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법 돋보인 불교사 연구의 새 안목

1. 조선시대 불교사의 재인식

역사는 시간 위에서 벌어지는 공간의 게임이다. 아니 공간 위에서 벌어지는 시간의 게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역사 기술에서는 시간의 주도자가 공간의 주도자가 된다. 그리고 그 주도자는 역사 문화의 주도자이자 철학 사상의 주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주역만으로는 무대를 열어젖힐 수가 없다. 역사의 무대는 조역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장막을 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조역은 비록 주인공을 보좌하지만, 주인공 이상의 역할을 펼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역은 조역을 격려하고 조역은 주역을 보좌할 때 비로소 한 편의 작품을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게 된다.

알다시피 역사는 문헌 ‘기록’과 동산인 ‘유물’ 및 부동산인 ‘유적’과 대면 구술에 의한 ‘기억’을 통해 시간 위에 새겨진다. 역사가는 이러한 사료들을 수집하여 투철한 역사인식에 기초한 명료한 역사해석을 통해 역사를 기술한다. 그런데 역사서는 객관주의 사관이든 주관주의 사관이든 상응주의 사관이든 사가에 따라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 것들로 채워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역사서는 승자의 기록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역사서는 힘없는 백성들의 기억으로 채워진 경우도 있다.

이 땅에 전래 수용된 불교의 중도적 세계관은 오랜 역사를 통해 한국인의 삶의 도리와 질서와 문화가 되었다. 그 결과 한국역사는 한국불교사와 한 우물이 되었고 한국불교사는 한국역사의 마중물이 되었다. 또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은 우리에게 철학 하는 법과 사유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결과 불교는 한국인의 국가관, 윤리관, 생사관, 예술관, 복식관, 식습관 등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성숙해져야 하며,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일깨워 주었다. 이처럼 한국사상은 한국불교사상과 한 우물이 되었고 한국불교사상은 한국사상의 마중물이 되었다.

대한시대(1897~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역사는 조선시대(1392~1896)이다. 한국불교사에서 조선시대의 불교는 아직까지 어둠 속에 남겨져 있다. 동시에 불편한 기억들로 남아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정치로부터 한결같이 강제되어 온 피지배적 상황, 인적 물적 억압과 교단적 침체, 교학과 사상의 쇠퇴, 불교인들의 힘겨운 생존방식 등은 찬란한 신라불교와 국교의 지위를 누린 고려불교와 대비되면서 조선시대 불교사를 타자화시켜 왔다. 이봉춘 동국대 명예교수의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는 40여 년 동안 파온 그 독법의 이정표이며, 조선시대 불교사의 ‘어둠’과 ‘우울’을 과감하게 돌파하면서 ‘쇠락’과 ‘소외’의 지평을 넘어서는 그 연구의 한 우물이다.

2. 불유 교대와 자립불교

말의 어순은 단순한 말의 순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의미의 순서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조선시대 불교를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발설하는 ‘숭유억불’ 혹은 ‘배불숭유’의 기호에는 우리의 부정적인 가치와 의미가 훈습되어 있다. 대개 ‘유불’ 혹은 ‘유불도’라는 단어는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하는 제2의 가치거나 세간의 유교보다 못한 출세간의 불교라는 영상을 암암리에 세뇌시키고 있다. 평자가 평소 ‘불유’ 혹은 ‘불도유’ 삼교라고 쓰고 있는 것처럼 저자 역시 이 책에서 시종일관 ‘불유(佛儒) 교대’라는 표현을 즐겨 쓰고 있다. 이것은 저자가 조선조 불교를 불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겠다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조선시대 불교는 국가의 공식적 지원을 받아온 신라와 고려의 ‘왕실불교’ 혹은 ‘국가불교’와 달리 풀뿌리 민주주의처럼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해온 ‘자생불교’이자 ‘자립불교’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국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섰다는 뜻이다. 물론 더러는 왕실과 유자들의 필요에 따라 비공식적인 지원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는 했다. 이러한 자생적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전기 이래 유자들이 보여준 세계관은 고려 이래의 세계관의 연속 위에서 ‘적유심불(迹儒心佛)’ 즉 ‘자취는 유자였으나 마음은 불자였다’거나 ‘외유내불(外儒內佛)’ 즉 ‘겉으로는 유자였지만 안으로는 불자였다’고 볼 수 있다.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불교 교단의 구조는 고려 후기 이래 11종에서 7종으로, 다시 7종에서 선교 양종으로 조정되었다. 이처럼 조선 개국 이래 불교계는 제도적 변화를 경험하지만, 전기까지만 해도 기본적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태종 이래 본격화된 배불정책의 두 방향은 ‘불교세력의 인적 물적 기반의 축소’와 ‘유교적 상례제(喪祭禮)의 실시로 인한 불교의 사회적 권위의 약화’로 모아졌다. 저자는 제1부의 불유 교대의 배경과 초기 불교정책에서 억불과 배불의 원인을 인과론적 관점으로 이해하면서 일차적으로는 불교 자체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어 성리학 전래에 따른 고려 후기의 사상적 변화 속에서 일어난 신흥 사대부 계층의 배불 여론과 기세로 보고 있다. 이로부터 태조 대의 엇갈리는 탐색단계와 태종 대의 본격적인 배불단행 및 세종 대의 더욱 강경한 배불정책으로 이어졌다고 파악하고 있다.

제1부에 이어 저자는 제2부에서 조선의 유교국가 체제는 태종 대에서 구축되면서 불교의 배척 강화와 고착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즉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억압한 태종과 불교의 인적 조직을 해체한 세종에서 시작하여 불교의 국가제도적 기반과 전통적 유습의 제거를 강행한 성종, 원칙 없이 우발적으로 파불을 자행한 연산군 그리고 법제적 폐불을 마무리한 중종을 거치면서 배불정책은 완벽을 기해 갔다고 이해한다. 동시에 이러한 불교 배척의 강화와 그 상태의 고착과 맞물려 유교국가 체제가 구축되고 완성되어 갔다고 파악한다.

3. 흥불정책과 참여불교

저자는 조선 개국 이후 국망에 이르기까지 불교에 대한 정책 기조가 왕조 내내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고 역설한다. 조선은 유교국가의 명분에 따라 억불과 배불을 공식화하였고 그러한 정책 방향을 일관성 있게 고수하였다고 인식한다. 조선 전기에 몇몇 숭불 군주들이 출현하여 주목할 만한 흥불 사업들을 펴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국가정책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고 이해한다. 이것 또한 조선의 기본적인 불교정책의 범위 내에서 타협적으로 수행되었을 뿐이라고 파악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조선시대 불교사를 ‘억압’과 ‘배척’으로만 보지 말자고 한다. 저자는 이와 달리 다른 한편에서는 흥불의 흐름이 엄연히 존재하였다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숭불 군주인 세종 후기와 세조의 경우와 같이 의욕적인 불교정책과 불교사업도 있었고, 조선조 전 시대에 걸쳐 고승을 비롯한 교단 구성원들의 지속적 활동과 노력도 있었다고 역설한다. 뿐만 아니라 ‘신앙’과 ‘의례’를 통해 불교의 저변 세력을 형성해 간 일반 대중의 변함없는 지지 또한 흥불의 중요한 요건이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러한 흥불사업과 정책이 불교교단의 유지 존속에 끼친 영향은 막중하였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갓 창제된 정음(正音)으로 불전을 국역(國譯)하고 결집(結集)함으로써 이루어진 불교의 사상적 정립과 대중화 과정은 조선불교의 중흥을 도모하는 의욕적인 사업이었다고 인식한다. 이러한 불전언해 사업뿐만 아니라 피폐해진 불교의 경제적 현실에 대한 대응노력, 다양하게 전개한 불교교단의 자구, 자립 활동, 법통의 수호와 법맥의 계승, 성리학적 이념 속에서의 사상적 대응, 신앙 및 교화를 통한 불교의 민중화 노력, 의승군 활동을 비롯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국가, 사회적 현실 참여 등이 흥불의 기반을 이루었다고 이해한다.

또 저자는 대중과 가장 친숙한 보편화된 신앙 형태였던 관음신앙은 국왕과 왕실에서부터 일반대중에 이르기까지 상하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고르게 환영을 받았고 영향을 주었다고 역설한다. 즉 관음신앙이 이데올로기적인 유교의 이념으로서는 충족하기 어려운 종교적 욕구와 희원에 크게 부응하면서 불교의 인간구제적 기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았다. 당시에 널리 수용된 관음영험과 주문 및 다라니 등의 밀교적 관음신앙의 유행은 불교의 저변화와 대중화의 주축이었다고 이해한다. 아울러 종단은 없었지만 국가적 편의를 위해 설치한 준(準)승직제도였던 도총섭 제도가 불교 교단의 외피적 구실을 담당하였고 불교 교단의 유지 존속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고 이해한다.

 4. 조선불교사의 자리매김

역사의 주체는 그 시대를 온전히 살았던 인간 즉 사람일 수밖에 없다. 역사의 지형은 ‘주제’와 ‘쟁점’ 및 ‘학통’뿐만 아니라 ‘인물’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인물은 그 시대의 주제와 쟁점 및 학통을 주도하는 것은 물론 그다음 시대의 역할까지 이어준다. 해서 인물은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 부분이 되는 것이다. 해당 인물의 삶과 생각 속에는 이미 그가 살았던 시간과 공간 위에서 이루어진 사상사의 주제와 쟁점 및 학통까지 다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사는 교단사와 교리사 및 사상사와 철학사 등을 아우르며 해당 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의 본류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조선시대를 살았던 인간의 의지와 활동을 통해 조선시대 불교사를 일구어간 인물들을 선별해 다루고 있다. 즉 역사적 전환기의 두 지성인 자초와 기화, 불교에 대한 신앙과 불교를 외호한 효령대군, 선교사상과 불유의 융합 조화론을 제시한 허응보우, 구국활동과 교단을 중흥시킨 사명유정, 배불 항론의 대표적 상소인 〈간폐석교소〉를 지은 백곡처능, 조선 후기 선문을 중흥하고 법통을 수립한 경허성우 등의 인물과 사상을 수록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조선불교의 가장 주요한 인물인 ‘청허휴정’과 ‘부휴선수’ 및 ‘백파긍선’과 ‘초의의순’ 등의 임제삼구(臨濟三句) 논변의 주역들에 관한 글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저자의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짐작되지만 뒷날의 보완을 기대해 본다.

이 책에는 여타의 책들과 구분되는 몇몇 특징이 있다. 전체 4부 중 제1장부터 제4장까지와 제2부 제1장까지는 저자의 박사논문인 〈조선 초기 배불사 연구〉를 수정 보완한 부분이다. 이후의 제2장과 제3장 및 제3부의 전 6장과 제4부의 전 6장은 이후 저자가 쓴 조선불교의 실상을 규명하면서 이루어진 결과물들을 집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학위 논문과 후속 연구를 하나의 책 속에서 유기적으로 재조직한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통합을 넘어 유기적으로 재조직해 쉽게 눈치챌 수 없게 하고 있다. 책의 서두에는 ‘전체 차례’가 제시되어 있으며, 각 부의 서두에는 ‘각 부의 차례’가 다시 제시되어 있어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또 각 부의 서두에는 각 부의 초록이 제시되어 있고, 각 장의 서두와 말미에는 서론과 결론을 독립적으로 편집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편집은 각 논문의 서론을 다른 형식으로 편집함으로써 각 장의 총론으로 읽히게 하고 있으며, 각 논문의 결론을 다른 구성으로 배치함으로써 각 장의 결론으로 읽히게 하고 있어 각 장별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책의 말미에는 ‘찾아보기’가 덧붙어 있어 검색에 도움을 주고 있다.

저자의 이 책은 다카하시 토오루의 《이조불교》와 누카리야 콰이텐의 《조선선교사》 및 우정상의 《조선전기의 불교사상 연구》와 김용태의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에 이은 또 하나의 조선불교사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불교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부족한 현재, 이 책은 ‘조선시대 불교사 독법의 이정표 혹은 연구의 한우물’로서 또렷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삼가 일독을 권한다. ■

 

고영섭 /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석사·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한국불교사 및 동아시아불교사상 전공. 저서로 《불교경전의 수사학적 표현》 《원효》 《한국불교사연구》 등이 있다. 현재 한국불교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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