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내가 맡은 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는 의료팀을 도와 핫팩을 할머니들 무릎이나 허리, 어깨에 얹어드리며 말벗이 되어드리는 일이었다.

그중 한 분인 김정순 할머니(당시 88세)의 초대로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대문이랄 것도 없는 마대자루를 덧댄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는 당신과 친하게 지내는 다른 할머니 두 분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동네의 허름한 단칸방 앞마당에 심어 가꾼 상추와 배추를 넣고 만든 비빔밥을 나에게 먹이고 싶으셨단다. 밤송이를 끼워놓은 쥐구멍과 바퀴벌레가 예사로 돌아다니는 주방도 심란했지만 커다란 양재기에 밥을 비벼 그릇째 놓고 같이 먹자는 말씀에 난감했다. 어머니와도 그래 본 적이 없이 까탈을 부렸던 내게는 가히 큰 시험대였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억지로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는데 할머니들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퍼졌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가게 된 것이 할머니들께는 매주 화요일은 ‘초롱이 엄마가 오는 날’이 되어버렸다. 기초생활 수급비를 받는 날이면 세 분이 함께 돈을 합쳐 소고깃국을 끓여놓기도 하고, 호떡을 서너 개 사다 놓기도 하셨다. 어쩌다 내가 하품이라도 할라치면 피곤해서 그런다며 뼈만 앙상한 무릎을 들이밀며 베고 누우라고 성화를 했다.

김정순 할머니는 이화학당을 다니신 엘리트였다. 일제 강점기,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8세에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둘러 결혼을 했는데 그 이듬해 아이도 없이 사별을 했단다. 청상과부로 수절한 할머니는 무남독녀인 까닭에 이 세상에 피붙이가 없었다. 늘그막에 나를 만난 것은 부처님의 은덕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런 할머니께 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아이들과 함께 가기도 하고 남편이 소소한 집수리도 해드리면서 몇 년을 잘 지내던 중 IMF의 여파로 남편의 사업이 기울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고향에서 큰오빠랑 함께 살고 계시는 어머니께서 노환으로 바깥출입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좁고 불편한 집으로의 이사와 함께 맞닥뜨린 경제적인 어려움은 나를 심한 우울증에 빠뜨렸다. 또한 내 어머니께서는 시골집 대문간에 앉아 앞산만 바라보고 계실 텐데 그런 어머니께도 자주 못 가는 주제에 남을 위해 봉사활동을 한다고 나서는 것이 얼마나 큰 위선인가 싶어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은 물론 복지관에도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한 주가 한 달이 되고 해를 넘기면서 나는 할머니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다행히 남편의 사업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다시 넓은 집으로 이사도 했다. 하지만 새로 장만한 집을 보여드리기도 전에 친정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이런 딸이 있는 엄마는 얼마나 행복하겠냐며 부러워하시던, 어머니보다 높은 연배이신 할머니는 어찌 되셨을까, 잠깐 스치듯이 생각났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자신을 방송국 피디라고 소개하는 아가씨의 전화를 받았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김정순 할머니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 할머니가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노인복지정책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 복지관에서 추천받은 노인이 김정순 할머니였는데 촬영을 끝낸 할머니께서 방송국에서는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않느냐며 ‘초롱이 엄마’를 꼭 좀 찾아달라고 부탁을 하더란다. 하도 간곡해서 수소문 끝에 전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로 그 피디와 함께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할머니는 나를 보자 손을 잡고 “초롱이 엄마가 갑자기 발길을 끊은 것이 뭔가 섭섭하기 때문일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죽기 전에 잘못을 빌어야 하겠기에 저이에게 부탁했어. 섭섭한 것이 있으면 늙은이가 몰라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줘. 그래도 죽기 전에 만나 사과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내가 초롱이 엄마를 만나지 못하고 죽을까 봐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몰라.” 하며 우시는 거였다. 나는 왈칵 목구멍을 가로막는 죄스러움으로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간의 상황을 말씀드리니 무책임했던 나를 원망하시기는커녕 “이제 편안해졌다니 다행이다.”를 연발하시는 할머니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좋은 소재라며 굳이 따라와 카메라를 들이대던 피디도 촬영을 접었다.

그 후 나는 다시 가끔씩이나마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할머니는 저승에 가면 먼저 돌아가신 친구 할머니들께 내 소식을 전해주겠노라 말씀하시더니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병원으로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할머니와의 10년 가까운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사전을 찾아보면 봉사활동(奉仕活動)이란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몸을 움직여 행동함’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돌보지 않기는커녕 내 기분에 따라서 봉사활동을 합네 생색내고 다니다가 내 생활이 좀 편치 않다고 할머니들께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만두었다.

 한 주 또 한 주,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시던 할머니들께서는 얼마나 쓸쓸했을까. 처음에는 어디가 아픈가 보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그러다가 당신들께서 뭔가 섭섭하게 했기 때문으로 결론을 내리셨다는 할머니들께 나는 큰 상처까지 준 꼴이었다. 그나마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오해가 풀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다행이었다.

“할머니!” 하고 들어서면 “왔다!”를 합창하며 반겨주시던, 내가 보살펴 드렸다기보다 언제나 나에게 더 큰 사랑을 베풀어주시던 할머니들. 그분들은 나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이란 것을 일깨워준 보살님들이었다. 지금도 어느 쪽방에서 낡은 선풍기 하나로 여름을 나고 있을 또 다른 할머니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문득 안부가 궁금해진다. ■

한경옥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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