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

1. 머리말

개인의 내면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 해방을 추구하는 불교는 인간을 사회역사적 존재로 보지 않고 보편적 인간으로 본다. 때문에 불교는 사회나 국가의 문제를 핵심 교리로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불교가 사회나 국가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 역시 국가와 결탁하여 후원을 받기도 하고 억압을 받기도 했다.

한국불교의 역사는 국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한국불교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늘 국가의 절대적 영향 아래에 있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불교는 국가불교의 상태에서 왕실과 국가로부터 절대적 후원을 받았던 반면에, 조선시대에는 가혹한 억압을 받기도 하였다. 불교는 국가의 후원에 보답하여 국가를 위해 봉사했으며, 심지어는 억압의 시기에서조차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 불교가 국가로부터 독립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국가와의 이러한 밀접한 관련과 국가를 위한 봉사 때문에 한국불교의 한 특징으로 호국불교를 들기도 한다. 물론 호국불교는 국가를 위한 봉사 일반보다는 주로 국가가 외침의 위협이나 직접적인 침입을 받았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경우를 지칭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국불교는 전시와 같은 특정한 시기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역사에서 호국에 대한 염원은 상시에도 늘 있어 왔으며, 불교 또한 상시적 염원에 동조하였다.

국가불교와 호국불교는 관점에 따라서는 내셔널리즘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근대주의적 해석은 내셔널리즘을 근대문명의 소산으로 보고, 근대국가의 형성을 내셔널리즘의 전제조건으로 본다. 그러나 근대주의자들의 관점은 기독교 보편주의의 해체로부터 시작하는 근대 유럽 민족국가의 형성이라는 독특한 유럽 역사의 경험에 함몰된 시각이다. 이 논문에서는 원형주의적 해석(Primordialist Interpretation)에 기초해서 내셔널리즘을 소속 국가에 대한 일반적인 애착으로 보고 호국불교를 내셔널리즘으로 해석했다.

2. 삼국시대: 국가와 불교의 유착시대

한국불교는 도입 과정과 공인 동기로 인하여 태생적으로 국가불교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불교는 체계적 이론을 갖춘 정치적 이념이 자리 잡고 있지 않던 삼국시대에 정치·외교적 효용성 때문에 한반도에 수용되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파견하면서 불상과 불경을 보내왔는데, 이것이 고구려의 불교 공인이다. 전진과의 외교적 관계 속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셈이다.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전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동진에 축하사절단을 보냈는데, 동진에서는 9월 승려 마라난타를 보내왔다. 백제의 불교 수용도 외교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라는 528년 법흥왕 때, 귀족들의 반대 속에 이차돈의 순교를 겪으면서 불교를 공인한다. 불교가 삼국에 들어온 것은 불교의 공인 시점보다 이전이겠지만, 불교는 이처럼 정치·외교적인 관점에서 왕실의 주도로 공인이 이루어졌다.

정치·외교적 효용성으로 인해 불교는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불교와 국가의 밀월관계는 삼국시대 내내 이어졌으며, 신라 하대까지 이어졌다. 왕실과 국가는 사찰을 지어 불교를 후원했으며, 불교는 통치이념을 제공했다. 불교와 권력의 밀접한 연대는 왕호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신라의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백제의 성왕, 위덕왕, 법왕 등에서 보는 것처럼 삼국시대의 왕들은 왕호를 불교식으로 지어 자신들이 불교적 정신의 구현자임을 표시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찾았다.

삼국시대에 관한 현존 사료가 신라 중심인 탓이 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신라에서 불교와 국가의 밀접한 연관을 보다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법흥왕 이래로 불교는 신라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룬 것이 분명한데, 그러한 발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승관제도(僧官制度)이다. 승관제도는 국가에서 만든 승려 관부 조직인데, 승려들은 이 조직에 편입된 덕분에 국가가 인정하는 신분을 얻게 되고, 국가는 이 조직을 통해서 승려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승관제도는 국가 전체의 승려들을 통괄하는 국통(國統)을 정점으로 하고, 그 밑에 주(州)의 승려들을 통괄하는 주통(州統) 9인과 군의 승려들을 통괄하는 군통(群統) 18인을 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승관제도를 통해 승려들에게 승과를 보게 하였으며, 또 지방 사찰에 대한 감찰을 하였다. 국가에 의해 승려들이 매우 체계적으로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승단이 국가조직 일부가 된 셈이다.

법흥왕을 이은 진흥왕(眞興王, 534~576)은 호불(好佛)의 군주로서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겨서 불교 왕국의 건설을 꿈꾸었다. 그는 고구려에서 귀화한 혜량(惠亮)을 국통에 임명하였는데, 이는 필시 점령지역의 고구려인들을 통합하는 일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국통의 역할 중 하나는 대규모 불교행사를 주관하는 것인데,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坐會)와 팔관회(八關會)가 대표적인 예이다. 인왕백고좌회는 신라에서 불교와 국가 간의 밀접한 관계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읽으면서 국가의 태평을 기원하는 이 법회는 반드시 국왕이 시주가 되어 열도록 되어 있었다. 국왕이 인자한 왕이 되어 나라를 통치하라는 취지이자 현재의 국왕이 자비로운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행사다. 《인왕반야경》의 〈호국품(護國品)〉에서는 갖가지 재난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국왕이 이 경을 하루에 두 번씩 외워야 할 것을 설하고 있다. 또 이 행사에는 백고좌에 앉힐 백 명의 고승은 물론이고 수많은 승려가 동원되었는데, 형식은 승려들을 공양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승려들이 왕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왕백고좌회는 신라에서 진흥왕 이후 수시로 개설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팔관회는 원래 고대 부족국가에서 행해진 추수감사제 격의 축제였는데, 불교에서 재가(在家) 신도가 하룻밤, 하룻낮 동안 받아 지니는 계율인 팔재계(八齋戒)와 결합이 되었다. 그런데 신라에서 행해진 팔관회는 호국적인 성격의 것으로 추정해도 무리가 없다. 《삼국유사》에 죽은 병사들을 위해 팔관회를 열었다는 기록과, 중국에 유학 갔던 자장이 귀국하여 왕에게 부탁하여 황룡사 구층탑을 세운 뒤 팔관회를 열었는데, 그렇게 하면 외적이 신라를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어떤 신인(神人)의 말에 따른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국통은 가장 명망 있는 승려들인 동시에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이 분명한데, 그중에서도 원광의 경우가 가장 눈에 띈다. 원광의 세속오계는 신라시대 불교와 국가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원광은 불교 재가자들을 위한 계율인 오계를 변형시킨 세속오계를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주었다. 그런데 세속오계의 내용을 보면 제일 먼저 임금에 대한 충성[사군이충(事君以忠)]이 오고, 그다음으로 부모에 대한 효[사친이효(事親以孝)]가 오고, 이어서 친구 간의 신의[교우이신(交友以信)]가 열거된다. 불교의 계율이라기보다는 유교의 윤리 덕목에 가까울 뿐 아니라, 효보다도 충을 앞세워 국가중심주의적 사고를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임전무퇴(臨戰無退)를 내세우고 있어, 전사로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에 살생유택(殺生有擇)을 내세우고 있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아 승려의 가르침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덕망 있는 승려가 젊은 청년들에게 준 생활 속에서 불교적 심성을 기를 수 있는 윤리지침이라기보다는 군사학교의 정훈(政訓) 교육의 기본지침처럼 보인다.

원광의 이러한 세속오계에 대해서 불교의 계율을 현실에 맞게 적용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으나, 불교적 가치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는 덕목도 딱히 불교 승려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전쟁에 나서는 장군이라도 그가 인간을 살해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전쟁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전쟁에 나서는 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원광의 세속오계는 그가 불교 계율을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가를 보여주기보다는, 불교 승려들이 국가이념의 교육자로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가 또 고구려를 물리치기 위해 수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쓴 것 역시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던가를 말해준다.

신라로 대표되는 한국 고대의 불교는 국가불교다. 불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보호 아래 있었으며, 불교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와 국가의 결탁은 전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교가 국가를 향해 나아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가 불교를 정치적 도구로 선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인들이 내셔널리즘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봉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불교인들은 국가와 대비되는 어떤 다른 가치, 이를테면 승단이나 당시 불교인들이 유학을 갔던 중국 대륙을 포함하는 불교 사회를 버리고 신라나 고구려, 백제 같은 특정 국가를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장이 팔관회를 개최하게 된 동기와 취지, 그리고 원광의 세속오계는 명백히 내셔널리즘의 발현이다.

3. 고려시대: 유학의 등장과 국가종교로서의 지위 위협

국가불교의 전통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 고려의 대업은 부처님의 가호에 의해야 하므로, 사원을 개창하고 팔관회와 연등회를 거행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승려들을 국사와 왕사에 임명하여 국정을 자문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승록사(僧錄司)라는 승관제도가 유지되었다. 승록사는 승적을 관리하였으며, 교계의 중요 의식이나 행사를 주관하였다. 교단과 정부의 행정적 협력기구로서 기능하면서 교계의 운영에 대한 국가의 정책 수행에 대한 보조임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고려불교의 국가주의적 성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승군이다. 거란과 몽고가 침입하였을 때 승군이 참전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호국불교의 정점은 부처의 힘으로 거란과 몽고의 침입을 막고자 한 고려대장경의 주조일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명백히 고려불교의 내셔널리즘 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역시 불교인들 자신이 사상적으로 내셔널리즘을 표방한 결과는 아니다.

고려의 승군은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며, 특히 거란과의 전쟁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현종 원년(1010)에 있었던 고려와 거란의 2차 전쟁 때 승려 법언이 군사(승병) 9천 명을 이끌고 서경 전투에서 거란군 3천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승병이 이렇게 규모 면에서 클 뿐 아니라 강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체제 때문이다. 오해하듯이 고려의 승려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애국심이 발동되어 의병대를 조직하여 거란과 몽고에 대항해 싸운 것은 아니다. 고려의 승병은 의병이 아니라 정규군의 일부였다. 사실 정규군으로서 승군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통일신라에서는 진성여왕 3년부터 9년까지(889~995) 해인사 승군 9천 명이 초적 3천 명을 격퇴한 기록이 있다. 군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회에서 많은 수의 승려들은 주요한 군사 전력이었으며, 이를 국가가 그냥 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수원승도(隨院僧徒)가 있었다. 사찰이 광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여기에 소속된 반승반속의 사람들이 부락을 형성하면서 살았다. 말하자면 행정적으로도 절에 등록된, 승려에 가까운 사하촌민들인 셈이다. 이들 중 장정들로 별도의 예비군을 편성한 것이 수원승도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정규군으로 동원되었다. 심지어 숙종 때는 아예 처음부터 이들 중에서 항마군(降魔軍)이라는 정규군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애국적 열정의 산물이 아닌 것은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호국의 염원으로 판각했다는 대장경 역시 마찬가지다. 현존 고려대장경은 고려가 30년 동안 몽고의 침입을 받아 피폐한 상태에서 16년간 국력을 기울여 벌인 사업이다. 이 사업은 물론 전 고려불교계가 참여하는 거국적인 사업이었고,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기록된 것처럼 부처의 공덕으로 몽고군을 물리치려는 호국의 염원에서 시작된 사업이다. 그런데 이 대장경은 최이의 주도 아래 진행되고 최항에 의해 완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씨 집안이 이 사업에 사재를 넣었다. 말하자면 최씨 집안의 사업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계 전체의 호국에 대한 염원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불교가 국가의 사상적 중심이었으나, 신라시대와는 상황이 달랐다. 상황의 변화는 유교의 약진이었다. 원래 유교는 불교보다 먼저 한반도에 유입되었으나 매우 천천히 전파되었다. 그러다가 고려의 3대 임금인 광종 때 과거제도의 실시와 함께 유학자층이 형성되어 갔다. 유학자층의 성장은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시무 28조를 건의하고, 그 기본 내용을 성종이 정책으로 반영해 실행한 데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불교의 쇠퇴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시무 28조에는 다양한 정책 건의가 담겨 있으나, 이념적 측면에서 보면 불교를 비판하고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는 우선 사상적인 측면에서 불교는 통치이념이 될 수 없고 유교가 통치이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불교는 개인적 수행의 가르침이고 내세를 위한 가르침이어서 정치사상으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논리다. 그러므로 왕이 팔관회와 연등회와 같은 불교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실제로 최승로의 건의대로 팔관회와 연등회가 폐지되었는데, 훈요십조에서 태조가 팔관회와 연등회의 지속을 당부한 것을 생각하면 실로 과감한 건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범죄자나 거지들이 승려가 되고, 절에서 보시로 고리대를 하는 등 불교의 현실적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무신정권(1170~1270)의 등장 또한 국가종교로서 불교의 위치 변화를 가져왔다. 문신귀족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불교는 문신귀족들과 함께 무신들에 저항하다 피해를 당한다. 무신정권은 문신귀족들과 얽혀 있는 교종 대신에 새로이 성장하는 선종을 후원하는데, 산중에 자리 잡은 선종은 상대적으로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4. 조선시대: 국가에 의한 불교의 억압 속의 의승병

조선시대가 되자 이전까지 국가종교였던 불교는 순식간에 국가로부터 억압받는 종교가 되었다. 억불정책은 태종(재위 1400 ~1418)이 즉위하면서부터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고려시대에 있었던 사찰 및 승려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이 철폐되었고, 종파가 강제로 병합되고 많은 사찰과 사찰의 토지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왕사, 국사는 폐지되었으며, 도첩제가 엄격하게 시행되었고, 사원에 딸린 노비들이 군정에 충당되었다. 이런 대대적인 억압으로 전국의 사찰은 242개로 축소되었는데, 세종 때는 다시 36개사로 줄었으며, 사원 소유의 토지는 고려 말에 비해 십 분의 일로 감소했고, 성외 승려들의 성내 출입이 금지되었다. 양민으로서 승려가 되려는 자는 정전(丁錢)으로 오승포(五升布) 백 필을 내야 도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문종 때는 민간인의 출가를 금지했으며, 성종 때는 일반인이 상을 당했을 때 불교식의 재를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연산군은 불교 탄압도 광적으로 하였다. 성내의 비구니 사찰을 모두 헐고 비구니들을 궁방(宮房)의 노비로 삼았다. 중종(재위 1506~1544) 때는 승과가 완전히 폐기되었다. 이제 불교는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혹하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세종과 세조, 그리고 명종 대의 문정왕후 같은 호불 군주와 왕후에 의해 일시적인 흥불 노력의 결과로 한글 불서의 찬술과 불전의 언해 작업 등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사상적으로 배타적인 성리학자들의 나라인 조선에서 불교는 그야말로 질곡의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유학으로 무장한 국가에 의한 탄압에 대한 불교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불교는 유학자들의 윤리적, 사상적 공격과 정부의 억압 정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였다. 불교에 우호적인 왕과 왕후들의 흥불 노력의 이면에는 불교 승려들의 노력도 있었을 것이나, 조직적인 것은 아니었다. 세종 대 함허기화의 〈현정론(顯正論)〉과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명종 대 보우의 〈일정설(一正說)〉 등 불교를 옹호하는 글을 내기도 했으나, 유교를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 간의 이론적 융합을 모색하는 타협적인 글이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국가종교로 역할을 해 온 불교가 이렇게 무기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도입 초기부터 이어져 온 불교와 정치의 결합 형태 때문일 것이다. 천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불상과 불탑, 사찰을 지었으며, 수많은 왕사와 국사를 배출한 불교는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교 자체의 영향력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불교는 늘 왕실과 귀족의 보호 아래 있었지, 그들 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억불정책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에서 고러 말까지 지속된 국가종교로서 불교가 사실은 사회적으로 허약한 기반 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불교가 오랜 기간 국가종교일 수 있었던 것은 불교가 일반 민중 속에 그 교리를 전파하여 대다수 국민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다. 불교는 대중적 기반과 상관없이 왕권에 의해 국가종교가 되었다. 그것은 대중적 기반을 가진 뚜렷한 정치사상이 부재한 한반도에서 여러 면에서 고등한 종교 체계를 가진 불교가 왕이 종교적 권능을 함께 가지는 제정일치적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귀족들 역시 불교에 대한 사상적 이해 때문이라기보다는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매력 때문에 불교를 믿었다. 불교 철학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던 재가자는 오직 소수 인사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려들뿐 아니라 재가 신도들, 설령 책을 읽을 수 있는 귀족들 가운데서도 광범위하게 불교 철학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성리학자들의 편협한 사고에 기초한 불교 비판의 논리가 아무런 반박도 받지 않고 정권의 억불정책으로 쉽사리 실행에 옮겨질 수 없었을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국가종교로서 국가의 보호 속에 성장해 온 불교는, 국가 자체가 보호자가 아니라 억압자로 변하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조선시대 불교에는 억압의 기록은 있으나 저항의 기록은 없다.

조선조에서 불교와 국가의 관계에서 불교 억압에 대한 무저항만큼이나 이해되지 않는 또 하나는 의승군의 활동이다. 임진왜란 당시 대략 5천여 명의 의승군이 전국 각처에서 왜병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며, 병자호란 때도 3천여 명의 의승군이 활동하였다.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승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승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의승군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의 의승군 역시 전적으로 불교계의 자발적인 의사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의승군 모집의 시작은 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1592년 4월에 의주까지 피난을 간 선조가 승통(僧統)을 설치하고 승군을 모집하면서 청허휴정에게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여 승군 동원과 통솔을 담당하게 한 것에서 출발한다. 선조의 요청에 선조와 개인적 인연이 있기도 한 휴정은 적극적으로 의승군 모집에 나서게 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대규모의 의승군 모집과 조직이 가능했던 데는 다음 두 가지가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평소에도 승려들은 도성 축조나 궁궐 건설 등 토목사업에 조직적으로 동원된 경험이 있어서 조직적 동원의 체계가 잡혀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1550년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문정왕후에 의해 선교 양종이 세워졌고, 승과가 재개되는 등 불교가 부흥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승군을 이끈 청허휴정과 사명유정이 이때 혜택을 입은 승려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의승군의 활동으로 조선불교계는 인적·물적 피해도 컸으나, 사회 내에서 위상을 회복한 면도 있다. 국가에서 다시 도첩을 발행하기도 하였으며, 전후에 선조가 전공을 치하하기 위해 백미 6백 석을 내리기도 하였다. 전사자들을 위한 천도재와 수륙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의승군으로 활동한 지도자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정조 때 밀양의 표충사,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가 사액사(賜額祠)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상의 일시적 조처 외에 전반적인 불교 정책의 변화는 없었다. 승려들은 여전히 천민 취급을 받았으며, 각종 노역에 동원되고, 양반계급에 시달렸다.

조선시대 의승군의 활약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국가로부터 철저히 억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승려들이 전장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세속적 이해관계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며 불교적 가치관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회로부터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고 억압받는 승려가 되어 산속에 살던 이들이 영웅주의나 명예욕 때문에 전장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서 싸우지 않으면 결국은 적에게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그들의 출전 동기와 참전 과정 등에 대한 보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알 수 있겠지만, 현재로는 같은 민족공동체에 대한 본원적인 일체감 때문이라고 해석해 볼 따름이다.

5.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문화적 정체성 인식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논하라고 하면 한용운을 대표로 하는 불교인들의 항일투쟁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항일투쟁을 한 불교인들은 극히 소수이고 정치적 차원에서 한국불교 내셔널리즘의 주요 양상은 친일 불교인들의 총독부와 결탁이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서 조선불교계는 일제와 상호협력적인 관계를 추구하였다. 조선불교계는 총독부와 일본불교의 도움을 받아서 조선불교를 부흥시키고 근대화시키려 하였으며, 총독부와 일본불교는 이에 기꺼이 협력하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불교 종단인 원종의 종정이자 일제강점기 대표적 친일 승려가 되는 이회광은 1914년에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불교진흥회를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1917년에 불교옹호회로 개편되는데 여기에는 이해승, 윤택영, 박영효 등의 친일 세도가가 고문으로 위촉되었으며, 이완용이 평의원장을 맡았다. 1918년에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일본불교 시찰단이 결성되었다. 조선불교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참가하였는데, 당시 일본 총리대신이자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를 만나 선물을 전달했으며, 천황의 묘소를 참배했다. 황태자의 자택을 방문했으며, 일본 황족과 귀족의 다음 자리에서 다이쇼 천황의 행차를 맞이하였다. 이들 시찰단은 조선 내에서는 승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감격한 시찰단은 귀국하여 〈매일신보〉와 《조선불교총보》에 다이쇼 천황과 데라우치 총리를 찬양하는 시와 글을 발표하였다.

일본불교 시찰단이 일본에서 받은 대접은 과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승려들이 국가로부터 늘 받던 대우였지만, 조선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조선 승려들의 지위는 급상승했다. 주요 사찰의 주지들과 유력 승려들은 이제 정부 관료의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총독이나, 부윤, 군수들을 직접 만나 요구사항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일제는 조선불교의 후원자였지만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처럼 정부 주도로 사찰을 건립해 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정전(丁錢)을 징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역에 동원하거나 특산물 공출을 요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불교계로서는 과거에 비해 훨씬 나은 대우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이름난 승려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각종 행사에 스스로 나갔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이 군국주의를 확대해 나갈 때는 승려들이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모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마치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국가불교를 재현한 듯하였다.
내셔널리즘과 관련하여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중요한 변화는 한국불교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다. 일제의 등장은 모든 한국인에게 자신이 조선인임을 자각하게 하였다. 그것은 불교 승려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과 일본불교의 등장은 한국의 승려들로 하여금 항상 스스로를 승려 일반이 아니라 조선의 승려임을 자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한국 불교인들은 오랫동안 국가불교 제도하에 있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국가와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불교가 한반도에 도입된 이래 신라세대에는 오교구산(五敎九山)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오교양종(五敎兩宗)이 있었지만, 이 어느 종파의 명칭에도 ‘대한불교조계종’과 같이 국호가 붙는 경우는 없었다. 1556년에 조선 불교의 총수가 된 청허휴정의 명칭은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이다.

그러나 근대 시기에 한국의 불교인들은 타자, 특히 일본과 일본불교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조선 즉 한국과 연결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차적으로 한국 내에 전국적인 불교 종단을 건설하고 그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시도에서부터 드러났다. 1908년에 한국의 불교인들은 전국적인 현대적 불교 조직체를 만들고 명칭을 ‘조선원종(朝鮮圓宗)’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조선원종은 친일적인 단체였음에도 조선불교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다. 조선원종에 맞서서 한용운 등 민족주의적 성향의 승려들이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임제종(臨濟宗)을 탄생시키는데, 이 임제종의 공식 명칭 역시 ‘임제종(臨濟宗)’이 아니라 ‘조선불교임제종(朝鮮佛敎臨濟宗)’이다.

당시 한국의 승려들이 자신들을 조선이라는 민족적 정체성과 연결시키고 있었다는 것은 그때 출간된 불교 잡지의 명칭들에도 나타나고 있다. 명실상부한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불교 잡지의 명칭은 《조선불교월보》다. 《조선불교월보》는 19호를 끝으로 폐간되는데, 이후 이를 대신하여 출현한 한국 불교계의 잡지들 역시 《해동불교》 《조선불교계》 《조선불교총보》 등의 이름을 가진다. 1924년 5월 11일(음력 4월 초파일)에 창간된 《조선불교》의 발간 취지문은 이러한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잘 나타나 있다.

고래로 불교가 반도문화상에 공헌한 사적이 자못 위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일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일고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가 많음으로 반도의 문화사상에는 불교를 빠뜨릴 수 없는 지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고자 함이요, 제3은 내지의 불교는 원래 반도로부터 전한 것이니 반도의 불교는 내지 불교에 대하여 사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금일에 이르러서는 이와 정반대로 내지의 불교는 갈수록 성하고 조선의 불교는 쇠미하여진 것은 유감인 까닭에 이에 대하여 조선의 불교와 내지의 불교와의 관계가 어떠한가와 그 성쇠의 원인 등에 대하여 연구하여 보고자 함이요, 제4는 조선의 불교에 조선불교의 특징이 자연 구비되었는데 지금에는 단지 조선의 불교는 종교의 능력이 없는 무용장물로 세인들이 인정하므로 이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고자 함이요, 제5는 조선의 현재의 불교는 승려에게만 한한 불교가 되어 일반 민중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같이 된 것이 조선불교의 현황이므로 본보는 불교의 민중화에 향하여 노력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바이옵니다.
— 《朝鮮佛敎》 창간호

‘한국불교’라는 정체성은 일제강점기에 문화로서의 불교를 인식함으로써 결정적으로 형성된다. 불교가 우주와 인생의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역사 속의 종교문화로 정립되면서, 한국불교의 특수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한국불교라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진리로서의 불교가 초역사적이고 초민족적인 반면에 문화로서의 불교는 역사적이고 민족적이다. 일제의 지배하에서 역사의식과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불교인들은 불교가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당대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이능화와 권상로가 박영호, 최남선, 정광진, 오철호, 백우용 등과 함께 1925년에 만든 ‘조선불교총서 간행회’의 〈조선불교총서 간행취지서〉는 당시 불교인들의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역사적 민족의 역사적 가치를 자부함에는 무엇으로써 이를 자랑할까.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시대, 그 민족, 그 국가, 그 사회의 일체 사위의 유적 유물인 문서 또는 미술의 빈약 풍부 여하에 의하여 그 문명과 야만의 정도가 자연히 판명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조선의 고대의 문화를 조사하여 보면 정신 물질 어느 방면을 물론하고 비교적 불교의 유물이 많은 것은 누구나 다 이를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신라 이래의 고승 대덕의 위대한 저술에 대해서는 세인이 아는 바가 매우 적다 하니 어찌 유감이 아니랴. 우리 조선불교회 내에 둔 ‘조선불교총서간행회’ 중대한 사명은 불교 수입 이래의 찬술을 일일이 조사하여 《조선불교총서》라 하는 서명으로 이를 차제에 간행하여 우리 민족을 위하여 우리 사회를 위하여 심력을 다하여 찬란한 정신문명을 장엄하여 주신 증거물로 하여 이를 일반 사회에 소개코자 하는바…….
— 〈朝鮮佛敎總書刊行趣旨書〉 《佛敎》 第十四號, 1925

이러한 맥락에서 이능화는 중국불교나 일본불교와 구분되는 한국불교라는 정체성을 정립하게 되는 《조선불교통사》를 저술하였다. 최남선은 1924년에 〈조선역사에 대한 불교〉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는데, 불교를 통해 세계 속에서의 한국문화의 자긍심을 확인하려는 그의 의도가 매우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불교를 통해서 한국문화가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6. 해방 후: 문화적 민족주의 표방

해방 후에 한국불교의 정치적 효용성은 일제강점기에 비해 낮아졌다. 국가권력은 불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종교 세력 중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은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 때 급속히 성장한 기독교였다. 또 급속한 서구문화의 유입 속에서 기독교는 서구종교로 불교는 전통종교로 한국인들에게 인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순수 종교적 차원의 정체성 외에 민족문화로서 정체성을 추구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로서의 정체성이 일본에 대한 대응이었다면 해방 후에는 서구문화와 기독교에 대한 대응이었다.

해방 후 민족문화로서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인은 이른바 ‘정화운동’에서 시작되었다.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는 내용의 정화유시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한국불교는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분쟁에 돌입하는데, 최종적으로 승리한 비구 측에서 ‘정화운동’이라고 규정한 이 싸움은 1969년 대법원 판결로 끝이 난다. 그런데 이 투쟁 과정에서 비구 측이 명분으로 내건 구호가 ‘왜색불교 청산’을 통한 민족불교 건설이다. 왜색불교란 대처승 관습을 말하는데, 이 대처승 관습이 일본불교의 유풍이라는 것이다. 비구 측이 승려의 대처가 불교의 전통에 어긋나며, 줄곧 비구 전통을 유지해 온 사찰들을 대처승이 차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 설득력이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가장 돋보이는 민족주의자인 한용운이 대처제도의 주창자였다는 사실 등을 고려한다면 대처승과 ‘왜색불교’를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당시 불교가 민족주의의 외피를 표방하였다는 것은 분명히 보여준다. 또 당시 대처승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선 이청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불교에 민족주의 외피를 입히려는 것이 일시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아보건대, 8·15 광복과 더불어 우리 겨레에게는 조국 재건과 민족중흥의 대과업이 지워졌다. 그리고 우리 불교도에게는 천육백 년 역사의 전통과 민족의 얼이 깃들어 있는 불교를 정화·현대화함으로써 상실되어 가는 자아인간을 되찾고 무너진 국민도의를 재건하여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여 구국제세의 역사적 과업이 지워졌다.
— 〈나의 불교현대화 방안〉 《여성동아》 1969년 11월호

조계종을 중심으로 한 불교인들 자신이 이렇게 불교에 민족주의의 외피를 입히려 한 것은 또한 한국사회의 전체의 요구와도 호응하였다. 정치적 효용성은 없었지만 한국불교의 문화적 효용성은 해방 후에 점차 커졌다. 신생 독립국으로서, 또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남한 정부는 민족적 정통성 확보가 필요했으며, 그것은 문화적으로도 그랬다.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자연히 대부분의 전통사찰과 사찰의 유물들을 문화재에 포함되게 만들었다.

또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권위주의 통치의 비민주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민족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이는 학계에서 민족문화의 발굴 작업을 활성화시켰다. 민족주의의 이념적 토대를 찾는 과정에서 한국철학사의 정립이 필요하게 되고, 전근대 시대의 원효, 지눌 같은 불교 철학자들이 한국전통철학을 대변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는 한때 정치적 민족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국가정책으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한일 관계 속에서 늘 선동적인 민족주의가 표방되지만, 말잔치에 불과했다. 불교계에도 정치적 민족주의 세력은 없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집단은 아니며, 뚜렷한 정치적인 이념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승려는 문화적인 의미에서 민족주의적이다. 그들은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확신하고 싶어 하며 그 속에서 자부심을 찾으려 한다.

7. 결론

한반도의 불교는 오랜 세월 동안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국가종교로서 존재했다. 불교는 국가의 유용한 통치 사상으로 기능해 왔으며, 국가권력의 보호하에 성장해 왔다. 그러나 불교가 국가종교가 되는 과정은 불교에 대한 대중적 신앙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왕실 및 왕실을 둘러싼 귀족의 정치적 필요성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리고 불교는 왕실 및 귀족에 대한 의존성을 버리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왕실 및 귀족과 승려 사이의 역학관계 역시 늘 전자가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승려들이 일반 신도들을 등에 업고 왕실 및 귀족을 압박할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왕실 및 귀족에 의존적인 불교의 한계가 가진 문제는 조선시대에 들어 명백해졌다. 신진사대부가 권력을 잡으면서 불교는 가혹한 억압을 받게 되었지만, 여기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고려시대 왕가와 귀족의 몰락이 불교의 몰락이 되었던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지배하는 국가로부터 가혹한 억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많은 승려가 국가 방위를 위해 의승병으로 활동한 점은 매우 이례적인 민족주의의 발로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당시 승병들의 국가에 대한 의식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불교인이 민족주의자가 되어 일제에 저항하기보다는 식민지 정부에 협조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의승병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수탈과 억압을 받은 불교인들이 불교를 우대하는 일본을 부정할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를 통해서 문화민족주의가 표방된 것은 불교인들 속에서도 여전히 민족에 대한 본원적 동화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인들의 문화민족주의는 해방 후에 더욱 강화된다. 불교인들은 한국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적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문화민족주의를 표방했으며, 정치권력은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 정립의 필요성과 이를 통한 정권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그 과정에서 불교가 민족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김종인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 스토니부룩대학교 비교문학과 박사. 저서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평설》 《한국의 대학과 지식인은 왜 몰락하는가》 Philosophical Contexts for Wonhyo’s Interpretation of Buddhism 등이 있다. 현재 국제재가불교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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