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호! 신난다. 스님 축하드립니다.”

“무엇인가요, 법우님? 무엇이 그리 신나는 일인가요?”

“예.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믿는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그런데 저희같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힐난하듯 말하기를 신이 있다는 증거를 내놓아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그것이 오래된 문제였던지 신학자들도 신의 존재를 입증하느라 오랜 노력을 했다네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그런데 결론은 신이 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축하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렇다고 지금까지 신을 믿어온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렇지 않을까요?”

“하하.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요?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으니 신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위 이야기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 관한 불교인들의 느낌이 들어 있다. 그럼 신을 믿지 않는다고 알려진 불교의 경우는 어떨까? 위 이야기를 기독교인의  시각에 맞춰서 구성해보면 어떻게 진행될까?

“야호! 역시 우리가 제일이야.”

“무슨 일인가요, 형제님? 무엇이 제일이라는 것인가요?”

“예. 위대하신 하느(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한 행복조건인데 그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특히 세계 4대종교에 들어가고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큰 종교라고 하는 불교인들이 부처를 따르잖아요?”

“그런데요?”

“그런데 불교의 연대를 보니까 올해가 불기 2559년이라고 해서 부처님이 2559년 전에 태어난 줄 알았는데 아니라네요.”

 “그럼 언제 태어났대요?”

 “불기는 부처가 세상을 떠난 해부터 치기 때문에 생애 80년을 더해야 부처의 나이가 나온다네요.”

 “그래요? 예수님은 태어난 때부터 계산하는데 왜 죽은 때부터 계산하나요?”

“부처는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아는 것은 탐냄, 성냄, 어리석음을 다 버리면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네요. 그리고 80세에 죽어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중생이 아니라 부처인 기간만을 계산하기 때문에 그렇다는군요.”

 “그런데 왜 우리가 제일이냐고요?”

“부처도 피조물이라 죽는 것은 당연한데, 부처가 되어서 영원히 사나 했더니 80세에 죽었고 부활하거나 다시 태어나지 않았으니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나라에 살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제일이지요.”

제 논에 물 대기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말한다.

신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했지만 반대로 신이 없다는 증거를 내놓은 사람도 없다. 증거는 과학적으로 검증되고 역사적으로 사실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종교의 특정 교리를 자연과학의 이론으로 비교해서 맞아떨어지면 그 종교의 교리가 과학적이라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으니 모양새가 좋지 않다.

필자는 1988년에 쓴 〈연기설의 입장에서 본 불안정성(entropy 증가)원리 연구〉라는 학위논문에서 불교의 연기설은 이미 2천 년 넘게 검증해 온 진리이므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연기설의 이론에 맞는다면 그것이 진리적이라는 기준을 새로 대었다.

신앙의 사실이 반드시 과학적 사실이거나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과학적 사실이 신앙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 신앙적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이라고 믿는 가운데 사실이 되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흔히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현상의 것들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인 양 착각하기 일쑤다. 그 착각을 제거하느라 붓다가 평생 노력해 가르친 것이다. 그것도 뭔가 모자란듯하여 여러 부파와 발달 불교의 사상가들이 노력해온 것이다. 초기경전뿐 아니라 《금강경》 등에 나오는 상(相)이 없다거나 없애라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것이다.

불교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열반(涅槃, nibbana, nirvana)을 한번 생각해보자. 위에서 말한 바대로 열반이라는 말은 본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안 것을 바르게 깨달았다[正覺]고도 하고 열반을 얻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번뇌의 묶임에서 벗어나[解脫] 자유롭고 행복함을 말한다. 그것이 잠시 잠깐이 아니라 오랫동안 아니 무한히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요즘 말로 지속 가능한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번뇌의 묶임은 같은 속성을 지닌 것 혹은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될 때 모여서[集], 이뤄지는 것[行]을 말한다. 이뤄지는 것은 반드시 모여야 가능하다. 모이는 것은 같은 속성을 지녔거나 지니게 될 때 모이게 된다. 또, 모인 것은 반드시 흩어지고 이뤄진 것은 스러지게 되어 있다. 같은 속성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게 될 때 그러는 것이다.

그 속성들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설명하는 경전들에서는 세 가지로 말한다. 감각욕망[欲愛], 존재욕망[有愛], 비존재욕망[無有愛]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의 대표적 활동이 모임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사성제의 두 번째 지분이 붙잡고 집착하는 집(執)이 아니라 모이는 집(集)이라 하는 것은 잘 살피는지 궁금하다. 모이고 흩어짐이 일어나지 않아 이뤄지고 스러짐이 없어진다면 틀림없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가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다시는 태어나지 않은 인물이 바로 샤카무니 붓다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그것은 입증할 수 있는 것인가? 신의 존재를 입증하듯이 입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애석하게도 현실적으로 열반을 입증하는 방법은 없다.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입증할 수 없다. 태어나야만 입증이 가능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생각할 것은 진리는 검증할 거리가 아니라 체험할 거리라는 것이다. 다만 믿는 자에게 그것은 가능한 것이니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는 스스로에 달려 있다. 물론, 그렇게 믿게 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은 학자들과 체험적으로 앞선 이들이 해야 한다. ■

 

법현 / 태고종 열린선원 원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