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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과 성찰] 삼국유사의 땅 경주에서 살고 싶다 / 이종문
[63호] 2015년 09월 01일 (화) 이종문 10413@hanmail.net

다분히 사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세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교편을 잡는 시인’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의 꿈은 ‘경주에서 교편을 잡는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하필이면 ‘경주에서’ 교편을 잡는 시인을 꿈꾸게 된 데는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 무렵 내 인생 전체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두 가지 사건이 어느 날 문득 일어났던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1년 12월 어느 날, 신문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경주의 향토사학자 최남주 선생이 ‘운주산’에서 《삼국유사》의 현장인 혜숙사(惠宿寺) 터를 발견했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운주산은 경북 영천시 임고면과 포항시 기계면의 경계 지점에 우뚝하게 솟아 있는 산이다. 임고면에서 젊은 날을 보냈던 나로서는 운주산을 보지 않고는 단 하루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가다가도, 소 풀을 뜯다가도, 소를 타고 강물을 건너가다가도, 문득 눈을 들면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주산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신문은 바로 그 운주산에 있는 혜숙사 터를 영천 사람이 아니라 경주의 향토사학자가 발견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나는 내 고향에 있는 절터를 경주 사람이 발견한 데 대해 대단한 아쉬움 같은 것을 느꼈다. 영천 사람들은 도대체 모두 다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린 마음에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해 나는 겨울 방학에 집에 있던 아주 낡은 자전거를 타고 내가 살고 있던 임고면 지역부터 막무가내 뒤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임고면에 숨어 있는 유적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내가 죄다 발견해 내고야 말 작정이었다. 급기야 내가 책임지고 발견해야 할 영역을 최소한 영천시 전역까지 확대해나갈 예정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발견이 의지와 열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임고면 전역을 이 잡듯이 샅샅이 다 뒤져봤지만 끝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석당 최남주 선생이 《삼국유사》의 현장인 혜숙사 터를 발견한 사건은 성장기에 있었던 어린 날의 나에게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경주에서 교편을 잡는 시인’이 되기로 내 인생의 꿈을 결정하는 데도 이 사건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내 인생의 꿈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데 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고전읽기 운동’의 일환으로 《삼국유사》를 읽었던 일이었다. 물론 《삼국유사》의 일부만을 가려 뽑아 번역한 책이었지만, 그때 《삼국유사》를 읽은 감동은 정말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해 여름에 입시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었던 《삼국유사》를 손에 들고 《삼국유사》의 땅 경주를 찾았다. 경주는 내 고향 영천의 이웃 고을이었고, 왠지 경주가 좋아 중학생 때도 자전거를 타고 여러 번 가본 곳이었다. 하지만 《삼국유사》를 읽고 난 뒤에 경주에 갔을 때, 경주는 나에게 그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곳은 돌연 감동이 그 무슨 밀물처럼 뜨겁게 밀려오는 《삼국유사》의 땅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삼국유사》의 현장 가운데서 그 당시로써는 알려지지 않는 곳이 너무나도 많아서 대단히 실망스럽기도 했다. 예컨대 생각 같아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의 현장인 도림사의 대나무 숲에 가서, ‘나는 아무개를 사랑한다.’며 내가 좋아하던 여학생의 이름을 목청껏 외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딘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달도 운행을 멈추었다는 월명사의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던 오솔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경주에서 교편을 잡는 시인’이 되기로 내 인생의 최종적인 목표를 세운 것은 바로 그때 경주에서였다. 경주에서 교편을 잡는 시인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서라벌의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시를 쓰고, 《삼국유사》의 현장들을 찾아내어 감동적인 안내판을 세우고 싶었다. 일생 동안 아이들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몇 권의 시집을 쓰고, 몇 개의 안내판만 세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충분히 찾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한문학자가 된 것도 아마 그런 꿈을 이루는 데 한문학적 소양이 꼭 필요하다는 인식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언 이순(耳順)이 지난 지금의 나를 살펴보면, 훌륭한 교육자는 물론 아니지만 나는 교편을 잡는 데 성공했다. 시를 잘 쓰는 시인은 물론 아니지만, 좌우간 시인이 되기는 했다. 그러니까 ‘경주에서 교편을 잡는 시인’이라는 세 마리의 토끼 가운데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경주에서 살고 싶다는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므로 내가 학교에서 퇴직하게 되면, 경주에서 살면서 경주의 향토 사학자로 변신하여 맨 마지막 생애를 불태우고 싶은 생각이 마음 밑바닥에 아직도 숨어 있다. 그리하여 젊은 날 나의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최남주 선생이나 윤경렬 선생과 같은 삶, 그런 삶을 흉내라도 내면서 살아보고 싶은데, 내 아내가 동의해 줄지 모르겠다. ■

이종문 /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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