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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선과 차와 시 / 이숭원
[63호] 2015년 09월 01일 (화) 이숭원 nanan303@naver.com

1. 머리말

선과 차의 관련성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고, 선과 시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많은 논문이 나왔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논지를 다시 정리하여 선과 차와 시가 함께 논의될 수밖에 없는 동질적 맥락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확인하면서 조선시대 유가(儒家) 전통의 사대부이면서도 차를 즐기고 선불교에도 통했던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삶을 살펴보려 한다. 제주도 유배 이후 김정희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삶의 시련을 거치면서 마음과 몸을 가다듬는 데 차가 어떠한 도움을 주었는지, 고난의 세월을 극복하고 정신의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선불교적 탐구가 어떠한 삶의 예지를 갖게 했는지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검토해 보려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일상적 생활의 측면에서도 한 단계 높은 정신세계를 영위하는 데 선과 차와 시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2. 선과 차

선종이 도입된 것은 중국의 남북조 시대이지만 수행의 방법으로 확고히 정착된 것은 당나라 때다. 중국은 원래 차의 나라이기 때문에 수시로 차를 음용하였는데 특히 수행하는 선원에서 차를 음용하는 것이 하나의 다례 의식으로 규범화되었다. 좌선 수행을 할 때 졸음을 물리치는 데 차가 도움되기 때문에 선승들은 오후에 음식을 먹지 않고 차를 마셨으며 수행승들이 다회를 열어 차를 마시는 것이 선원의 내규로 명문화되어 있었다.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선원의 일상적인 관례가 되자 수행 방법인 선과 생활의 의식인 차와의 동질성이 논리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고 정리되었다. 이것이 송나라 때 승려인 원오극근(圜悟克勤) 선사의 다선일여론(茶禪一如論)이다. 세속의 번뇌를 떨치고 삼매의 경지에 드는 참선과 잡다한 심사를 가라앉히고 차의 맛을 음미하는 다도가 동질적이며 추구하는 바가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다선일여론의 근거로 많이 거론되는 일화가 조주(趙州) 스님의 이야기다.
중국의 역대 공안 100개를 모아놓은 책이 《벽암록》인데, 《벽암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승려가 운문(雲門)이고 그다음이 조주다. 조주는 평상심이 도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야기가 ‘차를 마시고 가게(喫茶去)’의 고사다.
어느 날 한 납승이 와서 불교의 진리를 물었다. 조주는 전에 이 절에 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납승이 처음이라고 하자 조주는 “차를 마시고 가게.”라고 말했다. 또 다른 납승이 와서 비슷한 질문을 하자 조주는 다시 전에 이 절에 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전에도 들른 적이 있다고 하자 조주는 또 “차를 마시고 가게.”라고 말했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본 주지가, 스님은 처음 온 사람에게도 전에 왔던 사람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니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조주는 “자네도 차를 마시고 가게.”라고 말했다. 여기 담긴 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불교의 진리는 관념적으로 탐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마르면 차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지각되고 실현된다는 것을 일러준 이야기로 해석된다. 이 외에도 이 화두에 담긴 불교적 함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참구가 있을 수 있다. 어떠한 해석이든 선과 차의 관련성이 중심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조주의 이 일화는 선과 차의 관계를 설명하는 상징적인 사례로 굳건한 자리를 지켜왔고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변주를 낳았다. 그만큼 선가에서 차와 선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지속되어 온 것이다. 그 상관성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요지로 정리된다.

① 차와 선은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 한다.
② 차와 선은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는 무념무상의 상태를 지향한다.
③ 차와 선은 조용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중국 송나라 선종의 영향을 받은 고려시대에도 선원에 다도가 유행하였다. 출가한 승려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반 문사로 참선 수행을 하던 이인로나 이규보의 시에도 다도에 관한 소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법통을 이어받은 진각국사 혜심(慧諶)과 원각국사 충지(冲止)의 시문에도 차와 관련된 선원 생활의 단면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嶺雲閑不徹   산마루의 구름은 한가히 떠 있는데
澗水走何忙   골짜기의 물은 어찌 바삐 흐르나.
松下摘松子   소나무 아래 솔방울 따서
烹茶茶愈香   차를 달이니 맛이 더욱 향기롭다.
— 혜심

飢來喫飯飯尤美   배고플 때 밥 먹으니 밥맛 더욱 좋고
睡起啜茶茶更甘   잠에서 일어나 차 마시니 차 맛 더욱 다네.
地僻從無人扣戶   처소가 궁벽하여 찾는 사람 전혀 없고
庵空喜有佛同龕   암자가 비어서 부처님과 함께 있는 기쁨 누리네.
— 충지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선원의 다도 문화는 조선시대에 쇠퇴했는데, 쇠잔해진 다선일여의 정신을 다시 살려 다도의 절차를 문서로 남기고 다도를 중흥시킨 사람은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다. 대흥사 뒤편 산 중턱에는 초의선사가 그의 다선일여 사상을 실천하며 주석했던 일지암이 있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차와 선의 일치라는 정신적 경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주변의 승려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시문과 서화를 주고받았다. 다산은 지식으로 알고 있었던 차에 대해 강진에서 직접 각종 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진가를 터득해 갔다. 특히 그의 질병인 현벽(痃癖, 담적증)에 차가 효험이 있음을 체험하고 승려 혜장에게 병의 완화를 위해 차를 보내달라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실제로 차밭을 일구어 차를 재배하고 제조하여 음용한 정약용은 자신의 초당을 다산초당이라고 명명하여 다산을 자신의 당호로 삼았다. 다산은 완호윤우(玩虎倫佑) 선사와도 교유하였는데 완호 문하의 제자가 초의의순이다. 다산은 초의보다 24세 연장이었다. 다산이 보기에 초의는 문재도 있고 학문의 능력도 있어서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경전 공부에 전념할 것을 당부했다. 초의가 다산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할 때 대둔사에서 스승을 전송하며 쓴 시를 보면 스승에 대한 존숭의 마음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간에 새기고 큰 띠에 적어둔다”고 했다. 다산과의 인연은 다산이 유배에서 풀린 후에도 이어져 초의는 경기도 능내리의 시회에도 참석했다. 다산이 초의선사를 평하기를 승려이면서도 유교 경전에도 밝음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이미 늙었으나 새로운 도끼의 날이 빛나고 있음을 암시했다.
다산의 예상대로 초의선사는 다선일여, 다선불이의 정신을 발전시켜 선이 불교의 종교적 전유물이 아니라 “서민들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실현되어야 함을 지적하면서 선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그러한 선의 대중화의 한 방편이 다도의 일상화였다. 그는 “선사로서 참선 가운데 시와 서화를 즐기며 차 마심을 일상생활화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초의선사가 차의 이론과 실제를 통해 초의차를 완성한 것은 1840년경으로 고증된다. 이 시기는 다산이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경과한 때다. 초의의 진정한 다선일여의 실천은 이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산의 시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초의선사는 한양에서도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된 시대라 초의선사는 한양 외곽에서 완당 김정희,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 자하 신위, 다산의 맏아들인 정학연 등의 문인들과 교분을 쌓았다. 그는 이러한 교유 속에 자연스럽게 차를 가까이하는 기풍을 세속에 전하면서 유학자들에게 선종의 정신세계를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3. 선과 시

시의 역사는 5,000년이요 불교의 역사는 2,500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禪)이라 말하는 참선의 역사는 달마대사의 중국 전래 이후인 1,500년이다. 감각과 정신의 극점을 추구하는 시에는 선의 영향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시선일여론(詩禪一如論)이 나온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였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선사들은 게송을 많이 지었는데 그것이 전부 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당연히 시와 선이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또 당송 시대에 시인들의 작품세계도 선이나 도와 상통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에 시선일여론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정착된 후 그것을 이론화하는 논술이 나타났는바 그 골자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선의 직관적 깨달음(妙悟)과 시의 직관적 깨달음은 상통하는 바가 있다.
② 언어의 함축적 표현에 상통하는 바가 있다. 언어도단(言語道斷),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언어의 지시적 기능보다 언어의 연상적 기능, 정서적 기능에 관심을 가진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기를 선불교는 중국화된 불교라고 한다. 인도 대승사상의 철학적 부파는 인간의 의식 현상을 관념적으로 탐구하는 유식학(唯識學)으로 발전하였는데, 중국의 선종은 인도불교의 이론적 추구에서 벗어나 진리에 직접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논리적 변설에서 벗어나 직관적 각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선종을 낳게 한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선불교로 정착되어 선의 황금시대를 이루는 과정에 이미 민중에 뿌리를 내린 노장사상이 깊은 영향을 주었다.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노장사상에서 이미 사용하던 어휘를 차용해서 해석의 편의를 도모한 것이다. 도가 사상과의 교섭을 통해 인도의 유식불교는 인간 내면의 각성을 추구하고 주체적 초탈을 강조하는 중국의 선불교로 변화한 것이다.
선불교가 추구하는 직관적 각성의 표현은 대부분 시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중국의 문학적 관습으로 전해 온 절구나 율시의 형식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시는 선의 경지를 표현하는 언어 형식이 되었다. 선승이 아닌 일반인들도 그러한 미묘한 정신 상태를 표현한 시에 매력을 느끼고 선취(禪趣)를 풍기는 시를 창작하게 되었다. 시와 선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선이 기존의 관념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선에 의해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듯이, 시도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그것을 다시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유사성을 지닌다.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 속에서 얻은 새로운 깨달음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시와 선은 행복한 동행을 하게 되었다.
송나라의 소식(蘇軾)은 파란 많은 생애를 보내면서 불교적 사유를 거의 생활화하여 그 심경을 시로 표현했다. 특히 43세 때 황주로 유배되어 황무지를 경작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스스로 동쪽 둔덕의 거사(東坡居士)라 칭하면서 불교 행자의 면모를 보이며 금강경을 사경했다. 그가 46세 때 적벽에 가서 지은 〈적벽부〉의 유명한 대목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천지가 한 순간도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만물과 내가 모두 무궁한 것이다.(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自基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라는 대목은 불교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48세 때 다시 여주로 이배(移配)될 때 형주 동림사에 들러 동림사 회주에게 주었다는 시도 불교의 진수를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溪聲便是廣長舌   시냇물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장광설이요
山色豈非淸淨身   산 빛 또한 부처님의 청정신이 아닌가?
夜來八萬四千偈   밤이 되어 팔만사천 게송이 들리니
他日如何擧似人   훗날 남에게 어찌 다 이를 수 있으리.

이러한 불교적 사유의 시를 남긴 소식은 불교의 게송의 전통을 이어받아 전부 39개의 게(偈)와 109편의 송(頌)을 지었다고 한다.
소식의 다음 세대인 남송의 엄우(嚴羽)는 《창랑시화》에서 시와 선은 묘오(妙悟)에 핵심이 있다고 하면서 시를 짓는 방법이 참선하는 수행과 다르지 않음을 말했다. 12세기 금나라의 원호문은 “시는 선객에게 비단 위의 꽃이 되고, 선은 시인에게 옥을 다듬는 칼이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설명은 시와 선이 상보적 관계에서 서로 도움을 줌을 밝힌 것이다. 선의 직관적 깨달음은 상상력을 통한 시의 새로운 발견에 연결될 수 있다.
홍용희가 예로 든 다음 시는 시적 계시가 선적 묘오와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먼저 핀 꽃도
나중 핀 꽃도
모두 다 지는 꽃이라

그대가 어제 피운 꽃 한 송이
오늘은 내게 와서 지고 있다
— 김초혜 〈편지〉

세상 모든 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며 생멸을 거듭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먼저 핀 꽃이건 나중 핀 꽃이건 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대의 꽃도 내게 와 지고 나의 꽃도 어딘가에서 질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자명한 이치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것을 잊고 산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으니 그 순간의 삶이 계속 이어지리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언젠가 산산조각이 나기 마련이다. 산산조각 날 존재들이 오늘 잘났다고 떠들고 서로 다투며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날뛰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이것을 통찰할 때 자비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이 시는 꽃이 피고 지는 평범한 현상을 통해 만법의 원리를 제시했다. 홍용희의 설명대로 선적 직관이 시적 계시로 승화된 경우다.
선이 오묘한 깨달음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것은 오묘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것인데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오묘해 보일 뿐이다. 진리가 어느 먼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진실이 오묘하게 비칠 수 있다. 시가 생의 비밀을 드러내는 오묘한 창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일상의 평범한 일을 그대로 펼쳐낸 작품은 너무 싱겁게 비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은 한 잔 차의 담담한 맛에서 우러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재복이 평상심이 곧 진리라는 깨우침의 예로 제시한 다음 작품도 선과 시의 동질성을 또 다른 차원에서 알려주는 유익한 자료가 된다.

용인 공원 식당 창가에 앉아 맥주를 마신다. 앞에는 정민 교수 옆에는 오세영. 유리창엔 봄날 오후 햇살이 비친다. 탁자엔 두부, 말린 무 졸임, 콩나물 무침, 멸치 졸임. 갑자기 가느다란 멸치가 말하네. “생각해 봐! 생각해 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라는 건지 원! 멸치 안주로 맥주 마실 때 “이형은 목월 선생님 사랑을 그렇게 받았지만 생전에 보답을 못한 것 같아.” 종이컵에 하얀 막걸리 따라 마시며 오세영이 말한다. “원래 사랑받는 아들 따로 있고 효자 아들 따로 있는 거야.” 그때 내가 한 말이다. 양말 벗고 햇살에 발을 말리고 싶은 봄날.

“이군이가? 훈이가?” 대학 시절 깊은 밤 원효로 목월 선생님 찾아가면 작은 방에 엎드려 원고 쓰시다 말고 “와? 무슨 일이고?” 물으셨지. 난 그저 말없이 선생님 앞에 앉아 있었다. 아마 추위와 불안과 망상에 쫓기고 있었을 거다. 대학 시절 처음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나올 때 “엄마야! 이군 김치 좀 주게, 이군 자취한다.” 사모님을 엄마라 부르시고 사모님은 하얀 비닐봉지에 매운 경상도 김치를 담아 주셨다. 오늘밤에도 선생님 찾아가 꾸벅 인사드리면 “이군이가? 훈이가? 와? 무슨 일이고?” 그러실 것만 같다.
— 이승훈 〈모두가 예술이다〉

겉으로는 조금의 윤색도 없는 것처럼 사실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도 시인의 의도에 의한 선택과 배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상의 일을 그대로 서술한 것처럼 작의(作意)의 흔적이 없다. 사실을 투명하게 전달하여 거기서 일상의 진리를 스스로 찾게 하는 방임의 화법이 작용한다. 진리가 어떤 오묘한 구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을 은근히 알려주는 새로운 차원의 진술이다. 그런 까닭에 이 시가 시와 선의 동질성을 설명하는 표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4. 완당 김정희와 차와 선불교

추사 완당 김정희는 조선 500년 역사에 보기 드문 천재다. 그는 24세 때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서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하여 타고난 문재와 박학다식으로 청나라 인사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그곳에서 고증학과 금석학의 이론, 실사구시의 학풍을 배워 조선조 북학 연구의 일인자가 되었다. 타고난 천재였기에 자신이 아는 것을 과감히 개진하여 여러 사람의 질시와 지탄도 받았다. 그는 금석학에 바탕을 둔 역사 연구로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와 황초령순수비, 경주 무장산비, 경주 서악동 고분 등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중국의 역대 서체를 수용하여 자신의 개성을 변용한 독특한 필체를 시험하고 개발하였으며, 성리학에 바탕을 둔 선비이면서 불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이론을 전개했다. 그리고 불교적 선취를 머금은 시와 서를 발표하여 조선 후기 예술사의 변별적 전기(轉機)를 만들었다.
김정희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언제 싹텄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증조부 김한신이 원당(願堂) 사찰로 고향 예산에 화암사를 지었고 그의 부친 김노경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가야산 해인사에 시주하여 사찰을 중건한 것을 보면, 유학자 집안이면서도 불교에 발원하는 가풍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동갑의 승려인 초의선사와 교분을 나눈 후 불교에 더욱 기울어지게 되었고 차를 대하는 마음도 깊어졌다. 초의선사와의 첫 만남은 1815년 30세 때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海鵬) 대사와 선문답을 나눌 때 이루어졌고, 그 교분은 완당이 세상을 떠난 이후까지 이어졌다. 특히 제주도 8년, 북청 1년의 유배 기간에는 거의 차에 중독된 사람처럼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간청의 서신을 수없이 보냈다.
그가 차를 필요로 하는 이유로 가장 큰 것은 다산의 경우처럼 육체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다. 다산이 승려 혜장에게 차를 부탁한 이유가 담적증을 가라앉히기 위함임을 앞에서 말했다. 완당도 제주도 유배지에서 얻게 된 풍토병을 완화하기 위해 좋은 차를 구하려 한 것이다. 완당은 먹으면 곧 체하는 병으로 고생했는데 초의가 보내준 차를 먹고 병이 나았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보내주신 차는 병든 위를 말끔히 낫게 해주니 감동이 뼈에 사무치게 간절합니다.”라고 편지에 썼다. 그 고마움을 완당은 일로향실(一爐香室), 명선(茗禪) 등의 편액으로 써서 초의에게 보냈다. 특히 이 두 편의 서예는 차와 선의 일치를 추구하는 초의의 정신을 제대로 표현한 명작이다. 완당은 서예의 기법으로 선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제주에서 풀려난 후 완당은 지금의 한강 변 용산에 기거했는데, 해배 후에는 차를 직접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초의에게 차를 구하는 편지는 제주에서처럼 많이 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사대부의 번잡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자신과 속세를 떠나 선의 세계를 추구하는 초의의 삶을 비교하면서 청정한 삶에 대한 동경을 피력하고 있다. 선송(禪誦)을 멈추지 않는 초의의 정계(淨界)를 선망하며 자신은 굳고 무딘 목석(木石)처럼 범로(凡路)에 놓여 있음을 개탄하였다. 몸은 유가의 세계에 머물고 있지만 마음은 불가에 기울어짐을 고백한 것이다. 말년에 병이 깊어지면서 완당은 초의에게 차의 힘으로 여린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차를 보내주는 것이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완당은 젊은 날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유가이기에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고 유학과 상통하는 철학적 사유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30대에 가내의 원찰인 예산 화암사 뒤편 바위에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란 문구를 새겼다. 이 문구에는 완당의 유머 감각도 담겨 있다. ‘인도 옛 선생의 집’이란 뜻으로 석가모니를 모신 불당을 나타낸 것이다. 석가모니를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스승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부처를 절대자로 숭앙하는 입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33세 때 쓴 해인사 중건 상량문은 경상감사로 가 있던 부친 김노경이 해인사 대적광전을 중수하면서 상량문을 완당에게 쓰게 한 것이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해서로 되어 있는 이 글은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보통의 수준이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연도는 확실치 않지만 중년의 소산으로 추정되는 작품에는 《반야심경》을 사본한 것도 있어서 그가 불교의 공사상에도 근접했음을 짐작케 한다.
완당이 제주도에 유배된 지 4년째 되는 1843년 77세의 노승 백파(白坡) 대사와 선(禪)에 대한 견해 차이로 편지를 통한 일대 논전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완당의 유명한 ‘백파 망증(妄證) 15조’다. 완당은 일찍이 백파의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1822)에 대해 유학과 불교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음을 들어 백파가 결사문에서 말한 것이 자신의 뜻과 부합한다는 서신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선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자리에 선 것이다.
백파에 대해 먼저 반론을 제기한 것은 대둔사의 초의선사였다. 백파가 내놓은 〈선문 수경(手鏡)〉에 대해 초의선사가 〈선문 사변(四辯) 만어(漫語)〉를 지어 비판했다. 이것은 이때 이후 100년간 전개된 선 논쟁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이후 이 논쟁에는 각 문도의 제자들이 가담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학자들도 관여하여 의견을 개진했다. 이 논쟁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 논쟁의 속내를 살펴보면 선 우위의 임제종 정통론을 개진한 백파의 사상과, 선과 교의 근원적 동등함을 전제로 선과 교의 병행을 주장한 초의 사상의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완당은 그의 벗인 초의선사의 비판을 보고 백파에게 편지를 보내고, 백파의 답변이 오자 다시 그것을 비판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반론을 전개했다. 후손이 쓴 〈완당 김정희 선생 묘비문〉에는 선생이 평소 화평하고 화기애애했으나 의리나 이욕(利欲)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서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라고 적혀 있다. 제주도 벽지에 4년 동안 위리안치 되어 있으면서도 그 기개와 성벽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화엄종계의 대사를 향해서 자신의 선에 대한 주장을 펼쳤다는 점에서도 그의 불교 이해가 대단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완당은 북청의 유배에서도 풀려 67세 이후 과천에 정착했다. 70세 되는 1855년 봄 그와 논전을 펼쳤던 백파 스님의 제자가 찾아와 3년 전 세상을 떠난 스님의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스님은 1852년 4월에 입적했는데 그때 완당은 북청에 유배 중이어서 스님이 입적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완당은 70의 나이에 굳은 손을 녹이고 아픈 팔을 들어 올려 마치 12년 전 자신의 방자한 반박에 사죄하는 듯 전력을 기울여 백파 스님의 비문을 썼다. 비문은 해서로 쓰고 비석 뒤의 명문(銘文)은 행서로 썼다. 완당 만년의 정체에 입각한 단아한 해서, 행서 금석문을 남긴 것이다. 그 비문과 명문은 다음과 같다.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律師)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여기 율사라고 적은 것이다. 대기와 대용, 이것은 백파가 팔십 평생 가장 강조한 것인데 혹자는 기용(機用)과 살활(殺活)을 지루하게 천착하였다고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세상 만물을 대함에 어느 것이나 살활과 기용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나 어느 것 하나 살활과 기용에서 벗어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뜻을 모르고 망령되이 백파가 살활과 기용에 집착했다고 말하는 것은 하루살이가 느티나무를 흔드는 격이다. 이래서야 어찌 백파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왕복서한으로 변증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헛되이 의논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니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사람을 설득하려 해도 모두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면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 보고 한번 웃어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대기대용, 이 네 글자를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파비로서 부족하다 할 것이다.
이를 써서 설두, 백암 등 문도들에게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완당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달마대사 화상을 문도들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까지 지어 보냈다고 한다.

遠望似達磨   멀리서 바라보면 달마 같은데
近看卽白坡   가까이 보니 곧 백파로다.
以有差別   차별이 있음을 갖고서
入不二門   불이문에 들어갔네.
流水今日   흐르는 물은 오늘의 모습이요
明月前身   밝은 달은 옛 모습이로다.

비석의 명문에는 지난날 자신의 거친 반론에 대한 반성의 마음과 백파의 도력을 칭송하는 마음이 담겨 있고, 게송에는 불교의 한 경지에 대한 완당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게송은 일반 유학자는 물론이요, 선승에게서도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완당은 선의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앞에서 시와 선이 상통하는 바가 직관적 깨달음과 언어의 함축적 표현에 있고, 차와 선이 상통하는 바가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 하여 무념무상의 조용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라 했다. 시와 차와 선이 조응을 이루어 빚어낸 노년의 경지를 나타낸 서예 작품으로 다음 대련이 있다.

春風大雅能容物   봄바람 같은 인품은 능히 만물을 받아들이고
秋水文章不染塵   가을 물 같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으리라  
행서로 쓰인 이 대련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완당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봄과 가을의 속성에 의해 넓은 도량을 지닌 인물과 그의 글월을 대비하면서 마음은 만물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가지되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표현했다. 여기서 ‘춘풍(春風)’과 ‘추수(秋水)’, ‘대아(大雅)’와 ‘문장(文章)’, ‘능용(能容)’과 ‘불염(不染)’, ‘물(物)’과 ‘진(塵)’이 정확한 대응을 이루면서 의미의 대비와 조화를 이룸을 관찰할 수 있다. 모름지기 마음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워 만물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고 문장은 가을 물처럼 청정해서 잡티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과 문장을 춘풍과 추수에 비유하여 하나로 엮은 데 이 대련의 묘미가 있다. 이러한 묘미는 선과 차와 시가 조화를 이룬 높은 정신의 수양에서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71세 노인의 무심하면서도 걸림이 없는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말년의 작품을 보면 완당의 정신의 경지가 차선일여, 시선일여의 자리에 이르렀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大烹豆腐瓜薑菜   최고의 반찬은 두부와 오이와 생강과 나물
高會夫妻兒女孫   최고의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이것은 촌 늙은이의 으뜸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한 말(斗) 크기의 황금도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여인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작품을 쓴 1856년 5월 해붕 대사의 제자에게서 스님의 영정을 만들었으니 찬(贊)을 써 달라는 부탁이 왔다. 해붕 대사는 40년 전인 1815년 30세 때 수락산 학림암에서 만나 선문답을 나눈 승려이고 그때 초의선사를 만나 평생의 교분이 이루어지게 한 그분이다. 완당은 71세의 나이에 아픈 팔을 들어 마지막 기력을 다해 찬을 쓰고 부탁한 승려에게는 답서를 썼다. 그 답서에서 완당은 영정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지만 해붕노사는 나의 옛 벗이므로 신병을 무릅쓰고 글을 써 보낸다고 했다. 마음껏 써내지는 못한 것 같다고 겸손의 말도 하며 병세가 심하여 이만 줄인다고 끝맺었다. 이 〈해붕대사화상찬〉은 완당이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에 만든 ‘최말년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 내용을 보면 완당의 공(空)에 대한 견해가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된다.

해붕대사가 말하는 공은 오온개공(五蘊皆空)의 공이 아니라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이다. 혹자는 스님을 공의 으뜸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혹자는 참된 공이라고 하나 이는 그럴듯하게 들릴 뿐이다. 참됨이 공을 얽맨다면 그 또한 해붕의 공이 아니다. 해붕의 공은 곧 해붕의 공일 따름이다. 공이 큰 깨달음을 낳는다는 것도 해붕에 대한 어긋난 풀이이며 해붕의 공이 홀로 나아가고 홀로 통한다는 것도 잘못된 풀이다. (하략)

완당은 이 찬문에서 40년 전에 삼각산과 도봉산 사이에서 본 해붕 대사의 모습을 30년 전이라고 착각하고 기술했다. 71세의 노인이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세월의 단층을 넘어 영정의 찬문을 쓴 완당의 도타운 정성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훗날 완당의 벗인 초의선사는 이 찬문을 보고 깊은 감회에 젖어 발문을 지어 함께 표구했다. 40년을 지켜 온 선가의 인연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완당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과천에서 봉은사를 왕래했다.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 시기에 《유마경》 《능엄경》 《화엄경》을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은사의 남호영기(南湖永奇) 스님은 《아미타경》과 《무량경》을 판각하여 간행하고 이어 방대한 《화엄경》 간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완당은 아직도 유배지에 있는 평생의 지기 권돈인에게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다고 편지에 써 보냈다. 영기 스님이 《화엄경》 80권을 간행하고 경판전의 글씨를 완당에게 부탁하자 완당은 ‘판전(板殿)’이라는 글씨를 써 주었다. 그것이 9월 말이고 10월 10일에 완당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 글씨는 완당의 최후 작품이 되었다. 그 글씨를 보면 시와 차와 선이 일체를 이룬 노년의 담담한 경지가 배어 있는 것 같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 있다”고 한 것도 바로 이 경지를 말로 풀어 설명한 것이리라. 어쩌면 그것은 《화엄경》의 대의를 압축한 다음 4구게의 핵심을 문자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누군가 삼세 일체 부처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현상 세계가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통찰해야 할 것이다. ■

이숭원 / 문학평론가. 1986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서울대학교, 동 대학원(국문과) 졸업. 주요 저서로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 《미당과의 만남》 《영랑을 만나다》 《백석을 만나다》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 《시 속으로》 《감성의 파문》 등이 있음. 유심작품상(평론 부문) 등 수상. 현재 서울여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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