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근대기 원효인가?

신라시대의 고승 원효(元曉, 617~686)는 근대기를 맞아 어떻게 재인식되고 부각되었을까? 근대 한국의 불교도와 지식인들이 타자(他者, 他國과 他宗敎)를 의식하며 원효에 관심을 쏟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그 결과로 그려진 원효상은 어떠했을까?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원효는 생존 당시부터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존재감을 돋보였던 인물로, 그의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이 중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 볼 수 있듯이 무애무라는 춤을 고안하여 서민층에도 널리 알려졌었으며, 고려 중기 숙종(1054~1105)은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호를 추증한 바가 있다.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원효는 문도를 형성하는 등의 조직적 사상운동은 전개하지 못했기에, 조선시대 긴 숭유억불의 시간 동안 많이 잊히게 되었고, 저서 대부분도 산실되고 말았다. 그의 교학도 후학들에 의해 전승되기 어려웠으며, 명찰의 창건설화 속 인물이나 신비한 도승으로서 이미지가 많이 남아 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근대를 맞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불교계의 억불로부터 해방, 일본불교계와의 교섭, 서양종교와 경쟁 등의 배경 속에서, 원효는 급격히 주목을 받으며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원효 인식은 불교교리나 신앙의 측면보다는 일본의 식민 지배하에서의 ‘국가존립, 민족 주체성 문제’와 결부된 측면이 크다. 원효는 역사로부터 불려 나와 당시의 사회와 불교계의 정세에 맞추어 해석됐는데, 그 양상은 전근대의 원효 인식과는 상당히 다른 ‘민족의 영웅’ ‘개혁적 모델’ ‘통불교의 완성자’ ‘호국승’ ‘선교융합의 이념적 종조’ 등 다양한 표상으로 나타났다. 즉 원효는 근대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적 인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불교의 진리를 체득한 고승에서 ‘민족사상과 문화 자부심의 상징’으로 재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20세기에 들어 원효가 재생의 기회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1895년 승니도성출입해금과 같은 억불로부터 해방을 승인받게 된 원인도 있었지만, 일본불교와 서양종교 등 ‘새롭게 등장한 타자를 통한 자기 인식’이 생겨났던 이유가 크다. 당시 많은 지식인과 불교도들 사이에서 조선불교 정체성의 문제가 강하게 의식되었으며, 원효가 가진 다양한 면모도 이런 인식 위에서 부각된 측면이 크다. 더욱이 사회진화론의 유행과 불교개혁론의 대두, 1930년 후반부터 격화된 전쟁 등, 이전까지 겪지 못했던 변화를 단기간에 경험하게 된 불교도들은 적극 세속으로 뛰어들어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역사상의 인물 가운데, 산속 절간이 아닌 거리로 나아가 민중 구제에 힘 쏟았던 원효는 한층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원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또 다른 이유로, 원효와 관련된 신자료의 발견과 집성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10년대부터 한일 양국 학자들에 의해 원효의 유저 목록이 정리되어, 이전까지 40여 부 정도로만 알려졌던 원효의 저술이 90여 부까지 집계되었으며,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 《이장의》 《십문화쟁론》 등이 주목받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유학생들도 한국에서 소실된 원효 저술의 필사본이 일본에서 진중하게 전해 왔음을 알게 되자, ‘타국인들이 존숭하는 원효를 본국인인 우리가 무관심해서야 되겠는가’라며 반성을 호소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 조동종대학 유학생 정황진은 1918년 〈대성화쟁국사원효저술일람표〉를 발표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원효는 ‘설화 속의 도력 높은 승려’에서 점차 ‘불교 사상가, 대저술가’로 자리 잡게 된다.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 직원에 의해 서당화상비의 비편이 발견되어 원효의 생몰 연대가 밝혀지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이 같은 과정에서 새롭게 읽힌 원효 이해의 배경에는 식민통치국가인 일본에 대한 저항감, 그렇지만 선진불교국으로 부상하던 일본불교계에 대한 동경, 중국불교 아류설에 대한 반발, 불교의 과거 위상의 회복 등 복잡한 배경이 얽혀 있다. 많은 엘리트 승려들과 지식인들은 원효를 활용 가능한 이미지로 구축하여 매체를 통해 보급하였고, 그 연장선 위에서 근대 이후에도 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 의해 원효의 이미지가 재생산, 유포되었다. 그리고 일반 대중들은 이렇게 구축된 고정적인 원효상을 별다른 의심 없이 상식으로 수용한 측면이 크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헌에서 볼 수 없는 허구적 요소, 적지 않은 민족의식이 개입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근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원효 인식의 변화, 그 배경까지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원효는 종래 불교계 인물로 가장 많이 연구된 대상이지만, 대부분 특정 주석서에 대한 연구, 혹은 생애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원효라는 인물상의 역사적 정착 과정은 거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근대기 원효 표상화의 사례를 간추려 소개하면서 진행하고자 한다.

 
2. 근대기의 원효 표상화

1) 민족 영웅으로 부상(浮上)
조선왕조부터 비인륜의 신앙으로 격하되었던 불교는 19세기 말부터 새롭게 활기를 띠며 유교 질서의 혼란을 대체하는 민족종교로 부상하게 된다. 권상로가 ‘갱생과도의 시대’ 박한영이 ‘부활시대’라고 이름 붙인 바대로이다. 이 시기의 불교계 양상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불교의 본질과 조선 민족이 거의 동일시되었다는 점이다. 열반, 무아와 같은 보편초월적 진리의 추구보다도 ‘민족종교로서 조선불교’라는 관념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이는 당시 한국불교 내부의 변화 요인도 들 수 있지만, 이전과는 다른 타자(일본, 중국, 서양)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일본불교와의 관계는 떼어놓고 볼 수 없는데, 1877년 정토진종 부산별원의 개원을 시작으로 보은론(報恩論)을 내세운 각 종파의 등장, 1911년 총독부의 사찰령 시행 등은 ‘조선불교’의 정체성 모색을 촉구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한국불교계도 시찰단과 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그들의 의식변화는 식민지배하에서 불교의 역할과 사명을 찾는 데 집중되었다. 게다가 다카하시 도오루와 같은 일본학자들의 “조선불교사는 소규모의 중국불교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 그리고 인도-중국-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삼국사관에 대한 반감으로 ‘자존심 회복’의 문제도 시급해졌다. 또한 1886년 한불통상조약 체결 후 가톨릭 기독교도 국내에서 의료, 교육 등 대사회적 포교를 확대하여, 불교계의 위협을 불러일으켰다. 불교도들은 서양종교와 경쟁에서 불교가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요소로 ‘전통문화와 불교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흥미롭게도 이 중에서 불교도들이 떠올리고 주목하고 것은 ‘고대’의 불교였다. 현재 선진불교국으로 선양하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고, 불교를 국교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시대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입당하지 않고도 신라에서 독자적 교학을 세운 ‘민족의 자랑거리 원효’가 있었다. 어느 사람보다도 자존심 회복을 도모하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조선 특유의 원효의 해동종(海東宗) 분황종(芬皇宗)’ 등의 언설도 늘어났다. 차츰 불교는 조선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해 온 종교이자 문화로 부상하였고, 김상철이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들며 “조선이 성인국(聖人國)이요, 조선이 불교국이요, 조선이 천재문명국(天才文明國)이라는 것까지도 생각하게 될 것”이라 하였듯이, ‘원효’ 그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 ‘천재를 만들어 낸 조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같은 시대인식과 함께 원효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글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불교계에 한정되지 않고 지식인, 역사학자, 언론인까지 동참하기에 이른다. 대표적 예로 장도빈은 1917년 신문관 수양총서 제1호로 《위인원효》를 출판하였는데, 주목할 것은 당시의 시대 배경과 저자의 메시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애국의식을 고취하고 민족계몽을 촉구하는 매개로 동서양의 위인을 소개하는 영웅전기가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유행하였고, ‘영웅’은 곧 ‘민족’의 대변이기도 하였다. 장도빈은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 신민회 활동을 거치며 신채호, 장지연, 박은식 등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신채호가 논설에서 강조한 역사인물을 모아 《조선위인전》 《조선영웅전》(고려관, 1925)을 출간했던 것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지면 관계상 부분만을 소개할 수밖에 없으나, 《위인원효》에는 ‘외래문물 및 사조 유입의 필요성’과 ‘전통문화의 자긍심’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으며, 원효를 통해 고대의 우리 선조는 근면 성실하였으며 현재 민족의 계몽과 진보된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그를 모방해야 한다는 견해를 드러낸다.

이제 칸트 來하고 薛原郞이 來하고 元曉 來하여야 社會의 心理가 改良進步되리라. 社會의 心理가 改良進步되어야 社會의 物質이 改良進步되어 我等의 手로 다시 高麗瓷器를 造할지며 다시 新羅의 自鳴鐘을 造할지며……(《위인원효》 p.59)

이처럼 순수한 불교도라 할 수 없는 지식인들이 현실인식에 바탕하여 원효를 거론한 예를 볼 수 있는데, 조소앙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임시정부 위원으로 활동하던 때 〈신라국 원효대사 전병서〉(1933)를 발표하며, ‘원효는 나비[蝶], 일반 민중은 누에[蚕]’로 표현하여 원효를 민족의 이상을 실현한 상징이자 비범한 재능을 가진 지도적 인물로 묘사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남경 임시정부가 운영한 독립공론사가 발행한 《독립공론》 제3기(1936)의 〈한국문화대어국외공헌(韓國文化對於國外貢獻)〉에서도 원효의 득도와 저술에 대해 소개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개벽》과 《삼천리》 같은 대중잡지에서 ‘조선문화의 고유성’을 찾는 담론 가운데, 권덕규는 〈자아를 개벽하라〉(《개벽》 제1호, 1920)에서, 현대인들이 서양에 경도됨을 지탄하며, “지나에서 유일이오 創見이라 떠드는 賢首의 기신론소가 첫새배 곳 효공의 소를 盜竊한 것임을 볼 때에 과연 효공의 자아를 개벽함의 거룩함을 찬송하며 兼하야 현대인의 무의식함을 歎하노라 생각하라”며 원효(=민족)의 주체성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같은 논조는 〈조선생각을 찾을 때〉(《개벽》 제45호, 1924)에서도 볼 수 있다.
불교계 이외의 인사들 관심이 이 정도였으니 불교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앞서 언급한 정황진은 귀국 전후로〈진역화엄경소서〉(《조선불교총보》 제12호, 1918), 〈서성구룡의 격언〉(《조선불교총보》 제20호, 1920) 등을 발표하여 원효 유저를 소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원효대성제전법요거행〉 〈제원효성사문〉(1929) 등의 행사기록에서는, “성사께서는 도렷이 조선불교를 병작하신 자이오. 조금도 인도나 지나의 불교를 밋절미를 삼지 아니하시엇습니다”와 같은 찬앙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주자학의 시대에 역사 속에서 마냥 숨죽이고 있어야 했던 원효가, 20세기에 들며 ‘조선과 불가분의 관계인 원효성사’ ‘조선민족 사상 문화의 영웅’으로 재등장한 것이다. 늘 역사 속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2) 불교계 개혁의 모델
20세기 초 불교계와 사회의 변화를 주시하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신식교육을 받고 유학을 경험한 젊은 불교도들이었다. 불교계 개혁 바람이 불며 국내외 청년조직이 결성되었는데, 그 취지문 격려글에서부터 원효를 사회참여적 승려이자 ‘진취적, 개혁적 인물’로 거론함을 볼 수 있다. 전기류에 전하는 원효의 파격적 행동과 활달무애한 성격, 기득권 귀족승들을 힐난한 행적은, 보수적 불교계의 변화와 구습타파를 도모한 불교도들의 요구에 적합한 모범상으로 비쳤다.
우임생(寓林生)은 〈불교청년에 대하여〉(《조선불교총보》 제18호, 1919)에서 불교 청년들을 격려 질타하며, 서양인에만 경도될 것이 아니라 원효와 의천을 모방하여 조선불교의 인재를 만들 것을 제창하였다. 이는 김경봉의 〈도속(道俗)에 위인〉(《취산보림》 5권, 1921)에서도 볼 수 있는데 “(원효)師의 경력이 靑年諸位 讀愛을 받을 줄로 自想하고 玆에 略述하노라”며 자신한다. 그는 이 글에서 고대의 승려들은 군사와 사회구제에 힘썼음을 강조하는데, 장도빈의 《위인원효》 〈원효의 입세〉의 내용을 많이 참고한 듯하다. 장도빈은 “是時에 僧侶界가 너무 淸淨寂滅에 入하는 故로, 元曉는 此를 挽回코저 함이며”라며, “어허 元曉는 東方의 「루터」니라”고 하였는데, 이 같은 수식어, 원효 루터의 나열은 청년들의 타락을 경계하고 개혁 정신을 고무하는 글 〈조선불교청년제군에게 고함〉(〈동아일보〉 1920년 7월 6일)에서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1926년 12월 동경 금강저사에서 재일유학생을 중심으로 ‘원효대성찬앙회’가 결성되어 발기총회를 열었던 사실이다. 다음은 선언문의 일부이다.

今日로부터 우리 朝鮮도 朝鮮의 特色인 宗敎, 哲學, 文學, 藝術 등 온갖 文化思想에 體系를 세울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此等 文化史上에 代表的 人物은 누가 될까요. 물론 大聖일 것 입니다. 大聖은 偏智偏情의 闕一적 聖哲이 아니요. 知情意 眞善美의 總合的 人格者이신 聖師이십니다.……

위의 글에서 원효는 외국에 경도되지 않고 중국땅을 밟지 않고도 성인으로 명성을 드날린 ‘조선의 자부심이자 독창적 인물’로 등장한다. 위 유학생들의 문제의식은 당시 한국인들이 서양사상에 심취해 칸트나 마르크스는 자주 언급하지만, “원효에 대한 관념이 일본인만도 지나인(支那人)만도 같지 못함”에 대한 반성이다. 그리고 조선 사상문화의 자주적 특성 모색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회칙〉에는 순회강연, 논문발표, 선수행, 《녹원(鹿苑)》의 발간 등을 명기하고 있지만, 그 실제적 활동은 알 수 없다. 금강저사를 사무실로 이영재, 김태흡, 최범술 등 청년불교계에서 활약한 사람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던 점 등으로 보아, 당시 청년불교도가 원효를 재인식하는 큰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논고로 문전선의 〈우리의 강령〉은 1936년에 창립된 동경유학생회의 강령을 언급한 것으로, 그는 청년운동의 모범으로 《송고승전》의 기록을 거론하며 “원효조사는 계급화 취미화 사념화한 전당불교에서 실제화 대중화한 도시불교로 인도한 것이 과연 그의 역사적 사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일본 유학생의 증가와 함께 급증한 승려의 ‘대처식육’ 문제와 ‘원효의 파계’에 대한 인식이다. 한 예로 《조선불교》 제26호에는 ‘조선불교대처식육론’ 논고 공모 글이 수록되었고, 제27호 〈조선승려육식처대문제비판호(朝鮮僧侶肉食妻帶問題批判號)〉부터 우연인지 〈朝鮮高僧傳-新羅の碩徳、元暁大聖〉(上, 1926)가 연재되기 시작함이 주목된다. 그리고 〈조선고승전〉 하편에는 “원효대성은 전사회(全社會)를 위하여 유익한 인물을 얻기 위해 처를 취하고 설총과 같은 현자를 얻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언급 자체가 원효의 파계와 대처식육을 옹호하는 글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불교도들의 인식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사한 논조의 김병곤 〈사해(史海) 삼국시대 원효와 요석공주〉(〈중외일보〉 1930), 〈과공주(寡公主)와 원효사(元暁師)〉(〈동아일보〉 1938) 기사에서도 ‘원효가 설총을 낳은 것은 구국인재 배출을 위한 계획된 행동이자 희생’이었다는 관점을 강조한다. 김태흡은 〈고승일화원효대사〉(《삼천리》 제12권 3호, 1940)에서 원효가 종단을 “성적으로 해방을 시켜야 된다…… 미래 사람을 위하여 ‘혁명’ ‘개혁’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그는 ‘제일의 포교사’라는 명성을 얻었던 만큼, 이 같은 발언은 많은 대중으로 하여금 원효의 파계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도영웅을 논함〉(《삼천리》 60권 11호, 1934), 〈화쟁국사와 설총의 지성(분황사)〉(《불교》 25권, 1940) 등에서는 원효와 설총을 묶어 ‘고대 유불의 성인’으로 자부함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까지 원효는 세속인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신비로운 인물로 이미지화되었다. 하지만 근대를 맞아 ‘종교의 본령은 사회구제’라는 의식 확산과 함께 원효는 영웅적이면서도 다양한 재능을 겸비한, ‘인간미 있는 구도자’이자 ‘불법과 실생활을 융화시킨’ 위인으로 불교도들의 모범으로 그려졌다. 원효의 ‘산간불교에서 가두불교’로의 인도는 20세기 초 원효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3) 통불교의 실현자
한국불교의 특성과 회통불교에 대한 논의는 심재룡, 길희성, 이봉춘, 조은수, 존 요르겐센 등에 의해 이미 이루어졌으며, 기존의 고착적 원효 인식과 한국불교 특성론을 지적하고 주의를 환기시킨 점을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 글들에서는 최남선의 글 이외에 언급되지 않은 논고들이 있기에 이를 보완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최남선이 원효를 언급한 논고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조선불교-동방문화사상에 잇는 그 지위〉(《조선불교》 제74호, 1930)로, 원효의 사상을 ‘통불교’로 규정한 최초의 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 최남선이 저술한 것을 최봉수가 영역하고 도진호에 의해 1930년 7월 하와이 범태평양불교도대회에서 발표되었다. 저술 배경은 1928년부터 재기한 불교청년운동과 연관되는데, 불교청년들은 이 대회 참가를 ‘조선불교의 세계진출 기회’로 여겼다. 최남선도 외국인에게 보일 것을 염두하며 원고를 작성하였기에 조선불교의 특징과 독창성을 강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제4장 원효, 통불교의 건설자〉의 장을 구성한 배경도 마찬가지다.
이 글에서 최남선은 원효가 독자적 조선불교 해동종을 창안한 인물임을 강하게 표명한다. 그 배경에는 앞서 소개한 일본학자들의 조선불교의 비독자성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일본불교보다 우위를 점하는 동시에 중국불교로부터 거리를 둔, 조선불교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불교 전래에서도 기존의 북방 중국 루트 외에 해상루트를 통한 인도 서구문화의 전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이 글의 도입 부분에서는 문명사적으로 보아 “동서교통상의 일방의 종점인 조선반도는 저절로 일체 문화의 최후 정류지가 된다”고 하는가 하면, 〈제8장 일본불교와 조선〉에서는 일본에 미친 한국불교의 영향이 지대함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최남선은 중국서 활약하였던 삼론종의 승랑(생몰년 미상), 유식법상의 원측(613~696), 화엄종의 의상(625~702)을 드러내 민족의 고승으로 극찬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원효야말로 세계불교의 완성자’라며 강조한다. 무엇보다 원효는 입당의 경험 없이도 명성을 떨쳤던 점, 더구나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용수도 필경은 논사, 구마라습도 필경은 학자, 혜원도 필경은 특권계급”이었지만, 원효는 철학과 실천을 동시에 수행하고 종파를 초월한 ‘최후의 결론적 불교를 이룬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같은 최남선의 언급 가운데 역시 ‘통불교’라는 용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선행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듯이, 일본불교계의 사조를 접한 그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남선의 조선학과 불교연구는 일본 유학의 영향이 적지 않음은 스스로 〈묘음관세음〉(《불교》 50·51, 1928)을 통해 밝힌 바가 있다.
최남선이 일본에서 접하였을 ‘불교통일론’ ‘통불교론’이란, 메이지 이후 일본불교계에 유행한 사조로, 대표적인 인물로 무라카미 센쇼, 이노우에 세이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폐불훼석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불교계 변화를 도모하던 중 서양의 종교연구 방법론에 자극을 받으며 비교연구·역사적 연구를 통한 종파 초월적 불교이해에 주력하게 되었다. 사승(師承) 법맥의 종학(宗學)에 치우쳤던 종래 불교학을 벗어나 석가의 근본원리에 돌아갈 것, 그리고 불교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밝힐 것을 주창하였다. 이 사조는 권상로와 박한영의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가 있었다. 이를 접한 최남선은 종파성이 강한 일본불교에 비해 융합적 성격이 강한 조선불교의 우위성을 강조하고자 하였고, 특히 원효를 통해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최남선은 중국 당대 불교는 “투쟁견고의 시기”였으며, “속성분화의 절정에 달하여 새로운 일생명체로의 조직이 요구되던 때” 원효가 나타나 분열을 해결했다고 한다. 그의 언급처럼 원효는 “인도·서역의 서론적 불교, 중국의 각론적 불교, 조선의 결론적 불교”라는 전개과정에서 최후의 완성자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아래는 최남선의 글과 메이지 통불교 강연사 다카다 도겐의 글이다.

「釋迦로서 元曉」에는 요하건데 「創作에서 分化」와 「分化로서 歸合」을 의미를 함이얏다. 元曉가 있어서 여기 一乘的佛敎가 있다고 할 것이었다.

무릇 천지간 규칙으로 처음에는 단순한 것일지라도 결국 복잡한 것이 되니, 그렇다 할지라도 그 복잡한 것이 다시 단순으로 귀결하는 것이 자연의 勢이다.

주목할 점은 위 두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남선의 ‘창작으로부터 분화로’ ‘분화에서 귀합으로’ ‘인도(창작)→지나(분화)→조선(총합)’이라는 진화론적 서술은 다카다의 ‘단순→복잡→단순’을 내세운 자연존재론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일본 불교도들은 인도→중국→일본에 이르는 불교사적 발달과정을 설정하고, 일본에 이르러 불교는 정점에 달했으며 현재 불교 선진국인 일본이 사명감을 가지고 불교 통일을 완성하는 과정에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를 역이용하여 최남선은 그 정점의 자리에 융화적 성격이 강한 한국불교를 놓아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최남선은 그의 불함문화권이 조선을 중심에 두고 중국, 일본을 포함하여 발칸반도에 이르는 확장을 구상한 것과 같이, 통불교로 특징 지운 조선불교도 동방 나아가서는 세계불교의 정점에서의 우위 확보를 목적하였다. 이 글에서 조선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이 해륙문화의 집대성에, 조선불교계의 사명이 세계문화의 통일에 있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최남선의 언설이 한때의 주장에 그치지 않고 이후 불교도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그 외 김경주, 허영호, 문전선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조명기는 〈조선불교와 전체주의〉(1940)에서 통불교와 원효 재인식을 통해 전체주의 사조 속에서 조선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였으나, 그 선례로 메이지 불교계의 불교통일론 및 관련 단체를 언급하였다. 이처럼 근대기 한국불교도의 통불교론은 일본을 의식하며 자국 불교의 아이덴티티를 모색하는 가운데 형성된 측면이 있었으며, 그 속에서 원효는 종파와 성속 초월의 실현자로 그려졌다.
하지만 통불교라는 용어와의 결합은 원효가 갖는 다양한 면을 배제시키고 ‘통합주의자’로 가두어 해석하게 된 측면도 있다. 또한 이 통불교론은 1960년대 이후 한국불교의 대표적 슬로건으로 부상하며 원효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남북통일, 국민총화, 국론단합, 종단통합 이념과 결부되며 정치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역사학자 천관우의 〈인물한국사-고대편, 원효〉(〈경향신문〉 1981)의 글은 최남선의 1930년대의 논의가 그대로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 같은 예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4) 호국의 승려
1930년대 후반부터 한일불교계가 호국불교를 내세우며 전쟁에 협력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불살생’과 ‘평화’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종교인 불교의 ‘공·무아·열반’의 개념이 군국주의 및 전체주의 담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몰아의 정신’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시기에 ‘원효’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원효가 생존한 시기가 삼국 전쟁기였던 점, 신라에서 화랑의 존재와 역할이 두드러졌던 점, 원효의 저술 가운데 호국경전으로 불리는 《금광명경》의 주석서가 있었던 점 등을 들어 원효를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진 인물로 그려낸 예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소설이나 신문기사로 허구가 가미된 성격의 글들이지만, 그 발언들은 그 후 원효의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광수의 장편소설 《원효대사》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소설은 1942년 3월부터 10월까지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신라, 민족, 국가’가 전편에 걸쳐 강하게 부각되는 이 소설의 집필의도를 둘러싼 의견은 크게 양분되는데, ‘청년들의 전쟁 동원 선동’ 혹은 ‘민족정신의 고취’로 보는 상반된 견해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느 쪽으로 보든, 원효를 수행자이기보다는 ‘국가적인 인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역사서의 기록에서는 볼 수 없는 원효의 이미지를 지식인과 대중들에게 사실인 양 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설 속 원효는 조부 밑에서 자라며 내을신궁에서 국선도를 익히고, 출가 후 승려로 생활하지만, 전쟁의 불안과 사회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로 묘사된다. 불자이기보다는 신라 고신도, 화랑의 풍류와 충효사상 등 신라문화를 배경으로 한 인격체에 가깝다. 특히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용신도 수련’ 장의 내용은 고승 원효가 민족신앙 고신도를 접하게 되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있다. 여기서 원효는 고신도의 전당인 용신당에서 수련한 뒤 새로운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소설 속 원효의 설법도 주로 ‘충의’ ‘군사부일체’ ‘희생봉공’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저라는 생각이 있는 충효가 어디 있으며”를 제창하며, 원효가 거진랑과 함께 전투에 나섰던 것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원효가 제자 의명과 살생의 문제를 논한 대화 장면에는 ‘대의를 위한 아(我)의 희생’, 절대자를 위한 살생은 곧 ‘자비’라는 원효의 가르침이 강조된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본래 도적의 두목이 원효의 인도로 충성스런 ‘서당장군’이 되었다는 설정이다.
여기의 ‘서당’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소설의 한 설정으로 넘길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서당화상비편의 발견 후, 일본학자들에 의해 원효의 아명 ‘서당’이 군직으로 해석되며 원효가 군사에 종사한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가쓰라기 스에하루는 〈신라서당화상탑비(新羅誓幢和上塔碑に就いて)〉(1931)에서 《삼국사기》의 직관지 무관조의 ‘서당’ 기록을 들어, 원효를 군직에 종사한 것으로 추측하고 조선 승군의 기원을 신라시대까지 소급하였다.
한편 에다 토시오는 〈원효와 호국경전(元暁と護国経典)〉(《조선》 제239호, 1935)에서 《금광명경소》와 서당화상비의 발견을 거론하며 원효의 군사, 참전의 행적을 추정하였다. 이에 대해 판카즈 모한은 일본이 호국불교의 틀 안에서 한국불교 전통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제국주의가 정점에 접어든 1930년대이며, 에다가 원효, 원광의 세속오계, 황룡사 구층탑 축조와 자장의 역할 등을 든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원효와 호국의 관계는 일본 학자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호국의 전통’은 오히려 한국인들 사이에 우리 불교의 자랑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춘추공조〉의 원효가 당군 소정방의 암호를 해독하였다는 기록을 모티브로, 장도빈은 〈고대조선불교〉(《조선불교총보》 제21호, 1921)에서 원효를 김유신의 충군으로, 김태흡은 〈고승일화원효대사〉(1940)에서 〈수수꺽기 글자푸리〉 절을 설정하여 원효를 종군참모로 등장시키고 있다. 《금광명경》의 내용은 ‘불법(佛法)의 존숭을 호국의 최고 이념으로 삼는 것’이며, 제국주의적, 국가주의적 정치권력을 옹호하는 호국론은 현존하는 원효 저작의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지만, 전술한 배경 속에서 원효는 군사에 힘쓴 인물로 부각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해석은 근대 이후 많은 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조명기는 《신라불교의 이념과 역사》(경서원, 1962)에 “원효대사도 군사에 보좌한 것이 사실이니 이 전통이 총림에 연승(連承)되어 승병에까지 발전되었다”고 하였고, 오법안은 《원효의 화쟁사상 연구》(홍법원, 1992)에서 “청년 시절에는 단정한 청년으로 화랑이 되었으며 서당(군대의 계급명)이 되었고”라고 하였다. 특히 군사정권기 화랑도-무사도가 제창되던 때, 원효에 관한 많은 글에서 이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1969년에는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에 의해 서울 효창공원에 ‘원효대사 동상’이 세워졌는데, ‘충효·화랑 정신’에 근거한 민족국가 이념 창출을 목적으로 한 정권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사명과 원효는 동상과 함께 호국성사로 모셔지게 된 것이다.

5) 선교(禪敎) 통합의 종조상
1937년부터 본격적인 총본산 건립 계획이 추진되고, 1941년 4월에 이르러 총독부령 제125호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이 인가되었다. 물론 조계종은 선종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전통적으로 선종 법맥을 표방해 온 만큼 도의(생몰년 미상), 태고(1301~1382), 지눌(1158~1210) 등 선사를 중심으로 종조가 논해졌고, 거기에 법맥과 거리가 있는 애매한 지위의 원효는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1941년 결국 조선불교 총본산의 종명은 조계종, 종조는 태고로 결정되자, 종명의 성격에 규정지어져 ‘선’만이 조선불교의 성격으로 이해될 것을 우려하는 불교도들의 견해 속에서 원효에 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동양대 유학 시절 조명기는 〈원효종사의 십문화쟁론 연구〉(1937)를 발표하여 “조선불교에는 횃불잡이가 없고 목탁수(木鐸手)가 없다”며 다음과 같은 의견을 표명하였다.

선교양종의 종조를 태고화상을 봉안함도 崇外學者의 作亂이며 특히 선종은 계통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조선불교는 고대교리사로부터 재조직하여야 한다. 원효로부터 출발하여 현대의 선교양종까지 일관한 조선불교가 生할 것이며, 물론 원효가 종조가 될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조선불교와 전체주의〉(《불교》 제20권(신), 1940)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전체주의 사조를 개괄하고, 현 조선불교계가 종지를 정하지 못해 이견이 분분하나 “시대성에 비추어 조사 선사 유방 속에서 신대승의 조맥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며, 원효의 사교판과 제 저서를 관통하는 통일론이 가장 적합하다고 역설했다.
유사한 견해를 보인 또 다른 인물로 허영호를 들 수 있다. 범어사 출신으로 일본 대정대학을 졸업한 허영호는 1930년대 후반부터〈조선불교의 입교론〉(1937),〈조선불교와 교지확립〉(1937) 등을 발표하며, 한국불교계가 개정해야 할 선결문제로서 ‘종명, 종지, 종조 확정문제’를 꼽으며 원효를 언급하였다. 그는 당시의 총본산 건설은 전시체제에 유리한 통일기관 수립을 목적한 일본정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음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실패를 거듭해 온 불교계 통일운동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같은 외부적인 조력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총본산 건설을 ‘조선불교 재흥의 광명’으로 표현하며 큰 기대감을 드러냈지만, 우려도 강하게 표출하며 중심이념 확정에 지대한 관심을 표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조선불교의 ‘전통적 특성’을 찾을 것을 주장하며, “1) 조선불교는 ‘일승통일(一乗統一)’에의 지향을 지속해 왔다. 하나의 특정 종파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2) 조선불교를 선종일향(禪宗一向)의 편파적 관점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종단의 주체성은 ‘조선불교사 전체’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하며, 보조와 태고와 같은 선종의 법통 형성 이전 조선불교의 큰 흐름을 형성한 것은 바로 원효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실제로 허영호는 1938년 《불교》에 원효 《기신론소》의 과목을 게재하는 등 원효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왔다.
이 같은 특성을 바탕으로 그는 원효를 거론하며 “조선불교의 재조직은 통불교로서 조선불교의 확립을 전제하지 않으며 안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조계종법 인가 후 《불교》에 연재한 〈원효불교의 재음미〉(1941~1942)에 이어진다.

曹溪一宗으로 돌아간 조선불교는 원효에게 출발한 조선교리사의 속에서 그 宗旨를 全味할 수 있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특히 이 말을 여기에 부언하는 것은 조선불교 조계종명이 발포되자 곧 慧能의 南禪으로서 또는 義玄 臨濟로서 심지어 楊岐 黃龍으로서 조선불교를 强引解釋하며 나아가서 禪宗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해석이 유행하므로서다.
그런데 특히 주의할 것은 허영호의 이러한 주장들은 언뜻 뿌리 깊은 내셔널리즘에 근거한 듯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내선일체, 천황제옹호, 전시체제 협력론이 자리하였다는 점이다. 허영호는 1937년부터 조선불교의 의미와 특성에 관한 논설을 집중 발표하며 원효를 언급했는데, 중일전쟁 발발 시 게재한 전쟁 협력을 촉구하는 글, 〈총본산의 운영〉(《불교》 32권(신), 1940)에 보이는 “조선불교조계종지에 의한 황국신민의 연성(鍊成)” 등의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있다. 즉 그의 원효 회통론 부각은 조선불교의 제국불교로 편입의 일단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최남선을 비롯한 이전의 불교도들이 일본불교와 상대화된 조선불교의 구축을 위해 ‘조선불교의 특수성과 원효-통불교’를 제창하였다면, 허영호의 경우는 ‘특수’로서의 조선불교를, ‘보편’의 불교 즉 한국·중국·일본·서역불교를 모두 아우르는 ‘대동아공영권의 불교’ ‘일본적 세계불교’로 연결시키고, 그 안에서 조선불교의 위치 정립을 고려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 종파와 지역성을 초월한 불교가 요구되었고, 원효의 교판과 화쟁론은 아주 적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소승, 대승과 각 종파의 구별이 난립함을 부정적으로 언급하며, “대동아지역에 신질서가 건립되고 있는 이때에 이 지역 내의 각파 각태의 불교를 정돈하고 지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불교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중앙불교계 주요 인사로 활약하였던 허영호는 전시기를 맞아 한국불교계의 내부적 통합과 종단의 방향설정에 주력해야 했고, ‘통일체로서의 조선불교 구축’을 필요로 하였다. 그의 통불교론의 제창은 1920~30년대 초의 내셔널리즘에 바탕한 불교전통 속 민족성의 발견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이처럼 허영호를 비롯한 근대불교도들이 창출한 원효상에는 당시 한국불교계가 맞은 역경과 굴곡, 시대적 이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3. 근대기 원효 이해의 잔상 되새겨보기

20세기 초 불교계 밖으로 나오게 된 원효는 그 후에도 정치적 사회적 활용 가치가 적지 않았다. 참고로 근대기 일본의 원효 관련 논고와 비교해보면, 당시 민족의식에 의한 한국의 원효에 대한 선택적 이해를 좀 더 파악하기 쉽다. 일본의 경우 자국 불교사 혹은 자종 전승 경위의 규명을 목적으로 교학적 측면에서 원효를 논하거나, 새롭게 발견된 자료에 기초한 저술과 생애 분석의 연구가 많다. 한국에서와 같은 민족영웅, 개혁자, 통불교론자로서 표상화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의상과 원효를 묶어 《화엄연기회권》의 주인공으로 ‘해동화엄조사’라는 표현을 쓰지만, 원효만을 잘라내서 찬양하며 조선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견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한국은 김태흡이 〈의상대사와 화엄철학〉(《불교》 제55호, 1929)에서 원효는 ‘조선 독립의 화엄초조’ 의상은 ‘외래 화엄학의 초조’로 표현하듯, 양자를 찬양하면서도 대체로 원효에 더욱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 화엄사의 방계로 취급되었던 원효가 중국 화엄과는 다른 독자의 화엄학을 세운 인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원효의 실천성도 의상의 우위를 점하는 특징으로 부각되었다.
이후에도 민족주의적 연장에서 한국사상의 맥 찾기가 열기를 띠게 되었고, 박종홍이 《한국사상사-불교편》(서문당, 1972)에서 승랑, 원측, 원효, 의상, 도선, 의천, 지눌에 이르는 고승을 묶어 그 공통점으로 ‘융화성’을 들어 사상적 계통을 보이고자 한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또한 이기영은 원효사상의 실천성을 현실에 반영하여 원효학당을 열고 《원효사상》(원음각, 1967)을 출판하는 등 원효 연구를 선도하였다. 하지만 원효사상을 알리기 위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선양된 원효는 정치적 상황과 결합된 몇 가지 코드 ‘통불교’ ‘총화사상’ ‘통일’과 맞물려 부각되었다.
통불교는 원효의 화쟁사상과 맞물려 언급되는데, 화쟁이라는 단어는 사실 《열반종요》에서 《열반경》을 둘러싼 상주(常住)와 생멸설(生滅說)의 쟁론을 논하는 화쟁문에서 단 한 번 보인다. 그러나 이문개통(二門開通), 개유도리(皆有道理) 이설개득(二説皆得), 비(非)보다도 시(是)를 강조하는 등의 논법으로부터 원효가 제 경론의 이설들을 소통시키고자 한 경향을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이 곧 화쟁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러나 조명기의 연구 등으로 화쟁이 ‘총화사상’으로 개념화되자, 그 자신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1960~70년대 유신정권의 대표적인 코드 ‘국민총화’와 맞물려 반공, 국론 단합을 외치는 데 활용되었다.
이 같은 경향은 후에 민주화와 통일운동이 성행한 1980년대 국토통일원이 개최한 ‘성원효(聖元曉) 심포지엄’에서도 확연하다. 한국 측과 외국 측 논고의 성격에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통일원 장관의 간행사에는 “법화경의 회삼귀일에 주목한 원효야말로 삼국통일의 이데올로그였다”고 쓰고 있고, 김지견의 〈해동사문원효상소묘〉 발표에는 “원효의 무애, 화쟁 사상을 조명해서 남북통일의 철학적 근거로 삼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화쟁은 ‘통일’ ‘통합’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각각의 개성을 존중하며 소통을 꾀하는 이론이기 보다, 전체를 지향하고 하나를 목표로 하는 편중된 이해의 소지를 제공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권윤혁 〈화쟁논리의 부흥과 신민족 통일이념의 정립〉(1998), 박성배 〈원효의 화쟁사상로 생각해 본 남북통일문제〉(1991)와 같이 화쟁과 민족통일은 1980년대 이후 원효를 언급한 문장에 관용구처럼 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페라, 연극, 드라마 등 대중매체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데, 이광수의 《원효대사》 이후 얼마간 소설은 발표되지 않았고, 다만 영화 〈원효성사〉(1947)의 기획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후에 이광수의 소설을 토대로 드라마가 제작되었는데, 관련 기사 “원효대사, 러에서 방영, 호전한국 오해 소지 커”(〈동아일보〉 1994)를 보면, 드라마 내용이 삼국통일전쟁에 치우쳐 있으며, 원효의 종교철학은 거의 드러나지 않아 방영의 목적이 변질되었다는 지적을 볼 수 있다.
또한 원효가 화랑의 지도자였다는 식의 언급은 여전히 많이 볼 수 있다. 소설가 동리의 맏형인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은 《화랑외사》(해군본부정훈감실, 1954)의 〈십일. 백결선생〉 장에서 원효와 원광법사 등을 친밀한 관계로 등장시켜 금을 연주하며 풍류를 즐기는 인물로 멋스럽게 그려낸 바가 있다. 픽션이기에 그의 상상은 자유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글들을 접하고 원효를 떠올릴 때 ‘그가 왜 ‘화랑’에 주목하고 그러한 저서를 지었는가?’ 그 속에 ‘왜 원효가 들어 있는가’라는 점을 함께 읽어내려는 의식이 필요할 것이다. 효창공원에 세워진 원효 동상을 올려다보며, 호국승군단이 창설되던 유신정권기에 ‘왜 저 동상이 세워졌을까?’를 한 번쯤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같은 근대부터 불교도 및 지식인들이 원효를 통해 고심했던 문제들은 현 불교계에서 부각되고 있는 문제들 즉 ‘호국불교론’ ‘조계종 정체성과 종조론’ ‘한국불교의 성격론’ ‘민족주의 불교론’과도 무관하지 않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효라는 한 인물의 이미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시대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읽히고 재창출되어 왔다.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다시 ‘우리에게 원효는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

 

손지혜 / 일본 오타니대학 역사학과 조교. 간사이대학 동아시아문화연구과 졸업(문화교섭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近代日韓仏教の交渉と元暁論〉 〈韓国近代における元暁認識と日本の「通仏教論」〉 〈忘れられた近代の知識人「金九経」に関する調査〉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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