글에서 이색은 진리의 세계가 차별이 없으며, 유가나 불가가 모두 마음공부를 통해 자기완성과 사회적 실천을 함께 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수양 방법론에서 유학자가 《대학》의 격물치지, 성의정심으로 공부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룩하는 것이나 불교에서 마음 수행을 통해 본래면목을 보거나 부처의 자비로 적멸로 귀의하는 것이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이러한 수양론은 본래 순수한 마음이 더럽혀지게 되는 것을 막고 성품을 닦는 것은 유자나 불도가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방법으로 계, 정, 혜 삼학(三學)에 의거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유불일치론적인 입장은 이색이 주자학을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이색이 주자학을 이해하는 데 선의 이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기로 한다. 그는 주경(主敬) 공부와 정좌 수양을 강조하고 실제 자신이 그러한 공부에 몰입하였다. 그런데 이색은 주자학 수양론의 이해와 실천에서 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면이 적지 않았다. 다음의 시는 그러한 양상을 토로한 것이다.

성문(聖門)의 심학(心學)은 감히 헛되이 전하였겠는가.
주일공부(主一工夫)는 좌선(坐禪)과 흡사하다.
마치고 보니 밝고 밝아 시비를 끊으니
혼혼(昏昏)하고 묵묵(黙黙)하면 역시 편벽하다고 이르겠다.
벌과 개미같이 모이니 땅이 없는 것과 같아
어약연비(魚躍鳶飛)는 스스로 하늘에 있다.
취하고 버리는 유래는 손바닥 보는 것과 같은데
어찌하여 사욕으로서 붙들리고 있는가.

이색이 내면적인 세계에서 느낀 바를 표현한 위의 시에서 주일 공부를 좌선과 비슷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중용》의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의 구절을 인용하는데, 이는 군자의 도가 드러나면서도 은미하다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 의하면 자사(子思)가 이 시를 인용하여 화육이 유행하고 상하에 밝게 드러남이 이(理)의 용(用)임을 밝혔으니 이른바 비(費)라는 것이며, 그 소이연(所以然)은 보고 들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므로, 체(體)의 은미함이라 하여 은(隱)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에서 고기가 항상 뛰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솔개가 항상 날기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동정(動靜)과 체용(體用)을 겸하는 것이며, 손바닥을 펴는 것이란 굴신(屈伸)을 의미하니 곧 동정, 음양, 체용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색은 주자학의 핵심적인 실천에 대한 이해와 공부 방법에서 선의 이해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는 이색이 적암(寂菴)에게 준 글에서도 드러난다. 이 글에서 이색은 주자학의 주경 공부에 대한 설을 불교의 적(寂)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색의 연꽃 감상에 대한 20여 수의 시에서도 드러난다.

염계(濂溪)를 향하여 함께 연꽃을 사랑하고자 하니
… (중략) …
선풍(禪風)이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에 있어
환경(幻境)은 스스로 나는 못 위의 연꽃이니
누가 고요한 가운데 마음자리에 불초(不肖)도 없고 어진 이도 없다는 것을 알겠는가. 

위의 시에서 보이는 상련(賞蓮)은 주렴계의 〈애련설(愛蓮說)〉에서 군자(君子)라는 이상적인 인간형이 되기를 원하는 심정과 심신의 청정함을 기원하는 것이다. 〈애련설〉은 문장이 간결하고 주렴계의 심경이 잘 표현되었기 때문에 문장의 궤범(軌範)으로서 오랫동안 중시되었다. 그런데 이색의 경우는 성리학적 인간관의 전범을 보여주는 〈애련설〉에 대한 이해를 선의 경지에서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위의 시에서 ‘정전백수자’ 화두의 의미를 변하지 않는 정(靜)을 보여주기 위한 것, 곧 무심의 동정을 가리키고 있으며, 연꽃이 피고 지는 것이 환상이란 곧 생멸을 가리키고 있다. 현존하는 자료를 통해 이색이 애련설을 고려에서 처음으로 부각시켰는데, 성리학자들의 경향과 달리 선적인 분위기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고려 말의 사대부 사회에서 이색에 의해서만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원천석은 안회에 대한 흠모의 심정을 다양하게 시로 남기고 있다. 그런데 안회가 이상적인 인물로서 부각되는 것은 송 대에 이르러 부각된 성인(聖人)의 내면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본래 성인이란 사람으로서 최고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요, 순 등과 같이 역사상의 구체적인 이상적인 인물을 가리켰다. 이후 시대가 내려오면서 공자가 성인화된다든지, 도덕적 완성자로서 측면과 함께 민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유능한 왕자(王者)의 측면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부각된다.

그런데 북송 이후가 되면 역사상의 성인들 존재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서서히 성인의 개념에 순수하게 내면의 완전성만을 조건으로 하는 용법이 눈에 띄게 된다. 이러한 성인의 내면화 현상이 등장하면서 성인의 구체적인 예로서 강하게 의식되었던 것이 공자이고, 그와 동시에 성인에 이르는 한 단계 앞의 존재로서 제자인 안회(顔回)가 부각되었다. 안회의 단계를 통해서 성인에 도달하자고 하는 것은 성인을 단순히 내면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안회에 대한 현창은 만인이 학문·수양에 의해 성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성인가학설(聖人可學說)과 깊이 관련된다. 다시 말해 성인가학설에는 주자학의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집약되어 있고, 성인이라는 개념의 변화에 어울리는 인물로서 안회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색, 원천석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말의 사대부는 주자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불교, 특히 선의 영향이 적지 않게 드러나며, 유불일치론에 입각한 이해 방향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말 주자학의 실천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절의의 대명사로 조선시대에 줄곧 추숭되었던 정몽주가 지나치게 《능엄경》을 애독하므로 주위에서 공개적으로 우려의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불교비판론이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심각하게 제기되었지만, 사대부 사회에서 여전히 불교에 대한 이해는 별개의 문제이며, 주자학의 수용과 관련되는 측면이 존재하고 있었다.   

5. 나오는 글

고려 말 조선 초의 사상사는 불교에서 주자학으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양상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의 불교사는 결과론적으로 보면 몰락하는 흐름으로 나타나지만, 사대부의 불교 이해와 주자학의 수용과의 관계 문제 등은 사상사적인 의미가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색의 불교 이해는 14세기라는 정치적, 사상적인 격변기를 보내면서 사상사적 전환 과정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에 대한 시문집이 방대하게 남아 있고, 근래 시집이 모두 번역되고 문집도 새롭게 번역되어 새로운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다. 다만 여전히 불교사, 유교사라는 각각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인상이 강하며, 사상사의 전체 차원에서 보다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나아가 한국사상사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중국사상사의 흐름이나 동아시아 사상사를 아우르는 시각에서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

 

조명제 / 신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박사).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 불교학부 박사후과정을 이수하고 교토대학, 도쿄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한 바 있다. 저서로 《선문염송집 연구-12~13세기 고려의 공안선과 송의 선적》 《고려후기 간화선 연구》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