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

1. 머리말

고대 인도로부터 시작된 불교는 크게 대승불교권(Mahayana Bu-ddhism)과 상좌(부)불교권(Theravada Buddhism, 이하 상좌불교)으로 발전해 왔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주로 상좌불교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그러나 베트남과 싱가포르의 경우,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동남아시아는 문화적 다양성과 종족적 복합성으로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과 복합성 속에서 내셔널리즘(nationalism, 이하 민족주의)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는 민족주의와 상좌불교가 서로 길항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고유하면서도 독자적인 불교문화의 특징과 그 의미를 구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 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불교사상을 정신적 토양으로 하는 민족주의적 ‘불교사회주의’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 피식민 지배의 경험을 거친 동남아시아 불교국가들에서 불교사회주의는 낯설지 않은 용어였다. 버마(1988년 미얀마로 개칭. 이하 문맥에 따라 버마와 미얀마를 혼용함)인들은 사회주의의 실천에서 버마라는 정치경제적 조건과 사회문화적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근거를 들어 사회주의의 버마적 해석을 주장하였다. 이런 이유로 버마 불교사회주의의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의 영향하에 불교, 힌두교 등이 토착종교와 결합하여 고유하면서도 독자적인 종교 문화를 형성, 변모시켜 왔다.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버마), 태국 등이 상좌불교가 유입 정착된 나라이고 베트남, 싱가포르는 대승불교권에 속하는데, 특히 베트남은 유교, 불교, 도교 등이 혼합된 종교를 갖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대다수 국가에서 유럽 식민주의를 포함한 외세에 대항한 민족운동이 불교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이 지역의 불교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제반 영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특히 미얀마(버마)와 같은 나라는 불교적 정치이념 위에서 건설된 국가이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유럽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적 침략과 침탈은 원주민 수탈과 문화적 약탈과 침탈 등으로 나타났으며, 불교와 불교도들은 그로 인한 가장 심대한 피해자가 되었다. 제국주의적 침탈과 식민주의 지배하에서 불교는 불복종운동을 주도했고, 민족해방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불교는 민족해방의 선두에 서서 특정 민족의 주체성과 자존심을 창조해 내기도 했다. 불교 승려들과 불교도들은 민족주의자가 되었으며, 반식민 투쟁의 선두에 서기도 했던 것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남아시아의 불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베트남과 태국, 미얀마 불교에 대한 관심을 제외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을 포함하는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불교에 대해서는 국내 불교학계뿐만 아니라 종교 관련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 글은 동남아시아 불교의 민족주의 역사와 전개과정을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동남아시아 불교, 특히 상좌불교와 민족주의와의 관계를 역사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이를 동남아시아 불교의 민족주의와의 상호 관련성에 주목하여 그 역사적, 문화적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동남아시아 불교의 일반적 특징

오늘날 동남아시아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10개국을 지칭하는 지리적 개념이다. 현재 지극히 자연스러운 지리적 구분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개념은 그러나 학문적으로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았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식민지배라는 경험을 통해 구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 불교는 태국과 미얀마(버마)의 불교로 널리 알려진 상좌불교로 대표된다. 그것은 불교의 분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부처님의 역사적 가르침이나 생활방식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불교이기도 하다. 상좌불교는 히나야나 불교(Hinayana) 또는 소승불교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상좌불교가 주로 승려를 위한 종교 또는 불법을 좁은 의미로 해석한 연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테라바다(Theravada)는 고승들의 전통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상좌불교는 불교의 다른 종파가 그렇고 모든 종교의 분파들이 그러하듯이, 단일하고 통일된 실체라기보다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화적 환경과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화적 의미를 보유하는, 일종의 역사적, 문화적 산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남아시아 불교의 민족주의 역사와 전개과정은 어떻게 형성, 변모되어 왔으며, 그 역사적, 문화적 의미는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동남아시아 불교의 민족주의 역사와 그 전개과정의 특징과 의미를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동남아시아 불교를 고정불변의 실체로서가 아니라 동남아시아라는 변화하는 역사적,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일종의 부단한 변화과정 속의 역사적 구성물로 간주하는 것이 동남아시아 불교의 민족주의 역사와 전개과정의 특징과 의미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의 동남아시아 유입의 역사는 불교문화의 이동과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동안 인도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고.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모습의 불교가 만들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인도의 불교 승단은 국가 지원의 힌두교적 가치의 사회규범화로 인해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흔히 대승불교라 불리는 마하야나 불교(Mahayana Buddhism)는 인도에서 결국 무력화되어 인도 북부와 남부의 일부 지역에서만 명맥을 유지하는 쇠락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교가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도불교의 동남아시아 유입은 인도 내부의 사회문화적 상황의 변화에 대한 대안이었으며, 이는 새로운 형태의 불교에 대한 요청에 답하는 대응이었다고 풀이된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를 말하고, 도서부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지칭한다. 이런 구분은 무엇보다 문화적 특히 종교적인 기준에 따른 것으로, 대륙부 동남아시아가 불교(베트남은 대승불교, 나머지는 상좌불교)문화권이었던 것에 비해서 도서부 대부분은 이슬람문화권이라 할 수 있다(필리핀, 싱가포르 역시 원래는 무슬림 지역이다). 문화적인 것 외에도 민족적, 종족적 구성 역시 차이가 있다.

동남아시아 불교의 민족주의 역사와 전개과정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화인(華人)과 화인의 불교문화에 대한 폭넓고 심도 있는 이해가 요구된다. 동남아시아의 화인 문제는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그 문제의 뿌리는 직접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국민국가 정부들의 화인정책과 중국 및 대만과의 관계에 닿는다. 하지만 더 깊이 내려가면 서구 식민정부들의 화인정책과 동남아시아 전통왕국들의 남중국해 무역 그리고 중국 역대 왕조들의 동남아시아 무역정책 등 더욱 광범위하고 복잡한 역사적 배경과 요인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불교는 화인 민족주의의 실험 무대가 되었다. 말레이의 식민지 경험과 결과는 두 가지 특징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영토의 분할과 인구(이주민)의 유입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화인 민족주의의 성격을 형성했다.

우선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영국인들이 들어와서 점차 행정관료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도인, 화인들이 들어와 상업 활동과 노동력 공급의 역할을 하였다. 이들 이주민은 말라야(Malaya)에 체류하기보다 본국에 돌아갈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본국 정치에 더 관심이 많았고, 본국 민족주의 운동을 경제적으로 후원하였다. 말레이시아 화인들이 손문의 혁명을 후원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한편 인도네시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는데, 이들은 대체로 말레이 질서에 잘 적응하였고, 말레이인들은 외부 아시아인들에 대한 수적 열세를 만회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환영하였다.

동남아시아에서 민족 문제는 유럽의 도래 이전부터 중요한 문제였다. 버마, 베트남, 태국, 말라야 등은 영토를 둘러싸고 서로 충돌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세력권 내의 소수민족(또는 종족, minority group)의 민족(종족) 문제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유럽인들이 여기에 문제를 더했다. 그들은 버마에서 소수민족 문제를 심화시키고, 베트남을 3개 지역으로 나누고, 말라야는 영국과 태국 지배하에 갈라지게 하였다. 화인과 인도인의 유입, 유럽인들의 문화적 차이 역시 민족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동남아시아인들의 독립을 인정해야 할 때도 서구 관료들은 옛 다양성을 강화하고 새로운 다양성을 만들어냈다. 영국은 소수민족의 자치정부를 후원하고, 이들이 버마에 의해 통치되는 연방이 되기를 제안했다. 프랑스와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권과 비공산권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말레이 반도와 북부 보르네오는 반대로 처음으로 ‘말레이 연방’으로서 통합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불교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이지만, 문화의 형성과 변화라는 관점에서 유의미한 시기는 주로 19세기 이후로 한정된다. 이는 말레이시아 화인을 위한 사원들의 역사에도 여실히 반영되어 나타난다. 말레이시아에서 불교의 역사는 화인들의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과 투쟁 및 민족주의 발흥의 역사와 그 전개 양상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3. 동남아시아의 불교와 민족주의: 버마의 사례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에서 민족 문제는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문제이며, 민족 문제는 곧 식민지와 그에 대한 저항의 문제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민족주의의 대두는 유럽 식민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발흥을 기반으로 한 민족 해방 운동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전개되어 왔다. 버마와 같이 국민국가의 수립이 영국 식민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종족 간 갈등과 대립, 분규가 민족 문제로 비화된 경우에 민족주의의 발흥은 외세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발전되며, 그 과정에서 민족 갈등과 대립이 더 강화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의 발흥이 불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경우를 무시하기 어렵다. 이들 국가에서 불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영역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발전해 왔으며, 각 영역에 깊은 영향을 미쳐 왔다. 특히 버마는 불교 정치의 이념과 원칙, 가치 위에 건설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불교에 의한 반외세 투쟁과 저항은 민족주의의 부흥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민족해방 운동을 선도하면서 반외세 투쟁의 선봉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식민 통치를 겪었던 시기에 불교가 수행했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민족주의의 부흥과 이를 통한 전통문화의 보존이었다. 예컨대 태국과 라오스는 전근대 시대부터 상좌불교를 신봉해 온 국가들이다. 이들 나라에 도입된 불교는 국민의 도덕적 가치, 사고, 행동방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민족주의적 요소를 강화하고, 사회질서와 정치체제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불교교리를 전파하는 승가는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전근대 시대 이후 이 같은 관계는 태국과 라오스 양국에서 전개되는 상이한 역사적 과정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양국에서 승가와 국가권력 간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또 하나의 다른 예로, 캄보디아를 들 수 있다. 캄보디아는 상좌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국가이다. 캄보디아에서 불교는 민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캄보디아불교가 민족주의의 역사와 전개과정에 미치는 사회문화적인 영향은 매우 크고 중요하다. 캄보디아에서 시아누크(Sihanouk) 왕은 불교 세계관을 공유하는 캄보디아 국민의 믿음을 기반으로 캄보디아 민족주의의 이념과 왕권 개념을 적절히 정치에 잘 활용함으로써, 신적인 면모를 구축해낸 인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상좌불교의 조직력이 강했던 버마에서는 1910년경에 영국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가 탄생하였으며, 승가(Shangha)의 조직력이 버마보다 약한 데다가 프랑스 식민정부와 토착 엘리트가 관계를 맺기 시작했던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는 버마보다 20년 정도 늦은 1930년경에 민족주의가 탄생하였다. 이와 같이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불교에는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내재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캄보디아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재건을 위하여 불교조직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조직 개혁을 통하여 민족주의적 정신과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버마(미얀마)의 사례를 중심으로 상좌불교와 민족주의의 역사와 전개의 특징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버마에 도입된 상좌부 불교는 11세기 이래 법(法, dhamma)을 매개로 한 정치권력과 승가의 상호협력이라는 이념형을 지향하는 독특한 정신문화를 동남아에 전파한 선구가 되었다. 정치권력은 불교를 보호하고 승가를 후원하는 역할을 했고, 승가는 민간에서 보통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세대를 이어 불교 세계관과 전통문화를 전달하는 교사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마지막 전통 왕조를 몰락시키고 식민지 지배자가 된 영국은 불교의 후원자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정치·사회적 협력 구조를 붕괴시켰다.

이에 버마인들은 불교와 긴밀히 결부된 민족의식을 각성하며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을 시작했다. 영국 식민주의의 침탈로 버마의 불교는 정치적 기득권이나 경제적 자원과 부, 사회적 권한 등의 모든 권력이 상실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에 버마 승려들은 일반 대중과 함께하면서 민족해방 투쟁의 선구자가 되었고, 영국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1908년 청년불교도협회가 창설되고 이어 1911년 일반불교도협회가 조직되어, 이 단체들이 모든 반영국 투쟁과 저항의 선봉에 서서 버마의 고유하면서도 독자적인 전통문화의 규범과 가치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반영 저항 운동의 시작이었다. 승가 조직에서는 새로운 민족지도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젊은 승려들은 1920년대에 영국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마을에서 일반 대중을 동원하여 반영 시위 및 폭력적인 저항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특히 1920년대 버마 민족주의 운동에는 승려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이후 버마 민족주의는 기독교로 개종한 소수민족을 우대하고 버마족을 배제하는 분할통치, 그리고 경제영역에서 인도인과 중국인의 지배력 확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강력한 배외주의적 속성을 띠게 되었다.
1930년대 출현한 따킨당(The Thakin Party, ‘우리 버마당’이라는 뜻)은 식민지 자치론을 배격하며 사회주의와 무장투쟁으로 급진화되다가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달성하게 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일본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노골화되자 따킨당은 곧바로 노선을 수정하여 영국과 제휴를 통해 일본군을 축출하는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는 성과를 거뒀다. 그 후 따킨당의 입장에 따라 세속의 정치와 개인적 신앙을 구별하고 종족과 종교를 초월하는 조화로운 국민국가 건설의 청사진을 담은 초대 헌법이 제정되었다.

1930년 따킨당이 민족지도자 아웅 산(Aung San)에 의해 결성되자, 청념, 학생, 불교도 등을 포함한 민족지도자들은 모두 따킨당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이들의 사상적 토대는 마르크스 사회주의 이념이었다. 불교교단인 승단은 버마가 독립될 때까지 민족운동을 위한 물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불교사상에서 버마식 사회주의의 이념적 근거와 토대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아웅 산을 비롯한 근대 버마의 지도자들은 거의 불교도였고, 불교의 지원하에 민족해방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독립 이후에도 민족지도자들은 불교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다수 종족인 버마족과 소수 종족들이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공통의 이념적 근거와 토대를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 불교였기 때문에 이들은 불교라는 공통의 문화적 기반하에 하나의 ‘우리의 버마’로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통해 불교는 버마의 다양한 민족 또는 종족을 통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화적, 이념적 기반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버마의 건국 초기 역사는 민족주의의 결정체인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이 이념과 종족, 종교, 정파적 분열로 해체되어 가는 경로를 밟게 된다. 우 누 정권 시기에는 집권당만이 아니라 야당, 공산당, 나중에는 종교 불간섭을 주장하는 집권당 내 반대 파벌, 심지어 군부까지도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승가의 지지를 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승가는 어느덧 헌법이 금지하던 정치영역에 깊이 개입해 갔다. 종교 남용으로 인한 폐해는 연방유지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쿠데타로 집권한 네 윈 군부는 사회에 대한 강력한 억압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종교 남용을 국정 혼란의 원인으로 보고 종교 불간섭을 표방하며 불교와 승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정치화된 승가 분파들에 타격을 입혔다. 또 오랜 시행착오 끝에 1980년 전종단승가총회를 개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유일한 전국단위 승가기구를 조직하고 그 정점에 국가승가대위원회(SSMNC)를 둠으로써 전통 교구 체제 소멸 이래 최초로 전국단위 기구를 통한 승가 통제의 제도적 수단을 확보했다. 그러나 전국단위 승가 기구를 설립하는 일과 그 기구의 요청사항을 모든 승려가 자발적으로 수용할 정도로 권위를 지니게 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1980년대 말 버마에 대한 유엔의 최빈국 지정 및 민생경제 파탄은 학생들이 주도하는 강력한 반정부 투쟁을 낳았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버마인들의 염원은 1988년 8월 8일 민주화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은 반사적으로 건국 초기 각 종족의 승가가 지녔던 분열적 속성을 소멸시키고, 모든 버마인에게 종족과 종교를 초월하는 일체감을 부활시켰다. 승원(僧院)은 민주화 운동에 관한 정보의 전파 기지였고, 승려들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행정 공백을 메우는 질서 유지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90년 국가 법질서 회복평의회(SLORC)가 스스로의 책임하에 실시한 민주총선을 무시하자 승가는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서 반정부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결코 정권에 길들지 않는 도덕성의 최종적인 보호자이자 ‘공적인 양심’임을 드러냈다.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전 국민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군부는 종교 불간섭이라는 오랜 정책을 폐기하고 불교와 승가에 대한 각종 제도적, 재정적 지원을 시작했다. 또 불교를 미얀마화(Myanmarfication)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수용하면서 군부가 불교 전통의 보존과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을 적극 홍보해 나갔다. 그러나 국정 운영 실패로 경제가 극도로 피폐되고 사회 전 부문에 가혹한 억압이 실시되는 상황에서 군부가 불교를 후원하거나 승가를 회유한다는 이유만으로 군부 지배에 대한 정당성(legitimacy)이 생겨나기는 어려웠다.

2007년 8월 15일 갑작스러운 연료비 인상으로 닥쳐온 심각한 생계 위기로 촉발된 승가의 또 한 번의 항쟁은 다른 어떤 세력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엄혹한 시기에 승려들이 부도덕한 권력을 향해 국민을 대변해 저항의사를 표출할 만한 판단력과 권위, 용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부당한 지배에 대한 저항은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내려온 버마 승가의 역사적 역할이고, 향후 버마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어떤 종류의 정치적 변동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승가는 반드시 거기에 함께 하며 민주주의의 도입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버마의 불교는 소수민족의 민족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버마의 소수민족인 까렌족은 서구 식민제국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하면서도 독자적인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권국가 건설을 시도했다. 버마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불교국가로 19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6년 1월 해방된 신생 독립국가(버마연방)이다. 버마 역사상 정치적 주권을 전제한 민족주의 운동은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화하는 시기 소수민족 까렌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일어난 까렌 민족주의와 그 실천 과정은 당시 서구 기독교 선교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소수민족 까렌족은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구전된 까렌 신화에 나오는 ‘생명의 책’에 대한 예언(백인 형제가 ‘생명의 책’을 가지고 귀환할 때 까렌족의 번영이 이루어진다)의 성취로 보고, 기독교와 서구문명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그 결과 (버마족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버마족으로 분리된 까렌독립국 설립을 추구했다.

영국의 식민지 통치 시기 서구의 기독교가 까렌족에 소개되고 전파되었다. 기독교와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까렌 민족주의가 형성되고 까렌 독립국 설립이 추진되었다. 19~20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간 복음과 서구 문명은 버마의 소수민족 까렌족에 주어진 특수 환경, 즉 식민정부의 종족분할 정책, 다수 버마족과의 공존, 낙후된 문명과 정령신앙 등의 영향으로 아시아 여타 지역과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형성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미얀마 민족 정체성의 기본 이념은 미얀마 민족주의 운동 초기에 형성되었다. 민족 이념은 영국 식민지배 하에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때 형성되어 변모 과정을 겪은 현재의 미얀마 민족 정체성은 미얀마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지역적으로든 세계적으로든 가장 장기적이고 가장 갈등적인 양상으로 전개되는 미얀마의 종족 문제는 근본적으로 영국 식민지배의 역사적 유산이다. 미얀마의 종족 문제에서 영국은 다양한 종족에 대한 분할지배를 통하여 식민국가의 과거와 국민국가의 미래를 연결하는 역사적 고리이다.

종족 문제에 관한 아웅 산의 대안은 연합주의적 성향이 부각되고 종족적 정체성과 자율성이 충분히 존중되는 통합(integration)을 지향했다. 그러나 1950년대 우 누(U Nu)의 종족 정책은 버마족 민족주의에 기초하는 패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며, 불교의 국교화를 시도하는 등 소수민족의 동화(assimilation)를 추구함으로써 소수민족의 무장투쟁을 촉발했다.

1960년대 이후 네 윈(Ne Win)은 우 누와 달리 정교분리를 강조하면서도 우 누와 같이 버마족 중심의 패권주의적 동화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소수민족의 무장투쟁이 종식되지 않았다. 언어, 종교, 문화 등 종족적 정체성이 적절하게 배려되지 않은 패권주의적 종족정책이 장기적으로 견지된 것이다.

1988년 이후 새로운 군부정권(SLORC·SPDC)과 각종 소수민족 무장조직의 정전협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최종 해결 이전의 잠정 합의에 불과했며, 협정파기와 무장진압이 빈발했다. 2008년 신헌법에도 합리적 대안이 제시되지 않은 종족정책의 동향은 민주화의 관건으로 작용할 것이다.

스리랑카에 원류를 두고 있는 상좌불교는 12세기 버강(Pagan) 왕조 시기에 미얀마 하부지역의 몽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세기 이후에서 19세기 영국의 식민지배 이전까지 상좌불교는 왕조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작용하였고, 독립 이후에도 우 누(U Nu)를 비롯한 다수 정치지도자의 정치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 영국의 식민지지배로 인하여 상좌불교에 입각한 왕조국가의 정치지배원리는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강력한 상좌불교적 왕권사상이 가지고 있던 동심원적인 중심과 주변의 개념이 서구적 통치이념에 의한 자의적 분할이 시도됨으로써 미얀마의 전통적 가치는 적어도 정치적 측면에서는 상실되고 말았다.
전통적 가치의 복고에 대한 열망과 서구의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동경은 식민지시대의 유산이다. 독립 이후 단절되었다고 여겨진 불교의 중요한 기능을 적극적으로 정립시킨 이는 다름 아닌 신생 미얀마연방의 초대 총리 우 누(U Nu)이다. 그는 서구화된 정치적, 기술적 규범을 지니고 있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전통주의자였으며, 스스로 ‘전륜성왕’으로 불리는 역대 제왕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우 누는 1961년 헌법개정을 통해 상좌불교를 국교로 규정하였으나, 국론분열을 초래하여 곧 네 윈(Ne Win)의 쿠데타를 맞이하였다. 네 윈 군사정부는 상좌불교를 정치 지배에 필요한 정통성의 기반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앙의 자유를 인정함과 동시에 상가(불교승단)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이것은 네 윈이 정치적 전통을 파괴했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독립운동이 전개된 이래 정치의 ‘세속화’라는 근대화의 과제를 하나는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1960년대 이후 군부는 다양한 종족과 이념을 통합하기 위하여 평화협상, 무력진압, 개발계획, 소수민족 지도자의 제도정치권 영입 등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네 윈 정권이 엄격한 정교분리를 주장했던 것과 달리 1988년 새로운 군사정권인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는 종족통합을 포함한 국민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묘하게 상좌불교와 기타 종교의 차별성을 부각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군부통치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상좌불교의 사회적 권위를 이용하고자 하는 군사정부의 의도가 엿보임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종족적 갈등이 종교적 충돌로 전화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던 것이 사실이다.

1990년대 이후 군부정권에 의해 종족 간 대립과 갈등이 더욱 악화되어 까렌족의 반정부활동을 주도하는 까렌민족연합(KNU)에 대하여 ‘종족학살’로 명명될 정도의 심각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군사정부와 서부 여카잉 지역의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자족의 충돌도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소수민족 집단 사이의 종족적 갈등은 종교적 충돌 양상을 드러낸다. 그러한 현상은 19세기 영국의 식민지배 이후 이념적 기능을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상좌불교가 현대에 이르러 종교적 분쟁의 배경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1960년 총선 이후 불교의 국교화와 1962년 쿠데타 이후 소수민족 집단들의 무장투쟁은 정치권력에 대한 군부독점의 명분으로 이용되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불교도들은 기독교도가 중심인 KNU 지도부의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좌불교라는 전통의 합작은 미얀마 소수민족의 최대 반군조직인 KNU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미얀마 군부는 KNU 내부의 불교와 기독교 간의 갈등을 전면에 부각시켜 군부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럽히지 않고서도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린 셈이다.
미얀마 상좌불교의 세계는 끊임없이 미얀마의 정치사회구조에 유입되어 이질적인 종족집단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근본원리로서 작용해 왔고, 미얀마의 정치체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전통적 가치로서 자리 잡아 왔다. 그만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불교문명이 이룩해 놓은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며, 타 종교의 영향력이 거의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

정치권의 전통 회귀는 지배논리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군부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것 같다. KNU의 와해를 초래한 군부의 계략은 역시 기독교도 대 불교도라는 대립구도를 탄생시켰다. 이제 이 지역에서는 종교 간 대립양상이 현저하게 드러날지 모를 일이다.

과거와 같은 상가의 정신적 후원과 국민의 전폭적 지지 없이는 상좌불교라는 전통적 가치의 도구는 효과가 나지 않는다. 그러한 정당성을 배제하고라도 윤리성이 갖춰지지 않은 전통적 가치의 복고는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다.

4. 맺음말에 대신하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남아시아 불교의 저층에는 샤머니즘과 조상신 숭배 등의 토착적 요소가 깔려 있어서, 태국의 경우 귀신(phi)에 대한 신앙이 왕실에도 만연되어 있었고, 미얀마(버마)에는 정령(nat)을 숭배하는 신앙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런 토착문화가 서민들의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배층의 경우 인도나 중국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중국과 인도문화는 주로 엘리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 정치문화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식민통치를 겪었던 시기에 불교가 수행했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민족주의의 부흥이었다. 태국과 라오스는 전근대 시대부터 상좌불교를 신봉해 온 국가들로서, 불교는 국민의 도덕적 가치, 사고, 행동방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민족주의적 요소를 강화하고 사회질서와 정치체제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전근대 시대 이후 이 같은 관계는 대륙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전개되는 상좌불교의 민족주의 역사와 그 전개과정의 상이한 궤적에 따라 국가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에서 승가를 근간으로 하는 상좌불교와 민족주의 간의 관계는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동남아시아 불교의 민족주의 역사와 전개에 관한 것이다. 이를 위해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상좌불교와 말레이시아 화인들의 불교문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연구를 기초로, 앞으로 동남아시아 상좌불교에 대한 비교 연구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연구의 일차적 의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에 덧붙여, 앞으로 동남아의 상좌부불교 국가인 태국과 라오스에서 승가와 국가권력 간의 전통적인 관계가 근대 이후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를 민족주의의 역사와 전개라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비교 분석해 보는 것은 흥미롭고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홍석준 / 목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동 대학원 졸업(인류학 박사). 지은 책으로 《동아시아의 문화와 문화적 정체성》(공저), 《동남아시아의 한국에 대한 인식》(공저), 《동남아의 종교와 사회》(공저) 등이 있고, 동남아시아의 민족과 문화, 동아시아의 문화 정체성 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한국동남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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