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

중국불교사 연구의 권위자 카마타 시게오(鎌田茂雄, 1927~2001)는 초기 중국불교의 역사적 성격을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그는 인도의 아쇼카 왕이나 카니시카 왕에 의한 불교보호 정책은 불교의 자비를 실현하고자 한 법(dharma)에 의한 통치 정책인 데 반해, 중국 남북조 시대 호족국가(胡族國家)의 정책은 불교를 인민지배의 도구로써 이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국가불교의 색채는 불교가 수용된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는 고대 동아시아 전역에 파급되어 호국불교를 지향한 신라불교를 낳고, 일본의 나라불교(奈良佛敎)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있다.

카마타 시게오의 이러한 관점은 일본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역사서에 기술된 것처럼, 고대국가의 자장(磁場) 아래 성장한 일본불교는 중세에 이르러 스스로의 동력으로 불교의 주권을 확립하는가 하면 근세, 근대에 와서는 국가에 예속되는 다양한 형태의 변주를 보여주고 있다. 정교분리가 확립된 현대에 와서도 불교의 현실정치에 대한 참여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내셔널리즘이라는 말은 대체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지칭한다. 이 양자의 성격은 물론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이 논고에서는 후자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일본불교사에서 불교 독자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엄밀히 말해 불교계의 그러한 성향은 근대국가의 우산 아래에서 발생한 국가주의가 파생시킨 이념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국가라는 큰 틀에서 볼 때, 불교의 초국가적인 보편주의는 지역의 국가권력이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강력한 사상적 헤게모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헤게모니를 둘러싼 왕권 혹은 막부라고 하는 국가적 패권으로부터의 독립 혹은 예속이라는 관계가 형성되어 온 만큼 이를 역사적으로 돌이켜보고, 교훈 또한 그 역사 속에서 얻고자 한다.

1. 국가불교와 민중불교

일본의 고대불교를 내셔널리즘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국가라는 근대적 의미의 개념을 고려한다면, 고대불교와 국가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국가와의 관계라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불교의 내셔널리즘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대와 중세는 각각 국가와 민중의 불교로 나눌 수 있다. 고대 또한 국가불교와 민중불교로 다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국가불교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국가가 관장한 불교와 국가에 예속된 불교라는 의미이다. 전자는 고대의 경우에, 후자는 근세와 근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대의 국가와 민중불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교의 유입은 외부로부터이지만 초기의 전파는 국가권력에 의한 것임을 말한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킨메이(欽明) 천황 대인 552년, 백제로부터 불교 유입은 불교의 공전(公傳)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국가에 의해 주도된 불교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그 기록에 대해 이시다 미즈마로(石田瑞麿)는 “석가불 금동상을 번신(蕃神)이라 부르고, 일본의 천지사직의 백팔십 신인 국신과 같은 신으로 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고 한다.

번신은 일본인이 신을 믿는 것처럼 외국인이 믿는 신을 말한다. 불상을 외국의 신으로 본 것이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주체적인 외교 관계에서 볼 때, 국가의 사직에서 받드는 신이 있음에도 다른 국가가 믿는 신을 굳이 또 들여올 필요가 있겠느냐는 항간의 반발을 의식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숭불파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 일족과 배불파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 일족과의 싸움은 국가권력을 둘러싼 것이기도 했다. 소가노 이나메의 승리로 불교가 갖는 국제적 위상을 활용하여 율령제를 기반으로 한 왕권 주도의 고대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실이 7세기 초, 쇼토쿠(聖德) 태자에 의해 제정된 일본 최초의 헌법인 ‘17조 헌법’이다. 유교와 불교의 사상이 반영된 본 헌법의 제2조에는 “삼보를 독실히 경배하라. 삼보는 불법승이다. 즉, 4생이 마지막으로 귀의할 곳이요, 모든 나라의 최고의 가르침이다. 어느 세상, 어떤 사람이 이 법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랴. 사람이 매우 악한 자는 드물다. 잘 가르치면 따르게 된다. 삼보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지고 굽은 것을 바르게 할 것인가.”라고 하여 불교를 신봉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불교가 국가운영의 실제적인 이념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정일치 사회에서 불교의 가르침이 국가와 사회의 또 하나의 규준(規準)이 된 것이다. 또한 유입 초기의 씨족불교로부터 국가불교로 격상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국가의 입장에서 불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리했는가. ‘17조 헌법’의 삼보를 중심으로 보자면, 먼저 불보는 국가적 사찰의 건립으로 시작된다. 초기의 씨사(氏寺)로부터 7세기 후반부터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관사(官寺)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관대사(官大寺)는 천황의 발원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대관대사(大官大寺)로 봉해진 나라(奈良)의 대안사(大安寺), 흥복사(興福寺), 법륭사(法隆寺)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지방의 행정 중심지에 설립한 국분사(國分寺), 사립의 사원을 관사화한 유식봉사(有食封寺)나 정액사(定額寺) 등이 출현했다. 이들 사원의 역할은 진호국가(鎭護國家)를 기원하는 것이 제1의 의무였다. 수도 나라를 칭하는 남도(南都) 7대사니 15대사니 하는 것은 국가에 의해 번영한 사원을 말한다.

법보는 소위 진호국가 삼부경이라고 칭하는 《법화경》 《인왕경》 《금광명경》이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활용되었다. 보살도를 주장하는 대승경전이 주가 됨을 알 수 있다. 쇼토쿠 태자는 《승만경》 《법화경》 《유마경》에 대한 주석인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들 경전 또한 마찬가지이다. 승보의 질서는 7세기 전기, 중국의 승관제도를 도입하여 확립한다. 승강(僧綱)으로 불리는 승관직에는 최고위의 승정(僧正), 그 밑에는 승도(僧都)와 법두(法頭)를 두었다. 후에는 법두가 율사로 바뀌었다.

승려에 관한 제도는 8세기 초에 실시된 승니령(僧尼令)에 의해 확립되었다. 실제 내용은 승단의 계율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사원의 운영관리를 책임지는 상좌, 주지, 유나(維那)의 삼강(三綱) 또는 승강의 선출 방식 등을 규정한 것을 놓고 볼 때, 불교교단에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국가의 통제하에 두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7조로 이루어진 승니령에는 승려의 민간포교활동을 금지하고,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다. 소위 사도(私度) 활동을 금지한 것이다. 이 사도를 행하는 자를 사도승이라고 하여 엄하게 처벌하였다.

사도승은 율령제 체제에서 국가의 허락을 얻지 않고 득도한 자를 말한다. 득도는 국가의 관리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7세기 말 제정된 것으로 보이는 연분도자(年分度者)는 출가자를 배출하는 제도를 말한다. 각 종(宗)과 사원에 소정의 시험을 통과한 자를 득도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관의 허락 없이 이루어지는 사도는 8세기에 들어서면서 전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민간포교를 자처하는 사도승은 국가의 통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활동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씨족의 후예인 교키(行基, 668~749)였다. 그는 당시의 수도 헤이죠(平城, 현재의 나라)의 조영을 위해 모인 민중의 고통을 구제하였다. 농민을 위한 관개사업을 하거나 여행자를 위해 선착장에 무료숙식소를 운영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민중의 환영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지금도 수많은 사찰은 그와 관련된 연기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한때 국가로부터 승니령을 위배한 것에 의해 탄압을 받기도 하였지만, 국가의 위신을 세운 동대사의 건립에 재원을 모으는 일에 협조하여 마침내 대승정에 오르게 되었다. 국가불교, 다시 말해 국가가 관리한 불교를 넘어 불교 스스로의 생명력이 솟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9세기 초에 성립된 일본 최초의 불교설화집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에는 교키를 포함한 사도승들에 의한 민간포교의 다양한 이야기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고대 후반 소위 히지리(聖)의 활동으로 이어진다. 히지리는 산악의 수행승이나 둔세자를 포함, 다리나 도로를 건설하는 승려, 조상(造像)이나 사경 등을 권선하는 승려들을 말한다. 이 외에도 이들은 시대를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중세 신불교의 여러 조사들이 비록 천태종의 영향 아래에 있었지만, 불교의 시대적인 역할에 한계를 느끼고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전통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12세기 말엽, 시대적 혼란 속에서 말세와 말법의 위기를 느낀 조사들은 대교단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중의 고통을 불법으로 치유하기 위한 각자의 신념하에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켰다.

민중 지향의 신조사들은 불법승 삼보를 각각 자기화하여 선택과 집중의 교단을 출현시킨 것이다. 불보에 해당하는 종파는 아미타여래의 정토를 기반으로 한 호넨(法然, 1133~1212)의 정토종, 신란(親鸞, 1173~1262)의 정토진종, 잇펜(一遍, 1239~1289)의 시종(時宗)이다. 법보에 해당하는 종파는 《법화경》을 의미하는 《나무묘법연화경》의 제목을 외는 니치렌(日蓮, 1222~1282)의 일련종이다. 승보 교단은 에이사이(榮西, 1141~1215)의 임제종, 조동종의 도겐(道元, 1200~1253)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대 말 종교권력이 된 천태종과 진언종의 왕법과의 밀착에 회의를 느끼고, 믿음과 수행을 통한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여 불법을 시대화 및 대중화하여 토착화시켰다. 고대의 국가불교는 불법의 자기 세계 구현에 자양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2. 단가(檀家)제도와 불교의 국가적 기능

엄밀히 말해 현대 일본불교의 틀이 형성된 것은 근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근세 에도막부(江戸幕府)가 만든 본말사제도와 사청제도에 의해 형성된 단가제도를 사회문화적으로 상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가제도는 불교가 가(家)의 종교로 고착화하는 핵심 역할을 하였다. 이는 에도막부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타마무로 후미오(圭室文雄)는 근세적 본말제도의 목표에 대해 다음의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사원이 중세 이래 가지고 있던 경제적 특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즉, 사령(寺領)을 삭감하는 것, 둘째, 사원의 정치적 특권인 ‘수호불입권(守護不入權, 사령이나 경내에 영주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권리)’을 거두는 것, 셋째는 권력이 제거된 사원을 막번(幕藩) 체제의 정치기구의 말단으로 편성하여 막부의 종교정책이 본사를 통하여 말사에 관철되는 지배기구를 만드는 것, 넷째는 이전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유력 사원의 보호가 있었는데 이러한 대사원의 세력을 감소할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본말사제도의 의도적인 제정은 종교적 권력을 막부 초기부터 봉쇄하기 위한 전략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막부는 전국(戰國) 시대에 미쳤던 불교계의 영향력을 인식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통제하기로 한 것이다. 그 첫 순서가 법도(法度)의 제정이었다.

법도가 최초로 법령으로써 내려진 것은 ‘고야산사중법도(高野山寺中法度)’ 5개조였다. 진언종이야말로 에도막부가 가장 먼저 제어해야 할 대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1616년까지 진언종은 물론 정토종, 천태종, 법상종, 임제종, 조동종, 일련종에 대해 지속적으로 법도를 발포했다. 바로 내릴 수 없는 사정을 가진 정토진종과 시종에 대해 이때까지는 발포하지 않았다. 전 종파에 걸쳐 완비된 것은 1665년 ‘제종사원법도’에 의해서였다. 이후에도 두어 차례에 걸쳐 제도가 정비되지만, 그 기준은 ‘제종사원법도’였다.

이 법도의 내용은 종파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승려의 계율 준수, 종단의 교학 연찬에 대한 장려, 사찰 재정 관리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대로 넘어가면서는 본말사 관계 엄수, 사찰의 경제활동에 대한 규제, 단가에 대한 금전 강요 금지, 사찰 경내의 음주나 재(齋)에 대한 규제 등이었다. 각 종파에 대한 통제가 확립되면서 사찰과 단가와의 문제나 승려의 일상생활까지 간섭하게 된 것이다.

법도와 더불어 본말사제도의 확립에 직접적인 역할을 한 것은 막부에 의한 본말장(本末帳)의 제정이었다. 이 본말장은 1632년부터 1633년에 걸쳐 막부에 의해 집중적으로 제정되었다. 법도처럼 정토진종을 제외하고는 모든 종파에 해당하였다. 이 시기에 전국 모든 사찰의 본말사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1635년 막부의 종교행정을 담당하는 사사봉행(寺社奉行)의 설치와 같이 종교정책이 확립되면서 각 종파의 본말사 관계 또한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1692년, 1745년, 1786~1790년, 1834년에는 막부가 각 종파에 본말장의 제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본말사는 정부의 조직처럼 각 종파의 본산 아래에 말사들이 층층이 계급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사찰은 막부 산하의 위계질서(hierarchy) 속에 편입된 것이다.

이어 막부는 사찰에 전 민중을 묶어두는 단가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사원은 말단행정기관으로 변모하였다. 단가제도가 본격화된 계기는 1637년에 일어난 시마하라(島原)의 난이다. 나가사키 현의 동남부에 위치한 시마하라에서 영주의 가렴주구에 반발한 소위 하쿠쇼 잇키(百姓一揆)라는 민중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양쪽 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막부에 의해 다음 해에 진압되었다. 봉기에 참가한 민중 가운데는 다수의 기독교인이 들어 있었는데, 막부는 이들이 반봉건적 사상을 확산시킨 것으로 지목하고 전국에 걸쳐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을 개시하였다.

기독교를 금지시키고 강제로 개종을 하도록 정책을 취한 것은 시마하라의 난 이전인 1612년의 금교령(禁敎令)에 의해서였다. 시마하라의 난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사찰로 하여금 모든 민중을 대상으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는 증명을 발급하도록 하는 사청제도(寺請制度)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증명서를 사청증문(寺請証文)이라고 한다. 이것을 가지고 있어야만 이전, 여행, 혼인 등의 자유가 확보되었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이 종문인별장(宗門人別帳)이다.

시마하라의 난 이후인 1640년에 막부 직할의 종문아라타메야쿠(宗門改役)라는 직명을 두고 종문아라타메(宗門改)를 조사하였다. 종문아라타메는 개인과 집안이 어느 종파, 어느 사찰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조사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 결과를 매년 조사하여 기록한 것이 종문인별장이고, 소속 사찰을 단나사(檀那寺)라고 불렀다. 1664년에는 이러한 사청제도가 전국적으로 일제히 실시되었다. 이후 영주에 의한 부역 능력을 조사하는 인별장(人別帳)과 통합된 종문인별개장(宗門人別改帳)으로 이전되었으며, 1671년에 각 지방에서는 그 작성을 의무화하였다. 막부의 호적 기능을 맡게 된 것이다.

단가제도는 이렇게 하여 완결되었다. 사찰은 일정한 권력을 갖고 막부의 통제정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단가는 사찰의 불사와 관련한 재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자동으로 떠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승려의 부패가 드러나기도 하였으며, 막부 말기에는 지방의 폐불정책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단가제도는 1871년 메이지(明治) 신정부에 의한 호적제도가 제정되면서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근세에 집안의 제사 기능 등 장례불교 정착의 주원인이 된 사단(寺檀)관계는 하나의 전통으로 계승되어 근대를 관통하여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3. 국가신도(國家神道)와 국체론적 불교

1) 국교신도화와 불교계

1868년 메이지 유신 전후는 긴박한 시기였다. 에도막부가 붕괴하고, 새로운 정부는 천황의 권력을 복귀시켜 신국가의 강력한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1867년, 에도막부의 마지막 장군인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 대정봉환(大政奉還)과 이에 따른 왕정복고 선언, 1868년, 막부파와 신정부군과의 내전인 무진(戊辰) 전쟁과 유신정부의 기본 방침을 밝힌 메이지 천황의 5개조 서문(誓文) 발표, 1869년, 수도의 동경 천도 발표와 모든 번주로부터 토지와 인민을 조정에 반환한다는 판적봉환(版籍奉還), 1871년, 호적법의 공포와 번을 없애고 부·현을 설치한다는 폐번치현(廢藩置縣) 등등 혼란의 와중에도 수많은 정책이 나오고 실행되었다.

이 시기 일본식 법난인 폐불훼석(廢佛毁釋)이 일어났다. 그 계기는 메이지 원년에 신정부가 하달한 신불(神佛) 분리 정책이었다. 최종의 목표는 근대국가 정체(政體)의 구심점이 된 천황의 권위를 부활시키고,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신도국교화였다. 1300년 전, 불교가 유입될 때부터 시작된 일본 고유의 신불습합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1868년, 고대 신정행정을 도맡았던 신기관 재흥(神祇官), 전국의 신사에 별당 혹은 사승(社僧)으로 있던 승려를 환속시킨 사승환속령(社僧還俗令), 신사의 신직에 의한 신장의 실시를 허가한 신직신장령(神職神葬令), 그리고 마침내 신사와 사찰의 분리를 명한 신불판연령(神仏判然令)의 포고가 내렸다. 신불판연령에는 불상, 불구는 물론 승려의 환속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이 내려지고 있다.

이처럼 불교를 배제하고 타자화해 가는 가운데 신정부의 국교신도화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를 담당하는 기관의 설치이다. 초기의 신도성(1868)으로부터 신기성(1871)→교부성(1872), 그리고 1889년 일본제국헌법과 황실 전범(典範) 제정, 마침내 1890년, 교육칙어의 발포를 통해 국가체제는 물론 국교신도화에 정점을 찍게 된다. 이후 견고한 체제를 기반으로 신사국과 종교국(1900)→신기원(1939)을 통해 패전에 이르기까지 국가신도인 신사신도를 행정망에 버금가는 지역의 구심점으로 삼고, 국가의 상징이자 최고 권력인 천황제와 그 이념형인 국체론은 모든 종교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제국주의에서 군국주의, 그리고 파시즘으로 치닫는 기반이 구축된 것이다.

전통적인 신불습합에서 논의되던 본지수적(本地垂迹)의 사상은 이렇게 해서 역전되고 만다. 즉, 신의 본지인 불이 신의 모습으로 일본의 백성을 구제하고자 나타났다는 설은 이제 완전히 뒤바뀌어 신이 본지이고 불이 수적인 신주불종(神主佛從)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고 신은 시간적으로 아득히 먼 일본 민족 공통의 조상으로 누구나 그것에 기원을 두게 되었다. 따라서 신은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야마토(大和, 일본의 고칭) 민족의 제사 대상이 되어 누구나 의무적으로 경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신은 역사를 초월하여 역사 속에 지금 살아 있는 존재이며, 천황은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도 부여한 절대적 신성성을 갖춘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 것이다.

또한 때맞추어 대두된 신도 비종교론은 국가의 공식적인 견해이며, 제국헌법이 명시한 신교의 자유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해석을 내렸다. 이러한 논리를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默雷)를 비롯한 불교인들도 찬동했다. 시마지 모쿠라이는 1872년, 국민에게 존황 및 애국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설립한 신불합동의 대교원(大教院)에서 불교가 활동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정교분리의 원칙을 들어 자신의 종파가 탈퇴하도록 했다. 그리고 신도에 대해서는 “제신(諸神)을 숭경한다는 것은 종문상 소위 우리의 현당(現當, 현세와 내세)에 이익을 주거나 우리의 제신이 영혼을 구제한다는 그 신을 경신(敬信)하는 것이 아니다. 대저 우리나라의 제신은 황실 역대의 조종(朝宗), 혹은 우리 각자의 선조, 국가유공의 명신덕사(名臣德士)를 모신 것이다.”라고 한다.

이제 불교인 스스로도 종파를 초월하여 국가신도를 믿음에 선행하는 공동의 조상으로 모시고 예를 표해야 했다. 1889년에는 국공립 및 사립의 모든 학교에서는 종교교육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를 교육의 기본방침으로 정한 교육칙어가 등장한 것은 다음 해였다.

“우리 신민이 충의와 효의를 다하고,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세세에 걸쳐 훌륭한 성과를 가져온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국체(國體)의 정화(精華)인바, 교육의 연원이 실로 여기에 있다. (중략) 언제나 국헌을 무겁게 여기고 국법을 따라야 하며, 일단 국가에 위급의 사태가 발생할 때는 정의로운 용맹심으로 봉사함으로써 천양무궁(天壤無窮)할 황실의 운명을 도와주어야 한다.”

이로써 국가, 국가종교=국가신도(신사신도), 교육은 삼위일체가 되었다. 불교는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중엽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자신의 단가를 볼모로 국가에 봉사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불교 스스로는 20세기 초기까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공인교 운동을 통해 국가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국수주의적 활동이었다. 거의 모든 불교 교단은 청일전쟁으로부터 시작해 태평양 전쟁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또는 대만과 한국 등의 피식민지 국가에서 군국주의 모국의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자신의 교의를 왜곡시키면서까지 국가의 주구가 되어 갔다.

덧붙일 것은, 신도 국교화의 문제는 오늘날 야스쿠니(靖国) 신사 문제와도 여전히 깊은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전쟁터의 병사들은 “구단(九段, 야스쿠니 신사가 있는 곳의 지명)에서 만나자.” 하고 외치며 죽어갔던 것이다. 불교 또한 이 야스쿠니를 사후의 정토라고 주입시켰다.

2) 전시교학과 국체론적 불교

전시교학(戰時敎學)은 일본불교 내셔널리즘을 지원하는 교의를 말한다. 국체는 천황 중심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국체론적 불교는 전시교학을 통해 국가의 이념이나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봉사하는 불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시교학의 내용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정토와 선에 있어 대표적인 정토진종과 조동종, 그리고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일련종의 전시교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토진종의 전시교학의 핵심은 진속이제(眞俗二諦)이다. 주지하다시피 진제는 승의제(勝義諦)라고 하여 궁극적 진리를 말하며, 속제는 세속제(世俗諦)라고도 하여 세상 속의 진리를 말한다. 용수(龍樹)를 비롯하여 많은 조사가 이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일본에서는 천태종의 조사 사이초(最澄, 767~822)가 진제는 불법, 속제는 왕법으로 보았다. 정토진종의 종조 신란(親鸞)은 진속이제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근세에 교세 확장을 이룬 8대 렌뇨(蓮如, 1415~1499)에 의해 왕법위본 인의위선(王法為本 仁義為先)의 논리가 확립되었다. 즉, 왕법을 근본으로 하고, 인의를 우선하라는 것이다.

신심의 종교를 확립한 정토진종의 입장에서 진속이제의 근본 의미는, 먼저 내면에 신(信)을 세우고, 밖으로는 왕법을 따를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가 평가절하된 전시교학에 이르러 국체론적 불교를 성립시킨 핵심 교의가 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10개월 앞두고 정토진종의 본사 본원사(本願寺)에서는 “소위 ‘고도국방국가’의 건설에 일억 국민은 인력, 물력의 총력을 들어서 국가의 요청에 끊임없이 봉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보다도 국가가, 이익보다는 공익이, 나보다는 무아가 먼저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교단 매체를 통해 자신의 신자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은 전체주의 국가의 말로와 왜곡된 진속이제의 결합이 극명하게 드러난 오욕의 전쟁이었다.

국가의 운명과 함께할 수 있었던 교단 체제가 가능했던 것은 법주를 중심으로 한 유사국가적 위계질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양자의 구조적 유사성은 정토진종의 내셔널리즘을 더욱 강하게 가동시킬 수 있었다. 후쿠시마 히로타카(福嶋寛隆)가 언급하는 것처럼 결국 병립해야 할 교학상의 틀을 찢고 진제가 속제에 종속되는 것에 이른 것이자 전시교학의 극한 형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는 조동종의 전시교학으로 그 핵심은 전쟁선(戰爭禪)과 일살다생(一殺多生)을 들 수 있다. 조동종의 조사 도겐(道元)은, 무한한 수행이야말로 성불임을 의미하는 수증일여(修証一如)와 석가불과 같은 자세의 좌선이야말로 최고의 수행임을 말하는 지관타좌(只管打坐)를 통해 일체시 일체처에 불법이 드러나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을 주장하였다. 현실에서는 모든 삶이 불법의 묘용 아님이 없는 조동선을 확립한 것이다.

그러나 군국주의하의 전시교학은 이러한 전통의 가르침을 왜곡했다. 살상이 행해지는 전쟁터에서 무사도와 선을 연계시킨 전쟁선이나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다수를 살린다고 하는 파계의 논리를 공공연히 제시한 것이다. 이는 같은 선종인 임제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선과 전쟁에 대해서는 이미 브라이언 빅토리아(Brian Victoria)에 의해 잘 밝혀진 바 있다.

태평양전쟁 중에 당시 조동종 관장 하타 에쇼(秦慧昭)는 출진 학도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의 위대한 이 전쟁 목적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해 어디까지나 끝까지 싸워 마침내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은 무력을 위해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위대한 도의(道義)를 철저하게 하고자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일본의 싸움은 진무(神武)의 전쟁이다. 제군은 신병(神兵)이며, 어디까지나 신성(神性)에 사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성은 자신을 몰각하는 곳에 나타난다. 사지(死地)에 몸을 내던지는 그때만 나타난다. 선문(禪門)에 있어 대사일번(大死一番), 대활현성(大活現成)이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진무는 신과 인간을 이은 진무천황을 말하는 것으로 천황가의 조상이자 일본 개국의 초대 천황이라고 한다. 교단 최고 지도자가 국체론적 불교를 옹호하는 한편, 전쟁을 위해 선의 정신을 철저히 왜곡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련종의 전시교학은 종조 니치렌(日蓮)의 정신을 근대국가적 차원에서 해석한 일련주의로부터 발원된다. 특히, 내셔널리즘과의 교의적 관계는 왕불명합(王佛冥合)의 사상으로 이어져 있다. 왕불명합은 불법과 왕법이 명합한다는 것으로 《법화경》의 가르침이 국가와 사회에 편만해지고, 이 세상이 상적광토의 정토가 구현된다는 니치렌의 교시에 연원하고 있다.

이 일련종은 소위 니치렌의 제자인 6노승(老僧)에 의해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후 분파된 일련종은 근세에 와서 막부의 정책 아래 《법화경》의 전반부인 적문(迹門)과 후반부인 본문(本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일치파(一致派)와 승렬파(勝劣派)로 통합되었다. 그렇지만 근대에 와서는 교의를 둘러싸고 다시 세포 분열되었다.

근대 일련주의를 주창한 인물에는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와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学)가 있다. 전자는 근대적 교학의 수립을 위한 입장에서, 후자는 국주회(國柱會)와 같은 조직을 창립, 정치참여도 불사한 재가주의 종교 활동의 이념으로 일련주의를 주장했다. 종조의 3대 비법, 즉 석존을 본문의 본존, 나무묘법연화경 7자를 본문의 제목, 그리고 법화행자의 참회수계의 도량을 본문의 계단(戒壇)으로 하는 것을 국가주의 확립에 적용하였다. 그리고 전시교학의 핵심 목표로서 본문의 계단을 천황 통치하의 일본에 건립, 일본을 세계 통치의 제국주의적 근본국가로 만드는 것으로 정했다. 석가불의 영산정토를 국가와 등치시킨 것이다.
근대의 왕불명합은 왕법불법 사상에 기반한 일련종계 전시교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통적으로 불법을 비방하는 자에 대한 교화 방법을 제시한 절복(折伏) 사상은 국수적 배타주의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으며, 식민주의와 전쟁참여의 명분을 제공했다.

근대 일본은 서양의 자본주의를 수용, 네오오리엔탈리즘(Neo-Orientalism)적 근대 제국주의 국가 노선을 착실히 밟았다. 또한 제정일치의 천황제를 확립한 후, 주변 국가에 대한 정복의 길로 나섰다.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시베리아 출병(1918),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등 10년 단위의 대외전쟁은 이웃 국가와 국민은 물론 자신의 국민을 고통 속에 밀어 넣었다. 태평양전쟁에서만도 수백만 명의 자국민이 죽었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가 말한 소위 ‘무책임의 체계’는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형성된 국가주의 불교와 근대적 교의의 왜곡된 현실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후자는 자신의 단가를 전쟁 수행의 도구로 전락시킨 무책임의 교학이다.

4. 일본불교 내셔널리즘의 역사적 교훈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 기원은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불교와의 길항관계 속에서 중세에 교단의 독립을 확보했지만, 세력의 확장에 따라 근세에 국가의 하부구조로 편입되는 한편, 근대에는 폐불훼석의 여파로 자발적인 국가주의로 치닫는다. 이리하여 근대적 의미의 불교 내셔널리즘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근인(近因)으로 본다면, 근세의 본말사제도와 단가제도, 근대 신정부의 신도 국교화 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폐불훼석, 그리고 국가신도의 하부구조로 다시 전락한 불교의 황도화(皇道化)와 자발적인 국체불교의 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 내셔널리즘으로부터의 역사적 교훈은, ‘국가로부터 불교의 주체성 확립은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질문과 해답은 이미 일본불교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다.

이에 대해 먼저 조동종의 도겐의 가르침으로부터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도겐의 재세 시, 카마쿠라(鎌倉) 막부 5대 실권자인 호조 토키요리(北条時頼)로부터 사찰에 2천 석의 토지를 기증하고자 하는 기진장(寄進狀)을 얻은 수좌 겐메이(玄明)가 도겐에게 보고를 했다. 그에 대해 도겐은 “더럽다”고 하고, 겐메이를 빈출(擯出) 즉, 파문시켰다. 그리고 그가 앉아 수행하던 자리를 뜯어내고, 그 자리의 아래에 있는 흙마저 파내버렸다고 한다. 이 일화는 조동종 내에 전승되던 것을 후대에 켄제이(建撕, 1415~1474)가 정리한 것이다.

도겐의 이러한 행위는 여러 가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남송의 천동여정(天童如淨)으로부터 법을 받아 조동선을 확립한 선자(禪者) 도겐이 종교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역사를 통해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도겐은 중국에서 3무(武)1종(宗)의 법난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아니라면, 조동종에 하나의 선적 가풍(家風)으로 이어진 것이다. 조동 교단은, 국가권력은 현실적인 활인검이자 살인검과 같음을 깨달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살활자재는, 깨달음의 분상에서 구제 행위로 전이되는 각자(覺者)의 무한한 자비법력의 양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권력마저 무화시키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겐메이에게 행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결과, 중세 임제종이 막부 및 귀족계급의 귀의에 힘입어 수도를 중심으로 성장한 것에 반해 도겐의 문하는 지방을 중심으로 일반 민중 및 지역 유지들의 도움으로 교선을 확장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카마쿠라 시대 말기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남송의 제도를 모방한 5산10찰에 조동종의 사찰은 속하지 않았다. 국가권력과는 일정한 선을 그은 것이다.

조동종과는 다소 다른 측면이지만, 사상적 맥락이 유사한 일련종의 불수불시파(不受不施派)를 들 수 있다. 불수불시파는 에도막부 때 종파로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 근원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5년 천승공양회(千僧供養会)에 당시 8종 승려의 참여를 명령한 것에 대해 일련종의 니치오(日奥, 1565~1630)가 종조의 불수불시의 교의에 반한다는 이유로 나가지 않을 것을 주장한 것에 있다. 불수불시의 의미는, 다른 종파 신자의 보시는 받지 않으며, 일련종의 신자는 다른 종파의 승려에게 공양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물론 보는 각도에 따라 해석이 분분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국주(國主)의 보시를 받아도 된다는 수불시파와 이에 반대한 불수불시파가 오사카 성에서 대론을 벌이도록 한 뒤, 니치오를 공명위배의 죄로 유배시켰다. 이후 니치오의 사상을 추종하는 불수불시파는 갖은 박해를 당하고 기독교인들처럼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665년에 막부는 이들 포교를 금지하고, 타 종파로 개종하도록 하였다. 200여 년이 지난 1876년에야 비로소 불수불시파의 포교가 신정부에 의해 허락되었다.

불수불시파는 니치렌의 가르침에 따라 불주국종(佛主國從)의 길을 걸어갔다고 할 수 있다. 즉, 근대 일련종의 내셔널리즘의 사상적 축인 절복사상을 오히려 반대로 국가권력을 경계하는 데에 활용했던 것이다. 니치오는 국주의 보시를 받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정법을 비방하는 허물을 알게 하고, 정법이 행해지지 않아 일어나는 재난과 불행에 대한 국주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는 간효(諫曉)의 일종이라고 한다. 간효는 니치렌의 《입정안국론(立正安国論)》에 나와 있듯이 《법화경》의 행자로서 통치자에 대한 신앙적 결단을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시각에 따라서는 정치적 비판으로 볼 수도 있다.

니치오는 이러한 종조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종조가 3번의 간효로 유배를 갔듯이 자신도 또한 유배형에 처해져 신앙적 유대를 느꼈던 것이다. 근대 일련종은 적어도 니치오가 경고했듯이 국가로부터 의(義)와 도(道)가 아니면 천하를 주더라도 받지 않는다는 신념을 돌이켜보았어야 했다. 그 근본적 가르침에 비추어 국가와의 관계를 재고했어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근대에 천황을 시해하고자 했다는 대역사건의 죄목으로 36세에 사형된 우치야마 구도(内山愚童, 1874~1911)로부터 불교 내셔널리즘의 문제를 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엿보고자 한다. 우치야마는, 러일전쟁 이후 1920년대까지의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의 민주주의적 물결이 일던 소위 타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시대에 활동하던 조동종 승려였다. 대한제국은 불행하게도 일제에 의해 식민지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국가의 지원하에 자본주의가 번창하는 가운데 수많은 농민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드는 바람에 도시 빈민의 속출, 쌀값 소동, 파업 등의 노동쟁의와 같은 많은 사회문제가 대두되었다. 자본에 의한 침탈로 피폐된 농촌의 농민들은 소농으로 전락하여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등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1910년 천황암살을 기도했다는 죄로 전국에 걸쳐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가 체포되었다. 그중 주모자로 코토쿠 슈스이(幸徳秋水)를 비롯한 26명이 기소되었다. 다음 해 1월 24명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12명을 제외한 12명에게 판결 6~7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여기에 우치야마 또한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사형되었다. 대역사건에는 이 외에도 정토진종, 임제종, 진언종 등 다양한 종파의 승려들도 연루되었다.

우치야마에 대해서는, 농민의 고통은 천황을 비롯한 부자, 대지주에게 있다는 《무정부공산(無政府共産)》이라는 책자를 비밀리에 출판한 것을 이유로 삼았다. 이 저술에서 그는 반전사상은 물론 소작료나 세금의 납부 거부, 징용을 거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1904년, 〈평민신문〉의 〈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라는 기고란에 “나는 불교의 전도자로서,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차법평등무고하(此法平等無高下), 일체중생적시오자(一切衆生的是吾子)라고 하는 이것이 나의 신앙의 입각지인 금언(金言)인데, 나는 사회주의가 말하는 바 앞의 금언과 완전히 일치함을 발견하여 마침내 사회주의의 신자가 된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진리 앞에 불성의 내적 평등성과 사회주의의 사회적 평등사상이 일치함을 고백한 것이다. 또한 불법을 전하는 승려로서 불타의 입장을 대신하여 고통 속의 민중이야말로 자신의 자식이라고 본 것이다.

교단은 사형 후, 우치야마에 대해 멸빈을 내려 승적을 박탈했다. 이후 가족들은 끝없는 멸시와 박해를 받았다. 후에 대역사건 자체가 정부와 경찰의 음해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1993년에는 우치야마에 대한 교단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으며, 그의 사후 백 년이 된 2011년에야 비로소 조동종은 〈참회와 평화실현을 향한 서원〉이라는 담화를 통해 참회하고 사죄했다.

도겐, 니치오, 우치야마 구도의 공통점은 시대적인 중도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폭력을 무기로 하는 국가권력 앞에서 불법의 가르침에 입각, 어떻게 하면 시대적인 추의 균형을 잡을 것인가 고뇌했다. 그들은 불타와 종조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제자들과 고해 속의 민중을 향해 거침없는 사자후와 뜨거운 애민(愛民)의 자비를 베풀었다. 영욕으로 점철된 불교의 역사 이면에는, 이러한 다르마(dharma)의 냉철하고도 주체적인 양심이 쉼 없이 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

 

원영상 / 원광대학교 정역원 연구교수. 원광대학교 졸업. 〈8宗綱要 解釋〉 〈일본불교의 계율수용과 변용〉 〈한국학계의 일본불교연구 동향〉 등의 논문과 저서로 《근대 동아시아의 불교학》(공저), 《불교와 국가권력: 갈등과 상생》(공저) 등이 있다. 현재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불교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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