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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의 불교학자 <13> 김잉석 / 임상희
원융(圓融)한 세계를 드러낸 화엄학자
[63호] 2015년 09월 01일 (화) 임상희 gati29@naver.com

1. 머리말

국내에서 화엄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곡(玄谷) 김잉석(金芿石)의 기념비적 저서인 《화엄학개론(華嚴學槪論)》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이 책은 단기 4293년, 서기 1960년 3월 25일에 발행되었는데, 당시는 현대적인 의미의 불교학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불교학’뿐만 아니라 ‘화엄학’이란 용어조차 생소했으며, ‘불교학 연구방법론’은 물론 ‘화엄학 연구방법론’이라는 말조차 어색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간과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 책을 평가하는 것은 무모하지만 후학으로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곡 김잉석이 살았던 1900년에서 1965년까지의 65년간은 근현대사의 격동기였으며, 불교계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며, 새로운 문물의 유입과 가치관의 변화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뇌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그의 삶일지라도 내면은 누구보다도 치열했을 것이다. 이런 그의 삶을 지탱해준 원동력이 ‘불교학’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2. 현곡 김잉석의 생애

지인의 회고에 따르면, 현곡 김잉석은 1900년 1월 5일에 전남 승주군 쌍암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가 동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12세의 나이에 순천 송광사 해은(海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2년 동안 송광사 강원에서 출가자의 전통적인 교육과정이었던 사미(沙彌), 사집(四集), 사교(四敎), 대교(大敎), 수의(隨意)의 전 과정을 마쳤다. 이처럼 강원에서 이력(履歷)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중앙학림(中央學林)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불교계의 최신식 교육기관이었던 중앙학림은 1919년 9월에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가 1922년에 재건이 결의되어 1924년에 사학재단을 확립하게 되었다. 당시 중앙학림은 교육기관으로서 위상을 갖추어가고 있었으며, 이런 사정은 다른 교육기관도 마찬가지였다. 근대 이전에 전통 교육기관이었던 서당이 점차 후진적인 교육기관으로 인식되었으며, 서양교육을 도입한 근대 학교 제도가 수립되어가고 있었다. 불교계에서도 전통 교육기관이었던 강원과 근현대 교육기관이었던 중앙학림이 공존하고 있었다. 두 교육기관에서 수학했던 그는 1928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20세기 초 유학은 문화교류의 창구였기 때문에 많은 지식인이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일본 유학은 구미 유학보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적으면서 정서적으로 친숙했기 때문에 선호되었다. 불교계에서도 1910년부터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승려들에게 일본 유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일본 유학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도쿄의 고마자와(駒澤)대학에서 예과(預科)를 수료하였으며, 교토의 류코쿠(龍谷)대학에서 문학부(文學部)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에 보성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가 1934년에 불교전수학교(佛敎專修學校)에서 승격 개편된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의 교수가 되었다. 이 학교는 1940년에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로 개칭되었으며, 1944년에 일제의 학교 정비에 따라 강제로 폐교되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혜화전문학교가 개교하였고, 1946년에는 동국대학교로 승격 개편되었다. 1951년에는 6·25사변과 1·4후퇴로 인해 부산시 신창동의 임시 교사에서 개강하였다가 1953년에 부산에서 서울로 복교하여 개강하였다.

1934년부터 1953년까지의 20년 동안은 학교 제도가 정착되어가는 과정이었지만, 일제에 의한 강제 폐교와 전쟁으로 인한 교사(校舍)의 이동은 큰 아픔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 혼란의 와중에 그에게 시련이 닥쳤는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인과 두 아들을 잃은 것이다. 제자들은 그가 늘 우수에 차 있었고 강의 때마다 무상(無常)을 탄식한 것으로 회상하는데, 아마도 가족을 한꺼번에 다 잃었던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학교가 안정되어가던 1953년에 도서관장, 1958년에 불교대학장에 취임하였으며, 1961년 9월 30일에 정년퇴임하였다. 1962년에 불교문화연구소가 개소되면서 1963년에 창간한 불교학술지인 《불교학보(佛敎學報)》에 연구논문을 잇달아 게재하는 등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1963년에는 30년 동안 교육에 헌신한 공로로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4년에는 불교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65년 5월 31일 아침에 세연(世緣)이 다하였다. 그의 영결식은 6월 2일 오전 9시에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거행되었으며, 동국대학교 총장 조명기(趙明基) 박사가 조사(弔辭)하면서 고인의 넋을 기렸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제3공화국의 초기였다. 이 기간에 그는 별다른 외부 활동 없이 불교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조국의 독립이 숙원(宿願)이었던 일제강점기에는 국내외에서 불교학을 수학하는 데 전념했다. 조국의 독립 이후 이념의 갈등으로 대립했던 시기에는 교수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근현대사의 격동기 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쳤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현곡 김잉석의 학문 세계

현곡 김잉석은 화엄학(華嚴學), 삼론학(三論學)의 대가로 인식되어 왔으며, ‘한국의 승조(僧肇) 대사’로 불렸다. 이런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그가 《화엄학개론》과 삼론종의 승랑(僧朗)에 대한 논문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또 유고(遺稿)인 불교문학에 관한 몇 편의 글로 인해 불교문학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다채로운 그의 학문 세계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기사와 논저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기사를 포함한 이유는 1960년대 이전에는 불교계에 학술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집필된 논문은 동국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된 《현수교학에 있어서 연성이기론(賢首敎學に於ける緣性二起論)》인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서지정보에는 ‘발행년불명(發行年不明)’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책의 말미에 ‘二九五七 庚午 一九三○. 二. 二. 庚午十一月二日於京都出雲稿畔’으로 기재되어 있다. 중간에 있는 ‘二. 二.’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불기 2957년 경오(庚午), 1930년 경오 11월 2일, 교토에서 집필된 것이다. 또 노란색 선으로 줄 쳐진 원고지 하단에는 ‘용곡대학논문용지(龍谷大學論文用紙)’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목차를 제외한 전체 분량이 325쪽에 달한다. 따라서 이 책은 류코쿠대학을 졸업할 즈음 집필되었던 논문을 누군가 제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유학 기간에 중국의 화엄사상가인 현수법장(賢首法藏)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귀국한 이후 10년 동안 별다른 집필 활동이 없다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보조국사(普照國師)’에 대한 4편의 짧은 글을 연속해서 발표했다. 그 내용은 보조국사의 생애와 저서, 그리고 사상에 관한 것이다. 2편으로 나누어 소개된 보조국사의 사상은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徑截門)의 삼종법문(三種法門)이다. 이로써 그의 학문적 토대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59년에는 백성욱(白性郁) 박사의 송수(頌壽)를 기념해서 발간한 《불교학논문집(佛敎學論文集)》에 〈고구려(高句麗) 승랑(僧朗)과 삼론학(三論學)〉을 발표했는데, 이때부터 삼론학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같은 해에 그와 김병규(金炳奎), 장원규(張元圭), 박춘해(朴春海) 등이 공편(共編)한 《불교학개론(佛敎學槪論)》이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발행되기도 했다.

보조국사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심화해서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보조국사의 화엄관(華嚴觀)에 대한 3편의 짧은 글을 연속해서 발표했다. 그는 1959년이 보조국사가 출생한 지 801주년을 맞이하는 해임에도 불구하고 기념식조차 없는 것을 탄식하면서 글을 시작했다. 보조국사의 화엄관은 삼종법문 가운데 원돈신해문에 속한 것이며, 《화엄론절요서(華嚴論節要序)》에 의하여 이통현(李通玄) 장자의 《화엄론(華嚴論)》에 관한 보조국사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이 《화엄론(華嚴論)》에 의하여 보조국사의 원돈신해관(圓頓信解觀)을 피력한 것이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1권이라는 점을 밝혔다. 나아가 보조국사의 화엄관은 이통현 장자와 같이 화엄에 관해서는 특출한 창견(創見)이 있어 정통적 화엄교가의 설을 무시하고 어디까지나 성기취입(性起趣入)을 주안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1960년에는 그가 집필한 화엄학 입문서인 《화엄학개론》이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발간되었다. 1960년 이전에 발간된 화엄 관련 논문은 황성기(黃晟起)의 〈화엄교학의 무진연기론〉(1957)과 김영수(金映遂)의 〈화엄사상의 연구〉(1959)였다. 이런 상황에서 《화엄학개론》이 발간된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머리말에서 이 책이 동국대학교 총장 백성욱 박사의 후의에 의하여 출판되었다는 것을 밝히며 진심으로 감사했다. 또 책의 발간에 도움을 준 조명기 교수, 장원규 교수, 장룡 교수, 황성기 교수 등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1·4후퇴 때 세상을 떠난 부인과 두 아들의 명복을 빌었다.

1961년에는 불탄절(佛誕節) 특집으로 〈불타(佛陀) 성탄(聖誕)에 관한 역사적 소고(小考)〉를 《현대불교(現代佛敎)》 8호에 발표했다. 삼론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키면서 잇따라 4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62년에는 〈삼론(三論)에서 본 중도사상(中道思想)〉을 《불교사상(佛敎思想)》 11호에 발표했고, 1963년에는 〈용수(龍樹)를 조종(祖宗)으로 한 인도 중관학파의 진리성과 역사성〉을 《동국사상(東國思想)》 2집에 발표했다. 또 같은 해에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에서 창간한 《불교학보(佛敎學報)》에 〈승랑(僧朗)을 상승한 중국 삼론의 진리성〉을 발표했다. 1964년에는 〈승랑을 상승한 중국 삼론의 역사성〉을 《논문집(論文集)》 1집에 발표했다. 이로써 삼론학에 대한 연구가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같은 해에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를 《불교학보(佛敎學報)》 2집에 발표했는데, 그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사후에 유고(遺稿) 〈불타(佛陀)와 불교문학(佛敎文學)〉이 3차례에 걸쳐 《동국사상(東國思想)》 제4, 5, 6집에 나누어 실렸다. 1972년에는 지인들이 3편의 글을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당시는 ‘불교문학’에 대한 정의조차 분명하지 않았던 시기였지만, 후학들은 그의 입장을 ‘불교경전, 불교에 관한 문헌 및 불교적인 것을 표현하는 문학 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리했다. 다시 말해 불교경전을 불교문학이라고 보는 관점과 불교적 관심을 문학화한 것을 합쳐서 불교문학이라고 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20편의 저술을 분석해보면 화엄 관련 논저는 2편, 보조국사에 관한 기사와 논문은 8편, 삼론 관련 논문은 5편, 불타의 탄생과 관련된 기사가 1편, 불교문학과 관련된 논문 3편, 공편한 저서가 1편이다. 보조국사에 관한 기사 가운데 3편이 화엄 관련 기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화엄관련 논저의 비중은 5편으로 늘어난다. 20편의 글이 성격과 분량이 다르기 때문에 그 비중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1960년 이전까지는 기사가 주류를 이루었고, 1960년대가 되어서야 저서와 논문이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적 환경이 열악했던 시기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20편의 저술도 적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그의 학문적인 관심이 다채로웠던 것을 알 수 있다.

4. 현곡 김잉석의 화엄사상

1세대 불교학자라고 할 수 있는 김잉석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 유일한 저서인 《화엄학개론》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이 책은 철학적 통찰력과 분석력이 뛰어난 개론서이자 한국 화엄사상사를 정립시킨 최초의 책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반면에 이 책은 아직 독자적인 이론의 제시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으며, 기본적으로 개론적 성격에 충실한 저술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책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각자의 관점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선학의 연구 성과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여겨진다.

《화엄학개론》은 크게 다섯 부분, 즉 제1편의 화엄교사(華嚴敎史), 제2편의 본경개설(本經槪說), 제3편의 교판론(敎判論), 제4편의 교리론(敎理論), 제5편의 수증론(修證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에서는 중국의 화엄교사보다 한국의 화엄교사에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제2편에서는 《화엄경》의 종취(宗趣), 번역, 교주(敎主), 설시(說時)와 설처(說處), 소의(所依)의 삼매(三昧), 조직과 내용, 그리고 이통현의 화엄경관을 다루고 있다. 제3편에서는 일승(一乘)과 삼승(三乘), 동교일승(同敎一乘)과 별교일승(別敎一乘), 5교판, 10종판 등을 다루고 있는데, 법장의 교판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제4편에서는 화엄교의인 일심(一心), 법계(法界), 삼성의(三性義), 인연(因緣),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내용, 성기론(性起論), 연성이기(緣性二起)의 관련성 등을 다루고 있다. 제5편에서는 항포(行布)와 원융(圓融)의 단혹설(斷惑說), 불신론(佛身論), 불토론(佛土論)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불교학자인 유스키 료에이(湯次了榮)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13년부터 1919년까지 류코쿠대학에서 발간한 학술지에 8편의 화엄 관련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육상원융(六相圓融), 연기론(緣起論), 인문육의(因門六義) 등의 화엄교의에 관한 것이다. 주요 저서로는 1915년에 발간된 《화엄대계(華嚴大系)》와 1927년에 발간된 《화엄오교장강의(華嚴五敎章講義)》를 꼽을 수 있는데, 두 책은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발간되었다. 이 외에 1935년에는 《화엄학개론》이 발간되었으며, 1937년에는 법장(法藏)의 저서를 편집해서 저술한 《화엄경문의강목(華嚴經文義綱目)》이 발간되기도 했다. 그는 중국 화엄사상가인 현수법장의 사상에 깊이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유스키 료에이는 김잉석의 스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류코쿠대학에 유학할 당시인 1920년 후반부터 1930년 초반까지 유스키 료에이가 활발한 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1930년에 집필한 김잉석의 논문인 〈현수교학에 있어서 연성이기론〉은 유스키 료에이에게서 지도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논문은 제1장의 일진법계론(一眞法界論), 제2장의 연기와 성기의 고찰, 제3장의 차별연기법의 세 방면, 제4장의 평등성기의 고찰, 제5장의 연성이기의 관계, 제6장의 원융무진연기의 고찰로 구성되어 있다. 김잉석은 현수가 일체의 법을 연기의 상(相)과 성기의 성(性)의 두 측면에서 관찰해 드디어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의 최고 교의를 건립했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유스키 료에이가 1935년에 발간한 《화엄학개론》은 김잉석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유스키 료에이의 책은 크게 다섯 부분, 즉 제1부의 교사(敎史) 편, 제2부의 본경(本經) 편, 제3부의 교판(敎判) 편, 제4부의 교리(敎理) 편, 제5부의 수증(修證)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인도·중국·조선·일본의 화엄교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중국과 일본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제2부에서는 《화엄경》의 교주와 부류(部類), 제호(題號)와 종취, 조직과 분과(分科), 해인삼매(海印三昧), 설시와 설처, 해회(海會)와 방광(放光), 경전 내용 등을 다루고 있다. 제3부에서는 여러 사상가의 교판을 개설한 후에 5교판과 동·별교의 2교판을 소개하고 있다. 제4부에서는 사종법계(四種法界),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碍) 등으로 나누어서 화엄교의를 다루고 있다. 제5부에서는 기류(機類), 계급(階級), 단혹(斷惑), 관법(觀法), 성불(成佛), 불신토(佛身土), 화엄행자 등을 다루고 있다.

두 책의 구성을 비교해보면 모두 다섯 부분으로 비슷하지만, 세부 항목에서는 약간씩 차이가 난다. ①화엄교사에서는 유스키 료에이가 중국과 일본에 비중을 두어 서술한 반면에 김잉석은 중국보다는 한국에 큰 비중을 두었다. ②본경에서는 《화엄경》에 대한 개설은 비슷하지만 김잉석만 이통현의 화엄경관을 수록하였다. ③교판에서는 구성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법장의 5교판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은 비슷하다. ④교리에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약간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구성과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 유스키 료에이는 사종법계를 소개한 후에 이사무애 부분에 삼성동이(三性同異)와 인문육의(因門六義), 사사무애 부분에 동체(同體)·이체(異體)의 무애(無礙),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 연기(緣起)·성기(性起)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에 비해 김잉석은 무진연기(無盡緣起)의 내용을 십현연기설, 무진연기의 사실적이고 논리적인 근거, 육상원융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성기론(性起論)을 독립시켜서 서술하고 있다. ⑤수증에서는 유스키 료에이보다 김잉석이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는 두 사람 간의 사상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스키 료에이는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과 제4조인 징관으로 이어지는 정통의 화엄교학에 충실한 반면에 김잉석은 비정통의 화엄사상가인 이통현과 성기론(性起論)에 충실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유스키 료에이는 이통현의 사상을 10교판, 성악론(性惡論), 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 10처10회40품설, 범부일생성불득과설(凡夫一生成佛得果說) 등으로 간략히 언급하였다. 이에 비해 김잉석은 이통현의 화엄경관을 본경의 분과설, 본경의 시(時)·처(處)·회(會)·론(論), 종취론, 삼성원융론으로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였다. 김잉석은 화엄학에서는 유스키 료에이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의 입장을 추종한 것은 아니었다. 유스키 료에이 역시 1920년에 사이토 유이신(斎藤唯信)이 발간한 《화엄학강요(華嚴學綱要)》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이 책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유기적인 시각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김잉석의 《화엄학개론》은 ‘화엄학의 입문서이면서 독자적인 이론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한 저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산발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그의 화엄 관련 논저는 성기(性起)라는 키워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에 집필한 그의 첫 논문은 현수법장의 화엄교학에서 연기(緣起)와 성기(性起)의 관계에 대해 탐색한 것이었다. 30년이 지난 후인 1960년에 발표한 짧은 글에서는 보조국사의 화엄교관이 이통현의 영향으로 성기취입(性起趣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같은 해에 발간된 《화엄학개론》에는 그의 화엄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1964년에 발표한 생전의 마지막 논문은 보조국사에 관한 그간의 연구 성과를 총망라한 것이었다. 결국 송광사 강원에서 시작된 그의 학문적 여정은 보조국사를 다룬 논문에서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긴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원융한 세계’에 대한 추구였을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현곡 김잉석의 생애와 그의 학문 세계, 그리고 그의 화엄사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필자가 삼론학과 불교문학에 조예가 깊지 못한 화엄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1세대 화엄학자로서의 면모’를 밝히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현수교학에 있어서 연성이기론〉을 접하게 된 것은 필자로서도 큰 수확이었다. 또한 《화엄학개론》의 가치를 재조명할 수 있었던 것도 흐뭇한 일이었다.

그간 근현대 불교학에 관한 논저들을 접할 때마다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체로 한국 불교학은 일본 불교학의 절대적인 영향하에 있었다고 평가하면서 당시의 불교학자들을 질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화가 앞섰던 일본불교의 학문적 수준이 우리보다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주눅이 들어서 선학의 학문적 성과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후학으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또한 근현대 불교학자들의 상당수가 일본에서 유학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유기적인 시각에서 근현대 불교학의 성과를 재평가해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불교학의 자생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불교학자에게 화두이다. 과거에는 일본 불교학에 경도되었지만 지금은 구미의 불교학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화두를 풀기 위해서는 선학의 연구 성과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선학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국외의 연구 성과를 수용해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 없는 학문으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주체적인 역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    

 

임상희 /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강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이통현의 화엄사상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연구원 연구원,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이통현의 교판론〉 〈탄허 택성의 화엄사상〉 〈법현전의 刊本에 대한 고찰〉 등이 있고, 저서로 《화엄세계와 하느님나라》(공저)와 《고승법현전》 《왕오천축국전》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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