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월호’라는 화두(話頭)

2014년 4월 16일은 세간의 시간 흐름 속에서 별다른 특징을 찾아보기 힘든 그런 날 중의 하나로 기록될 평범한 날이었다.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제주 수학여행 학생단 등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좌초되기 전까지는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하루였기 때문이다. 좌초 이후에 구조작업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비교적 가벼운 뉴스거리로 끝나 쉽게 망각의 파고를 넘지 못하는 작은 사건으로 처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백 명의 목숨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과정을 생중계 보듯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우리에게 그 사건은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뼈아픈 사태로 남아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게 되었다.
‘세월호 사태’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선 해양안전사고라는 일반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구조과정에서 보인 극단적인 무력함과 그로 인한 수백 명의 살아 있는 목숨의 손실을 가져온 구조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차원의 도덕성 문제가 부정적으로 결합되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윤리적 사태로 규정되어야 한다. 물론 윤리 문제 자체가 지니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볼 때 그것은 단순한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사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사태에 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떠한가? 1년을 넘긴 시점인 지금까지 9명의 시신을 담은 채로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세월호’를 대하는 우리의 인식은 다양하면서도 극단적으로 갈리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1년이나 지닌 일이고 단지 해양 교통사고에 불과한 것을 너무 과장한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세월호와 같은 어이없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만연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현재진행형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이 인식의 간극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대립과도 이어지면서 조금씩 망각의 강을 넘어서는 중이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문제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호’를 불러온 원인을 분석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비교적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선장이나 승무원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만 온전히 환원될 수 없는 구조적 맥락을 지닌다는 점이다. 물론 선장이나 선주, 승무원, 구조를 제대로 하지 못한 해양경찰 개인들의 역할 도덕성(role morality)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사회구조 전반의 사회구조적 도덕성 문제를 직시하지 않을 경우 이런 사태는 지속적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윤리학에서 사회윤리 또는 사회윤리학이 대두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사회구조적 도덕성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자리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윤리학적 논의는 대체로 그런 차원을 경시하거나 축소하면서 서양 윤리학의 흐름을 추종하는 수준에 머물러 왔다. ‘세월호’는 이러한 인식의 한계와 함께 실천적인 무능함을 총체적으로 반성해야만 한다는 절박한 요청을 우리에게 던져준 사태이다. 이 사태를 분석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지만,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사태라는 것이 필자의 기본 출발점이다. 다른 차원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타자의 삶에 무관심하면서 돈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이익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21세기 초반의 추악한 한국인’인 우리 스스로가 불러온 사태가 바로 ‘세월호’이다. 따라서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고 근원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 또한 ‘윤리적 사태로서의 세월호’일 수밖에 없다.

 
2. ‘세월호’의 윤리학은 가능한가?

1) 21세기 초반의 종교와 자연주의 윤리학
윤리학은 인간다운 삶을 향한 열망과 지향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철학의 한 분과학문으로 출발한 윤리학은 20세기 동안 학문으로서의 존립 여부조차 의심받는 상황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절박한 윤리적 선택과 실천이라는 실존적 물음과 마주해야만 했던 의사 등 외부 전문가들의 요청으로 살아남아 이제 철학의 영역을 넘나드는 학제적이면서도 통합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철학적 윤리학은 본래 신학적 윤리학과의 대비 속에서 등장한 말이지만, 이제는 도덕현상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구, 즉 기술윤리학(記述倫理學)을 제외하고 도덕적 규범 관련 개념의 의미와 기능 등을 탐구하는 분석윤리학[메타윤리학]과 그 규범 자체를 찾아 제시하고자 하는 규범윤리학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이 철학적 윤리학의 외연에 포함될 수 있는지를 놓고 논란을 거듭하고 있는 영역이 도덕심리학이다. 도덕현상을 인간의 도덕 심리와 연관시켜 주로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탐구하고자 하는 최근의 도덕심리학이 전통적 의미의 윤리학에 속할 수 있는가 하는 논란이 그것이다.
이 논란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부분은 도덕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이다. 도덕성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 뿌리가 다이모니아(소크라테스)나 신(토마스 아퀴나스), 또는 하늘(공자)이라고 받아들여 왔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인간의 뇌신경의 특정 부위와 연결짓는 이른바 자연주의적 관점을 최근 도덕심리학의 기본 전제로 수용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도덕성을 바라보는 형이상학적 관점과 자연주의적 관점 사이의 논쟁은 이미 20세기 윤리학사에서 본격화되었지만, 현재는 점차 자연주의적 관점이 우위를 차지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윤리학의 자연주의적 경향은 몇 가지 점에서 그 특징이 부각되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우리가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을 윤리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경험주의적 특징이 부각될 수 있고, 그러다 보니 도덕현상에 관한 사회과학적 또는 자연과학적 관찰 결과인 사실로부터 가치 또는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관점이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사실과 가치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흄(D. Hume)의 강조 이후로 정착한 자연론적 오류, 즉 사실로부터는 당위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주장이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경향은 또한 몸의 경험을 강조하는 체험주의적 관점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몸과 마음의 이분법이라는 오랜 사유의 질곡을 넘어서면서 몸과 마음의 근원적인 미분리성을 근간으로 삼아 몸이 주체가 되는 체험을 사유와 판단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체험주의이다. 그러나 체험주의는 삶의 의미 물음이라는 윤리학의 오랜 아포리아 앞에서 그것을 새롭게 넘어서야만 하는 과제와 직면하게 된다. 즉 몸을 중시하고 마음의 작용도 그 몸과의 연계성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오랫동안 정신적 영역의 문제로 설정해왔던 삶의 의미 물음을 재설정해야 하는 과제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삶의 의미 물음은 윤리학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주된 주제이기도 하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지 또는 부여할 것인지의 문제는 신앙(信仰)과 신행(信行)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종교적 실천과 이어지면서 종교가 제공해야 하는 핵심 물음 중 하나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제 그 과제를 윤리학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직시하면서 다시 종교의 주된 과제로 설정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 종교와 종교계에 주어져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불교의 여실지견(如實知見) 개념은 형이상학적 도그마를 괄호 속에 넣어두더라도 삶의 의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오래도록 강조해왔던 ‘신의 뜻과 사랑’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오늘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삶의 의미 물음을 내놓아야 한다는 요구와 만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종교계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재확인하면서도 현재 상황을 맨눈으로 직시해야 한다는 중요한 요청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21세기 초반 한국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그 구체적인 계기로 ‘세월호’를 상정하는 일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는 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

2) 윤리적 사태로서의 ‘세월호’
아직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세월호’를 전제로 하는 윤리학은 가능한 것일까? 이런 물음의 배후에는 ‘세월호’라는 사건 또는 사태가 지니는 절박한 사유와 실천의 요청이 깔려 있다. 일부에서 ‘세월호’를 해상 교통사고의 하나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한국인은 최소한 그런 사고 중 하나는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 다른 관점의 전환과 일상 속 실천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세월호’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윤리학적 물음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면서 1주년을 맞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세월호’가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윤리학적 물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답을 찾아가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을 우리는 ‘세월호의 윤리학’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해볼 수 있다. 이런 개념 규정이 특정 사안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보편화되기 어렵다거나 자칫 특정 사건에 대한 과잉해석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와 비판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21세기 초반 한국인’을 윤리학적 탐구와 실천의 주체로 설정하고자 하는 실천윤리학적 논의 속에서 ‘세월호’는 피해갈 수 없는 상수(常數)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본다면 ‘세월호의 윤리학’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라는 판단은 충분한 정당화 근거를 지닌다. 오히려 20세기 한국 윤리학이 대부분 서양윤리학의 수입에 치중한 수입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수용하여, 보다 적극적인 차원의 한국 윤리학, 즉 한국인이 스스로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말로 윤리학을 하고자 할 때 ‘세월호’라는 소재만큼 적절한 것은 많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윤리적 사태로서 ‘세월호’는 두 가지 윤리적 사유의 연결 고리를 제시한다. 하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관련된 개인윤리적 차원의 사유 고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가와 관련된 사회윤리적 차원의 사유 고리이다. 이 둘은 서로 구분되면서도 동시에 분리되지는 않는 상호연기(相互緣起)의 관계 속에 있다.
1년 전 우리는 수없이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공유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명 정도는 충분히 눈감을 수 있다는 물신주의적 사고가 결국은 자신과 자식들을 향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는 사실을 눈앞에 확인하면서 저들과 내가 결코 둘이 아니라는 불이적 관점(不二的 觀點)을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그렇다면 다른 누구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도 조금은 더 투명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 바람과 열망들이 모여 온 나라가 노란 깃발로 펄럭이고 개인의 마음속에도 그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도 대통령을 정점으로 삼아 전 국민이 마음을 모아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국가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이른바 ‘국가개조론’이 나오기도 했고, 여러 시민단체가 모여 다른 국가와 시민사회를 만들기 위한 청사진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불과 1년 사이에 그 모든 것들은 강요된 망각의 강을 건너 사라지고 이제 ‘세월호’는 그만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드러내놓고 펼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이런 기피 현상을 정신과 의사 강정훈은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질서를 흐리고 사회적으로 위협적인 것처럼 느끼는 무서움의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분석한다.
자신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기제로 ‘세월호’의 의도적인 망각 또는 왜곡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은 상황에 관한 객관적인 인식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극히 위험한 것일 수 있다. 그런 방향이 문제를 해소하기는커녕 더 복잡하고 복합적인 실타래로 만들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고통에의 직시는 고타마 붓다의 네 가지 진리[四聖諦] 중 첫 번째에 속한다. 삶에 내포되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 바로 고성제(苦聖諦)이다.
이 고통은 일단 철저하게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타인의 고통에 온전히 공감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고통의 속성 때문이다. 한 개인에게 다가온 고통은 그 자신 외에는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고통이고 동시에 언어 이전 또는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언어는 쓸모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급한 타자의 위로는 오히려 그에게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 중 상당 부분은 동시에 철저하게 사회적인 연결고리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세월호 희생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그들 자신이 유발한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구조 자체가 작동한 결과이자 동시에 그 구조 속에서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이 불러온 것이기도 하다. 개업(個業)과 공업(共業)이 구분될 수는 있지만 결코 분리될 수는 없다는 불교윤리적 관점을 굳이 동원하지 않더라도, 세월호 사건을 불러온 물신주의적 풍조와 무감각, 무책임 등은 어느 한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몫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다.
이런 인식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는 그 실상을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분석하는 일과 그 과정과 결과에 따라 개인적 차원에서 해야 할 일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을 구분해가면서 실천에 옮겨가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할 뿐만 아니라 출발점을 이루어야 할 일은 ‘세월호’를 단순한 사건이 아닌 윤리적 사태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강요된 개화기로 시작된 19세기와 20세기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성취한 결과물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 이제 더 이상 그런 방향의 삶을 지향점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인식의 토대 위에서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물음을 우리 모두의 화두(話頭)로 삼는 일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과제이고, 특히 1주기 추모를 앞둔 이 시점에서 꼭 해내야만 하는 우리 모두의 과업이기도 하다.

3) 삶의 방향 전환이라는 대안 모색의 과제
‘세월호’를 21세기 한국인을 위한 윤리적 사태로 받아들이고 개인적 차원과 사회구조적 차원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명제는 그러나 불행히도 공허하게 다가온다. 그 공허함의 뿌리는 대체로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그런 인식 자체의 철저하지 못함에서 오는 인식 수준의 공허함이고, 다른 하나는 설령 그런 인식에 동의한다고 해도 우리의 실제적 삶이 방향 전환을 하지 못하고 관성대로 다시 복귀할 것이라는 실천 수준의 공허함이다. 우리는 이미 1주기를 맞으면서 두 수준의 공허함을 모두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만 세월호 이전으로 복귀하지 않는 방향 전환을 이뤄낼 수 있을까? 도도하게 흘러온 생존과 이념 위주의 20세기적 삶의 양식은 밝음과 빠름, 편리함이라는 강렬한 지향점을 지닌 채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한 힘을 보여주고 있고 당분간 이런 추세가 쉽게 꺾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또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런 삶이 우리가 추구하던 삶과는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체험적인 고백들이다. 특히 이 문제는 우리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인 우리 자식들의 삶과도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심화된다. 우리 자신은 희생할 수 있을지라도 아이들까지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는 미래세대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은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배수진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런 절박한 인식을 토대로 삼아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그러나 또 하나의 지난한 과업으로 다가온다. 우리 삶의 중층성은 물론 그것과 이어져 있는 우리 사회의 복합성은 모든 문제를 서로 얽히게 하여 그중 어느 한 곳을 건드릴 경우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가 그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민 모두가 교육전문가’라는 다소 희화화된 명제를 바탕으로 삼아 백가쟁명의 대안들이 쏟아지고 각 정권은 자신들의 임기 안에 눈에 띄는 어떤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온갖 정책들을 남발하지만, 결과는 늘 이전보다 악화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현재도 밟아가고 있다.
이런 결과를 낳는 이유 또한 다양하게 분석될 수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를 짚어본다면 다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문제 인식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작동하는 단순화의 오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따라 나타나는 근시안적 처방의 남발이라는 실천적인 오류이다. ‘세월호’는 그 자체로 우리 자신과 사회의 모든 문제가 서로 얽혀 빚어낸 총체적인 사건이자 윤리적 사태이기 때문에 단순한 인식틀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대안 또한 쉽게 제안될 수 없다는 엄연한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미뤄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받아들이면서 겸허함을 근간으로 하는 과정성과 실천성을 확보해내야만 한다.


3. ‘세월호’의 윤리학과 종교적 대안: 불교의 역할을 중심으로

1) ‘세월호’의 윤리학과 종교의 역할
‘세월호’의 윤리학은 이 사태를 윤리적 사태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삼고 인식과 실천의 두 영역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점으로 삼아 전개될 수 있다. 일단 윤리적 사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치 기준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가능해지고, 그 비판적 인식을 토대로 삼아 어떤 윤리적 대안들이 가능한지에 대한 실천적 모색이 이어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세월호’의 윤리학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 기반한 배려윤리와 연결된다. 공감에 기반한 배려윤리는 이성에 기반한 사려분별의 윤리와 대비되면서 등장한 비교적 새로운 윤리학 영역이다. 이데아 또는 신을 배경으로 삼아 그 절대적 영역을 향하는 열망으로서 이성과 자신과 그 지점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능력으로서 이성에 기반한 서양윤리학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 이후 주로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고 따지는 협소한 사려분별의 윤리학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공감에 기반한 배려윤리는 윤리적 요청의 기반을 타자와의 만남과 공감에 두고, 타자와 자신에 대한 공정한 배려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배려윤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로 상징되는 그리스도교 윤리라는 뿌리와도 이어지지만, 삶의 본질을 관계에 두고 그 관계들 사이의 적절한 감응(感應)을 추구해온 유교윤리나 동체(同體)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자비(慈悲)를 추구해온 불교윤리와도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다. ‘세월호’를 통해 우리의 공감 능력은 사실 필요 이상으로 발휘되기도 했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오히려 그러한 과도한 공감 능력 발휘로 인한 급속도의 소진과 이른 피로감이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과도하게 공감을 표시하고는 급속도로 식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 이번 사태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따라서 ‘세월호’의 윤리학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공감에 기반한 배려의 윤리는 이 문제까지도 반드시 그 범위 안에 포함시켜야만 한다.
여러 중첩된 과정을 통해 강화되어 하나의 성향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과잉 공감 현상’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그 공감의 뿌리를 살려가면서도 공감 이후의 상황을 보다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보완되면 되는 문제이다. 이 과제 수행 과정에서 우리 종교계의 역할이 부각될 필요가 있다. 종교성 또는 영성이라는 정신적 기반을 바탕으로 삼아 공감의 지속과 함께 합리적이면서도 총체적인 대안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공감대 조성을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해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종교계 이외에 그런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떤 주체를 찾기가 어렵기도 하다.
세월호의 윤리학이 주목할 필요가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은 개인윤리적 차원과 사회윤리적 차원의 연결고리 지점이다. 한 개인의 윤리적 기준은 그 사람의 마음에 토대를 두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가 속해 살아가는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 각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고 남는 사회적 실체로서의 사회에 주목하는 에밀 뒤르켐 같은 사회학자의 관점이, 체계 또는 관계들 자체에 주목하는 니콜라스 루만 등의 관점으로 대체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은 개인과 사회구조 또는 체계 사이의 윤리적 연결 고리 문제이다. 이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채 윤리적 책임 문제를 다룰 경우 그 둘 중의 어느 하나로 환원되고 마는 환원주의의 오류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선장과 같은 책임이 있는 개인들의 몫임과 동시에 나 자신을 포함하는 우리 사회 모두의 몫이다. 그 일차적인 연결고리는 각 개인이 사회 속에서 맡고 있는 구체적·추상적 역할에 주목하는 역할 도덕성이지만, 그것으로 완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역할 도덕성 담론을 넘어서는 어떤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종교는 고유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삼아 강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하나님이 몸으로서의 교회와 그 교회의 확장으로서의 사회 등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불교의 경우 연기적 관계망 속에서 자신과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동체적 세계관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다.

2) 불교(계)가 해온 일에 대한 성찰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의 증진 및 유지라는 개인윤리적 차원의 과제와 그 개인윤리를 사회윤리로 확장시킬 수 있는 연결 고리의 강화라는 과제를 세월호와 관련된 종교의 주된 과업으로 설정하고 나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과업을 구체화할 수 있느냐는 실천적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오늘 우리의 만남은 그 실천적 영역을 전제로 그리스도교와 불교 각각의 대안을 내놓고 마음을 모으고자 하는 시도라고 판단된다. 발표자는 그중에서 불교의 영역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기 위한 발제자의 역할을 부여받고 이 자리에 있지만, 사실 불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지위를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불교계 안에서 발표자가 가진 자리는 진보적 불교지식인 연대인 ‘정의평화불교연대(정평불)’의 학술위원장과 역시 임의단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생명윤리협회’의 집행위원장, 불교계의 대표적인 대중학술지인 《불교평론》 편집위원 정도이고 공식적인 자리는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게 본다면 발표자의 불교계 세월호 관련 활동에 관한 견해는 사견의 수준에 그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다만 앞에서 고찰한 ‘세월호의 윤리학’의 관점에서 조심스럽게 평가하고 보다 나은 실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할 따름이다.
세월호 이후 1년 동안 불교계가 해온 일은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만큼의 중요성도 지니고 있다. 그동안의 활동을 구분해 보자면 크게 셋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팽목항의 세월호 법당으로 상징되는 지속적인 예불 활동이다. 전국 곳곳의 절집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주모하는 법회가 열렸고, 그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예불이 거의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불교계가 세월호와 관련지어 해온 일 중에서도 가장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둘째는 조계종 총무원장과 노동위원장 등 여러 스님과 재가자들이 앞장서고 있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와 같은 제도적 대안 마련 노력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세월호를 계기로 해서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질서와 지향점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모색하고 촉구하는 세미나와 법회 활동을 들 수 있다. 이 세 가지 부류의 활동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하고 일정 부분은 그 연계성이 확보되어 있기도 하지만, 유기적인 연계 고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불교는 종교이자 철학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첫 번째 위상은 종교로서의 불교에 맞춰져 있다. 불교의 철학적 속성 또는 영역에 관한 고찰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는 그 자체로 충분히 고려될 만하다. 왜냐하면 우선 철학과 종교의 구분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그 둘을 구별해야 한다는 강한 의식 또한 서구 근대 계몽주의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 속에서 종교와 철학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윤리적 화두를 중심에 두고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실천을 전개해왔던 실학적 지향 때문이다. 불교와 유교, 도교 모두 종교이자 철학으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철학과 종교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삶의 의미 물음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 오늘 우리의 상황 속에서 더 요청되고 있다.
그런 전제를 갖고 ‘세월호’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의 역할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종교로서의 불교는 세월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포용하는 안심(安心)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모든 종교의 역할이지만, 특히 불교의 경우 ‘그들과 함께함’을 구현함으로써 정신적인 위안과 최소한의 평안을 줄 수 있다. 작년 세월호 사건에 맞춰 팽목항에 설치되었던 법당과 그 법당을 지킨 스님들, 그리고 재가자들의 주된 역할이 바로 이러한 안심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강렬한 고통은 말로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럴 때 말없이 그들과 함께함으로써 그 자체로 위안을 주고 어느 순간 드디어 말 걸기도 가능해질 수 있게 된다. 그런 역할을 하기에는 전문적인 정신과 의사보다 오히려 스님 또는 유사한 경험을 한 ‘상처받은 치유자’로서의 재가자가 적절할 수 있다. 일상적인 치유의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전문적인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세월호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상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완결함으로써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는 정신과적 분석 결과를 수용하면서 가능하면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여건을 마련해주는 일이 종교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두 번째 해야 할 역할은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마련해주는 일이다. 동체자비의 세계관과 윤리관을 근간으로 삼아 타자의 고통에 충분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하고, 법회나 템플스테이 등의 공간을 활용하여 그러한 안목과 능력을 길러주는 공감교육의 장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전쟁과 재난 등으로 인한 엄청난 고통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생중계되는 시대를 맞아 우리의 공감 능력은 갈수록 피상화되거나 순간적인 관심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수전 손택의 적절한 지적과 같이 이제 우리에게 타자의 고통은 단지 이미지에 불과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그 정도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강화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 공감의 연속선 위에서 세월로 특별법 및 시행령 제정과 같은 제도적인 장치의 마련을 촉구하는 노력이나 안전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 자신의 물신주의적 사유방식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성찰의 장 마련 같은 대안들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종교이자 철학으로서 불교가 해내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우리 시대 상황을 고려하는 삶의 의미 물음을 지속적인 화두로 던지는 일이다. 세월호는 잠시나마 우리가 잘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사회와 국가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와 같은 의미 물음을 우리 눈앞에 던져주었다. 하지만 불과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런 물음들은 다시 뒷전으로 밀리고 여전한 밝음과 빠름, 편리함을 습관처럼 갈구하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그 배후에 전제되어 있는 어둠과 느림, 불편함의 미학은 극복되어야 하는 적대적 대상일 뿐이라는 일차원적 사유와 행동이 우리를 다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시점에 한국불교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는 화두참구를 일상으로 다시 끌어내려 삶의 의미 물음으로 재구성해 적극적으로 제안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반의 문명 전환을 촉발할 수 있고, 사실상 종교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도 있다.


4. 맺음말

한 사회에서 발생한 사태 또는 사건에 관한 구성원들의 인식은 대체로 학문적 인식과 일상적 인식으로 나뉘고, 그 두 인식 사이의 우위성을 판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당연히 학자들에 의한 전문화된 인식틀이 우위를 차지한다고 받아들여지지만, 그 인식의 과정에서 학자 개인의 주관적인 편견과 학문적 개념 자체의 추상성, 학계의 권력 관계 등이 작동하면서 오히려 현실로부터 유리된 그들만의 집짓기에 머물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인 인식이 손쉽게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자본주의적 일상에 함몰된 일상인의 인식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일상적인 인식틀 속에서는 사태에 대한 분노 같은 정서적인 요인이 제대로 포착될 수 있는 가능성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는 기본적으로 윤리적 사태이고, 그와 같은 인식을 토대로 종교, 특히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를 모색한 이 작은 글은 불교윤리학자의 편견을 전제로 한 것일 수밖에 없고, 그 편견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도 여전히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편견은 일상인으로서 필자의 위상과 이어지면서 지속적인 분노로 상징되는 정서적 측면을 살려낼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할 수도 있다.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하지 않고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을 성찰한 시인 김수영의 정서는 이 지점에서 꼭 살아나야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세월호’는 개인적으로는 돈으로 상징되는 풍요와 권력으로 상징되는 출세에 맹목적으로 몰두하고, 사회적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하는 분위기와 경쟁에 패한 사람들에 대한 멸시를 조장해온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의 추악한 자화상이다. 더 심각한 것은 아직까지 그 배가 인양되고 있지도 못한 시점임에도 급속한 망각의 장으로 내몰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거나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사람들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세월호의 지속적인 반복을 가져오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길임에도 우리는 애써 태연하거나 나 자신이나 자식들의 문제만 아니면 된다는 비현실적인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고타마 붓다의 현실 인식은 바로 이러한 무명(無明)의 짙은 그림자에 대한 직시(直視)이고, 그것은 살아 있는 화두를 전제로 하는 우리 선불교 전통의 핵심 가르침이기도 하다. 철학과 종교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불교가 우리 시대에 해주어야 할 역할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직시와 그 직시의 지혜에 기반하여 세월호 선장과 나 자신을 구분하지 않는 따뜻한 눈길과 손길의 제시이다. 물론 책임 있는 사람들의 책임을 정확하게 밝혀내어 그 책임을 묻는 일 또한 여실지견(如實知見)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이지만, 그것에만 머물 경우 우리는 또 다른 무명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고 만다는 지혜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이다. ■

 

박병기 /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윤리학, 도덕교육학 석사·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윤리를 수학했으며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현재 동양윤리교육학회 회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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