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

1. 머리말

타이쉬(太虛, 1889~1947)는 중국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그는 불교개혁뿐만 아니라 사회계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른바 불교 3대혁명의 제창과 인간불교의 제안은 그의 불교개혁과 사회계몽 기획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중일전쟁 기간 일본에 대항하여 중국 인민의 단결을 외치면서 불교의 역할을 강조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불교는 과연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고, 역할은 무엇인지 탐구했다. 그는 중국 민족의 단결이 대단히 강조되는 시기에 불교호국을 선도했다. 물론 그가 강력한 국가주의로 무장하여 중국불교를 이끈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중국인으로서, 그리고 승려로서 국가의 위난을 맞아 적어도 불교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려 했다.

이 논문에서는 타이쉬가 중화민국 건립 이후 보인 국민도덕 제창과 국가 위난을 맞아 제안한 불교호국 등을 통해 그가 내셔널리즘과 불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이론적인 면에서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주로 1910년대 저작인 《중화민국 해석》과 《불교도와 국민외교》 《중화민국 국민도덕과 불교》 그리고 1930년대 전쟁 기간 저작인 《불교와 구국》과 《불교와 호국》 《항마구세와 항전건국》 등을 분석한다. 그의 활동보다는 그의 주장과 논리를 문헌을 통해서 살피는 문헌 연구의 방법론을 사용할 것이다. 필자는 이미 근대 중국의 민족주의에 관해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불교계가 보인 민족주의에 대한 몇 가지 양상을 소개했는데, 이 글에서는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타이쉬 1인으로 한정해서 그 내용을 심화하고자 한다.

2. 중화민국 건설과 중화불교총회

근대 중국에서 내이션(nation)은 주로 국족(國族)으로 번역됐다. 서구에서 정립된 국가나 민족 관념은 청말부터 꾸준히 중국에 소개됐다. 더구나 지식인들이 염원하는 새로운 국가체제도 사람마다 달랐다. 그것은 결국 정치적 견해 차이로 나타난다. 계몽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같은 이는 입헌군주제를 기본으로 한 국가건설을 염원했고, 쑨원(孫文)이나 장타이옌(章太炎) 같은 인물은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고자 했다. 량치차오는 신해혁명 이전 독일과 일본이 선택한 국가철학을 선전했는데,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국가유기체설에 근거했다. 량치차오는 《정치학 대가 블룬칠리의 학설》(1903)에서 블룬칠리(Johann Kaspar Bluntschli, 1808~1881)의 국가유기체론을 소개한다. “국가 자체가 목적이다. 진정 국가는 제일의 목적이고 각 개인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공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국가는 단순한 개인의 총합이 아니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생명체임을 강조했다. 근대 중국에 소개된 개인과 국가에 대한 일종의 관계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량치차오는 개인은 국가에 귀속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은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이때 그는 불교의 업설을 원용하기도 했다. 개인의 행위는 그 결과가 국가와 사회가 수렴하기 때문에 행위로서 개인은 국가와 사회를 통해서 살아남게 된다는 논리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민족의 영웅을 기리며 내뱉는 ‘그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혹은 ‘그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라는 수사도 이와 관련된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종교는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사이의 연결과 재생의 신비에 관심을 가진다”고 말한다. 량치차오는 불교가 국가 건설과 집단 윤리에 유익한 종교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1911년 10월 10일 후베이 성 우창에서 청조타도를 기치로 일어난 군사반란인 이른바 ‘무창봉기’를 기점으로 청 제국은 붕괴한다. 이듬해 쑨원을 임시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건립된다. 아시아 최초의 공화정 국가가 오랫동안 봉건 세계를 대표한 중국에서 등장한 것이다. 왕정 국가의 백성이 공화정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동요가 있었을까? 아니면 동요가 있기나 했을까? 물론 백성들이야 본질적인 차이를 느끼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에게 그것은 커다란 변화다. 단지 중화민국의 건국이라는 사건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 관념은 확산되었다. 더구나 청말부터 이미 국민이나 시민 관념이 소개되고 그것과 함께 국가나 사회라는 거대 공동체에 대한 관념도 출현했다.

중국은 대단히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됐다는 특수성 때문에 민족과 국가를 단순히 일치시킬 수는 없다. 중화민국 건설 이전 입헌파는 오족협화(五族協和)와 같은 주장으로 청 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대단결을 외쳤지만, 혁명파는 만주족 타도를 중심으로 두었기 때문에 단순한 민족대단결을 말할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한족 중심의 공화정 건설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중화민국 건설 이후 쑨원 등은 이제는 오족협화를 이야기했다. 국가 단위의 통치를 기도하기 때문에 민족대단결 요구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공화정 국가인 중화민국 건설 이후 불교계는 물론 온전히 근대화한 것은 아니지만 근대화한 시대에 적응하고자 불교도의 의사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전체 국민의 이익을 반영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후 불교계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새롭게 등장한 기존과 전혀 다른 정치체로서 중화민국이기에 불교계도 전혀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개인 혹은 집단의 자유를 보장한 중화민국이기에 불교계도 자신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자 했다. 민국 원년인 1912년 4월 중국불교계는 상하이에서 ‘중화불교총회’를 창립한다. 성급 지부가 22개에 달하는 전국적인 규모였고, 그야말로 전체 중국불교계를 대표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불교총회장정(中華佛敎總會章程)〉에서는 자신의 종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회는 불교를 통일하고 법화를 선양하여 개인과 사회의 도덕을 촉진하고 국민의 행복은 완전히 하는 것을 종지로 한다.

청말민초 중국 지식인은 특정한 단체[社團]를 만들어 자신의 견해를 사회에 전파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또는 그것으로 정치활동을 행했다. 물론 자신의 입장을 먼저 밝혔는데, 중화불교총회의 장정도 그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설립 취지는 어떻게 보면 대단히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투성만큼 그들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다. ‘국민도덕’과 ‘국민행복’을 제고하겠다는 사회적인 의도에 앞서 자신들이 전체 중국불교를 대표하고 통일하여 하나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는 단체 설립의 당연한 의도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화불교총회가 행한 주요한 활동은 기본적으로 새로 등장한 중화민국 정부에게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1912년 초에 중화불교총회는 임시 대총통 쑨원에게 〈불교회가 민국 정부에 승인을 요구하는 몇몇 조건〉을 상서(上書)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민국 정부는 중화불교총회의 불교계 대표성을 인정하고, 불교계의 권익과 완전한 종교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전제정치는 타도됐지만 민국 정부가 전면적으로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는 않았다. 불교계의 재산권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고, 법적인 소송도 발생했다. 중화불교총회는 불교계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각급 사찰에서 진행된 여러 차례 소송을 대리하기도 했다. 당시 불교계에 이런 분위기가 만연한 까닭은 청말부터 진행된 정치권력의 불교계 침탈 때문이다. 청말 봉건시대에도 그랬고, 민국 성립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불교계 재산을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공적 재산으로 편입시키거나 군대나 경찰이 임의로 점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불교계는 교권(敎權)과 교산(敎産)을 지키고자 처절하게 싸워야 했다.

근대불교 연구자 덩즈메이(鄧子美)는 중화불교총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중화불교총회는 중국 근대 최초로 근대적인 형식을 띤 전국적인 불교 통일조직이었다. 그것의 탄생은 불교 부흥과 근대화를 촉진했지만 신해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국내 정치가 크게 퇴보하고 불교계 수구세력의 타성 때문에 근대적인 이 조직은 반짝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중화불교총회가 분명 국민도덕과 국민행복을 개선하려는 종지를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마치 ‘개인과 국가’라는 관계에서 개인이 국가에 대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사람들은 근대적인 공화제 국가가 마냥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거나 개인의 권익만을 지키지는 체제가 아님을 알게 됐다.

3. 타이쉬의 ‘중화민국’ 해석 및 국가의식

사실 국가(state)는 대단히 근대적인 개념이고, 동아시아에서 그것은 수입된 개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국가라는 형태가 근대 이전에 전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개념적으로 얼마나 부합할지와 무관하게 인간은 일찍부터 집단화했고, 다양한 정치체로 국가를 이뤘다. 근대 중국에서 중화민국이 건국되기 이전 여러 지식인은 장래 건설한 국가의 형식을 고민했다. 량치차오는 입헌군주제를 말했고, 쑨원은 공화제 국가를 염원했다. 량치차오는 국가주권론을 강조한 데 반해 쑨원은 기본적으로 인민 주권을 말했다.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이 건설된 이후에도 일반 백성이나 지식인들 사이에 ‘국가’ 혹은 ‘중화민국’이라는 정치체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타이쉬는 1916년 〈중화민국 해석(釋中華民國)〉을 《각사총서(覺社叢書)》에 실었다. 이 글은 장타이옌이 1907년 발표한 〈중화민국 풀이(中華民國解)〉를 떠올리게 한다. 타이쉬는 이 글에서 자신의 ‘국가의식’을 비교적 정교하게 드러낸다. 또한 그것을 불교 이론을 통해서 해석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아무래도 타이쉬가 국가의 실체성을 부정했다는 점일 것이다. 중화민국의 국민으로 살고 적극적으로 정부의 정책에 동참하려 한 타이쉬가 이런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는 마치 홉스나 루소처럼 국가는 개인의 집합으로 본다. 비록 사회계약설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개인의 집합인 이상 그 자체로서 실체성을 갖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는 이를 불교의 자아론에 입각해서 해설한다.

타이쉬는 불교의 자아론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여래장식의 진성이다. 둘째, 오온화합의 중생이다. 국가의 자아를 말할 수 있다면 진실한 실체가 아니라 화합으로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두 번째 자아론에 근거해 국가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때 자아론은 결국 무아를 설명하는 기제일 뿐이다. 초기불교에서도 오온설은 무아를 설명하는 개념 장치 가운데 하나이다. 그도 “오온화합의 중생은 비록 유기체이지만 실아가 아니다. 고정된 주재자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의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자아는 ‘허깨비’일 뿐이다. 첫 번째 자아론에 근거하면 국가는 존재하는 게 없다. 이런 입장은 청말 량치차오가 국가유기체론을 주장하면서 개인을 국가라는 일종의 실체에 수렴시키려 한 것과 상반된다.

만약 오온 연생의 幻我義를 분명히 하면 이른바 ‘국’도 民心 등 증상의 오온이 연기해 구성한 증상의 大幻我임을 알 뿐이다. 왜 증상이라고 말하는가? 사람과 사물이 허깨비[幻]인데 다시 오온이 결합되어 국가를 이룬다면 허깨비 위에 허깨비를 더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국 이전 량치차오가 보인 국가주의에서는 국가를 하나의 실체로 간주한다. 량치차오는 참과 거짓을 따지자면 국가가 참이고 개인이 임의적임을 주장한다. 장타이옌은 신해혁명 이전 〈국가론〉에서 개인과 국가 모두 임의적일 뿐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둘 가운데 개인이 좀 더 진실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타이쉬는 장타이옌의 입장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장타이옌에 비해 타이쉬는 개인의 우선성을 좀 더 강조한다. 그는 ‘국아(國我)’와 ‘인아(人我)’라는 표현으로 국가와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과연 둘은 실체를 가지는가? 또 둘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사실 타이쉬의 국가의식은 이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타이쉬는 “민심 각각이 지닌 의념의 집합을 제외하면 결코 국가의 자증심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국가 관념은 국민의 집합적 관념일 뿐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국가 관념은 어떻게 발생했나? “민심 각각의 국가 관념은 교육과 학습에 의해서 형성되었고, 개인이 선험적으로 가진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타이쉬가 오온화합으로써 국가를 상정하는 논리는 다소 특이하다. 그는 국가의 영토와 물산 등이 색온에 해당하고, 국민의 고락과 영욕 등이 수온이고, 국명이나 국헌 등이 상온이고, 정치 등 갖가지 활동이 행온이고, 민족의식과 습속 그리고 언어 종교 풍속 등이 식온이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을 포괄하여 완성된 하나의 개념이 국가라고 말한다.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타이쉬의 국가와 오온 도식은 그가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를 불교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인아’가 오온으로 구성됐듯, ‘국아’도 오온으로 구성됐다는 것이다. 비록 국가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이러하지만 그가 순전히 국가를 허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중화민국의 ‘민국(民國)’을 해석하면서 먼저 ‘민(民)’의 어의를 분석한다.

혹자는 民과 氓은 [算+見]髳인데, 君師官吏에 예속되어 奴虜의 부류에 가깝다고 한다. 지금 비록 굳이 고의를 탐구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民의 뜻과 人의 뜻은 다르다. 인은 여러 생물종 가운데 하나의 생물류를 명명한 것이다. 민은 인류 단체 가운데 한 분자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이 의지하는 하나의 단체 가운데서 自意와 衆意가 화합한 행위를 한다. 반드시 의지하는 단체 가운데서 유명무형의 공통된 제재를 받는다.

타이쉬가 단순히 개인이 국가에 대해 절대적으로 우선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본원적인 의미에서 인간 개인은 국가에 의해 조작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개인이 한 집단 속에 귀속해서 살아가는 한 완벽하게 국가와 분리할 수는 없다. 타이쉬는 집단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민(民)’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완벽하게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완벽하게 집단화를 거부할 수 있을까. 아마 타이쉬도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결국 인간은 민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민은 군주나 군대 그리고 관리에게 복종하는 노예나 포로를 일컫는다는 해석을 인용한다. 과연 그것이 정당한 해석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민이 통치의 대상임은 분명하다. 달리 말하면 민은 피통치자를 일컫는 말이다.

인간은 사회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다분히 생물학적인 언어이다. 적어도 타이쉬에게는 그렇다. 그는 민(백성)은 그 개념 자체가 집단의 일부이자 집단의 제재를 받는 개체임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모두 백성이어야 하나? 단독자로서 인간 개체는 불가능한가? 타이쉬는 이 가능성 여부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인연생으로서 인간을 말하는 그가 완벽한 단독자로서 인간 개체를 상정했을 리는 없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결국 집단 속의 존재이다.

인류 단체는 국가로써 궁극적으로 완성되기에 인류 단체의 분자로서 민은 또한 국가에 이르러 비로소 궁극적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민이라는 것은 바로 국민이고, 국가라는 것은 바로 민국이다. 국민과 민국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사실 국가가 인류가 완성한 가장 궁극적인 단체인지는 알 수 없다. 국가가 가진 장점 못지않게 그것이 보이는 병폐는 대단히 크고 심각하다. 그 때문에 쉽게 궁극적 완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상위의 단체이자 가장 강력한 단체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쉽게 탈퇴하고 가입할 수 있는 단체가 아님도 분명하다. 타이쉬는 최상위 단체로서 국가를 사실로서 인정하는 듯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가는 민이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민국이다. 달리 말하면 ‘백성의 나라’이다. 하지만 거꾸로 ‘나라의 백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타이쉬는 말한다. “진정한 인생관과 세계관은 유식론(唯識論)이고, 진정한 국가관은 유민론(唯民論)이다.” 분명 타이쉬는 민이 기본이 되는 나라를 말한다.

대개 民은 國民이다. 그래서 민은 바로 국민 전체다. 해륙산하는 국민이 유지하고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공계일 뿐 국토가 아니다. 대개 국토는 민의 總業이고, 그래서 민 가운데 있지 민을 떠나서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

국토를 일종의 업설에 기반을 두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인데, 앞서 량치차오도 〈나의 생사관〉에서 개아의 행위는 국가라는 대아에 살아남는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는 진화론에서 말하는 유전체인데 나는 이들 모두 정신이라고 명명하고 싶다.”고 말한다. 개인의 카르마는 국가에 남는다는 논리다. 량치차오가 국가유기체설에 입각해서 개인의 행위를 수렴하려 한 것과 달리 타이쉬는 개인 행위의 총합으로서 국가나 국토를 말한다. 국토는 민이 없다면 단지 하나의 공간일 뿐이고, 거기에 백성의 행위가 반영되어야만 국토일 수 있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타이쉬의 국가 의식에서 민족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는 민족은 ‘국가의 뿌리[國根]’이고 국가의 본성은 이것에 기초를 둔다고 말한다.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언어, 역사, 종교, 풍습 등”이다. 이를 두고 타이쉬는 민성(民性)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달리 말하면 민족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타이쉬는 ‘중화’라는 국명을 풀면서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의 영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중화국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중화는 또한 사방과 내외에 존재하는 미개한 국족에 대한 표현인데, 그래서 중화(中華)와 융적(戎狄)을 대립해서 말하기도 하고, 화하(華夏)와 이적(夷狄)을 대립해서 말하기도 한다. 이는 역사상 인문지리 때문에 이름을 획득한 경우다. 지금 중정화평(中正和平)을 중(中)이라고 하고, 화귀문수(華貴文秀)를 화(華)라고 하여 우리 민족 본유의 품성을 표현하고자 그것으로써 국명을 삼았다.” 이는 다소 전통적인 방식으로 ‘중화’를 해석하고, 거기서 중국민족의 민족성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중화’ 해석을 하기도 한다.

中은 실질이고 華는 정교한 앎이다. 우리 국민이 덕을 진작시킬 지침으로 만들고자 그것으로 국명을 삼았다. 또 중은 우리 마음을 이끌고 준비시키는 것이고, 화는 천하를 교화함이다. 大同 세상을 만들어 사람 모두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할 책임이 오직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국명으로 삼았다.

하지만 타이쉬도 실은 세계에서 중국의 특별한 역할을 여기서 찾고 있다. 대동이라는 평화세계를 염원하지만, 그 세계를 이끌 민족으로 중국 민족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역할과 책무를 자기 민족이 짊어졌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 봉사나 희생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것은 선민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마치 내가 너희를 지도하고 돌보겠다는 말로 들린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타이쉬가 말하는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좀 더 약소국의 입장에 가깝다. 그러기에 그의 민족주의는 쉽게 ‘민족제국주의’로 진행하지는 않는다. 그는 쑨원의 삼민주의를 말하면서 민족주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민족주의는 국내 여러 종족의 일률적인 평등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과 세계 여러 국족이 모두 자유 독립의 평등을 추구하였다.

타이쉬의 민족주의도 기본적으로 이런 맥락에서 운용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다민족국가로서의 중화민국에서 민족주의는 국내 여러 종족에게도 통용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청말 쑨원이 제기한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약소국 간의 연대가 바탕이 된다. 서로 독립을 인정하는 세력 간에 연대할 수 있고, 함께 제국주의 세력에 맞설 수도 있다. 타이쉬의 민족주의도 기본적으로 국가 간 상호존중이라는 전제 아래서 논의됨을 알 수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세계평화를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찍이 장타이옌은 “민족주의를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마땅히 자신의 진심을 미루어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저들 민족을 구제하여 그들이 완전히 독립된 지위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 중일전쟁 기간 일본불교도에게 불교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염원하자고 권유하기도 한다. 이는 불교 세력이 침략을 당하는 국가와 침략하는 국가로 나뉠 때, 보일 수밖에 없는 언설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다. 타이쉬의 민족주의는 불교가 가진 세계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세계평화라는 큰 기치 아래 피침략 혹은 피압박 민족이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고 지키는 일체 행위를 인정하려 한다. 그는 여러 차례 대동세계(大同世界)와 민족주의를 같이 말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천황의 이름으로 세계통일을 외친 것과는 다르다.

이렇게 타이쉬는 인류와 국가의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하고 국가 조직 속에서 중생은 보호받고 살아야 함을 역설한다. 그는 “인류는 진정 부모가 발생하고 자라는 원인이 되고, 또한 사회가 서로 보조함으로써 존립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가 모순되고 혼란한 과정에서는 오히려 우리는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국가의 조직이 있어야 하고, 중생은 보장한 바가 있어야 하고 사회는 마땅히 질서가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안정된 상황에서 생활할 수 있다. 이는 불교를 신봉하든 아니든 관계없이 모두 국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애국의 사상이 있어야 하고, 외세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4. 불교호국과 항마전쟁

불교가 구국이나 호국을 말한 지는 오래됐지만, 말할 때마다 낯설다. 아마도 그것은 불교가 국가나 민족 같은 지역성을 초월한 보편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것이 끈질기게 견지한 비폭력주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불교 국가에서도 폭력은 일상적이고 심지어 불교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자행되기도 했다. 전쟁을 불교 내부의 논리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전쟁 기간 불교계를 이끈 타이쉬도 국가의 위난을 맞아 어떤 식으로든 그 문제를 다뤄야 했다. 타이쉬는 1933년 진행한 〈불교와 호국〉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보통 사람들은 불교로써 구국한다는 말을 들으면 다들 괴이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한다. 타이쉬는 1932년 강연에서 “현재 중국은 국난이 엄중한 시기에 처했다. 전국 인민이 마음으로 우선 어떻게 나라를 구해야 할지 토론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에 의지해서 출가한 불교도는 불법이 가진 사회, 인민, 국민, 공익에 유익한 의리에서 그것을 끄집어내서 민간에 선양하여 구국행위가 불법에 의해서 지지를 얻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회국가에 이익될 것이다.

타이쉬는 대단히 건전한 국가관을 말한다. 다소 상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종교의 보수적인 역할이 이런 것이다. 공익적인 종교다. 하지만 공익은 때론 비불교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행위는 위난을 당한 사회에서 보자면 공익적인 행위지만 결국 살생이라는 불교의 최고 금계를 어기게끔 한다. 이는 ‘불교’의 가치관을 고수하지 못한 공익이기에 불교의 공익적 활동이라고 말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것은 곧잘 무시된다. 타이쉬도 조국의 위난을 모른 척하면 그건 목석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는 애국이나 구국이 단지 하나의 방법만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함으로써 불교적인 의미의 애국 활동에 길을 열려고 한다.

타이쉬는 자신의 모든 활동에 대해 불교적인 해석을 시도하는데, ‘구국’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첫째, 인연생의이다. 둘째, 무자성의다. 셋째, 대비심의이다. 이는 대승불교를 포함한 불교의 일반적인 교설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불교의 일반적 교리를 국가나 구국 관념과 연결시키는 것은 타이쉬의 능력이다. 첫째 원리로서 인연생의는 흔히 모든 존재자가 온갖 인연에 의해 생기했음을 말하는 이론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단지 현상 발생을 설명하는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타이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자발성이나 적극성을 부여한다.

만약 전체 사회국가의 공중이익을 버리고 개인의 이익을 구하는 것으로 전제를 삼는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패배를 맞을 것이다. 국가사회는 모두 많은 사람이 조성한 것이고 각자가 사회국가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복리만을 도모한다면 국가사회는 실패할 것이고, 개인 자신도 실패할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개인이 구성한 것이라면 국가에 대한 주재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국가를 통해서 획득한 이익을 공유할 수도 있다. 또한 반대로 개인이 성취한 이익도 국가의 패망과 더불어 소실될 수도 있다. 결국 국가와 개인 가운데 선재성을 따지면 개인이 앞서겠지만, 국익과 사익을 따지면 국익이 결국 사익을 담보한다는 논리다. 이는 타이쉬가 1900년대 량치차오의 국가주권론과 달리 인민주권론을 주장하는 듯하지만 종국에 도달 지점은 집단과 개인 사이에 집단 이익의 선재성을 인정해 버린 꼴이다. 인간은 단독자로서 성립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꼭 그가 속한 공동체와 잘 지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타이쉬는 집단의 위난이나 실패는 곧장 개인의 위난과 실패로 이어짐을 강조하면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구국 행위의 두 번째 개념인 ‘무자성의(無自性義)’와 관련해서 타이쉬는 심력을 말한다.

본래 만물은 무자성이고 심력이 전변한 의지가 무상의 서원을 발생시키고 무외의 정신을 분발케 하고 적극적으로 구국구세의 사업을 한다. 그래서 두 번째 층위에서 무자성의를 밝혀 곧바로 각자 마음이 전변의 역량을 가짐을 드러낸다. 외래의 나쁜 환경과 세력에 의해 굴복되지 않고 용맹정진의 마음을 발하여 구국구민의 중임을 짊어진다.

‘무자성’ 개념은 어떻게 구국 행위와 연결시킬까? 사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이미 존재했다. 무술변법에 참여했다 서태후의 정변으로 참수당한 탄쓰퉁(譚嗣同)이 일찍이 보여주었다. 그는 심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현실의 것을 무조건 사실로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그것이 거짓이고 결국 나의 마음이 그것을 조작한다고 말했다. 타이쉬도 ‘심력’이 나뿐만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킨다고 말한다. 만약 목전의 세상이 있는 그대로 고정됐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이쉬는 개인이 무력감을 극복하고 구국을 위해서 떨쳐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을 그는 용맹정진의 심력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일종의 ‘유의지주의(唯意志主義)’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세 번째 ‘대비심의’도 이와 관련된다.

전국 국민의 공공복리를 도모하고 자기희생을 애석해하지 않고, 대공무사하여 국민의 고락으로서 고락을 삼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실제상의 구국구민의 진정한 사업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연생의를 따라서 대비심의에 이른다면 불법 가운데 구국을 말하는 일관된 의리가 핵심의 의리일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심이 꼭 희생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이 희생으로 이해된다. 이는 다소 위험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 윤리로서 자비의 강조가 자기희생에 대한 부당한 요구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기업이나 사회가 이익을 희생하는 개인에게 분배하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그저 약탈일 뿐이다. 타이쉬는 대비심을 개인이 사회적 책임감에 기반을 두고 행하는 자기희생으로 해석했다. 물론 이는 구국이라는 다분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에 대한 불교적인 과잉 해석이다. 그런데 사실 민족주의는 바로 이 희생이란 관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일찍이 르낭(Joseph Ernest Renan)은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런 말은 19세기 국민국가가 강고하게 성립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 등 폭력적인 사태를 감안한 것이다. 서구 열강은 이 시기 식민지를 경영하거나 제국주의 전쟁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민족 혹은 국민이란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는 억압되고 원하지 않는 희생을 요구받았다. 개인은 마치 제단에 바친 소나 양처럼 자신의 의사는 거의 반영되지 않고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이 남이 아니라 자기라는 점에서 이타적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타이쉬는 불교가 일상의 윤리를 수용한다고 말한다. “불교주의는 인류윤리를 수행의 기점으로 삼는다. 충·효·우·신 모두 인류도덕이 출발하는 기초이다. 불교도 그것을 기꺼이 말한다. 불교는 결코 인류윤리를 저버리지 않고 염세적이거나 공상적이지 않다.”

타이쉬는 호국을 말하면서 그것을 인과보응설에 입각해서 설명한다. 불교에서 보응은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선인락과와 악인고과는 누가 시켜서 관철되는 인과법칙은 아니다. 불교에서 이는 세계에 관철되는 진리이다. 그런데 타이쉬는 그것을 하나의 윤리로서 요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 경전에서는 보은을 자주 말한다. 보은은 《대승본생심지관경》에서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한다고 말한다. ①부모은 ②중생은 ③국왕은 ④삼보은이다. 국가는 우리를 보호하고 교육하는 은혜를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에 헌신해서 그것을 보답해야 한다.”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윤리적인 행위다. 국가에 대한 헌신이나 보답을 요구하게 된다.

타이쉬는 호국을 협의와 광의 둘로 나누는데, 먼저 “협의로 말하면 일상인이 말하는 구국은 규정된 토지 내에서 인류 이외에서 도래한 재난이 있거나 인류 중에 외부세력의 침략이 있거나, 본국 내에서 변란이 발생하여 재난이 있을 때, 우리가 온갖 구호의 역량을 다해서 갖가지 구국의 역할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호국과 보통사람이 말하는 구국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그는 “광의로 말하면, 석가불이 교화하는 나라는 사바세계이고 아미타불이 교화하는 나라는 극락국토이다. 그래서 호국은 곧 세계의 일체중생을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생구제 자체가 호국인 셈이다.

중일전쟁 기간인 1938년 여름 타이쉬는 쓰촨성 청두(成都)의 불학사(佛學社)에서 행한 강연에서 ‘항마구세(降魔救世)’와 ‘항전구국’을 말한다. 붓다가 깨달음 이후 마군의 공격과 유혹을 물리친 것을 두고 ‘항마’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숙종 때 설치된 별무반 내에 승려 가운데 징집된 군사로 이루어진 항마군을 조직했다. 이는 공식 명칭으로 유통됐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승군이 전투에 참여했다. 타이쉬는 이른바 ‘항마전쟁’을 촉구한 것이다. 그는 아라한의 의미 가운데 ‘번뇌의 도적을 모두 죽여 없앴다’는 뜻이 있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번뇌는 중생의 정신계에서 인간 사회를 번뇌롭게 하고 괴롭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 도적[賊]보다 훨씬 강한 말이 마(魔)라고 강조하고, 거기에는 살해자란 의미가 있음을 강조한다. “중생계에서는 선근을 증진시켜 해탈을 향해 가는데 마가 그를 만나 선근을 부수고 혜명을 끊어 조금도 나아가거나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타이쉬가 도적이나 살해자란 의미를 부각하는 이유는 불교 내부에서 ‘아군과 적군’이라고 할 때처럼 ‘적’ 개념을 추출하기 위해서다. 대항해야 할 적. 이것은 전쟁 기간 가장 명료하게 요구되는 개념이다. 타이쉬는 “마를 항복시켜야만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마를 항복시켜야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하면서 ‘항마성불’을 ‘항마구세’로 돌려놓는다. 나아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바로 ‘항전건국’이다. “항전건국은 항마구세의 종지와 서로 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대단히 잘 호응한다.”고 선언한다.

항전은 결코 전쟁을 본질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외래한 나쁜 세력의 침략에 저항한 전쟁은 자기가 발동한 전쟁이 아니다. 그래서 중국의 항전은 전쟁을 없애고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일어나 전쟁에 대한 저항이다. 항전의 본질은 자위와 평화이고 전국 인민과 세계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보위하기 위해 발동한 것이다.

타이쉬는 불교적으로 항전을 정당화한다. 물론 외세의 침략에 가만히 당하는 게 불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맞붙어 싸우는 것이 특별히 더 불교적일 수는 없다. 타이쉬는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항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가치이자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타이쉬는 중국인의 항전은 분명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붓다가 깨달음을 지키기 위해 부득불 마군을 항복시키듯, 국가와 인류의 평화를 보위하기 위해서 적군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항마건국’이다.

5. 맺음말

근대 중국은 아편전쟁 등 외세의 침탈로 시작됐다. 중국인들은 무술변법과 신해혁명 그리고 신문화운동, 국공내전 등 거대한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국가 만들기를 시도했다. 다양한 기획과 요구가 있었다. 다양한 의미의 그리고 다양한 방식의 내셔널리즘이 사회 전체 영역에서 작동했다. 불교계도 마찬가지였다. 중화민국과 함께 출현한 전국적인 불교단체인 중화불교총회는 불교의 권익을 보호하고 새로운 시대에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 노력했다. 특히 대표적인 고승 타이쉬는 불교가 사회와 국가라는 거대한 현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여야 하고, 전쟁이라는 국난 앞에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중국 불교도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타이쉬는 기본적으로 한 사회에 닥친 위난을 극복하는 것이 결국 중생 구제의 일환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개인도 사회적 위난을 위해서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함을 주장한다. 일면 그것이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이타적 행위가 불교적으로도 가능함을 역설한다. 한 인간을 구성한 다양한 인연에 대한 존중과 그것에 대한 보답은 불교적으로도 당연하다고 본다. 미움이나 증오가 만연한 전쟁 기간, 그는 불교인에게도 적을 물리치는 행위가 단순한 살생이나 범계가 아니라 항마(降魔)의 일환임을 역설한다. 그래서 제국주의 국가 일본과 수행하는 전쟁을 ‘항마전쟁’으로 규정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라는 대단히 명료한 실체가 있고, 국가 간 전쟁이라는 살생을 기본으로 하는 상황에서 타이쉬의 저런 해석은 일종의 합리화로 보이기도 한다. 항마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항마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건 결코 불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약소국의 내셔널리즘과 강대국의 내셔널리즘은 다를 수도 있다. 당시 중국과 일본의 다른 처지를 고려하면 중국의 내셔널리즘은 저항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타이쉬 같은 고승이 그것을 합리화하는 방식에는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합리화 시도는 타이쉬뿐만 아니라 불교가 거대 종교로 존재하는 여러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제국주의 일본에서 그랬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그랬다. ■

 

김영진 /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주요 저서로 《불교와 무(無)의 근대》 《근대 중국의 고승》 《공(空)이란 무엇인가》 《중국근대사상과 불교》 등이 있고, 역서로 《중국근대사상사 약론》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공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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