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

1. 이슬람과 내셔널리즘: 전개과정

이슬람은 탈민족주의를 종교적 근간으로 삼았다. 이슬람이 처음 발아되었던 아라비아반도 서쪽의 메카는 전형적인 다민족 다종교 사회였으며, 이해관계가 끊임없이 상충하는 혼성도시였다. 다신교 사회를 갈아엎고 일신교를 주창한 이슬람은 평등과 평화라는 두 축을 종교적 사상철학의 기초로 삼으면서 ‘민족, 계층, 출신, 피부색, 언어를 초월해 모든 이가 신 앞에 평등하다’는 기본 이념을 고수했다. 이슬람이 유대교나 일부 동방정교회의 경우와 달리 민족을 기본 모체로 하는 지역종교나 폐쇄적인 민족종교로 머물지 않고, 세계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민족을 초월한 글로벌 보편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국가체제로서 실질적인 운영과 접목되었을 때, 민족주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이슬람이 태생적으로 아랍인 예언자(무함마드)에 의해 아라비아 지역에서 아랍어로 계시되었다는 절대적인 명제 앞에서 이슬람 정권 핵심부는 아랍인들이었고, 코란을 기록한 아랍어는 신의 목소리로 칭송되면서 최고의 언어로 존중받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우마이야 시대를 풍미한 일반적인 인식이었는데, 750년 압바스왕조가 창건되자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을 연이어 제패하면서 두 제국의 거버넌스와 인적자원을 받아들이기 위해 탈아랍화가 요구되었다.

이는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언어의 경계를 넘어 이슬람이 세계화될 수 있느냐는 기로에서 정권이 취한 정책이었다. 민족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인재들을 받아들였고 종교적 관용도 크게 보호되었다. 이슬람의 토착화가 진행되면서 율법 적용에서도 아랍 중심의 근엄하고 경직된 해석에서 벗어나 상당 부분 절충과 완화가 이루어졌다. 이 왕조에서는 비아랍인들의 아랍화가 활발히 추진되어 아랍, 시리아, 페르시아적인 요소들이 골고루 융합된 보다 폭넓은 이슬람문화가 발전하여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복민으로서 아랍민족 우월주의는 퇴색하고 이슬람의 전파자, 수호자로서 아랍인, 즉 인종적 의미의 아랍인에서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으며, 스스로 아랍인으로 자칭하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문화적 개념의 아랍인이 보편화되었다. 이런 아랍화 물결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전역에 번져, 오늘날의 아랍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탈민족주의와 글로벌을 지향한 압바스 왕조는 5대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 786~809)와 그의 아들 마문(Ma’mun, 813~832)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바그다드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함께 세계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성하였고, 활발한 육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으로 동서문물이 물밀 듯이 유입되었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제지술이 도입되자 종이 혁명을 가져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번역, 재해석되고, 학문이 꽃을 피워 이슬람의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제지술의 도입은 751년 압바스 군대의 이븐 살리히(Ibn Salih) 장군과 당나라의 고선지(高仙芝) 장군과의 탈라스 전투의 결과인데, 중국군이 이슬람군에 패함으로써 포로로 잡힌 중국의 제지기술자에 의해 종이가 이슬람 세계 전역에 확산되었다. 더욱이 이 시기에 저술된 많은 아랍 사료에서 신라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발견할 수 있어, 우리나라와 아랍세계의 긴밀한 교류와 그 폭을 짐작할 수 있다.

압바스조는 제국의 성격을 분명히 했고, 1258년 몽골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다양한 민족과 생각들을 끌어모으는 문화 용광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아랍 중심의 이슬람이 글로벌 종교로 진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압바스 제국이 멸망하고 몽골이 이슬람 지역을 통치하던 50여 년은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문화적으로 가장 혹독한 말살을 경험한 시기였다. 14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절망에 빠진 이슬람 세계를 새로 구원한 세력은 아랍을 대신한 튀르크족들이었다. 셀주크튀르크를 이어 놀라운 기운으로 급성장한 오스만튀르크는 유럽을 바라보는 아시아 쪽 도시 부르사(Bursa)에 기반을 잡고 튀르크 중심의 오스만제국을 건설해 갔다. 오스만제국도 역시 다문화 다종교 정책을 제국의 근간으로 유지했다. 탈민족주의라는 이슬람의 근본을 유지한 것이 600년 세계최대 제국 유지의 비결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다민족 제도가 밀레트(Millet) 정책의 채택이었다.

2. 이슬람의 탈민족주의 근간: 딤미와 밀레트 제도

타자와의 공존과 타자의 인정, 적극적인 대화와 절충이 무슬림들의 기본 의무로 규정되어 왔다. 이슬람의 이러한 전통은 딤미(Dhimmi) 제도를 정착시켰고, 커다란 변혁 없이 오스만제국의 밀레트(Millet)로 연결되었다. 적어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중동의 이슬람 사회는 소수민족에 대한 지위인정과 다원주의적인 공존에 익숙해 있었다. 천 년 이상 아랍인과 유대인이 상대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공존해 온 사실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1) 딤미       
7세기 중엽 이슬람제국이 성립된 직후, 이슬람은 소수의 정복자, 정착민, 그리고 통치자들의 종교에 불과했다. 과거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 영토에 살던 인구의 절대다수는 여전히 고대의 전통적인 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중동 지역에서 무슬림들이 다수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비중은 서서히 증가되어 왔다. 다만 비무슬림들의 거주가 허용되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전승된 기록에 따르면, 칼리프 우마르는 예언자의 고향인 성지(아라비아를 의미)에는 오직 한 종교, 즉 이슬람만이 허용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따라서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은 그곳을 떠나도록 요구되었다. 물론 이 포고령은 기독교가 수 세기 동안 잔존했고, 유대교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남부 아라비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무슬림의 통치와 영향하에 있는 비무슬림 공동체의 운명은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다. 북쪽의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 남쪽의 에티오피아와 같이 이슬람제국의 외곽에 자리한 일부 국가에서는 기독교적인 특성을 보존하였고, 일부는 독립을 유지하기도 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일대)과 이집트에서는 비록 그 숫자가 서서히 줄어들기는 했지만, 기독교 교회는 번성을 계속했고, 비잔틴의 지배가 종식되면서 그들 나름의 올바른 믿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동부와 중부, 서부 지방에 굳건한 뿌리를 내렸던 유대 공동체는 기독교인과 유사한 지위를 얻게 되는데, 과거 기독교 치하에서보다 월등한 지위 향상을 꾀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들처럼 외부 세계의 지원과 협조, 혹은 유대인들 같이 처절한 생존 전략을 마련하지 못했던 조로아스터교 인들은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일부는 인도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파르시(Parsees)’라 불리는 조그만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된 이교도를 ‘딤미(dhimmi)’ 혹은 ‘아흘 알-딤마(ahl al-dhimma, 계약의 백성)’라 불렀다. 딤미는 무슬림 국가가 허용한 보호받는 비무슬림 시민들을 일컫는 법률적 용어였다. 실제로 그들은 기독교인, 유대인, 그리고 동부 지역의 조로아스터교 인들을 의미하였다. 딤미의 지위는 무슬림 통치자와 비무슬림 공동체 간의 계약에 의해 결정되었다. 계약의 기본 골격은 딤미가 이슬람의 우위와 이슬람 국가의 지배를 인정하고, 나아가 일정한 사회적 제약이나 지즈야(jizya)라고 불리는 인두세 납부를 통해 딤미의 종속적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물론 무슬림들에게 인두세 납부는 면제되었다. 인두세에 대한 대가로 딤미는 생명과 재산의 안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의 보호, 신앙의 자유, 그리고 자신들의 문제에서 광범위한 내적 자치 등을 보장받았다. 딤미들은 세액의 차별은 있었지만, 장사와 무역에서도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았다. 무슬림들의 무역세는 일반적으로 40분의 1이었음에 반해 딤미들은 20분의 1을 납부해야 했고, 딤미가 아닌 사람들은 10분의 1을 납부하도록 했다. 대신 무슬림들은 별도로 40분의 1에 해당하는 종교세인 자카트를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했다.

따라서 딤미는 노예보다는 훨씬 유리한 상황에 있었지만, 자유 무슬림보다는 훨씬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딤미는 무슬림들보다 열등했지만, 비록 그 숫자는 미미하다 해도 거대한 부를 축적하여 경제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는 딤미들을 찾을 수 있다. 압바스 시대에 들면, 칼리프들이 직접 이교도 시민들의 종교의례에 참석하고, 심지어 그들의 교회를 순방하기도 했다. 특히 이교도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칼리프들의 배려는 각별하여 경제적 지원은 물론, 유대인 최고 지도자에게는 알-말리크(Al-Malik)라는 칭호를 붙여주기도 했다.

근대 이전 대부분의 이슬람 역사 시기에서 비무슬림 시민들의 지위와 입지는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은 형편이었다. 비무슬림 소수민족에 대한 제한규정은 수시로 강화되었는데, 이는 법률이 정하고 있는 제한을 넘어 딤미들의 사회적, 정치적 진출이 과도하게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딤미들은 이슬람 분파 계열의 통치자들보다는 수니 통치하에서 더욱 대접을 잘 받았다. 칼리프와 술탄 통치하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 모두는 정부 업무, 특히 행정 분야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등용에 대한 무슬림들의 반발도 크지 않았다. 물론 아주 드물게 기독교 관리를 반대하는 캠페인이 일어나고, 약간의 폭력 소요가 있기도 했지만, 딤미 관리의 과도하고 부당한 행위가 문제가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딤미는 열등한 존재였고, 그들이 종속된 하위시민임을 망각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그들은 무슬림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었고, 노예와 여성들처럼 피해보상에서 무슬림들보다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무슬림 남성들이 기독교나 유대 여성들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던 반면, 딤미는 어떤 경우라도 무슬림 여성들과 결혼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복장, 탈것, 예배장소 등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다. 구분되는 별개의 복장을 하여야 했고, 말을 타지 못하고 대신 당나귀나 노새를 타야 했으며, 법률 규정에 따라 낡은 예배장소를 수리할 수는 있어도 새로 신축할 수는 없었다. 비록 이러한 제약이 항상 엄격하게 시행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법적인 제재를 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 한편 딤미들은 때때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부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정치적 특권으로부터 소외되자, 음모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고, 이것은 결국 딤미 자신들뿐만 아니라 무슬림 국가와 사회 모두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2) 밀레트 제도
딤미에게 주어졌던 이슬람 사회의 소수민족 정책은 오스만제국 시대에 오면 ‘밀레트(millet)’라는 독특한 체제로 되살아난다. 밀레트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무슬림들은 ‘밀레티 하키메(millet-i hakime)’ 즉 지배집단에 속했고, 다른 종교에 속한 소수민족들은 ‘밀레티 마흐쿠메(millet-i mahkume)’ 즉 종속집단을 구성했다. 지배집단을 구성하는 주요 민족은 튀르크족 외에도 아랍인, 페르시아인,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과 같은 무슬림들이었다. 종속집단에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루마니아인, 슬라브인들과 같은 소수민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밀레트 제도는 종교·정치적 공동체로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 적용되었던 딤미 제도의 발전된 형태였다. 

밀레트 중 최대의 종속집단은 그리스 정교 공동체였다. 이들의 종교행정은 이스탄불 시내 페네르(Fener)에 있는 대주교청을 중심으로 결집되었다. 다수의 그리스인을 중심으로 발칸반도의 여러 소수민족, 세르비아인, 불가리아인 등이 그리스 정교 대주교청에 소속되었다. 두 번째 소수민족 밀레트는 아르메니아 정교 그룹이었다. 오스만 영토 전역에 흩어져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지역별 정교 교구청에 소속되었고,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정신적 중심지인 에츠미야드즈미 대교구청에 속하였다. 이스탄불에는 아르메니아 정교 대주교를 임명하여 상당한 예우를 하였다. 세 번째 소수민족 밀레트는 유대인 집단이었다. 유대인들은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이즈미르, 셀라니크 등 항구도시 주변에 집거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에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거주하게 된 배경은 1492년 기독교 스페인에 의한 유대인과 무슬림들에 대한 대량학살 사건과 폴란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등지의 유대인 학살이었다. 학살의 위협에서 갈 곳 없는 유대인들을 거둬들여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 것이 오스만제국이었다. 이스탄불의 대랍비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고 책임자로 오스만 정부와의 관계를 설정해 나갔다. 이 밖에도 수적으로 미미한 종교그룹인 야쿠비, 네스토리아인, 마루리인 등과 같은 소수 기독교 종파들도 각각 자신들의 교회에 소속되어 고유한 종교적 관습의 지배를 받았다.

소수민으로서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능력 있는 비무슬림 엘리트들은 자신의 역량을 정치 분야보다는 경제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발휘하였다. 통치자의 성향에 따라서 일부 유대인과 기독교인 관료들은 궁정의 중요한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집트의 파티마와 아유비, 맘루크 왕조하에서 기독교 곱틱 관리들이 재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대인들은 의학 분야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당시 유대인 궁정의사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유대인이나, 기독교 관리들이 개종하는 경우에 그들의 신분상승은 급류를 탈 수 있었다. 일부 개종자들은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고, 많은 관직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이슬람 사회의 유대인들은 이슬람 국가와 지중해는 물론 인도양까지 연결하는 원거리 국제교역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또한 직업적 분화가 뚜렷하여 금, 은, 보석 거래와 세공, 제약업 등은 거의 대부분 유대인 상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처럼 오스만제국 내의 소수집단들은 밀레트 내에서 자신들의 신앙과 종교의례는 물론 고유한 관습과 언어 사용, 문화적 전통 등을 향유할 수 있었다. 또한 터키인들과의 마찰과 갈등으로 인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공동체 내규에 따라 분쟁이 조정되고 해결되었다.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정교도’ 등 각 밀레트에는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 해당 밀레트의 종교행정과 문화활동을 관장하며 오스만제국의 술탄에게만 책임을 졌다. 소수민족 공동체와의 조화와 공존은 오스만제국 600년 역사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통치이념이었다.


3. 정교일치 강화와 탈민족주의

1) 종교의 국교화와 조로아스터교의 사례
이슬람 이전 서아시아의 주된 종교적 흐름은 조로아스터교였다. 원래 이란 지방에서 민중들 사이에 성행하던 이 종교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신앙이 됨으로써 크게 확산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그 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창건자이자, 이 신앙을 부활시킨 아르다시르(226~240)에 의해 이란의 국교로서 지위를 갖게 되었다. 조로아스터 종교체제는 통치권이나 사회, 정부기구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로써 국가가 규정한 이념의 정통성 수호, 성직의 관료화. 종교의 깊숙한 정치개입, 이단자의 색출과 탄압을 통한 정통 국가이념으로서 지위 강화 등 여러 방식을 통해 막강한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는 길을 활짝 열어놓았다. 한 종교가 국교가 됨으로써 벌어질 수 있는 결과를 알려주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사산조 파르티아의 종교정책은 광범위한 종교적 관용과 절충주의를 받아들였던 이전의 파르티아나 로마제국의 태도와는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조로아스터 신앙과 성직 계층은 국가와의 이러한 특수연계로 인해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동시에 국가 자체가 멸망되었을 때는 국가와의 밀착관계로 인해 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650년경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자 조로아스터의 성직 편제는 국가 패망과 함께 와해되었고, 조로아스터교의 정치권 권위는 거의 소멸되었다. 철저한 배척과 심각한 타격 때문에 후일 종교적 관용이 회복되고 이란의 전통문화가 부활을 맞이하는 시기에서도 조로아스터교는 거의 회복되지 못했다. 기나긴 쇠퇴기로 접어들었던 조로아스터교는 최초의 일신교로서 후대 로마 군인의 신앙 대상은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숙과 교리 정립에도 커다란 공헌을 했음에도 세계종교로서 입지를 다지는 데 실패하였다. 한편 이란에서 이슬람의 진출에 대항하여 종교적 저항을 시도한 것은 권위를 행사하는 데만 익숙해 있던 정통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이 아니라, 저항과 탄압에 단련되어 있던 조로아스터교 이단자들이었던 점도 흥미롭다. 

조로아스터교 이단 종파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미트라교이다. 미트라교는 로마제국 내에서 특히 군인들 사이에 많은 추종자를 얻었고, 심지어 영국까지 전래되어 그곳에 미트라 사원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미트라교가 동방으로 전파되어 미륵불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이단 종파는 마니의 신조를 근거로 한 마니교이다. 서기 216년에서 277년 사이에 살았던 마니는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 사상을 혼합한 종교를 창시했다. 마니는 277년 순교했지만, 그의 종교는 놀라운 역동성을 가지고 중동과 유럽에서 무슬림과 기독교도 양자의 극심한 박해에도 살아남았다. 조로아스터교는 서아시아에서 최초의 제국 종교였고, 배타적인 정통성을 고수한 신앙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란의 민족종교에 머물렀고, 이란 문화권 바깥의 어떤 인종들에게도 보편적 메시지를 제공해주는 데 실패했다. 더욱이 한 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종교적 운명을 지나치게 정치에 의존함으로써 정치를 따라 소멸해 버렸다. 이 법칙에 하나의 예외가 있으니, 정치적 영토적 근거가 소멸된 후에도 살아남아 급격한 자기변화의 과정에 의해 삶을 영위해 가는 유일한 고대 종교는 유대교이다.

2) 이슬람의 정교일치 체제 강화
흔히 이슬람 정치체제를 정교일치 혹은 신정정치로 설명한다. 그러나 1,400년 이슬람 역사를 되돌아보면 완전한 신정정치가 실현된 시기는 그나마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 30년 정도였다. 칼리프는 이 시기 세속정치의 최고 통치권과 동시에 종교적 권위를 가진 초월적인 카리스마를 상징했다. 그들은 정복지의 군사 수장이 되었고 신의 대리인으로서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정교일치적 칼리프 제도는 우마이야 왕조(661~750)가 왕권 승계에서 혈통 세습을 채택함으로써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이후 칼리프는 명목상 신의 대리인 역할과 세속 군주권을 겸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국의 통치권자로서만 존재했고 종교적 권위나 지식이 부족한 군주의 신앙적 지휘권은 따로 종교지도자나 율법학자를 두어 해결해 나갔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세속 통치권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셈이다. 물론 칼리프라 불리는 군주도 절대 경전인 코란과 샤리아라는 이슬람 법체계의 통제를 받고는 있었지만, 최고 종교지도자가 칼리프에 의해 임명되는 상황에서 그 주종관계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이 신정정치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정교일치 체제라기보다는 이슬람 율법의 권위를 인정하는 체제라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알 카에다나 IS(이슬람국가) 같은 테러집단들이 화려한 중세를 꿈꾸며 정통 칼리프 시대를 희구하는 것도 현재의 정치체제에서 신정정치 모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다시 민족주의로: 아랍민족주의와 범튀르크주의

민족을 초월한 범세계적 종교를 주창했던 이슬람 정치체제도 18세기 이후 서구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고, 이슬람의 연이은 패배로 개별 국가 단위의 민족주의가 유용한 대안이라는 새로운 생각이 굳어지면서 급격히 민족주의 노선으로 돌아서게 된다. 무엇보다 19세기부터 불어닥친 유럽의 민족주의 열풍은 약화된 오스만제국과 서구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중동 전역에서도 강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오스만제국 치하의 발칸반도와 중동 여러 지역에서 고유문화의 회복과 민족 정체성 문제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종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어진 인위적 경계는 민족 정체성의 분포선과는 무관하였고, 필연적으로 다민족, 다종족, 다문화적 사회구성을 촉진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계선 내의 이질감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민족주의보다는 국가주의의 가치가 강조되었다. 이제 독립되고 재편된 영토를 가진 개별국가는 종래 다문화의 공존과 다양성의 원칙보다는 동화와 획일화의 원칙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슬람의 오랜 다민족 공존과 이교도에 대한 포용성의 문은 현저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슬람 민족국가들도 제국의 피지배자에서 개별국가로 독립하면서 국가이익 최우선이란 새로운 가치가 두텁게 자리를 잡아갔다. 이 기간에 중동의 민족주의 운동은 아랍과 이란, 터키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1) 와하브 운동
18세기에 들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더욱 목소리를 높여갔다. 초기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대부분 크리스천이었고, 거의 모두가 서구의 지원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는 제국 내 오스만 지방 통치자(장군, 총독)들의 배반과 반란이었다. 가장 성공적인 예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파샤였다. 그는 아라비아반도로 출병하고 수단을 정복하는 한편 이집트의 근대화를 위해 나일 강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여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그를 이은 이스마일의 통치기에는 수에즈운하를 완공하고, 산업, 교통, 교육의 혁신을 가져왔다. 쿠웨이트에서는 1756년 사바흐(Sabah)라는 지배 가문이 권력을 잡았다.
오스만제국의 정통성에 도전한 강력한 민족주의 세력은 와하브 운동(Wahhabism)이었다. 이 운동의 창시자는 나즈드 지방의 신학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1703~1787)였다. 그는 순수하고 정통적인 예언자 시대의 이슬람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미신, 거짓 신앙, 사악한 의례 등과 같이 이슬람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오염시키고 왜곡시키는 요소들과 그것을 조장하고 장려하는 정권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압둘 와하브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이 후일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세운 나즈드 지방의 다리야 지역 아미르(토후)였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Muhammad ibn Sa’ud)였다. 와하브 운동은 오스만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우드 가문의 호응을 받아 와하비 왕국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와하브 운동은 아랍인의 각성을 촉구하여 후일 아랍 여러 나라의 독립에 정신적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탄생에 정신적 지주와 종교적 바탕이 되었다.

2) 이란의 카자르조
이란 지방은 18세기 말 민족주의를 표방한 카자르(Khajar) 왕조에 의해 재통일되었다. 카자르 왕조는 한때 아프가니스탄까지 그 영역을 넓혀 번영하였으나, 19세기 말부터는 열강의 간섭과 침략이 가속화되었다. 그러자 이란의 민족주의 운동은 유럽 열강에 대항하는 항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1890년에는 담배의 전매권이 영국인의 수중으로 넘어가자, 담배 보이코트 운동이 일어나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했으나, 결국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과 카프카스 지방을 점령하고 남과 북에 각각 자국의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국왕 알딘 샤(Aldin Shah)는 1906년 헌법제정과 의회설립을 통한 입헌혁명을 이룩하고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제국주의 유럽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높아 효과적인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이란의 카자르조 샤(왕)가 채택한 개혁정책은 군의 현대화와 중앙화, 행정과 교육의 현대화, 특히 통신과 같은 현대적 사회 간접시설의 구축, 최소로 필요한 만큼의 서구기술과 방식의 도입과 채택, 이와 함께 경쟁적인 유럽 열강을 상호 견제하게 함으로써 독립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군대와 민간부문에 대한 개혁은 철저하지 못했고, 중앙집권화 조치는 지역적이고 부족적인 특수성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3) 이슬람에서 내셔널리즘 운동으로: 범튀르크주의(Pan-Turkism)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오스만제국, 러시아, 중국,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터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연합을 결성하고자 했던 정치적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슬람의 연대를 강화하자는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의 범이슬람주의(Pan-Islamism)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크림반도와 볼가 강 근처에 사는 터키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된 이 운동은 러시아의 증대되는 전제주의적 지배에 대항해 최초로 오스만제국과 러시아 제국에 사는 터키인들을 연합하려고 노력했다. 1883년 크림반도의 교육 선각자 이스마일 가스프랄르는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에 사는 모든 터키어 사용 민족들의 언어와 사고 그리고 행동의 통일’을 선언하면서 크림반도 러시아 지역에서 〈테르주만(Tercüman)〉이라는 터키어 신문을 발행했다. 1911년에는 유수프 악추라 오울루가 이스탄불에서 유사한 신문인 〈터키인의 본향(Türk Yurdu)〉을 창간했다. 이들 민족주의 성향의 개혁론자들은 이슬람이라는 공통분모 대신에 터키 민족이 공유하는 전설적인 과거와 미래를 칭송했다. 무엇보다 1913~18년 터키가 러시아와 치열한 투쟁에 휩싸이게 되자 오스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범튀르크주의 선전을 증대시켰다. 러시아 치하의 터키 민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자극해야 하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터키의 국부(國父)로 추앙된 케말 아타튀르크는 범튀르크주의보다는 터키 내에서 터키 민족주의를 강조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범슬라브주의가 재생되고 터키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이 등장하자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비록 미미했지만 일부의 터키인들 가운데 범튀르크주의에 대한 관심이 다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소련에 거주하는 터키어 사용 이슬람 민족들에게서 튀르크족 국가들 간의 연합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4) 아타튀르크 개혁과 터키의 민족국가화 
탈민족주의를 표방하던 이슬람을 국교의 지위에서 폐지하고 민족국가 중심의 세속주의로 전환한, 20세기의 가장 드라마틱한 변신이 터키에서 이루어졌다. 1923년 10월 29일, 600년 왕정을 폐지하고 터키는 공화국으로 새로 탄생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중심 가치를 이슬람에서 세속주의로 옮겨가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새 국가의 성격을 가늠하는 공화국 헌법이 1924년 4월에 제정, 공포되었다. 그 직전인 1924년 3월 3일에는 이슬람 정치체제의 상징이었던 칼리프제가 폐지되었다. 이로써 터키는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으로서 위상보다는 서구 중심의 글로벌 세계의 일원으로 뛰어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아직도 국민의 98%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상황에서 터키는 이슬람교를 국교의 자리에서 던져버리고 순수한 세속 공화국으로 다시 출발했다. 엄청난 저항과 반대가 따랐지만,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향하겠다는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과 혁명 주체세력들의 의지를 뒤바꿀 수는 없었다.

500년간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버리고 아나톨리아 반도 중심의 앙카라가 새 수도로 선정되었고, 종교재판을 관장하던 샤리아 법정도 일반 법정으로 바뀌었다. 교육부가 만들어지면서 공식교육을 담당하던 종교학교 대신에 모든 교육은 초등학교의 의무교육과 함께 일반 학교 교육으로 전환되었다. 1925년 1월 25일에는 ‘모자법’이 통과되어 종래 이슬람의 상징처럼 따라다니던 여성들의 터번 착용과 남성들의 붉은 색 페즈(Fez) 모자 착용이 금지되었다. 대신 서구식 중절모의 착용이 장려되었다. 민중적 이슬람의 뿌리였던 이슬람 신비주의(Sufism)의 정비를 위해 성자 무덤 참배와 다양한 수피 신앙의 의례들이 제한되거나 철폐되었다. 오랜 이슬람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이 조치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따랐다.

그해 11월에는 음력에 기초한 이슬람 달력과 역법을 폐지하고 서양력을 채택했다. 이슬람의 전통적 종교 휴일인 금요일 대신 일요일이 휴일로 받아들여지고, 근무시간도 국제적 기준에 맞추었다. 결정적으로 1926년 2월 17일 스위스 민법에 기초한 근대적 법률이 도입되어 공표됨으로써 6백 년간 지속되던 오스만식 이슬람법과 관행은 더 이상 설 땅을 잃었다. 민법과 형법을 포함한 모든 법률은 서구식 제도를 본땄으며, 이슬람 관행은 민간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유지될 뿐이었다.

여성의 지위와 사회참여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슬람의 일부다처제가 폐지되고, 결혼은 종교적 관습이 아닌 법적인 틀 속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보호되었다. 남성에 의한 일방적인 이혼은 인정되지 않고, 반드시 법정의 결과에 따르도록 했다. 여성의 정치참여도 법적으로 보장되어 1930년에는 지방자치 선거에서 여성들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인정되었고, 1934년에는 국회의원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사회적인 현실은 남성 우월이 지배적이었지만, 적어도 법 앞의 양성평등은 보장받았다. 이것이 후일 터키가 이슬람권에서 여권신장이 가장 앞선 나라로 평가받는 기틀이 되었다. 1928년에는 또 다른 결정적인 변화가 이어졌다. 문자개혁이었다. 천 년 가까이 사용해 왔던 터키어의 아랍어 표기를 버리고 라틴어 알파벳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과거 역사와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문맹퇴치와 서구식 근대화에 불을 댕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31년에는 도량형 개혁을 통해 미터와 킬로그램 단위가 전국적으로 정착되고, 1934년에는 사회적 변혁에 해당하는 ‘성씨(姓氏)제도’를 실시했다. 그때까지 터키에서는 유목적인 관습에 따라 성씨제도가 정착되지 못하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함께 사용해 왔었다.

1931년에는 터키공화국의 국가이념으로 6개의 기본 원칙이 공표되었다. 공화주의, 민족주의, 국민주의, 국가주의, 세속주의, 개혁주의가 그것이다. 이제 터키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국가로 탈이슬람, 친서구화 실험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원칙은 오늘날까지 터키공화국을 지탱하는 기본 골격으로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다.  

5. 이슬람에서 보는 기독교와 불교

이슬람의 코란에 의하면 기독교는 같은 하느님을 믿고 아브라함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형제의 종교다. 창세기에서 구약까지의 성서적 내용을 공유하고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어떤 다른 종교적 가치보다 상호 간에 신학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 다만 이슬람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이나 신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오류를 범하지 않는 완성된 인격체, 나아가 순수한 인간 예언자로 보기 때문에 이 점에서 두 종교가 교리적 충돌과 갈등을 보인다. 이런 근원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에서는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과 기적의 권능을 받아들인다. 더욱이 이슬람 학파의 다수가 최후의 심판일 주재자로서 예수께서 재림한다는 사실을 믿고 따른다. 이처럼 두 종교는 신학적으로 가깝지만 그만큼 상대에 대한 경계와 경쟁도 강하다. 무엇보다 두 종교의 역사가 중세까지 이슬람에 의한 서구의 지배를 이어, 근대 이후 서구에 의한 이슬람 세계 식민지 경험 때문에 아픈 상처와 생생한 기억들이 상호 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문화적 배경이다.

이슬람의 다수학파는 붓다를 이슬람의 한 예언자로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코란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예언자의 명단에 붓다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구체적 이름 없이 코란에서 언급된 수많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붓다의 행적과 가르침이 예언자들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점을 들어 붓다의 이슬람 예언자설은 별다른 반대 주장 없이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은 존중되고 불교에 대한 이슬람의 입장은 크게 적대적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과 불교는 충돌보다는 조화로운 공존의 경험이 더 길다. 물론 이슬람의 인도 진출 과정에서 불두를 우상숭배로 보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불교유산이 훼손되었고, 몇 해 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급진적 이슬람 정권인 탈레반에 의해 바미안 석불이 파괴되는 반문명적 사건이 발생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슬람과 불교가 공존하는 태국, 미얀마, 인도, 파키스탄의 상황을 보면 다른 일신교끼리의 대결 양상에 비하여 종교적 갈등요인은 훨씬 미미하다고 볼 수 있다. ■

 

이희수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 동 대학원 졸업. 이스탄불대 역사학 박사. 주요 저서로 《이슬람과 한국문화》 《이슬람: 9·11테러 10년과 변한 이슬람 세계》 등이 있다. 터키 마르마라대학 교수, 한국중동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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