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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건너는 九江
김성부 시인·컬럼니스트
[28호] 2006년 12월 10일 (일) 김성부 시인·컬럼니스트

   
중국 광동성 곡강현의 보림산록에 위치하고 있는 남화선사(南華禪寺)의 조사전·중국 선종(禪宗) 육조혜능 선사(638~712)의 진신육상(眞身肉像)을 친견하고 나와 바라 본 여름 하늘은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같이 맑고 푸르렀다.

어쩌다 무더운 여름날을 택하여 중국의 영남 땅에 산재해 있는 선종사찰, 특히 육조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살아가고자 애쓰는 불자로서의 도리보다는, 1천3백여 년 전 그 척박한 환경과 고난 속에서도 구도의 끈을 놓지 않고 농선(農禪)으로 지탱하며 깨달음을 증득한 선사의 진신을 뵙고 그 귀한 법향(法香)을 오래오래 마음에 새겨 삶의 지남(指南)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육조사(六祖寺)라고도 불리는 남화선사의 조사전에 입멸 후 지금까지 그 긴 세월동안 거의 훼손되지 않고 잘 모셔져 있는 혜능선사의 진신육상을 친견하고 물러나와, 도량 건너 조계(曹溪)의 둑길에 서서 천년고찰을 바라보며 대웅전에 걸려있던 현판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생각하고 나의 마음공부를 다시 점검해 보았다. 구도를 위해 오조(五祖) 홍인대사(602~675)를 친견한 지 팔 개월 만에 거사의 신분으로 오조로부터 법의 인가를 받아 육조가 되었으나, 당시 오조를 따르던 많은 스님들의 시기와 위협을 피하여 남쪽지방인 광동성 고향 땅으로 내려오는 길에, 강서성과 광동성의 경계인 대유령에 이르러 추격해온 혜명스님과 법의(法衣)를 놓고 나누는 말씀 중에 육조 혜능거사가 던진 한 마디가 지금도 심금을 울리고 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는 바로 이러한 때, 어떤 것이 혜명상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고?” 이 물음은 일천사백여 년이 흐른 지금 이 땅의 뜻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큰 화두(話頭)이며, 갈등과 다툼과 편 가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회지도자들의 어깨를 치는 죽비 소리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의 삶에는 선도 악도 모두 스승이며,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가진 자와 덜 가진 자가 모두 이웃이고 본 받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귀중한 대상들이다. 나의 자리, 내가 서야할 자리와 끼어들어야 할 때와 장소, 물러서고 피해주어야 할 때와 장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분쟁이 빈발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자기의 마음자리를 항상 챙기고 바로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은 나라, 사회, 단체와 가족간에 자리와 이권다툼이 일어날 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24살의 나무짐꾼이었던 혜능이 오조 스님을 뵙기 위해 한달이나 걸려 호북성 황매현 오조사로 가다 걸어 넘었고, 팔 개월 만에 법을 인가받고 법의를 받아들고 오조의 배웅 속에 몸을 피해 강남땅으로 가는 길에 두 달이나 걸려 이르렀던 대유령(大庾嶺)은, 이제 큰 도로로 변하고 이름도 매령(梅嶺)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옛날의 고개이름은 바뀌었어도 육조의 가르침인 “不思善 不思惡”과 “本來面目”은 여름날의 무더위를 씻어주는 바람으로 고개를 넘나들고 있었다.

광주 신흥현 신주마을에 있는 삭발수계도량인 광효사(光孝寺)와 출생지이며 입적도량인 국은사(國恩寺) 입구에 걸려있던 “선종 육조혜능 고향” “선종의 조정(朝廷)”이라는 이정표가 그 고통스러웠던 중국의 법난과 문화대혁명을 견뎌내고 살아남아 오늘날 선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해주고 있구나 싶어 무척 반가웠었다.

   
황매현 사조사와 오조사로 가는 길에 구강장강(九江長江 : 양자강)대교 끝 강변에 있는 쇄강루(鎖江樓)에 잠깐 올라, 강 건너 어디쯤에 오조 스님의 배웅을 받으며 배에 올라 노를 저어 강남으로 피신하시던 구강나루터가 있을까 한참이나 바라보아도 옅은 안개 끼어있는 넓은 구강의 흙빛 물결과 오가는 화물선만 보일 뿐이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강변의 풍경을 그리며 천 삼백여 년 전 어느 날 캄캄한 새벽에 노 저어 나루터를 벗어나며 오조 스님과 말씀을 나누던 육조 혜능거사의 비장한 모습을 떠올려 마음에 새기며 숙연해졌다.

“내가 삼경에 의발을 받아들고 말씀드렸다. ‘제가 본시 강남 사람이라 이 곳 산길을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강구(江口)를 빠져 나갈 수 있겠습니까?” 오조 스님 말씀이 “너는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너를 전송하리라”고 하신다. 큰 스님과 함께 구강나루터에 이르니 마침 배 한 척이 있었다. 오조 스님께서는 나에게 배에 오르라 하시고 노를 잡으시고 친히 저으셨다. 내가 말씀드리기를 “큰스님께서는 앉으십시오. 제가 노를 젓겠습니다”하니, 큰스님께서 “내가 마땅히 이 강에서 너를 건네주리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 내가 말씀드렸다. “제가 미혹한 때는 스님께서 건네주셔야 했습니다만, 제가 깨친 다음에는 스스로 건너겠습니다. 건넌다는 말은 비록 같사오나 쓰는 곳은 같지 않습니다. 혜능은 변방에 태어나서 말조차 바르지 못하옵더니 스님의 법을 받아 이제는 깨쳤아오니 마땅히 자성(自性)으로 스스로가 건너야만 합니다”

“스스로 건너는 구강”,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노력하여 크고 넓고 물결이 센 강을 건널 수 있는 사람, 힘들고 고통스러운 화택(火宅) 같은 세상을 유유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깨친 훌륭한 스승을 만나 화두를 받고 믿음으로 인욕하며 그 화두의심을 타파하여 자성(自性)을 요달한 사람이거나, 그렇게 하기 위해 일심으로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고통을 이기며 노력하지 않고서 어떻게 험난한 강을 혼자 노를 저어 건널 수 있을 것이며, 자기의 집을 반듯하게 장만하고 일가를 이루어 가족을 굶기지 않고 바로 살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요즘 세상에는 부모로부터 생을 받고 양육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와 친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노력하고 판단하며 세파를 이겨내는 자식들이 그 얼마나 될까? 또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아 지식과 교양을 쌓고 사회의 지도자를 자처하고 지내는 사람 가운데, 공동체의 갈등과 분쟁을 위하여 스스로 나서 지혜롭게 해결하여 주위로부터 진정으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제가 미혹한 때는 스님께서 건네주셔야 했습니다만, 제가 깨친 다음에는 자성으로 스스로가 건너겠습니다”라고 하신 육조의 말씀은, 오늘 같이 문명화 되고 각종의 문화혜택을 향유하면서도 더 탐욕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천금보다 귀중한 가르침이리라. “믿음과 고통과 인욕이 수반되지 않은 수행은 허망한 것이다.

더 큰 안목을 열어 거듭나는 생을 살 수 있도록 발원하고 하심하며 인욕 속에 끊임없이 수행 정진할 때 비로소 원력소생하는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 옛 선인의 말씀을 육조의 가르침인 ‘불사선 불사악’과 함께 생각하며 구강의 유장한 물길 위에 뱃길을 만든다.

구강 강변을 따라 달리는 버스 차창에서 바라보는 구강장강대교가 길기도 하다. 일천여 년이 흘러 오랑캐 땅이라고 푸대접 받던 영남지방이 이제는 중국의 경제를 좌우하는 요지가 되고, 오랑캐로 매도되던 영남 사람들의 입지 또한 엄청나게 높아있음을 이번 순례 길에서 실감하였다. 황매현 사조사를 참배하고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동산(東山) 산록의 오조사 일주문에 합장하고 들어섰다. 멀리 보이는 전법동(傳法洞)이 손짓하여 부르는 것 같다. 오조 스님께서 설하는 『금강경』의 한 구절인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에 이르러 혜능거사가 언하에 크게 깨달은 곳이 저기 있다.

훌륭한 스승을 찾는 길, 그 길은 구도의 장정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삶의 여정에 많은 스승이 있지만은 아마 육신을 낳아주고 양육해 준 부모보다 더 귀중한 스승은 진리를 깨닫게 해준 스승일 것이다. 혜능거사는 24살의 나이에 오조 스님을 만났고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사의 신분으로 법을 인가받고 육조가 되었으니, 두 분 간 숙세의 인연, 법의 중흥과 끊임없는 전법을 예견한 선지식의 법안(法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혜능이 팔 개월 간 디딜방아를 찧으며 때를 기다려 수행했던 방장실 후원 건너 방앗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옛 시절 낡은 디딜 방앗간이 아니었서도 바로 그 자리에 마련되어 있는 조그만 방앗간에서, 키가 작고 야윈 거사가 몸에 돌을 매달고 디딜방아를 찧어 양식을 만들며 오조 스님의 부르심을 기다린 인욕의 날들을 회상하면서, 육조 스님의 좌상 위에 걸려있는 당시 혜능거사의 게송 속에 담겨있는 깨달음에 대한 청정한 마음을 읽었다. 그리고 십여 발자국 건너편에 있는 오조의 방까지 이르는 데에 8개월이나 걸려야 했던, 깨달음의 먼 길을 생각했다.

“깨달음은 잡혀지는 존재가 없고, 밝은 마음 이름뿐 실체가 없네. 본래가 한 물건도 있지 않거늘, 어느 곳에 일어날 번뇌 있을까(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오조사의 진신전(眞身殿)에 모셔져 있는 오조홍인대사의 진신육상을 친견하여 삼배를 올리며, 선종을 위하여 일생을 수행정진으로 보내신 성인들의 크신 마음을 작은 가슴에 새겨보려 애를 써보았지만, 중생의 가슴과 마음으로 어찌 감히 큰 스님의 뜻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혜능거사가 오조 스님을 만나던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조사를 떠나올 때 한 스님이 손수 써서 곱게 접어 손에 쥐어주시던 글 <緣>을 마음에 담아보았다.

오조께 예배하니 오조가 나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이며 무엇을 구하고자 하느냐?”하신다. 내가 말씀드렸다. “제자는 영남 신주에 사는 백성이온데 멀리서 와 스님께 예배드리게 됨은 오직 부처되기를 구할 뿐 다른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조께서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고 나무라신다. 내가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다하지만 불성에는 본래 남북이 없사오며, 오랑캐의 몸과 화상의 몸이 같지 않지만 불성은 무슨 차별이 있사오리까?”라고 하였다.

오조사 스님께서 주신 붓글씨 <緣>이 어쩌면 오조와 육조, 지금 이 시간 동방에서 이 먼 곳 호북성 황매현까지 찾아 와 대 선사들의 숙연과 인간사의 대혁명을 바라보게 하고, 끊임없이 수행하며 자성을 깨달아 진리 속에 살 수 있기를 발원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 고마운 마음으로 일주문을 나서다가, 수령 천년이 넘는 세 그루의 키 큰 보리수나무를 올려다보며 육조의 삭발수계도량인 광주시(廣州市) 광효사(光孝寺)의 고보리수 나무와 삭발수계를 기념하여 건립한 예발탑을 떠올렸다. 그리고 육조 스님이 『육조단경』을 설하신 소관시(韶關市) 대범사(大梵寺)를 그려보며, 당시 천여 명의 사부대중에게 설법하신 말씀 중에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들을 위해 꼭 마음에 담아야 할 “참회(懺悔)”에 대한 법문을 생각했다.

‘참(懺)이라 함은 이제까지 지은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이제까지의 지은 모든 악업인 어리석고 미혹하고 교만하고 속이고 질투하는 등 죄를 모두 다 뉘우쳐 다시는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회(悔)라 함은 미래의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지금부터 이후의 짓는 악업인 어리석고 미혹하고 교만하고 속이고 질투하는 등 죄를 지금 미리 깨닫고 모두 다 영영 끊고 다시는 짓지 않는 것이니라.’

중국불교, 특히 선종은 살아있고 생동하고 있었다. 육조사를 비롯한 육조혜능선사의 발자취에서, 육조 스님의 대제자인 운문문언선사의 돈오법문도량인 대각선사와 마조 스님의 전법도량인 보화사, 선종7조 청원행사 스님의 수행도량인 길안 청원산 정거사, 위앙종의 도량이며 허운화상의 입적도량인 남창 운거산 진여선사 등이 모두 농선(農禪) 수행도량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깨달음은 때도 장소도 따로 있을 수 없고 출재가자의 구별도 있을 수 없다고 큰 스님들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열흘간의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이렇게 먼 곳까지 이끌어 대선사의 발자취를 따라 천년 세월 동안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 법음(法音)을 듣고, 법향(法香)에 취할 수 있게 해주신 부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한다.

“육조 스님의 진신육상 앞에서”
(2006년 8월 한 여름 날. 중국 광동성 곡강현 남화선사에서)

눈물이 흐르더이다. 가슴 속에 진한 눈물이
보림산 폭포 되어 흘러내리더이다.
먼 길 스님 따라 어려운 길 찾아 와 육조 스님
眞身肉像 친견하는 자리에, 나무지게 짐 벗어 놓고
홀어머니 신주마을 외딴 집에 남겨둔 채,
걸망 매고 대유령 굽이굽이 한 달이나 걸어 넘어
오도 스님 보비기 위해 찾아가시던 모습 그리며
자꾸 눈물이 흐르더이다.

1300여 년 세월이 멈추어 빛이 서린 곳,
육조전에서 형형한 눈빛으로 다가 와
빈 가슴 채워주시는 스님의 야윈 모습 안으며
엎드려 소리 내어 울고 싶었더이다.
卓錫泉 물소리 못 잊어 돌아서다 바라 본
하늘 뭉게구름이 자애로운 미소되어 울음을
달래주어도, “本來面目”현판 올려다보며
스님의 진신 향해 합장하고 정진하던 뜨거운
낮의 대웅보전에 들려오던 청아한 새소리들
육조 스님 따르며 천년을 지키고 있었던 것을
선원장스님의 법문 듣고 깨었더이다.

이제는 환희심 채운 가슴으로 소관시 대범사로
떠나야 하는 시간. 합장하고 일주문 나서
감로법문 안으려 바삐 설법당으로 가려 하나이다.
수천 년 흘러도 스님의 설법이 조계의 물길로
온 세상 하늘 길 따라 흐르고 있는 것을.

김성부
시인·컬럼니스트. 경남 거제시 출생. 부산 동아대학교 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대불교문인협회, 서초문인협회, 거경문학회 회원. 삼흥컨설팅 회장. 대한불교조계종 안국선원 홍법운영팀장 겸 안국컬럼 주필. 시집 『이별연습 그리고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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