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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미당(未堂)시의 불교적 상상력* / 윤재웅
-‘동백꽃 제사’를 중심으로
[63호] 2015년 09월 01일 (화) 윤재웅 shouuu@hanmail.net

1. 문학문화의 새로운 모형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시에서 불교 이미지나 상상력을 다루는 논의는 풍성하다. ‘신라정신’과 ‘영원주의’의 맥락을 중심으로 불교의 영향이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하는 관점, 인연론이나 윤회전생설 같은 교학적 담론에 기초한 해석, 선불교 전통과 미당 시의 유사성을 조명하는 담론, 불교사상이나 이미지 등을 개별 텍스트 해석에 활용하는 논의 등이 그것들이다.
미당의 시 950편 속에는 불교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렵다. 미당은 소년 시절에 조선불교의 석학이자 대강백이었던 석전 박한영(1870~1944)의 문하생으로서 불경 공부를 한 바도 있었고, 석가모니의 가르침에서 수많은 시적 영감을 받아 그 자신 창의성의 원천으로 삼기도 했다. 이에 대한 체계적인 규명은 매력적인 연구과제다.
2015년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정본 시전집(전 5권)이 간행되고 나머지 저작들도 완간을 앞두고 있는바, 미당에 대한 연구·비평 영역의 진전과 도약을 기대할 법하다. 불교와의 관련 연구도 더욱 그렇다. 이 짧은 글은 미당의 시와 불교와의 관계를 다루는 새로운 탐색의 일환이다. 동백꽃을 모티프로 하는 미당 시 세계를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여기에 불교의 사상과 전통과 미학이 어떻게 결합하는지, 특별히 불교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주목하고자 한다. 현대시와 불교철학이 결합한 독특한 문화콘텐츠의 향유 방식에 대한 논의도 이 글의 주요 관심사다.
동백꽃 제재를 다루고 있는 서정주의 시편들 속에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촉발된 ‘미래 발명’의 흥미로운 과제가 숨겨져 있다. 이 과제들은 전통적인 시 감상과 이해 방법에서 나아가 미래의 독자들에게 시인의 창의력을 해석하고 실행하는 제2, 제3의 창작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권면한다는 점에서 문학문화의 새로운 모형으로 평가할 만하다.

2. 서정주와 동백꽃

고창 선운사의 수만 송이 동백꽃이
핏빛으로 핏빛으로 떨어져 내려
봄의 풀섶들이 슬퍼 울게 하는 날은
고창사람들은 그 동백꽃 넋들이 너무나도 안쓰러워
하늘로 하늘로 두 손 모아서
그 넋들을 보내는 제사를 지낸다.
—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 제사〉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에 수록된 이 시는 일련의 동백꽃 시편들 가운데서도 심미성과 윤리성을 함께 갖춘 특별한 작품이다. 여섯 줄에 불과한 단순한 진술임에도 불구하고 자비와 평화사상의 전통과 실천수행으로서 구제의식(救濟儀式)의 문제를 다룬다.
우선 이 텍스트는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전승되어 오는 제사의례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샤머니즘이나 유교문화 전통을 재현한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런 전통 풍속에서 ‘죽음 이후의 존재 양상’은 생명의 끝과 단절이 아니라 현존자-후손에 의해 기억되고 전승되는 ‘개체들의 종속연관’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제사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옛 기록에 따르면 제사의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의식이 있었고, 불교의 제사는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遷度齋), 물과 육지를 홀로 떠도는 귀신이나 악귀들에게 공양하는 수륙재(水陸齋), 고려시대 국가 차원의 종합 민속의례인 연등회와 팔관회가 대표적이며, 무속신앙에서 행해지는 각종 신에 대한 제사 역시 민초들의 삶과 함께 전승되어 왔다.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 제사〉가 독특한 점은 제사 대상이 조상 영가나 초월적 신(하늘)이 아니라 떨어진 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떨어진 꽃의 목숨을 안쓰러워해 그 넋을 하늘로 보내는 의례 행위는 문헌기록에서 찾기 어렵고 실제로 행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시인은 고창 지방의 전통 풍속인 양 보고하듯 진술하고 있다. “고창사람들은 그 동백꽃 넋들이 너무나도 안쓰러워/ 하늘로 하늘로 두 손 모아서/ 그 넋들을 보내는 제사를 지낸다.” 어찌 된 일일까. 이 문제에 접근하기에 앞서 서정주의 ‘동백꽃’에 대한 관심을 전반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 〈선운사 동구〉

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친척의 부인을 모시고 성(城) 안 동백꽃나무 그늘에 와 있었습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어 계시고, 나는 풀밭 위에 흥근한 낙화가 안씨러워 줏어 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놓았습니다.
쉬임 없이 그 짓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 뒤 나는 연년(年年)히 서정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서다가 디리던―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어 줄 이가 땅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줏어 모은 꽃들은 제절로 내 손에서 땅 위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 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시를 쓸 수가 없습니다.
— 〈나의 시〉

시집 《동천》(1968)에 수록된 〈선운사 동구〉는 이미 져버린 작년의 동백, 서러운 목소리의 목쉰 동백에 대한 이야기다. 이 시는 1942년 부친 장례 치르고 서울 올라오는 길의 선운사 입구 어느 주막에서 벌어졌던 일과, 20여 년이 지난 뒤 그 추억의 현장을 찾으러 갔다가 주막도 막걸릿집 여자도 모두 없어져 버리고 실파 밭만 남아 있는 풍경을 보고 지은 것이다. 다음의 회고를 보자.

이것은 물론 쓰기는 근년에 쓴 것이지만, 이 시 속의 막걸릿집 여자의 모델은 바로 이 여인이다. 한 심미의 기회라는 것도 참 묘하게는 오는 것이다. 이건 우리의 자력(自力)의 추구만으로 오지 않고 반드시 저 편에서도 마주 향해 와서만 우연처럼 이루어지는데, 이걸 석가모니가 전생의 인연이라 한 것은 정말 실감 있는 해석이다.
‘심미의 기회’는 추억이 문학 텍스트로 형상화되는 순간 찾아오는 일종의 계기다. 시인의 기억 창고 속에 저장되어 있던 특정 사건들이 어느 순간엔가 되살아나서 그의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경우는 실제로 많다. 〈선운사 동구〉가 그런 경우다.
서정주는 후일 그 막걸릿집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그 집은 사라지고 빈터엔 실파만 자욱이 나서 자라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빨치산에 의해서 불탔고 그녀 역시 그때 죽음을 당했다는 동네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여기에서 동백꽃은 막걸릿집 여자의 등가물이다. 이미 죽고 없어진 목숨, 시인의 추억 속에 살아 육자배기 서러운 가락을 목이 쉰 채로 불러주는 막걸릿집 여자의 현장공연이 바로 ‘작년의 동백꽃’의 이미지와 뭉크러져 마침내 창작의 순간에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심미의 기회’라고 서정주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과 꽃이, 꽃과 노래가, 한 죽음과 또 다른 죽음이 시인의 ‘현존’ 속에 ‘뭉클리어’ 밀려오는 것. 그리하여 선운사 동백꽃은 시인으로 하여금 ‘남아 있는 것의 아름다움’이라는 심미적 감성을 촉발시키는 대상으로 재탄생한다.
〈나의 시〉는 보다 이른 시기인 《서정주시선》(1956)에 수록된 작품이다. “흥근한 낙화”는 동백꽃의 생태와 시인의 비유적 이미지가 결합한 시어다. 동백은 질 때 꽃송이 채로 떨어지므로 참수(斬首)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목이 잘려 피가 흥건한 채로 나뒹굴고 있는 꽃. 동백의 붉은 빛에서 유추되는 이미지다.
시인은 땅 위에 떨어져 구르는 꽃을 “주워” 아름다운 부인의 치마폭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서정시를 쓴다는 것이다. “친척의 부인”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여성성의 표상이다. 그녀는 천지운행의 질서를 알아차리는 신비한 캐릭터이고, 보들레르적 의미에서 ‘말 없는 것들의 말’을 알아차리는 시인 즉 시의 여신이기도 하며, 불교적 문맥에서는 중생 구제를 위해 지상에 나투는 ‘보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흥근한 낙화”를 치마 위에 올려놓는 시인의 행위야말로 미적 행위인 동시에 윤리적인 행위다.
이 시의 결정적 의미 전환은 ‘지금 현재’의 상황이다. 떨어진 꽃들을 받아줄 사람이 이제 없다는 것과, 주워든 꽃들이 내 손에서 저절로 떨어져 구르고, 그런 마음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비애감이 지배하는 국면을 시인은 담담하게 진술한다. 그러나 받아줄 사람 없는 상황에서도 떨어진 꽃을 위해 시를 쓰는 상황은 ‘서정시가 사라진 시대의 만가(輓歌)’가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지상의 심미적 가치와 윤리적 실천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애틋하고 거룩한 자비행이다.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 제사〉의 세계와 닮은꼴이다.


3. 문화콘텐츠로서 동백꽃 제사

‘동백꽃 제사’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1977년부터 고창문화원 주관으로 ‘동백연’이 개최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 잔치는 고창의 전통사찰인 선운사 광장에서 벌어지는 청소년 문화축제다. 백일장, 사생대회, 시조 경창 등의 문화예술 부문, 제기차기, 투호, 학부모 윷놀이 등의 민속 부문, 향토문화 알리기, 도자기 만들기, 가훈 쓰기 등의 체험 부문으로 나누어 진행해오고 있다. 축제 시작 전에 산신제를 간략하게 지낸다. 선운산 산신령에게 행사의 시작을 알리고 사람들의 평안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는다. 미당이 노래한 ‘동백꽃 제사’의 맥락과 특별한 관련이 없다. 이와 관련한 서정주의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미당은 〈나의 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 대신 동백꽃이라면 이 성(고창의 모양성을 말함-필자) 안에서 한 20리 밖에 있는 선운사에 지금도 많이 이어서 피고 지고 있어서, 봄이면 나도 이제는 그 선운사를 찾아가 보고 지낸다. 몇 해 전부턴가, 이 선운사 동백꽃들의 낙화 철에는 이 꽃들의 혼을 하늘에 천거하며 자비(慈悲)하는 동백제(冬柏祭)를 이 고을(高敞) 사람들이 모여 지내고 있다. 그래 이 잔치의 정식 명칭을 어떻게 붙일 것인가 내게 물어 와서 동백제(冬柏祭)의 제(祭) 자 대신에 연(燕) 자를 붙이라고 내가 조언해 지금도 해마다 그 ‘동백연(冬柏燕)’이란 이름으로 이 제사(祭祀)를 치르고 있는 걸로 안다. 제(祭) 자는 저승만을 느끼게 하는 글자여서, 목숨들이 붉은 동백(冬柏)꽃같이 살아 있는 이승의 희비(喜悲)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좋은 잔치를 뜻하고 또 그 반가운 제비들의 느낌도 아울러 담고 있는 글자인 그 연(燕) 자를 권해 공감을 샀던 것이다.
그야 하여간에, 나도 이제부터는 해마다 그 선운사 동백연에 참가해서 그 낙화한 꽃들의 넋들에게 내 마음속 헌화(獻花)의 뜻을 전해 보내 저 저승의 그 친척의 부인께 드리면 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살게 되었다. 꽃의 넋을 시켜 우리 소원을 하늘로 전해 보내는 고운 유풍(遺風)은 신라 때부터-아마 그 이전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니, 우리 선인들의 오래 쌓인 넋의 세계에 공참(共參)해서 훈훈한 느낌으로 말씀이다.

‘동백꽃 제사’가 저승 의례가 아닌 이승의 희비를 나타내는 ‘좋은 잔치’의 맥락을 가져야 한다는 것, 여기에 신라 때부터의 “고운 유풍(遺風)”을 결합시킨 특수한 문화콘텐츠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취지다. 물론 ‘유풍(遺風)’은 신라가요 〈도솔가〉 속에 노래하고 있는 ‘꽃 뿌리는 의례’를 말한다. 즉 ‘산화공덕’의 풍속이 1천3백 년 이상 이어져 ‘선운사 동백연’으로 승계된다고 미당은 본 것이다.
한국문화의 독특한 속성을 성찰하는 미당의 관점에 따르면, ‘동백꽃 제사’ 속에 내재된 생명존중사상, 평화사상, 자비정신 등은 단순히 텍스트 해석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기왕에 ‘동백연’이란 이름을 붙인 행사라면 이 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차원의 문화 활동을 전개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 과정의 예비 단계로서 ‘동백꽃 제사’의 문화적 의의를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동백꽃 제사가 실제로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기록도 없고 증언자도 없는 상황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핏빛으로 떨어져 내린 동백꽃의 넋들을 하늘에 올려 보내는 제례의식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적 창의 속에서 발명된 ‘미래의 독자들이 이 가치를 알고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시인의 소망’에 가깝다. 이런 생각이 가능한 까닭은 같은 모티프를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시 때문이다.

선운산에 새빨간 동백꽃들이
송이송이 떨어져 내리는 날은
선운산 사람들은 그 꽃 줏으며
그 꽃의 넋에다가 소원을 실어
하늘 깊이 하느님께 올려 보내요.

춘향이는 속눈썹을 지그시 감고
‘이 도령과 짝이 되게 해주십사’고,
이 도령은 그 꽃에다 입술을 대며
‘춘향이와 백년살이 시켜달라’고
그 진 꽃에 소원 실어 멀리 보내요.

나 같은 늙은이는 젊고 싶어서
‘동백꽃 너같이만 젊고 싶구나’
마음속에 외오치며 하늘을 보면
‘네 마음이 내 맘이다 염려 말어라’
하늘도 침묵으로 대답이시요.
— 〈동백꽃 제사〉

인용시는 《노래》(1984) 속에 수록된 것으로서, 동백꽃과 관련한 제사의 개념이 처음 나오는 사례다. 여기에서 제사의 성격은 꽃 그 자체를 위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의 소원을 함께 실어 하늘로 보내는 욕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즉 개별적 주체들의 세속적 욕망을 하늘로 실어 나르는 행위라는 점에서 다분히 현세 기복적이다. 기본적으로 샤머니즘적 속성을 가진다.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 제사〉(1997)는 꽃 그 자체만을 위한 순수한 의식(儀式)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문화콘텐츠다. 시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고창 선운사’라는 지명이 명백하게 적시되어 있다는 점, 수만 송이 동백꽃이 핏빛으로 떨어져 내린다고 바라본 점, 그 때문에 봄의 풀섶들이 슬퍼서 운다고 한 점, 고창 사람들이 그 떨어진 꽃의 넋을 안쓰러워한다는 점, 그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인과에 대한 설명을 단순 간명하게 하고 있다.
앞의 인용시가 보여주는 개인 욕망의 표출이나 현세기복의 성격과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한층 발전된 모습이다. 시의 핵심 내용은 자비의 보살행으로서 불교생태학의 이념과 그 실천에 가깝다. 미당 또한 ‘이 꽃들의 혼을 하늘에 천거하며 자비(慈悲)하는 동백제(冬柏祭)’라고 부를 정도다.
시의 대상은 남도의 여기저기에 피어 있는 동백꽃이 아니라 고창 선운사 대웅전 뒷산 기슭에 해마다 장관으로 피어나는 천연기념물(184호) 동백꽃 나무 군락이다. 수만 송이 동백꽃이 핏빛으로 떨어져 내린다는 진술은 참수당한 목숨의 유추며 그런 점에서 인간화한 동백꽃의 형상화 과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민초들의 서러운 역사 혹은 생로병사의 생태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뭇 생명의 본질을 환유하기도 한다. 그런 고(苦)를 발견하는 순간은 자연스럽게 대자연의 슬픔[자비(慈悲)]으로 이어지며, 사람에게는 이의 극복을 위한 특별한 실천수행이 요청된다. 그것이 바로 죽은 꽃의 영혼을 구제하려는 보살행으로서 영가 천도 의식인 것이다.
시인은 꽃을 위한 제사의식을 고창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수행한다고 독자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현실에서 없으며, 시인의 상상적 창의 속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동백꽃 제사’는 매력적인 문화콘텐츠다. 〈도솔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꽃을 사랑해온 유서 깊은 한국문화의 전통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으며, 죽은 꽃의 영혼을 기리는 세계 최초의 민속의례를 창안·전승한다는 점에서 민족예술의 독자적 개성을 발현시킬 수 있다. 또한 독자들이나 문학의 교수-학습자들에게 자연·생명·평화·윤리의식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문학이 삶과 함께하는 예술이라는 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향유하게 할 수 있다.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 제사〉는 이 모든 가능성을 매력적으로 암시한다.


4. 동백꽃 제사의 불교생태학적 세계관

‘동백꽃 제사’(1984)가 현세기복의 샤머니즘 속성을 가진다면 ‘동백꽃 제사’(1997)는 불교의 특성이 보다 강하게 드러난다. 이 특성을 불교생태학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게 이 논문의 입장이다. 불교생태학은 자연생태계의 현상을 불교의 철학과 윤리의 문제로 바라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오늘날의 생태학적 시스템 이론은 ‘인과의 일반성과 단순성을 주장하는 근대의 기계론과는 달리, 인과의 상호성(mutuality)과 복잡성(complexity)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연기론과 일맥상통’한다. 꽃이 피고, 꽃이 지고, 핏빛으로 떨어지고, 봄의 풀섶들이 슬퍼서 울고, 사람들이 그 넋을 제사 지내고 하는 행위는 이미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의 생명 세계의 본질을 묘파하는 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의 경우와 같은 방식이다.
김종욱은 생태계의 본질로서의 이 ‘상호의존성’을 불교식 표현으로 ‘연기(緣起)’라고 간명하게 정리하면서 연기(緣起)를 인과(因果)와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상호의존성은 그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호존중성으로 이어져야 하고 이 말은 곧 ‘연기(緣起)이므로 자비(慈悲)여야 한다’(173면)는 뜻으로 풀이한다. 나아가 ‘상호의존의 철학(philosophy of interdependence)과 상호존중의 윤리(ethics of interrespect)로 세상을 보는 것이 불교생태학의 통찰’(174면)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불교의 가르침을 생태학의 논리와 결합시켜 생태학의 차원을 보다 높이고자 하는 게 불교생태학의 중요한 방향이라고 한다면,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 제사〉는 그런 점에서 좋은 연구 자료다.
한국의 전통사찰 선운사. 신라 진흥왕(555년) 때 창건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1,500년 고찰이다. 종교적 신념이나 성향과 관계없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대웅전 뒤편 산기슭에 있는 천연기념물 동백숲이 ‘볼거리-문화’다. 수령 5백 년이 넘는 오래된 동백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면 수만 송이가 장관을 이룬다.
동백은 그 호화로운 색깔과 자태로 인해 사랑받기도 하지만 꽃송이 채로 깨끗하게 떨어지는 특성 때문에 안타까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안타까움은 미당의 시에서 ‘핏빛 흥건한 목숨’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이는 대상 자체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를 환유의 관계로 엮는 시적 발상이기도 하다.
‘핏빛으로 떨어져 내린 수만 송이 동백꽃’은 곧 뭇 목숨의 상징적 표상이다. 꽃이 피고 지는 것, 풀섶들이 슬퍼 우는 것 등이 모두 연기(緣起)의 작용이므로 상호의존성은 결국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론’을 가리키고 이는 존재의 비실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동백은 곧 나이기도 하고 민중이기도 하고 풀섶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세계 인식이 〈내가 돌이 되면〉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 〈내가 돌이 되면〉(1968)

이것은 실제로 생태 에너지의 변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아’의 비실체성을 강조하는 불교 연기론의 시적 진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라는 실체가 없으므로 모든 개체는 ‘고립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성이 없는 “무자성(無自性)의 가(假)”의 산물일 뿐이다. 또한 마음이 없으면 현상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불교의 입장이다. 이를 “비실유(非實有)의 가(假)”라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자경은 “현상세계는 그 세계를 인식하는 식(마음)에 대해서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식과 독립적으로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꿈꾸어진 세계가 꿈꾸는 의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현상세계도 그것을 의식하는 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가(假)이다. 그러나 꿈꾸는 세계가 가(假)라는 것은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알 수 있지만, 현상세계가 가라는 것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가? 불교는 그것을 무명의 극복,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무명 상태에 계속 있게 되면 실체에 대해 집착을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업을 짓고 현상세계에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윤회다. 그러나 ‘무자성의 가’와 ‘비실유의 가’를 깨달으면 집착을 넘어서고 그로 인한 업이 성립하지 않아 윤회를 벗고 해탈하게 된다. 삼사라(samsara, 윤회)에서 벗어나 니르바나(nirvana, 열반)에 이르는 ‘생명의 위대한 승리의 여정’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내가 돌이 되면〉이 보여주는 진경의 상태가 상호의존적 평등관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상호의존성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차별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차별성은 주체와 대상을 비교하게 되고 비교를 통해 욕망을 발생시킨다. 욕망은 업을 낳고 업은 보를 낳는다. 곧 윤회다. 그러므로 상호의존성의 자각만으로는 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차별성이 허망분별이며 ‘무자성의 가’와 ‘비실유의 가’를 깨닫는 ‘진여성의 자각’이야말로 현상적 차별성을 타파하여 모든 생명체가 본래 평등한 본성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길이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라는 의식, 너의 아픔에 공감하는 의식, 만물이 본래 평등한 하나라는 만물일체의 느낌, 동체대비의 감정이 바로 자비다. 그러나 자비의 본성은 마음이나 감정이 아니라 그 실천수행에서 구현된다. 삼법인과 사성제와 팔정도의 관계가 그런 것처럼, 깨달음과 자비는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문법을 고스란히 가진다. 이것이 바로 상호의존성의 철학과 상호존중 윤리학의 관계이기도 하다.
자비의 드라마틱한 면모는 보살행이다. 통상적으로, 깨달으면 윤회하는 업을 짓지 않아 중생계에 다시 나투지 않는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동체대비의 정신에 따라 “고통받고 있는 다른 중생이 이 땅 위에 남아 있는 한, 그 중생에 대한 자비로 인해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열반에 드는 부처가 되기보다는 생사의 고통 속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태어나기를 서원하는 보살이 된다. 보살은 중생을 향한 사랑과 자비(慈悲)로 인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업력에 의한 윤회가 아니라, 자비의 원력(願力)에 의한 환생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장보살이다. 그는 지옥에 단 한 사람의 중생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환생하는 각자(覺者)다.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은 기본적으로 이런 원력과 구제의 문법을 잘 보여준다. ‘자각과 수행’ ‘알아차림과 실천’ ‘연민과 구원’이 함께하고 있다. 즉 시의 표면구조는 연민의 문법이다. 꽃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마음과 그 의식(儀式)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면구조는 구원의 문법을 따른다. 상호의존의 철학과 상호존중 윤리의 결합을 통해 궁극적 구원으로서의 꽃의 해탈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보편적 슬픔에 대한 공감과 구원의 실천이며 이 시가 갖는 불교생태학적 의의라 할 수 있겠다.
시인은 고창 선운사의 수만 송이 동백꽃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봄의 풀섶들이 슬퍼서 운다고 노래한다. 봄의 풀섶은 동백나무 군락지를 구성하고 있는 생태계 전체를 환유한다. 혹은 꽃 피고 지는 모든 봄날의 생태계일 수도 있다. 부분(동백꽃)과 전체(봄의 풀섶)의 상호의존과 공명의 문법은 그것이 선운사라고 하는 절집 공간에 있으므로 해서 더더욱 아우라가 생긴다.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생태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만 송이 동백꽃이 중생의 상징이라면 봄의 풀섶은 보살의 화현이다. 슬퍼 우는 것은 자연스럽게 자비행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고창 사람들의 ‘교감’이 더해진다. 이들은 동백꽃과 봄의 풀섶과 인간사 사이의 연기 관계를 내면화한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꽃도 넋이 있다고 믿고 그 넋을 하늘로 보내는 제사를 지낸다. 생태윤리학의 한 정점이 이렇게 형상화된다.
어떤 생명이든지 다 존중하고, 사랑하며, 생명의 본질을 잘 깨우치고 실천하도록 돕는다. 꽃의 넋을 하늘로 보낸다 함은 시 전체의 맥락으로 보아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교의 천도재 의례 성격이 강하다. 다시 윤회하지 말라는 발원의 보살행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수만 송이 동백꽃은 ‘흥건한 핏빛’의 이미지로 인해 애틋하게 죽어간 뭇 목숨을 환유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동백꽃의 처연한 슬픔은 실상은 인간사 생로병사 윤회에 대한 슬픔의 토로이기도 하다. 그런 슬픔의 연속되는 고리를 끊는 길은 무명으로부터 벗어나는 스스로의 깨달음이지만, 뭇 목숨이 모두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래서 지상의 예토(穢土)에는 자비행의 보살이 있는 것이다.
보살행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가천도 의례다. 이 의례 속에는 만물 정령들조차도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해주려는 경건한 구원의식으로서의 불교생태윤리가 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백꽃 제사’와 관련한 모티프는 현세 기복적 샤머니즘 성격의 제사의식(1984)에서 ‘하화중생’이라는 불교 자비행의 실천윤리(1997)로 한층 더 진화해 나가는 것이다. 불과 6행에 지나지 않는 아름답고 슬프고 거룩한 한 편의 시 속에서 한국 불교생태문학의 새로운 미래 가능성을 탐구하고 공감하는 일은 즐거운 독서 체험이 된다.         


5. ‘꽃제사’ 문화 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

이제 독자들의 역할에 대한 구상을 몇 가지 소개함으로써 이 시-문화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핵심은 시인이 꿈꾸던 제사 의례를 다양한 방식으로 기획해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짐 데이토가 말한 ‘우리가 선호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도록 모든 사람과 모든 노력을 동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문화의 품격을 높일 수 있다.
첫째, 지역문화의 특수성을 격조 있게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선운사 동백꽃만의 아우라를 문화상품화해 보는 것이다. 불교철학과 윤리학이 여기에 내면화되는 게 바람직하다. 이는 고창의 고유한 문화를 넘어 한국문화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둘째, ‘꽃제사’의 콘셉트 자체가 오늘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긍정적인 기능을 많이 하리라 본다. 생명존중, 평화고취, 환경보호는 21세기 생태계 문제 해결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사회적 갈등비용을 줄이는 관용과 배려의 문화 정착을 위해서도 이런 의례는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
셋째, 세계 초유의 생명사랑 꽃제사는 한국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문화 콘텐츠라는 점을 자각하고, 이의 향유를 위해 이웃과 후대를 위한 실천 기획을 준비해야 한다. ‘동백꽃 제사’ 전반을 구상하고 기획하는 스토리텔링이 필수적이다.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상생적으로 모여 창의적이고 기품 있는 미래를 ‘발명’하는 일, 그것이 시인이 후대의 독자들에게 건네는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이다. ■

 

윤재웅 / 문학평론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주요 저술로 〈에코뮤지엄으로서의 미당시문학관의 발전가능성에 대한 고찰〉 〈서정주 ‘화사집’의 문체 혼종 양상에 대하여〉 등의 논문과 저서로 《미당 서정주》 《문학비평의 규범과 탈규범》 《판게아의 지도》 등 다수. 현재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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