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해 깊었던 원칙주의자

1. 《삼국사기》의 불교 비판

《삼국사기》의 편찬자로 잘 알려진 김부식(1075~1151)은 고려 중기, 특히 12세기 초인 예종 대(1105~1122)와 인종 대(1122~1146)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인이다. 당대에 그의 학자 및 문인으로서 위상은 인종 원년(1123년)에 고려를 방문하였던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남긴 기록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서긍은 고려를 방문한 후 고려 사회의 여러 모습을 그림과 함께 기록하였는데, 그중 당시의 대표적 인물들에 대해 서술한 〈인물〉 편에서 김부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글을 잘 짓고, 고금(古今)에 정통하다. 학사들이 믿고 따르는 데 있어서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 49세로서 아직 4품의 예부시랑직에 머물고 있던 중견 관료에 대한 평가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려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김부식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김부식은 인종 즉위 직후 여러 관료가 국왕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으로서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이자겸에게 잘 보이고자 그의 생일을 국왕의 생일과 같이 국가의 명절로 지정하자고 건의했을 때 거의 유일하게 이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국왕과 신하의 본분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러한 논의를 중단시켰다. 이때 당사자인 이자겸조차도 김부식의 주장이야말로 정설이고 그로 인해 자신이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며 김부식의 원칙주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김부식은 여러 차례 국왕과 재상들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비판하면서 원칙주의자로서 면모를 보였다. 서긍이 이야기한 ‘학사들이 믿고 따르는 데 있어서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는 평가는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인인 동시에 정치적인 면에서도 철저히 원칙을 지키는 그의 태도가 여러 동료와 선후배들의 존중을 받고 있던 상황을 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주의자 김부식은 일반적으로 불교를 비판 혹은 배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말미에 쓴 사론(史論)을 보면 그는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그 시작을 살펴보면 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 남에게는 관대하였고, 관청을 단순하게 두어 일을 간소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배를 타고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자제를 파견하여 (중국의) 조정에서 숙위하면서 대학에서 배우게 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거친 풍속을 바꿔 예의의 나라로 만들었다. 또한 중국 군대의 위엄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삼았으니 훌륭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을 받들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여 마을마다 절과 탑이 늘어서고 (국역을 담당할) 백성들이 승려로 숨어들어 가 군대와 농민이 나날이 줄어 나라가 날로 쇠약하게 하였다. 그런즉 어찌 어지럽게 되어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위의 글에서 보듯 그는 신라의 통치자들이 좋은 덕성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이를 토대로 성현의 가르침 즉 유교 문명을 배워 예의의 나라를 만들고 동시에 중국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할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그런 후에 그렇지만 불교의 사찰이 난립하고 지나치게 많은 백성들이 승려가 되는 폐단으로 인해 나라가 쇠약하게 되어 망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유교는 성공의 요인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는 반면, 불교는 멸망의 원인으로서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보면 김부식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물론 현재 전하는 김부식의 글 중에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위의 신라 멸망에 관한 사론 하나뿐이고, 다른 글에서는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모습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불교 승려들을 칭송하는 글을 적지 않게 남겼을 뿐 아니라 당시의 고승들과도 친밀하게 교유하였다. 또한 그의 글 중에는 불교 교리에 대해 상당히 잘 이해하고 있었던 모습도 보인다. 더욱이 그는 만년에는 거사(居士)로 자처하면서 사찰을 짓고 그곳에서 노년을 보내었다. 이는 그가 불교에 대해 단순히 비판적인 태도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과연 그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2. 노년의 거사(居士)로서 삶

김부식이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은 그가 노년에 사찰을 짓고 거사로서 생활하였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고려사》 등의 자료에 의하면 김부식은 노년에 관란사(觀瀾寺)라는 절을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김부식은 이 관란사에서의 생활을 주제로 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六月人間暑氣融   6월 세상엔 더위가 한창인데
江樓終日足淸風   강변 누각엔 온종일 서늘한 바람 가득하네.
山容水色無今古   산 모양, 물빛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인데
俗態人情有異同   세속의 인정은 차이가 있네.
舴艋獨行明鏡裏   쪽배는 홀로 맑은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鷺鷥雙去晝圖中   해오라기 한 쌍은 그림 속에 날아가네.
堪嗟世事如銜勒   아! 세상일은 재갈과 굴레처럼
不放衰遲一禿翁   머리 다 빠진 이 늙은이를 놓아주지 않네.
— 〈관란사 누각에서(觀瀾寺樓)〉 《동문선》 권12

은퇴 후 강변에 작은 절을 짓고 그곳에 머물며 여유 있는 삶을 보내려 했지만, 여전히 세속의 일에 얽히게 되는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문하시중이라는 최고 재상직으로 은퇴한 이후에도 정계의 주요 현안에 의견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김부식의 노년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때 김부식이 거사(居士), 즉 재가 불교신자로 자처하였음은 비슷한 시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흥천사종명〉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새로 만든 흥천사의 종에 새기기 위해 써준 이 글에서 김부식은 자신을 ‘거사 김아무개(居士金某)’라고 표현하고 있다. 김부식은 이 글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거사로 칭하고 있는데, 관직에서 물러난 노년에 본격적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고 생활하면서 거사로 자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노년의 김부식이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생활하였음은 당시 유명한 화엄학 승려이자 시인이었던 혜소(惠素) 스님과 긴밀하게 교류하였던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혜소는 대각국사 의천 스님의 문도로서 황해도 배천(白川) 지역의 견불사(見佛寺)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파한집》에 의하면 김부식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나귀를 타고 자주 이곳에 왕래하면서 그와 밤을 새우며 도를 논하였다고 한다. 시인으로서의 교감도 있었겠지만 ‘도를 논하였다’고 표현된 것으로 보아 불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논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혜소와의 교류는 매우 긴밀하였던 것 같은데 《파한집》과 《보한집》에는 두 사람의 시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편 전하고 있다. 문종의 장인으로 재상을 지냈던 이자연이 송나라의 감로사를 본떠 만든 같은 이름의 사찰은 좋은 경치로 유명하였는데, 혜소와 김부식은 함께 그곳에 가서 경치를 감상한 후 혜소가 먼저 시의 앞부분을 짓고 김부식이 그것을 이어 뒷부분을 지어 공동으로 완성하였다. 두 사람이 대단히 의기투합하는 사이였음을 보여준다. 이 시는 크게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합작시에 화작(和作)하였는데, 그 화작시가 모두 천여 편에 이르러 그 자체로 책 한 권이 되었다고 한다. 또 혜소가 고양이를 주제로 하여 시를 짓자 김부식이 그것에 화작(和作)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螻蟻道存狼虎仁   땅강아지와 개미에게도 도가 있고 호랑이에게도   인(仁)이 있으니  
不須遣妄始求眞   참됨을 구하는 마음을 놓치고 잊어서는 안 되네.
吾師慧眼無分別   우리 스님의 혜안(慧眼)은 분별심이 없으니 
物物皆呈淸淨身   모든 사물이 청정한 몸으로 드러난다네.
— 《보한집》 권중

혜소의 시는 전하지 않지만 두 사람이 고양이를 주제로 하여 모든 중생에 내재하고 있는 불성과 청정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소 두 사람이 밤새워 논한 ‘도’의 내용도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김부식은 노년에 관란사를 짓고 거사로 자처하면서 화엄학승 혜소와 긴밀하게 교류하며 불교의 이치를 공부하고 불교적 삶을 살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배불론자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혜소와의 교류는 그의 스승인 대각국사 의천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고승에 대한 존중은 노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3. 대각국사 의천에 대한 경애

혜소와 김부식의 본격적인 만남은 김부식이 대각국사 문도들의 요청으로 대각국사의 비문을 작성하는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소 대각국사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혜소가 대각국사의 행적을 10권의 행장으로 자세히 정리하였고, 김부식이 그에 의거하여 비문을 지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이 대각국사의 비문을 짓게 되는 과정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고려시대 고승의 비는 국사와 왕사 등 국가적으로 그 위상을 인정받은 승려들에 한하여 건립되었다. 그리고 그 건립 과정은 문도들이 행장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스승의 탑비 건립을 요청하면 국왕이 적절한 문인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따라서 김부식이 대각국사의 비문을 지은 것은 국왕의 명령에 의한 관료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김부식에게 대각국사 비문 작성은 단순히 주어진 임무가 아니라 본인이 적극적으로 원하여 맡은 일이었다.

왕자 출신으로 11세기 후반 고려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대각국사는 그 위상으로 볼 때 입적 후 탑비의 건립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탑비 건립 과정에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대각국사가 입적한 다음 해인 1102년에 왕명으로 대각국사의 탑비 건립이 결정되자, 곧바로 처음 출가 도량인 개성 영통사 서북쪽에 탑비를 봉안할 경선원(敬先院)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1103년) 겨울에 공사를 완료하고 이곳에 탑비를 건립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 후인 1111년에 탑비의 위치가 풍수적으로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다음 해(1112년) 봄에 사찰 남쪽 회랑 바깥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과정도 다른 고승의 탑비에서는 보기 힘든 예외적인 일인데 더욱 큰 문제는 탑비가 옮겨지는 과정에서 본래의 비문이 사라지고 새로운 비문이 새겨졌다는 사실이다. 본래의 비문은 대각국사 입적 당시 재상이었던 윤관이 찬술한 것이었는데, 현재 전하는 영통사 대각국사 탑비의 비문은 윤관이 찬술한 것이 아니라 김부식이 찬술한 것이다.

더욱이 김부식이 비문을 찬술한 것은 탑비가 옮겨지고 나서 10여 년이 지난 1125년 여름 이후에 찬술된 것이다. 이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윤관의 비문 문장이 좋지 못해서 대각국사의 문도들이 왕에게 새로 지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에 국왕이 김부식을 시켜서 새로 짓게 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로 보면 1112년 탑비를 옮기는 과정에서 문도들이 기존의 탑비를 없애고 새로 비석을 마련한 후 거기에 새로운 내용의 비문을 새기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부식은 그들의 요청에 따라 새 비문을 지어주었고, 그것이 현재 전하는 영통사 탑비에 새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탑비를 없애고 새로운 비문의 탑비를 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것으로서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기존 비문의 작성자는 비록 당시 생존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전대에 재상을 역임하였던 국가의 원로이고, 그의 아들들이 당시에 고위 관료로 조정에서 활동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혹 문도들의 요청이 있고, 국왕의 명령이 있다고 해도 후배 관료가 선뜻 새로운 비문을 작성하겠다고 나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잘못하면 선배 재상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그 집안과의 관계도 나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려사》에서는 김부식이 기존 비문 대신에 새로 대각국사의 비문을 지음으로써 윤관의 아들들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훗날 비문이 완성된 다음 김부식이 국왕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경연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가 의도적으로 어려운 질문을 퍼부어 김부식을 당황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기존에 윤관이 작성한 비문이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김부식은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대각국사의 비문 작성을 맡았다. 원칙만 중시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두운 답답한 성격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소 자신이 존경하고 있던 대각국사의 업적을 기록하는 글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부식은 비문의 말미에 일찍이 자신이 젊었을 때 출가한 친형을 따라 대각국사를 만나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고 칭찬받았던 일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감회를 적고 있다.

아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쓰이게 되면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해야 하는 것이니, 비록 머리를 길에 펴서 발로 밟게 하는 것일지라도 즐겁게 할 것이다. 하물며 문자로써 (국사의) 비석 아래에 (나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어찌 영광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학술이 고루하고 말이 어눌하여 능히 (국사의) 그윽하고 밝은 덕을 온전히 드러내어 뒷사람들에게 보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죽는 한이 있어도 해야 한다는 표현에서, 일찍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었던 대각국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주변의 질시와 비난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문을 작성하는 심정이 엿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김부식이 기꺼이 대각국사의 비문을 작성한 것은 단순히 과거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대각국사는 왕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어려서부터 입적할 때까지 쉬지 않고 학문에 열중했으며, 이를 통해 당시 불교계의 현실 안주적이고 외형적 포장에만 급급한 태도를 개혁하고자 했다. 김부식은 이러한 대각국사의 행적에 많은 공감을 느끼고 그것을 이상적인 승려의 모습으로 현창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각국사의 업적을 정리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원효와 의상 두 분) 성인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가르침도 그에 따라 해이해졌다. 세상에서 명사(名士)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마음은 명예에 휘둘리고 지혜는 이로움에 어두워져서 학문이 갈수록 천박해졌다. 서적을 뒤져서 (그럴듯한) 문구만 따다가 이야기하면서 득의양양하게 스스로 좋아하고 있으니 후학들도 그 잘못을 이어받아 그대로 따라 하고 반성할 줄 모르게 되었다. 국사는 이에 습속(習俗)의 무지몽매함과 도덕의 막힘을 싫어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분발하게 함으로써 도를 밝히고 폐단을 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곡학(曲學)을 물리치고 오묘한 가르침을 보여주며, 감추어져 있는 진리를 드러내고 나태한 사람들을 북돋워 일으키면서 벼락과 같이 진동시키고 우로(雨露)와 같이 윤택하게 해주었다.

그 사이에 비록 마음으로 복종하고 기쁘게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미워하여 비난하고 헐뜯는 소리가 비등하였다. (하지만 국사는) 도(道)에 맞게 지내시면서 마음을 편안히 하고 조금도 동요되지 않으셨다. 마침내는 (사람들이) 모두 다 조금씩 바른 쪽으로 변해갔다. 이전에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던 자들도 낯빛과 생각을 바꾸어 근본의 학문에 힘썼다.

김부식이 활동하던 당시 고려는 송나라와 교류를 통하여 학문과 문화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지만 동시에 그러한 학문과 문화를 형식적으로 수용하여 학자와 문인들이 자신의 뛰어남을 과시하는 데 이용하는 지적·문화적 허영심이 성행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김부식은 당시의 여러 학자와 문인들의 그러한 형식적이고 허영에 찬 글들을 벌레가 풀을 갉아먹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의지를 담은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대각국사의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과 현실 안주적 태도를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자신과 같은 마음을 보고 크게 공감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고승의 비문은 대부분 문도들이 작성한 행장에 의거하여 고승의 업적을 찬양하는 형식적인 서술에 그치고 있지만, 김부식은 대각국사 비문에서 단순한 의례적인 찬양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공감한 이상적인 승려의 모습을 찾아서 그것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의 대각국사 비문은 대각국사를 매개로 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승려상의 제시였다고 할 수 있다.

고승을 현창하는 글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승려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은 깊은 산 속에 은거하며 수행에만 힘쓴 탐밀(探密)과 굉확(宏廓) 두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묘향산보현사기〉에도 보인다. 이 글에서 김부식은 두 스님의 행적과 보현사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한 후 세속에서 벗어나 내면의 수행에 힘쓰는 일민(逸民)의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논한 다음 탐밀과 굉확의 행적에서 강조되어야 할 승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건대 여래께서는 3아승기 겁 동안 수많은 선행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셔서 복덕과 지혜가 두루 갖추어지고 정보(正報)와 의보(依報)가 모두 훌륭하게 되었으며, 세상에 나와 교화하실 때에는 맨발에 발우를 들고서 걸식으로 생활하셨다고 하니 어찌 영예를 제대로 알고 욕됨을 잘 지킨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제자가 된 사람들도 이를 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스님들은 여러 가지 추악한 일을 하지 않음이 없으며, 이보다 나은 사람들도 혹은 탐욕과 인색으로 많은 재산을 모으고서 물건을 사용함에 세속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고 사치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다.

 그러고도 부족하게 여겨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물건을 빌려주어 이자를 받아냄에 그들의 살과 뼈를 벗길 정도로 하여 죽을 때까지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설혹 부처를 (…결락…) 한다고 하여도 내생에 반드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탐밀 스님과 굉확 스님 같은 분들을 어찌 존경하고 내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신성하신 옛 임금님께서 크게 칭찬하시고 지금의 밝은 임금님께서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게 한 것 역시 마땅한 일이다. 스님들의 생애에 부처님을 보고 사리를 얻거나 신비한 빛을 내어 산신들을 감동시킨 일과 같은 많은 영이한 일들이 있음을 들었지만 행장에 자세하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였다.

탐밀과 굉확의 생애와 그들이 창건한 보현사를 현창해달라는 요청에 의한 글이었고, 문인들이 제시한 행장에는 두 스님의 신령한 일들이 강조되었지만, 김부식은 그들의 요구와 행장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당시 불교계의 일반적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그와 대비되는, 불교의 원칙에 충실한 탐밀과 굉확의 행적을 이상적 승려상으로 제시하였다. 수행을 통해 신비한 능력을 가졌던 고승 혹은 신승으로서의 면모보다도 세속의 명리에서 벗어나 수행 자체에 충실하였던 모습을 김부식은 보다 중시하였던 것이다. 〈영통사대각국사비〉와 〈묘향산보현사기〉는 김부식이 생각하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문제점과 그와 대비되는 원칙적인 이상적 승려상을 서술하는 글로서, 그의 불교관 일단을 보여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4. 화엄학과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한 관심과 이해

김부식은 불교 교리에 대해서도 일정한 수준의 이해를 하고 있었다. 흥왕사 홍교원에서 《화엄경》을 강의하는 화엄법회를 개설할 때에 국왕을 대신하여 지은 소문(〈흥왕사홍교원화엄회소〉)에서 김부식은 이 법회에서 이야기될 가르침의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의 참되고 현묘한 것(=마음)이 실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비로자나, 문수, 보현의) 삼성(三聖)의 원융함이 바로 화엄경의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색(色)과 공(空)이 섞바뀌어 비치고, 이치[理]와 현상[事]이 서로 밝히는 것은 제석천의 보배 그물에 있는 구슬들이 무한하게 서로 비추고 있는 것과 같고 해인삼매 속에 (법계의 모습이) 두렷하게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승(二乘)의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을 휘둥그레 하면서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본성에 맞는 사람이라면 십신(十信)의 초심(初心)이라도 입술을 합하듯이 온전하게 합치할 것입니다. 진실로 임금이 지성으로 높여 받들지 않고, 스승이 밝은 지혜로 선양하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화엄경의 책을 티끌 속에서 꺼내 대지(大地)에 일륜(日輪)을 비출 수 있겠습니까.

이 글은 문종이 창건하고 대각국사가 주석하였던 흥왕사에서 대각국사의 문도들을 불러 《화엄경》을 강의하는 법회를 위한 소문인데, 김부식은 여기에서 화엄학의 기본 이론들을 간결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인용문의 첫 번째 문장, 즉 하나의 참되고 현묘한[一眞玄妙] 마음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비로자나불과 문수·보현보살 등 《화엄경》의 중심이 되는 세 불보살의 원융이 《화엄경》의 근본 가르침이라는 내용은 대각국사와 그 문도들이 중시하였던 중국 화엄종 제3조 징관(澄觀)의 화엄학 이론의 주요한 내용이었다.

고려 전기의 화엄학은 신라의 화엄학을 계승하여 주로 의상 및 그 스승 지엄(智儼), 그리고 의상의 동문 법장(法藏)의 이론에 입각하였지만, 송나라에 유학하였던 대각국사 의천은 당시 중국 화엄학의 흐름에 영향받아 징관(澄觀)의 이론을 중시하였다. 한편 이(理)와 사(事)의 상즉과 제석천의 그물 즉 인드라망의 비유를 통한 제법(諸法)의 원융무애, 해인삼매를 통한 법계의 체득, 십신 초심에서의 정각 등은 징관 이래 화엄학파의 기본적 이론들이었다. 김부식은 이러한 화엄학파의 기본 이론들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하고서 화엄법회의 소문에 이들을 종합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로 볼 때 그의 화엄학에 대한 이해 수준은 상당하였으며, 특히 대각국사 문도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대각국사를 존경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의 사상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김부식은 원효의 진영을 칭송한 〈화쟁국사영찬〉에서도 원효 불교사상의 핵심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恢恢一道   분명한 하나의 가르침을                        
落洛其音   분명하게 이야기하건만                         
機聞自異   근기에 따라 서로 다르게 들으니              
大小淺深   크고 작고 깊고 옅은 이해의 차이가 있네.
如三舟月   같은 달이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과 같고
如萬竅風   바람이 구멍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것과 같네.
至人大鑒   지인(至人)의 큰 이해로 보면
卽異而同   다르면서 또한 같도다.
瑜伽名相   유식[瑜伽]은 명상(名相)을 이야기하고
方廣圓融   화엄[方廣]은 원융을 이야기하지만               
自我觀之   내가 보기에는
無往不通   서로 통하지 않음이 없네.
百川共海   백 개의 강이 모두 같은 바다로 가고 
萬像一天   하나의 하늘이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네.
廣矣大矣   크고도 넓어서                                
莫得名焉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뿐이다

이 글은 원효의 진영을 참배하면서 그의 덕을 칭송하여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유학자의 글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불교의 이론만으로 찬을 짓고 있다. 부처의 가르침은 하나이지만 듣는 사람들이 근기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해하여 서로 다른 이론을 제시하지만 결국은 같은 가르침의 서로 다른 부분에 불과하며, 진짜 진리는 그들을 다 포괄하는 무한한 것으로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이 글의 내용은 원효의 화쟁 사상을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원효의 주요한 글들을 숙독하고 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서술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김부식의 원효에 대한 관심과 존중은 《삼국사기》의 서술에서도 보이고 있다. 열전에서 설총에 대해 서술하면서 그가 원효의 아들임을 언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열전 말미에서는 신라 사신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고관이 사신 중에 설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이전에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보고 감동하였는데, 이제 그 후손을 만나게 되니 반갑다며 시를 지어 준 것을 특별히 서술하고 있다. 김부식이 원효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김부식의 원효에 대한 존중과 관심은 대각국사 의천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의천은 우리나라의 역대 승려 중에서 의상과 원효를 각별히 존중하고 그들의 사상을 계승, 종합하려고 하였는데, 의천을 존경하며 따랐던 김부식이 그러한 의천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서 원효의 사상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의천은 원효의 화쟁을 중시하였고, 국왕에게 요청하여 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였는데, 김부식의 글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의천과 사상적 관심을 같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김부식은 화엄학과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불교사상이나 이론에 대해서 그와 같은 정도의 관심과 이해를 보이지는 않고 있다. 유식학을 전공한 승려를 수좌로 임명하는 사령장인 〈유가업수좌관고〉의 내용 중에 유식학에 관한 언급이 있지만 유식학 이론 자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당시 중국과 고려의 지식인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비문을 지어 칭송한 대각국사 의천과 탐밀, 굉확 등도 모두 화엄종 승려였다. 현재 전하는 자료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대각국사 의천에 대한 존중을 고려할 때 대각국사와 마찬가지로 화엄학과 원효의 사상 이외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5. 불교적 신앙심이 표현되지 않은 불교 관련 글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부식이 노년에 거사로 생활하였고, 불교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열렬한 불교적 신앙을 가졌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글 어디에도 불보살에 대한 구체적 신앙이나 기원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불교적 수행을 실천하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그의 불교와 관련된 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전하는 김부식의 글 중 불교와 관련된 글은 약 20여 편 정도인데, 앞에서 언급한 몇 편의 글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에서는 불교에 관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적인 내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국왕이 주관하는 법회의 소문들에서는 물론 부처님에게 국가와 왕실의 평안과 번영, 이상기후와 같은 재이의 종식, 백성 생활의 안정 등을 빌고 있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의례적인 표현들에 그치고 있고 강한 신심에 기초한 기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일부 소문들에는 《시경》과 《서경》 같은 유교 경전 중의 표현들을 구사하고 요(堯)와 순(舜), 문왕(文王) 등의 유교적 이상 군주를 거론하면서 유교적 이상사회가 되기를 기원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불교 법회를 위한 소문들임에도 불보살에 대한 열렬한 신앙심은 두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유교적 색채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점은 사찰을 주제로 하여 지은 시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김부식의 시 중에는 사찰을 주제로 한 것이 10여 편 전하고 있다. 이 시들은 모두 특정한 사찰에 들렀을 때 자신의 감흥을 표현한 것인데, 사찰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노래하면서 속세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표현하고는 있지만 불교에 대한 신앙심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한 사찰에 있는 승려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사찰은 단지 한적한 장소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 불교의 가르침이나 신앙, 승려들의 생활 장소로서는 전혀 인식되지 않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자신이 지은 관란사 누각에서 지은 시에서도 번잡한 세속세계로부터 벗어날 것은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불교적 신앙으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그의 시 중에는 사찰에서 재를 마치고 나와 지은 시와 등석(燈夕) 곧 사찰에서의 연등회를 마친 후에 지은 시도 있지만, 여기에서도 불교 신앙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후자에서는 연등회의 화려한 행사 모습만을 언급하고 마지막에는 임금님이 성색(聲色)을 삼가니 관료들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적 제재임에도 유교적 가르침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글 중에서 승려에 대한 비문을 제외하고 불교에 대해 특별히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나그네들을 위하여 인적이 드문 곳에 사찰을 세운 사람의 공덕을 찬양한 〈혜음사신창기〉를 들 수 있다. 이 글은 하급 관료인 이소천(李少千)이라는 인물이 개경 남쪽 고갯길에 마땅한 숙소가 없어 나그네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발심하여 묘향산의 승려들과 함께 절을 지어 나그네들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나아가 사재를 털어 나그네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일을 기록한 글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도 김부식은 이소천과 승려들의 선행을 불교의 보시행으로 서술하기보다는 유교의 문헌에서도 강조되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일반적인 선행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이소천 등이 사찰을 짓고 행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준 것은 과거 중국에서 홍수로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건져내거나 가뭄에 우물을 파준 것과 같고, 《예기》에서도 빈민들에게 죽을 쑤어준 행위를 기록하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그 행위는 보편적인 선행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 승려와 신자의 보시행을 칭찬하는 글에서도 불교인의 행위를 강조하기보다 유교와 불교 모두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행위로 이야기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김부식의 불교에 관한 글들로 볼 때 그가 불교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다른 사상 체계보다 중시하였다거나 자신의 생활신조로 삼은 모습은 보기 힘들다. 물론 불보살에 대한 경건한 신앙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불교에 대해 관심과 호의는 가지고 있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 김부식의 불교관  : 이상적 인간의 완성을 돕는 철리(哲理)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사론(史論)에서는 불교의 발전이 신라 멸망의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이야기하며 불교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사찰을 짓고 거사로 지내면서 고승과 친밀하게 교류하는 등 불교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편 젊은 시절에 만났던 대각국사 의천을 경애하면서 그의 사상적 영향하에 화엄학과 원효의 화쟁사상 등도 깊이 있게 공부하였지만, 개인적으로 불보살에 대한 구체적 신앙을 갖거나 구체적 불교 수행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탐밀과 굉확 같은 산속에 숨어 수행하는 승려나 여행자에게 숙소와 음식을 제공한 재가신자의 덕을 특별히 찬양하는 글을 지었지만 그러한 그들의 행위를 칭찬하는 기준은 불교만이 아닌 유교와 불교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선행에 대한 칭송이었다. 이와 같이 김부식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다양한 모습을 띠고 때로 모순적으로까지 보이는데, 이를 종합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김부식의 불교에 대한 인식은 당시 중국과 고려의 여러 유학자가 공유하고 있던 인식, 즉 불교는 개인적인 수행과 내세의 안녕을 기원하는 가르침이고 유교는 현실에서 나라와 사회를 운영하는 가르침으로서, 후자가 전자에 비해 더욱 중요하다는 인식에 기초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유교를 기본으로 하면서 불교를 필요에 따라 일부 활용하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경우 이러한 인식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밝힌 인물로 김부식보다 1백여 년 이상 앞서 살았던 최승로를 들 수 있다. 그는 성종 원년(982년)에 국왕에게 올린 시무책에서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治國)의 근본인데, 수신은 내생을 위한 것이고 치국은 현재를 위한 것이니” 가까운 현재를 위한 유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그런 관점에서 왕실의 불교 승려들에 대한 우대 조치와 과도한 법회의 개설을 비판하고 승려들의 사원 창건과 이식 행위로 일반 백성들이 피해를 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에서 신앙해야 하며 국가적・공적 차원에서는 최소한도로 축소되어야 하고, 민생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신앙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부식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최승로의 견해를 공유하였다고 생각된다. 그의 글에 개인적 신앙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고, 불교 승려나 재가신자의 공덕을 칭송할 때에도 불교적 입장이 아니라 유교적 입장 혹은 불교와 유교를 아우르는 보편적 입장을 취한 것은 그러한 유학자의 불교인식을 반영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묘향산보현사기〉에 보이는 승려들의 탐욕적 모습에 대한 비판도 최승로의 승려들에 대한 비판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가 《삼국사기》의 사론에서 불교의 지나친 발전을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 제시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제시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지나친 국가적, 공적 차원의 불교 신앙은 국가 재정의 위축과 민생의 불안정을 가져오고 그로 인해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는 인식인 것이다.

하지만 김부식은 최승로의 불교 인식과는 다른 모습도 보이고 있다. 광종 대의 지나친 숭불정책으로 민생이 위협되는 상황을 경험했던 최승로가 불교 신앙 일반에 대해 보다 엄격하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과 달리 김부식은 국왕의 개인적인 신앙이나 왕실의 법회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또한 사찰의 창건에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그것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나아가 그는 불교의 이론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전체적으로 불교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당시 승려들의 무원칙한 생활과 경제적 타락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최승로와 같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기보다 긍정적인 승려들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불교계 전반의 개선을 촉구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고려 초에 비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불교계도 일정한 체제를 갖추고 질서 있게 운영되는 당시의 상황,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과 같은 성실하게 수행하는 고승들에 대한 접촉 경험이 그로 하여금 최승로에 비해 불교에 대해 보다 우호적인 인식을 하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김부식은 유교를 기본으로 하되 불교, 특히 불교의 철학적, 사상적 측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를 유교 사상과 통합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보편적인 인격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김부식의 인식은 그 개인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여러 유학자가 공감하는 것이었고, 이후 고려 말 성리학에 의한 불교 비판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다수의 유학자가 모범으로 삼아 공유하였던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최연식 / 동국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석사, 박사). 한국불교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고중세 불교사상사 전공. 목포대·한국학중앙연구원 사학과 교수 역임. 주요 논저로 〈均如 華嚴思想硏究-敎判論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 《교감 대승사론현의기》 《역주 일승법계도원통기》 등의 연구서, 《새롭게 다시 쓰는 중국 선의 역사》 《대승불교와 아시아》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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