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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호진 지음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 안양규
불교의 두 핵심 기둥의 양립 모색
[63호] 2015년 09월 01일 (화) 안양규 an1313@dongguk.ac.kr

시작하는 말

   

무아 윤회 문제의 연구
호진스님

이 저서는 아마도 호진 스님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연구 성과물일 것이다. 지난 1992년 국내 최초로 무아와 윤회의 관계를 정리한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가 출간됐다. 이 저서는 호진 스님이 1981년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제출하였던 박사 학위 논문의 번역본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의 개정판이다.

개정판에서 크게 달라진 내용은 《우빠니샤드》의 윤회와 해탈(mokṣa), 초기불교의 무아와 열반에 관한 부분이다. 호진 스님은 몇 해 전 라모뜨의 《인도불교사》를 완역하여 한국불교학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스님이 겪은 노고가 얼마나 지대하였는지 잘 알고 있다. 《무아·윤회 문제의 연구》는 스님의 창조적 작업이기에 정신적 노역이 더 심대하였을 것이다. 이 저서의 글자 한 자 한 자는 스님의 숨결이 묻어 있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저서는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 중의 주제인 ‘무아와 윤회’를 다루고 있다.

초기불교 경전을 보면 윤회설은 모든 교리의 토대가 되고 있다. 만약 윤회설이 제거되면 다른 교리는 지탱할 의지처가 없게 된다. 호진 스님은 “한마디로 무아설과 윤회설은 불교라는 하나의 건축물을 세우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아설을 포기할 때 불교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역시 윤회설을 제거해 버릴 때 불교라는 구조물은 붕괴되고 만다. 이 두 교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p.22)고 한다.

스님의 말씀처럼 무아와 윤회가 두 기둥이라면 우리는 이 두 기둥 가운데서 하나라도 제거할 수 없다. 어느 한 기둥을 없앨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존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접근 방식이 붓다 당시부터 부파불교 시대의 《나선비구경》까지 진행된 것이다. 불교 내부에서도 무아설은 윤회의 주체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초기불교 당시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부파불교 시대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고 논의되었다. 이 저서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 해결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스님의 저서는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무아와 윤회 문제를 이론적으로 다루고 있다(2장, 3장). 이 책의 제2장에서는 인도의 고대문헌인 《베다(Veda)》 《브라흐마나(Brahmana)》 《우빠니샤드(Upanisad)》를 통해서 윤회사상의 기원과 발달 단계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3장에서는 아함경을 중심으로 무아설과 윤회설의 양립이라는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둘째 부분은 무아와 윤회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나선비구경》에 대한 고찰이다(4장과 5장). 제4장에서는 《나선비구경》의 내용과 성립연대, 경의 성격 등을 살펴보고 있다. 또한 《나선비구경》의 무아와 윤회에 대한 설명과 이 두 교리를 어떻게 양립시키고 있는가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고 있다. 제5장에서는 초기불교 경전과 부파불교의 논서에서 《나선비구경》의 무아와 윤회설의 출처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부분이나 둘째 부분 모두 무아와 윤회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스님의 저서를 읽으려는 독자를 위하여 저서의 핵심 내용을 선별하여 간략히 소개하고 필자의 소견을 필요한 곳에 부기하겠다.

힌두교의 윤회와 불교의 윤회

이 책의 장점 중의 하나는 윤회 사상에 대하여 자세히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회 사상의 기원, 형성 과정, 발전 단계를 문헌을 중심으로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베다 시기(기원전 1500~1000년)의 문헌은 현세의 삶에 집중되어 있고 내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브라흐마나 시기(기원전 1000~600년)의 문헌은 사후 저승에서 영혼이 다시 사용할 육체를 만드는 일, 즉 제사에 골몰하고 있다.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우빠니샤드》에 등장하게 된다. 《우빠니샤드》의 윤회설에서 비로소 업과 아뜨만이 모두 존재하게 되었다(pp.60-70).

윤회 사상의 형성 과정과 발전 단계에 대한 분석 연구는 힌두교의 윤회 사상이 불교의 윤회 교리와 어떻게 다른가를 탐구하는 데 주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우빠니샤드》의 윤회설과 비교해 보면 불교에서 훨씬 더 정교하게 발달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불교 경전에 나오는 윤회사상은 가장 오래된 《우빠니샤드》에서 볼 수 있는 윤회사상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다.”(p.53) “대부분의 학자들은 윤회사상이 바깥에서 불교에 도입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불교는 윤회 신앙과 함께 시작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불교는 윤회사상을 외래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불교의 정통사상으로 생각했었다.”(p.136)

힌두교의 업에 관한 이해와 불교의 업 사상은 동일하지 않다. 브라흐마나 문헌에서는 업 즉 제사 행위는 선으로 간주되지만 불교에선 업은 윤회를 지속하게 하는 악으로 간주된다 (p.45). 선업이 천상에 태어나게 하지만 천상도 여전히 윤회 세계의 일부이다. 

《베다》와 《브라흐마나》 문헌에선 의식 행위 특히 제사 행위를 주로 의미하지만 《우빠니샤드》에선 윤리적인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p.76). 불교에서 말하는 업은 전적으로 윤리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까르만이 어떻게 해서 ‘제사’라는 ‘특수행위’에서 ‘보편 행위’를 의미하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p.77) 힌두교의 업 개념이 변화된 것과 관련하여 불교의 업 개념 형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빠니샤드》의 업 개념이 불교의 업 사상에 영향을 준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힌두교의 아뜨만과 불교의 무아

힌두교의 윤회 주체는 아뜨만인데 시기별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베다》와 《브라흐마나》 문헌에 의하면 아뜨만은 불변적(不變的) 존재가 아니라 육체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거나 제사의 결과가 다하면 소멸한다. 이런 가변적인 아뜨만에 비해 《우빠니샤드》의 아뜨만은 실체적이고 영속적인 성질을 가진 개체의 영혼이다. 《우빠니샤드》에 의하면 아뜨만은 어떤 크기를 가지고 있지만 파괴되지 않으며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비록 업이 아뜨만을 윤회하게끔 하지만 아뜨만의 성질을 바꿀 수 없다. “아뜨만은 선행에 의해서 커지지도 않고 악행에 의해 작아지지도 않는다.”(p.73)

불교에서 윤회는 고통의 세계이다. 인간을 괴롭게 하는 여러 원인 중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욕망이다. “욕망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내(我)가 존재한다는 생각’이다.”(p.115) ‘내(我)가 존재한다는 생각’ 즉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은 오온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다. “이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하고 마음을 얽매어 욕망을 일으킨다(잡아함 3권 62).” 색 등 오온은 무상(無常)한 것으로 생멸하고 만다. ‘나’라는 자아의식을 발생시킨 근거가 된 오온은 그 자체 무상한 것이기에 ‘나’라는 자아의식은 무상한 것이 된다. 무상한 것은 고이며 무아이다. 요컨대 오온 무아가 된다.

불교의 무아 사상은 시대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붓다는 힌두교 사상을 비판하였다. 아뜨만이 불변이며 소멸되지 않는 것임에 비해 불교에서 ‘자아’는 오온에서 형성된 것으로 무상한 것이다. 오온 무아를 허무론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무아와 윤회

무아·윤회를 내세우는 불교는 윤회의 주체로서 영속하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업(業, karman)을 짓고 누가 그 업의 결과[果報]를 받는가. 호진 스님은 무아와 윤회의 문제 해결책을 초기경전에서 세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뿟갈라(pudgala, 補特伽羅)설, 식(識)설, 상속(saṃtati)설(pp.148-157). 스님의 견해에 의하면 《나선비구경》에서도 초기경전의 경우처럼 윤회의 주체 문제와 관련한 해결책으로 뿟갈라설, 식설, 상속설이 언급되었다. 《나선비구경》이 수용한 것은 상속설이라고 스님은 파악하고 있다(p.364). 나가세나는 실체적인 주체 없이 윤회하는 것, 즉 ‘무아·윤회’를 위해서 등불과 우유의 비유를 들었다. 등불을 켜면 초저녁에서 새벽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한다. 그러나 초저녁 불꽃에서 새벽 불꽃은 동일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두 불꽃 사이에 옮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초기불교 및 부파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속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여 힌두교의 영원불변(永遠不變)한 아뜨만과 다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나선비구경》 고찰

《나선비구경》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심도 있게 논의한 것도 호진 스님의 저서의 가치이다. 특히 스님의 논의 중 2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나선비구경》(빨리어본은 《밀린다빵하》)은 불교학계에선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 사이에 행해진 대론을 기록한 대론서로 소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호진 스님은 이 경을 전문적인 교리문답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초기불교 경전에 설해진 여러 가지 교리를 대립시켜 논의하고 있어 다분히 논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부파불교의 논사들이 이 경전을 인용한 점에서 전문적인 교리문답서라는 것이다(p.250).

둘째 《나선비구경》에서 말하는 업은 의도(意圖)와 상관없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전통 불교에서는 의도적인 행위가 업으로 과보를 산출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가세나는 주장하고 있다. “모르고 악을 행한 사람이 더 큰 화를 입고 알고 악을 행한 사람은 화를 적게 입습니다.”(p.301) 업의 결과[果報]는 업을 지은 사람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전적으로 업 그 자체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독약은 그것이 독약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마셨다 해도 그를 죽일 수 있다. 죽으려는 의도 없이 실수로 독약을 마셔도 죽는다는 것이다. 업과 의도의 관계에 대한 《나선비구경》의 이와 같은 주장은 정통 불교의 입장과는 반대된다(pp.380~381).

맺는말

이제 글을 마치면서 다시 질문해 보자. 무아설과 윤회설은 양립하는 것인가? 그 대답은 무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윤회설은 불교라는 건축물의 토대이다. 윤회설이 배제되면 불교라는 건물은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 “알프레드 푸쉐에 의하면 불교는 모든 교리를 윤회설 위에다 세웠으므로 이 사상 없이는 붓다의 교리체계가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다. 업(karma) 사상이 부정되면 불교는 그 바탕에서부터 무너져 버릴 것이다. 마치 지동설이 나오자 고대 천문학설이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p.136) 윤회설이 불교의 핵심 토대가 되기 때문에 부정될 수 없으므로 결국 무아를 윤회설에 맞추어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실 업이 없다면 윤회가 있을 수 없고 윤회가 없다면 불교의 존재 이유가 없게 될 것이다.”(p.158)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방식이나 능력으로는 무아와 윤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지혜에 의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지혜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고 하였다. “지혜는 조명(照明)과 절단(切斷)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p.338) 조명은 무명의 어둠을 제거하고 밝게 볼 수 있는 통찰을 의미하며 절단은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혜에 의해 이 문제를 풀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윤회의 교리에 근거하여 선업을 많이 짓는 것이고, 무아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행위에서 벗어나 남을 배려하는 선업을 짓는 것이 무아와 윤회문제에 대한 실천적인 접근 방식이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이 고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런 실천적 접근이 바람직하다. ■

 

안양규 /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서울대 종교학과, 동국대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영국 옥스퍼드대학 박사(붓다의 입멸에 관한 연구).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특별연구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사고의 역기능에 관한 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 《불교의 생사관과 죽음교육》 《붓다의 입멸에 관한 연구》 The Buddha’s Last Day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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