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문화 융합한 대표적 재가거사

1. 머리말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한국 한문학사에서 문인으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높은 문학적 성취도 이루었고 또한 문학 장르를 폭넓게 활용하고, 유교·불교·도교와 고유신앙까지 두루 소화하여 중세의 문학적 위상을 높이 고양시킨 이상적 교양인인 동시에 한국문학사를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이런 평가에 걸맞게 이규보는 자신의 당대에 이미 ‘문학유학(文學儒學)’의 대표자로 불렸고, 그의 문예론의 지배적 모티프는 도가사상으로 평가될 만큼 친도가적 인물이었다. 또한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처럼 고려 거사불교(居士佛敎)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유교적인 사고를 근간으로 생활하던 고위관료였지만 종교 신앙에서는 불교에 깊이 침잠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불교에 대한 지식과 신심, 승려와의 교유와 같은 불교적인 행적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이규보는 무의자 헤심(慧諶)과 같은 최고의 고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재가불자였고, 혜심과 함께 불교시의 문학성을 최고조로 고양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규보의 시에서 불교는 단순한 소재의 차원을 넘어 그의 고명한 시명(詩名)과 문학적 업적을 이루는 근본 토대였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어느 시대나 불교계를 이끄는 두 축은 출가 승려와 재가불자였다. 특히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의 재가불자는 불교문화의 기층이었다. 물속에 잠긴 거대한 빙산처럼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불교문화를 유지 발전시키는 주체였다. 그러므로 불교문화의 발전과 쇠퇴는 재가불자들의 수준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불교문화와 거사불교가 왕성하던 고려시대에 이규보는 재가거사(在家居士)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불교교학에 정통했고 다양한 승려들과 고류하였다. 그가 교류한 승려는 약 48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가장 막역하게 교류한 이들은 당대의 고승인 국사 지겸(志謙), 수선사 3세 몽여(夢如), 대선사 혜문(惠文), 《해동고승전》의 각훈(覺訓)과 고려재조대장경(高麗再彫大藏經)을 교정한 수기(守其) 등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규보는 고려의 대표적인 재가거사로서 그 자취가 분명하다. 따라서 이 논문은 이규보의 거사로서의 행적과 그의 불교인식의 구체적 특징을 탐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논의해보고자 한다.

2. 이규보의 불교적 행적

이규보는 젊은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하였다. 24세 때 이미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자호하고, 25세 때에는 《백운거사전》과 《백운거사 어록》을 저술하여 삶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이규보는 당대를 대표하는 사대부였지만, 스스로 ‘유학자로서 지관(止觀)을 배운 사람’으로 자처하였고, 누차 자신을 ‘거사 춘경(春卿)’으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참선하는 늙은 거사’로 부르고, 말년에는 주로 남헌(南軒) 거사 혹은 남헌(南軒) 장로로 자칭하였다.

이규보는 《백운거사어록》에서 거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혹자가 이르기를 거사라고 칭하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라고 묻기에 “혹자는 산에서 머문다고 하고 혹자는 집에서 머문다고 하나 오직 도를 즐기는 자라야 거사라고 부를 수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집에 머무르며 도를 즐기는 사람이다.”

위 인용문에 보듯이 이규보는 24세에 스스로 집에서 도를 즐기는 재가불자라는 점을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과 그가 일생 동안 걸어온 불교적 행적으로 살펴볼 때, 이규보는 고려의 대표적인 재가거사로 불리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규보처럼 고려시대에 거사로 활동했던 사대부는 매우 많았지만, 중요 인물에는 청평거사(淸平) 거사 이자현, 낙헌(樂軒) 거사 이장용, 동안(動安) 거사 이승휴가 있다. 특히 이자현은 고려 중기에 거사불교의 지평을 새롭게 연 사람이었다. 그는 고려 최대의 문벌인 인주 이씨의 후예로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춘천의 청평산(淸平山) 문수원(文殊院)에 들어가 수행했던 대표적인 거사였다. 이장용은 이자현의 방후손(傍後孫)이며 문벌의 후예로서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그는 주화적인 대몽외교(對蒙外交)와 개경천도(開京還都)의 주역으로서 당대를 대표하는 사대부였지만 또한 독실한 불자였다. 그의 두드러진 불교적 행보는 혜심의 수선사 결사와 천책(天頙)의 백련결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승휴는 본업을 유학으로 생각했던 신진사대부로서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밀직부사(密職副使)로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원정국사(圓靜國師)에게서 불교를 배우고 만년에는 삼척 두타산에 은거하며, 10년간 삼화사(三和寺)의 불경을 빌려 탐독하며 수행한 거사였다.

이규보도 이자현, 이장용, 이승휴처럼 유학을 생활의 기반으로 살아가던 전형적인 사대부였지만 재가거사로서의 특징과 위상을 분명하게 간직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고려시대의 거사들이 공유했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첫째, 유학적인 교양을 기준으로 활동하던 사대부였다. 둘째, 불경에 정통하고 여러 종파의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셋째, 불교 저술을 짓고, 승려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넷째, 말년에는 불교에 더욱 심취하여, 불교계율까지 지키는 삶을 살았다. 다섯째, 집에서도 수행에 힘썼고 가족 중에 출가자가 있었다. 여섯째, 재산과 살던 집 등을 사찰에 희사하였다. 일곱째, 임종 때에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자진하여 시신을 다비(茶毘)하게 했다.

위 거사들의 이런 공통성을 이규보에게 대입해 보면, 이규보도 전형적인 재가거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이규보는 유학적 교양과 이념을 삶의 준칙으로 삼던 신흥사대부였다. 특히 그는 무신정권기에 ‘능문능리’한 재능을 토대로 관계에 진출하여 관직 생활을 하다가 정승의 반열인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런 그를 정지(鄭芝)는 ‘일대유종(一代儒宗)’이라 불렀고, 이수(李需)는 ‘해동공자’로 평하였다.

둘째, 그가 읽었던 불경에는 《법화경》 《대품반야경》 《승기율》 《금강명경》 《인왕반야경》 《대장엄론》 《화엄경》 《원각경》 《능가경》 《능엄경》 등이 있는데, 이는 불경에 대한 그의 관심이 매우 광범위했음을 보여준다. 고려재조대장경 판각 시 교정을 주도했던 수기(守其) 승통은 그가 불경을 잘 외우자, 부처님의 제자 중에 총명제일로 불렸던 ‘아난(阿難)’의 이름을 빌려 이규보를 ‘아난’이라 부르기도 했다.
셋째, 이규보의 불교적 행적은 남달랐지만 독립적인 불교 저술은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동국이상국집》에 300여 수의 불교시와 140여 편의 불교 산문을 남겼다. 고려시대의 거사로서는 가장 많은 불교 관련 글들을 남긴 것이다. 이 자료들은 고려의 불교사와 불교시문 연구에 아주 소중한 자료들이다.

넷째, 이규보는 말년에 불교에 더욱 침잠하였다. 고려의 대표 거사들이 대부분 인생 후반부에 더 깊이 수행을 했듯이 이규보도 노년에 불교에 더욱 기울었다. 이규보는 벼슬에 물러나는 시기를 전후하여 불교에 침잠하면서, 《능엄경》 공부에 깊이 천착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시불(詩佛)로 불리던 왕유(王維)가 오신채와 육식을 금했던 사례처럼 이규보도 노년에 오신채와 육식을 금하고자 했다.

다섯째, 이규보는 25세 때부터 불교에 깊이 경도되었고, 자식들을 혼인시킨 뒤에는 입산하겠다는 의지를 자주 보여주었지만, 이는 일종의 문학적인 수사였다. 조선조 사대부들에게 귀거래(歸去來)의 뜻이 문학적인 관습이었듯이 이규보의 입산 언급도 문학적 관습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백거이의 “집에 있어도 부처가 될 만하니/ 이미 집을 잊은 사령운이구나(在家堪作佛 靈運已忘家)”라는 구절처럼 그는 늘 출가를 동경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출가하지 못하고 아들 법원(法源)을 출가시켰다.

여섯째, 다른 거사처럼 사찰에서 살거나, 사찰에 재산을 희사하지는 않았다. 그의 집안은 부친 대에 비로소 중앙 관계에 진출한 가난한 향반이었다. 그래서 관직에 나가서도 주로 녹봉에만 의지한 관계로 자주 식량을 걱정하였다. 따라서 사찰이나 승려로부터 오히려 물질적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승려들을 대신하여 수많은 문장을 지었다. 그가 당대를 대표하던 문사였던 만큼 ‘문장으로 부처에게 봉사하는[以文事佛]’ 보시에서는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일곱째, 죽음을 앞둔 불자들은 대부분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염원한다. “신축년(1241년) 7월에 앓기 시작하여 9월 2일에는 머리를 서쪽을 두고 홀연히 서거하니 향년 74세였다.”는 연보 내용으로 볼 때, 이규보도 임종에 임해서는 서방정토를 간절하게 염원하던 불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규보가 보여준 거사로서의 큰 행보였다.  

3. 이규보의 불교관

이규보의 불교관은 한마디로 자리매김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 이규보는 젊었을 때부터 불교의 여러 경전을 읽고 여러 종파의 승려와도 다양하게 교류하였고, 고려를 대표하는 거사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처럼 불교에 대한 그의 지식과 신앙은 폭이 넓었기 때문에 그의 불교관을 간명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또한 이규보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과 도교에도 정통하였고, 자신의 생각을 부처나 고승들처럼 장소와 청중에 따라 수기설법, 응병여약의 태도로 다양하게 펼쳤기 때문에 그의 불교사상은 더욱 다채롭게 보인다.
그의 불교 저작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당대에 크게 성행되었던 선종과 선사상의 불교관이 두드러지고, 또한 호국불교와 불법을 널리 펴는 방편인 실용적이며 영험적인 면이 강조된 불교관이 두루 나타난다. 이규보는 고려왕조가 지향했던 불교의 경향을 철저하게 수용하고 실천했던 사대부였다.

전통적인 고려불교의 특징은 호국불교이며, 민간신앙이 습합된 불교인데, 그는 이러한 당대의 불교적 특징을 적극 수용하여 왕실과 조정의 불교 의례와 행사에 필요한 행사문을 짓는 것은 물론 사찰의 기문이나 불상의 봉안문(奉安文) 등과 같은 글을 많이 지었다. 그 결과 이규보의 불교적인 글에는 실용성과 영험성도 자주 확인된다.

특징적인 그의 불교관은, 먼저 불교 경전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즉 그는 불경의 종지와 여러 종파가 주장한 교리에 정통하여, 《화엄경》을 이야기할 때는 《화엄경》의 이론과 용어를 통해 화엄사상을 논하고, 《법화경》을 논의할 때에는 《법화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불교사상을 진술할 만큼 불교 교리에 막힘이 없었다.

예컨대 그는 화엄사상과 화엄종을 두고 글을 쓸 때는 “법문은 많으나 화엄원교(華嚴圓敎)가 가장 으뜸이다. 만약 그 뜻을 말한다면 마치 천지의 큼을 기리는 것과 같다”라고 했고, 《법화경》을 논급하거나 천태종의 승려와 담소할 때에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나 ‘일불승(一佛乘)’의 이론과 ‘오시설(五時說)’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선종에 대해 논급할 때에는 선종의 승려를 최고로 칭찬하고, 〈담선법회문(談禪法會文)〉을 쓸 때에는 선종의 종지가 최상의 법문임을 내세우며 “선(禪)은 위가 없는 큰 법문”이라 주장하였다.

이런 점은 그가 불교에 박식한 당대의 문사였던 만큼 글의 청탁자나 글의 대상에 따라 다르게 ‘글로써 부처에게 봉사하는[以文事佛]’ 글쓰기를 했기 때문에 그때그때 내용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의 또 다른 불교관은 실용적, 방편적인 글에서 드러난다. 그는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국난과 재난을 극복하려는 불교 행사문을 많이 저술하였다. 예컨대 고려인의 불교적인 호국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글은 고려재조대장경의 주조 동기와 사상적 배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이규보는 사찰과 승려들의 권위를 북돋우고, 대중들의 종교적인 믿음을 돈독하게 하며, 불법을 효과적으로 포교하기 위해서 부처의 영험적 능력을 부각시키는 사찰의 기문(記文)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이런 종류의 글을 통해서 불교의 실용적, 방편적, 영험적인 측면을 널리 수용하였다.
그의 구체적인 불교인식의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 선종 중심의 불교 인식

이규보는 위에서 약술한 것처럼 불교를 다각적인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선종에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규보 개인의 종교적인 성향과도 관련이 있지만, 이규보 당대에 크게 풍미했던 조계종풍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규보가 의욕적으로 활동하던 시대에 권력을 잡은 무신 세력은 자신들의 정권을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이상과 상황에 맞는 종파를 지원하였다. 그래서 고려 불교의 경향은 교종에서 선종으로 그 무게 중심이 급격하게 옮겨졌다.

나말여초에 태조 왕건은 지방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던 선종과 연합하여 고려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벌열(閥閱) 귀족과 왕실이 중심이 된 귀족불교인 교종이 고려사회를 장악하였다. 그러다가 새롭게 등장한 무신정권은 교종과 교종을 후원하는 벌열 세력들을 제거하고 선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정세에 따라 선종은 쉽게 교종이 가졌던 기득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 배경을 토대로 성장한 지눌(知訥)의 수선사는 이후 자체적으로 불교를 혁신하고 아울러 최씨정권의 적극적인 지원과 비호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수선사는 당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주체로서 불교계에 등장하였다. 이때 최씨정권에게 인정을 받아 문관으로 활동하던 이규보는 선종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무신정권의 정책 방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선종 중심의 불교관은 자신의 종교적 취향과 소신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한 당대의 정치적 배경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이규보의 선종 중심의 불교관과 아울러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글에는 〈담선법회문(談禪法會文)〉이 있다. 〈담선법회문〉은 외형적으로는 실용문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내용 면에서는 친선종적이고, 최씨정권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에서 시행되었던 까닭으로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담선법회는 태조 때부터 시행되어 온 국가행사로 참선하는 선사들이 주로 참여하는 담선(談禪) 모임이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로 대표되는 선리(禪理)를 탐구하여 개인의 안녕을 도모하고, 선리의 신속성과 응집력을 이용해 국난을 극복하려는 행사였다. 즉, 법회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국난을 극복하려는 최씨정권의 염원이 그의 〈담선법회문〉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다음의 〈담선법회문〉은 이규보의 친선종적 사고를 잘 보여주고 있다.

대저 부처의 법은 한 가지인데 혹은 선이라 하고 혹은 교라고 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부처님의 마음은 선이라 하고 부처님의 말씀은 교라고 한다. 교라는 것은 법을 얻는 도구이니 법을 얻고 나면 그것은 곧 통발이나 올무나 추구처럼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만일 그렇지 않고 문자에 얽매여서 그 돌아갈 바를 모르면 몸이 죽음에 이르도록 허둥지둥하여 부처를 구하는 마음이 매우 근실할지라도 효과를 보는 일이 더디게 될 것이다. 선은 부처와 조사가 견성하던 법[印]이다. 대저 마음은 달처럼 깨끗하여 본래 한 점의 티끌도 없는 것이니, 진실로 망령된 정에 오염되지 않으면 그 빛을 돌이켜 높이 깨달으면 스스로 곧장 깨침의 경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 길은 매우 빠르고 그 효과는 매우 신속하다. 이것이 바로 더 없는 대승이 되는 것이다.

위 인용문의 요지는 인간의 자성은 본래 청정하여 누구나 훼손할 수 없고, 누구나 청정한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바로 돈오하여 보리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종이 주장하는 논리이며, 아울러 이규보의 친선종적 사고를 잘 보여준다.

이규보는 종파를 초월하여 다양한 승려들과 교유했지만, 선종의 승려와는 더욱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선종의 국사 지겸(志謙, 1145~1229), 수선사 3세인 몽여(夢如, ? ~1252), 그리고 대선사 혜문(惠文) 등과 막역하게 교류하였다. 이규보는 “남종선의 노숙은 스님 가운데 봉황인데, 이미 한계(寒溪)의 금벽동에 들어갔네(南宗老熟僧中鳳 一入寒溪金碧洞)”라며 선종의 승려를 승려들 가운데 봉황이라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선종 승려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만이 아니라 선종을 바라보는 그의 긍정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이규보의 이 같은 선종 중심의 불교관은 무의자 혜심(慧諶)이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을 발간하고 선시를 본격적으로 창작하던 당대의 불교사조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많았을 것이다. 이규보는 선시를 많이 지었고, 또 내용에서도 언어부정의 선리와 유심적인 사고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점으로 보아 그가 선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선종은 문자로 표현하는 일체의 행위를 배격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래서 심지어 원오극근(圜悟克勤)이 지은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선서인 《벽암록》을 그의 제자 대혜종고(大慧宗杲)가 불태워버렸다. 이럴 만큼 ‘이심전심’의 선지를 중시하고, 문자를 철저하게 배격한 종파가 선종이다. 이런 전통에도 불구하고 선사들은 선시를 많이 창작하였고, 《능엄경》이나 《육조법보단경》과 같은 경전을 열심히 읽었다. 이러한 선종의 전통을 이해하고 그가 주로 읽었던 경전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그의 불교사상의 방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규보는 《능가경》 《유마경》 《원각경》 등과 함께 고래로부터 선종에서 매우 존중하였던 경전인 《능엄경》에 깊이 매료되었다. 만년에 불법을 더욱 믿어 《능엄경》을 외었다고 했다. 《능엄경》을 “1권부터 6권까지 유창하게 외웠으니/ 어찌 나머지를 남겨두고 그만둘 수 있으랴”라는 진술에서 보듯이 그는 노년에 《능엄경》 읽기에 더욱 주력하였다.

위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볼 때, 이규보는 선종에 대해 호감을 가졌고, 그의 정치관도 친선종적인 정치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불교관이 선종 중심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2) 이문사불(以文事佛)의 방편불교

이규보가 가졌던 불교인식의 근간은 선사상이다. 그러나 이규보는 수많은 종파와 불교사상 가운데 선종과 선사상에 많이 경도되어 있었지만, 불교의 실용성과 영험성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이러한 관점은 불교를 현실적인 삶에서 적극 활용하고 또 불교의 세계로 대중들을 인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험한 설화 등의 방편적인 활용과 관련된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고유의 전통신앙을 비롯한 여러 사상과 습합되어 한마디로 아우를 수 없는 다양한 모습을 가진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 이후 불교는 호국사상·보비사상과 결탁되고 국가와 왕실이 팔관회·연등회와 같은 대소의 불교행사들을 주관하였으며, 무신정권도 이러한 전통을 적극적으로 유지 계승하였다.
문사로서 재능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 이규보에게 부과된 주된 책무는 조정과 왕실이 주관하는 행사와 종교적인 의례를 위해서 글을 쓰는 일이었다. 이규보에게 왕실과 집정자가 주도하는 행사와 관련된 글을 쓰는 행위는 힘든 사역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장의 기량을 마음껏 펼쳐서 관계에 진출하고 승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고려 때에는 불교를 숭앙하고 장려하는 것이 왕업을 높이 받드는 사업이었고, 이규보는 왕의 명령을 받아 이러한 글을 지음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규보는 이런 글을 쓸 위치에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이 업무를 수행하여, 그가 남긴 140여 편의 불교 산문 가운데 많은 양이 불사(佛事)와 관련된 글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규보뿐만 아니라 최자(崔滋, 1188~1260), 김구(金坵, 1211~1278)와 같은 고려시대의 대문장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그들은 한결같이 대외적인 표문(表文)이나 왕실과 조정의 불교 행사에 쓰였던 많은 의례문(儀禮文)을 창작하기도 했다.

이규보가 지은 실용적인 불교 관련 글은 국가 주관의 행사에 필요한 〈석도소(釋道䟽)〉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담선법회문〉 그리고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고 외침 및 재난 방지를 기원하는 ‘음찬시(音讚詩)’가 대표적이다.

이규보는 〈용담사총림회방(龍潭寺叢林會牓)〉 즉 〈담선법회문〉에서 그의 실용적, 방편적인 불교관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 태조대왕께서 처음 왕업의 기틀을 닦으실 때에 선법을 독실히 존숭하였다. 이에 오백 사찰을 서울과 지방에 창건하여 승려들을 거처하게 하고 한 해씩 걸러서 담선대회를 서울에서 여셨으니 이것은 북병(北兵)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태조 때부터 내려온 ‘담선법회’의 주목적은 북병(北兵)을 진압하는 데 있다고 했다. 북병 진압을 위해서 창작된 이 글은 그가 불교를 방편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이규보는 여러 편의 〈담선법회문〉을 통해서 호국적 사고를 드러냈는데, 이는 이규보 개인의 관점인 동시에 당대의 고려사회가 가졌던 불교인식과도 깊이 관련된다. 이러한 글들은 불교 행사를 주관하면서 종교적 교의를 널리 펴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글들이기에 목적성이 더욱 부각된다.

이규보의 실용적 불교관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은 영험적인 불교관이다. 이규보의 불교관은 선사상이 중심이고, 실용불교와도 관련이 깊다. 그래서 그는 불교설화 등의 다양한 영험담(靈驗談)을 적극적으로 불교저작에 수용하였다. 이규보가 불교의 영험성을 강조한 글은 친분이 두터운 승려들의 청탁에 따라 지은 기문(記文)들이 많다. 이런 종류의 글은 청탁자의 요구에 부응하여, 신이한 불교 이적을 믿는 일반 대중이 쉽게 불교에 접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다. 이 같은 영험적 불교관은 다음의 예문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일찍이 대사에게 말하기를, “대저 심법(心法)으로 본다면 곧바로 비로자나의 정상을 밟으려 해야 할 터인데, 자네는 바야흐로 또 그 상을 만들고 있으니, 견성에는 또한 멀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대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세속의 야박함과 사람의 욕심이 심한데, 어찌 사람마다 모두 곧바로 깨닫는 뜻을 알게 하겠는가? 무릇 인정이란 경계를 대하면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연을 얻은 다음 참된 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상을 조성하는 것은 대개 사람들을 몰아서 진여에 돌아가게 하고 사람들에게 부처를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네”라고 하므로, 나는 비로소 그 말이 옳다 하였다.

이 글에서 이규보는 승려 학주(學珠)와 문답하는 형식의 글을 통해 서로의 불교관을 비교하며 방편불교의 관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 글은 앞에서 고찰한 바처럼 이규보의 불교관이 표면적으로는 선종 중심임을 알게 한다. ‘심법으로 본다면 곧바로 그 정상을 밟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돈오사상이다. 북선(北禪)의 점수(漸修)와는 달리 남선(南禪)에서는 돈오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남선의 종지로 판단하면, 깨달음은 점수로는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불상을 만들어 그것을 믿고 받들 필요가 없다.

그러나 대사는 “세속과 인정이 야박하여 사람마다 곧바로 돈오의 경지에 들 수가 없으니, 사람이란 환경을 대하면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연을 얻어서 참된 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며, 중생 모두가 돈오하지 못하기 때문에 점수의 과정을 거치고, 진여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불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대사의 이런 주장에 따라 이규보는 점수설을 긍정하고 있다. 즉 대중들을 불교로 인도하기 위해서 영험적인 이적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방편불교이다. 모든 중생이 돈오를 깨달아 진여자성에 나아갈 수는 없으므로 불상을 만들어 불교의 세계로 인도하여 결국은 진여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수기설법(隨機說法) 관점에서 불교를 방편적으로 활용한 사례이다.

영험불교는 부처의 초월적인 권능을 신도들에게 널리 전파하여 부처나 승려의 권위를 신장하고 종교적인 경외감을 드러내어 준다. 물론 영험불교의 내용을 담고 있는 기문은 청탁에 의해서 주로 지어졌으며, 작품의 양도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규보의 주된 불교관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기문을 작성하면 반드시 이러한 영험적인 내용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불교 포교의 차원에서 불교의 영험담이 가진 효용성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규보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는 신이한 불교설화 3편을 수용하여 불교의 영험담을 주로 기술했다. 〈남행월일기〉는 이규보가 32세 때 전주목(全州牧) 사록(司錄)으로 부임했다가 관내의 여러 지방을 유람하면서 쓴 견문록이다. 이규보는 이 글에서 옛 승려들의 철저한 수행과 구도의 의지, 그들이 도를 얻게 된 내력을 서술하고, 이어서 깎아지른 절벽에 쇠줄로 묶여 있는 사찰의 지형을 서술하며 불교적 영험성을 구체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규보는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하여 영험적인 불교설화들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물론 이규보가 창작한 이러한 종류의 글들은 대부분 청탁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지만, 이런 글에서는 그의 방편적 불교관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은 물론 글의 청탁자나 서술 대상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지며, ‘글로써 부처에 봉사하는[以文事佛]’의 그의 독특한 불교적 글쓰기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4. 맺음말

이규보가 활동하던 무신정권기는 그들의 강권통치로 인한 불교와 문학이 퇴보하는 쇠퇴기가 아니라 오히려 약진하는 성황기였다. 그리고 고려 중기에 발간된 고려시대의 문집 가운데 전문적인 불서와 승려들의 문집과 어록을 제외하면, 당대의 불교문화와 불교 시문을 온전하게 보존한 사대부들의 문집들은 거의 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은 그가 지은 불교시문의 독특한 개성과 수많은 내용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

또한 이규보는 불교를 깊이 신봉하던 대표적인 재가거사로 당대의 불교 신앙과 문풍을 주도한 인물이다. 무의자 혜심이 선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최고조의 선시를 창작한 승려라면, 재가거사 이규보는 승려들의 전유물이었던 선시와 불교시를 일반화시키고 자신의 문학작품에 불교적 사유와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도입해서, 불교와 문학을 고차적인 융합한 수준 높은 작품을 창작한 선시인(禪詩人)이었다. 따라서 한국문학에 나타난 선시와 불교시는 승가(僧家)로만 이어진 단선적 문화가 아니라 이규보와 같은 거사 문인에게서도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규보는 ‘문장으로써 부처에게 봉사하는[以文事佛]’의 방편적 글쓰기를 통해서, 대중을 불교로 인도하기 위한 영험불교를 수용하였고, 수많은 불교적인 의례와 행사에 활용되는 찬불문 등을 전담하여 지었다. 이로 보아 이규보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매진했던 진정한 불교 문인이었다.

불교에 정통한 거사 이규보가 지은 불교시와 불교 산문은 승려들의 작품에 비해서 교리나 선리가 앞서지 아니하고 항상 감수성과 소통성이 우선되기 때문에 훨씬 쉽게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장점이 있다. 시불(詩佛)로 불린 왕유(王維)가 당나라에서 이룩한 선시(禪詩)의 성과에 근접한 한국의 거사에는 이규보와 그의 선시가 있으며, 중국의 대표적 거사 시인 향산(香山) 백거이(白居易)의 불교적 행보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도 이규보였다.

고려의 대표적인 거사로서 이규보가 보여준 불교적 행보는 그가 이룩한 우뚝한 문학적 성과와 아울러 한국 문단에 떨친 그의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높이 쌓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강석근 / 동국대학교 아시아연구원 전임연구원.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주요 저서로 《이규보의 불교시》 《한국불교시연구》 등이 있다. 현재 경북스토텔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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