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

1. 인간은 이기적 행위자이면서 아견(我見)의 소지자다
   -불교적 인간관

무궁화와 국화(菊花)가 무궁하지 않듯이 국가와 민족 역시 영원·절대의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인간이 이름 지어 부르는 일체-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없어지기 때문이다. 들녘의 풀꽃은 주로 자연의 힘으로 피지만, 특정 국가와 민족은 집단의 공동 기억과 형성력을 토대로 삼아서 생성되고 유지된다. 국가와 민족을 형성하고, 그 생명을 유지하려는 태도나 욕망은 자연적, 본능적, 생리적, 습관적인 것으로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국가나 민족을 형성하고, 그 생명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내셔널리즘 또는 민족주의라고 해보자. 우리에게 이토록 친숙한 내셔널리즘을 문제 삼는 이유는, 그것이 갖는 이기적 성향이 이웃과의 화(和)를 잃게 하고 강력한 적개심을 조장해서 분쟁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적과 친구로 나누는 이기적인 집단성향은 근대의 국민국가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개인과 집단 속에 거의 상존해 왔다. 이기성과 공격성이 자리 잡은 심층 심리를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는 장식(藏識)이나 팔식(八識)이라고 한다. 이 장식은 우리의 현의식(現意識)과 기억의 저장고로서 몸·입·뜻(身·口·意) 3업의 원천이고 힘이지만, 그 진상이 우리의 일상적인 현의식에는 대부분 은폐되어 있으므로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장식이 경계를 만나 이를 애(愛)와 불애(不愛), 아(我)와 진(塵)으로 곧 친구와 적으로 분별하는 것을, 지식의 최초의 모습[智相]인 칠식(七識)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중생이 대상을 만나서 최초로 형성하는 분별지는 애·불애의 구분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능력이 생존에 유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이기적 집단성향이 진화론적으로 일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부처는 인간이 오랫동안 형성해온 집단성향인 아진분별심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면서 이를 버리라고 가르친 분이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내셔널리즘은 개인의식에 깊이 내재해 있는 아진분별이 근대국가의 출현과 함께 집단성향으로서 표출된 것이다. 우리 국민 개개인과 TV와 영화, 심지어 비디오 게임 등 거의 모든 매체가 내셔널리즘의 형성과 유지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국민-중생이다. 국사(國史)는 당연히 아견(我見)이니, 논쟁 중의 과거사를 두고 한일 간에 하나의 ‘올바른’ 역사인식은 불가능하다.

 2. 부처와 간디 그리고 내셔널리즘

부처가 16세기의 임진왜란, 20세기의 일제 침략과 6·25 전쟁을 목격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위를 했을까? 우리 근대의 여느 스님처럼 살인하는 전쟁터를 외면하고 수수방관하며 산속에서 도만 닦았을까? 《숫타니파타》의 《자비경 (Mettasutta)》에는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모든 생명에 대해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내라.”(149)는 구절이 있다. 부처는 이런 구절을 되뇌며 전투 중인 아군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설법했을까? 그는 민족주의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신라의 원효(617~686)는 《대승기신론소》에서 나와 남을 떠나는 자비[離自他悲]를 무연지비(無緣之悲)라고 불렀다. 원효는 자신의 화쟁사상(和諍思想)에 근거해서 조선, 일본, 명 삼국 간의 전쟁을 평화로 바꿀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마하트마 간디(1869~1948)와 그의 비폭력 운동을 돌아보게 한다.

간디는 그의 사상과 행위에서 아주 불교적이다. 그는 1927년 스리랑카(당시 실론) 콜롬보의 한 대학교에서 불교도들에게 연설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간디는 독실한 종교 연구를 위한 조건으로서 다섯 가지의 규칙을 제시하고, 미물의 생명조차 사랑해서 석존의 정신을 계승하자고 권유했다.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예비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연설했다.

힌두교에는 올바르고 독실한 종교 연구를 위한 서너 가지의 조건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따마가 힌두교도 중의 힌두교도였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그는 그를 둘러싸고 있던 화석화된 신앙에 생동적인 개혁을 도입했습니다. ……그 조건들이란 종교 공부를 하려는 남녀가 우선 준수해야 할 덕목으로 다섯 야마로 불립니다. 그것들은 자제의 다섯 규칙으로서, 여러분에게 반복해 보겠습니다. 첫째, 범행(梵行, brahmacharya), 곧 순결입니다. 둘째는 진리(satya)이고, 세 번째는 불상해(ahimsa), 곧 절대 순진무구로서 파리 한 마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일입니다. 다음 조건이 불투도(asteya)인데,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훔치지 않기’만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것이 아닌 것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해 탐욕의 눈길을 던지는 일조차 절도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무소유(aparigraha)입니다. ……고따마는 지식을 얻기 전에 규칙들을 지켰는데, 당대 사람 중 거의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석존은 이 규칙들의 정신을 지켰습니다.

간디가 부처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예비 조건으로서 권유한 다섯 규칙은 우리 불교의 오계와 아주 흡사하다. 오계에는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가 있는데, 출가자라면 불사음 대신에 불음을 지켜야 한다. 간디의 다섯 규칙에는 무소유가 추가되어 있고, 진리는 불망어와 거의 같은 것이다. 간디의 규칙에 불음주가 없지만 그는 술을 검은 마법이라고 부르며 아주 엄격하게 금지했다. 연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간디는 비천한 생명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 여러분은 고따마가 가장 비천한 피조물도 자신과 동등하게 대접하라고 세상에 가르쳤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땅 위를 기어다니는 미물의 생명조차도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저 위대한 성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진리를 살아갔습니다.

간디는 부처의 정신이 미물의 생명이라도 자신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말하며, 육식을 금지한 것이다. 어떤 불교도들은 남이 죽인 동물은 먹어도 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핑계일 뿐 그것도 동물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는 행위라며 간디는 비판하고 있다. 힌두교에서 여전히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도 육식을 위한 편법이라고 비판했다. 간디의 비폭력(아힘사) 운동은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을 정치적인 차원에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간디의 내셔널리즘은 부처의 내셔널리즘일까?
간디의 내셔널리즘은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의 연장이다. 그래서 그의 내셔널리즘은 내이션이나 민족의 생존을 위한다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나의 내셔널리즘은 우주만큼이나 광대합니다. 그 범위 안에는 저급한 동물에서부터, 지상의 모든 나라까지를 포함합니다. ……나의 내셔널리즘은 전 세계의 복지를 포함합니다. 나는 나의 인도가 다른 나라들의 잔해를 밟고 일어서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물리력을 토대로 삼는 헌법의 기초에 공범자가 도저히 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것입니다.(1925년)

이와 같은 내셔널리즘은 물리력에서 그 토대를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간디는 물리력에 토대를 두는 헌법의 기초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비폭력을 보편 진리로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력·경제력·군사력 등 일체의 물리력을 포기해야 하고, 자신이나 인도 전체를 희생할 수 있는 각오와 훈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지상의 모든 나라를 포함한다는 간디의 우주적 내셔널리즘과 그의 행위에 대해 일부의 힌두교도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힌두교도 내셔널리스트 고제(Nathuram Godse, 1910~1949)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한 이후 힌두교도인 간디가 무슬림을 편애한다고 믿고서 그를 죽였다. 고제는 사형당할 때까지 암살을 뉘우치지 않았다.

일체의 생명에 대한 자비심은 사덕(私德)일 뿐, 국가 사이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다.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그중 하나다. 그는 《문명론지개략》에서 국익의 추구가 문명의 대세라고 보고, 일시동인(一視同仁)이나 사해형제(四海兄弟)와 같은 종교의 가르침은 나라의 기초가 될 수 없는 사덕에 불과하다고 하고, 필요한 것은 보국충정과 건국독립, 그리고 애국심이라고 했다. 유키치는 간디를 시대착오자로 불렀을 것이다.

간디의 모병운동과 ‘불가피한’ 폭력에 대한 도덕적인 지지

간디는 비폭력 원리를 견지했다. 하지만 비폭력 원리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그리고 불가피한 폭력의 지지 여부를 두고 종종 딜레마를 경험했다. 가장 심각한 딜레마는 모병 운동에서 느꼈다. 실제로 모병한 것은 1918년 유럽의 서부전선이 무너지고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하고 있을 무렵, 같은 해 4월 말 인도 총독 첼름스포드(Che-lmsford Lord, 1868~1933)가 소집한 전쟁회의에 참석한 이후였다. 간디는 〈모병호소문〉(1918. 6. 22)에서 인도가 신민(subject)이나 속국이 아니라 제국의 동반자가 되어야 하고, 동반자가 되는 최선의 길은 인도인이 군대에 자원하여 제국의 방어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말했다.(CWMG E 17: 83~84 참조) 그리고 케다 지역의 연설(1918. 7. 14)에서 영국 편을 들었다. 독일이 승리한다면 패배자를 억압하고 핍박할 것이지만, 영국인은 자유를 사랑하고, 인도가 희생하면 영국이 양보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CWMG E 17: 130 참조) 그의 오랜 동지 영국인 목사 앤드루스 찰리(C. F. Andrews, 1871~1940)는 간디의 모병에 반대했다. 간디는 설득 조의 편지(1918. 7. 6)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주 특별한 경우 필요악으로서 전쟁을 치러야 할 것 같다. 마치 육신이 필요악이듯이. 만일 동기가 옳다면 전쟁은 인류의 이익이 될 수도 있고, 비폭력주의자라고 해서 수수방관하며 무관심하게 쳐다보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선택한 다음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CWMG E 17: 124) 간디는 자서전(1925~1928)에서 모병 당시에 심각한 ‘정신적 딜레마’를 겪었다고 했다.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 아힘사와 맞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는 너무도 환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제 의무가 무엇인지를 늘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애호자는 어둠 속을 헤매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많다.”(CWMG E 44: 351) 그는 이어서 사람이 먹고 마시고 산다는 일 자체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힘사, 곧 생명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말하면서 1차 세계대전 참전도 그런 사례로 보았다.(CWMG E 44: 351) 간디 손자인 라즈모한 간디 교수에 따르면, 간디는 10주간의 모병으로 100명의 명단을 작성해서 제출했는데, 그 첫 자리에 간디, 그다음이 파텔, 그리고 아슈람 소속의 간디 동료도 많았다고 한다.

간디는 모병 행위와 아힘사 원리 사이에서 딜레마를 느끼면서도, 인도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독일의 진격 앞에 영국을 지키기 위해서 모병하기로 했다. 스테거와 라즈모한 간디는 모병 운동을 민족의 이익과 비폭력 원리 사이의 충돌로 보았다. 영국인 역사가 퍼시벌 스피어는 다음과 같이 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인도인의 의식에 혁명을 불러일으켰으며, 마하트마 간디의 출현을 낳았다. 1914년 이전에는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1918년 이후로는 국민회의가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주도권의 장악에는 인도인의 참전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40년 8월경, 2차 세계대전 초기 유럽 전체가 전쟁에 빠졌을 때, 간디는 영국에 도덕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 점에 대해 누군가가 질문했고, 그에 대해 간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모든 전쟁이 전적으로 나쁘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두 전쟁 당사자를 면밀하게 관찰하면 한 편은 옳고, 다른 한 편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가령, 갑이 을의 나라를 강탈하려고 한다면, 을은 분명 피해당사자이다. 양쪽은 무력으로써 싸운다. 나는 폭력적인 전투를 믿지 않지만, 을의 명분은 정당하므로, 나의 도덕적인 도움과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하리잔〉 1940. 8. 18 CWMG E, 79: 110)

간디가 임진왜란의 전말을 알았다면 그 전쟁이 나쁘다고 하면서도, 이순신과 사명당에게 도덕적인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3. 이순신의 통분(痛憤)과 살생: 민족주의의 원상

역사는 불살생의 계율을 지키고 무연지비를 실천하기에는 너무 사나운 때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외적(外敵)이 침략해서 백성을 어육으로 만든 때가 특히 그렇다. 우리 역사에 가장 깊고도 넓은 영향을 준 외침은 임진왜란이었다. 어떤 학자는 임진왜란에 대한 집단 기억을 ‘proto-nationalism’, 원시 민족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원상(原象)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의 중심에 민족의 영웅으로 불리는 이순신 장군(1545 ~1598)이 존재한다. 그는 왜적(倭敵)의 침략으로 백성이 어육이 되는 일에 대해 통분하고, 왜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자신의 다양한 감정을 솔직히 표현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종종 살인으로 나가는 분노이다. 한자로는 분(憤), 완(惋), 통(痛)이다. 분노, 원통, 아픔이다. 이순신은 때때로 두 개의 한자를 묶어서 통분(痛憤), 분완(憤惋), 통완(痛惋)을 사용하기도 했다.

왜적의 함대가 부산 영도 앞에 침공해온 것은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이었다. 사흘 뒤의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부산의 거진(巨鎭)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不勝憤惋)”고 했다. 1593년 2월 10일(음력) 일기에는 적을 섬멸하지 못한 일을 두고 ‘통분통분(痛憤痛憤)’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적을 회피하는 아군에 대해서도 통분한다고 했다(p.90). 선조가 피난하는 사정을 듣고는 크게 통곡(痛哭)했다(p.107).

이순신은 하급 관청에 내린 한 감결(甘結), 곧 공문에서 임진왜란을 섬 오랑캐가 일으킨 변(島夷之變)으로 규정했고, 이런 흉변이 우리 동방예의지국에 갑자기 닥쳐왔다고 했다. 임금님의 수레는 서쪽으로 옮겨가고, 백성은 물고기와 짐승의 고기처럼 살육당했다(生靈魚肉)고 했다. ‘어육’이란 백성이 물고기와 짐승의 고기처럼 남에게 짓밟히거나 무참히 살육당하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1594년 갑오년 2월 9일 일기에는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죽여서 식인하는 참혹한 상황[相殺食之慘]도 적혀 있다(p.158). 일주일 뒤에 이순신은 “나라를 위하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爲國之痛愈甚)”고 했고, 류성룡에 대해서는 감개함과 그리움[慨戀]을 드러냈다(p.159).

이순신은 분노와 고통, 그리고 기쁨과 그리움을 표현했지만, 이것들은 모두 ‘나라를 위한 아픔’과 관련된 것이었다. 정유년(1597년) 10월 14일 일기에서 장군은 셋째 아들 면(葂)이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집안 편지를 받고서 하늘이 불인(不仁)하시다 하고 목 놓아 통곡했다(失聲痛哭痛哭)고 적고 있다(p.424). 이순신에게 왜군은 나라와 백성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원수이기도 한 셈이다.

전투의 목표는 적군의 살상이다

이순신은 수군을 지휘하면서 섬 오랑캐나 왜놈들(倭奴)이 일으킨 흉변을 극복하고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적선을 파괴하고, 활을 쏘고, 적장의 수급을 베었다. 여러 적의 목을 벤 날 일기에는 “아주 기쁘다(多喜多喜)”고 적었다. 항복한 왜놈들을 참수하기도 했다(p.243, p.299). 부대에서는 아주 엄격한 군율을 적용했다. 계사년 2월에는 도망간 80여 명의 격군(格軍, 노 젓는 군사)에게서 뇌물을 많이 받고 붙잡아 오지 않은 두 사람을 처형했다(2월 3일). 적과 내통한 자와 선비 집안의 처녀를 강간한 자 모두 목을 베어서 효시했다(p.429, 1597년, 정유년 10월 30일). 1593년 10월 27일의 시 〈진중음(陣中吟)〉에서는 “원수 모조리 섬멸할 수 있다면 죽음일지라도 마다하지 않으리(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라고 읊조렸다. 그는 종종 술을 걸고 활쏘기 시합도 하고, 때로는 술을 심하게 마셨다.

불교 관련 일기

《난중일기》에 불교에 관한 내용은 드물다. 승려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임진년(1592) 3월 4일(음력)의 일기에 나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0일 전인데 전쟁 준비와 관련되어 있다. “승군들이 돌 줍는 일에 부실해서 우두머리 승려에게 곤장을 쳤다(僧軍拾石不實, 故首僧決杖)”고 했다(p.58. 일부 수정). 이 구절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임진왜란 전에도 승군이 존재했다는 점, 이순신이 전쟁 준비를 위해서 승군을 부역(負役)에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임무 수행에 부실하면 수승에게 곤장을 칠 수도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사명당이 적진을 오가면서 간단한 기록[草記]를 보냈다는 내용도 나온다(갑오년 5월 16일, p.177). 전쟁터에서 장군과 승려가 서로 연락한 것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10여 차례 점을 친 것을 적고 있다. 점괘에 대한 이순신의 해석은 당시의 사회 풍조를 짐작하게 하고, 불교에 대한 장군의 태도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장군은 1594년 9월 1일 아침 일찍 세수하고 고요히 앉아서 부인의 병세에 대해 점을 치고 ‘승이 환속하는 것과 같다(如僧還俗)’는 괘를 얻었다. 다시 점을 쳐서 ‘의심한 일이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괘를 얻었다. 장군은 이 두 괘를 모두 매우 길한 괘[極吉]로 보았다(p.201; p.585). 그날 아산에서 어떤 기쁜 소식이 왔는지 일기에는 없다.

‘여승환속’이 극길의 괘라면, 출가하는 것은 극흉의 괘란 말인가? 여승환속이 ‘극길’이라는 점사(占辭)는 이순신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당시에 유통되던 점서(占書)에서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니, 조선 중기의 일반 정서, 특히 유자들의 일반 정서로 볼 수 있다. 이순신 또한 조선 성리학 전통에서 성장했던 장군이 아닌가.

이순신의 통분에는 삼독심 중의 하나인 ‘진(瞋)’이 있다 하고, 원수라도 죽이는 것은 살생을 범한 것이고, 엄격한 군율 집행은 무자비하고, 부하들과의 술자리에서 폭음한 것은 불음주의 위반이라고,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승환속’ 괘를 극길이라고 기뻐했던 이순신을 가리켜 반(反)불교인이라고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에 대한 집단 기억이 민족주의의 원상이고, 이순신의 행동은 우리의 민족주의와 민족감정의 원상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왜란에 대한 집단 기억은 《임진록》이란 전쟁 이야기를 통해서 강화되고, 20세기에는 만해의 시조와 변영로의 시 〈논개〉를 통해서, 그리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5)과 〈징비록〉(2015) 등을 통해서 상속되고 있다. 이런 기억은 보통 분노와 적대감도 동반한다.

4. 사명당: 정당한 내셔널리즘의 표본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은 국가의 위기에 의승장으로 변신하여 의병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며 전후의 대일 강화(외교) 등에서 활약했다. 사명당은 〈봉이수사(奉李水使)〉라는 칠언절구를 지어서 이순신의 생신을 기렸다. 그런데 아래 두 시는 사명당이 의승을 일으킨 동기를 보여준다.

天寒旣至   추운 날씨 이미 이르러
白雪如斗   흰 눈이 오네 함박만 하게
赤頭綠衣兮絡繹縱橫   적두와 녹의가 종횡으로 줄을 이어
魚肉我民兮相枕道路   어육된 우리 백성 길가에 즐비하네
痛哭兮痛哭   통곡하고 통곡하나니
日暮兮山蒼蒼   날은 저물고 산은 창창하네
遼海兮何處   아득한 바다는 어느 곳에 있는고
望美人兮天一方   하늘 한쪽 임금님 바라보네
— 〈시월 삼일에 눈이 오기에 회포를 적다(十月初三日雨雪寫懷)〉

十月湘南渡義兵   시월에 상남 건너는 의병이여
角聲旗影動江城   뿔피리 소리 깃발 그림자 강성을 뒤흔드네
匣中寶劒中宵啂   상자 속의 보검이 한밤중에 우나니
願斬妖邪報聖明   요사의 목을 베어 성명에 보답하려고
— 〈임진시월에 의승을 이끌고 상원을 건너다
(壬辰十月領義僧渡祥原)〉

이 두 수 모두 임진왜란 발발 6개월 뒤쯤의 시다. 6월 14일 평양성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의해 함락되었고, 6월 23일에는 중국 땅에 인접한 의주에 행재소를 설치했다. 첫 시는 10월 초 눈 내리는 날 어육이 된 우리 백성과 북쪽으로 파천한 임금[美人]을 생각하면서 느낀 감상(感傷)을 적은 시다. 적두와 녹의는 왜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육처럼 짓밟힌 백성과 파천한 임금은 의병을 일으키고 칼을 뺀 직접적인 동기로 보인다. 사명당은 두 번째 시에서 의병이 칼로써 ‘요사’의 목을 베는 것은 임금에 보답하는 길로 보았다. 적을 ‘요사’로 부르면서도 분노라는 말 대신에 “상자 속의 보검이 한밤중에 우나니”라고 표현했다. 전장에서 때때로 선정하며 분노를 좀 삭여서 그랬을까?

사명당 나이 51세가 되는 갑오(1594)년 9월에 선조에게 올린 〈갑오상소문〉의 전반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죄인(無父無君之罪人)이 되었습니다.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오면 모두 성명(聖明)의 덕택이었습니다. 하오니 감히 중의 몸이라고 해서 스스로 나 자신을 소원하게 여겨, 밥 한 번 먹는 동안이라고 어찌 군부(君父)를 잊어오리까. 통탄스럽게도 이 훼갈(虺蝎, 독사와 전갈) 같은 무리들이 큰 나라를 제 마음대로 해쳐서 생민이 어육(肆毒大邦 生民魚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족히 말할 것도 못되옵고 더욱이 종사(宗社)가 몽진하고 임금의 행차가 파천까지 하셨사오니 혈기가 있는 자라면 그 누가 분격해서 팔뚝을 걷어 올리지 않으오리까(莫不扼腕). [중략] 신은 본래 미록(고라니와 들사슴)의 몸(臣本麋鹿之身)으로서 병가의 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하오나 적 하나라도 죽여서(殺一敵) 성상(聖上)의 망극한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이오니 어찌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들에게 뒤지오리까.

‘무부무군’은 중국 당나라의 한유 이래로 유자들이 출가승을 두고 비난하는 정형구와 같은 것이고, 의관을 갖춘 사람들은 유자를 가리킨다. 사명당은 유자에 반하여 스스로 죄인임을 밝힌 것인데, 승려로서 평소에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전시에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라서 그런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나라를 마음대로 해치고 생민을 어육으로 만든다고 해서 왜인을 독사와 전갈의 무리라고 불렀고, 적을 죽이는 것은 왕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로 보았다. 혈기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분격해서 팔뚝을 걷어 올린다’고 말했는데, 이순신이라면 통분한다고 했을 것이다.

본래 미록의 몸 곧 자연 속의 몸인 사명당이 의승장이 된 것은 이미 커다란 변신[飜成]이었다. 그런데 임란 후 1604년 일본으로 가는 사신이 되기 위해서 또 하나의 분신과 또 한 번의 변신이 필요했다. 그런 분신에 대해 사명당은 〈죽령을 넘으며(踰竹嶺)〉를 지었다.

庚雨初晴嶺嶠秋   장맛비 비 막 갠 죽령 고개의 가을
恭承朝命下南州   조정의 명 삼가 받고 남주로 내려가네
分身百億誰云妄   백억의 분신을 누가 거짓이라 하는가
離幻飜成博望侯   이환이 바뀌어서 박망후가 되었는걸

백억의 분신이라! 구제해야 할 중생의 사연이 백억 가지라면 그만큼의 분신이 필요하다. 칼을 찬 몸을 차마 화신(化身)이라고 부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분신이 거짓일 수는 없다. 중생의 고통이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환은 사명당의 자(字)이다. 헛것[幻]을 떠나 진리에 도달하고 싶어서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그런 이환이 조정의 명을 받아 몸을 바꿔서 왜적과 싸우다가, 이제 박망후처럼 외교관으로 변신한 것이다. 박망후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 장건(張鶱, ?~기원전 114)의 봉호(封號)이다. 장건은 한 무제 때 흉노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왕에 의해서 박망후로 봉해졌다. 사명당은 장건이 박망후로 변신한 것에 자신의 변신을 빗대어 보았다.

분신에 대한 자각은 미록지신과 같은 본신(本身)이나 실신(實身)에 대한 자각과 함께 온다. 사명당은 본신과 분신 사이에서 때때로 회의나 딜레마를, 심하면 수치를 느낀 것 같다. 〈삼가 서울에 있는 여러 재상들에게 올려 도해시를 청하다(謹奉落中諸大宰乞渡海詩)〉라는 시의 한 구절, 곧 “석장 날리며 병사를 말한 잘못도 애당초 부끄러워(飛錫初羞誤說兵)”라는 구절이 수치를 말하고 있다. ‘석장(錫杖)을 날리며’ 곧 승려로서 돌아다니면서 병사(兵事)를 말한 것을 수치라고 했다. 이순신에게는 찾을 수 없는 수치심이다.
이러한 수치심에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김진영 교수가 〈사명대사 유정의 인간상과 시 세계〉라는 논문에서 말한 귀향의식에 이를 것이다. 임진전쟁이 끝난 이듬해 기해년(1599)에 쓴 시 〈기해년 가을에 변주서와 헤어지며(己亥秋奉別邊注書)〉에 귀향의 마음[歸心]을 토로하고 있다. 이런 귀심은 〈전라 방어사 원장포에게〉에서는 “돌아갈 한 생각(思歸一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5. 한용운이 본 ‘석가의 정신’은 민족을 초월한다

한용운은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제출해서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요구하기도 했고, 이순신과 을지문덕을 기리는 시조를 짓기도 했다.

이순신 사공삼고
을지문덕 마부삼아
파사검(破邪劍) 높이 들고
남선북마 하여볼까.
아마도 님 찾는 길은
그뿐인가 하노라.(전집 1: 97)

한용운은 이렇게 이순신과 을지문덕을 기리면서도, 〈석가의 정신-기자와의 문답〉(1931년)에서는 석가를 민족주의자로 부르는 일을 한사코 거부했다. 기자는 먼저 석가께서 오늘날 조선에 태어나셨더라면 조선 현실을 보고 조선 사람의 구제를 위하여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어서 무슨 결사 운동을 한다든지……” 하지 않았을까 하고 묻는다. 만해는 “조선 일만을 아니 하시겠지요.”라고 대답한다. “전 우주의 혁명을 기도하는 것이 부처님의 이상이었으니까, 비단 조선 한 곳만을 위하시어 분주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고 한다. 기자는 만해에게 “민족의 한계도 국역도 혈통도 전혀 부정하신단 말씀입니까?” 하고 되물으면서 석존이 인도의 민중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셨음을 지적하니, 만해는 대답한다. 그것은 가까운 곳에 마침 인도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러하신 것, “유독 인도인만을 골라 가지고서 구제하신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앞에는 일체의 제한과 일체의 후박(厚薄)이 없습니다. 그이가 구제 운동을 일으킨 것은 전 우주의 만유가 오직 그 대상이 될 뿐”이라고 말하고(2권, p.291), 만유에 사람, 짐승, 산천초목, 강과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와 자라를 포함시켰다. 기자는 “간디는 불교도입니까?” 하고 묻는다. 간디라면 ‘나는 정신적으로는 100% 불교도’라고 대답했겠지만, 이 질문에 대한 만해의 대답은 없고 ‘하략’이라고만 적혀 있다. 기자는 또 한 번 석가께서 조선에 나셨더라면 민족 사상을 가졌을 것이라고 하자, 만해는 “우주의 혁명을 일야(日夜) 염두에 두시는 분에게 무슨 지역적으로 국한한 특수 운동이 있었겠습니까.”라고 응수한다(p.293). 기자는 석존을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만해는 끝까지 석가의 구제 대상이 전 우주의 만유임을, 그가 우주의 혁명을 염두에 둔 분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간디의 우주적 내셔널리즘을 연상시킨다.

민족 위에 부처를 두는 일은, 부처의 정신이 민족주의라는 집단성향으로부터 개인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지키게 하는 근거가 된다는 의미에서도 아주 중요하다. 만해는 석존에게서 민족을 넘어서서 전 우주의 만유를 대상으로 삼는 정신을 보았고, 간디는 힌두와 무슬림들의 집단성향에 도전하다가 같은 힌두교도의 총에 죽었다.

6. 류성룡이 주목한 신숙주의 유언:
   ‘일본과의 화(和)를 잃지 마소서’

외적이 침략해서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 때 혈기가 있는 자라면 팔뚝을 걷고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방책은 침략이나 전쟁을 미리 막는 것이다. 최선의 방책은 무엇인가? 화(和)를 도모하는 것이다. 류성룡(1542∼1607)이 《징비록》에서 제시한 후환을 경계하는[毖] 여러 방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징비록》의 권1에서 성종(成宗)에게 남긴 신숙주의 유언-“원컨대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화를 잃지 마소서(願國家毋與日本失和)”-을 소개하고, 이순신의 《난중일기》와는 달리 임진전쟁의 전사(前史)를 기록해서 전쟁의 중요한 발단[始]의 하나를 일본과의 실화에서 찾으려고 했다.

《징비록》의 권1에 나오는 두 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첫째, 신숙주의 유언에 감동한 성종은 일본과의 화목을 닦기 위해서[修睦] 부제학 이형원(李亨元)과 서장관 김흔(金訢)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들이 쓰시마에 이르러 풍랑에 놀라 병을 얻었다고 보고하니 사신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보면 현해탄의 풍랑 앞에서 화목을 위한 노력이 꺾이고 말았다는 기록이다.

《징비록》은 다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두 차례의 분노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전쟁의 직접 원인으로 볼 만하다. 첫 번째의 분노는 임진전쟁이 발발하기 6년 전의 것이다. 일본의 66주를 무력으로써 통일한 히데요시는 외국을 침략하려는 뜻을 품게 되었는데, 그는 일본국의 사신은 조선에 가는데 조선 사신은 오지 않는다고 하며, 이는 “조선이 우리나라를 무시하는 것[비아(鄙我)]”이라고 하면서(p.100),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에게 자신의 국서를 주어서 조선에 파견했다. 그런데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국서의 언어는 거만[倨]하고, 사신 야스히로의 행동은 오만[倨傲]했다. 그래서 국서에만 답을 하고 물길에 어둡다는 이유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야스히로가 귀국해서 이를 보고했고, 히데요시는 대로하여 그와 일족을 죽였다. 이것이 《징비록》에 기록된 최초의 분노와 살인이다. 조선이 사신을 파견했다면 히데요시가 침략하지 않았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류성룡은 징비의 다른 대책으로서 조선의 국방정책 근본, 장군의 선택, 군대의 조직과 훈련 방법을 언급하고, 일본의 허실에 대한 정보의 필요성도 지적했다.

히데요시의 두 번째 분노는 수치심을 동반하고 있다.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일본 승려 겐소(玄蘇)가 서울에서 김성일에게 들려주었던 다음 대화에 나온다. “중국은 오랫동안 일본과 관계를 끊은지라 일본은 조공을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일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노하고 수치스럽게 여겨서[憤恥] 군대를 일으키려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이 먼저 명에 청하여 일본이 명에 조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도록 해 준다면 틀림없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pp.148-149) 이 말에 대해 김성일은 대의로써 꾸짖었다. 이에 겐소는 과거사 문제를 거론했다. 곧 고려 시대에 조선이 원나라 군사와 함께 일본을 쳤으니 이에 대해 일본이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선 측은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했고, 서로 틀어진 채 겐소 일행은 귀국했다. 16세기 임란 직전에도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13세기에 일어난 일을 두고 과거사 논쟁이 있었다.

바로 다음에 류성룡은 1591년 여름에 있었던 조선 조정의 분노와 대마도주의 불만을 적고 있다.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宗 義智)가 부산포에 있던 조선 장수에게, 일본은 대명국과 소통하고 싶은데 조선이 이러한 뜻을 명나라에 전해 주지 않는다면 두 나라는 화기(和氣)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했다(p.149). 조선의 장군은 이를 조정에 보고했지만, 조정은 도리어 일본과 사신을 주고받은 것을 꾸짖고 일본 측의 언동이 거칠고 거만한 데 분노하고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았다[怒其悖慢不報]. 소 요시토시는 답신을 기다리다가 얻지 못하고 원망하면서[怏怏] 돌아갔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임진전쟁의 발단으로 히데요시의 수치와 분노, 조선 측의 무시와 무대응, 조선 나름의 분노, 그리고 소 요시토시의 원망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히데요시의 분노와 수치일 것이다.

7. 결론

내셔널리즘이나 민족주의는 우리 개개인의 골수에 박혀 있는 아진분별심이 근대 국가의 출현과 함께 집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했다. 이 글은 아진분별의 치명적 사례를 임진왜란에서 보았고, 이에 대한 집단 기억이 우리 민족주의의 원상임도 확인했다. 부처가 사명당의 참전과 살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사명당에게서 정당한 내셔널리즘의 기준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었다. 곧 의병을 일으킨 동기가 바로 그 기준이다. “독사와 전갈 같은 무리들이 나라를 제 마음대로 해쳐서 생민을 어육으로 만들 때” 그때는 생민을 보호하고자 민족주의와 살생은 허용된다. 이런 민족주의는 우리의 생명, 말, 문화, 역사를 지키자는 것이므로 정당할 수 있다. 이순신이 적을 진멸하겠다는 의지도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집단성향으로서 내셔널리즘은 언제 문제가 되는가? 어육이 될 위험이 없는 데도 있다고 착각하면서 집단적으로 반응할 때이다. 집단 기억에서 오는 착각, 현재를 과거와 혼동하는 데서 오는 강력한 아진분별은, 현재에 분노와 적개심을 낳고 이것들은 상대의 허실과 국제 판세에 대해 무지하게 만든다. 이러한 무지는 무시와 무례를 낳고, 결국 상대를 분노케 해서 실화(失和)와 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내편의 불만과 분노 자체가 저편의 불만과 분노를 야기한다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증언이다. 따라서 무지와 오판에서 오는 내셔널리즘은 화(和)의 적(敵)이다.

한국과 일본의 일부 사학자들은 쌍방의 민족주의자들을 ‘적대적 공범자’라고 부르면서까지 내셔널리즘에 대해 심각하게 경고한 지 오래다. 그래서 묻는다. 한국과 일본의 불교도나 불교학자들이 부처의 정신을 배운 다음 독립성과 자주성을 발휘하여 내셔널리즘에서 벗어나 양국 간에 화기(和氣)를 감돌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불쾌하고 일본이 정말로 밉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외교를 하기가 늘 어려웠다. 같은 민족이라고 해도 공포정치와 핵의 북한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이때 이웃에 적을 하나 더 만들어서 우리에게 유리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티븐 핑커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최신 연구에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살인율은 선사 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현재야말로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임을 통계수치로 증명하려고 했다. 이를 생각하며 400여 년 묵은 내셔널리즘의 열정을 식힌다면 식힌 만큼 폭력도 감소할 것이다. 자타 관념이 모두 우리 자신의 형성이나 구성의 결과라는 무아의 진리를 실천하며 정체성 선언과 역사 기술에서 일본을 최소화하는 정도만큼, 우리는 진리와 화(和)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아진분별심은 복수의 개인과 집단들로 구성된 인간 사회에서는 항상 준동한다. 적을 최소화하는 훈련, 곧 적대감을 줄이는 훈련은 국제 관계 전반에서, 그리고 국내의 치열한 이념 대결의 장에서도, 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우리가 적으로 규정한 자에 대한 적대감을 줄이는 데 성공하면 우리는 저급한 국민-중생의 수준을 벗어날 수 있고, 잘하면 상당한 수준의 집단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 ■

 

허우성 /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하와이대 철학박사. 저서로 《근대 일본의 두얼굴: 니시다 철학》과 역서로 데이비드 로이의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문명 정치 종교(마하뜨마 간디의 도덕 정치사상)》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소장,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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